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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구체적인 것에 대한 마르크스의 정의


γ구체적인 것에 대한 마르크스의 정의


 

마르크스는 구체적인 것을 ‘다양한 양상들의 통일’로 정의한다.1 이 정의는 전통 형식논리학의 입장에서는 불합리해 보일지도 모른다: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다양성을 통일로 환원(reduction)하는 것은, 언뜻 보기에는,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사물들에 대한 추상적 지식의 과제처럼 보인다. 이러한 논리학의 관점에서는, 감각적으로 인식된 현상들의 다양성에서 통일성을 얻는 것은, 이 모든 현상이 담지하고 있는 추상적으로 일반적인, 동일한 요소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일반적 용어를 통해 의식 속에 기록된 이 추상적 통일은 언뜻 보기에 논리학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서의 바로 그 ‘통일’로 보인다.

 

정말로, 만약 누군가가 생생한 관찰과 관념으로부터 개념으로, 즉 인식의 감각적 단계로부터 이성적 단계로의 이행에 대해, 감각적으로 주어진 다양성의 추상적 통일로의 환원이라고만 해석한다면, 마르크스의 정의는 의심할 것도 없이 ‘논리학적’ 용어로 정당화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요점은 마르크스의 관점이, 그것의 목적과 과제에 있어서, 낡은, 비(非)변증법적 논리학이 그 이론을 세운 것과 상당히 다른 사고의 개념에 기초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논리학적 문제들의 해결에 관한 내용에서만이 아니라 그 용어법에서도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그 점은 불가피하다: “어떤 과학의 모든 새로운 양상은 그 과학의 기술적인 용어들의 혁명을 포함하는 것이다.”2

 

마르크스가 구체적인 것을 다양한 양상들의 통일로서 정의할 때, 그는 통일, 다양성 그리고 그것들의 관계에 대한 변증법적 해석을 전제한다. 변증법에서 통일은 무엇보다도 특정한 체계 혹은 덩어리 내에서 상이한 제 현상의 연관으로서, 상호연관과 상호작용으로서 해석되지, 이 현상들의 추상적 유사성으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마르크스의 정의는 정확히 ‘통일’이라는 용어에 대한 이러한 변증법적 의미를 전제한다.

 

만약 누군가가 마르크스의 다소간의 경구적인 간결한 정식을 펼쳐 놓는다면, 구체적인 것에 대한 그의 정의는 말 그대로 다음과 같은 것을 뜻한다: 구체적인 것, 구체성은 먼저 현상 간 실재적 연관, 관찰과 관념 속에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대상의 모든 측면과 계기의 연관과 상호작용에의 동의어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것은 대상의 다양한 존재 형식의 내적으로 구분된 총체성으로서, 오직 주어진 대상에만 특징적인 독특한 결합으로서만 해석된다. 이렇게 인식된 통일은 현상들 상호의 유사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그것들의 차이 그리고 대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양성 속의 통일(혹은 구체성)이라는 개념은, 낡은 논리학에서 비롯된 것과 다를 뿐만 아니라 그것의 직접적인 대립물이다. 개념은 완전성 혹은 전체성의 개념에 접근한다. 마르크스는 용어를 대상의 모든 다양한 표현 속에서 통일되어 있는 완전한 전체로서, 상호 간 서로 규정하는 현상들의 유기적인 체계로서 객관을 특징 지워야 하는 때에 사용하는데, 이는 대상을 서로가 오직 외적으로, 다소 우연적으로 연결된, 불변의 구성 요소들의 기계적 응집물로서 보는 형이상학적 개념과는 반대된다.

 

마르크스의 구체에 대한 정의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우선, 그것이 인식주관에서 야기될 수 있는 어떠한 전개상들로부터도 완전히 독립적으로 고려되는 사물의 객관적인 특징으로서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대상은 사고에 의해 구상되거나 감각 기관에 의해 인식되는 것과는 별개로 그 자체로 구체적이다. [객관적인] 구체성은 인식주관이 대상을 반성하는 과정에서, 반성의 감각적 단계에서나 합리적-논리적 단계에서 창조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구체’는 유물론적 변증법의 다른 범주들, 즉 ‘필연’과 ‘우연’, ‘본질’과 ‘현상’과 마찬가지로 객관적 범주와 같은 종류이다. 그것은 자연, 사회, 그리고 사고 발전의 보편적 형식을 표현한다. 마르크스의 견해 체계에서 ‘구체’는 결단코 감각 소여, 직접적으로 관찰된 것에의 동의어가 아니다.

