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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구체의 표현으로서 추상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 제2장 (1) 총명한 유물론 2 겨울


2장. 사고의 법칙으로서 추상과 구체의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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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의 표현으로서 추상

 

우리는 개별적 사실을 반영하는 지식은, 비록 그것이 자주 반복되는 것일지라도 그것의 내적 구조나 다른 사실들과의 내적이고 필연적인 연관을 추려내지는 못한 것이며, 심지어 그것이 직접적이고 감각적으로 인식되었다 할지라도 극도로 추상적인 지식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바로 이것이 ‘운동의 형태 변화에 관한 일반법칙이 그것에 관한 “구체적인” 그 어떤 하나의 예시보다 훨씬 더 “구체적”1인 이유이며, 심지어 가장 생생한 예시들도 규정에 있어 빈곤한 사고를 구체적인 사고로 만들 수 없는 이유이다.

 

어떤 빈약한 추상을 묘사하는 생생한 예시들은, 단지 구체적인 고찰의 외양 혹은 환영만을 창조하면서, 오직 그것의 추상성을 덮어 가릴 수 있을 뿐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과정은 이론적 고찰을, 예시를 모으는 것에 제한하는 사람들에 의해 종종 이용되어 왔다. 구체성을 지식에 대한 감각적 가촉성(sensual tangibility)으로 해석하는 것은, 사실들에 대해 더 심화된 분석을 요구하는 마르크스의 정의보다 그들에게 당연히 더 편리하다.

 

실제로 이 입장은 마르크스의 입장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물론 ‘공통적인’ 어떤 것은 있다‘추상’과 ‘구체’라는 단어. 그러나 이러한 동일한 단어들은, 추상과 구체의 완전히 대립하는 개념들에서, 사유에서, 즉 직관과 표상을 가공하는 것에서 양자의 역할과 지위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허구적인 이해 사이의 대립을 완전히 가려버린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대상에 대한 참으로 추상적 고찰은 어디에 있는가? 그의 견해에서, 그러한 추상성 그 자체는 같은 종류의 다른 많은 것들에서 유사하거나 동일한 그 측면만을 반영하는 어떤 사물에 관한 지식의 종류이자 인식의 일면이다. 어떤 사물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성질을 표현하는 추상은 꽤 다른 문제이다. 그러한 추상은 그것의 논리적 성격에서 단순한 추상, 추상 그 자체에 정반대로 대립하는 어떤 것이다.

 

참된 일반화를 한다는 것, 어떤 현상에 대한 객관적인 구체적 추상을 형성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어떤 매우 특수하고 반복되는 사실을 그 사실 자체의 내재적 내용과 관련하여 고려함을 의미하고, 이는 흔히 쓰이는 표현이 말하듯이 그것을 ‘그 자체로서’ 고찰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이 존재하는 더 넓은 현실 영역의 모든 외적 영향의 총체에 그것이 빚지고 있는 모든 걸 무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단순한 상품교환의 현상들을 연구할 때 따르는 방식이다. 그는 가치의 실재적 객관적 특성들을, “추상적으로 고찰된, 즉 상품들의 단순 유통 법칙들로부터 직접적으로 흘러나오지 않는 상황들로부터 분리된”2 것으로서 획득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처음부터 사고에서 구체의 재생산을 전반적 목표로 염두에 두고 있으며, 이러한 목적에 비추어 각각의 개별 논리적 절차, 개별 추상을 형성하는 행위가 평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본론』에서 각 특수한 현상은, 그것이 그 특수한 규정성을 획득하는 구체적 체계 전체 안에서, 그리고 그 체계를 통해서, 그 전체 속에서 그것의 지위와 역할과의 관련 하에서 직접 고찰된다. 각 구체적 추상은 이 규정성을 기록하는데, 이 규정성은 주어진 구체적 체계의 외부에서 그것이 존재한다면 개별 현상에 특징적인 것이 아니며, 그것이 그 체계의 일부를 이루자마자 그것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다. 사실상 마르크스는, 특정 현상의 추상적 분석을 통해 전체의 보편적 상호연관, 즉 상호작용하는 특수한 현상들의 전 총체의 보편적 상호연관을 고찰하면서, 주어진 현상이 그것과 상호작용하는 다른 현상들에 빚지고 있는 모든 걸 의식적으로 무시한다.

