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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이전 철학에서 존재-사유 동일성에 관한 물음: 스피노자의 견해

마르크스 이전 철학에서 존재-사유의 동일성에 관한 물음: 스피노자의 견해 총명한 유물론 2 가을


The Question of the Identity of Thought and Being in Pre-Marxist Philosophy, Russian Studies in Philosophy, 36 (1), 1997: 5-33.


E. V. Il'enkov | 구 소련 유물론 철학자·논리학자

    1. 스피노자의 견해
    2. 포이어바흐의 견해


AA AB AC AD AE AF AG AH AI AJ AK AL AM AN AO AP AQ AR AS AT AU AV AW AX AY AZ BA BB BC BD BE BF BG BH BI BJ BK BL BM BN BO BP BQ BR BS BT BU BV BW BX BY BZ CA CB CC CD CE CF CG CH CI CJ CK

존재-사유의 동일성에 관한 물음은 철학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엥겔스는 이 물음에 관해 이렇게 썼다: “우리의 사고는 현실 세계를 파악할 수 있을까? 우리는 현실 세계에 대한 관념과 개념으로 현실의 진정한 반영을 형성할 수 있을까? 철학 용어로 이 물음은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에 관한 물음이라고 불린다. 대다수 철학자는 이 물음에 긍정적으로 답한다.”1

 

하지만, 때로는 다음과 같은 류의 말을 듣기도 한다: 우리의 사고는 현실 세계를 인식할 수 있으며, 우리의 이념과 개념은 세계를 참되게 반영할 수 있다. 그러나 왜 이것을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이라고 부르면서, 왜 여기서 특별한 ‘철학적 언어’를 사용해야 할까? 이러한 진술은 오해에서 비롯된다. 철학적 언어는 단순히 용어의 집합이 아니며, 그 의미는 일치(agreement)에 달려 있다; 그것은 규약(convention)의 결과가 아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지속되는 투쟁의 산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헤겔만이 철학적 문제에 대해 철학적 언어로 말하고 쓰는 것을 선호했던 것은 아니다. 철학의 언어를 알지 못하면 K.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V. I. 레닌의 『철학 노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특별히, ‘존재-사유 동일성’이 헤겔적 원리라는 잘못된 표상은 스탈린 개인숭배 시절 우리 철학 문헌에 정착된 것으로, 변증법·논리학·인식론의 일치에 대한 레닌의 테제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상당한 방해로 되었다. 이 표상에 기반한 논증은 대략 다음과 같다: 변증법과 논리학은 동일하지 않다결국 변증법은 존재의 이론인 데 반해, 논리학은 사유의 이론이며, 사유와 존재는 다르므로, 그것들이 서로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기서 작용하는 것은 바로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 원리가 일종의 ‘게겔리안시치나(Gegelianshchina)’[헤겔주의에 대한 경멸적 표현]를 예고한다는 두려움이다. 하지만 이러한 두려움은 순전히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두려움은 반드시 해소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특히 마르크스주의 이전 철학사를 살펴보는 게 유익하다.

 

1. 스피노자의 견해

 

먼저 우리는 몇 가지 명백한 사실을 확립해야 한다: 첫째,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이라는 명제에는 헤겔 특유의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과거에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헤겔 외에도 스피노자와 포이어바흐는 이 테제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둘째로, 일반적으로 변증법헤겔의 변증법을 포괄하는에서 동일성은 분명히 형이상학적인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항상 차이 속의 동일성, 대립물들의 동일성이다.

 

일반적으로, 변증법은 참된 동일성을 전화의 행위(act of transition)반대되는 것이 상호 전화하는 것으로부터, 즉 이 특수한 경우에서 현실(존재)이 사유로, 사유가 현실로 전화하는 것으로 통찰한다. 그리고 이 동일성은 모든 인간이 매일 깨닫는 현실이다. 어떠한 사물을 안 사람은 그것을 개념으로 전환한다; 그리고 자신의 연구 과제를 행위로, 즉 사물을 변화시키는 행위로 실현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개념을 사물로 전환한다. 물론 이 모든 것에 ‘게겔리안시치나’ 따위는 없다.

