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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적 모순과 그것의 해소: 변증법적 논리의 중심 문제에 관하여」 『총명한 유물론』 제2집 가을호
“Dialectical Contradiction and Its Solution: Concerning the Central Problem of Dialectical Logic”, Philosophy in the USSR: Problems of Dialectical Materialism, Moskva: Progress Publishers, 1977, 134-56.
A. S. Bogomolov | 구 소련 유물론 철학자·논리학자
✮ 1. 지식의 발전, 그리고 부정·모순
✮ 2. 과학 지식 발전에서 모순을 해소하는 몇 가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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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모순 문제만큼 오해와 상호 이해 부족에 시달리며 장기간에 걸쳐 끊임없이 논쟁을 야기하는 변증법의 문제는 없을 것이다. 변증법적 논리학의 개념을 옹호하는 자들 사이에서도 이에 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반대자들에게 있어서는, 칼 포퍼와 같은 유명한 철학자가 내놓은 견해가 시사적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두 항의 서로 모순되는 진술을 결합한 진술은 순전히 논리적 근거에 따라 항상 거짓으로서 기각되어야만 한다.”1
나는 이 인용문을 포퍼의 널리 알려진 『변증법이란 무엇인가?(What Is Dialectic?)』에서 의도적으로 가져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대 형식 논리의 견지에서 보더라도 극히 전형적이면서도 잘못된 견해를 명확히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특별한 비판적 목표도 설정하지 않고, 형식 논리에서 모순율이 실제로 무엇을 금지하는지, 그리고 왜 ‘변증론자들’이 서로를 부정하는 진술들, 즉 상호 모순되거나 대립적인 진술들로 구성된 진술이 전적으로 논리적 근거에 의해 항상 거짓으로 기각되어서는 안 되며, 실제로 감히 기각될 수 없다고 단언하는지에 관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하겠다.
1. 지식의 발전, 그리고
부정·모순
부정에 대한 형식 논리적 연구는 오래전에 일상 언어에서 ‘нет’이라는 소사(小詞)로 표현되는 부정의 기호가 수많은 숨겨진 함의를 가질 수 있으며, 다양한 논리 체계에서 이 의미를 엄격하게 정의하고 서로 구별해야만 함을 밝혔다. 따라서 고전 논리에서는 하나의 부정이 있음에 반해, 다치(多値) 논리에는 하나, 둘, 셋 또는 그 이상의 부정형(否定形)이 있을 수 있으며, 구조 논리는 부정형의 완전한 계층 구조를 허용하며, 부정형 간 차이는 그 적용 영역과 강도에 따라 달라진다. 고전 논리에서 참인 판단의 부정은 거짓 판단을 낳는 데 반해, 다치 논리에서 거짓 또는 무규정적 판단을 낳을 수 있다. 이는 모순율이나 배중률과 같은 사유의 ‘절대’ 법칙의 지위에 변화를 야기한다. 따라서 이것들은 고전 논리에서 동어반복이다. 즉, 이것들은 ‘논리적 진리’의 지위를 갖지만, 일부 종류의 다치 논리에서는 상황이 상당히 다르다. 배중률은 모든 다치 논리에서 동어반복이 아니며, 모순율도 일부 다치 논리에서 동어반복이 아니라는 식이다.
그래서 “가장 단순한” 논리 연산조차 면밀히 조사해 보았을 때는 상당히 복잡한 것으로 밝혀지게 되는 것이며, 이 복잡성은 주어진 연산을 통해 형식 논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현실 속의 객관적 관계의 엄청난 다양성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 작업에는 적어도 두 가지 특수한 추상화가 포함되어야 하며, 이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모순 문제를 이해할 수 없다. 첫 번째 추상화는 모든 연산을 이 연산이 수행되는 사유 형식의 불변 관계와 불변 내용의 영역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이 추상화가 필요한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형식화 자체, 즉 상징을 통해 관계·내용·연산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이는 표현하는 내용의 불변성, 즉 안정성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파생된 두 번째 추상화는 형식 논리를 수화(手話) 체계(‘수화 언어’)의 영역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이는 조사를 사고의 표현 영역인 언어에 국한시킨다. 그러나 언어가 실제로 “사유의 직접적인 현실”2이기는 하더라도, 그것이 사유의 유일한 현실이었던 적은 없다. 사유의 또다른 중요한 현실은 인간 실천과 그 결과이다. 이 사실은 오래전부터 인간의 상식에 의해 확립되었고, 군중의 지혜로서 복음서의 말씀으로 기록된 바 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3 또는 당신이 ‘미주리의 논증(Missouri argument)’을 선호한다면, “어떻게 만들라고 말하지 말고 직접 만들어라!”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다소 쉽고 간단한 사고는 현대 철학자들에 의해 종종 잊혀지기도 하지만, 철학에서 그것의 적용은 지식 이론에 엄청난 전망을 제시하는데, 이는 그것이 실천[에 대한 탐구]을 포함해야 할 필요성을 함의한다. 이는 철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위대한 공헌이었다.
논의에 들어선 문제와 관련하여 이는 그것[실천]에 대한 특수한 추상화 없이는 전혀 상상할 수 없을 것인 형식 논리는 인식론적 탐구의 유일한 기초와 장치의 역할을 차지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형식 논리는 필요한 것이지만, 불충분한 것인데, 인식론적이고 이론적인 인지 탐구를 하려면 더욱 심오하고 일반적인 사고 과학이 필요하다. 그러나 과학이 바로 변증법적─혹은 철학적, 이론-인지적─논리이다.
변증법적 논리의 일반적 특성은 형식 논리와 관련하여 다음으로 규정된다: 1. 사고의 불변적 변환(invariable transformation)의 법칙과 형식에 관한 과학으로 취급될 수 있는 형식 논리와는 달리, 변증법적 논리는 전체로서의 사유, 특히 내용이 변화하는 사고에 관심을 둔다. 상수는 변화의 극단적인 경우─변화가 0인─이므로, 형식 논리는 변증법적 논리의 극단적인 경우로 된다; 2. 변증법적 논리는 인간 사고의 현실의 총체, 즉 실천을 주제로 한다. 후자의 특수한 경우는 언어적 실천이다. 이와 관련하여 형식 논리 역시 변증법적 논리의 특수한 경우로 된다; 3. 자연히, 변증법적 논리는 인간의 실천 활동을 직접 연구하는 과학, 즉 실천학으로 간주될 수 없다. 이는 인간의 실천 활동을 연구하는 과학적 지식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 지식에는 형식 논리가 포함된다. 따라서 변증법적 논리가 연구하는 현실의 ‘모델’은 오늘날의 형식 논리에서처럼 언어가 아니라, 그것의 발전 과정과 결과의 다양성 속에서 출현하는 과학적 지식이다.
이는 부정과 모순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다치 논리, 직관주의 논리 및 구조 논리에서의 부정의 복잡한 연산을 당분간 무시한다면, 우리는 형식적-논리적 부정이 객체의 종류(집합)들의 극단적인 외연적(용적) 관계들을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종류들은 필연적으로 용적과 내용에 있어 변하지 않는 상수로 이해된다.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부정의 두 가지 형태, 즉 무규정적인 것(~A)과 규정된 것(~A=B)을 알아두는 것이 중요하다. 후자는 다시 특수한 규정적 부정(~A=oB) 또는 규정적 부정 일반(~A=eB)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이를 다이어그램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부정이며, 모순율과도 서로 다른 관계에 있음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따라서 무규정적 부정 또는 규정적 부정 일반과 진술의 결합은 허용되지 않지만, 진술과 특수한 규정적 부정의 결합은 허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A가 “단맛”을 의미한다면, 그 무규정적 부정은 “단맛이 아닌 것”이 되며, 규정적 부정 일반은 “쓴맛”이 된다. 어떠한 대상은 단맛과 단맛이 아닌 것, 단맛과 쓴맛의 속성을 결합할 수 없다. 그러나 “단맛”의 특수한 규정적 부정, 예컨대 “흰색”(흰색은 달지 않은 것)은 양립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산이 부정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단맛-쓴맛” 또는 “단맛-흰색” 쌍은 긍정 술어의 비교로서, 형식 논리에서 매우 흔하고 잘 알려져 있으며, 그것은 양립 가능한 개념과 양립 불가능한 개념을 나타낸다. 긍정 술어를 부정으로 번역하는 것은 불필요한 어려움을 야기하는데, 그것은 설탕은 설탕이고 단맛은 단맛(즉, 흰색이 아닌 것)이며, 하나는 다른 하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 프랜시스 브래들리(Francis Bradley)의 ‘지성주의(intellectualism)’의 입장을 채택함을 의미한다. “브래들리 씨는 설탕이 어떻게 달콤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어려움을 겪는데, 지성주의는 그 자체를 앞지르며 공공연히 일종의 언어주의로 변질된다.”4 하지만 브래들리에 대한 제임스의 통찰력 있는 비판은 결국 논리에 대한 그의 공개적으로 솔직하며 완전한 거부로 끝맺었다. 그러나 형식 논리학자들에게 그것은 그들의 탐구를 확립된 범위와 내용을 가진 고정된 개념으로 제한하고 그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변증법적 논리에서는 이 부정형의 상호 관계, 즉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의 이행(transition from one to the other)이 장면을 지배한다.
