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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생산회의

인간과 계획: 제3장 (2) 총명한 유물론 2 겨울


AA AB AC AD AE AF AG AH AI AJ AK AL AM AN AO AP AQ AR AS AT AU AV AW AX AY AZ BA BB BC

 생산회의

 

바로 이 시점에, 즉 1924년 1월레닌의 서거 직전이었으며, 이미 수개월 동안 활동 불능의 상태였을 바로 그때에 소련 공산당 제13차 대표자회의는 당면한 경제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노동조합이 국영공장의 관리자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조직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노동자들 사이에서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기 시작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특별학교들이 필요했으며, “또한 경제적 상황과 공업 기업소들의 현행 사업에 관한 논의에 광범위한 대중을 참여시켜야 한다. 산업 생활의 현안들을 토의하고, 성과를 요약하며,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생산회의에는 경제기관과 노동조합, 당 조직과 비당원 노동자들의 대표들이 함께 모여야 한다. 이러한 회의들은 정기적으로 개최되어야 한다. 이러한 회의들은 노동조합이 공장의 관리를 신중하게 연구하고 감독할 수 있게 하며, 경제기관이 경제를 개선하고 부실 경영과 과도한 간접비용 등과 맞서 싸우는 데에 있어서 가능한 모든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1

 

처음에는 1924년 2월에 발표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특별회람에서 드러나듯이, 공장 내 당세포의 주도성과 여러 공장의 당세포들로 구성된 협의회 활동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었다.2 그러나 이 회람에서도 생산회의에 참가하는 당원들이 공장회의와 노동자대표회의를 활용하여, 노동자들이 자신이 속한 공장의 경영활동과 생산 문제에 대해, 예컨대 생산원가와 제품가격, 노동생산성, 노동자들의 숙련도, 단체협약 등의 문제를 논의하도록 독려해야 한다고 지시하고 있다.3 사실 그해 동안 현장에서의 경험에 따른 결과로 작업장의 생산회의와 전체 공장 생산회의를 더욱 광범위한 기반 위에 두어야 할 필요성이 인식됐고, 1924년 9월에는 노동조합의 일간지인 트루드가 노동조합의 기반 위에서 생산회의를 개최하기 위한 표준 규정을 발표했다.

 

1924년 5월에 소련 공산당 모스크바 위원회는 “국가의 경제에서 이룩된 개선이 안정적이라고 할 만한 상황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고 인정하며 “경제 상황과 사업계획에 관한 주기적인 보고를 실질적으로 조직하고, 관련 문제들을 특별히 소집된 대의원 확대회의에서 기술자 및 관심 있는 개별 노동자들과 함께 해결해 나가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4 하지만 몇 달 후, 경험은 모스크바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생산회의와 공장위원회의 사업은 노동조합의 문제”이며, 공장 내 공산당 기구들이 이들 대표자회의에 명령할 것이 아니라, “생산문제에 노동자 대중을 끌어들일 책임을 공장위원회의 소관으로 옮겨놓아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위상을 높이는 동시에 노동조합의 사업 전반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5 제14차 모스크바주 당 대표자회의(1925년 12월 11일) 무렵에는 모스크바 노조평의회 의장이 다음과 같이 보고할 수 있었다:6 “생산회의는 실로 행정 및 경제사업을 맡을 다수의 노동자를 배출하는 학교이자, 미래의 관리자들을 훈련하는 학교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노동자 25만 명 이상이 1924-5년 동안에 생산대표자회의 대의원 선거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성들을 이런 회의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불충분하다고 한 여성 대의원 한 명이 제기한 강한 비판으로부터조차예컨대 섬유공업에서는 노동자의 57%가 여성이었지만, 생산회의 참석자 가운데 여성은 15%에 불과했다노동과 공공 문제에 대한 새로운 태도의 성장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스크바 주의 모든 지역에서, 공산당이 당원이 아닌 여성들로 구성된, 폭넓게 선출된 대표자회의를 소집해 온갖 사회 문제들을 토론하고 있었는데​—그 가운데에는 세르푸호프와 오레호보-주예보 같은 대규모 방직(직물) 중심지도 포함되어 있었다여성들 자신이 이 대표자회의를 끊임없이 생산회의로 바꾸어 놓곤 했다. 즉 생산계획, 그리고 생산에서의 각종 문제점·부족한 점들을 토론하는 회의로 만들었던 것이다.7

