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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보장입법 쟁취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다시 한번 비정규직 권리보장입법에 대하여 

 

 

 

  총파업이 임박해 올수록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지도부들은 권리보장입법을 관철시킬 의지가 없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권리보장입법은 핵심적 내용들이 현장에 제대로 홍보되고 있지 못하고 그 의의 또한 집회장에 걸리는 슬로건의 의미 이상으로 확대되고 있지 못하다.


1/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은 부분적 요구투쟁이라는 측면에서 재조명되어야 한다.

  우선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자.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안을 담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권리보장 입법은 비정규직 완전철폐가 아닌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차별을 해소하는 것에 한정하고 있다. 권리보장 입법은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로 확대된 비정규직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본의 노동유연화 공세를 근본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요구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권리보장 입법은 노동유연화 공세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무의미한가? 그렇지 않다. 권리보장 입법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해있는 열악한 생활조건을 부분적으로나마 개선시켜주고 비정규직의 무한확대를 저지한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노동3권, 파견법 철폐, 기간제 노동 사용제한의 요구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노동자들의 육체적 정신적 퇴화를 막고 투쟁의 조건을 뚜렷하게 향상시켜 줄 것이다. 현재의 권리보장 입법은 부분적 요구투쟁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현재와 같이 자본이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사소한 경제적 요구, 사소한 양보조차도 획득하기 어렵다. 또한 그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의 경험은 계급적 단결에 기반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걸지 않고서는 자본가들로부터 단 하나의 양보조차도 얻기 힘들다는 것을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권리보장 입법은 이런 측면에서 재조명되어야 한다. 권리보장입법이 담고 있는 부분적인 요구들을 실제적으로 획득해 나가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계급적 단결의 중요성을 알게 될 것이며 스스로를 투쟁적으로 단련시켜나갈 것이다.

 

2/ 그렇다면 비정규직 권리보장입법은 어떻게 쟁취되어야 하는가?

  무엇보다 의회주의적 사고는 단호히 배격되어야 하다. 의회를 통한 입법 투쟁으로의 집중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수동적인 방관자로 전락시킨다. 실제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권리보장입법을 보면서 그것이 자신의 처지를 향상시켜 줄 수 있는 매력적인 법안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법안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대다수 노동자의 시야를 의회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10명의 의원으로 법안 통과가 가능하겠는가?” 이러한 사고가 법적 테두리가 아닌 대중투쟁에서도 그것을 쟁취할 의욕과 기대를 송두리째 앗아가고 있다. 민주노총의 관료들과 민주노동당의 지도부는 이러한 대중심리를 조장하면서 자신들이 제출한 법안을 사문화시키고 있으며 정부의 보호입법을 부분 수정하여 개악의 정도를 약화시키는 것에 골몰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권리보장입법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느냐 없느냐(사실 법안통과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가 아니라 권리보장입법이 담고 있는 요구들을 쟁취하기 위해 현장으로부터 어떻게 강력한 투쟁들을 만들어나갈 것인가이다. 법안 통과라는 의회주의적인 방식이 아니라 대중투쟁의 방향성으로 권리보장입법 요구안을 바라봐야 한다.


3/ 이런 측면에서 평등연대 김광수씨의 입장(『총파업 투쟁에 임하는 사회주의자의 임무』)은 현실의 문제를 한편으로 올바르게 직시하고 있다.  김광수씨는 “10명의 민주노동당 국회의원과 동조자를 가지고는 입법은 아예 엄두도 낼 수 없다.… 입법을 성사시키겠다는 난망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직하고 엄호, 연대하는 것이다”라고 민주노동당의 의원단 활동의 한계를 적절하게도 지적하면서 대중투쟁의 관점을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다음의 입장들은 문제의 핵심을 잘못 짚고 있다.


“노동자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세계적 추세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자본주의 자체를 거부하든지 양자택일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김광수, 『총파업 투쟁에 임하는 사회주의자의 임무』)

 

  과연 그런가? 노동자들은 정말 자본주의 또는 사회주의로의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가? IMF외환위기 이후 남한 자본의 위기가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위기를 근본적인 체제의 위기로 발전시킬 노동자들의 공세는 펼쳐지지 못했다. 오히려 자본과 정권의 광폭한  공세 앞에 노동자들은 투쟁을 주저하고 있으며 사소한 개량조차 요구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현재는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공격하고 혁명(혹은 이행기강령)을 선동하는

 

‘공세적 시기’(준혁명적 시기)가 아닌 ‘방어적 시기’임을 분명히 하자.

  “지금 권력과 자본은 최소한의 개량적, 부분적 조치도 거부하고 있기에 개량적 요구 이상을 밀고 나가야 한다. 그럴 때만 일부의 양보도 얻어낼 수 있다. 사회주의적 전망을 구체화하는 강령적 요구 … 기업회계의 완전한 공개 … 실업자를 구제할 수 있는 대규모 공공사업의 전개와 무상의료, 무상교육 … 이러한 요구는 반드시 노동자 정부의 실현이라는 권력에 대한 문제와 결합되어야 한다”

(김광수, 앞의 글)


  자본주의 철폐의 호소와 노동자 권력의 실현이라는 선전선동은 그 자체로 사회주의자의 과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계급투쟁이 후퇴하는 시기, 방어적 국면에서 혁명에 대한 선전(그것이 이행기 강령이라 할지라도)에 자신을 집중시키는 것은 오류를 낳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입자은 부분적인 요구투쟁의 중요성을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고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임무를 혁명적 선전에만 국한시키기 때문이다. 

 

  방어적, 평화적 시기에는 많은 경우 ‘경제투쟁 및 제도적 요구투쟁의 수행방식’을 둘러싸고 혁명적 노동운동과 개량적 노동운동 사이에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즉, 민주노총의 개량주의 관료처럼 계급협조, 계급타협에 기댈 것인가, 아니면 대중 스스로의 투쟁에 입각해 부분적 요구투쟁을 계급의식 발전, 정치의식 발전이 비옥한 토양으로 삼을 것인가.

 

  전자의 방식은 자본과 정권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하며 오히려 개량주의적 관료들만을 강화시켜 줄 뿐이다. 그러나 후자의 방식은 부분적인 개량의 획득이라고 할지라도 자본가들에게 위협이 될 뿐만 아니라 대중의 투쟁력을 강화시켜준다. 노동자들은 부분적 요구들을 쟁취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감을 회복해 나갈 것이며 그러한 자신감은 이후 자본주의 철폐 투쟁의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총파업 투쟁에 임하는 사회주의자의 임무는 바로 이러한 요구투쟁을 지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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