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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적 존재론과 공산주의: 서론」 『총명한 유물론』 제2집 겨울호
권태연 | 회원
서론: 존재론에 관한 몇 가지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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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재론의 의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존재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자연, 사회, 사유 등 일체의 존재자에 대해 보편성의 견지에서 그 보편적인 연관과 합법칙성을 연구하는 존재론이다. 존재론은 철학을 이루는 많은 분과형식들과 구분되면서도 그것들을 상호 유기적으로 통일하는 하나의 이론이자, 모든 경험과학의 토대가 되는 중요원리들을 포함한다. 분과학문들은 존재론적 범주와 원리들을 전제된 것으로 간주하고 과학 연구에 그것들을 사용하되, 범주나 원리들에 대해 주제적으로 연구하지는 않는다. 존재론은 존재자를 존재자인 한에서 연구하는 학문이다.1 이런저런 특수한 사태와 대상영역, 사물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주제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을 갖고 탐구하고자 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존재론의 경우, 이것이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에 관심을 두고 있는 존재론인 한, 여타의 분과학문과는 다른 변별적 특성을 갖고 있다.
먼저, 존재론으로서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분과학문과 달리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추구한다. 예를 들면, 세계는 물질적으로 통일되어 있으면서도 그 속에 부분적 계기들이 풍부하게 분화된 형식으로 지양되어 있는 구체적인 발전적 총체성이다. 이런 종류의 언명은 분과학문의 여러 명제들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존재론적 언명인데,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보편적인 규정성과 모든 것의 최종적인 근거에 이르기까지 침투하면서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실재 해석을 제공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한편, 물 분자는 수소 원자 2개가 산소 원자 1개와 전자(電子)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명제는 존재론적 명제가 아니라, 개별 과학적 성격의 명제이다. 왜냐하면, 물 분자라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물과 사태에 대해서, 물 분자의 구조와 그것을 구성하는 원소, 화학적 결합원리 따위를 설명한 명제이기 때문이다. 철학으로서 존재론은 물 분자와 같은 대상이나 개별현상을 분석하고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물 분자가 그것의 일부분으로서 포함되는 존재자 일반에 대해서 궁구(窮究)한다. 철학으로서 존재론은 보편학이다. 그러나 존재론이 분과학문과 전혀 무관한 성질의 것은 아니다.
존재론과 분과학문의 관계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관계와 같다. 이때 보편성과 특수성은 변증법적 범주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렇게 이해된 보편성은 자신 속에 특수성을 포함하고 있는 보편성이지, 구체적인 존재자들로부터 공통적 속성이 추상되어 그것들과 외타적으로 대립하는 추상적 보편이 아니다. 또 변증법적으로 이해된 보편성은 차이가 사상(捨象)된 자기동일적 본질도 아니다. 왜냐하면, 보편성은 자기 안에 특수한 차이들을 포함하면서도 그것들을 하나의 통일성 속에 묶어내는 원리이며, 보편성은 특수성으로 분열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보편성의 존재방식은 평화로운 정태적 자기동일성이 아니라, 항상 특수성들로 분열되는 바로 그 투쟁적인 과정이다. 그리고 보편성은 그렇게 규정된 보편성인 특수성을 하나로 결집시킨다. 그러므로 존재론은 분과학문들로 분열되어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통일적인 세계관으로 자체 내에 지양하고 있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존재론은 보편적인 과학이며, 분과학문은 존재론이 특수한 대상영역으로 분지화된 특수한 존재론이라 할 수 있다.
존재론은 분과학문을 이론 내에서 최종적으로 근거 짓는다. 분과학문은 자기 스스로를 근거 지을 수 없으며, 그것은 존재론이라는 메타적 지평 속에서만 근거지어질 수 있다. 철학적 존재론은 근원학 내지는 근거학이다. 이런 점에서 철학으로서 존재론은 분과학문들에 대해 존재론적 우위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별과학과 존재론은 근거지어진 것과 근거 짓는 것과의 관계 속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런 근거지음과 근거 지어짐의 관계가 경직된 것이거나 일방적인 것은 아니다. 양자는 변증법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므로, 분과학문이 존재론을 제약하는 측면도 가진다. 분과학문에서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지거나 새로운 원리들이 주창(主唱)되면, 존재론은 그것들을 철학적으로 일반화하는 방식으로 자체 내에 지양한다. 다시 말해 존재론은 분과학문들의 성과들을 흡수하고 분석 및 총화(總和)하여 그것들을 하나의 수미일관된 통일성 속으로 체계화함으로써 자체 내에 지양한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론은 분과학문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성질의 학문은 아니다. 그러나 존재론은 그 속에서 분과학문들이 총괄되는 하나의 지평이므로 존재론 없이는 분과학문들은 자신의 존립 기반을 가질 수 없다. 모든 학문은 변증법적 유물론 속에서 하나이다. 개별과학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특수한 양태일 뿐, 그 자체로 자립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말했듯이, 오직 하나의 총체적인 역사과학만이 있다. 그리고 학문이 오직 하나의 역사과학뿐일 수 있는 것은 세계가 하나의 역사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유물론 속에서 모든 과학이 총체화될 수 있는 것은, 자의적인 종합이나 사회적 및 담론적 구성 혹은 인간 이성의 총체화하고자 하는 의지나 열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총괄적인 반영으로서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반영하는 대상인 객관적 총체성의 선재하는 실재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반영의 대상이 구체적 총체성이므로, 반영의 산물도 구체적 총체성임은 지극히 당연하다.
또,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세계관인 존재론은 현실에 대한 전체적인 상을 제공해주므로, 과학적 연구의 발견적 지침의 기능을 한다. 분과학문에는 아직 해명되지 못한 현상이나 연구되어야 할 주제들이 산적해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이러한 미개척된 연구영역에 발견적 지침으로서, 그리고 방법론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존재론은 총체적 세계관을 제시함으로써 개별 사실들이 그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지평의 역할을 수행한다. 오직 총체성의 객관적인 지평 하에서만, 개별적 사실들이 서로 관련 없이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체계성 속에서, 자기 전개하는 총체성의 유기적인 구성성분으로, 그것의 계기로 이해되고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은 존재론과 철학은 분과학문의 방법론적 원리의 역할과 발견적 지침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함축한다.
분과학문은 변증법적 유물론 속에 통일되어 있고, 변증법적 유물론의 보편적인 존재론적 원리들이 분과학문들 속에 삼투되어 그것들을 통일성 속으로 결속시킴으로써 변증법적 유물론은 마침내 하나의 세계관으로 된다. 그러나 이 세계관은 변증법적 모순으로 가득한 생동하는 통일체이지, 경직된 체계가 아니다. 즉, 변증법적 유물론 속에서 분과학문들은 상호제약하면서도 상호이행하고 있다. 왜냐하면, 반영의 대상인 물질세계는 실로 생동하는 전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분과학문들 사이에서 접합과 융합이 형성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학문분과들 사이의 접합과 융합, 모순으로 가득 찬 상호이행은, 학문이 반영하는 대상성 속에 저러한 성질의 것들이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주며, 실제로도 그러하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분과학문들과 구분되면서도 구분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반영의 산물이며, 과학과 모순적인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면서 과학의 발전 그리고 사회정치적 실천과 더불어 그 내용이 풍부해지는 발전하는 열린 체계2이다.