 

‘게겔리안시치나’에게 있는 두드러진 신비주의는 이 전화의 견지에 있는 게 아니라 그 객관적-관념론적인 해석에 있다. 하지만 동일한 사실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도 존재한다. 불가지론자들에게는 이 둘의 근본적인 차이가 실체도 없고, 하찮은 것으로 여겨질 뿐인데, 그들에게 유물론과 관념론은 그저 공허한 단어일 뿐이다. 불가지론자에게 객관적-관념론적 해석과 유물론적 해석은 모두 똑같이 ‘게겔리안시치나’이다. 그래서 칸트주의자와 실증주의자들은 기만당하기 쉬운 독자들의 뇌리에 ‘게겔리안시치나’라는 공포심을 주입하는 것을 즐긴다. 예를 들자면: “순수한 또는 절대적 유물론은 순수한 또는 절대적 관념론만큼이나 영적이다. 둘 다 단순히, 비록 다른 관점에서이지만, 사유와 존재가 동일하다고 가정한다. 대조적으로, 새로운 유물론자들(the new materialists)은 동시대 주요 자연과학자들의 대다수가 그랬던 것처럼, 근본적으로 칸트적 관점을 똑같이 단호하게 채택한다.”2

 

이 “새로운” 유물론자들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었다.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신비주의”베른슈타인은 그것을 변증법, 즉 일반적으로 대립물의 동일성, 그리고 특히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에 관한 교리라고 지칭했다에 너무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우연적인 게 아니라 매우 전형적인 것인데이것이 무슨 뜻인지, 이런 종류의 사상가들이 왜 사고와 현실의 동일성 원리에 관해 고민하는지 알아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물론 문제는 이름에 있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구체적인 접근 방식에 있으며, 이는 실지 난해한 작업이다. 그리고 모든 이론가가 필연적으로 부딪히는 이 난해함은 지식개념, 이론적 구축물, 그리고 이념들의 설정과 그 지식의 대상 사이의 관계에 있다. 이들이 서로 일치하는지 여부를 어떻게 검증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칸트와 칸트주의의 주요 이념은 인간은 현실적인 것, 즉 의식 밖에 존재하는 것이 자신이 다루는 개념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결코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논증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객관적인 것‘물자체’가 의식의 대상이 되는 행로에서 지각 및 판단 기관의 “특정한 본성”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굴절되므로, 우리는 이 굴절의 결과로 획득된 형태로만 대상을 안다. 칸트는 의식 바깥에 있는 사물의 존재를 거부한 적 없다. 그는 ‘단지’ 단 한 가지, 즉 사물이 실제로 우리가 아는 그대로인지, 그리고 우리가 의식하는 그대로인지 검증하게 할 그 가능성을 거부한 것이다. 우리는 의식에 주어진 사물과 의식 밖에 있는 사물을 비교할 수 없다. 의식 안에 있는 것과 의식 안에 없는 것을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아는 것과 내가 모르는 것, 보지 못하는 것, 인지하지 못하는 것,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비교할 수는 없다. 내가 어떠한 사물에 대한 관념을 그 사물과 비교하기 전에, 나는 그 사물을 알아차려야만 한다. 즉, 그것을 생각으로 변환해야만 한다. 이러한 점에서 내가 비록 관념을 사물과 비교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나는 항상 관념과 관념을 비교하고 대조하고 있을 따름이다. 나는 언제나 어떠한 사물에 대한 관념을 의식의 대상으로서의 사물과 비교한다. 즉, 그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 사물에 대한 다른 관념과 비교하는 것이다.

 

당연히 동일한 종류의 것만 비교하고 대조할 수 있다. 화폐의 단위인 파운드를 길이 단위인 마일과 비교하거나, 스테이크의 맛을 정사각형의 대각선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 둘은 다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스테이크와 정사각형을 비교하고 싶다면, 스테이크와 정사각형을 비교하는 게 아니라, 두 물체를 비교할 것인데. 둘 다 기하학적이고 공간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두 가지의 구체적인 속성은 이 비교에 포함될 수 없다.

