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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 제1장 (6)」 『총명한 유물론』 제2집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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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 그리고 보편·개별의
변증법
인간의 본질을 ‘유(類) 개념’ 속에서 인간들을 이상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찾으려는 시도는 보편과 개별의 관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념을 전제한다.
형이상학자에게서, 오직 개별만이 구체적이다─감각적으로 지각되는 개별 사물, 대상, 현상, 사건, 개인 등등. 그에게 있어서 ‘추상’이란 정신적 분리 작용의 산물이며, 그 현실적 대응물은 많은(혹은 모든) 개별 사물·현상·인간들의 유사성이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보편은 현실 속에서 오직 다수 개별 사물 사이의 유사성으로만, 그리고 오직 구체적 개별 사물의 한 측면으로만 존재한다. 개별 사물과 분리된 그것의 존재, 즉 그 자체로서의 존재는 오직 인간의 머릿속에서만, 오직 하나의 낱말로서, 하나의 용어의 뜻과 의미로서만 실현된다.
언뜻 보기에는, 보편과 개별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견해야말로 유물론적이고 상식적인 유일한 견해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언뜻 보기에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문제는, 이 입장이 바로 문제에 접근하는 그 방식 속에서, 사물들 자체 속에, 머릿속 바깥의 현실 속에 존재하는 보편과 개별의 변증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인간 본질에 대한 포이어바흐적 규정과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규정이 갈라지는 방식을 살펴봄으로서 가장 생생하게 드러낼 수 있다. 포이어바흐는 헤겔의 관념론, 즉 ‘순수 사유’를 인간의 본질로 삼는 그의 입장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속에, 그리고 사회생활의 물질적 생산에 내재하는 변증법을 헤겔에 대립하여 제시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사회학과 인식론 모두에서 추상적 개인에 머물러 있었던 이유이다. 그가 자신이 ‘구체적인’, ‘현실적인’, ‘실재하는’ 인간을 다루고 있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은 포이어바흐의 상상 속에서만 ‘구체적’이었을 뿐이다. 그는 인간의 실제적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지 못했다. 그는 인간의 실제적 ‘구체성’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보지 못했다.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더라도, 그것은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이라는 용어들이 포이어바흐에 의해 참된 철학적 의미와는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가 ‘구체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탁월하게 입증했듯이, 사실상 지극히 추상적인 것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포이어바흐가 말하는 ‘구체적’이라는 용어는, 각 개인에게 내재하면서 모든 개인에게 공통적이며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성질들의 집합에 적용된다. 그의 인간 개념은 이러한 성질들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 곧 변증법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전형적으로 추상적인 인간의 묘사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물론적 관점에서, 인간 존재의 진정한 구체성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철학자가 ‘구체적’이라는 용어를 그 완전한 의미에서 적용할 수 있는 객관적 실재란 무엇인지를 최초로 밝혀냈다.
그들은 인간의 구체적 본질을, 각 개인에게 내재하는 일련의 성질들 속에서가 아니라, 사회적 생활의 전체 과정과 그 발전 법칙들 속에서 발견했다. 인간의 구체적 본성에 관한 문제는 여기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사회적 관계 체계의 발전 문제로서 제기되고 해결된다. 인간과 사물 사이의 보편적(사회적으로 구체적인) 상호작용 체계는, 개별적인 개인에 대해서는, 그로부터 외부에서 그리고 독립적으로 형성된, 그의 고유한 인간적 현실로서 나타난다.
자연 그 자체는 아무것도 ‘인간적인’ 것을 창조하지 않는다. 모든 특유의 인간적 특징들을 지닌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 노동의 결과이자 산물이다. 처음 보기에는 인간의 자연적이고 해부학적으로 타고난 특성처럼 보이는 곧게 걷기조차도, 실제로는 이미 성립된 사회 안에서 아이를 교육한 결과이다: 사회로부터 격리된 모글리식(a la Mowgli) 아이(이러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는 네 발로 달리는 것을 선호하며, 이 습관을 고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개별적 인간의 특성, 성질, 그리고 특징들 가운데 궁극적으로 사회적 노동의 산물인 것들만이 특별히 인간적인 것이다. 물론 해부학적·생리학적 전제조건을 제공하는 것은 대자연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취하게 되는 특별히 인간적인 형식은 노동의 산물이며, 오직 노동으로부터만 그것을 이해하거나 연역할 수 있다. 반대로, 노동의 산물이 아닌 인간의 모든 성질은 인간의 본질을 표현하는 특성들에 속하지 않는다(예를 들어, 부드러운 귓불처럼 그것이 ‘인간 고유의 특징’이기는 하지만, 다른 어떤 생명체에도 없는 특징일지라도 말이다).
인간적 생활 활동에 눈뜨는 개인, 즉 자연적·생물학적 존재가 사회적 존재가 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은, 교육을 통해 이러한 활동의 모든 형식에 동화되지 않을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생물학적으로 유전되는 것은 없다. 유전되는 것은 그것들에 동화될 수 있는 생리학적 잠재력뿐이다. 처음에 이 활동 형식들은 그에게 전적으로 외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전적으로 객관적인 것으로, 동화와 모방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교육을 통해 이러한 사회적 인간 활동의 형식들은 개인적, 개별적, 주관적 소유로 전환되며, 심지어 생리학적으로 고정된다. 성인은 비록 원한다고 해도 더 이상 네 발로 걸을 수 없는데, 그것은 조롱받을까 봐서가 아니다; 이는 날고기를 먹으면 그의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과 유사한 이유에서 그런 것이다.