 

‘구체적인 것’이 ‘추상적인 것’에 대립하는 범위 내에서, 그 추상적인 것은 마르크스에 의해 무엇보다도 객관적인 것으로 다루어진다. 마르크스에게, 그것은 전혀 ‘순수한 이념’, 정신적 활동 산물에의 동의어, 인간의 두뇌 속에서만 존재하는 주관적인 심리학적 현상에의 동의어가 절대 아니다. 마르크스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이 용어를 그것들이 의식 속에 반영되었건 되지 않았건 간에 의식 밖에 존재하는 실재적 현상들과 관계들을 특징짓기 위해 사용한다.

 

가령,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추상적 노동에 대해서 말한다. 여기서 추상성은 인간 노동이 발전된 상품생산,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입는 노동 형태의 객관적 성질로서 출현한다. 다른 때에서도 그는 서로 다른 종류의 노동을 그 어떠한 구별도 결여한 동일한 단순노동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매일의 사회적 생산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추상”임을 강조한다. 그것은 “모든 유기체가 공기 중으로 분해되는 것만큼이나 (추상) 실제적”3이다.

 

추상적 부의 물질적 현존으로서 금의 정의는 자본주의적 구조의 유기체 내의 그것의 특수한 기능을 표현하는 것이지, 결코 이론가나 실용적 노동자의 의식 내의 그 특수한 기능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추상’이라는 용어의 이러한 사용 방식은 마르크스의 용어법상 변덕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그의 논리학적 견해의 중요한 본질, 사고의 형식들과 객관적 실재에서의 그것들의 관계에 대한 변증법적 설명, 사고의 추상물들의 진리 기준으로서 실천대상들과 관계하는 감성적 활동에 대한 견해와 연관된다.

 

이러한 용법이 ‘헤겔주의로의 퇴행’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가장 단순한 경제적 범주, 예를 들면, 교환 가치는 … 이미 존재하는 구체적인 유기적 전체의 추상적인, 일면적인 관계를 떼놓고는 존재할 수 없다”4는 취지로서 마르크스의 명제는 헤겔과 대립한다.

 

이러한 종류의 맥락의 ‘추상적인 것’은, 마르크스에게서 매우 빈번하게, ‘단순한’, 미발전된, 일면적인, 부분적인, ‘순수한’ 것(예컨대, 어떤 변형 작용을 통해 복잡해지지 않은 것)의 의미를 띤다. ‘추상적인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의식의 현상일뿐 아니라 실재 현상들의 객관적 성질이 될 수 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상업 민족들(페니키아인, 카르타고인)이 그러한 순수성(추상적 정확성)을 가지고 발전하게 된 원인은 정확히 고대 세계에서 농업 민족들의 양적 우세에 있다”5; 이는 물론 페니키아인 혹은 페니키아의 역사를 기술한 스콜라학자들의 “사고의 추상적 권능”에서의 우위의 결과가 아니다. ‘추상적인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결코 사고의 산물이나 그 결과가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번식의 추상적 법칙이 오직 식물과 동물에게만 존재한다”는 사태와 동일한 정도로 사고에 의존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추상적인 것’은 (그것의 대립 부면인 ‘구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 사회 및 사고 발전의 보편적 형식들에 대한 과학으로서 변증법의 범주이며, 이러한 기초 위에서 변증법은 또한 마르크스주의의 논리이기 때문에 논리학의 한 범주이다.

 

추상적인 것이라는 범주에 관한 객관적 해명은 조잡한 형이상학적 방식으로 “사고의 순수한 형식들”을 객관적 실재의 형식들에 대응시키는 모든 종류의 신칸트주의 논리학과 인식론과 투쟁하는 선봉에 있다. 이러한 논리학 유파에게 ‘추상적인 것’은 사고의 한 형식에 불과한 반면, ‘구체적인 것’은 감각 소여로서 상(像)의 한 형식이다. 이러한 설명은 논리학의 밀-흄적(Mill-Humean) 및 칸트적 전통(예를 들면, 러시아에서 첼파노프와 브베덴스키)에서의 논리학과 지식이론으로서, 변증법의 중요한 본질에 이질적이고 적대적이다.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의 범주에 관한 편협한 인식론적 설명(즉, 본질적으로 그 최종 분석에서 심리학적인)은 현대 부르주아 철학에 확고하게 뿌리박혀 있다. 이에 대한 생생한 예시가 있다막스 아펠(Max Apel)과 피터 루츠(Peter Ludz)의 『철학사전』에 나온 정의들이 그것이다:

추상(abstract): 주어진 연관에서 분리되어 오직 그 자체로서만 생각되는 것. 따라서 추상은 관찰에서 주어지는 것과 반대로, 개념적, 인식적 의미를 획득한다. … 추상화(abstraction): 특징들의 소거를 통해 관찰 속에 주어진 것에서 일반적인 개념으로, 주어진 개념에서 더 일반적인 개념으로 오름차순으로 올라가는 논리적 과정. 추상화는 내포를 줄이고 외연을 확장한다. … 구체(concrete): 관찰 속에서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 구체적 개념들은 관찰된 것, 즉 관찰의 개별 대상들을 지시한다. 추상의 반대.”6

이 일면적인 정의추상은 물론 타자 중의 정신적 구분이지만 결코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점에서 일면적인는 [그 외양에 있어] 다양하지만, 사전마다 [그 내용에서] 약간씩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수십의 판본을 거듭하며 다듬어졌고 자본주의 국가의 철학자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는 확실히 그것의 적합성을 입증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구체적 개념’은 이러한 정의들로써 감각적으로 관찰된 개별적 사물들을 지시하는 것으로, 단순한 기호, 혹은 상징으로 환원되었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것’은 오직 명의상으로만, 오직 ‘지명된 이름’의 자격 속에서만 사고 속에 존재한다. 다른 한편에서 ‘구체적인 것’은 설명되지 않은, 규정되지 않은 ‘감각 소여’에의 동의어로 만들어진다. 구체적인 것도 추상적인 것도, 이러한 정의들에 따라서는, 실재의 객관적 내용과 관련된 이론적 지식의 특징들로 사용될 수 없다. 그것들은 오직 ‘인식의 형식’만을 특징 지운다: ‘구체적인 것’, 감각적 인식의 형식, 그리고 ‘추상적인 것’, 사고의 형식, 이성적 인식의 형식. 다시 말해, 그것들은 혼(psyche)에서 다른 영역을 차지하며, 다른 대상들에 속한다. 구체적인 어떠한 것에는 추상적인 것이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이러한 정의가 가진 전부이다.

 

구체에 대한 추상의 관계 문제는 마르크스의 관점, 즉 논리학 및 지식이론으로서 변증법의 관점에서 매우 다르게 조명되어 등장한다.

 

이 문제가 단순히 ‘인식론’적인 문제로, 즉 감각 지각된 상에 대한 정신적 추상의 관계 문제로 보일 수 있음은 오직 언뜻 보기에 그럴 뿐이다. 실제로 그것의 실제적 내용은 그것보다는 훨씬 넓고 깊으며, 분석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아주 다른 문제, 즉 대상과 그 자체의 관계, 말하자면, 특정한 구체적 전체 내에 있는 객관적 실재의 상이한 요소 간의 관계의 문제로 대체된다. 이것이 왜 신칸트주의 및 실증주의가 시도하는 바와 같은 협소한 인식론적 국면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연, 사회 및 사고 자체의 발전 법칙과 보편적 형식들의 사상인 객관적 변증법의 틀 내에서 그 문제가 풀리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마르크스는 문제의 인식론적 측면을 다루는 한에서 추상적인 것을 성숙하고, 전반적이며, 종합적인 지식인 구체적인 지식에 대립적인 것으로서, 오직 의식 속에 대상을 일면적이고, 불완전하며, 불균형적으로 반영한 것으로서 해명한다. 이 지식이 인식주관에 의해 어떤 주관적인 심리적 형태로 '경험'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감각-지각적으로 인식되는 상으로든 추상적인 언어적 형태로든 말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논리학(변증법)은 경험의 주관적 형식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지식의 객관적 요지와 의미와 관련해서 그것의 특질을 형성한다. 빈약한, 공허한, 불균형적인 지식은 감각적 상의 형식 속에 동화되었을 것이다. 이 경우에 논리학은 그것을, 그것의 존재가 감각적으로 주어진 상 속에 체현되었을지라도, ‘추상적’ 지식으로 규정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추상적 언어 형식, 즉 정형화된 언어적 문구는 풍부하며, 성숙하고, 심오하며, 종합적인 지식, 즉 구체적 지식을 표현할 것이다.

 

‘구체성’은, ‘추상성’이 이성적 및 이론적 지식의 특징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의식 내의 실재의 감각적-상(像)적 반영 형식에의 동의어도, 특권도 아니다. 확실히 우리는 종종 감각적 상과 추상적 사고의 구체성에 대해서 말한다.