 

“문자 A와 테이블 사이의 거리는 얼마인가? 이 질문은 무의미하다. 우리가 두 사물 사이의 거리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공간적으로 두 사물을 얼마나 뚜렷하게 구별되는지에 관해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것들을 공간의 일부로서 서로 동일시하고, 그 후에야 비로소 공간의 견지[B. M. Kedrov의 강조; Il’enkov]에서 그것들을 동일시한 연후에 그것들을 공간의 별개 지점으로서 구별한다. 그것들의 통일성은 그것들이 공간에 속한다는 데 있다.”3

 

다시 말해, 두 사물 사이의 어떠한 종류의 관계를 확립하고자 할 때 우리는 결코, 한 사물을 문자 A로, 다른 사물을 테이블, 스테이크, 정사각형으로 만드는 구체적인 속성을 비교하지 않고, 열거된 사물로서의 존재와 구별되는 제3의 항을 표현하는 속성으로만 비교한다. 따라서 비교되는 사물은 둘 다에 공통적인 제3의 속성, 즉 공간 또는 가치에 놓인 여러 변형으로 취급된다. 자루옷과 프록코트를 비교함은 둘 다 상품인 경우, 즉 특정 유형의 노동의 응고물이며 둘 다에 공통적인 본질의 표현인 경우이다. 파운드는 마일과 비교될 수 있지만, 파운드와 마일은 “하나이고 동일한 것”을 측정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표현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예를 들어 물이나 밀의 특정량을 측정하는 것이 이와 같다. 그러한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 없다면 비교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서로 다른 것이고, 그게 전부이다. 만약 두 사물의 본성상 두 사물에 공통된 제3의 항이 없다면, 논리적 관점에서 볼 때 그들 사이의 차이는 전혀 의미가 없게 된다.

 

부르주아 경제학이 악명 높은 공식으로 소득의 세 가지 원천을 구분했을 때, 이 공식은 경험적으로 명백했음에도 완전히 공허한 것이었다. [이에 의하면] 자본은 실제로 이윤을 생산하고, 토지는 지대를 생산하고, 노동을 임금을 생산한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이 공식은 “눈은 희고 뉴욕은 크다”는 이유로 눈과 뉴욕을 구별하는 판단만큼이나 무의미하다.

 

이윤, 지대, 임금의 차이는 이 모든 게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것의 이형(異形)으로서 이해될 때라야만 참으로 명징해진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이 차이가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는 분명하다. 부르주아 경제학의 삼위일체 공식은 그런 종류의 것을 전혀 보여주지 않으므로 무의미하다.

 

하지만 개념(사유)과 사물 같은 대상은 무엇 안에서 서로 관련되어 있을까? 우리는 어떠한 특별한 ‘공간’에서 그것들을 대조하고, 비교하며, 구별할 수 있을까? 겉으로 보기에 명백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에 하나이고 동일하다는 그 제3의 항이 정말 있을까? 만약 사유와 사물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는 그러한 공통된 본질이 없다면, 그들 사이에 내적으로 필연적인 상관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 그러한 본질이 없다면 기껏해야 옛날에 하늘에서 사는 신성한 존재들과 한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이에 확립된 것과 같은 외적 관계, 즉 각각이 자체의 완고하고 구체적인 법칙에 따라 전개되는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일련의 사건 사이의 관계만을 확립할 수 있다. 정말로 그렇다면 논리 형식은 신비로우며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 옳다.

 

그러나 사유와 현실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는 추가적인 난점이 생겨난다. 우리는 사유도 아니고 물질적 실재도 아니지만 동시에 사유와 물질적 실재의 공통 본질을 구성하는 어떠한 특별한 본질을 확립하려는 시도가 어디로 이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시도가 기실 어디로 이어지는지 이미 알고 있다. 즉, 어느 때는 사유로 나타나고 다른 때에는 존재로 나타나는 제3의 존재가 그것이다.

 

결국 철학에서 사유와 존재는 상호 배타적인 개념이다. 사유는 존재가 아니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사유와 존재를 서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상호작용 기반은 무엇이며, 무엇이 그것들을 ‘하나이자 동일한 것‘으로 만드는가?

 

이러한 난점은 데카르트에 의해 순전히 논리적인 형식으로 명확하게 표현되었다. 그에게 사물의 존재가 연장에 의해 규정되고 그 공간적-기하학적 형태가 인식주체 외부에서 그 존재의 유일한 객관적 형태라고 한다면, 사유는 그 반대로, 공간의 형태로 묘사하는 것을 통해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유의 공간적 특성은 사유의 구체적인 성격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유의 본질은 공간적-기하학적 상의 표현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은 개념을 통해 밝혀진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 견해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사유와 연장은 두 가지 다른 실체이고, 실체는 그 자체를 통해서만 존재하며 정의되며, 타자로써 정의되지 않는다. 사유와 연장에 공통적인 것은 특별한 정의로 표현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사유의 정의 중에 연장의 정에 포함될 수 있는 속성이 단 하나도 없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공통 속성이 없다면 사유에서 존재로, 또는 그 반대로 합리적으로 추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추론에는 중간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사유에 대한 일련의 정의, 그리고 의식이나 사유의 밖에 있는 사물의 존재에 대한 일련의 정의 모두 포함되는 항이다.