다시 말해, 이른바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모든 특성의 총합은 사회적-인간적 노동 활동의 결과이자 산물(물론 최종적인 산물)이다. 인간은 그것들을 자연 자체에 빚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그것을 신이라든가 다른 어떤 이름(예: ‘이념’)으로 불리는 초자연적 힘에 빚지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그것들을 오직 자기 자신과 이전 세대의 노동에만 빚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곧게 걷기보다 훨씬 더 감각적이면서 동시에 객관적(물질적)이며 정신적인, 보다 복잡한 형태의 인간 활동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역사를 통하여 축적된 인류 문화는 현대의 개인에게는, 그의 개별적 인간 활동을 규정하는 선차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과학적(유물론적) 관점에서 볼 때, 개인, 즉 인간 개성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보편적 인간 문화를 통일적으로 구현한 존재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 문화는 물론 개인 속에서 다소간 일면적이고 불완전한 방식으로 실현된다. 한 개인이 문화의 부(富)를 자기 소유로 만들 수 있는 정도는 그 자신에게만 달려 있는 게 아니라, 훨씬 더 크게는 사회와 그 사회에 고유한 노동분업의 방식에 달려 있다.
문화의 어떤 영역이든, 혹은 인간 활동의 어떤 형식이든 그것의 실제적인 동화는, 그것을 독립적, 개별적, 창조적인 방식으로 더 발전시킬 수 있을 정도로 동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동적 관조를 통해서는 아무것도 동화될 수 없다―그것은 마치 하늘에 성을 쌓는 것과 같다. 능동적 실천이 없는 동화는 아무런 결과도 낳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보편적 인간 문화를 동화하는 방식은 노동분업의 형태에 의해 규정된다. 물론 ‘편향성(일면성)’에도 여러 형태가 있다. 이 문제의 해결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거둔 가장 중요한 성취는 부르주아적 노동분업의 모순을 세심하고 구체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적대적인 계급적 노동분업은 각 개인을 극도로 일면적인 인간, 즉 ‘부분적’ 인간으로 만든다. 그것은 타인의 발전 가능성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어떤 능력을 발전시킨다. 어떤 능력들은 일부 개인들에게서 발전하고, 다른 능력들은 또 다른 개인들에게서 발전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발전의 일면성이 개인들을 인간으로서 서로 연결시키는 매개로 작용하며, 보편적 발전이 실현되는 형식으로 기능한다.
이 경우 인간 발전의 구체적 충만성은 인격적, 개별적 발전의 충만성에 기인하며, 각 개인이 불완전하고 일면적이며, 즉 추상적인 인간임이 드러난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만약 포이어바흐가 이러한 객관적으로 추상적인 개인을 ‘구체적’ 인간으로 간주했다면, 그것은 단지 부르주아 이론가로서의 한계, 곧 현실의 상태를 가리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의 표현일 뿐 아니라, 그의 입장의 논리적 약점의 표현이기도 했다. 인간의 본질, 곧 인간 일반의 구체적 개념을 구성하기 위해, 포이어바흐는 역사에 의해 발전된 모든 실제적 차이로부터 추상하여, 재단사와 화가, 자물쇠장이와 사무원, 농민과 성직자, 임금노동자와 기업가에게 동일하게 특징적인 일반적 속성을 찾으려 했다. 그는 계급이나 직업에 상관없이 모든 개인에게 공통된 속성들 속에서 인간의 본질, 진정한 구체적 인간성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인류의 실제적 본질을 구성하는 바로 그 모든 요소―즉 상호 매개하는 다양한 인간 활동 양식들의 총체로서, 대립을 통해 발전하는 본질―로부터 추상해 버린 셈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논리학에 따르면,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이론적 개념, 인간 본질의 구체적 표현은 포이어바흐가 무시하는 바로 그 차이와 대립(계급적·직업적·개별적 차이)을 정확히 고려함으로써만 형성될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은 잘 발달되고 체계적으로 구성된 능력들의 체계, 즉 그 필요에 따라 개인들을─수학자, 목수, 직조공, 철학자, 기업가, 은행가, 하인 등으로─형성하는 복잡한 노동분업 체계로서만 현실적이다.
다시 말해, 인간 본질에 대한 이론적 규정은 사회적·인간적 활동의 모든 다양한 표현과 양태를 발생시키고 발전시키는 필연성을 드러내는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이 체계의 가장 일반적인 성격, 즉 ‘인간 본성’의 보편적 규정에 관해서는, 그 성격이 인간 문화의 모든 부(富)가 필연적으로 성장하는 현실적·객관적으로 보편적인 토대를 표현해야 함을 지적해야 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인간은 자신이 직접 만든 노동 도구를 사용하여 노동하기 시작할 때 동물 세계로부터 분리된다. 노동 도구의 생산은 바로 인간의 생활 활동, 즉 인간 존재의 첫 번째 형태(본질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이다.
따라서 인간 안의 모든 인간적인 것의 현실적 보편적 기초는 생산수단의 생산이다. 바로 이 토대로부터 의식과 의지, 언어와 사유, 직립보행과 그 밖의 모든 다양한 인간의 성질들이 발전해 나왔다.
만약 일반적으로 인간에 대한 보편적 정의, 개념의 간단한 정의를 시도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것이다: “인간은 노동 도구를 생산하는 존재이다.” 이것이 구체적 보편 개념 규정의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 정의는 구(舊)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보편적이기에는 허용될 수 없을 만큼 ‘구체적’이다. 모차르트나 라파엘, 푸시킨이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인간 종의 확실한 대표자들은, 단순한 형식적 추상과 삼단논법 도식만으로는 이 정의에 포함시키기 어렵다.
반대로, ‘노동 도구를 생산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정의는 구(舊)논리학에 의해 보편적 정의가 아니라 순전히 특수한 인간 정의로 평가될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유형, 계급, 혹은 직업―즉 기계 제작 공장이나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만의 정의로 인정될 것이며, 그 이상도 아니라고 여겨질 것이다.