 

1925년 12월 제14차 당 대회에서 조직 문제에 관해 한 그의 보고에서 몰로토프는 아직 불완전하긴 하지만, 자료에 따르면 모스크바에서는 371회의 상설생산회의에 34,000명이, 레닌그라드에서는 204회의 생산회의에 36,000명이, 그리고 트베르에서는 198회의 생산회의에 13,000명이 참여했다고 밝혔다.8

 

레닌그라드에서는 비록 공장 중 오직 19%에서 생산회의가 조직되었으며, 생산회의가 열린 곳조차도 비당원 노동자들(참가자 중 42%)의 참여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소련 공산당 14차 대회에서도 보고했듯이25,000명의 노동자가 생산회의의 의사 진행 과정에 참가했다(36,000명의 참가자 중 나머지는 기술자와 관리자들이었다). 수많은 유용한 제안들이 나왔고, 그의 반 이상이 이미 유익하게 실행됐으며, 약 2천 명의 노동자가 생산회의에서의 경험을 통해 생산 분야에서 최소한 하급 관리직을 맡을 수 있는 수준으로 훈련받았다.9

 

이러한 생산회의와 생산대표자회의는 무엇이었는가? 본질적으로, 그것들은 회의에 참석하고자 하는 모든 노동자의 총회이거나, 공장이 너무 크거나 (또는 여러 공장을 포괄해야 하는 경우에는) 선출된 노동자 대표들의 대표자회의로서, 관리자 및 기술 인원들과 함께 열리는 회의였다. 이러한 회의에서 작업장이나 공장, 혹은 국영 트러스트의 관리자는 산업 전반의 상황, 특히 해당 공장의 상황과 그 공장의 생산 및 판매상의 문제들, 그리고 개선을 위한 제안들에 관해 보고했다. 소련 산업에는 (과거와 현재에도) 영업 비밀이나 재정상의 기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이것이 논의를 곧바로 매우 넓은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노동자들은 생산의 모든 측면, 곧 인적 측면과 기술적 측면을 최대한 폭넓게 토론하고,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를 몸소 느끼는 실무자로서 제안을 내도록 장려되었다. 대개 생산위원회가 선출되어 제시된 제안들을 면밀히 기록하고 그것들이 실제로 실행되는지를 감독했다. 실제로는 노동자들의 제안을 모으는 노력보다 그 제안들을 실제로 적용되게 만들기 위한 투쟁이 더 중요해졌다. 관행·보수주의·관료주의가 극복되어야 할 가장 큰 장애물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안을 내놓은 적극적인 노동자들에게는 하나의 엄청나고, 장기적으로 볼 때 모든 것을 압도하는 요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제 러시아에는 오직 한 가지 형태의 공유재산, 즉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재산만이 존재한다”는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공업과 농업에서 전전 수준으로의 회복이 대체로 완료된 해를 앞두고 개최된 소련 공산당 제14차 대회는 이제 노동자들의 주도성을 활용하는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했다. 대회는 1920년 12월에 처음 제기된 요구를 다시 가져왔지만, 다른 적합한 용어로,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소비에트 경제생활의 새로운 단계에 맞게 가져왔다. 대회는 선언했다:10 “우리의 노동조합은 그 어느 때보다도 건설적인 사업과 주도성, 활동, 노동자들의 역량 동원 및 노동자들의 100% 조직화를 위한 학교로, 사회주의 건설에 노동 대중을 더 많이 끌어들이기 위한 학교로 되어야 한다.”