 

[데카르트의 견해에 따르면] 사유와 존재는 결코 서로 접촉할 수 없다. 접촉할 경우, 사유와 존재 사이의 경계가 바로 사유와 존재를 동시에 나누면서도 연결하는 경계로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계가 없다면 사유는 연장된 사물을 제약할 수 없고, 사물은 이념, 즉 정신적 표현을 제약할 수 없다. 그것들은 마치 어느 곳에서도 한정이 없이 서로 자유로이 침투하고 스며드리라. 사유 자체는 확장된 사물과 상호작용할 수 없고, 사물은 사유와 상호작용할 수 없다. 둘은 모두 자기 자신 안에서 순환한다.

 

바로 이러한 문제야 야기되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사유와 신체 기능은 어떠한 방식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는가? 둘이 연결되어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사람은 다른 유사한 신체 중에서도 공간적으로 규정된 자신의 신체를 정신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 그의 정신적 충동은 공간적 움직임으로 변환되고, 인간의 유기체에 변화를 일으키는 신체의 움직임(감각)은 마음의 상으로 변환된다.

 

그렇다면 이는 사유와, 연장된 신체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상호작용한다는 뜻일까? 하지만 어떻게 상호작용할까? 이 상호작용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들은 어떻게 서로를 규정하며, 다시 말해 경계를 정할까?

 

그러나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런 종류의 변환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논리적으로 이는 사유와, 연장된 신체에 공통된 정확히 동일한 속성을 중간항으로 사용할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장된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고, 사유의 형태를 통해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지, 그리고 반대로 공간적 속성이 전혀 없는 사유가 어떻게 갑자기 공간적으로 정의된 변화, 즉 운동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스피노자는 사유와 연장을 두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실체를 표현하는 두 속성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이러한 난점을 극복하였다. 학문적으로 들리는 이 정의의 의미는 매우 심오하였다. 스피노자 시대의 철학에 특유한 이 표현을 현대 철학의 언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연장도 사유도 독립적으로 실존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어떠한 제3의 항이라는 측면·현현의 형태·존재 양식일 뿐이다. 하지만 이 제3의 항은 무엇일까?

 

스피노자는 그것이 참되게 무한한 자연이라고 답했다. 데카르트 형이상학의 모든 난점은 현실 세계와 상상된 세계 사이의 구체적인 차이가 연장성, 즉 공간적-기하학적 규정에 있다고 여겨진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실상 연장 그 자체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실지 연장 그 자체는 절대적인 공허의 형태로서만, 즉 순전히 부정적으로, 어떠한 명확한 기하학적 형태의 부재로서만 사유될 수 있다. 동일한 견해가 사유에도 도입된다. 사유 그 자체는 물체를 규정하거나 경계를 정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는 자신을 포함해 그 아무것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일반적인 사유나 사유 그 자체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으며, 연장이라는 개념 자체도 마찬가지이다. 연장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다른 어떠한 것의 실존 형태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사유도 연장도 아닌 오직 자연뿐이며, 자연은 사유와 연장을 모두 가진다.

 

스피노자는 이 단순명쾌한 사고방식으로 유명한 심리물리학적 문제의 고르디우스 매듭을 잘라내고 이 문제에 관한 답은 문제 자체가 상상력의 산물이므로 찾을 수 없었음을 보여주었다.

 

누군가가 사유는 비물질적이며 공간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여 공간적으로 표현된 변화(인간 신체의 움직임)로 변환되는지, 또는 반대로 타자 신체에 의해 발생한 인간의 신체 움직임이 어떻게 하여 관념으로 변환되는지를 묻는다면, 그는 이미 완전히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물음은] 또한 실제로 존재하는 자연(스피노자 철학에서는 실체 또는 신)은 유기적으로 사유가 불가능한 어떠한 것이라고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자연을 극도의 불완전한 방식으로 떠올리며, 처음부터 그것의 완전성 중 하나를 부정한다.