다시 말해, 두 객체─객체의 종류 또는 집합─의 관계에 대한 탐구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형태로 표현되는 두 객체 간 구별을 확립하는 것으로서 시작하며, 이는 상호 부정(A와 ~A)을 통해 표현된다. 다르게 말한다면, 두 번째 객체는 처음에는 첫 번째 객체의 단순 부정으로 작용하며, 논리적으로는 자연스레 그것의 무규정적 부정으로 표현된다. 이 경우,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의 이행은 탐구 중인 현상의 경험적 자격(empirical qualification)을 명시하거나 밝힘으로써 발생한다. 헤겔은 이러한 개념의 발전을 해명하면서 절대적 구별에서 본질적 구별(다양성)로, 그리고 여기에서 대립(반정립)으로의 이행을 동일성에서 구별, 구별에서 모순으로 나아가는 일반적 경로의 단계 중 하나로 보았다.
이 흔한 예는 형식 논리적 모순이 항상 어떤 식으로든 ‘소거’되어야 할 논리적 오류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변화, 지식의 발전, 사고 내용 발전의 관점에서 볼 때, 모순은 이러한 발전에서 출발점으로, 지식 발전의 단계로, 그리고─가장 중요한 것은!─인지 활동을 더욱 촉진하는 원동력으로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모순은 모든 경우에서도 우리 진술의 거짓을 나타내는 징후로서 간주될 수 없다. 우리가 모순에 직면하게 되면, 우리는 먼저 이 모순에서 무엇이 도출되는지 알아내야 하는데, 이는 결코 형식적인 물음이 아니다.
명료하게 설명하기 위해 잘 알려진 예를 들어보겠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초기 진술 중 소위 제5공준을 포함하는데, 이는─그 극도로 복잡한 공식을 인용하지 않고서도─“동일한 평면상 한 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면서 이 직선에 교차하지 않는 직선은 오직 하나뿐”임을 효과적으로 말한다. 이 진술을 A라고 하겠다. 논리학에서 부정 연산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A의 부정을 공식화하고 “동일한 평면상 한 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면서 이 직선에 교차하지 않는 직선은 하나(즉, 하나 이상)도 없다”고 주장하도록 한다. 이는 진술 ~A이다. 전통적인 견지에서 모순율은 A와 ~A는 양립할 수 없으므로, 첫 번째 진술과 두 번째 진술 중 어느 하나만이 진리여야 함을 승인하도록 강제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A가 참임을 알고 있으므로(유클리드 기하학은 비모순적임), ~A는 거짓일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제5공준을 증명하고 그 부정을 논박하려는 시도가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왔으며, 그 결과 아무도 제5공준을 증명할 수 없었다는 잘 알려진 결론이 도출되었다.
이런 방향으로 추론한 수학자와 철학자들은 제5공준의 부정을 반박하려 하는 자신들의 시도가 형식 논리에서 불변의 법칙, 즉 모순율에서 출발했다고 가정하였는데, 이 규칙은 모순을 제거하려면 반대되거나 모순되는 판단 중 하나만을 참으로 승인해야만 한다고 명령한다. 하지만 기하학이 더욱 발전하면서 유클리드 기하학의 제5공준 외에도, 동일 평면상 직선 위에 있지 않은 한 점을 지나면서 이 직선과 교차하지 않는 직선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 그려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또다른 기하학이 가능하다는 ‘광기’의 이론이─로바쳅스키 기하학─출현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 또한, 주어진 직선 밖의 어떤 점을 지나더라도 동일 평면상에서 그 직선과 교차하지 않는 다른 직선은 그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부정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리만 기하학에 도달한다. 이 기하학은 다시 두 번째 직선이 첫 번째 직선과 두 점에서 만나는 구면 기하학과, 한 점에서 만나는 타원 기하학으로 나뉜다. 리만 기하학의 경우 유클리드 기하학의 다른 공리들을 재구성해야 하지만, 로바쳅스키 기하학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최근래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창안한 기하학자들의 추론을 재현해 보도록 하겠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형식 논리의 모순율을 무시하는 것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다만!) 주어진 사례에서 모순율이 “작동”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제5공준이 있는 기하학의 참이 제5공준의 부정의 참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정당하게 가정하면서 그렇게 하였다. 하지만 제5공준의 “무규정적 부정”은 여전히 그것을 대체할 진술의 구체적인 공식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 하나(즉, 하나 이상)의 직선은 없다 …”라는 공식은 “… 임의 개수의 직선은 …”이라는 공식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사용해 온 용어로 이는 “규정적 부정”이 될 것이다. 이 부정은 다시 새로운 규정적 부정, 즉 “… 다른 직선은 없다 …”라는 진술로 이어진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모순율이 우리 추론의 출발점에서 “작동”하지 못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기실, 순전히 제5공준과 그 부정(규정적 부정!)은 서로 다른 기하학적 체계에서 참이라는 것인데, 유클리드 기하학이 참임을 전제로 둘 때 이들의 공존은 단호히 거부되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모순율의 절대적 권위 때문인데─모순율은 두 개의 서로 모순적인 진술의 결합을 순전히 논리적 근거에 따라 거짓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인식론적 분석의 문제가 야기되자마자 형식 논리가 이미 해결된 과학적 문제와 관련해서만, 그리고 모든 세부 사항이 철저히 명확해지고 정의된 진술에 대해서만 판단을 내린다는 점은 끊임없이 ‘잊혀졌고’, 지금도 여전히 ‘잊혀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개념의 정교화와 과학적 문제의 해결이 우리 지식의 부적합성이나 불완전성으로 생성된 모순을 없애고자(제거) 하기 위한 경험적 또는 연역적 절차로서 과학적 지식[활동]의 평상적인 작업이므로, 과학은 어떠한 ‘변증법적 논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이는 형식 논리의 모든 ‘옹호자’, 즉 올바른 사유에 관한 유일하고 포괄적인 과학으로서 형식 논리의 지위를 옹호하는 것이 신성한 의무라고 믿는 사람들의 입장 아닌가? 칼 포퍼가 “모든 비판은 모순이나 불일치를 지적하는 데 있으며, 과학적 진보는 대체로 모순이 발견되는 곳에서마다 그 모순을 없애는 데 있다”5고 강조해서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아니,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모순을 발견하고 이를 없애는 것은 원리적으로 참으로서 받아들여진 다른 이론 및 이론의 일부와 일치시키기 위해 그 이론이나 그 일부에 수행되는 형식적 작업을 수반한다. 만약 우리가 여기에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서로 모순적인 이론(또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이론과 모순되는 이론)을 제거하고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라는 개념을 광기에 찬 작자의 헛소리로 여겼던 사람들이 기하학에서 권장하였던 절차에 마주하게 되는데,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것은 그저 ‘광기의 이론’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이 용어는 닐스 보어 덕분에 과학에서 매우 긍정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자의 견해는 칼 포퍼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표현된다: “… 과학적 절차는 모순이 허용될 수 없으며, 모순을 피할 수 있다는 가정에 따라 진행되는데, 그러므로 모순이 발견되면 과학자는 이를 제거하기 위해 모든 시도를 해야 한다.”6 이와는 대조적으로 변증론자는 과학적 진보의 과정에서 모순이 필연적으로,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식으로 발생한다고 주장하며, 과학자는 모순이 발견되면 이를 피하거나 없애는 게 아니라 그것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꾸어 말하면, 형이상학자, 즉 형식 논리를 절대화하고 과학의 모든 절차를 관찰의 형식 논리적 처리 또는 공리들로부터 가능한 모든 결론의 형식 논리적 추론으로 축소하는 자는 모순에서 질병의 징후를 보고 그 질병을 치료하고 제거하기 위해 이 증상을 치료하며, 만약 질병이 사라지지 않으면, 아아, 병자는 사라져야 한다. 변증론자는 모순을 통해, 모순 속에서 고통받는 자가 새로운 자로 거듭날 수 있는 유익한 위기의 징후를 읽는다. 또는, 다른 비유를 들자면, 아름다운 나비가 나오는 번데기의 파괴를 들 수 있다. 형이상학적으로 모순을 항상 오류의 결과이자 징후이다. 변증론자에게 있어 (물론, 발견하고 바로 잡아야 할 실제 실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면) 모순은 성숙한 변화의 징후이자 지표이며, 이론을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키는 질적 변화의 징후이다.