 

일반 노동자 대중을 소비에트 경제의 실질적인 건설에 참여시키고, “노동 대중의 이익과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적 성공의 정도 사이에 놓인 밀접한 관계에 대한 인식을 심으며, 새로운 관리 및 행정인력을 발굴하고 훈련하는 가장 좋은 수단은 공장, 작업장 및 기타 대규모 경제단위의 생산회의에 있다.” 관리자들과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은 모두 생산회의의 활동과 생산회의가 제시하는 제안들을 관찰하고 연구해야 하며, “특정 제안이 채택되지 않는 이유를 명확하게, 공개적으로 정확하게 진술하고, 그것들의 실수와 일탈을 교정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발전한 생산회의를 통해 노동조합은 내전이 끝났을 때인 1922년에 제11차 대회에서 정한 목표, 즉 “나라 전체의 국민경제를 관리하기 위해 산업노동자들과 모든 노동 대중을 실질적으로 훈련시키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터였다.

 

1년 후인 1926년에는 공산당 제15차 대표자회의(10월과 11월에 개최)와 제7차 노동조합 대회(12월)에서 더 큰 결과가 보고됐다. 대부분의 대규모 작업장은 작업장 생산회의 체제로 전환됐다. 비록 이러한 회의들의 평균적인 참여율은 산업노동자들의 약 10%였지만, 회의에 참가한 전체 숫자는 전보다 훨씬 더 많았다.11 제14차 대회의 결정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기술자들은 처음에 생산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이는 경영진의 관심 부족 또는 심지어 질투와 함께 결합되어 결정의 30%만이 경영진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이어졌는데, 그 결과 1926년 여름에는 노동자들의 관심이 감소했다. 그러나 그해 가을에 국가의 급속한 공업화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면서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났다. 기술자들은 생산회의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논의의 주제는 생산회의의 초창기 단계에서 가장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세부적인 것의 사소한 개선보다 공장의 광범위한 문제들로 옮겨졌다. 많은 숫자의 유용한 제안들이 상정됐다. 모스크바에서는 전체 산업 부문을 망라하는 15차례의 생산회의가 대표자회의가 열리던 기간에 진행되고 있었고, 약 50만 명의 노동자를 대변하는 대표들이 참석했다. 전체 철강공업에서 각종 생산회의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비율은 20%를 넘었다.12 노동자들이 만든 제안서들의 가치는 레닌그라드의 철강공업만 해도 한 분기 동안 제출된 제안만으로도, 45만 루블을 초과하는 절약을 이끌어 냈다는 사실에서 판단할 수 있다.13 레닌그라드의 가장 큰 96개 작업장에서 작업반장의 약 1/3은 생산회의를 통해 노동자들 사이에서 승진한 사람들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전처럼 이 운동에 특별한 관심을 표했다: 1926년 10월 레닌그라드의 전체 공업에서 여성은 전체 노동력의 30%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생산회의에 참가한 이들 가운데서는 거의 32%가 여성 노동자들이었다.14

 

1926-7년의 기간 동안 산업에 대한 계획에 있어서 노동자들에 의한 새로운 참여의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는 생산원가의 계산을 논의하기 위해 특별회의를 소집한 것으로서, 일반적인 생산회의보다 훨씬 더 많은 참가자를 끌어모았다. 코스트로마에서는 노농감찰부가 노동자들로부터 충원한 자원자들의 “조사조”를 노동조합 및 공산주의청년단의 대표들과 공동으로 구성하여 공장들을 방문했고, 현장의 노동자들과 함께 공장들의 성공과 결점에 대해 논의했다. 트베르에서는 지역신문이 수 명의 노동자들을 초청하여 지방 “통제위원회”를 조직함으로써 생산문제에 대한 노동자들의 관심을 자극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도록 유도했다. 이러한 사례는 사라토프와 로스토프에서 뒤이어 나타났다. 다수의 공장에서는 “생산법정”이 조직되어, 불량한 실적에 대한 이유를 논의할 것을 요청받은 노동자들의 대규모 회의에서 불량한 생산량이나 불량한 작업의 사례들을 “심판”했다. 1926-7년에 개발된 또 다른 형태는 동종 산업 내 인근 작업장이나 상점으로의 “생산견학”이었는데, 보통 견학자들이 전보다 나은 결과를 어떻게 산출하는지 배우기 위한 목적을 띠고 있었지만, 때때로는 정반대의 목적을 지녔다. 트베르의 프라우다가 도시의 큰 공장인 프롤레타르카 섬유공장에서 조직한 “공개감찰”에는 놀라운 결과가 뒤따랐다. 6주의 기간에 노동자들은 산업에 관한 2,242개의 제안한 해 동안 생산회의에서 내놓은 숫자보다 거의 10배나 더 많은을 내놓았다. 채택된 방법론과 그에 대한 반응을 나타낸 지표는 노동자들의 25%에서 30%가 감찰 기간에 트베르 프라우다지의 “노동자 특파원”이 됐다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15