이러한 분기의 원인은 무엇인가? 사실은, 이 구체적·보편적 규정이 도출된 토대인 마르크스의 논리학이, 보편–특수–개별(단자) 사이의 상관관계를 비변증법적 논리학과는 다르게 파악하는 개념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노동 도구, 즉 생산수단의 생산은 실로 인간 존재의 현실적이며 따라서 전혀 특수한 형태이다. 동시에,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 발전의 나머지 전부에 대한 현실적 보편적 토대, 인간 안에 인간적인 모든 것의 보편적 유전적 기초라는 성격을 덜 가지는 것은 아니다.
노동 도구의 생산이야말로 인간 활동에서 최초의 보편적 형태, 다른 모든 인간적 성질의 “전부 예외 없는” 객관적 기반, 인간의 인간적 존재의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형태─이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체계에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보편 개념 속에 표현되어 있는 바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 전체의 가장 복잡한 사회적 현실의 객관적·보편적 기반인 노동 도구의 생산은 천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개별 인간들에 의해 수행되는, 개별 행위들 속에 실제로 실현되는 인간 활동의 완전히 특수한 형태이기도 하다. 노동 도구 생산이라는 사회적 행위를 분석하면, 이 행위의 내적 모순들과 그 전개 성격이 드러나야 하며, 바로 그 전개로부터 인간의 말, 의지, 사유, 예술적 감각과, 나아가 집단의 계급 분화, 법·정치·예술·철학·국가 등의 출현이 어떻게 발생하는지가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이해에서, 보편자는 특수자와 개별자에 대하여─정신적 추상이 감각적으로 주어진 현상의 충만함에 대립하는 방식으로─형이상학적으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 특수, 개별의 현실적 통일로서, 객관적 사실로서, 동일한 구체적이고 역사적으로 전개된 체계 내부의 다른 객관적 사실에 대립한다. 여기서는 인간의 사회적·역사적 현실이 그에 해당한다.
이 경우 개별에 대한 보편의 관계 문제는, 단지 혹은 주로 감각적으로 주어진 객관적 실재에 대한 정신적 추상의 관계 문제로서가 아니라, 감각적으로 주어진 사실들에 대한 다른 감각적으로 주어진 사실들 사이의 관계, 곧 대상의 자기 자신에 대한 내적 관계, 그 상이한 측면들의 상호 관계, 곧 객관적 구체성의 자기 내부의 내적 분화의 문제로 제기된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그리고 그 결과로서, 이 문제는 이러한 연관 속에서 표현되는 분절된 구체성을 표현하는 개념들 사이의 관계 문제로서 제기된다.
추상적 보편이 올바르게 추출되었는지 판정하려면, 단순한 형식적 추상 과정을 통해 그것이 예외 없이 모든 특수하고 개별적인 사실을 직접 포괄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주어진 관념을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함에서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사정은 구체적 보편 개념과 감각적으로 주어진 특수 및 개별 현상의 다양성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는 다르다. 어떤 개념이 대상의 보편 규정을 드러내었는지 아니면 비보편적 규정을 드러내었는지를 알아내려면 훨씬 더 복잡하고 의미 있는 분석이 요구된다. 이 경우 우리는, 그 개념 속에 직접 표현된 특정한 현상이 동시에 주어진 구체적 체계의 다른 모든─역시 특수한─현상들을 그 필연성 속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보편적 유전적(생성적) 기반인가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 도구의 생산 행위는, 다른 모든 인간적 특성이 그 필연성 속에서 그것으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바로 그런 종류의 사회적 현실인가,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그 개념의 논리적 성격 규정, 곧 그것이 보편적인지 비보편적인지를 결정한다. 이 개념 내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이 경우 긍정적 대답을 산출한다.
반면 동일한 개념을 오성(intellect)의 추상적 논리학의 관점에서 분석하면 부정적 대답이 나온다. 인간 종의 개별적 대표자들이라 의심할 바 없는 존재들의 압도적 다수는 이 규정에 직접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낡은 비변증법적 논리학의 관점에서는 이 개념은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보편적 개념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논리학에서는, 이 개념이야말로 진정으로 보편적인데, 바로 그것이 다른 모든 인간적 특성들의 사실적·역사적 발전의 사실적·객관적 토대를 직접적으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인간적인 모든 것의 구체적 보편적 기반이다.
다시 말해, 어떤 개념의 보편적 성격이라는 물음은 다른 영역으로, 즉 실제적 발전 과정의 연구 영역으로 옮겨진다. 발전적 접근이 따라서 논리학의 접근이 된다. 이 접근은 또한, 개념은 추상적 보편이 아니라 레닌의 적확한 공식에 따르면 특수, 개별, 단일자의 풍부함을 그 자체 속에 체현하는, 곧 ‘구체적 보편’을 표현해야 한다는 유물변증법의 명제를 규정한다.
특수한 것과 개별적인 것의 이러한 풍부함은, 당연히, 개념 그 자체 속에 구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념 속에서 반영되는 객관적 실재 속에, 즉 보편 개념의 규정들로서 추상되는 특성들을 가진, 감각적으로 주어진 바로 그 특수한(그리고 심지어 개별적인) 현실 속에 구현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은 노동 도구를 생산하는 존재’라는 개념 속에 인간의 다른 모든 성질에 관한 개념들이 그 자체로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노동 도구를 산출한다는 실제적 사실이 그 성질들의 발생과 전개에 대한 필연성을 자기 속에 포함하고 있다. 상품 개념이든 가치 개념이든, 자본주의의 다른 이론적 규정들의 모든 다양성이 그 자체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산자들 사이의 현실적 연관의 상품형태야말로 거기서 ‘부’의 모든 것─심지어 임금노동자의 빈곤까지도─이 발달하는 배아이다. 바로 그 때문에 마르크스는 단순한 상품교환이라는, 사람들 사이의 실제적이고 직접 관찰 가능한 관계의 분석 속에서 현대사회의 모든 모순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성격의 그 무엇도, 개념 ‘자체’에서는 관찰되지 않는다. 『자본론』의 부르주아 비평가들과의 논쟁에서, 마르크스는 자기 책의 첫 대목들이 상품의 개념에 대한 분석이 전혀 아니며, ‘상품관계’라 불리는 하나의 기본적 경제적 구체성─현실적이고 감각적으로 관조되는 사실─에 대한 분석임을 강조해야 했다. 그것은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추상이 아니다.