 

하지만 자연은 기실 인간 안에서, 그리고 인간을 통해 사유라고 불리는 바로 행위를 성취한다.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함은 자연 그 자체인데, 이는 자연에 반대되는 어떠한 특별한 존재, 즉 알려지지 않은 기원을 가진 존재가 자연 속에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자리 잡는 아니다. 바로 여기에 스피노자주의의 정수가 있다.

 

그러나 사유가 자연적, 즉 공간적으로 조직된 신체에 의해 성취되는 행위라면, 사유 자체는 이 신체의 완전히 공간적으로 표현된 행위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덕분에 사유와 신체 사이의 인과관계, 즉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이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독립적으로 실존하는 사물이 아니라,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므로 오직 두 가지 방식으로 현현하거나 두 가지 다른 양상에서 취급될 뿐이다. 사유, 그리고 생각하는 신체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는 인과관계가 아니라 기관과 기능, 즉 작동 방식과의 관계이다.

 

생각하는 신체는 순전히 사유, 즉 행위하는 신체로서의 그 존재 자체는 사유이므로, 사유에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생각하는 신체가 행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생각하는 신체가 아니라 그저 신체일 뿐이다. 만약 행위한다면 그것은 사유에 작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행위 자체가 사유이기 때문이다.

 

사유는 생각하는 신체에서 특별한 물질로 분리되어 나갈 수 없다. 마치 이는 담즙이 간에서 분리되고, 땀샘에서 땀이 분리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행위의 산물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이다. 예를 들어 걷기는 다리의 행위 방식이다. 다시 말한다면, 사유의 산물은 다른 신체에 대한 신체의 상대적인 기하학적 모양이나 위치의 공간적으로 표현된 변화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생각하는 신체의 작동 방식의 변화는 신체의 공간적-기하학적 조직·구조·위치의 변화로 매우 적절하게 표현된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야기한다고 말할 수 없다. 사유는 공간 구조의 운동을 유발하는 게 아니라 그 운동을 통해서 존재한다. 생각하는 신체 구조의 가장 미묘한 변화가 사유의 변화라는 형태로 적절하게 표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여기에 스피노자의 입장에서 극히 중요한 측면이 있다. 즉, 생각하는 신체 내의 구조적-공간적 변화로 표현되는 것은 사유나 생각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로 사고 기관의 내재적 운동이 사고의 변화로 표현되는 것 또한 아니다. 따라서 사유는 생각하는 신체 내부에서 야기되는 변화에 대한 가장 세밀한 조사를 통해서도 이해될 수 없으며, 반대로 순수한 사유 행위에 관한 조사로써도 이해될 수 없다.

 

스피노자가 재차 반복하듯, 그것들은 단지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 하나의 동일한 것일 뿐이므로 정확히 이해될 수 없다.

 

하나로써 다른 하나를 해명하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을 묘사한 것을 그대로 반복함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우리가 움직이는 마차를 보고 “바퀴가 돌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말하거나, 반대로 “마차가 움직이기 때문에 바퀴가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어떠한 설명이든 다 그럴싸할 것이다. 이러한 유치한 설명으로 마차가 움직이는 진짜 이유, 즉 마차가 말에 의해 끌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

 

이 해법의 기발한 단순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처음부터 이 해법은 관념론적이고 이원론적인 개념으로 사유의 본질을 해명하려는 모든 시도를 근본적으로 배제한다. 이것이 바로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에 관한 관점이며, 오늘날에도 다른 사상가들은 이를 ‘게겔리안시치나’라고 부르며 불신을 쌓으려 하고 있다. 기실, 이는 이원론과 특정 ‘게겔리안시치나’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찾을 수 있게 해 주는 입장일 뿐이다. 오직 마르크스와 엥겔스만이 스피노자주의의 심오한 해법의 진정한 가치를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헤겔조차도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물음에 대해 그는 순수 비연장적 사유가 사유의 “신체”인간의 뇌와 감각 기관, 언어, 행위, 노동 산물 등에서 발생하는 변화의 능동적인 원인이라는 데카르트의 해법으로 돌아간다. 달리 말하면, 사유와 신체적 존재의 동일성에 관한 스피노자의 이해에의 유일한 대안은 사유가 어떻게든 자신의 어떤 종류의 “신체”도 없이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런 다음 사유의 목적에 적합한 “신체”, 즉 뇌, 언어 또는 이와 유사한 것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스피노자의 관점에 따르면, 사유는 특별한 공간적 구조가 아니며, 연장되지 않은 구조도 아니다. 사유는 공간적으로 조직된 구조의 작동 방식, 즉 기능 방식이다. 이는 명료한 것인가? 그렇다, 그것은 명료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하는 신체의 공간적 구조를 조사함으로써 사유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모든 기관이 특정 기능을 수행하도록 구조적으로 적응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이 기능에 따라 구조적으로 조직되어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기관의 작동 방식과 기능은 그 기관의 내재적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게 아니라 그 기관에 속한 유기체의 특성에 의해 규정된다.