 

1927년 12월 소련 공산당 제15차 대회집단화 문제에 대한 광범위한 결정과 당내 트로츠키 반대파의 최종적인 패배로 하여 제1차 5개년 계획을 위한 길을 닦았기 때문에 소련사에 “집단화 대회”로 알려진에서 보고된 결과는 매우 놀라웠다. 중앙위원회를 대표하여 제시된 보고는 지난 2년 동안 생산회의의 발전에 관해서는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 생산회의는 작업장들에 “뿌리내렸고”, 정기적으로 더 많이 개최됐으며, 노동자들의 참가 인원이 늘어났다. 레닌그라드에서는 그 수가 35% 가량으로 증가했고, 모스크바의 금속공업에서는 40%,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는 64% 가량 증가했다. 노동조합 중앙평의회는 전체 산업노동자의 약 15%(즉, 한 해 전의 26만 명과 비교되는 약 45만 명의 규모)가 [생산회의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고 추정했다.

 

생산회의에서 주된 관심사는 이제 기업소의 계획된 작업의 개선에, 특히 수리와 장비갱신, 합리화, 기계화의 문제에 집중됐다. 노동자들은 수천 개의 제안을 내놓았고, 그의 5분의 4가 수용되고 있었으며, 실행에 옮겨진 비율 또한 증가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그리고 레닌그라드에서 그 비율은 모두 60% 이상으로 상승했다.16

 

대회는 산업의 합리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조건”이 노동자들을 적극적인 협력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에 있다고 재차 선언했다. “대중의 주도성을 촉발”함으로써 노동조합은 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터였다. 대회는 노동조합에게 “프롤레타리아트의 후진적 분자들을 도와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야말로 산업의 주인이며, 국가의 공업화와 경제의 합리화, 사회주의의 건설에 있어 지칠 줄 모르는 확고한 진전이 있다면 그들 앞에 광대한 전망이 열려 있다는 것을 완전히 깨달을 수 있게 하도록” 촉구했다.17 노동자 중 후진분자들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우연이 아니었다. 국가의 공업화는, 그 당시 여전히 등록되어 있던 150만 명의 실업자를 완전히 흡수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주로 농촌에서 수백만 명의 새로운 노동자를 산업으로 끌어들일 것을 요구했다. 농촌에서 농민들의 광범위한 다수는 여전히 소생산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세계관에 있어서는 사회주의적인 전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당시에 아르코스 주식회사에 대한 습격과 봄에 일어난 영국-소련 외교관계의 단절로 인해 몇몇 나라들과의 관계가 최악의 방향으로 급격하게 나빠졌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소련 지도부가많은 외국의 경제학자와는 다르게관리기구에서 노동자들의 역할을 진중하게 고려했다는 것은 몇 달 후 도네츠 분지의 샤흐티 탄광에서 최초의 계획적인 파괴행위가 적발됐을 때 전체 상황에 대해 이루어진 날카로운 비판을 통해 알 수 있다. 12월 당 대회에 보고된 긍정적인 성과들은 오직 시작일 뿐이었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가 1928년 4월 11일에 채택한 샤흐티 사건에 관한 공동결정서는 대중이 생산관리에 참여하는 수준에 대해 불만족을 표명했다.