따라서 가치 범주의 보편성은 우선 무엇보다 개념이나 정신적 추상의 성격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출현에 있어 상품형태가 수행한 객관적 역할의 성격이다. 바로 그 결과로서만, 이 현실과 그것이 전체 구조 속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표현하는 개념의 논리적 성격 또한 보편성임이 입증된다.
‘가치’라는 말과 그것에 상응하는 비교적 규정된 개념은 페티나 스미스나 리카도에 의해 창안된 것이 아니었다. 그 시대의 어떤 상인이든, 사거나 팔거나 교환될 수 있는 것, 어떤 비용이 드는 모든 것을 ‘가치’라고 불렀다. 만약 정치경제학의 이론가들이, 그 전통적 명명으로서 ‘가치’라고 불린 모든 대상이 지니는 일반적 요소를 추상함으로써 그 개념을 정식화하려 시도했다면, 그들은 물론 결코 하나의 개념을 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다만 ‘가치’라는 말의 의미─정확히 그 시대의 어떤 상인이라도 암시하고 있던 바로 그 동일한 의미─를 끌어냈을 뿐일 것이다. 그들은 그 이름 ‘가치’가 적용되었던 현상들의 성질들을 단지 열거했을 뿐일 것이다. 전체 작업은 그 이름, 그 말의 적용 가능성의 한계를 밝혀내는 것, 곧 이름에 암시된 의미의 분석을 넘어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핵심은, 그들이 이 물음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식화했다는 점이며, 바로 그 결과로서 그에 대한 대답이 하나의 개념으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러한 접근의 실제적 본질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페티로부터 시작되는 정치경제학의 고전가들은, 자본주의 상품순환의 표면에서 관찰되었으며 당대의 관용적 사용에 의해 ‘가치의 운동’의 사례들로 불렸던 그 모든 개별 경우로부터 추상을 전혀 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물들의 가치 속성의 현실적 근원, 가치의 실체라는 문제를 매우 명백하고 직접적으로 제기했다.
그들의 주요한 성취는 바로 그들이, 기본적 상품교환을 고려함으로써, 가치의 실체를 엄격히 규정하려 시도했다는 점에 놓여 있었다. 이로써 그들은 가치의 실체가 사회적 노동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가치 개념을 전개함에서, 그들은 실제로 한 상품이 다른 상품과 교환되는 것을 면밀히 연구했는데, 그것은 왜, 어떤 객관적 토대 위에서, 어떤 구체적 실체 속에서, 하나의 사물이 실제로 다른 하나와 등가로 놓이는가를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다시 말해, 그들은 [가치의 본질에 대해] 자신들 작업의 논리적 본질을 명확히 자각하지 못한 채, 실제로는 가치 운동의 하나의 특정한 경우, 즉 단순 상품교환이라는 사실을 고려했던 것이다. 이 특정한 경우의 분석이 가치 개념을 산출했다.
영국 경제학의 효시인 윌리엄 페티는 다음과 같이 논증함으로써 가치 개념을 얻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페루의 땅속에서 은 1온스를 캐어 런던으로 가져오는 데 걸리는 시간과 같은 시간에 한 ‘부셸’의 곡물을 생산할 수 있다면, 하나는 다른 하나의 자연적 가격이 된다. … ”1
여기에는 ‘가치’라는 말이 전혀 들어 있지 않음을 주목하자─페티는 ‘자연가격’을 말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출현하는 것은 바로 한 상품 속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양이 구현되어 있다는 의미에서의 가치 개념이다.
개념이란─그것이 단지 용어로 표현된 일반 관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개념이라면, 언제나 추상적 보편이 아니라 구체적 보편을 표현한다. 곧 그것은, 다른 특수 현상들 가운데 하나의 특수 현상인 동시에, 모든 다른 특수 현상들 속에 ‘세포’로서 들어 있는 진정한 보편, 구체적 보편의 요소를 표현한다.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의 고전적 대표자들은, 자연발생적으로, 시행착오를 거쳐, 가치 규정의 이 올바른 길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사유 방식의 진정한 의의를 완전히 자각하지는 못했다. 그들의 사유가 의식적으로 지향하고 있던 로크의 철학은, 보편 개념들을 규정하는 문제에 대한 어떤 열쇠도 그들에게 제공하지 않았다. 이는 그들을, 논리적 관점에서 보기에 매우 교훈적인 여러 역설, 그리고 몇 가지 근본적 난점들로 이끌었으며, 이러한 난점들의 진정한 의미는 오직 마르크스의 분석에서 비로소 밝혀졌다.