2. 존재론의 필요성
존재론으로서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사적 유물론과 더불어 마르크스-레닌주의 세계관의 일부분을 이루는 철학이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의 원리가 수미일관되게 전개된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은 당과 당이 이끄는 단결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관이다. 이 철학은 현실에 대해 관조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 혁명적이며 과학적인 철학은 현실을 변혁하려는 목적의식 하에 형성된 행동과 변혁의 이론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성질을 지닌 실천적 이념인 한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필연적으로 존재론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실천철학인 한에서, 더구나 세계를 혁명적으로 변혁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철학인 한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연구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총체적이고 급진적인 변혁을 위해 활동하는 자는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실천적 변혁을 지향하는 혁명적이고 과학적인 세계관이다. 혁명적 변혁을 지향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활동가와 당은 변혁할 사태에 대한 올바른 이론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론 없이는 변혁운동이 성공적으로 행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레닌이 말했듯이, “혁명적 이론 없이는 혁명적 실천도 있을 수 없다.”3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사유와 개념으로 먼저 장악하지 않으면, 사태를 현실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장악하여 전유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에 공산주의자들이 존재론을 탐구해야 하는 이유의 하나가 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은 기껏해야 부분적 개량이나 개선에 만족해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급진적이고 총체적인 변혁을 주장하고 지향하는 사회세력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사회와 자연에 대한 이론적 반영을 매개로 사회와 자연을 통제, 조절하고 자신의 지배하에 둘 수 있다는 전제로부터 이 철학이 자연과 사회 그리고 사유 발전의 변증법적 합법칙성을 인식할 수 있다는 인식론적 낙관주의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가능하지 않다면, 따라서 자신의 목적을 객관적인 현실 속에서 실현할 수 없다면, 자연과 사회를 자신의 의도와 의사에 부합하게 통제하고 조절하여 자신의 완전한 지배하에 두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세계의 인식가능성은 성공적인 실천에 의해 알려지게 된다. 객관적 현실 속의 합법칙성이나 범주 따위가 우리의 주관 속의 그것들과 부합한다는 것, 따라서 우리가 객관적인 현실을 존재-적합적으로, 진리성 있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그 해답으로 실천을 제시한다. 만약 우리들의 실천이 성공리에 수행되었다면, 따라서 우리의 의식 속의 목적이 객관적 현실 속에서 성공적으로 실현되었다면, 이러한 실천적 경험으로부터 우리의 인식이 객관적 실재에 부합했다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실천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어 의식 속의 목적이 현실 속에서 실현될 수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하나의 구성요소인 변증법적 유물론은 존재론이기는 하지만, 이론적 관조의 철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실천적 관심에 매개된 철학이며, 실천은 항상 사회적 총체성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역사적 실천이므로, 변증법적 유물론은 사회역사적이고 시대적인 조건과 무관한 철학이 결코 아니다. 존재론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실천이 이루어지는 시대적 상황과 조건에 매개된 철학이다.
오늘날 변혁적 실천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이론-실천적 원칙과 총체적 해방의 전망을 상실한 암담한 현실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노동자 운동 내부와 외부에서 청산주의, 수정주의, 소부르주아 기회주의, 각종 무정부주의 등이 원칙 없이 무질서하게 발호(跋扈)하고 있다. 총체적 변혁과 해방적 전망이 상실되어 버림에 따라, 총체성과 혁명이 아니라, 개별특수성에 근거한 국부적이고 점진적인 사회변혁운동과 개량이 모색되고 있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관련하여, 변혁을 지향하는 공산주의자들은 역설적이게도 이론으로 향하는 우회로를 거칠 필요가 있다.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인 세계관 철학으로서의 변증법적 유물론이 다시 거론되어야 하는 이유를 위와 같은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총체성의 이념이 상실된 지 오래된 이 시대에 노동자 운동에 다시 활기를 불어 넣고, 노동자 운동의 정치조직적 발전과 그 실천 투쟁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체계인 존재론을 깊게 탐구하여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적 조건과 상황만이 존재론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론은 사회의 혁명적 발전, 정치적 실천과도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으며,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배제되고 억압받고 수탈당하는 부분, 자본주의적 총체성 내부에서 그것을 부정하는 세력, 반자본주의 총체성인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이해에도 부합한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의 부분적 개량으로는 자신의 계급적 처지를 타개할 수 없으며, 오직 혁명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그 위에 구축된 국가와 부르주아적 법률 등을 타도하지 않으면 자신을 해방할 수 없는 계급이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인 존재론은, 그 자신 자본주의의 총체적인 부정이며, 자본주의를 총체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면 예속된 자로서의 자신을 부정할 수 없는, 즉 스스로를 해방할 수 없는 계급인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이해에 부합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연과 사회에 대해 철두철미한 총체적 인식을 추구하는 데에 있어 계급적 이해를 가진다. 사회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는 데에 무관심하거나 현실 속의 모순에 대해 외면하거나 얼버무리는 데에 객관적인 계급적 이익이 달린 부르주아지와는 달리, 총체적인 과학적 인식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혁명적 실천은 필연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으며, 단기적으로는 자신이 당면한 계급적 처지를 개선하고, 궁극에는 자연과 사회를 비롯한 세계의 주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유적 본질을 남김없이 발양·전개할 수 있는 삶을 원망하는 노동계급과 노동계급을 비롯한 근로인민대중은, 자연과 사회의 합법칙성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일에 객관적인 이해를 가지며 또 사회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적 총체성을 창조하는 활동성이지만, 자신의 산물로부터 소외되어 억압받고 천대받는 그러한 활동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서 자연과 사회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진리에 사활이 걸린 사회세력, 특히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는 개별과학뿐만 아니라, 개별과학이 자신의 부분적 계기인 존재론은 프롤레타리아와 피압박, 피착취 근로인민대중에게 더욱 현실적이고 긴박한 현안으로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오직 존재에 부합한 총체적 반영만이 프롤레타리아트가 행하는 총체적인 변혁운동과 해방투쟁에 이바지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사회경제적 처지와 이해관계를 개선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의 주도세력으로서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성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해방을 위해서 의지해야 할 것은 오직 과학과 진리뿐이다. 오로지 진리성 있는 과학, 그리고 과학에 근거한 주도면밀한 정치 조직적 실천만이 자본주의 사회를 분쇄하고 프롤레타리아트를 해방시킬 수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트를 비롯한 근로인민대중의 절망과 도탄에 빠진 삶을 구원할 수 있다. 그런데 존재론이야말로, 다시 말해, 분과학문들을 자신의 부분적 계기로 포함하고 있는 이 존재론이야말로,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학문이다. 말하자면, 철학으로서 존재론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실천의 무기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무산계급과 무산계급의 선두에 선 선진분자들은 존재론을 자신의 손아귀에 거머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보편존재론으로서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시대적 상황과 계급적 이해에 부합하는 철학이다. 먼저 그것은 총체적 변혁의 전망이 상실된 시대적 상황에 부합한다. 사회주의의 역사적 패배 이후, 해방투쟁은 통일성을 상실했으며, 산발적이고 자생적인 투쟁이나 개별특수적인 부문 운동으로 분산되어 버렸다. 