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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철학에서 직접지(直接知)의 문제」 『총명한 유물론』 제2집 여름호
“The Problem of Immediate Knowledge in the Philosophy of Hegel”, Soviet Studies in Philosophy, 1 (4), 1963: 44-50.
V. F. Asmus | 구 소련 유물론 철학자·논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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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평생을 거쳐 직접적 직관지(直觀知)의 문제를 다루었다. 직접지(直接知)와 매개지(媒介知), 직관과 증명의 관계 문제는 헤겔이 철학자로서 성장해 가는 초기에 스스로 해명한 문제였다. 그는 그 후에도 이 묘안에 충실했다.
헤겔은 칸트가 발전시킨 직접지 개념과 셸링 및 낭만주의자들의 학설을 비판했지만, 특히 그중에서도 야코비[F. H. Jacobi]의 견해를 자주 언급하고 자세히 논의하면서 비판했다.1
헤겔이 야코비에게 관심을 기울인 것은 그를 주요 철학자로 여겼음에 있지 않다. 헤겔은 이 사상가의 중요성을 결코 과대평가하지 않았다. 헤겔은 직접지에 대한 야코비의 철학에서, 지적 직관에 관한 셸링과 낭만주의자들의 학설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철학의 과제와 방법에 대한 자신의 개념과는 정반대인 견해를 발견했다.
헤겔의 견해에 따르면, 자신 이전의 어떤 철학 체계도 과학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헤겔이 이해한 대로, 철학의 과제는 바로 과학이 되는 것이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철학 체계는 과학적 철학 체계의 형태로 정립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 서설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철학으로 하여금 학(學)의 형태에 가까워지도록 진력함을 목표로 삼았다. … 그렇게 하여 철학이 지(知)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을 떨쳐버리고 그것이 현실적인 지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2 헤겔에 따르면, 지와 학[과학]은 본질적으로 동의어이다. “지가 곧 학이라는 그 내적 필연성은 지 자체의 본성에 있다 … ”3
헤겔은 철학이 과학이 될 수 있는 조건은 그가 “사변적”이라고 부르는 방법, 즉 관념론적 변증법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 방법의 중요한 특징은 각 범주가 발전된 내용을 얻은 후, 그의 반대물, 즉 그 자신이 ‘타자’가 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변형을 완성하여 그 변형 자체가 대립물의 통일을 드러내는 경로를 정신적으로 추적하는 데 있으며, 이는 지의 추가적인 발전과 새롭고 더 높은 수준으로의 이행을 위한 조건임이 증명된다.
철학의 목적과 방법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철학함(philosophizing)이 이루어지는 과학적 형태에 높은 가치가 부여되었음을 전제로 하며, 그 결과 과학적 인식의 논리적 형태로서 개념과 더불어 지적 인식 또한 높이 평가되었음을 의미한다. 헤겔은 참된 진리가 과학적 형태임을 확신하며, 진리는 “개념의 형태로만 존재의 요소를 갖는다”3고 단호히 주장하였다. 이러한 확신의 힘은 헤겔이 야코비의 직접지 철학 및 낭만주의자들의 직관 학설과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대립하도록 만들었다. 헤겔은 이러한 학설에서 철학을 과학적으로 정당화할 가능성 자체가 부정됨을 옳게 관통하였고, 감정과 신앙의 철학에서 모든 철학의 부정을 목도하였다.
하지만 헤겔은 자신의 관점을 야코비와 낭만주의자들의 관점에 반대하는 게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요점은 야코비, 하만[J. G. Hamann] 그리고 낭만주의자들의 직접지 옹호, 그리고 개념과 직관을 대립시키는 것이 합리론적 형이상학(rational metaphysics)에 대한 그들의 비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비판은 헤겔이 가장 단호하게 옹호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한 측면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헤겔의 변증법 자체가 계몽의 시대에서 합리론적 형이상학 및 독일-베를린-계몽주의 철학5이 제시한 그 평면적인 변종(two-dimensional variant)의 이성적 개념들에 맞선 투쟁 속에서 형성되고 자라났기 때문이다.