 

일견 이것은 역설적으로(paradoxical) 보인다: 현상들의 보편적 연관성은 그것의 대립물, 즉 한 현상이 다른 것들과의 보편적 상호연관들 때문에 지니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리고 주어진 특수한 현상의 내재적 법칙들로부터 흘러나오지 않는 모든 것으로부터 엄격한 추상을 통해 확정된다.

 

하지만 요점은, 주어진 특수한 현상을 고찰하는 권리 자체가, 그 전체 속에서, 보편적인 상호연관 속에서, 상호 조건 지어지는 특수한 현상들의 총체 속에서 그것의 특수한 역할과 지위를 파악하는 것을 추상적으로 전제한다는 점이다; 단순 상품교환, 상품 그리고 상품 형태가 추상적으로 고찰된다는 바로 그 사실이, 다른 어떤 전체가 아니라 바로 주어진 전체 속에서 상품이 수행하는 아주 특수한 역할의 논리적 표현이다.

 

상품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다른 모든 현상으로부터 독립되어 추상적으로 고찰된다는 사실은, 하나의 전체로서 생산관계들의 체계에 대한 그것의 의존성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독특한 형태를 논리적으로 (이론적으로) 표현한다.

 

요점은 상품 형태의 연관이 다른 어떤 생산관계의 체계에서가 아니라 오직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된 체계 내에서만 사람들 간의 상호연관의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형태라고 밝혀진다는 점이다. 다른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생산관계 체계에서도, 상품과 상품교환은 그러한 역할을 하지 않았고, 하고 있지도 않으며, 할 수도 없다.

 

또한 발전된 자본주의 내에서의 단순 상품 형태의 이 특수한 역할과 의의는, 상품과 그 내적 법칙들에 대한 순수한 추상적 고찰이 동시에 어떤 전체로서의 체계보편적인 이론적 정의를 그것의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규칙성의 표현을 드러내는 그 상황 속에서 이론적으로 표현된다. 자본주의가 아닌 어떤 다른 사회적 생산관계의 체계(사회주의 혹은 봉건제, 원시공동체 체계 혹은 노예제적 구성체)가 연구 대상(subject-matter)로서 이론적으로 연구되었다면, 마르크스주의 논리에서, 자본주의 경제이론에서 하듯이 상품 형태를 추상적으로 고찰하는 것보다 더 잘못된 것은 없었을 것이다.

 

상품 형태에 대한 추상적 고찰은, 어떤 체계가 어떤 다른 기반에서 발전했다면, 그 체계의 보편적 연관에 대한 이론적 이해에 별 쓸모가 없을 것이다. 이 경우에, 상품을 추상적으로 고찰하는 속에서, 사고는 연구 중인 경제 체계에 대한 구체적인 고찰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며, 그 대상에 대한 그 어떤 하나의 구체적인 이론적 정의도 추상하지 못할 것이다.

 

이론가는 자본주의적 체계 내에서 상품 형태를 추상적으로 고찰할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가 있지만, 그는 동일한 자본주의적 유기체 속에서 어떤 다른 형태의 경제적 연관, 예를 들어 이윤 혹은 지대를 추상적으로 고찰할 논리적 권리는 없다.

 