그러나 개별특수적 부문 투쟁이나 개량으로는 문제의 근본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자체를 없앨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투쟁들은 체제의 외부를 지향하는 전복적인 것이 아니라, 체제 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개량과 부분 투쟁의 본질상 그것들은 총체적일 수도 없으며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급진성을 발휘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저러한 투쟁들은 현존하는 체제에 의해 지탱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부정하는 해방투쟁은 과학으로 무장한 당의 조직사상적 지도와 대중의 자발성이 변증법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자본주의 착취 사회의 지배계급의 경제적 이해를 직접적으로, 완전하고도 불가역적으로 침해함으로써 성과적으로 개척될 수 있다. 개별특수성을 띤 부문 투쟁과는 반대로, 공산주의자의 계급투쟁은 현존 착취체제의 기반인, 그리고 이 속에서 창궐하는 각종 사회병리현상과 사회악이 거기로부터 결과하는 가장 근본적인 차원인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겨냥하고 그것을 분쇄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물론, 개별특수적 부문운동도 나름대로의 의의와 성과가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개별특수적 부문운동의 궁극적인 성공도 문제의 근본인 사적 소유와 자본주의 체제를 타도하지 않으면 성과적으로 개척되거나 보장될 수 없다. 착취체제인 자본주의적 총체성 속에서 하나의 문제는 다른 문제와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있으며, 모든 사회적 문제의 근원인 착취적 생산관계가 존립하는 한 문제의 근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분산된 부문운동의 개별특수적 투쟁만으로는 그 투쟁들이 성과를 거두는 데 있어 한계가 있으며, 문제의 근원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없애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에도 이르지 못한다. 이처럼 부문운동이 자신들이 목적으로 하는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라도 그 운동들은 계급투쟁과 결합될 필요가 있다. 부문운동과 계급투쟁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총체적 변혁에로 가기 위해서는 정치조직의 통일적 지도가 필요하며, 정치조직은 자기 활동의 지침과 방법으로서 과학적으로 정초된 이론적 기초가 필요하다. 진보적 사회 변혁 운동이 개별특수적 부분운동으로 해체되고 혁명성을 상실하여 자본주의 내에서의 개량주의에 빠져버린 현실은 그 자체로 운동의 패퇴를 함의하기도 하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지배계급과의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패퇴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운동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원칙을 확고히 하고 다시 재생시키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 체계의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 도달하여야 한다. 이 이론적 기초에 해당하는 것이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시대가 변해도 자본주의의 반동적, 반인민적 본질에는 변함이 없으며, 자본주의의 내적 동학의 원리상, 자본주의 경제는 끊임없이 몰락에로의 경향성이 관철되는 체제이다. 만성적인 경제적 위기에 빠져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혁명의 객관적 조건은 단순히 논리적이고 추상적 가능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재적 가능성이며, 이 가능성이 적절한 주관적 조건과 결합함으로써 혁명은 현실화될 수 있다. 일시적으로 해방투쟁에서 좌절을 겪었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주객관적으로 혁명의 가능성을 창출해내는 체제이므로, 패배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이러한 시대에 회의나 절망에 빠지지 않고 인민대중을 총체적 해방투쟁에로 불러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상이론적 기초가 요구되며, 변증법적 유물론이 바로 그 기초에 해당한다. 우리 시대의 상황과 조건은 존재론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깊게 탐구하기를 촉구하고 있으며, 우리는 정치투쟁이나 경제투쟁과 더불어, 지배계급이 자신의 정치경제적 지배를 확고히 하고 유지시키기 위해 사회 전역에 유포시키는 반동적인 이데올로기에 맞선 이데올로기 투쟁도 전개해야 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철학은 과학성과 당파성의 통일성을 주장한다. 당파성에 관련한 편견과는 다르게,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지위와 입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사태를 고찰하는 당파성으로 하여, 오히려 주관과 무관하게 있는 객관적 사태에 대한 총체적이고도 명징한 인식이 얻어질 수 있다. 당파성과 과학성은 일견 상용(相容)불가능한 범주 같지만, 사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과 입장에 섬으로써만 사태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얻어질 수 있기 때문에, 당파성은 과학성과 변증법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객관적 현실에 인식적으로 가닿을 수 있지만, 그것이 가능한 것은 공평무사한 소위 “과학적” 입장에 섬으로써가 아니다. 애초에 계급들로 분열된 사회에서는 공평무사한 입장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당파성과 과학성의 통일을 주장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프롤레타리아가 처한 객관적인 사회적 위치에서 사회적 총체성에 대해 접근할 때에만, 존재에 부합한 인식이 얻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당파성이 오히려 그것의 대립물인 총체적 인식과 진리로 전도된다. 애초부터 사태에 대한 공평무사한 입장을 취하려는 소위 “과학적”자세는 오히려 자신의 대립물로, 비진리와 비과학으로 반전되는 변증법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왜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 당파적으로 편드는 것이 통념과는 다르게 과학성에 이를 수 있는 길인가. 무슨 근거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당파성과 과학성의 통일을 주장하는가. 피상적으로 보면, 당파성은 사실들을 노동계급의 입맛에 맞게 자의적으로 짜깁기하여 사태를 왜곡해도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당파성의 교의가 말해주는 바는 사태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적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 불리한 것은 배제하고 유리한 것만 취사선택하여도 좋다거나 사실을 왜곡해도 된다는 어리석은 가르침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당파성이 과학성을 담보해주는 이유와 까닭은 첫째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역사적 현실을 창출해내는 바로 그 주체이기 때문이고, 둘째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위치상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자신의 계급적 이해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주체에 의해 창출된 사회역사적 현실은 주체로부터 소외되어 독립적 실재성의 가상을 띤 자립적인 힘으로 주체들에게 경험된다. 그러나 그러한 소외된 현실은 어디까지나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실천이 아니라) 일상적 실천에 의해 구조연관 및 체계로서 부단히 재생산되는 한에서만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진출은 이러한 주객 사이의 괴리와 소외라는 사태를 급변시킨다. 혁명적 정세 속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산출물인 사회역사적 현실을 자신들의 혁명적 실천 속으로 재전유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사회역사적 현실의 물상화와 소외를 타파하고 자신들의 혁명적 실천 속으로 동일화해나감으로써, 사회와 자연을 비롯한 세계의 주인으로 생성되어 간다.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구성 중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을 산출해내는 주체적인 활동성이므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실천은 사회적 주관과 사회적 객관이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자본주의 내의 비(非)자본주의적 영역이며,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제출한 철학과 과학은 근원적 진리(실천)에 입각한 가장 올바른 과학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사회역사적 현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산출한 현실이며, 그 현실이 자신이 산출한 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프롤레타리아적 입장과 관점에서 이루어진 세계에 대한 인식은 내용적으로도 진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집단적 실천에 의해 검증되기 때문이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당파적 입장에 선 존재론, 즉 올바른 존재론에 기반하고 있지 않으면, 사회 변혁 운동의 길을 성과적으로 개척해 나갈 수 없다. 무산계급의 존재론적 관점과 개념, 입장을 전제로 하지 않는 과학은 그 과학성이 담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은 과학을 근거 지으며, 올바른 이론 없이는 올바른 방향성을 가진 변혁적 실천은 있을 수 없다. 현실에 대한 총체적 반영인 존재론을 오늘날 논해야하는 이유와 존재론의 정치적 의의는 바로 이와 같은 사실 속에 놓여 있다. 총체적 변혁인 혁명과 건설을 위해서는 분과 학문적 과학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 존재론이 이론 실천적으로 요구된다.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세계관적 관점을 부여해 주는 존재론의 연구와 그것을 확산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이론적 투쟁은, 총체적 해방과 변혁의 전망이 상실된 이 시대적 상황과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선결조건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총체적 해방과 변혁의 전망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총체적 해방과 변혁이 요구되는 오늘날의 시대적 현실과 계급적 이해에 부합한다. 이것이 오늘날 변혁 운동에 존재론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이 절실히 요구되고 필요한 이유이다.