형이상학자의 입장은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언급하지 않은 또다른, 형식 논리의 특수한 추상화에 기반을 둔다. 이러한 추상화는 형식 논리가 적용되기 전에 범위와 내용 모두에서 완전히 확립된 완전한 개념과 관계를 요구한다는 사실로 성립된다; 그것이 처리하고자 하는 자료는 정의상 적어도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거나 고정된 내용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는 지식의 발전 과정을 무시하는 매우 강력한 추상화이다. 더 높은 차원의 지식을 표현하기 위해 형식 논리는 새로이 진화된 불변의 법칙을 요구하지만, 주지하듯 형식 논리는 스스로 그러한 법칙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이를 위해 우리는 과학적 지식을 발전시키는 다른 모든 수단, 즉 경험적 연구(empirical research), 가설 제시(proposing of hypotheses), 과학적 직관(scientific intuition) 등을 적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 내용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과학적 지식의 발전에 대해 변증법적 논리가 제시하는 가설은, 이러한 발전이 과학의 일반적 진보 속 ‘결절점(nodal points)’에서, 특정 법칙에 따라 발전하는 이론의 ‘경계선(at the borderlines)’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모순들을 해결함으로써 진행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이론에서 이전 이론의 모순은 ‘제거’되지 않고, 헤겔적 의미에서 “지양(aufheben)”7되는 것인즉 긍정적 내용은 보존되고, 더는 그것은 [지양 전의] 논리적 모순의 초기 형태로 현상하지 않는다. 이 개념은 헤겔에 의해 정식화되었으며, 현대 과학에서는 ‘대응 원리(correspondence principle)’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더 일반화된 형태로서는, 주어진 객관적 영역에 대해 정확성이 확실하게 입증된 이론들은 그에 대해 새로운 더 보편적인 이론이 등장하자마자 거짓으로 버려지지 않고, 새로운 이론의 극단적인 경우로서 이전 영역에 대해 그 의미를 유지함을 말한다. 나아가 우리는 이 대응 원리가 모순 문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제 우리는 가설이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는지, 어떠한 이론적 근거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에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모순의 해소가 지식 발전의 수단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세 가지 근본 명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1. 20세기에 들어 형식 논리는 (형식 논리의 범위 내에서!) 두 항의 서로 모순되는 진술로 구성된 진술은 순전히 논리적 근거에 따라 항상 거짓으로 기각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상당히 개선하였다. 개선의 목적은 새로운 테제를 제시함에 있었다: 모순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데, 즉 모순되는 두 가지 진술로부터 무한한 수의 진술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형식 논리에서 이는 모순으로부터 아무것도 추론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변증법적 논리에 의거한다면 두 항의 모순되는 진술이 결합된 진술은 형식적 근거에 따라서는 폐기될 수 없는데, 이 진술은 그 형식적 모순 너머에 있는 본질적 모순이 발견되기 위해 연구되어야 한다. 모순으로부터 무엇인가가 도출될 수 있는 한─참 또는 거짓─주어진 모순의 의미 영역을 제한하여 (형식적 의미가 아닌!) 참인 진술을 함축하도록 하는 게 가능하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는 변증법적 논리가 답해야 할 물음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변증법에 관한 레닌의 정의가 특히 의미심장하다: “변증법은 반대되는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이 동일한 것으로 될 수 있는지(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보여주는 가르침이다. … ”8
2. 이러한 점에 대한 변증법적 논리의 핵심 명제는 다음과 같다: “ … 모순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이 진술에서 유일하게 옳은 것은 모순으로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9─모순은 반드시 해소되어야만 한다. 이 진술은 헤겔과 마르크스를 비난하는 수많은 사람이 믿고 있는─그들 변증법의 절차가 모순을 찾아내고 이를 영속시키는 것이라는 주장을 확고히 반박한다. 안타깝게도,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는 헤겔과 마르크스주의 고전들이 모두 모순의 중요성과 풍부함을 인정하고 과학자들에게(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자신들인) 이러한 모순들을 감추지 않고 발견하는 능력을 요구했음을 이유로 들며, 저 기묘하고 근거 없는 견해를 공유한다. 과학에 대한 그들의 주요 공헌이 사회 발전에의 분석이었으므로, 그것은 대체로 이 발전에서의 모순, 그리고 무엇보다도 계급모순을 폭로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러나 헤겔과 마르크스의 저작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자라면 두 철학자 모두 계급모순의 보존과 영속을 요구하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모순이 해소되어야 함을 요구하였다. 헤겔은 궁극적으로 대립물의 화해에서 그 해결책을 보았음에 반해, 마르크스는 사회에서의 이 "대립물의 투쟁"인 계급투쟁을 프롤레타리아 혁명, 프롤레타리아 독재 및 공산주의 사회 건설까지 추진하는 데서 그 해결책을 보았다. 물론, 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단 한 가지 유형의 모순─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인 모순만을 승인하고, 이를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 즉 혁명적 폭발만을 승인했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모순 문제에 관한 모든 마르크스주의적 연구─그리고 많은 연구가 쓰여진─는 이 사실을 입증한다.
3. 헤겔은 그의 저서 『정신현상학』에서 참과 거짓은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므로, “모든 거짓에는 참이 존재한다”는 표현을 기름과 물과 같이 서로 섞이지 않고 단지 외적으로만 결합된 것처럼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정확히 우리는 완전한 타자성의 양상 또는 계기를 지정하고자 한다는 것만으로, 타자성이 상쇄되고 초극된 자리에서 ‘참’과 ‘거짓’이라는 용어를 더는 사용하여서는 안 된다. 마치 ‘주체와 객체의 통일’, ‘유한과 무한의 통일’, ‘존재와 사유의 통일’ 등의 표현이, 주체와 객체 등이 그들의 통일 밖에서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때 어설퍼지는 것처럼, 그 통일의 안에서 그 표현 자체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그것들이 의미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거짓은, 거짓으로서, 더 이상 진리의 한 계기가 아니다.”10 이 인용문은 두 가지 측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첫 번째는 반대되는 진술의 결합, 즉 모순(참과 거짓, 특히 형식 논리의 용어로서 A와 ~A)의 해소가 그것들의 종합(synthesis)이라는 진술인데, 종합에서 본래 진술은 더는 초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이 상황은 형식 논리에서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것이며, 그것은 사실상 동일률을 위배하는 것이지만, 현대 과학과 현대 철학에서는 흔한 일이다. 마르크스주의 문헌에서 ‘양질 전화의 법칙’으로 알려진 이것은, 어떤 측면에서 영어권 세계의 ‘창발적 진화’ 개념을 연상시키는데, 이 개념에 따르면 초기 요소들의 결합으로 발생하는 새로운 존재는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요소들의 합보다 “더 클” 뿐만 아니라, 요소들 자체도 이 새로운 존재의 일부로서 본질적인 변화를 겪고 그것에 의존하게 된다. 인지에 적용된 이 테제의 인정은 형식 논리─보편적인 인지 방법이라고 일컬어지는─가 그러한 종합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데서 난점에 부딪히게 하였는데, 왜냐하면 형식 논리는 결합된 진술의 의미가 일정해야 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때 형식 논리는 완전히 옳지만, 그것은 오직 위에서 언급한 자체의 추상화에서 출발하는 한에서만 그렇다. 따라서 이러한 추상화를 상쇄하려면 새로운 논리, 즉 변증법적 논리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언급해야 할 두 번째 측면은 참과 거짓의 상관관계인데, 이는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형식 논리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고전 논리에서)인 A와 ~A로 표기된다. 이런 식으로 보면, 한쪽은 단순히 ‘참’이고 다른 한쪽은 ‘거짓’일 뿐이다. 그러나 이 마니교적 쌍은 실제 삶에서, 즉 지식의 실제 발전 과정에 있어서는 본질적이지 않으며 단, 서로 대립하는 본질로 변형될 뿐이다. 반대되는 명제의 결합은 순전히 논리적 근거에 따라 거짓이므로 기각해야 한다는 형식 논리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마니교적 형이상학의 입장에서 출현한 것이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를 넘어섬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11 물론 이런 입장은 가능하다만, 기초적이고 극단적인 경우에나 가능하다.