직접지의 철학과 지적 직관의 낭만주의적 교리의 비과학적 경향은 헤겔로 하여금 이 두 교리를 과학적 철학에 적대적인 것으로서 전면적으로 거부하게 하였다. 그리고 헤겔은 옳았다. 헤겔과 낭만주의자들의 이성 개념 비판은 정반대의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헤겔은 형이상학의 합리론적 구상들의 그 한정된 시각(‘유한성’)과 변증법의 결여가 철학이 참된 과학으로 됨을 방해한다고 비판하였다. 그에 반해 야코비, 낭만주의자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셸링조차도 합리론적 개념들을 비판했으며, 그 이유는 그것들이 합리론적(형이상학적)이라서가 아니라 개념[적]이었다는 데 있었는데, 그들은 직접적인 감정(야코비)이나 지적 직관(셸링, 프리드리히 슐레겔)만이 적절한 인식의 형태로 작용할 수 있고, 개념은 그렇지 않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출발점의 상반성을 고려하여 헤겔은 자신이 야코비 및 셸링과는 다름을 최대한 강조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믿었다.
헤겔은 직접지 및 직관을 옹호하는 자들의 논증을 철학과 인식론에서뿐만 아니라, 예술 이론과 미학에서도 해부한다. 여기서 직접지의 철학은 예술적 미가 “사유에 명백히 반대되는 형태로 … 나타난다”6고 주장한다. 헤겔은 이것이, 개념 형태의 지식에 관해 “일반적으로 현실, 자연과 정신의 생명을 왜곡하고 말살한다”는, 그리고 개념적 사유가 이 현실을 우리에게 가져다주기는커녕 “그것을 우리로부터 더 멀리 떨어뜨려 놓으여, 생명을 인식하는 수단이 되어야 할 사유 덕분에 인간이 오히려 이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을 자신으로부터 박탈한다”7는 견해와 관련이 있음을 지적한다.
헤겔은 직접지 자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는 직접지를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8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실을 단지 진술하는 데 그쳤을 때, 우리는 평범한 경험의 영역에 머무르게 된다. 경험의 진부한 사실 중 하나는, 극도로 복잡하고 다양하게 매개된 연구 및 추론의 결과로서 발생한 수많은 진리가 심히 관습화되어 결국 우리에게 마치 직접적인 것처럼 여겨지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3
직접지의 철학의 오류는 그러한 지식의 실제적 존재를 지적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기준으로서 내용 자체가 아닌, 의식의 어떠한 사실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10 결과적으로, 진리로서 제시되는 것의 기초는 단지 ‘주관적인 지’일 뿐이며, “나의 의식에서 나에게 주어진 내용을 발견한다”11는 사실에 대한 단순한 주관적 ‘확신(Versicherung)’임이 증명된다. 예술에서조차 이러한 주관적인 지와 ‘확신’은 단지 출발점에 있을 뿐이다. 예술 자체는 이미지를 직접적 감각으로 인식하는 영역이 아니라, 독특한 사유 활동이다. 하지만 이제 사유의 수준에서는 의식 속에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직접성이라는 질로 나타나는 것만이 아닌,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대립으로서 출현한다.12
직접적인 것의 빈약함은 사유가 필연성의 인식에 도달하는 어느 곳에서나 완전히 드러난다. 헤겔은 “필연성을 인식함으로써 형식적 사유에 여전히 내재해 있던 직접성의 마지막 흔적마저 사라진다”13고 말한다. 그러므로 헤겔은 “직관은 지의 시작일 뿐”14이라고 설명한다. 철학적 지식만이 아니라 “모든 지는 사유를 필수 조건으로 전제한다.”15 시인이나 예술가조차 일반적으로 직관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그에 반해, 진정한 시인은 자신의 작품을 창작하기 전과 창작하는 동안 “숙고하고 사유”3해야 한다.
그러나 직접지의 철학의 빈약함은 그것이 직접지를 단지 지의 시작점으로 간주하지 못했다는 사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철학의 옹호자들은 직접지의 본질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는 항상 사유이지만, 헤겔이 말했듯, 사유 그 자체는 과정이자 운동이며 생명이다. 주어진 지식 수준에서 의식이 직접 명백한 진리로 인식하는 것은 사실 기다란 선행 매개 사슬의 결과이다. 헤겔은 매개를 폭넓게 이해하였다: 매개는 주어진 인식이나 통찰이 의식에 직접적인 것으로서 출현하기 위해 필요한 일련의 실천적 행위, 사건, 발명 및 그와 유사한 것들로 구성된다. “나는 예를 들어, 아메리카에 대한 직접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지는 매우 매개적이다. 아메리카를 보기 전에 나는 그곳으로 여행해야 하지만, 그보다 앞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해야 했고, 또 그보다 앞서 그 목적을 위해 배들이 건조되어야 했으며, 이는 계속 이어진다. 이 모든 게 요점과 관련이 있다.”17 따라서, 우리가 지금 직접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한한 매개의 결과이다.3