3. 존재론의 가능성
존재론은 과연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앞서 존재론의 의의와 필요성을 논하면서 존재론이란 한 마디로 말해 존재자인 한에서의 존재자와 그 근원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했고, 사회역사적 현실과 무산계급의 계급적 위치가 우리로 하여금 존재론의 탐구에 매진하게 한다고 언급했다. 존재론은 개별적 사물에 대해서 연구하는 분과학문과 달리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얻고자 한다. 개별자인 태풍이 왜 그리고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개별과학인 대기과학을 연구해야 한다. 또 길가에 놓여 있는 화강암의 화학적 조성과 분자들의 미시적인 배열상태, 그리고 화강암이 띠는 거시적 특성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기화학과 암석학을 연구해야 한다. 하지만 존재론은 태풍이나 화강암과 같은 구체적인 개별자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는다. 존재론에 대해 아무리 깊게 연구하더라도 화강암이 어떻게 생성되는지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애당초 존재론은 개별적이고 특수한 현상에 대해 설명하려는 학문이 아니라, 존재자를 보편적 관점에서 고찰하고, 온갖 현상적 다수성을 근원원리로 귀착시켜 설명하려는 근본적이고 정초적인 학문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이고 근본적이며 정초적인 학문인 존재론을 탐구해야 하는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회역사적 현실과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프롤레타리아 해방투쟁이 탐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인 존재론은 과연 가능한가?
여기에는 몇 가지 합리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이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이유는 분과학문들은 자신들이 설명하고자 하는 현상과 사물을 연구할 때, 암묵적인 존재론을 전제한다는 데에 놓여 있다. 개별현상은 무매개적으로 이론적 지성에게 인지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 맥락 속에 매개되고 제약된 방식으로 현상하며, 그렇게 전제된 전체에 의해 규정된다. 뿐만 아니라, 이론적 지성은 특정 존재론적 선(先)판단4에 매개된 방식으로, 비록 이 선판단을 저 이론적 지성이 명시적으로 의식하고는 있지 않다 하더라도, 사물 현상을 인지한다. 그러므로 사태에 대한 인간의 이론적 인식은 수동적인 받아들임임과 동시에 능동적인 기투의 변증법적 모순이다.
언제나 이미 사회 역사적 현실에 묻어 들어간 채로 주어진 사태에 관하여 사유하는 인식은 자신이 속한 사회역사적 현실이 역사적으로 달라짐에 따라 사태에 대한 기투 양식도 달라진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학은, 사물의 정지 상태를 정상적인 상태라고 간주하고 운동을 분석하는 반면, 근대 물리학에서는 사물은 항상 운동하고 있으며, 이 운동 상태가 정상적인 상태라고 간주하고, 변수들 사이의 함수관계를 확립한다. 외력이 가해지지 않으면 운동하는 물체는 등속도의 직선운동을 한다는 관성의 법칙이 근대 물리학의 기본적인 존재론적 가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정지는 속도가 0인 특수한 운동이라고까지 말한다.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를 총체성의 관점에서, 그러나 그 역사적 일시성과 더불어 고찰한다. 자본주의 사회를 초역사적인 자연 상태로 파악하는 부르주아 경제학은, 그 계급적 편견과 경제학 연구의 몰사상성 탓에, 연구는커녕 짐작조차 못한 자본주의 사회의 멸망의 합법칙성을 마르크스가 폭로해낼 수 있었던 데에는 존재론적 배경이 있다. 다시 말해, 이는 마르크스가 올바른 변증법적 방법과 존재론에 입각하여 정치경제학 연구를 수행했기 때문에 성취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유사한 예를 많이 들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개별과학은 사태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함에 있어 존재론적 가정을 부득이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경험과학의 발달이 존재론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말소해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경험과학은 존재론을 전제하며, 게다가 올바른 존재론이 올바른 경험 과학적 연구를 가능하게 한다. 존재론이 가능한 이유는 이미 존재론이 적어도 비주제적인 방식으로라도 이론적 실천 속에서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론은 분과학문 속에서 늘 “실천”되고 있다. 그러므로 존재론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분과학문들 속에서 현실적이다. 다만, 본격적인 존재론과 분과학문 속에서 전제된 존재론 간의 차이는, 전자가 후자 속에서 암묵적으로 전제된 것을 주제적으로 취급한다는 점에 있다.