자본주의 경제의 다른 모든 범주에 대한 보편적 토대로서의 가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그리고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에서 달성되었던 그 종류의 분석 사이의 근본적 차이는, 마르크스가 ‘가치 일반’, ‘가치 그 자체’의 과학적 규정들을, 화폐가 개입하지 않는 하나의 상품이 다른 하나와 직접 교환되는 구체적 고찰에 기초하여 구성했다는 바로 그 사실 속에 놓여 있었다. 이 작업을 수행하면서 마르크스는 이 토대 위에서 발전된 다른 모든 종류의 가치들(잉여가치, 이윤, 지대, 이자 등등)로부터 엄격한 추상을 행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리카도의 주요한 오류는 ‘가치 그 자체’를 고려함에 있어서 ‘이윤을 잊지 못한’ 데 놓여 있었으며, 그 결과 그의 추상은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며, ‘형식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마르크스는 ‘가치 일반’의 규정들 속에, 가치의 한 종류, 정확히 말해, 논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즉 본질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모두 기본적이며 최초의 것으로 드러나는 바로 그 종류의 가치의 분석을 통해 드러난 규정들만을 포함시킨다. 그의 분석의 산물은 가치 일반의 진정으로 보편적인 규정들이며, 화폐와 이윤 모두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보편적인 규정들의 의미를 갖는 규정들이다. 다시 말해, 이것들은 가치의 다른 모든 특수한 표현태들의 구체적으로 보편적인 규정들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보편적인 개념의 가장 훌륭한 사례이다. 그 규정들은 모든 다른 특수한 범주들의 초기적이며 ‘발생적(generic)’ 본질을 구성하는 실제적인 (형식적이라기보다) 일반적 계기를 표현한다. 그러한 진정으로 보편적인 규정들은 화폐에서, 이윤에서, 지대에서 더욱이 재현되며, 이 모든 범주에 공통적인 규정들을 구성한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보여주듯이, 이러한 규정들은 상품, 화폐, 이윤, 지대의 특수한 특징들로부터의 단순한 형식적 추상을 통해서는 결코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가치의 보편적 규정들은 『자본론』에서, 단순상품교환의 특수성들의 이론적 표현, 그리고 이러한 특수성들을 드러내는 법칙들의 이론적 표현과 직접적으로 일치한다. 그 이유는, 단순상품형태의 특수성이 바로 전체 체계의 진정으로 보편적인 기초, 곧 그 ‘기본 세포’, ‘가치 일반’의 최초의 현실적 표현형태를 구성한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이 특정 사례를 고찰함에 있어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분석을 통해, ‘추상의 힘’에 의해, 그 속에서 가치의 보편적 규정들을 드러낸다. 면포와 외투의 교환이라는 겉보기에 하나의 개별적인 사례 분석은 그 결론으로서 개별적 규정이 아니라 보편적 규정들을 산출한다. 개별적인 것을 보편자로 상승시키는 이 행위가 단순한 형식적 추상이라는 행위와 근본적으로 상이하다는 것이 단번에 드러난다. 이윤, 지대 및 기타 가치형태들과 구별되는 기본적 상품형태의 특수한 성질들은 여기에서 어떤 비본질적인 것으로서 무시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러한 성질들의 이론적 분석이 하나의 보편 개념의 형성으로 이끈다. 이것이 바로 개별적인 것을 보편자로 상승시키는 변증법적 방식이다.
낡은 비변증법적 논리는 여기에서 다른 접근을 권할 것이다. 그 원리들에 따르면, ‘가치 일반’ 규정은 단순상품교환을 포함한 모든 가치형태의 특수자로부터의 추상을 통해, 즉 상품, 이윤, 지대, 이자 등등의 공통 특성들을 식별함으로써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상품형태의 가치의 특수자는 ‘비본질적인 것’으로서 무시되었을 것이다. 보편자는 특수자로부터 고립된 채 파악되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전적으로 다른 접근을 취한다. 보편자는 현실 속에서 오직 특수자와 개별자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만큼, 그것은 특수자로부터의 추상 행위가 아니라 특수자에 대한 분석에 의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 보편자는 특수자와 개별자의 이론적 표현이며, 그들의 존재 법칙의 표현이다. 자연에서 보편자의 현실성은, 어떠한 점으로서 현상들의 단순한 형식적 유사성이 아니라, 특수자·개별자의 존재 법칙이며, 바로 이 법칙이 이들을 하나의 범주로 포섭하는 기초가 된다.
상품형태, 화폐, 이윤 및 다른 모든 범주의 실제적, 현실적 일반 내용을 드러내도록 해주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적 변증법이다. 이러한 일반 내용은 단순한 형식적 추상의 행위를 통해서는 드러날 수 없다. 그것은 현상들의 초기적 분류에서만 유용하다. 보다 중대한 과제―보편적, 객관적 이론적 규정들, 개념들을 정식화하는 그 과제―가 제기되는 곳에서는 그것이 부적합함이 드러난다; 더욱이 이 지점에서 그것은(형식적 추상은) 그 고유한 영역을 넘어 적용되기 때문에 그 과제를 해결할 수 없다. 여기에서는 보다 심층적인 방법이 요구된다.
주지해야 할 점은, 구체적 보편 문제에 대한 올바른 변증법적 개념에 매우 근접했던 헤겔이, 가장 중대한 지점에서 변증법을 배반했다는 사실이며, 그리고 그것이 그의 개념 규정의 관념론적 성격 때문이었다는 점이다.