헤겔은 매개를 통해 검증, 특히 과학적 체계의 증명을 이해한다. 그리고 이것이 이루어질 때, 현재 의식에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오직 선행된 증명의 결과로서만 그러한 것으로서 인식될 수 있다. 그렇기에, 헤겔에 따르면 직각 삼각형을 볼 때 나는 이미 그 변 제곱의 합이 빗변의 제곱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것을 직접적으로 알고 있으나, 또한 나는 오직 교육을 통해서 그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증명의 매개로써 이를 확신하게 되었다.”3 그러므로 직접지는 “항상 매개된다.” 직접적인 것을 직접적인 것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교육과 발전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필연성은 미학, 도덕성, 과학, 그리고 철학에서 드러난다. 예술 작품이, 지성의 사물인 것처럼, 본질적으로 지적인 것처럼, 예술 작품은 지각적 사고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예술 철학에서도 진리는 증명되어야 한다. “철학적 방법은 노골적인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방법에서는 인정받을 만한 것의 진리가 증명되어야 한다. 즉, 그 필연성이 입증되어야 한다.”20
그러나 이 주장은 미학뿐이 아니라 예술 자체의 관점에서도 타당하다. 예술가의 지위가 높을수록 그는 자기의 작품에 영혼의 깊이를 더욱 생생하게 묘사해야 한다. 하지만 헤겔은 이러한 깊이가 “예술가에게 직접적으로 파악되지 않으며, 예술가는 오직 내면과 외면의 세계에 정신적 시선을 집중함으로써만 그 깊이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21고 말한다. 모든 관찰 형태 중에서 예술적 관찰이 가장 직접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헤겔에 따르면, 이러한 관점은 단지 환상일 뿐이다. 예술적 지각(artistic perception)의 소위 ‘직접성’은 일반적인 감각적 지각의 직접성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직접적인 감각적 실존의 범위와 비교했을 때, 예술의 범위는 … 우리를 그러한 한계 밖으로 데려가며, 그 너머의 어떠한 것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그것을 매개자로 하여 우리가 상상하는 대상이 되는 영적인 무언가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 ”22 예술은 결코 직접적으로 명백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영감, 그리고 예술적 비전의 직접성만으로는 예술가가 자신 앞에 놓인 과업을 수행하는 데서 [그 과업을 이루기에는] 절대적으로 불충분한 것이다: “오직 연구를 통해서만 예술가는 그 내용을 이해하고 자신의 의도에 필수적인 어떤 질료와 내용을 획득한다.”21 예술가의 재능과 천재성이 하나의 요소로서, 그의 천부적 소질을 포함하지만, 이 천부적 소질이 문화에 적용되려면, 그 양식이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지에 관한 사유와 성찰이 필요하다. 이는 무엇보다도 건축과 조각에 해당하지만, 회화, 음악, 심지어 시에도─정도는 덜하지만─적용된다. 따라서 예술에서도 직접성은 출발점이 될 수 없으며, 오직 그것은 매개라는 여정의 결과일 따름이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직접적인 관찰에서, 나는 실로 그 대상의 전체를 내 앞에 두고 있으나, 그것에 대한 인식이 모든 측면에서 발전되어 단순한 관찰의 형태로 돌아올 때라야만, 그 대상은 내 정신 앞에 내적으로 구조화된 것, 체계적인 총체성으로서 마주 선다.”24
이 직접지의 개념은 헤겔에 의해 예술뿐만 아니라 종교와 철학에도 적용된다. 여기서도 그는 자신의 관점을 야코비의 관점과 대립시킨다. 감성과 신앙의 대변자인 야코비는 그의 이 직접지 개념에 특별한 기초를 두어, 종교에 관한 합리주의적 개념과 검증에 맞섰다. 다른 한편으로, 과학적 형태의 철학의 옹호자로서 헤겔은 매개와 증명의 원리를 종교 자체 안으로 도입하고자 하였다. 그 귀결로, 그는 칸트와 야코비 모두의 종교관을 비판했다. 신 존재 증명에 그 어떠한 타당성도 있을 수 없음을 보여준 칸트의 분석과는 반대로, 헤겔은 존재론적 증명의 명예를 회복하려 시도했다. 그는 모든 지식의 필연적인 매개적 본질이라는 자신의 개념에 근거하여 이를 시도했다. 그는 종교와 도덕이 신앙과 직접지의 본질이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은 “발달, 양육, 교육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전적으로 매개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25고 역설하였다. 존재론적 논증에서 헤겔은 단순히 감각적인 것을 넘어선 의식의 고양, 신에 대한 믿음으로의 이행을 보았다.26 헤겔에 따르면, 감각적이고 유한한 것을 넘어서는 이러한 고양은 그 자체로 매개, 참된 매개를 드러낸다.3
예술의 영역에서처럼, 도덕과 종교의 영역에서도 헤겔은 직접지의 빈약함과 일면성을 꼬집었다. 소위 직접성에 대한 모든 지에는 지의 시작이라기보다 그 결과가 있을 뿐이다. 이 결과는 오직 매개로써만 도달된다. 그리고 이 매개의 형태와 방법이 어떻게 다르든─그것이 훈련, 양육 또는 발달에 의한 것이든, 문화, 검증 또는 증명에 의한 것이든─지에 있어 가치 있는 결과는 항상 매개와 직접적인 것의 통일, 직접적인 것과 매개된 것의 변증법을 전제한다.