그러한 시도는 총체적인 상호연관 속에서 이윤의 역할과 지위의 구체적인 이론적 이해를 이끌어 낼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잉여가치, 화폐, 상품이 먼저 분석되지 않는 한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 만약 우리가 사전에 상품, 화폐, 잉여가치 등을 분석함 없이, 시작부터 이윤이라는 현상을 끄집어내고 그것을 추상적으로 고찰하기 시작한다면, 즉 그것의 내적 법칙들로부터 흘러나오지 않는 모든 사정들을 제쳐둔다면, 우리는 그것의 운동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기껏해야 우리는 이윤 운동의 현상들에 대한 묘사, 즉 구체적 이론적 개념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추상적인 관념을 얻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어떤 현상을 추상적으로 고찰할 권리는 연구 중인 전체 속, 상호작용하는 현상들의 구체적인 체계 속에 있는 그 현상의 구체적인 역할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이론의 발전의 출발점이 올바르게 잡혔다면, 그것의 추상적 고찰은 전체 체계의 구체적 고찰과 직접적으로 일치하게 된다. 만약 추상적 분석이, 전체로서 대상의 존재 방식의 보편적이고, 가장 단순하며, 기본적인 형태, 그것의 실제적 “세포”를 객관적으로 구성하는 현상들 대신에 다른 어떤 현상들을 다룬다면, 그러면 추상적인 고찰은 그 단어의 나쁜 의미에서의 추상으로 남으며 구체적 인식의 방향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윤 현상들을 뽑아낸다면, 혹자는 그것들에 대한 추상적으로 일반화된 관념을 형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방식으로는 이윤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관계들의 체계의 운동에서 이윤의 역할과 지위에 관한 구체적인 개념은, 그것들의 실제적인 가장 가까운 실체, 잉여가치에 대한 이해를, 즉 다른 경제적 현상에 대한 이해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자는 다시 차례로 상품-화폐 영역의 내적인 운동법칙에 대한 인식, 즉 이윤 혹은 잉여가치와 무관하게, 가치 자체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이윤에 대한 추상적 고찰은 오직 이윤으로부터 독립적인 현상들이 사전에 분석되었을 때만 가능하다. 이윤은 오직 잉여가치를 통해서만,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데 반해, 잉여가치는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고 이해되어야만 하며, 그것을 분석함에서 그것의 내적 법칙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는 모든 사정을 엄격하게 제쳐두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윤을 내버려 두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윤을 분석함에 있어서는, 그러한 어떤 것도 할 수 없는데, 즉 다른 현상의 내적 법칙들로부터 흘러나오는 정황들을 그대로 둘 수 없으며, 이윤을 추상적으로 고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현상에 대한 추상적인 고찰은 그 자체로 이 현상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을 구성하며, 전체로서의 현상들에 대한 주어진 구체적이고 역사적 체계에서의 그 역할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대상에 대한 추상적 고찰은, 주어진 현상의 내재적 법칙들로부터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는 모든 상황을 제쳐두면서, 내적 법칙에, 헤겔적 표현에 쓰자면, ‘즉자대자적으로’ 현상의 분석에 집중한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상품-화폐 영역의 운동법칙에 대한 분석은 그러한 연구의 모범이다. 그 현상은 여기에서 다른 현상들, 무엇보다도 잉여가치 생산과 연관된 더욱 복잡하고 발전된 현상들의 모든 영향으로부터의 엄격한 추상 속에서, ‘그 자체로’ 고찰된다. 그것은 또한 현상이 추상적으로 고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추상적 고찰의 이러한 개념과 적용은 구체적 고찰과 형이상학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과 구체의 실제적인 일치, 즉 그것들의 변증법적 통일이다. 구체적 고찰은, 주어진 현상의 내적 법칙들로부터 흘러나오지 않는 정황들이 제쳐두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려되는 고찰로서 나타난다. 상품-화폐 영역에서의 현상들에 대한 구체적 이해는, 자본주의에서 발전되고 점점 더 복잡해진 경제적 관계들의 모든 형태가 상품-화폐 영역에 미치는 모든 그러한 영향을 고려하는 것과 일치한다.

 

즉, 원래 오직 추상적으로 고찰되었던 상품에 대한 구체적 개념은, 자본주의의 전체 경제 구조, 상호작용하는 경제적 생활 형태들의 전체 총체에 대한 이론적 이해와 일치한다. 이 개념은 과학의 전반적 체계 속에서만, 전체로서의 이론 속에서만 획득된다.

 

번역: 노준엽 | 집행위원

 

2026년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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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 Engels, Dialectics of Nature,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74, 222.텍스트로 돌아가기
  2. Capital, Vol. I, 158.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