 

“생산계획과 진척 상황에 관해 노동자들에게 제공되는 정보는 자주 형식적인 성격을 띤다. 생산과 생산의 합리화, 자본투자에 관한 문제는 생산회의에서 다뤄지지 않고 있고, 심지어 몇몇 사례에서는 경영진의 업무상의 결함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에 대한 박해까지 일어나고 있다. 노동조합은 생산회의의 중요성을 제기하는 데에 체계적으로 임하지 않고 있다. 회의는 제대로 조직되지 않고, 비정기적으로 소집되고 있으며, 기술자들과 때로는 당간부들에 의해 무시당하고 있고, 결정의 이행에 대한 감독은 불충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결정서는 이 모든 측면들에 대해 과감한 변화를 요구했다.18

 

이미 달성한 결과에 대한 자기 만족적 태도를 규탄하고, 이미 달성한 것이 아닌 앞으로 할 일의 양[규모]에 대해 주의를 환기한 이러한 사례는 생산회의의 활동을 자극하는 데에 있어 상당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이란, 1928년 내내 당내 우익반대파에 맞서 전개됐던 운동이 수행한 역할이었다: 그것은 러시아가, 다른 모든 계급의 지도자인 자국 노동계급과 함께 사회주의 사회를 자력으로 건설할 수 있는지의 문제로 전환하였기 때문에 중요했다. 그리고 그해 말엽으로 향할수록 사회주의적 경쟁의 새로운 단계가 다가오고 있다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

 

번역: 김의진 | 사무위원

 

2025년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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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VKP(b) v Rezolutsiakh ee Syezdov i Konferentsii, 1927, 508.텍스트로 돌아가기
  2. 그러나 1924년 초반에 섬유노동조합이 랴잔과 코스트로마, 야로슬라프 및 기타 도시들에서 여성 노동자 생산회의를 조직했고, 선출된 대표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숫자의 공장노동자들도 이 회의에 참석한 것은 주목할 만 하다. 예를 들어, 랴잔의 “크라스니 보스토크(Krasny Vostok)” 공장에서 열린 회의에는 다양한 섬유공장들에서 온 45명의 대표들뿐만 아니라 여성노동자 200명도 참석했다. 논의는 공장 노동자들의 자녀들을 위한 탁아소들의 확장과, 공장학교에서 견습 여직공의 작업훈련 개선, 여성을 훈련반장으로 훈련시키는 문제, 그리고 전반적인 생산회의에 여성들을 인입시키기 위한 노력 등과 같은 문제들을 중심으로 전개됐다.(Otchet Zentr: Komiteta k VI Syezdu Textilshchikov, 1934, 77)텍스트로 돌아가기
  3. Spravochnik Partiinogo Rabotnika, T. 4, 1924, 106-8.텍스트로 돌아가기
  4. Materialy k XII Mosk, Gubpartkonferentsii, 1924, 24.텍스트로 돌아가기
  5. Otchet o rabote Baumanskogo RK, 1924, 14, 114.텍스트로 돌아가기
  6. XIV Mosk Gubpartkonferentsia, T. 11/XII, 1925, 18.텍스트로 돌아가기
  7. Ibid., 37.; 소련의 산업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지배적이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8. XIV Syezd VKP(b), 1926, 60.텍스트로 돌아가기
  9. Ibid., 733, 787.텍스트로 돌아가기
  10. VKP(b) o Rezolutsiakh, etc., 1927, 628, 632.텍스트로 돌아가기
  11. 이 비율은 26만 명에 해당됐다. 노동조합의 일간신문인 ≪베스트니크 트루다(Vestnik Truda)≫에 따르면, 1926년 10월 – 1927년 3월의 기간에 노동조합은 생산회의(그 중 64%는 작업장회의였다)에 참가한 숫자가 36만 2천 명에 달했다고 보고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2. XV Konferentsia VKP{b), 1927, 342-3; 373, 389.텍스트로 돌아가기
  13. Otchet VZSPS, etc. 1926, 280. 상단에 인용된 ≪베스트니크 트루다≫의 통계에 따르면, 15개 산업부문들에서 만들어진 3만 8천 개의 제안들은 1926-7년 초반에 받아들여졌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4. Za Ratsionalizatsiu: Sbornik Statei, 1927, 106, 109.텍스트로 돌아가기
  15. Ibid., etc. 22-3, 86, 96-7.텍스트로 돌아가기
  16. XV Syezd VKP(b), 1928, 86-7.텍스트로 돌아가기
  17. Rezolutsii i Postanovlenia XV Syezda VKP(b), 1928, 74-6.텍스트로 돌아가기
  18. Rezolutsii Obyedinennogo Plenuma ZK i ZKK VKP{b), 1928, 26-7, 36.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