헤겔의 이 사상은 그의 예술, 종교 및 도덕에 대한 성찰에서가 아니라, 문제의 핵심이 철학인 곳에서 가장 정확하게 표현된다. 이것은 그가 체계적으로 직접지의 문제로 회귀한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이에 관해서는 『철학백과(Encyc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의 “사유와 객관성 사이 제3의 관계(Third Relation Between Thought and Objectivity)”라는 절에서 다루어진다. 바로 여기에서 헤겔은 야코비의 이론에 대한 자신의 가장 중요한 반대와 직접지에 대한 그의 변론을 체계화했다. 헤겔의 견해로는, 야코비 학설의 주요 모순은 형이상학과 합리주의의 일면성과 싸우면서도, 그의 뿌리는 여전히 그가 부정하는 그 형이상학에 있다는 사실에 있다. 야코비의 철학은 단순히 직접지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데, 그는 모든 매개를 단호히 배제한다. 헤겔은 그의 관점에 대해 “이 관점의 독특성은 직접지가, 순수하며 매개가 배제될 때에만 진리를 내용으로 가질 수 있다는 주장에 있다”28고 하였다. 이는 야코비가 직접지에 관한 그의 철학이 지향하는 바처럼 보이는 동일한 형이상학으로 되돌아감을 뜻한다.
그러므로 야코비의 구상에 대한 헤겔의 최종 평가는 전적으로 부정적이다. 야코비 학설에 대한 이 판결은 헤겔의 『철학사 강의』에서 선언되었는데, 이 문헌에서 우리는 다음의 문장을 읽을 수 있다: “보편적인 것이 직접지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 양육 및 인류가 행한 발견의 제 결과라는 사실에 대한 지식의 부재는 단순 묵상의 불충분함을 입증한다.”29 결국, 야코비가 직접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이해한 것은 “모든 비판과 논리의 부재를 가리킨다.”30 야코비와 그의 동료 사상가들의 교리에서 직접지는 본질적으로 철학적 지 및 이성에 반대된다.31
야코비의 이론에 대해, 헤겔은 직접적인 것과 매개된 것에 대한 자신의 변증법으로 맞선다. 그는 자신의 『논리의 학(Wissenschaft der Logik)』에서 본질에 대한 논리 전체가 “직접성과 매개성의 본질적 … 통일성에 관한 연구”32에 불과하다고 해명한다. 그러나 직접지의 학설에 대한 헤겔의 비판은 그것의 형이상학적 성격을 명확히 하는 것뿐만 아니라, 매개지에 대한 비판에 속해 있는 반과학적 경향을 폭로하는 데에도 있다. 헤겔이 입증하였듯이, 이 비판은 과학적 사고와 인식의 주요 형태, 즉 개념에 관한 것이다. 이 사상을 발전시키면서, 헤겔은 더 이상 야코비의 견해를 고려하는 데 자신을 국한하지 않는다. 그는 소위 “지적 직관”에 관한 셸링과 낭만주의자들 학설의 분석으로 향한다.
헤겔은 깊은 통찰력으로 이 모든 학설에 공통적인 비논리적 경향,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자주 비판하는 대상이 ‘합리주의적’ 또는 ‘형이상학적’ 일면성이라기보다 오히려 지성적 인식(intellectual cognition)의 특정 형태, 주로 개념의 형태에서 진리를 엄밀하게 표현하는 원리 자체임을 보았다. 헤겔은 만약 진리가 오직 직접지의 형태로만 주어질 수 있다면, 이 경우 철학을 정교화하는 데 필요한 것은 개념들이 아니라 그 반대의 어떠한 것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만약 진리가 오직,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오직 직관, 절대적 직접지, 종교, ‘존재’라고 불리는 것 안에만 존재한다면 … 철학의 개시는 개념의 형태와는 오히려 반대되는 형태를 요구할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필요한 것은 절대자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지하고 관조하는 것일 것이다. 절대자를 표시하고 표현해야 하는 것은 개념이 아니라 절대자에 대한 느낌과 직관일 것이다.”33
이 견해에 대해, 헤겔은 “오직 개념 안에서만 [진리가] 존재할 수 있는 요소를 소유한다”34는 자신의 진술로 맞섰다. 그러므로 헤겔은 “영감 그리고 몽롱함과 같은 것이 학보다 더 높은 어떠한 것”35이라는 주장에 대해 심각한 의심을 표명했고, 직관과 직접지에 기초하여 자신들이 “사물의 본질에 몰입할” 수 있다고 상상했던 셸링과 낭만주의자들을 조소했다. 기실, 개념화라는 매체로써 달성되는 측정과 정의를 무시한 결과, 그들은 무작위적인 내용과 자신의 욕망에 자신을 맡기는 데에만 성공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의식을 혼란케 하고, 이성을 버림으로써 신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 되어, 영면 속에서 신이 지혜를 계시해 줄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영면 속에서 실제로 얻고 창조하는 모든 것은 꿈에 불과한 것이다.”36