이외에도 자세히 고려할 만한 점은, 이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결책과 헤겔주의적 해결책 사이의 관계이다. 마지막 두 가지 요점을 내가 헤겔의 변증법에 제시된 대로 정확하게 정식화한 것은 단지 우연이 아니었다. 헤겔은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을 주장할 때, 사유의 운동을 존재와 일치시키는 데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그는 마르크스가 말했던 바, “자기 자신을 자기 안에서 종합하고, 자기 자신 속으로 그것을 더욱 깊이 펼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발전하는 사유의 결과로 현실을 이해한다는 착각에 빠졌기”12 때문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현실의 차별화되고 분지화된 구조를 동등화하여 훨씬 더 복잡하고 심오하고 동시에 더 엄밀한 인간 인지의 청사진을 구축하는데, 이는 우리 정신에 ‘낯선’ 분해와 분지, 그리고 ‘광기의’ 조합을 제공한다. 이것들은 과거의 경험, 축적된 지식, 그리고 편견의 힘을 지닌 습관적인 사고방식의 각인을 지닌 이 마음에 의해 필연적으로 기입되며, “순전히 논리적인 근거에 따라” 제거되어야 하는 형식적-논리적 모순으로 기입된다.
이러한 표상과는 대조적으로, 변증법은 한편 형식 논리 체계의 패턴으로 모델링될 수 없는 현실의 무한한 복잡성을 주장함으로써 사유하는 정신의 그러한 편견을 흔든다. 예를 들어,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이 한때 발전시키려고 시도했던,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와 같은 체계가 있다. 반면에, 절대적 상대주의, 회의주의, 그리고 비합리주의적 ‘변증법’이 변증법과 비합리주의, 변증법과 신비주의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체계는 과학에서 가장 빈번히 마주치는 모순들을 해소하고, 이러한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장치들을 마련하고자─항상 과학적 지식의 발전에 의지하는 동시에 과학의 대상이 지닌 실제 모순을 발견하고, 기존 이론의 모순에 이를 반영하며, 새로운 이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탐색에 과학의 지향점을 두려 노력한다.
오늘날 이러한 경향은 변증법을 주관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철학자 사이에서 점점 더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으며, 심지어 과학적 방법론 연구의 기초로 헤겔 논리학─“단순히 쓸모없을 뿐만이 아니라 과학 이전, 심지어 논리 이전 사고방식의 전형인”13─을 수용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권장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연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에의 ‘전복’, 즉 반영 이론에 기초한 유물 변증법의 방법으로의 이행은14, 그러한 ‘연민’의 합리적 근거를 박탈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서 특히 더 중요한 것은, 다시 한번 말하자면, 그러한 저자들이 우리의 주장을 암묵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저자는 비록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칼 포퍼의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1935, 1959년 영어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잘 알려진 저작의 근본적인 기획상은 과학적 발견, 즉 과학적 지식의 창조적 발전에 있어서 결정적 계기가 그 어떠한 공식적인 절차도 가지지 않고 일어난다는 것이다. 단언하건대, “모든 발견이 베르그송의 의미에서 ‘비합리적 요소’ 또는 ‘창조적 직관’을 포함한다”는 포퍼의 긍정적 해결책은 확실히 신비주의자의 황홀감에 빠진 직관에 나타나는 인식으로서 바로 그 “과학 이전, 심지어 논리 이전” 단계의 예이며, 그 단계와 베르그송의 “창조적 직관” 사이의 친연성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의 저자에 의해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이 확립되었다.
이제 아브라함 프렝켈(Abraham Fraenkel)과 여호수아 바-힐렐(Yehoshua Bar-Hillel)의 『집합론의 기초(Foundations of Set Theory)』를 또다른 예로 살펴보겠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모순의 기능은 논리와 수학의 연역적 체계를 통제하고 제한하는 것이며, 실험의 기능은 물리학과 천문학과 같은 과학의 반연역적 체계를 통제하고 수정하는 것과 같다.”15 그러나 사람들이 이율배반을 우리로 하여금 다른 더 안심을 주는 기초를 찾도록 강제하는 재난으로 보든, 아니면 반드시 치료되어야 할 (반가운) 질병의 징후로 보든, 어느 경우든 해결은 “어떤 면에서 관습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의 벗어나야 함…”을 요구하는데, “비록 이 이탈이 어디서 발생해야 하는지가 결코 명확하게 결정돼 있지는 않다.”16 변증법적 논리는 바로 이러한 “관습적 사고방식으로부터의 벗어남”을 권장한다.
오늘날 저명한 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알론조 처치(Alonzo Church)가 “집합론의 이율배반은 궁극적 해결책을 향한 진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왜냐하면 이 이율배반은, 수학에서 집합을 활용하는 데서 과거의 진부하고 ‘발생론적인(genetic)’ 방식이 집합론을 위한 공리적 기초[에 관한 이해]로 전환되게 하는 것을 강제했기 때문이다”17라고 썼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정확히 이율배반이 우리가 설명한 이론의 변증법적 모순들과 연관된 모든 속성들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과거 이론의 ‘경계선’에서 발생하며, 그 해결책은 새로운 이론을 산출하는데, 그 새로운 이론 안에서 선행 이론의 이율배반은 제거되거나 실수로서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상쇄’되고, 지양되어, 그 자신의 창조적 힘을 드러낸다.
예시를 쉽게 늘릴 수 있다만, ‘오캄의 면도날’은 본질이나 예시에 대해 불필요하게 깊이 다루어서는 안 됨을 시사한다. 과학에서 모순을 해소하는 다양한 방법을 아직 분석하지 못한 것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지금으로서는, 서로 모순되는 두 진술의 결합이, 특히 순전히 논리적인 근거에 있어서, 항상 거짓이라고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충분히 설득력 있게 확립했다고 가정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결합은 개념(또는 이론)의 진보적 발전의 출발점이 될 수 있으며, 이는 초기 모순을 종합하고 모순을 ‘상쇄하는’ 새로운 개념(또는 이론)으로서 극점에 도달한다.. 변증법에서 그러한 발전은 ‘대립물의 종합(synthesis of opposites)’이라고 불린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지식의 발전이 가능한지에 관한 의문에 마주하게 된다. 반대되는 것들이 어떻게 동일할 수 있는가? 어떻게 동일해질 수 있는가?
2. 과학 지식 발전에서 모순을
해소하는 몇 가지 방법
철학사에서 모순 해소 문제는 많은 주목을 받아 왔다. 고대의 변증론자들, 헤라클레이토스와 제논, 플라톤과 플로티노스; 후기 고대인들과 중세 신비주의자들;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와 조르다노 브루노; 칸트, 피히테, 셸링 그리고 헤겔; 베네데토 크로체와 프랜시스 브래들리, 독일 신헤겔주의자들과 니콜라이 하르트만, 앙리 베르그송 그리고 키에르케고르에서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루너에 이르는 ‘변증법적 신학자들’; 카를 야스퍼스와 장 폴 사르트르─이 모든 철학자는 이 문제에 관한 해결책을 도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들 노력의 주요 경향은 다음과 같이 제시될 수 있다: 1. “나의 말이 귀를 기울이지 말고 로고스에 귀를 기울여 모든 게 하나라는 데 동의하는 것이 현명하다”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글에서 표현되는, 우주의 직접적으로 주어진 ‘형상(eidos)’ 또는 ‘상(image)’에서 대립물의 통일에 관한 ‘논리’의 즉각적인 관조적 재생산; 2. 부정 변증법은 모순이, 해당 개념으로 표현된 대상의 비실재성의 징후라고 진술한다. 제논의 역설이나 ‘밀린다왕의 질문(the questions of Milinda)’, 그리고 최근에는 프랜시스 브래들리의 ‘드러남의 변증법’이 우리에게 많은 예를 제공한다; 3. 신플라톤주의자들, 중세 신비주의자들 그리고 야콥 뵈메의 신비주의적 변증법은 현대 비합리주의에 의해 변증법에 관한 비합리주의적 해석으로 발전하였다. 요나스 콘(Jonas Kohn)이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신비주의자는 모순의 발판에서 절대자의 흐름(the flux of the absolute) 속으로 스스로를 내던지므로 모순을 해소하지 못하고 오히려 영혼 속에서 모순을 알게 될 따름이다. 비합리주의자들은 상당한 수준으로 잘 정립된 모든 모순에서 현실의 비합리성과 그것에 관한 지식의 증거를 목도하고, 변증법을 (리하르트 크로너가 명명한 바) “이성적 비합리주의”의 창조물로 간주한다. 그런데 모순을 오류의 징후로 보고 “순전히 논리적인 근거”로 그것을 거부하는 실증주의자는 마음속 깊이 이 [비합리주의의 산물]에 동의한다. 4. 유한과 무한, 시간성과 영원성, 인간과 신의 모순이 너무나 근본적이어서 그 유일한 탈출구가 보편적인 "양자택일"이거나, 혹은 원한다면 신앙의 용어로 "나는 그것이 터무니없기 때문에 믿는다. … "일 수밖에 없는 ‘긍정적’ 신학의 변증법; 5. 합리적 변증법의 기본 전제는 적어도 사후적으로는, 과학적 진보의 행로에서 모순을 해소하는 실제적 방법을 추적하고, 그러한 방법에 관한 유형학을 만들어, 이를 과학 연구의 발견법적 도구로 권장할 잠재적인 것으로서 취해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변증법적 논리의 과제이며, 헤겔과 마르크스의 논리학과 지식 이론으로서 변증법의 과제이다.