 

우리가 간(肝)의 생리학이나 물리화학적 구조를 아무리 탐구하더라도, 간의 분비물이 신체 전체에 미치는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동물의 신체에서 간의 역할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의미’를 간에서 찾을 수 없다. 비록 의미가 간에 표현되기는 하지만, 간이 그곳에는 없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신체의 구조적 분석을 통해 사유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이는 문맥을 모조리 제거한 각각의 용어들로부터 『일리아스』의 문구 또는 심지어 루돌프 카르납의 『세계의 논리적 구조(The Logical Structure of the World)』에서 표현된 그의 관점을 추론하려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일이다.

 

사유는 이해하려면 생각하는 신체의 존재 양식을 이해해야지, 비활성 상태의 구조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 바로 여기에 스피노자의 입장이 지닌 모든 게 있다.

 

생각하는 신체의 존재 양식을 이해함은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생각하는 신체와 생각하지 않는 신체 모두, 다른 신체들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밝히는 것을 뜻한다. 간이나 심장의 기능을 이해하려면 인간이나 동물의 신체 기관계에서 이 두 기관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알아내면 충분하다. 사유를 생각하는 신체의 기능으로 이해함은 이 신체의 경계를 넘어 ‘생각하는 신체자연’ 시스템의 경계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신체의 구체적인 작동 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광범위한 시스템 안에서이다.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전체로서 자연이며, 아무리 광범위하더라도 한정된 영역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생각하는 신체는 구조적-해부학적 조직에 의해 특정 작용 방식에 얽매이거나, 그것을 통해 특정 형태의 자연적 신체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 요점이다. 생각하는 신체의 작동 방식은 명백하게 표현된 보편적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외부 신체가 취하는 특정 형태에 맞게 다양화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손은 원, 직사각형, 삼각형 또는 기타 복잡한 도형의 윤곽을 그릴 수 있다. 이는 손의 본래 형태가 신체 사이에서의 손의 작동 방식에 전혀 반영되지 않음을 의미하거나, 더 나은 표현으로, 그것은 한번 주어진 운동 패턴을 구성하지 않는다는 바로 이 사실에 정확히 반영된 것이라는 그런 연유로 하여, 손은 어떠한 행동 패턴에도 쉽게 적응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들의 형상”, 즉 보편적 형상이라고 적절하게 부른 생각하는 신체의 속성이다. 그는 이 속성을 신적 이성의 조각, 즉 완전 현실태(enteleche)로서 영혼의 신적 본성에 귀속시켰다.

 

구조적으로 원을 그리며 움직이도록 결정된 생각하지 않는 신체는 다른 신체 사이에서 운동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조차도 어떠한 상황에서든 행위로 ‘자기중심적’ 본성을 드러낸다. 결과적으로 이는 다른 기관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이로써 그 행위 방식이 종식되거나 바뀔 것이다.

 

다시 말해, 생각하지 않는 신체는 어떠한 내적 필연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오로지 외적 강제력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다른 신체 형태에 맞춰서 비자유로운 방식으로 운동(행위)을 수행한다.

 

생각하는 신체는 이를 자유로이 행하며, 자연의 총체적 필연성에 따라 조화로이 운동하고, 이 필연성을 능동적으로 미리 고려한다. 그것은 외부 신체의 형태에 따라 행위하며, 현실로부터 직접적인 저항으로 인해 행위 패턴을 바꾸도록 강요받지 않고 다른 신체 사이에서 자신의 행위 방식을 의식적으로 조직한다.