이러한 판단들은 피히테와 셸링의 직접적 이해와 직관에 대한 가르침의 진정한 아킬레스건을 겨냥한 것이었다. 헤겔은 그들의 체계에서 과학 및 엄밀한 과학적 사고 방법에 위험한 경향을 드러냈다. 피히테와 셸링의 지적 직관 이론에서 그[헤겔]는 합리주의적 형이상학에 대한 응답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논리적 검증과 철학적 지식의 구성이라는 원리 자체에 대한 반역을 정당하게 예견했다. 헤겔은 피히테와 특히 셸링의 견해에서 이 문제에 대한 기본 모순, 즉 철학을 과학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와 이를 실현하기 위해 선택된 방법 사이의 모순을 드러냈다.
헤겔은 피히테의 주관적-관념론적 지적 직관 이해의 터무니없음을 밝혀낸 비판에 있어 옳았다. 그는 또한 셸링의 지적 직관 학설의 기초로 되는, 절대자 안에서의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이 자기 멋대로인 영감의 신비적인 무규정성 속에서 인식의 엄격하고 정밀한 한정들과 형태들을 용해함을 입증한 데서도 옳았다. 개념 형성의 형태들에 대한 필요성, 그리고 특히 매개지와 직접지의 변증법에 관해 헤겔이 말하는 모든 것은 무엇보다도 탁월하다. 지적 직관 개념─철학적 낭만주의의 특징인─에 대한 헤겔 자신의 반대를 제시한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과 『철학백과』는 19세기 초 독일 관념론에서 진보적이고 반동적인 경향들을 규정하는 투쟁과 과정에서 중요한 이정표를 이룬다. 특별히 중요한 사실은, 헤겔의 비판이 변증법 철학에 대한 투쟁으로서 발전했다는 것인데, 이는 비록 피히테와 셸링의 경우에서와 같이, 변증법을 선호했지만 그럼에도 형이상학, 신비주의 그리고 주관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철학에 대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헤겔은 낭만주의적 지적 직관 이론에 맞서 끝까지 투쟁하지는 않았다. 피히테와는 대조적으로 객관적 관념론자였고, 야코비와는 대조적으로 변증법적 관념론자였던 헤겔은 체계와 방법 모두에서 여전히 관념론자였다.
헤겔의 중요한 업적은 그가 매개지의 발전 학설을 바탕으로 직접지와 매개지의 변증법을 발전시켰다는 사실에 있다. 그의 학설에서 쟁점으로 된 것은 구체적으로 매개지의 발전과 관련이 있었고, 직접성이 그에 의해 오직 결과로만 여겨졌는데, 이는 즉시 헤겔을 모든 형이상학적 인식의 구상뿐만 아니라 그의 학설을 모든 주관적 관념론의 우위에 서게 하였으며, 그의 인식론에 직관적이 아닌 논리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피히테가 『전 지식론의 기초(Grundlage der gesamten Wissenschaftslehre)』의 후기 판본에서 [단지] 경향적으로만 보였던 것이 헤겔에게는 명확하게 이해된 과제로 보였으며, 그것은 『정신현상학』에서 벌써 공식화되었다.
하지만 헤겔은 ‘매개’ 개념을 올바르게 풀어내지 못했다. 관념론자로서 [그가 창조한 것인] 이 개념은 오직 사유에 의한 사유의 매개, 개념에 의한 개념의 매개만을 반영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 매개의 뿌리는 물질적 실천에서 발견된다. 주어진 과학적 사고 수준에서 오직 과학 자체의 선행 발전과 이론적 사고의 범주들에 의해서만 매개되는 것처럼 보이는 과학적 학설들은, 실제로는 그것들에 의해서만 매개되는 것이 아니다. 최종적인 분석에서 그것들은 사회적 인류의 물질적 실천의 전체 발전, 즉 산업·기술·실험 등의 발전에 의해 매개된다. 그러나 매개의 분석을 매개의 모든 연결의 궁극적 기초로서 물질적 실천까지 가져가는 것은 오직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만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헤겔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특징인 매개 개념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었다. 바로 그 귀결로서, 직접지와 ‘지적 직관’에 대한 헤겔의 비판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고, 그가 검토한 학설과 관련해서만 부분적으로 타당함이 증명되었다.
헤겔은 직접지에 관한 한 자신과 피히테 및 셸링을 가르는 거리를 과장했다. 그는 셸링과 심지어 피히테의 학설이, 지식의 직접성 문제에 관한 자신의 해결책을 위한 길을 닦을 수 있는 경향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지 못했다.
피히테에 관해, 헤겔이 나타낸 부적합한 역사적 객관성은 쉽게 해명된다. 헤겔은 피히테 저작의 일부만을 알았다. 『전 지식론의 기초』의 후기 판들과 그의 초월론적 논리에 대한 강의들─과학 이론 체계의 매개적, 논리적 성격이라는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바로 그 피히테의 작품들─은 헤겔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는 주로 1794년판 『지식론(Wissenschaftslehre)』을 학습하였는데, 이 문헌에서는 지적 직관에 대한 주관주의적 견해가 특히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헤겔은 셸링에게서 발견된 비논리주의(alogicism)와 신비주의로의 경향을 정당하게 반박했다. 