경험과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론이 가능한 두 번째 이유는, 우리의 진술의 구조와 관련이 있다. 어떤 명제에 대해 참과 거짓의 진리치를 논할 수 있다. 그런데 명제의 참과 거짓을 가리는 행위는 참에 근거해있지, 그 반대는 아니다. 즉, 거짓에 근거해서 참과 거짓을 가릴 수는 없다. 어떤 학자가 하나의 과학적 명제를 진술한다고 하자. 이 학자가 자신의 명제가 실재와 부합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부합이 과연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한다. 반대로 저 학자가 자신의 명제가 실재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도 문제의 그 부합이 무엇인지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진리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자신의 주장이 진리를 벗어났다고 공언하기 위해서는 참에 의존해야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장이 실재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일치에 대한 모종의 앎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무매개적 경험에 기반을 둔 과학은 비경험적 전제에 의존하고 있다는 추론을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비경험적 일치에 대한 앎을 부정한다면, 경험과학에서 제시된 명제나 법칙의 참·거짓을 따지는 행위는 무의미해지겠고, 개별과학뿐만 아니라 어떠한 학문도 성립하지 못할 것이며 학문적 논의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져버릴 것이다. 이러한 일치에 대한 앎은 모든 개별적 명제에서 나타나지만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항상 배후로 밀려나서 자신의 모습을 직접 드러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배후의 진리가 없다면, 개별적 명제와 사태의 부합여부는 판단할 수 없을 것이고, 어떠한 참·거짓도 성립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만약 경험 과학적 명제의 진위여부를 판별할 수 있다면, 그 말은 이 배후의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런데 이 배후의 진리는 결코 경험적 실재이거나 경험이 아니다. 따라서 경험과학의 영역으로 환원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러한 영역에 대한 앎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영역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 의문은 실천과 관련된 후술하는 문장들에서 해결될 것이다.
존재론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어떻게 존재론은 가능한가? 그 가능성의 조건은 바로 물질성과 관련된 대상적 활동인 실천이다. 실천은 대상과 관련된 활동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 목적을 대상세계에 실현하는 목적의식적인 활동이다. 이 실천은 우선 대개의 경우 (비장하며 영웅적인 혁명적 실천이 아니라) 환경세계 속에서 행해지는 일상적인 실천이다. 일상적 실천은 도구를 가지고 어떤 대상에 활동성을 발휘하여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는 합목적적 활동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적 실천은 심정성, 이해, 퇴락을 등근원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일상적 실천은 항상 어떠한 기분에 젖어 있으며, 도구적 사물이나 타인은 이러한 기분 속에서 현상한다. 그리고 일상적 실천은 항상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 이해하고 있으며 그 가능성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선 대개의 경우 세상 사람들에 의해 주입된 가치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러한 것들을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으로 착각한 채로 살아간다. 일상의 실천을 행하는 존재자는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는 존재자에 몰입해 있음으로서 자기를 앞질러 이미 어떤 세계 내에 있다.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물과 타인에 마음 쓰며 살아가는 비본래적 실천인 일상적 실천은, 죽음으로 선구하여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을 회복하는 본래적 실천과는 다르지만, 본래적이든 비본래적이든 모두 기재하면서 현전화하는 장래인 시간성이 있음으로 하여 가능해지는 실존 형식들이다.
일상적으로 환경세계 속에서 마음 쓰는 활동성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장래 목적을 예기(豫期)하며, 이 미실현 목적에 비추어 현재 실천에 관련이 있거나 유용할법한 과거를 상기(想起)하고, 현재 상황을 현전화(現前化)하여 적절한 합목적적 행동을 취한다. 그런 다음 실천은 자신의 목적을 재정립함으로써 자신을 장래를 향해 개방한다. 실천과정 속에는 시간의 삼차원성이 모순적으로 통일되어 있고, 끊임없이 서로의 안으로 탈자적으로 운동한다. 이 독특한 실천적 시간성은 타인과 도구적 사물에 대해 마음 쓰며 살아가는 일상적 실천의 근본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실천의 시간성은 점적 순간들의 연속된 흐름이 아니다. 기재하며 현전화하는 장래인 시간성은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로 흐르지 않고 오히려 시숙(時熟)한다. 실천의 시간성은 시간성의 탈자태들인 장래, 기재, 현재가 시숙하는 통일성이다.
실천은 인간이 존재론적 논의를 할 수 있게 하는 그 가능성의 조건이다. 왜냐하면, 실천이야말로 동물적 상태를 타파하고 인간이 인간화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시발점이자 인간의 인간화 과정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실천이 존재론을 가능하게 하는 이유는, 바로 실천이야말로 세계가 인간에게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열어 밝혀지게 되는 바로 그 가능성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실천이 없다면, 세계와 실천적으로 교섭하는 주체의 활동이 없다면, 사물이 우리에게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주어질 수 없을 것이다. 전통적인 철학자들의 논의의 저변에 깔린 암묵적인 전제와는 다르게, 사유가 직접적으로 사태에 들러붙어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와 사유를 따로 떼어 내 놓고서 사유가 어떻게 존재에 가닿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제기는 결코 풀릴 수 없는 문제제기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문제제기는 앞서 언급한 검토되지 않은 전제에 입각해 있는 문제제기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존재와 사유의 관계 문제를 저것들 두 개의 항(존재와 사유, 물질과 의식)과 관련은 있지만 구별되는 새로운 차원인 실천을 도입함으로써 해결한다.
인간은 실천하면서 항상 존재에로 나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사물에로 항상 나가 있음”으로서의 실천5을 통해서 우리에게 절대적 총체성의 부분이 소여(所與)되며, 또 실천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 감각하거나 지각하거나 사고하고 이해할 수 있다. 사물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장소는 근대 합리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지성도 아니고, 근대 경험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각도 아니다. 오직 실천이라는 대상적 활동의 장에 사물이 주어지는 한에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 감각하고, 지각하고, 사유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무한한 존재에 접근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우주의 합법칙성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은 왜 가지적인가? 실천이 아니라면, 실천이라는 지평 속에 현상과 사물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한한 세계에 접근할 수 없으리라. 물론 실천이 무한한 절대적 총체성과 전면적으로 교섭할 수는 없다. 실천은 절대적 총체성을 전부 담아내기에는 너무나도 많이 제약되어 있다. 하지만 실천의 지평 속에 주어진 사물에 대해서 이해하고 연구함으로써 실천과 실천이 이루어지는 사회 바깥의 자연적 우주가 무한하다는 것이 알려진다. 우리는 세계와 실천적으로 접촉하고 교섭함으로써만 사유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앎을 얻을 수 있다. 뇌수물질의 활동의 여부와 전혀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현실에 대해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이러한 객관적 현실에 대한 능동적인 실천을 통해서이다. 또, 이 우주가 무한하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실천에 의해서이다. 실천에 매개된 자연 사물은 이미 사회화된 사물이므로, 사회적 현실의 일부이지 자연적 세계가 아니고, 따라서 우리는 즉자적 자연에 대해서 알 수 없다거나 사회역사적 현실 속에 갇혀 있다는 식의 주장에 대해 우리는 거부해야 한다.