서로 모순되는 것이 어떻게 동일해지는가에 관한 물음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우리의 분류법(classification)을 살펴보면, 그 대부분이 과학 이전, 심지러 논리 이전적인 사고방식, 즉 사유가 다다르게 되는 막다른 골목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칼 포퍼 경과 함께 이러한 경향을 반드시 거부해야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형태들 속에서 변증법 발전의 역사적 경험에 관한 연구는 가장 유익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합리적 변증법은 과학적 인식·변증법적 논리의 가장 보편적인 방법론으로서 인정되고 수용되어야만 한다. 당연히 이 소논문은 이 주제에 관한 일반적인 해명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개념과 이론의 형성으로 이어지는 모순들을 해소하는 잘 알려진 과학적 방법 중 일부만을 고려할 것이며, 가능한 한 그것들의 논리적 구조를 발견하려 노력할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과학계에 상당히 잘 알려진 사실들이며, 우리는 단지 새로운 각도에서 그것들을 고찰하는 것 이상을 하지 않을 것이다.
1. 제5공준과 그 부정 사이의 모순의 해소를 바탕으로 비유클리드 기하학들이 출현한 위의 사례로부터 시작해 보자. 과학적 방법론, 즉 ‘과학의 논리’는 이 위대한 기하학적 발견을 통해 진리의 상대성에 관한 중요한 명제를 얻은즉 하나이자 동일한 것에 대한 하나이자 동일한 진술의 긍정과 부정이 서로 다른 체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면 둘 다 참일 수 있다는 의미가 그것이다. 이는 과거에는 그러한 가능성을 가정하지 않았던 형식 논리의 모순율을 긴요하게 개선한 것이다. 다른 예로 배중률을 제한하는 직관주의와 구성주의 논리의 창조를 들 수 있다; 괴델-코헨 집합론의 결론은 선택 공리의 집합론에서의 독립성 증명과 선택 공리로부터의 연속체 가설과 관련이 있다. “괴델-코헨의 결론, 그리고 이를 확장한 결과, 집합론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존재하며 그 차이는 직관에 따르면 ‘실제로’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문제와 관련하여서만 야기된다.”18
이 유형의 모순을 해소하는 논리적 도식화는 아래와 같다:19
A.~A⇉A.Ã.⇉S(A).S(Ã)⇉S(A).S(A1).S(A2)
논리학적·수학적 연구에 따르면, 대안적 가정에 기반한 공리 체계를 구축하여 모순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조건은 해당 가정이 체계의 다른 공리와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2. 논리학에서 잘 알려진 또 다른 예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우연한 미래 사건(chance future events)’의 모순과 관련이 있는데, 이는 확률 개념과 확률론적 논리 체계를 바탕으로 1920년대에 가서야 해결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작 『명제론』의 제9장에서 우연적인(불확정적인) 미래 사건에 대한 모순되는 개별적 판단을 조사하였고, 그것이 형식 논리에서 말하는 모순율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실제로 모순율의 전통적 형태에 따르면 진술의 참은 그 진술을 부정하는 것이 거짓임을 함축한다. 하지만 미래의 확률적 사건이 실재함을 긍정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당신의 진술이 반드시 참이 아니며, 그 진술을 부정하는 것 역시 반드시 참이 아니다. 둘 중 어느 것도 따로 취하면 참이 아니다; 오직 두 논제(A.~A)를 모두 포함하는 전체로서의 반정립만 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추론은 수세기 동안 지속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예를 들어 조지 그로트(George Grote)와 같이 존재론적 근거로 반박되거나20, 혹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진술’과 ‘부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의미가 모순율의 설명에서 사용된 의미와 다르다고 재정의하여 설명되곤 했다.21
두 가지 해결책 모두 참이 아닐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 유일한 겨로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현대화하는 것일 뿐, 그가 제출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우연적인 것, 또는 그가 다른 글에서 표현한 ‘무한한 가능성(indefinite possibility)‘에 관해서는 “엄격한 중간항이 없으므로 여기에는 과학도 없고, 직접적인 삼단논법도 없다”22는 결론을 내렸다. 이 결론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는 “확률은 무지와 지의 중간이며,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즉 그것은 절대적인 확실성을 불러일으킨다”23는 결론에서 알 수 있다.
이 해결책은 실제로 확률을 수학적 연구에서 배제하고 이를 주관적 영역에 엄격히 가둬 놓았으며, 오직 지속적인 수학적 사고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만이 결국 확률을 수학의 영역으로 되돌렸다.
이 문제에 대한 참된 논리적 해소는 폴란드의 논리학자 얀 루카시에비츠(Jan Lukasiewicz)의 연구에서 제출되었다. 1920년대에 그는 양상 명제(modal propositions)를 포함하는 세 가지 진술이 서로 일치하고 고전적 논리 법칙(즉, 2치 논리!)과 일치하는 것이 가능한지 알아내는 과제를 맡았다. 코타르빈스키가 해명한 바와 같이, 이는 다음과 같다: (ⅰ). CN Mp Np (p가 불가능하면 ~p); (ⅱ). CN pN Mp (~p이면 p가 불가능함); (ⅲ). 그리고 Σp KMp MNP (p가 확정적인 것인 경우, p와 ~p은 가능);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우연한 미래 사건에 대해 제기한 이율배반과 같다. 코타르빈스키는 “루카시에비츠의 논리 분석은 위에서 제시된 세 가지 명제가 전통 논리의 법칙을 위반하지 않고서는 진술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24고 썼다. 이 세 가지 명제를 모두 주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달성하기 위해 고안된 명제 계산의 수정은 삼치(三値) 명제 계산을 만들어 냈고, 이는 진리치인 ‘참’·‘거짓’과 나란히 하는 세 번째 논리값인 ‘불확정성(indeterminacy)’을 도입하였는데, 이를 부정하면 동일한 불확적성이 생성된다─이는 진리를 부정하면 거짓이 생성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 2치 논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후자의 경우에서는 ‘불확정성’을 부정하면 동일한 진리치가 생성된다.
이제 위의 분석을 요약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모순율이 우연한 미래 사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논제의 참을 긍정하는 것이 그 반정립의 거짓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전을 던졌을 때 앞면이 나올 확률과 뒷면이 나올 확률의 값은 같다. 따라서 “동전은 앞면이 나올 것이다”라는 진술은 “동전은 앞면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라는 명제와 동치(A≡~A)이다. 논리학은 확률(주어진 경우에서는 2분의 1의 확률)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할 방법을 제시하는데, 이는 모순을 ‘상쇄하는 것’, 즉 해소하는 것이다. 이 경우, 형식 모순 A≡~A에서 인지적 모순 A≡~Ã가 생성되는데, 이는 ~A와 Ã가 오직 2분의 1의 확률로 일치하기 때문이고, 이때 “앞면이 나오지 않는다”는 “뒷면이 나온다”는 의미랑 같다. 예를 들어, 주사위를 던지는 경우와 같은 다른 상황에서는 “6이 아니다”는 1, 2, 3, 4 또는 5가 될 수 있으므로 상황이 더 복잡해진다. 중요한 점은 이 모순의 해결 덕분에 우리가 지금까지 우리의 추론이 국한되어 있었던 2치 논리 체계에서 다치 논리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카시에비츠의 3치 논리 창안은 2치 논리의 모든 동어반복이 3치 논리에서 동어반복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는데, 모순율과 배중률도 이에 포함된다.25 하지만 이는 3치 논리에서 모순율이 작동하지 않는다거나, 발생 가능한 사건이 모순 없이 표현될 수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3치 논리는 양상 명제를 포함하는 표현식 (ⅰ), (ⅱ), (ⅲ)을 모순 없이 수용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취되었다.