 

이는 생각하는 신체가 마치 다른 모든 신체, 아직 공간적으로 직접 접촉하지 않은 신체를 포괄하는 모든 신체의 전체 분포를 나타내는 일종의 지리적 지도를 눈앞에 들고 있는 셈이다. 생각하는 신체의 행위가 지닌 보편적인 가소성(plasticity)과 유연성(flexibility)은 결코 진흙이나 물의 수동적인 무형성과 같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것은 자유-형태의 조형 활동, 즉 “총체적 필연성에 조응하는 생각하는 신체의 능동적인 움직임”을 표현한다.

 

스피노자의 정서 이론의 전체 체계, 자연에 관한 신학적 설명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적절한 비판, 그리고 특히 우리 주제에서 중요한 것으로 『기하학적 순서로 증명된 윤리학』, 『지성개선론』, 『신학-정치학 논고』 그리고 수많은 서편에서 주의 깊게 전개된, 진리와 오류에 관한 그의 심오한 이론은 이 독창적이고 명료한 구상에 기초해 있다.

 

생각하는 신체의 행위 방식이 신체의 내재적 구조가 아니라 사물의 형태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된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오류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문제는 윤리와 신학에서 죄와 악의 문제로 제기되었으므로 더욱 중요해졌다. 신학자들의 스피노자주의 비판은 언제나 이 지점을 겨냥했다. 스피노자의 이론은 선과 악, 죄와 정의, 진리와 오류 사이의 구별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과연 이 둘의 구별점은 무엇인가?

 

스피노자의 대답은 다시 한번 놀라울 정도로 명료하다. 근본적으로 타당한 모든 대답이 그렇듯 말이다.

 

오류(그리고 그에 따른 악과 죄)는 본래의 참된 내용에 따른 관념과 행위의 특성이 아니다; 그것은 긍정적인 속성도 아니다. 오류를 저지른 자도 사물의 형식에 따라 엄격하게 행위하지만, 문제는 이 사물이 어떠한 종류인가 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 무시할 수 있고 불완전한즉 우연적이라면 그에 적합한 행위 방식 또한 불완전하다. 그리고 만약 어떠한 자가 이러한 행위 방식을 타자에 적용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게 된다.

 

결과적으로 오류는 제한된 유효성을 지닌 행위 방식에 보편적 의미가 부여되고 상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에만 발생한다. 이러한 이해의 견지에서 스피노자는 추상적·형식적 유비(類比)나 추상적 보편에 기초한 형식적 추론에 응하는 행위에 매우 낮은 가치를 부여한다.

 

추상적 이념은 가장 자주 눈길을 끄는 것을 표명한다. 하지만 이는 사물의 완전히 우연적인 속성이나 형태일 수도 있다.

 

따라서 사람이 다루는 전 자연의 영역이 좁을수록 오류의 정도는 커지고 진리와는 멀어진다. 같은 이유로, 생각하는 신체의 ‘[능동적] 활동성(activeness)’은 그 생각의 적합성에 정비례한다.

 

생각하는 신체가 수동적일수록 가장 표면적이고 순전히 외적인 상황이 그 생각하는 신체에 미치는 힘은 더 커지는데, 그 행위 방식은 사물의 우연한 형태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반대로, 생각하는 신체가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는 자연 영역[에의 앎]을 더욱 적극적으로 확장할수록, 그 신체의 관념은 더욱 정확해진다.

 

그러므로 블레셋인의 자기 만족적인 수동성은 가장 큰 죄악이다...

 

이상적인 경우, 즉 생각하는 신체의 완전성의 한계는 전 자연의 총체적 필연성에 의해 결정되는 행위 방식이다. 지상의 인간은 이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명백히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필연성을 지닌 실체라는 관념은 지성의 지속적인 개선을 위한 원리로 작용한다. 완전성의 원리로서 실체라는 관념은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모든 유한자는 무한한 실체의 품에서 소멸하는 순간으로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으며, 따라서 아무리 자주 마주치더라도[경험하더라도] 어떠한 특정 형태[유한자]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완전한 생각하는 신체의 행위가 따라야 할, 진정으로 보편적인 사물의 형태를 밝히기 위해서는 형식적 추상화 이외의 기준과 지식 방법론이 요구된다.