헤겔은 보편과 특수의 변증법에 관한 그의 개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기하학적 도형들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기한 잘 알려진 논변을 논평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도형들 가운데, 오직 삼각형과 다른 규정적 도형들”, 직사각형, 평행사변형 등“만이 실제로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공통적인 것은 ‘도형’이지만, 이 일반적 도형, 즉 이 공통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은 아무런 현실적 존재도 갖지 않고, 무(無)이며, 정신의 공허한 것일 뿐이며, 단순한 추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삼각형은 최초의 도형, 현실적인 일반자이며, 그것은 직사각형 등에서 또한 나타난다”─즉 가장 단순한 규정으로 환원된 도형이다. 한편으로 삼각형은 직사각형, 오각형 등과 나란히 하나의 특수한 사물로 서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그리고 바로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지성의 위대함이 놓여 있는데─그 삼각형은 하나의 현실적 도형, 하나의 ‘실재적-일반적’ 도형이다.’2
겉보기에는, 헤겔은 구체적 보편 개념과 공허한 추상 사이의 주된 차이를, 구체적 보편 개념이 직접적으로 객관적 의미를 가지며 어떤 경험적으로 주어진 구체성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찾는다. 그러나 헤겔 자신은 보편·특수·개별의 관계를 결코 기하학적(기하학적 도형을 포함하여) 도상과 그 관계들에 비유해서는 안 된다고 자주 경고하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한 도상들은 개념의 단순한 일종의 비유에 불과하며, 너무나 ‘감성성’으로 짐 지워져 있다. 그가 개념으로서, 그리고 오직 개념으로서 해석하는 진정한 보편자는, 이러한 ‘감성적 질료’, ‘감성성의 질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는 이 점에 관하여 유물론자들을 비판했는데, 그들이 보편자를 해석하는 방식은 사실상 보편자를 제거해 버리고, 그것을 단지 ‘특수자 곁에 놓여 있는 또 다른 특수자[besonderen]’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보편자 그 자체, 곧 특수자와 개별자의 풍부함을 포섭하는 그 보편자는, 헤겔에 따르면 오로지 개념으로서만, 순수사유의 에테르 속에서만 존재하며, 결코 ‘외적 현실’의 영역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엄밀히 말해, 헤겔이 유물론을 철학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한 이유였다(왜냐하면 철학은 보편자의 학이며, 보편자는 사유이며 사유 이외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인간을 노동 도구를 생산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정의는, 그것이 선행하는 논리학에서 그러했듯이, 헤겔의 논리학에서도 보편적 규정으로서는 용납될 수 없다. 헤겔의 견해에 따르면, 그것 또한 인간의 보편적 ‘사유적’ 본성의 한 특정한 규정, 하나의 특수한 표현형태에 불과하다.
보편에 대한 관념론적 개념, 즉 그것을 단지 개념으로서만 해석하는 것은 헤겔을 곧장 그 보편의 형이상학적 해석과 동일한 결과로 데려간다. 만일 헤겔의 논리가 그것의 원래의 교조적 형태 그대로 『자본론』의 분석에 적용된다면, 마르크스의 전체 논증 전개는 잘못된 것으로 보일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가치는 마르크스가 그것을 규정한 방식으로는 규정될 수 없다. 어느 헤겔주의자는 『자본론』의 첫 장들에서 마르크스가 가치의 한 특수한 형태의 규정을 가치의 보편적 규정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며, 그것들은 결코 보편적 규정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보편적 가치 규정을 ‘이성적 의지’의 규정들로부터 연역해야 한다고 조언할 것이다(바로 그것이 헤겔이 『법철학』에서 그러한 규정들을 연역하는 방식대로).
이 모든 것은 헤겔 논리가, 그것이 옛 형이상학적 논리보다 갖는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근본적 비판, 즉 관념론의 모든 흔적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작업 없이는 유물론에 의해 채택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마르크스에게서 가치 범주는 단순한 형식적 추상도 아니며, 헤겔의 ‘순수 개념’도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감각성으로 짐을 진 것’이며, 특수자의 이론적 표현으로서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가치가 ‘감각적–초감각적’ 성격을 지닌다고 말하는데, 이는 헤겔적 관점에서는 그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마르크스가 강조하듯, 가치의 단순한(보편적) 형태는 결코 모든 시대나 태고적부터의 경제적 관계의 보편적 형태였던 것이 아니었다. 오직 자본주의적 발전만이 그것을 그러한 형태로 만들었다.
직접적 상품교환은, 가치의 보편적 규정을 얻을 수 있는 현상으로서, 그리고 가치가 순수한 형태로 표현되는 현상으로서, 화폐, 잉여가치 및 가치의 다른 특수한 발전 형태들이 나타나기 이전에 실현된다. 이것은 다른 여러 사정과 더불어, 자본주의 아래에서 비로소 진정으로 보편적이 되는 경제적 관계의 형태가, 그 이전에는 전적으로 특수한 현상으로서, 혹은 심지어 우발적이고 개별적인 현상으로서 실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언제나, 나중에 보편화되는 현상은 처음에는 개별적이고 특수하며 구체적인 현상으로, 즉 규칙의 예외로 출현한다. 그것은 사실상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출현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역사는 다소 신비로운 형태를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노동의 어떤 새로운 개선, 인간의 생산적 활동의 어떤 새로운 방식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승인되기 이전에는, 먼저 이전에 받아들여지고 체계화된(codified) 규범으로부터의 일정한 일탈로서 출현한다. 하나 혹은 몇 사람의 노동 속에서 규칙으로부터의 개별적 예외로서 출현한 새로운 형태는, 그 뒤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보편적 규범이 된다. 만일 새로운 규범이 처음에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결코 진정으로 보편적 형태가 되지 못하고, 단지 공상 속, 희망적 사고 속에서만 존재했을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진정으로 보편적인 것을 표현하는 개념은 개별적인 것과 특수한 것의 보편적인 것으로의 변형이라는 변증법을 그 안에 직접 포함하며, 그리고 현실에서, 인간의 머릿속 밖에서, 발전의 보편적 형태를 구성하는 바로 그 개별적인 것과 특수한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헤겔의 논리에 대한 그의 요약들과 노트들에서, 레닌은 변증법의 중심적 요점들 가운데 하나를─추상적으로 보편적인 지성의 증류물들에 대립하는, 구체적으로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보편 개념─끊임없이 언급한다. 특수와 개별에 대한 보편의 관계는, 레닌이 말하듯이, ‘아름다운 공식’에 의해 변증법에서 표현된다: ‘“단순히 추상적 보편이 아니라, 특수한 것의 풍부함을 그 자체 안에 포괄하는 보편.”’