주어진 사례에서 양상적(확률적) 사고 과정이 실제 과정을 명확하게 반영해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만 한다. 사유에서 확률 개념에 의해 ‘상쇄’된 모순은 현실에서는 동전 던지기 횟수를 충분히 늘려서 해결되는데, 이는 모순적 상황 A≡~A에서 모순되지 않는 nA=n~A로 이어지고, 여기서 n은 던진 횟수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발견한 우연한 미래 사건의 모순은 확률론적 논리에서 해결되고 다음의 공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A≡~A⇉A≡Ã⇉MA≡M̃·A, 여기서 M은 확률을 나타내는 부호이다.
이 공식이 모든 양상 논리에 적용될 수 있을지, 아니면 이 분야가 새로운 난점에 부딪힐지는 아직 논급하기 어렵다.
3. 엘레아의 제논이 쓴 고대의 역설로, 그것은 “날아가는 화살”로 알려져 있다. 이 역설의 구조는 일반적으로 운동(또는 움직이는 물체) 개념을 분석한 결과로 모순이 출현하도록 지시한다. 하지만 그 참된 의미는 반대로 해석될 때만, 즉 “날아가는 화살” 논증이 운동(또는 움직이는 물체)이라는 개념의 종합으로 제시될 때만 드러난다. 이러한 종합은 “물체 A는 장소 B에 위치하며, 장소 B에 위치하지 않는다”라는 말에서 정식화된 모순에서 유래한다. 형식 논리의 관점에서 이 진술, 아니 더 정확히는 이 진술들의 ‘결합’은 모순이며 따라서 이해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보통 역설에 대한 형식-논리적 분석은 우리가 이미 움직이는 물체를 다루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바탕을 둔 채 부정 명제에서 “위치한다”라는 용어의 의미를 정제(精製)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역설을 분석적 차원에서 종합-발생적 차원으로 옮기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는 아직 “운동”(또는 움직이는 물체)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필요한 세부 작업을 수행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얻기 위해 우리는 진리치가 아니라 ‘결합’을 제시하고, 이에 상응하는 경험적 상황을 발견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상황 1: ∃t∃c[T: Located(A, B, t, c)∧F: ¬Located(A, B, t, c)]26
모순율에 속하는 이 상황은, [“물체 A는 장소 B에 위치한다”의] 부정문이 거짓으로 판정돼 소거되는 한에서 물체 A의 공간적 위치가 장소 B에 고정됨을 의미한다.
상황 2: ∃t∃c[F: Located(A, B, t, c)∧T: ¬Located(A, B, t, c)]27
이러한 경험적 상황 역시 자명한데, 이는 장소 B에 물체 A가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가장 큰 난점은 제논의 역설에 해당하는 상황 3에서 발생한다.
상황 3: ∃t∃c[T: Located(A, B, t, c)∧T: ¬Located(A, B, t, c)]28
주어진 ‘결합’은 어떠한 경험적 상황을 표현하는가? 이는 분명히 정적인 ‘위치’, 즉 주어진 장소의 공간적 위치도, 그것의 단순한 부정도 아니다. 두 진술의 진리[치]가 충분히 확립되어 있다고 가정하고─그리고 이것의 가능성은 위에서 입증되었다─, 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개념을 정식화하여 해결책을 찾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주어진 경험적 상황의 시각적 상은 상황 1과 2처럼 정지해 있는 화살이 아니라 [상황 3에서 그 모순적 상황의 상호작용으로서] 날아가는 화살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는 바로 ‘크라튈로스의 상황’인데, 그는 전 자연계가 변화하고 있음을 보고, 이에 대한 참된 진술은 존재할 수 없다고 하였다.29 그러나 크라튈로스와는 대조적으로 합리적 사고는 이 흐름에 불변량, 상수를 도입하여 이를 ‘운동’이라고 불렀는데, 즉 그것은 운동 자체를 하나의 확립된 상태로 정돈하였다. 이 상태는 그러한 것으로 설명된 물체가 공간적 속성과 운동적 속성이라는 이중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가정하는데, 후자는 물체의 공간적 위치를 “부정”한다.
따라서 상황 3에서 표현된 모순은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해결된다: “물체 A는 운동한다.” 그러나 이 추론을 두 가지의 전형적인 반론을 야기한다. 그중 하나는 “위치한다”라는 용어가 긍정문과 부정문에서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예에서는 공간적 위치를 의미하는 데 사용되는 반면, 두 번째 예에서는 “장소 B를 통과한다”를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기한 또 하나의 반론은, 긍정 진술은 물체의 실제 위치를 표현하는 반면, 부정 진술은 단지 잠재적인 위치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30 그러나 이 두 가지 반박은 모두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반박들에서는] 긍정 진술의 의미를 오직 언어적으로만 평가하는 데 반해, 부정 진술은 운동의 확립된 사실에 바탕을 둔 채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위에서 확립한, 종합의 변증법적-논리적 해석을 바탕으로 한다면, 우리는 연결된 진술 중 단 하나만을 더 정교하게 다듬을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두 진술에서 용어들의 의미는 반드시 사유의 통합적 행위에 의해 규정되어야 하며, 이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물체 A가 장소 B에 위치하고 장소 B에 위치하지 않으면, 물체 A는 운동한다.” 그렇다면 물체가 공간에서 위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움직이는 물체는 반드시 어딘가에 있어야 한다!)이 물체의 운동적 속성을 빼앗는 것이 아니며,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임이 명백해진다. 무규정적 부정은 규정적 부정이 되고, 진술과 부정은 완전히 동일한 의미로 된다. 즉, 긍정 진술에서는 공간적 위치가 명확하게 표현되고, 운동적 특성은 은폐되어 있는 데 반해, 부정 진술에서는 그 반대이다.
역설에 대한 해결책은 상징적으로 아래의 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A.~A⇉A.Ã⇉C(A.Ã)⇉C(A.D)
제논의 역설에 대한 이 해결책은 나의 논문 「날아가는 화살과 모순율」31에 제시된 바 있다. 1967년 V. S. 비블러(Bibler)는 『발전하는 개념 분석(Analiz razvivayushchegosya ponyaliya)』이라는 저작에서 「운동 개념의 발생─역학의 역사에 관하여」라는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하였다. 저자는 아르키메데스 역학의 기원에 관한 자세한 연구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역학의 발전(아르키메데스부터 오늘날까지)은 엘레아의 제논, 더 정확히 말하자면 … 제논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으로 정식화했던 실제적인 논리적 난제들의 해결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역학의 전사(全史)를 제논-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에 대한 답의 끊임없는 발전, 즉 점점 더 확장되고 구체적인 답의 일종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또 그래야 한다고─생각한다.”32 이 작업은 우리의 가설을 확증하는 역사적·과학적 연구를 제시할 뿐만이 아니라, 내가 간략하게 다루었던 문제의 한 측면을 드러낸다: 새로운 이론의 형성은 모순을 단번에 종식시키는 단 하나의 개별적인 행위가 아니다. 지식이 더욱 발전하는 과정에서 모순은 계속해서 발생하고, 새로운 형태를 띠지만, 과학 발전의 동력으로서의 제 기능을 유지한다.
비블러는 아르키메데스 역학의 발전이 보편적 방법으로서의 그 자신을 파괴하면서, 운동을 고려·측정할 수 있는 미분적 표상으로 보편적 방법을 대체하였음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비록 더는 도형의 완결된 형태가 아니라 궤적의 모든 지점에서 이루어지지만, 여전히 아르키메데스 역학처럼 기하학적 투영(geometrical projection)에 머물러 있다. 이는 미분학에 의해 제공되었는데, 제논의 역설이 여기서 또다시 나타난다는 것은 더욱 흥미롭다. 따라서 ‘아킬레스와 거북이’는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수학에서 형성되었던 이율배반적인 상황에서 문자 그대로 표현되었는데, 당대의 미분학에의 설명은 "실제의 무한소(無限小)"를 가정할 것을 요구했으며, 그 핵심은 그것의 크기가 0과 0이 아닌 값을 동시에 나타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대의] 제논은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현대 용어로 이는 “변수는 결코 극한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미분학의 역설에 대한 가장 간단한 표현을 아래의 기초적인 식에서 찾을 수 있다:
Δy-dy가 Δy보다 높은 계(order)의 무한소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으므로, dy가 Δy의 극한이고 dx가 Δx의 극한임은 명백하다. 따라서 변수 Δy와 Δx는 동시에 두 극한을 향해 나아가는데, 첫 번째 극한은 0과 dy를 향하고, 두 번째 극한은 0과 dx를 향하므로, 이는 모순이다.33 수학은 현대 극한 이론에서 이런 상황을 벗어날 길을 찾았는데, 바이어슈트라스(Weierstrass) 이래로 운동에 기반한 직관적 극한 표상의 사용을 부등식의 엄격한 수학적 장치로 대체해왔다. 이러한 점에서 또한 커다란 흥미를 끄는 것은, 실제의 무한소에 관한 표상이 역설을 야기하므로 이는 미분학의 기호가 수행하는 작동 역할(operative role)에 관한 표상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생각이다.34
4. 마르크스의 고전적 저술 『자본론』은 이 문제와 그 해결책에 관한 의식적인 이율배반적 제시의 예를 제공한다. 이는 자본의 기원에 대한 그의 분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우리의 화폐 소유자는 상품을 그 가치대로 사고, 그 가치대로 팔아야만 하지만 그 과정이 끝나면 처음에 투입하였던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유통으로부터 빼내야 한다. 그가 완전히 성숙한 자본가로 성장하는 과정은 유통 영역 안팎에서 모두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문제의 조건이다.”35 주지하다시피, 마르크스는 사용가치가 가치의 원천이라는 속성을 지닌 상품이며, 실제 소비는 노동의 구현체, 즉 가치의 창조이고, 그 유통이 곧 생산인 노동력이라는 상품 개념에서 그 해결책을 찾았다. 자본주의 경제에 있어 생명인 이 개념의 발견은 그 분석이 이 소논문의 범위를 넘어서는,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가장 추상적인 형태로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유형의 ‘결론’을 얻는다: 자본은 상품인 ‘노동력’의 유통 영역에서 발생하는데, 그 유통 자체가 생산이다. 모순의 해소는 노동력의 유통이 생산에 불과하므로, ‘상쇄’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직감적으로는 유통과 생산은 양립할 수 없다.(유통에 들어서려면 먼저 상품이 생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생산은 유통─‘노동력’ 상품의 유통─의 특수한 경우로서 스스로를 현현한다.36
우리는 우리의 추론과 집합론에서 괴델-코헨 결과와 관련하여 처치가 처리한 추론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해야 한다.
A.~A⇉A.Ã⇉A∈Ã⇉A∈P
당연히 여기에서도 결과는 형식적으로 비모순이다.
우리는 모순의 해소로 새로운 개념이나 개념 체계가 발전한 전형적인 사례 중 일부를 조사하고 해석─체계적이거나 포괄적이라고 주장하지 않은 것으로서─하려 노력하였다. 이러한 마주침은 과학적 사고에서 매우 빈번하게 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사례는 어떤 경우에도 사유의 불변적이고 형식적인 전이를 다루지 않는다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각 사례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결론을 향한 확고한 전진성을 보여준다.
이는 보통 형식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다른 많은 절차도 동일한 차원에서 고려될 수 있다고 가정할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유형 이론이나 메타 언어를 사용하여 의미론적 모순을 제거하는 관련 절차와 같이, 이율배반을 제거하기 위한 수리논리의 전형적인 장치가 있다. 이는 수리논리에서 이율배반의 문제가 고도로 공식화되어 있음에도, 이율배반의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제거하는 것 자체가 사유의 형식과 내용이 분리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고, 결과적으로 사고의 창조적이고 종합적인 특성을 발견하게 함을 시사한다. 그렇게, 현대 형식 논리학계의 경험은 그 자체로 변증법적-논리적 표준화를 위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지식의 발전, 어떻게 모순을 해소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의식적으로 제기하고 그 답을 찾아내는 변증법적 논리는, 후자에서 형식 논리적 연역으로 표현될 수 없고 알고리즘으로 정식화될 수 없는 절차, 그 다양한 유형의 제 개념·이론 형성의 특정 형태들과 그들을 새롭고 더 높은 발전 단계로 끌어올리는 것으로 확립될 절차를 탐구한다. 그 결과로서의 개념이나 이론에서는 그 발전의 초기 지점 역할을 하였던 모순이 ‘상쇄’되고 해소되며, 형식적으로 제거되지는 않는다. 모순의 해소 양식에 따라 모순의 유형을 체계화하고 구체적으로 그것들을 조사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변증 논리의 주요 과제이다.
모순의 해소를 통한 인식 발달의 특징 중 하나는 새로운 개념(이론)으로 이어지는 모순 해소 과정에서 초기 모순을 형성하는 진술들의 내용과 의미가 수정된다는 것이다. 그 최종적인 의미는 초기 모순과 그 결과를 모두 포괄하는 논증의 총체적 관점에서 볼 때만 발견될 수 있다. 달성된 결과의 관점에서 관찰할 때, 초기 모순은 정립과 반정립의 추상적이고 불확정적인 대치(긍정-부정)의 형태를 초극하여, 구체적이고 명징한 모순으로 이행한다. 그래서 초기 모순은 새로운 단계에서 모순되지 않는 논리 정식에 들어맞는 것으로 [지양된 것으로서] 출현하며, 이 정식의 구조는 초기 모순에 대해 채택된 해소 양식에 의해 규정된다. 하지만 결과로서의 개념(이론)을 초기 체계의 관점에서 분석하려는 시도는 탐구자를 필연적으로 [초기 형태 수준의] 모순을 재생산하는 데로 치닫게 한다.
그러므로 논리적 모순에 논리적(의미론적) 상대성의 원리를 확장할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물과 사태의 객관적 제 관계를 표현하는 모순은 그것이 출현하는 개념 체계와 상관관계에 있다. 그것은 초기 과학 체계에서 형식적-논리적 모순의 형태로 출현하겠지만, 결과로서의 체계에서는 ‘상쇄된’, 즉 해소된 형태로 출현할 것이다. 진술과 그 부정의 결합에 형식적 모순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다면, 항상 이같이 질문해야만 한다: “어떠한 체계에서 그것이 존재하는가?”
개념을 발전시키고 이론을 개발하고 변형하는 방법으로서, 모순 해소 문제는 궁극적으로 객관적 과정의 변증법에 근거하는 변증법적 논리의 문제이다. 이러한 객관적 근거에 관한 조사는 두 가지 방법으로 진행될 수 있다: 자연과학적 자료를 분석하는 방법과 초기 이론 간 관계를 연구하는 방법이 그것인데, 초기 이론들의 ‘경계’에서는 그 자신의 해소 및 더한 개발을 요하는 모순이 명확하게 출현하며, 이러한 모순을 해소함으로써 새로운 이론이 생겨난다.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일반적인 알고리즘이 없는 것은 사유 과정이 비형식적이고 다변적이기 때문인데, 이는 종종 형식 논리가 [지금까지 다루어진 변증 논리의 발견에 관한,] 그와 같은 문제 제기를 비판할 근거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은 A.~A 유형의 이율배반적 표현을 모순율 위반으로 식별하는 데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식별은 정당화될 수 없는데, 그것은 형식 논리 자체의 특수한 추상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 주장은 주어진 공식이 객관적 모순을 표현하고, 이 공식을 A.Ã 유형의 다른 구체적이고 명확한 모순으로 변환하는─그와 같은 지식의 발전을 계산에 넣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현대 형식 논리학 자체가 발견한 부정 연산의 다치(多値)적 본성조차 고려하지 않는다.
비합리주의 철학자들은 변증법적 모순의 해소가 비형식적이라는 점에서 이 종류의 작업이 비합리적임을 보여주려 한다. 키에르케고르에게 “변증법적 모순”이란 무엇보다도 “붕괴(Bruch)”이며, “이성을 모욕하는” “도약”이고, 따라서 “신화”이다.37 베르그송은 여기에 “무언가 기적적인 것이 있다─왜냐하면 두 가지 상반되는 것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인데 … 모든 기적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 … ”라고 말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신비로운 작용이며, … [우리는] 그것에 어떠한 정도(程度)나 그늘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38 야스퍼스에게 이는 “알려진 모든 규칙의 너머에 있는” “돌파(Durchbruch)”이다.39 그들 사이의 오랜 대립에도 불구하고 형식 논리학자와 비합리주의자는 모순을 해소하는 과정의 합리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같다. 변증법이 항상 말하였듯, 두 극단은 만난다. 형식 논리학자나 비합리주의자는 통합적이고 종합적인 사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변증법적 논리는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과학적 사고의 실제 과정, 모순 해소에서 발견되는 규칙성을 연구한다. 이 길이 우리에게 급속한 성장을 약속한다고 선험적으로 단언할 수는 없으며, 쉬운 길일 가능성은 더욱 낮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인간 사고의 가장 심오한 수수께끼 중 하나─이성의 종합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의 신비를 다루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번역: 한동백 | 집행위원
2025년 9월 19일
- K. R. Popper, Conjectures and Refutations, New York, 1965, 316.