 

실체라는 관념은 사유와 연장 모두에 속하는 동일한 속성을 추상화하여 형성되는 게 아니다. 하나와 다른 하나 사이에서 추상적으로 보편적인 것은 단지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존재 일반(existence in general), 즉 둘 중 어느 것의 본질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절대적으로 공허한 규정일 뿐이다.

 

사유와 공간-기하학적 실재 사이의 참으로 일반적인(무한하고 보편적인) 관계, 즉 실체라는 관념에 도달하는 것은 자연에서 그 둘의 상호관계 양식(mode of their interrelationship within nature)을 참되게 이해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스피노자의 이론 전체는 실상 이 무한한 관계를 다루고 있다.

 

실체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으로 밝혀졌으며, 이것이 없다면 생각하는 신체가 그것이 생각하는 신체로서 작용하는 세계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는 극히 변증법적인 측면이다.

 

따라서 생각하는 신체는 실체라는 관념에서 출발해야만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 안에서 행위하고, 그 안에서 생각하는 현실을 이해할 수 있다. 이 관념이 없다면 생각하는 신체는 자기 자신이나 세계를 이해할 수 없고, 자신과 세계와의 관계 방식도 이해할 수 없기 떄문에 신학적으로 구성된 신, 기적과 같은 외적인 힘이라는 관념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생각하는 신체가 그 주제에 대해 합당하고 이성적인 어떠한 것도 말할 수 없으며, 생각하는 신체가 자기 자신이나 외부 신체에 대한 자기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즉 사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생각하는 신체는 자신의 행위 방식즉, 사유을 이해함으로써 실체를 외부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직관(intuitive)이라 칭하는 인식 방식이다. 생각하는 신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즉 외적 대상의 윤곽을 따라 운동하는 자신의 형태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창조함으로써 이 대상의 형태와 윤곽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창조해 낸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이자 동일한 형태이자, 하나이자 동일한 윤곽이기 때문이다. 외부 세계와의 상호작용 양식에 관한 적합한 관념을 창조하면서, 외부 세계 전반에 관한 적합한 관념도 창조한다. 직관에 관한 이러한 이해에 주관적 내관(subjective introspection)과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오히려 이는 스피노자에게 전 자연에서 자기 행위의 일반법칙에 관한 생각하는 신체의 이성적 이해, 자연에서 자신의 행위 방식에 대한 이해, 그리고 자연의 신체에 대한 이해의 동의어일 뿐이다. 생각하는 신체는 자신의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합리적인 해명을 제공하면서 자신의 활동 대상에 관한 참된 관념을 소유한다.

 

우리는 여기서 스피노자가 표명한 입장의 역사적 조건화된 내용이 지닌 불가피한 결함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리고 전반적으로, 이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포함한 모든 마르크스 이전 유물론의 결함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자연을 변화시키는 활동으로서의 ‘능동적인’ 실천 활동의 역할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스피노자는 자연적 신체의 기성 윤곽을 따라 운동하는 생각하는 신체의 움직임만을 염두에 두었다. 따라서, 피히테가 스피노자(그리고 그가 대표하는 유물론의 형태)에 대해 제기한 요점, 즉 인간(생각하는 신체)은 자연에 의해 외부적으로 주어진 기성 형태들과 윤곽들을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자연에 고유하지 않은 새로운 형태들을 능동적으로 창조하고 그것들을 따라 움직이며, 외부 세계의 저항을 극복하고 기성의, 부과된 형태들을 거부한다는 점은 [마르크스 이전 유물론에서] 간과된다.

 

이 측면의 중요성은 나중에 스피노자와 매우 밀접한 사상가인 포이어바흐의 철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과 관련하여 다루어질 것이다. 포이어바흐에게서는 스피노자주의의 강점과 약점이 스피노자의 그것보다 훨씬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번역: 한동백 | 집행위원

2025년 9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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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 Marx & F. Engels, lzbrannye proizvedeniia v dvukh tomakh, Moscow, 1953, Tom. 2, 351.텍스트로 돌아가기
  2. G. V. Plekhanov, Sochineniia, Moscow-Petrograd, 1923, Tom. 11, 9.에서 재인용.텍스트로 돌아가기
  3. K. Marx, Teoriia pribavochnoi stoimosti, Leningrad, 1936, Ch. 3, 111-2.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