그러나 헤겔은 적어도 셸링의 직접지의 학설에서 이러한 경향이 단지 하나의 경향일 뿐이며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헤겔은 셸링이 말했던 직접지와 ‘지적 직관’이 지성 밖에 있는 것이 전혀 아니며 확실히 지성에 반대되어 놓인 것도 아니라, 오히려 지적인 인식의 특별한 형태 중 하나이며 다른 어떤 종류의 인식이 아님을 보지 못했다.(또는 심지어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셸링은, 적어도 그의 『초월론적 관념론의 체계(System des transcendentalen Idealismus)』, 『학문적 연구의 방법에 대한 강의(Vorlesungen über die Methode des akademischen Studiens)』 그리고 대화록 『브루노(Bruno)』를 집필하던 시기 동안에는, 일관되게 전혀 비논리적이지 않았다. 셸링은 그의 저작 중 가장 신비로운 작품의 하나인 『브루노』에서도 직관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인식이 전적으로 이성의 영역에 속한다고 강조했다. 셸링에게 있어 과제는 이성적 인식의 변증법에서 각 인지 기능의 연관성과 지위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셸링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성은 모든 것 안에서 발견되지만, 직관 안에서는 그것이 직관적인 것에 종속되고, 지성 안에서는 지적인 것에 종속된다; 그리고 만약 지성과 직관이 이성 안에서 절대적으로 하나라면, 연역에서 우리는 대전제에서는 상식에 해당하는 것을, 소전제에서는 직관에 해당하는 것을 가진다; 전자에서는 보편적인 것을, 후자에서는 특수한 것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지성의 관점에서는 분리되어 있고 결론에서만 이성을 위해 결합된다.”37
이 진술은 직접지의 본성에 관한 물음와 관련하여 그가 제공한 보편·특수·개별의 변증법의 독특한 유형의 정식화이다. 셸링의 설명에서 우리가 보듯이, 이러한 변증법들은 전적으로 이성의 한계 내에 갇혀 있다. 그의 ‘지적 직관’도 마찬가지이다. 이것과 합리성의 입장 사이의 차이는 그것이 우리를 지성과 논리의 한계 밖으로 데려간다는 사실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이 지성을 범속한 합리성의 유한한 제 규정보다 우월한 지위로 격상한다는 데 있다. 그것은 범속한 상식에는 양립 불가능하게 보이는 제 규정의 통일을 예견한다. 그러나 자신을 형이상학적 제 규정을 뛰어넘은 것으로서 격상한 뒤에도, 지성은 그 자체로 존재함을 멈추지 않으며, 직관 또한 ‘지성적인’ 것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과 셸링 사이의 차이점을 강조하려 하면서, 헤겔은 ‘지적 직관’ 개념을 반박했다. 그러나 그것을 거부하면서, 그는 자신이 이 개념에 얼마나 가까운지 보지 못했다. 그리고 기실, 헤겔의 변증법은 인식에서 일정한 리듬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매개의 길을 걸어가고 그것으로 자신을 풍부하게 한 후, 지식이 각각의 새로운 단계에서 다시 직접성을 획득한다는 사실로 구성된다. 각각의 더 높은 수준에서 그것은 직접적인 관조(immediate contemplation)로 복귀하지만, 그러나 그 안에는 마치 과거의 발전 과정 전체가 보존되어 있는 듯하다.
헤겔은 자신과 셸링 사이 차이의 실제 본질을 혼동했다. 이 차이는 결코 셸링이 지적 직관을 선언하고 헤겔이 그것을 부인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헤겔과 셸링의 실제적인 차이는 셸링처럼 지적 직관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직관이라고 부르지 않았던 헤겔이, 셸링보다 매개지의 발생, 직접성과 매개성의 통일에서의 매개의 변증법을 훨씬 더 강력하게 강조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셸링의 절대성, 즉 주체와 객체라는 대립물의 동일성에 대한 헤겔의 논평이 그토록 날카롭고 신랄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셸링에 따르면, 절대자는 인간 직관의 매개를 통해 달성된다. 셸링에 대한 헤겔의 논증이 지닌 합리적 의미는 명백하다. 헤겔은 셸링의 학설에서, 변증법을 박탈당하고 기원, 발전 그리고 생명을 배제한 죽은 동일성으로서의 절대자의 형이상학적 개념을 비난했다. 셸링의 철학은 절대자 안에서는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셸링은 이 단일하고 포괄적인 공준을 차별화하고, 지로 가득 찬 것과 대립시킨다. 그러나 절대자를, 속담대로라면 모든 소가 검다는 그러한 종류의 밤으로 파악하는 지는, 헤겔의 견해로는 “인식에서 공허함의 순진함”38이다. 그리고 이 비난을 셸링에게 던진 후, 헤겔은 그의 견해에 자신의 변증법적 관점으로 맞서는데, 그것에 따르면 “모든 것은 진리를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주체로서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으로 귀결된다.”3 여기서 “주체”는 지식 발전의 변증법적 과정을 위한 가명이다.
