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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만남

1/ 정말 오랜만에 -- 10년이면 "정말"이라는 말이 들어갈만하지 --  고등학교 때 선배를 만났다. 솔직히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할 얘기가 많을거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저 잊혀진 흔적이나 줏어 먹어볼까... 쉽고 안일한 생각으로...

 

2/ 더이상 운동은 하지 않지만 정치적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는 형는 여전히 운동의 변두리를 기웃거리는 나를 위해 때늦은 해체주의와 디지털 혁명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잠깐씩 장단을 맞추어 줄 뿐... 그랬는데...

 

3/ 그런데 느닷없이 튀어나온 "장기전" 얘기는 나의 눈을 번쩍 뜨게 했다. 장기전이라는 말에 심오한 무언가를 얻어가려는 사람처럼... 나는 나대로 깊은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4/ 장기전이라 함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소소한 전투들이 전체적인 전선 속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함을 의미할 것이다. 한두판으로 끝나는 전투라면 거기에 온 힘을 쏟아붇고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력을 투자하면 될텐데... 지금은 하나의 전투에 아무리 힘을 쏟아붇어도 작은 변화조차 기대하기 힘들다. 그래서 장기전이다. 장기전 속에서 전선은 길고 넓으며 또 다양하다. 무엇이 본질적인 전선인지 불명확하고 개별적인 전투는 많은 경우 역량의 소진으로 나타날 때도 있다. 그래서 장기전이다.

 

5/ 대중없는 운동이라는 게 의미가 있을까? 대중이 의미없다고 하는데 아무리 의미가 있다고 우겨도, 나만은 옳다고 외친대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대중이 운동을 버린 것인가, 아니면 운동이 대중으로부터 멀어진 것일까? 나는 언제나 독야청청한데 타락한 민중이 떠난 것인가? 민중을 읽지 못한 고지식한 내가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일까? 선배왈 "민중은 항상 그자리에 있어... 어디로 도망가지 않았다구... 정치가들만이 어느날 우르르 몰려왔다가 철새처럼 떠나갔을 뿐"이라고...

 

6/ 대중이 등을 돌린 것을 단순히 방식의 문제로만 돌릴 수 있나? 근본적인 반성 없이?... 사상의 밑바닥을 다시 갈아엎는 본질적인 대공사를 전제하지 않고서... 사고방식과 사상의 기저를 다시 고찰해야 한다는 말... 이제까지 추구해온 것이 진리였다고... 누가 그런 걸 확신할 수 있나... 대중을 사로잡는 사상은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그 또한 현실로부터 나오는 것 아닌가? 공자왈 맹자왈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없다는 것... 현실적인 것만을 추구하면 그건 분명히 점진주의와 개량주의로 빠지겠지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사상은 공허한 공자왈 맹자왈 유아적 이상주의 아닌가...

 

7/ 대중 항상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활동가라면... 학자가 아닌 활동가라면 그는 언제나 대중 속에 있어야 할 것이다. 대중 속에서 같이 호흡하고 그들보다 단 반템포 먼저 움직이며 같이 가는 거라고... 적어도 5년전이었으면 난 그걸 NL식의 대중 추수주의로, 대기주의, 준비론자로 비판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원래부터 대중운동의 방식이며 우리 운동에 가장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대중 속에서 무언가를 차곡차곡 쌓아가지 않는 한, 우리 운동의 영역내로 대중을 끌어당기는 짧지 않은 시간의 투자가 없는 한... 당분간 계급운동의 미래는 없다는 생각... 그래서 나이 없은 내가 대중추수주의자가 된 것인지... 아니면 현재의 운동 현실이 그것을 요구하는 것인지...

 

8/ 처음 사적 유물론을 접하며... 인간의 역사가 계급투쟁의 역사였다는 말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는 선배... -- 사실은 나도 그랬다 -- 어떻게 인간들끼리 지지고 볶고 싸우는 것이 어찌 인류 역사의 원동력이 될 수 있겠냐고... 정말 어렵게 사적 유물론을 받아 들이기 시작했을 때 생각이 변화하기 시작하고 고통스럽게 사람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사람이 변하는 거... 그게 쉬운 일인가... 뼈를 깍는 고통을 동반하지 않고서.. 지난 삶에 대한 철저한 자기 반성을 동반하지 않은 변화는 다 거짓말이다. 정치적으로 백날 바꾼다고 해도 다음날 비리 저지르는 정치인이랑 다를 것이 없는 비겁한 삶이다.

 

9/ 그것이 운동의 요구라면 또는 혁명의 요구라면 개인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혁명가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인권과 요구와 다양성이 아니라 전체 운동에 자신을 종속시키고 운동의 변화에 자신의 변화를 맞추는 삶... 그런 삶이 말처럼 쉽나? 또 뼈를 깍아야 하는 것이다. 관상용 나무의 허리를 비틀듯이... 그것이 내 삶을 비틀어 놓더라도 내가 바꿔야 하는 것이다. 내가 안 바뀌고 대중을 핑게대고 개인주의와 다양성 들이대는 순간... 운동은 진정성을 잃은 한낱 얘들 장난처럼 변질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말야 나는 뼈를 깍는 고통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걸까? 이런 거 생각하면 갑자기 사람 비참해진다니까~~~

 

10/ 프로가 되자? 오늘 선배랑은 대략 이런 얘기를 나눴다. 10년만에 만나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놀라웠다. 여전히 어떻게 살 것인가가 고민이 된다. 하고 싶은 걸 하며 거기에 모든 것을 쏟아부으면서 살면 좋겠지만 그게 언제적 레파토린가?  현실적인 고민이 치밀고 올라올 때마다... 너무 자주 이런 거 생각하다보니 세상이 어둡고 어지러워지네... 에이 참~~~ 빠뜨릴 뻔 했는데 팀웍도 중요하다... 사상이 같다고 운동 잘한다는 보장있나... 마음이 맞아야 한다... 팀웍도 스타일에만 한정하지 않는 장기적인 훈련 과정이다. 그렇게 이해해 버리면 편하지 않을까 해서... 끌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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