 

감각적 상, 관찰적 상 또한 못지않게 매우 추상적일 수 있다. 그것은 기하학적 도형이나 추상화 작업을 상기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파악된다. 그리고 반대로, 개념적 사고는 세계의 완전하고 엄격한 의미 속에서 구체적일 것이며 심지어 구체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추상적 진리는 없으며 진리는 항상 구체적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는 오직 감각-지각적 상, 개별적 사물의 관찰만이 진실임을 결코 합축하지 않는다.

 

사고에서 구체성은, 마르크스의 정의에 따르면, 수많은 규정들의 결합(종합) 형식으로 나타난다. 규정들의 체계의 논리적 일관성은 정확히 구체적 진리가 사고 내에서 실현되는 ‘자연스러운’ 형식이다. 체계의 부분을 형성하는 각각의 규정은 오직 구체적 실재의 부분, 파편, 요소, 측면만을 반영한다그러므로 다른 정의와 별도로 그 자체로 취해지면 그것은 추상적이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것은 사고 내에 추상적인 것, 즉 그 자신의 대립물을 통해서 실현되며, 그것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일반적으로 변증법에서 예외가 아닌 법칙이다. 필연은 우연, 본질은 현상과 같은 종류의 관계에 놓여있다.

 

다른 한편에서, 구체적 과학의 개념적 체계의 부분을 형성하는 수많은 규정 각각은 그것의 추상적 성격을 그것 속에서 잃으며, 그것과 연관된 다른 모든 규정들의 의미 속에서 충만해진다. 고립적인 추상적 규정들은 서로를 상호 보충하며, 그럼으로써 고립적으로 받아들여진 그것들 각각의 추상성은 극복된다. 간단히 말해서, 이 지점에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것을 반영하는 사고 속에서의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에 관계에 대한 변증법이 있다. 살아있는 관찰 자료에의 이론적 처리 과정, 관조와 관념들의 결과를 개념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의 변증법이 지금 작업의 연구 주제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작업이] 모든 형태의 일반적인 반영에서 [전개되는] 인식 과정의 모든 단계에서의 추상과 구체의 문제에 관한 철저한 해답을 제공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사물의 감각-지각적 상의 형성은 그 자체의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의 변증법을 수반하며, [그것은] 매우 복잡한 것이고, 이는 언어와 관련된 개념의 형성, 즉 단어와 관련된 개념의 형성에서 더욱 그러하다. 인식에 막대한 역할을 하는 기억은 또한 구체에 대한 추상의 관계에 그만큼 복잡한 관계를 그 구조 속에 포함한다. 이러한 범주들은 또한 예술적 창조성과 관련된다. 우리는 이 모든 측면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것들을 전문 연구의 주제로서 남겨두어야 한다.

 

살아있는 관찰에서 추상적 사고로, 또 그것으로부터 실천으로 나아가는 인식의 경로는 매우 복잡한 경로이다. 이 길의 각 고리에서,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향하는, 내지는 그 역으로의 복잡하고도 변증법적으로 모순적인 이행이 야기된다. 심지어 감각은 그것이 실제 그러한 것보다 더 거친 상을 제공하며, 직접적인 지각조차도 현실의 구체적인 것에서 의식 속의 추상적인 것으로의 이행의 요소가 존재한다. 살아있는 관찰에서 추상적 사고로의 이행은 결코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의 운동과 같은 것이 아니다. 비록 후자는 항상 전자 속에서 관철되지만, 그것은 결코 그것이 이 계기로 환원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오직 구체적인 것을 직접적인 감각적 상에의 동의어로, 추상적인 것을 정신적, 이념적, 개념적인 것에의 동의어로 놓는 사람에게만 같은 것이다.

 

번역: 노준엽 | 집행위원

 

2025년 3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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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 Marx,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Progress Publishers, Moscow, 1978, 206.텍스트로 돌아가기
  2. K. Marx, Capital, Vol. I, Progress Publishers, Moscow, 1974, 14.텍스트로 돌아가기
  3. K. Marx,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30.텍스트로 돌아가기
  4. Ibid., 206.텍스트로 돌아가기
  5. Ibid., 213.텍스트로 돌아가기
  6. Philosophisches Wörterbuch, von Dr. M. Apel, Dr. P. Ludz, de Gruyter, Berlin, 1958, 4-5, 162.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