세계에 대한 인식이 선행하고 나서 실천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물질성에 대해 활동성을 항상 이미 발휘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생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타당하다. 역사적으로도 이론적 활동에 대한 실천의 우선성이 관찰된다. 과학과 학문이 인류사 초기부터 존재해 왔던 것은 아니며, 다만 가능적으로 실천 속에 포함되어 있던 것이 사회적 발전 과정에서 분화되어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된 것이다. 물질의 선차성과, 의식은 그것의 반영이라는 유물론의 두 근본원리가 알려지게 되는 것도 사변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실천, 수천 년에 걸쳐 수억 명의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 실천에 의해서이다. 실천에 의해 이러한 원리들이 인간에게 드러나게 된다고 해서, 실천이 물질보다 존재론적으로 근원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물질이 근원적이고 실천과 의식은 파생적이다. 실천과 인식은 물질 발전의 결과물이며, 총체성 내부의 높은 단계의 물질 분화형식이다. 인식과 실천은 존재를 전제한다. 따라서 인식과 실천에 대한 연구는 존재론을 전제하고 그것에 의존한다. 실천에 의해 현실에 대해 열려있고 자연과 교섭하는 인간에게 총체성은 자신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드러내지만(현상하지만), 이러한 실천을 가능하게 해주는 궁극적인 조건은 그 무엇에도 제약되지 않는 물질적 총체성, 영원히 운동하는 물질로서의 세계이다. 자연과 사회에 대한 정신적 반영이자 전유인 학문과 예술은 실천의 차원을 전제하며, 실천은 사회 구성체를 전제하고, 실천과 사회는 자연을 전제한다. 그러나 자연은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아무것도 전제하지 않는 자기-원인적 총체성이다. 우리는 이러한 무한한 총체성에 대해 역사적 실천으로 개방되어 있는 만큼 총체성에 대해 인식하고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과 이해는 끝이 없는 무한한 역사적 과정인바, 실천의 사회역사적 제약성 때문에도 그렇고, 절대적 총체성이 무한한 실재성을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통일체가 학문과 예술의 영역을 한 요소로 포함하고 있는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이데올로기적 심급을 최종심급에서 규정하고 제약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경제적 토대에서 자연을 실천적으로 지배하고 현실적으로 전유하는 만큼만, 실천적으로 자연에 열려있는 만큼만 사태에 대한 이해와 인식, 그리고 자연과 신진대사 하는 사회를 자신의 반영 대상으로 삼는 예술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새길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감성적 대상적 활동인 실천에 의해서 사태에 대해 이론적으로나 예술적으로 개방되어 있을 수 있으며, 이러한 개방성으로 말미암아 이론과 예술이 성립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실천은 항상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통일체 속의 계기로서, 저 구체적 총체성 속에서 역사적으로 변화·발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므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세계가 우리에게 드러나는 방식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의 담론사를 (역사적)상대주의의 관점에서 취급한다는 것을 함의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인류의 지성사를 다양한 상대적 관점들 속에 내재하는 절대성을 향한 점진적 진행과정으로 이해한다.
영원하고 무제약적인 물질적 총체성의 변증법적 변화·발전이 인간을 산출하고, 인류의 생물학적 발생 초기, 자연과 일체를 이루던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규정된 자신의 유적 잠재력을 노동을 통해 사회적 대상성 속으로 펼쳐낸다. 자연을 변형하고 개조하여 자신의 의지에 종속시킴으로써, 인간은 자연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변화시킨다. 즉, 인간은 인간 자신으로 대자화되어 간다. 장구한 세월 동안 노동하는 인간은 노동 과정에서, 자연으로부터 자기를 구분함으로써 총체성 속에 분열을 도입하고, 또 유적 인간 속에 계급 분열을 도입하며, 또 자신의 의식 속에도 분열을 도입한다. 말하자면, 자연은 인간의 노동을 통해 자기로부터 자기를 구분하는 것이다. 인간의 활동을 매개로 한 물질적 총체성의 자기구분은 세 겹의 구분이다. 인류의 조직화된 집단적 실천과 그것에 매개된 자연으로의 분열, 그리고 인류의 조직화 내에서의 계급분열, 마지막으로 주관의 자기구분(자기의식의 발생). 자기의식은 칸트가 말하듯이 자연의 최종적인 성립근거가 아니다. 오히려 자연과 자연 속에서 인간이 행하는 실천이 자기의식의 발생적 근거이다. 세계를 향해 능동적으로 반작용함으로써 인간의 의식은 자기로부터의 거리를 비로소 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연적 전제에 자신의 활동성을 가함으로써 유로서의 인간은 자신에게 고유한 사회역사적 현실을 창조한다. 실천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유적 존재를 사회역사적 현실 속에 펼쳐냄으로써, 다시 말해 자신을 대상화함으로써 자기 내부에서의 의식의 자기 구분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이 자기에 대한 거리를 취하여 자기에 대해 의식하게 되는 것은 오직 외적 현실에 대한 실천적 반작용을 행함으로써, 사회역사적 현실을 창조함으로써이다. 인간이 자기에 대해 의식적인 반성적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오직 대상화하는 실천에 의해서이다. 유로서의 인간은 자신을 대상적 세계 속에 객관화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의식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자기구분으로서의 인간은 실천을 그것의 심장으로 하는 역사과정을 거쳐 자각되어 가면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자신의 표상에 불과한 목적을 자연적 인과과정과 결합함으로써, 실천적으로 장악하고, 그것에 대해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 대한 인간의 개조와 사유는 자연의 자기 변형임과 동시에 자기의식이다. 자연은 인간을 산출해냄으로써, 그리고 자신의 산출물인 인간의 노동을 통해서 자신을 더욱 활발히 변화시키고 발전시켜 나간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노동은 자연의 자기 형성 활동의 일부이다. 그리고 자연은 인간을 통해 자신에 대해 이해하고 알게 된다. 대상적 활동으로부터 비롯된 세계에의 개방성 덕분에 인간은 자연의 객관적 합법칙성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인식은 정확히 자연의 자기의식과 일치한다. 그러나 자연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이해하고 인식하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장구한 역사발전과정을 거쳐 가는 인류의 집단적 실천을 통해서이다.