“『자본론』과 비교하라”, 레닌은 여백에 이렇게 적으며, 계속한다:
‘아름다운 공식: “단순히 추상적 보편이 아니라, 특수한 것, 개별적인 것, 단일한 것의 풍부함을 그 자체 안에 포괄하는 보편” (특수한 것과 단일한 것의 모든 풍부함을!)!! 아주 좋다!(Tres bien!).’3
개념 속에 표현된 구체적 보편은, 물론, 온갖 이러한 풍부함을, 모든 특수한 사례들을 포괄하고 그것들에게 그들의 일반적 이름으로서 적용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 자체 안에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것이 헤겔이 반대하는 형이상학적 개념이며, 그리고 그것이 레닌이 그의 입장을 승인하는 이유이다. 구체적 보편 개념은 ‘특수자들의 풍부함’을 그 자신의 구체적 규정들 속에─두 가지 의미에서─포함한다.
첫째, 구체적 보편 개념은 그것의 규정들 속에서, 연구 대상의 단일한, 매우 일정한 하나의 발전 형식의 특정한 구체적 내용(내적 법칙적으로 규정된 구조)을 표현한다. 그것은 그 형식의 규정들의 ‘온갖 풍부함’, 그것의 구조와 그것의 특수성을 그 자체 안에 포함한다. 둘째, 그것은 대상 전체의 발전에서 임의로 선택된 어떤 형식을 그것의 규정들 속에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풍부함’의 다른 구성물들이 성장하는, 진정으로 보편적인 기초 또는 토대를 구성하는 바로 그 형식, 그리고 오직 그 형식만을 표현한다.
그러한 개념의 가장 인상적인 사례는 『자본론』에서의 가치 범주이다. 이 개념은, 자본주의 세계의 하나의 ‘가장 기본적인 경제적 구체성’─한 상품을 다른 상품과 직접 교환하는, 돈이 개입하지 않는─의 철저한 분석의 결과이다. 이 형식의 특수성은, 그것이 ‘세포’ 또는 배아처럼, 더 복잡하고 더 발전된 자본주의 관계들의 풍부함을 포함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바로 이 매우 단순한 현상(이 “부르주아 사회의 ‘세포’” 안에서) 속에서 분석은 현대 사회의 모든 모순(또는 모든 모순의 싹)을 드러낸다’.4 바로 그렇기에, 이 분석의 결과이자 산물인, 가치 범주의 규정들 속에 표현된 것은, 자본주의 세계 전체를 이론적으로 파악하는 하나의 열쇠를 제공한다.
이 범주가 단순한 추상들(‘가구’, ‘용기’, 또는 ‘단맛’과 같은)과 구별되는 점은 근본적인 성질에 속한다. 후자는, 물론, 어떠한 ‘특수한 것과 개별적인 것의 풍부함’도 그 안에 포함하지 않는다─이 ‘풍부함’은 단지 일반적 이름들로서 그것들과 외적으로 관계할 뿐이다. 그러한 개념들의 구체적 규정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이 풍부함을 표현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가구 개념은, 단지 탁자와 의자, 찬장 등이 공통으로 가지는 일반적 요소만을 기록할 뿐이다. 그것은 의자, 탁자, 혹은 찬장의 특수한 특징들을 포함하지 않는다. 이러한 종류의 규정들은 단 하나의 종도 표현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가치 범주는, 그 특수성이 바로 동시에 속(屬)이 된다는 데에 있는 그러한 하나의 종(種)을, 그 자체 안에 완전히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기본적이며, ‘오성적(intellectual)인’ 추상적 일반들의 중요성과 인식적 역할이 깎아내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역할은 크다: 그것들 없이는 어떠한 구체적 보편 개념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복잡한 과학적 개념의 출현의 전제이며 조건을 이룬다. 구체적 보편 개념 역시, 그것이 그 규정들 속에 절대적으로 개별적인 것, 유일한 것을 기록해 놓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하나의 추상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것의 본질을, 그리고 그러한 의미에서 일반적인 것의 본질을, 수백만 번 반복된 현상으로서의, 보편적 법칙의 표현인 하나의 개별적 사례의 본질을 표현한다. 단순한 가치형태를 분석할 때, 마르크스는 물론 외투나 아마포의 개별적 특징들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투와 아마포의 관계는 분석의 직접적 대상으로 취해지는데, 바로 그것이 단순한 상품교환의 전형적(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일반적) 사례이며, 돈 없이 이루어지는 교환의 전형적 특수성에 상응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반적 분석에서는 보통 실제적 조건들이 그 개념에 상응한다고 가정되며, 또는 같은 말이지만, 실제적 조건들이 오직 그것들이 그들 자신의 일반적 경우의 전형적인 한에서만 제시된다고 가정된다.’5
물론, 구체적 보편 개념들은 이러한 이유로, 그것들이 언제나 개별적 사례들, 사물들, 현상들의 어떤 일반적 성격을 표현하며, 또한 ‘개별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상승시킨 것’의 산물들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단순한 오성적 추상들과 유사하다. 과학적 개념과 어떤 초보적 추상 사이의 친연성을 가리키는 이러한 계기 또는 측면은 개념 속에 항상 존재하며, 그 속에서 발견하기도 쉽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계기가 과학적 개념의 특수한 성질을 어떠한 방식으로도 제공하지 못하며, 그것의 특수성을 표현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가치와 흼, 물질과 가구와 같은 추상들을 단순히 동일시하는 논리적 이론들은, 두 종류 모두가 단일한 개별적 현상에 대해서가 아닌, 수다한 개별 현상에 똑같이 관계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똑같이 추상적이고 일반적이라는 점에서 전혀 터무니없는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 규정은 단순한 추상적인 것들에게는 충분할지라도, 복잡한 과학적 개념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불충분하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과학적 개념들의 본질이라고 받아들여진다면, 이러한 견해는 거짓이 되는데, 예를 들면 ‘가치는 노동의 산물이다’라는 명제가 거짓이 되는 것과 바로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여기에서 하나의 구체적 현상은 지나치게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방식으로 규정되며, 따라서 전적으로 부정확하게 규정된다. 물론, 인간은 동물이고, 과학적 개념은 추상이다. 그러나 그러한 규정의 부적절성은 그것의 극단적 추상성에 놓여 있다.