불행히도, 헤겔은 그의 변증법적 관점에서 비롯된 비판의 이 중요한 측면을 셸링의 지적 직관 이론에 대한 비판과 혼동하였다. 그는 자신의 철학조차 지적 직관 학설을 포함한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학설을 부정하는 데서 헤겔에게는 사변적 지가 배타적으로 직접지가 아니며, 그 운동의 각 단계에서 그것이 선행적 매개들의 결과를 구성함을 입증하는 것으로 충분해 보였다. 셸링과 헤겔 사이의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직접지에 관한 그들의 학설에서, 셸링과 헤겔은 둘 다 객관적 관념론자들이다. 그러나 헤겔은 셸링에 변증법을 더한 것에 반해, 셸링은 헤겔에게서 변증법을 뺐다.
헤겔이 셸링에 대한 비판 전체를 구축했어야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차이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객관적 관념론에 부합하지 않는 지적 직관에 대한 일관성 없는 비판으로, 비판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제 셸링이 ‘지적 직관’이라는 말로서 실제로 염두에 두었던 뇌의 직관, 이성의 사변적 이해를 개념화하지 않은 채, [그에게서 찾을 수 있는] 비논리적 직관, ‘본능’, 낭만주의자들의 ‘영감’을 개념화하였다. 이 비판은 슐레겔과 슐라이어마허를 대상으로 할 때는 완전히 정당화되지만, 셸링에 관해서는 실질적으로 그 타당성이 상당히 떨어진다.
헤겔은 변증법적 관념론이 [정립]할 수 있는, 직접지에 관한 가장 심오한 사상들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의 결론에 대한 관념론적 기초의 허위성은 문제의 많은 측면에 관한 그의 견해를 무가치하게 만들었고, 또한 철학사적 측면에서 그 방향을 왜곡시켰다. 그럼에도 직접지의 본성, 지위 및 가치에 관한 문제의 해결에서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그의 모든 분석과 특성화에 있어 엄밀한 과학으로서의 철학이라는 개념, 논리적으로 검증된 지식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엄밀한 과학적 접근이라는 정신은 야코비와 하만, 낭만주의자들과 셸링에 맞선 그의 투쟁에 스며들었다. 이 투쟁 과정에서 헤겔이 저지른 모든 과장은 같은 근원─과학적 체계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진 철학의 기초와 권위를 훼손할 수 있는 어떠한 것에 대한 부정─을 가졌다. 그러나 헤겔은 직접지의 문제를 탐구한 부르주아 계급의 마지막 철학자는 아니었다. 헤겔 이후 19세기와 20세기의 수많은 철학 저술가가 이 물음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부터, 사회-역사적 조건들은 직접지 개념이 독일 고전 관념론에서 발생했을 때 획득되었던 조건들과 완전히 달랐다. 1848년 프랑스에서의, 그리고 독일의 혁명들은 부르주아의 철학적 발전에서 진보의 그 어떠한 가능성에도 종지부를 찍었다. 부르주아의 위협적이고 강력한 적수─자본주의 체제에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하는 노동계급─의 출현은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특히 그들의 철학에 어마어마한 변화를 가져왔다. [부르주아 철학에서] ‘혁명의 대수학’─변증법─에 대한 필요는 사라졌다. 이성에 대한, 합리적 인식에 대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학 자료와 합리적 사고의 형태들에 기초한 유물론적 세계관에 대한 그것의 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지식에서 그리고 인식 방법에서의 ‘합리주의’는, 위험한 혼란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매우 제한적인 사고방식으로 [재]선언되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특히 이성과 그 전능함에 대한 믿음이 (자본주의!) 사회에 위험한 노력, 즉 사회사에서 발전의 법칙들을 이해하려는 노력, 사회생활의 기둥들─사유재산과 그 위에 건립된 부르주아 법률과 도덕, 그리고 그 권위를 이용하여 이 법률과 이 도덕을 신성하게 선언한 종교를 편견 없는 비판적 검토에 종속시키려는 노력을 낳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과학적 세계관 대신 종교적 세계관이 제공되었고, 합리주의 대신 비합리주의가 제공되었으며, 논리학 대신 비논리주의가 제공되었고, “부정”(혁명적·비판적) 철학 대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긍정” 철학이 제공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9세기 중반부터 독일 부르주아 철학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이미 1820년대 초부터 독일에서는 부르주아 철학의 이러한 전환을 선언할 운명의 사상가가 등장했다. 바로 쇼펜하우어였다.<끝>
번역: 한동백 | 집행위원
2025년 8월 19일
- 야코비에 관한 논의는 Voprosy filosofii, 6, 1957.에 실린 논문인 „Uchenie o neposredstvennom znanii v istorii filosofii novogo vremeni[현대철학사에서 직접지의 학설]“를 참조하라.