- K. Marx & F. Engels, Collected Works, Vol. 5, 446.

- 『마태복음』, 제7장, 제20-1절.

- W. James, A Pluralistic Universe, New York, 1916, 220.; Cf. F. H. Bradley, Appearance and Reality, Oxford, 1969, 16-7.

- K. R. Popper,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Vol. 2, London, 1966, 39.

- Ibid.

- “지양(aufheben)은 이중적 의미를 지니는데, 유지하거나 보존하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중지하거나 끝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G. W. F. Hegel, Hegel's Science of Logic, Vol. 1, London: Allen and Unwin, 1929, 119.)

- V. I. Lenin, Collected Works, Vol. 38, 109.

- G. W. F. Hegel, Sämtliche Werke, Bd. 8, 280.

- G. W. F. Hegel, The Phenomenology of Mind, London & New York, 1931, 99.

- 『마태복음』, 제5장, 제37절.

- K. Marx, 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Rohentwurf), 1857-1858, Moskva, 1939, 22.

- Conjectures and Refutations, 1965, 335.

- 여기서 우리는 변증법과 일반적으로 기계론적 유물론의 속성으로 [잘못] 여겨지는 반영 이론의 종합, 통일이 어떻게 질적으로 새로운 것, 즉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이나 조잡한 ‘복사 이론(theory of copies)‘으로 축소될 수 없는 것을 낳는지에 관한 또 다른 예를 보게 된다.

- A. A. Fraenkel & Y. Bar-Hillel, Foundations of Set Theory, Amsterdam, 1958, 19.

- Ibid., 7.

- Proceedings of the International Congress of Mathematicians (Moscow—1966), Moskva, 1968, 16.

- Ibid., 18.

- 이 글에서는 T. 코타르빈스키(Kotarbinski)의 책에서 발췌한 예, 그리고 저자의 구두 설명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저자 자신의 기호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더 편리한 때를 제외하고, 수학적 논리의 일반화된 기호를 채택하겠다. 마침표 기호 ‘.’는 접속사 ‘그리고’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며, 기호 앞의 휘어진 대시 기호 ‘~’는 부정을 나타낸다. 기호 ‘S’는 클래스에 포함됨을 나타낸다. 기호 ‘≡’는 동치(同値)를, ‘=’는 수학적으로 같음을 나타낸다. 추가적으로, 우리는 명확한 부정을 나타내기 위한 기호 위에 두른 대시 기호 ‘~’를 사용하고, 논리-인지적 함의(만약 …라면 …인)를 나타내기 위해 기호 ‘⇉’를 사용한다.

- G. Grote, Aristotle, Vol. 1, London, 1872, 164-8.를 참고하라.

- 그 사례로, A. S. Akhmanov, Logicheskoye ucheniye Aristotelya, Moskva, 1960, 151-6.을 참고하라.

- Aristoteles, Analytika Protera, 1:13, 32b.

- G. J. Gravesande, Introductio ad philosophiam, metaphysicam et logicam continens. ed. quarta, Leidae, 1765, 211.

- T. Kotarbinski, Leçons sur l’histoire delà logique, Warszawa, 1965, 200-1.

- A. A. Zinovyev, „Ocherk mnogoznachnoi logiki“, Problemy logiki i teorii poznaniya, Moskva: Izdatel'sky Dom MGU, 1968, 123-4.를 참고하라.

- 하나이자 동일한 시점과 관계에서 물체 A는 장소 B에 위치한다 (참) 그리고 물체 A는 장소 B에 위치하지 않는다 (거짓)

- 하나이자 동일한 시점과 관계에서 물체 A는 장소 B에 위치한다 (거짓) 그리고 물체 A는 장소 B에 위치하지 않는다 (참)

- 하나이자 동일한 시점과 관계에서 물체 A는 장소 B에 위치한다 (참) 그리고 물체 A는 장소 B에 위치하지 않는다 (참)

- Aristoteles, ta meta ta phusika, Γ, 1010a.

- 첫 번째 반박은 A. Reinach의 저서 „Über das Wesen des Bewegung“, Gesammelte Schriften, Halle, 1921.에서, 가장 완벽에서 다루어졌다. 두 번째 반박은 동시대 토마스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것으로서, N. Ogiermann, Materialistische Dialektik, München, 1958, 83-5.에서 검토되었다.

- Filosofskie nauki, 6, 1964.

- Analiz razvivayushchegosya ponyaliya, Moskva, 1967, 119-20.

- S. Y. Lurye, Teoriya beskonechno malykh u drevnikh atomistov, Moskva & Leningrad, 1935, 17.를 참고하라.

- K. Marx, Matematicheskiye rukopisi, Moskva, 1968, 10.에서 S. A. Yanovskaya의 소개문을 참고하라.

- K. Marx, Capital, Vol. 1, Moskva, 1974, 163.

- “괴델-코헨 결론과 그에 대한 확장들은 하나의 집합론이 아니라 여러 집합론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는데, 그 차이는 직관이 여전히 ‘실제로’ 오직 하나의 참된 해결책만이 있어야 한다는 문제와 관련하여 야기된다.” (Proceedings of the International Congress of Mathematicians (Moscow—1966), 1968, 18.)

- S. Kierkegaard, Gesammelte Werke, Abt. 16, 2. Teil, Düsseldorf & Köln, 1958, 281 ff.

- H. Bergson, An Introduction to Metaphysics, New York & London, 1912, 57.

- K. Jaspers, Von der Wahrheit, München, 1958, 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