변증법적 논리학은, 보편 개념이 개별적 경우들, 개별 사물들, 현상들, 사건들의 ‘일반적 본질’, ‘평균적 유형(mean type)’을 표현하는 하나의 추상이라는 명제의 진리를 전혀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더 멀리, 그리고 더 깊이 나아가는데, 바로 여기에 그 개념 규정이 옛 논리학의 그것과 구별되는 점이 있다. 보편에 대한 변증법적 개념은, 개별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으로의, 그리고 보편적인 것이 개별적인 것으로의 이행─이러한 이행이 어떠한 실제적 발전 속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는─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 입장은, 개념들 속에 표현되는 객관적 실재에 대한, 사물들에 대한 역사적 관점을 전제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하여 로크와 헬베시우스도, 심지어 헤겔마저도, 추상의 구체에 대한 관계 문제에 합리적 해답을 제시할 수 없었다. 헤겔은 그 해답을 제시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발전과 역사적 접근의 사상이 그의 체계 속에서 온전히 실천된 것은 사유에 관해서만이지, 사유의 소재를 구성하는 객관적 실재에 대해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헤겔의 관점에서 객관적 실재는 단지 그것이 사유·정신 발전의 외적 형식이 되는 한에서만, 즉 정신이 그것에 스며들어 내부로부터 그것을 활성화하여 그것을 움직이고 심지어 발전시키는 한에서만 발전한다. 객관적인 감성적 현실(Objective sensual reality)은 그 자체의 내재적이고 자생적인 운동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의 눈에 그것은 진정으로 구체적인 것이 아니며, 그 다양한 측면들의 살아 있는 변증법적 상호연결과 상호의존은 사실상 그것을 관통하는 정신에 속하는 것이지, 그러한 것으로서의 현실 그 자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헤겔에게서는 오직 개념만이, 그리고 개념만이, 개별적 현상들의 이념적 상호연결의 이념적 원리로서 구체적이다. 개별적 사물들과 현상들은 그것들 자체로서는 추상적이며, 추상적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 규정은, 관념론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에 대한, 감각적 자료를 파악하는 과정에 대한 변증법적 관점도 또한 포함하고 있다. 헤겔은 개별적 사물, 현상 또는 사실을 추상적인 것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용법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 만일 의식이 사물을,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전체적인 구체적 상호연결의 연쇄를 파악하지 않은 채, 그 사물을 그대로의 것으로서 지각하였다면, 이는 의식이 그 사물을 직접적인 구체적-감각적 관찰, 감각적으로 손에 잡히는 상의 모든 충만함 속에서 지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추상적인 방식으로 지각한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의식이 하나의 사물을 다른 모든, 바로 그와 같이 개별적인 사물들, 사실들, 현상들과의 상호연결 속에서 지각하였고, 만일 그것이 개별적인 것을 그것의 보편적 상호연결을 통해 파악하였다면, 비로소 그때에야 의식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지각한 것이다. 비록 그에 대한 표상이 직접적인 관찰, 접촉 또는 후각을 통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개인들로부터의 말(언어)을 통해 형성된 것이고, 따라서 즉각적인 감각적 특징을 결여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다시 말해, 이미 헤겔에게서는 추상성과 구체성이, 지식이 개별적 머릿속에서 존재하는 형식의 즉각적 심리적 성격의 의미를 잃고, 지식과 의식 내용의 논리적(의미적) 성질들이 된다.
만일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 그것이 실제로 발생하고, 존재하고, 발전하는 그 보편적 구체적 상호연결을 통해서, 곧 그것의 진정한 본성을 구성하는 구체적 상호연결의 체계를 통해서 이해되지 않는다면, 이는 오직 추상적 지식과 추상적 의식만이 얻어진 것임을 의미한다. 반대로, 하나의 개별적 사물(현상, 사실, 대상, 사건)이, 하나의 통일된 일관적 체계를 형성하는 다른 사물들과의 객관적 연관 속에서 이해된다면, 그것은 이 단어의 가장 엄격하고 가장 충만한 의미에서 구체적으로 이해되고, 실현적으로 파악되고, 인식되고, 개념화된 것임을 의미한다.
유물론적 형이상학자의 눈에는, 감각적으로 지각된 개별자만이 구체적인 것이며, 반면에 보편자는 추상의 동의어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자에게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그의 관점에서, 구체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바로 수많은 개별 현상들의 보편적 객관적 상호연결과 상호의존, 즉 ‘다양성 속의 통일’, 추상적 동일성, 추상적이고 죽어 있는 통일이 아니라, 구별되는 것들과 서로 대립하는 것들의 통일이다. 기껏해야, 후자[추상적 동일성]는 사물들 속에 내적 연결들, 현상들의 잠재적 통일의 현존 가능성을 가리키거나 암시할 뿐이며, 그것이 항상 그런 것도 아니고 결코 필수적인 것도 아니다: 당구공과 시리우스는 그들의 기하학적 형식에서는 동일하지만, 여기에서 어떤 실제적 상호작용을 찾으려 하는 것은, 물론, 전혀 옳지 않을 것이다.
번역: 노준엽 | 집행위원
2025년 12월 31일
- K. Marx, “Theories of Surplus-Value", Capital, Vol. 4, Part 1, Moskva: Progress Publishers, 1975, 356.

- G. W. F. Hegel, „Vorlesungen fibe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Samtliche Werke, Bd. 18, 1928, 374.

- V. I. Lenin, “Conspectus of Hegel’s Book The Science of Logic”, Collected Works, Vol. 38, 99.

- Ibid., 360-1.

- Capital, Vol. 3, 1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