- G. W. F. Hegel, Werke, Bd. 2, Vollständige Ausg. durch einen Verein von Freunden des Verewigten, Berlin: Duncker & Humblot, 1832, 6.

- Ibid.

- Ibid.

- 〔역자주〕 G. W. 라이프니츠에서 시작되어 C. 볼프에서 정점에 달했던 18세기 독일 합리주의 철학의 지배적인 유파.

- G. W. F. Hegel, Werke, Bd. 10, Teil. 1, Vollständige Ausg. durch einen Verein von Freunden des Verewigten, Berlin: Duncker & Humblot, 1835, 17.

- Ibid., 17-8.

- G. W. F. Hegel, Werke, Bd. 6, Teil. 1, Vollständige Ausg. durch einen Verein von Freunden des Verewigten, Berlin: Duncker & Humblot, 1840, 134.

- Ibid.

- Ibid., 138.

- Ibid., 139.

- G. W. F. Hegel, Werke, Bd. 7, Teil. 3, Vollständige Ausg. durch einen Verein von Freunden des Verewigten, Berlin: Duncker & Humblot, 1845, 353.

- Ibid., 355.

- Ibid., 320.

- Ibid., 321.

- Ibid.

- G. W. F. Hegel, Werke, Bd. 15, Vollständige Ausg. durch einen Verein von Freunden des Verewigten, Berlin: Duncker & Humblot, 1836, 549.

- Ibid.

- Ibid.

- G. W. F. Hegel, Werke, Bd. 12, Vollständige Ausg. durch einen Verein von Freunden des Verewigten, Berlin: Duncker & Humblot, 1835, 31.

- Ibid., 37.

- Werke, Bd. 10, Teil. 1, 1835, 13-4.

- Ibid., 37.

- Werke, Bd. 7, Teil. 3, 1845, 320-1.

- Werke, Bd. 6, Teil. 1, 1840, 135.

- Ibid., 137.

- Ibid.

- Ibid., 133.

- Werke, Bd. 15, 1836, 547.

- Ibid., 549.

- Ibid., 544.

- Werke, Bd. 6, Teil. 1, 1840, 134.

- Werke, Bd. 2, 1832, 7.

- Ibid., 8.

- Ibid., 9.

- Ibid., 10.

- F. W. J. Schelling, Sämmtliche Werke, Bd. 4, Teil. 1, Stuttgart: J. G. Cotta, 1859, 300.

- Werke, Bd. 2, 1832, 14.

- Ibi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