인간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존재자와 존재에 대해서 항상 이미 이해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자이다. 인간을 제외한 무기적 자연이나 유기적 자연의 개별자들은 세계에 대해 이해하지도 못하고, 자연을 아름다운 시어(詩語)로 찬미하지도 못한다. 그것들은 세계에 대해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폐쇄되어 있다. 그것들은 무세계적이거나 몰세계적이다. 그들에게 물리적인 환경은 있을지언정 세계는 없다. 인간은 유일하게 자신의 사유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세계와 존재자 그리고 존재에 대해 개방되어 있다. 인간이, 그것들을 학문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하고, 설명하는 능력과, 예술적으로 형상화하여 자신의 작품 속에서 예술미를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유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세계에 대한 이해를 항상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선(先)존재론적 이해가 인간에게 가능한 까닭은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능동적인 반작용을 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실천함으로써 비로소 세계에 대한 인간의 개방성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존재자와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이해하고 있다. 인간은 존재와 존재자에 대해 물음을 던지며, 도대체 무엇인가 있다는 사태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끼기까지 한다. 세계에 대한 물음과 무엇인가 있다는 사태에 대하여 경이로움에 찬 경탄이 가능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항상 이미 존재와 존재자에 대해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의 실천으로 말미암아 존재자와 존재에 대해 열어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대상적 실천으로부터 비롯된 이러한 존재 이해가 있음으로 하여, 이 선주제적인 존재 이해, 선-존재론적 존재이해가 있음으로 하여 인간에게는 존재론에 대한 탐구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하지만 세계와 존재에 대한 선-존재론적 이해는 오로지 환경에 대한 능동적인 반작용과 그것의 현실적 전유와 장악에 근거해 있다. 여기에 존재론이 가능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놓여 있다. 존재론이 가능한 이유는 결국에는 세계 속의 인간이 사회역사적 현실 속에서 실천하는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며, 이 실천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인간에게, 세계 내의 존재자들과 세계가 열어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실천으로부터 발생하여 실천 속으로 흘러들어가 실현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은 결코 경직된 교조주의 체계이거나 단번에 완성된 형태로 제출된 형이상학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개방된 발전적 체계이고, 이론적 실천과 예술적 실천, 사회정치적 실천의 성과물에 의해 부단히 풍부화되고 완성으로 생성되어 가는 철학이다. 이론의 내부에서 이론을 완결 짓고 근거 지으려는 전통적인 철학적 기획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실천적 경향과 더불어 끝장났다. 이론은 자체 내에서 원리들의 발전적 전개 속에서 연역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론은 항상 자신의 외부를 지시하며 그것을 전제한다. 실천은 이론의 외부라는 점에서 이론의 부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은 이론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의미의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의미에서의 부정이다.
실천은 주관적인 의지나 의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현실에 대해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대상적 활동이다. 물론 마르크스 이전의 독일 고전철학자들도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를 말한다. 칸트 이후의 독일 관념론 철학은 이론이성에 대한 실천이성의 우위라는 칸트의 사상을 수용한다. 칸트 이후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피히테도 합법칙성 하에서의 표상 능력인 오성의 근저에서 그것의 발생적 기원임과 동시에 가능성의 조건인 충동과 욕망을 발견한다.6 그러나 이들 관념론자들의 실천은, 현실의 피와 살을 지닌 구체적인 주체의 구체적인 실천이 아니라, 그러한 현실의 실천이 관념론적 편견을 통해 왜곡된 방식으로 사유 속에 반영된 것에 불과하다. 반면에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말하는 실천은 구체적인 생산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 현실적 인간의 실천이다.
이러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 체계의 실천에 근거하고 있는 특성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단순히 자본주의의 병폐현상과 그것의 사회역사적 뿌리를 혁명적으로 폐절한다는 혹은 혁명적 노동계급의 진출로 말미암아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를 혁명적으로 타도하고 새로운 제도와 사회체계를 건설한다는 의의를 넘어, 마르크스-레닌주의 세계관과 이 세계관에 근거를 두고 이루어지는 당의 영도와 전략전술 및 인민대중의 혁명과 건설 활동(인간 해방을 위한 과정)이 가장 근원적 의미에서의 진리 그 자체라는 것을 보증한다. 왜냐하면, 뒤에서 자세하게 논급할 것이지만, 노동계급의 전위들의 조직된 부대인 당의 영도와 당을 따르는 근로인민대중의 집단적 실천은 그 속에 자연과 사회를 비롯한 대상성과 주체적 활동성이 서로 맞부딪히며 투쟁과 통일이 부단히 갱신되는 과정이며, 존재와 사유가 근원적으로 일치하는 차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방적 실천은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 진리이다. 전통적인 플라톤주의에서는 진리란 초월적인 공간에 정립된 불변의 무엇이었다. 진리는 확고불변의 영원성을 지닌다는 억견과는 반대로.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진리는 물(物)이 아니라, 과정이다. 실천은 주관도 아니고 객관도 아니며, 오히려 주객이 만나 투쟁하고 불화를 겪는 대립물의 투쟁과 통일의 과정이며, 산출성과 피산출성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역동성이다. 근원적 진리7는 그 자체로 과정적인 것이며, 주관과 객관이 구분되면서도 구분되지 않게 하나로 일체화되어 있는 이런 실천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진리이다. 왜냐하면, 뒤에서 자세히 논할 것이지만, 파생적 진리들은 바로 이러한 의미의 본래적 진리로부터 발원하며, 본래적 진리에 의해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천이란 무엇인가? 실천은 물질성과 관련된 감성적 대상적 활동이다. 대상적 실천은 의식을 객관화하는 과정이자, 객관이 주관화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실천은 주관과 객관이 만나 일치하는 유일무이한 지평이다. 실천 속에서 주관과 객관은 대립물로서 일치하며, 주관과 객관은 실천과정의 계기로 포함되어 있다. 객관성과 작용하는 실천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주관적 표상과 객관적 사태가 일치하는지 불일치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런 경우에는, 사태에서 얻어진 주관적 표상과 이렇게 얻어진 표상을 대상과 일치하는지 비교하기 위해 다시 인식한 대상 사이의 비교밖에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이렇게 되면 객관과 주관적 표상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표상과 주관적 표상을 서로 비교하여 그것들의 동일성 여부를 판정하려고 드는 셈이 된다. 이렇게 되면, 기껏해야 물 자체에 대한 접근가능성을 부정하고, 자기의식 속에서 주관과 객관의 일치 가능성을 보는 칸트주의로 나아가거나, 심지어는 버클리 주교의 주관적 관념론 철학에 빠져버려 거기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스콜라 철학자들이 말했듯이, 명제적 진리가 만약 지성과 사물의 일치라면, 그리고 지성과 사물의 불일치가 비진리라면, 진리든 비진리든 모두 오직 실천이라는 주객이 동일화된 지평과 차원이 전제되었을 때만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실천이야말로 진리는 물론이거니와 비(非)진리조차도 가능하게 하는 가능성의 조건이다. 주관과 객관이 대상적 활동 속에서 이미 서로 만나서 변증법적으로 상호이행하면서 동일화되어 있지 않았다면, 사태와 주관적 표상의 일치로서의 진리도 불가능하거니와 그것들의 불일치도 불가능하다. 주관과 객관이라는 대립물의 불일치도 그것들의 동일성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천은 인식 내용의 검증 기준으로 될 뿐만 아니라, 진리와 비(非)진리를 공히 가능하게끔 하는 가능성의 조건이자 지평이다. 일치뿐만 아니라 불일치조차도 대립물의 선일치가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주관이 사태와 불일치하는지를 알려면 주관적 표상과 사태와의 일치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먼저 일어나 있어야만 하고, 문제의 그 일치가 무엇인지 이미 알려져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오직 실천 속에서만 우리는 주관과 객관, 존재와 사유, 물질과 의식이 통일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실천이 전제되지 않으면, 진리와 비진리 모두 불가능하다. 앞서 언급한 진리치와 관련된 내용, 다시 말해 명제적 진리가 명제적 진리와 비진리 양자의 기준이자 그것들 양자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그 일치가 무엇인지 알려져 있어야만 한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과연 어떻게 이러한 일치를 알고 있는가 하는 의문은 비로소 실천에서 그 해명과 해답이 주어진다. 문제의 그 일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실천에서 주관과 객관이 항상 이미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성과 관련된 대상적 실천은 그 위에서 명제적 진리와 명제적 비진리가 가능하게 되는 근본적인 의미의 진리이며, 실천은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 조성되어 있는 동시에 저 대립이 와해되고 다시 통일화되어 가는 과정이다.
우리가 탐구하려는 유물변증법적 존재론은 도대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그 가능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존재론적 탐구는 가능하며, 존재론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과학이나 예술의 가능성마저도)은 실천에 기초해 있다. 왜냐하면, 실천으로 인한 열어 밝혀져 있음으로 말미암아 존재물음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천하는 존재자에게 있어 존재물음이 가능하다는 것은 우리가 자신이 만나는 존재자와 그 존재자가 속해 있는 세계에 대해 이미 열어 밝혀져 있음을 시사(示唆)한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미리 알려져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물음을 던질 수조차 없다. 존재론의 가능성은 단적으로 실천하는 존재자의 열어 밝혀져 있음에 놓여 있다. 존재와 존재자에 대한 학문적 탐구의 가능성의 조건은 오직 역사적으로 실천하는 인간의 개방성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하에서 탐구할 유물론적 존재론은 이렇게 사회 역사적 실천 속에서 형성된 열어 밝혀져 있음과 존재 이해의 명석판명화이자 언어적 존재 이해의 개념적·술어적 철저화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2026년 1월 13일
- 있는 것을 있는 것인 한에서 그리고 그것에 그 자체로서 속하는 것들을 이론적으로 고찰하는 어떤 학문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개별 학문들 가운데 어느 것과도 같지 않은데, 그 이유는 다른 학문들 가운데 어떤 것도 있는 것을 있는 것인 한에서 보편적으로 탐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학문들은 있는 것의 한 부분을 떼어내서 그것에 속하는 부수적인 것을 이론적으로 고찰하는데, 예컨대 수학적인 학문들이 그렇다. 우리는 원리들과 최고의 원인들을 찾고 있기 때문에, 분명 그 자체로서 이런 것들을 갖는 어떤 자연적인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만일 있는 것들의 요소들을 찾는 사람들이 찾았던 것이 바로 그런 원리들이라면, 그 요소들은 필연적으로 있는 것에 속하되, 부수적인 뜻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있는 것인 한에서 속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있는 것인 한에서 있는 것에 속하는 첫째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Aristoteles, 『형이상학』, 제1권, 조대호 역, 파주: 나남출판사, 2012, 129-30.)

- 반면, 헤겔의 체계는 닫힌 체계라고 볼 수 있다. 헤겔에 따르면, 정신의 최초의 즉자적 통일성이 분열되어 자연과 유한한 정신으로 외화(外化)된 다음, 자연 속에서 자신을 인식함으로써 물질적 타성을 떨쳐내고 자기 자신으로 복귀한다. 헤겔 철학 체계는 이러한 정신의 자기전개 과정을 논리 개념적으로 파악해 놓은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헤겔의 체계에 자연철학과 정신철학이 있기는 하지만, 이 두 학문들도 논리학적 파악에 종속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생동하는 현실을 일차적인 것으로 놓고 유물론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파악된 범주로 현실 전반을 논리학화하는 데에 헤겔 철학의 결점이 있다 하겠다.

- V. I. Lenin, 『レーニン選集』, 第2冊, 初版発行, マルクス=レーニン主義研究所レーニン全集刊行委員会訳, 東京: 大月書店, 1957, 27.

- 이 선판단은 의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물질과 감성적 대상적으로 실천하는 과정에서 의식 속에 대상세계의 외연적·질적 속성, 본질적 관계 등이 반영되어 들어간 것에서 비롯된다. 이 과정에서 사태에 대한 무의식적 반영이 이루어지고, 이때 얻어진 반영의 결과물은 이론적 실천의 전제가 되며 선판단으로서 기능한다. 존재론은 실천이나 이론에서 이미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해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선판단을 해석하고 검토하며, 주제적으로 명확하게 다루는 학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 이 실천은 고립된 개인의 일상적 실천도 아니고, 몰역사적 실천도 아니다. 이 글에서 사용되는 실천이라는 개념은 항상 타자와 관계 맺으며 이루어지는 집단적 실천이며. 사회적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적 실천이다.

- 지식학에서 전개되는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에 대해서 간략히 서술하자면 이하와 같다. 피히테 관념론의 출발점은 절대적 자아의 사행이다. 사행은 절대적 자아의 정립하는 활동성과 그것에 의해 정립되는 사태가 동일한 차원을 의미한다. 나는 나를 정립하면서 그 정립에 의해 동시에 정립되는 바의 것이다. 절대적 자아 속에서 정립성과 피정립성이 무매개적으로 일치하는데, 이 동일성의 관계가 동일률의 형이상학적 근거이다. 피히테의 관념론은 이 동일성으로부터 시작하여 범주적 형식을 연역하고, 칸트가 주관 외부로부터 도입한 감성의 질료까지도 논리적으로 도출해낸다. 자아의 절대적 활동성은 자기로부터 비롯됨이므로 자유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진공 속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맞서 저지하고 있는 대상성을 필연적으로 요청한다. 이 대상성은 자아의 반정립의 산물이지만, 활동성의 발휘와 자유를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으로서 자아는 자신의 최초의 동일성, 다시 말해 자기 자신과의 완전한 합치를 회복하기 위해 부정되고 극복되어야할 대상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저지와 장애는 완전히 지양되어버릴 수는 없는바,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자아는 활동성을 발휘할 수 없게 되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히테 관념론에서는 자아는 대상성으로 나타난 자연을 완전히 내부로 지양하여 자기 자신과의 무한한 동일성이 되려고 분투하지만, 결코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는 그러한 존재이며, 끊임없는 극복과 초월의 과정으로서만 존재한다.

- 이 진리와 다른 의미를 지닌 진리가 있는데, 이것이 파생적 진리이다. 그 중 하나는 언어로 표현된 사태에 대한 표상, 명제가 사태와 부합한다는 의미에서의 진리이다. 이론이 현실과 부합하는지,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 그것의 현실적 차안성 여부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차원은 실천이다. 실천으로 명제의 현실과의 부합여부를 판정할 수 있다. 이러한 부합은 근원적 일치인 실천에 비해 파생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