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γ. 히틀러 시기의 경제 계획, 1933-41년
1934년 소련 공산당 제17차 대회에서 채택된 제2차 5개년 계획의 목표는 제1차 5개년 계획의 목표보다 훨씬 더 광범위했으며, 그 성과를 기초로 삼을 수 있었다. 제2차 5개년 계획의 목표들은 1. “전체 국민경제에 대한 개조의 완성”; 2. “소련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분자들과 계급 일반의 종국적인 일소와, 이들의 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경제적 원인들의 종국적인 일소”; 3. “실질임금의 괄목할 만한 성장과 소비수준의 2~3배 증가”와 4. 인간의 의식에 남아있는 자본주의적 잔재의 극복”이었다.1 이번에는 최소 120개 이상의 산업부문들이 새로운 5개년 계획의 범위 안에 들어왔다.
소련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세운 과제들을 최대한 순탄하게 수행하기 위해 다른 나라들과 평화롭고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열망을 숨기지 않았다. 스탈린은 이 당시 중대한 평가를 남겼다. “평화를 원하고 우리와 비즈니스 관계를 추구하는 이들은 언제나 환영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공격하려 드는 나라들은 우리가 가꾼 소비에트 정원에 자기들의 돼지 주둥아리를 들이밀지 않도록 교훈을 주기 위해 압도적인 격퇴를 받을 것이다.”2 그의 앞선 발언은 특히 독일과 일본의 통치자들과, “영국 보수당의 일부 분파”를 언급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소련은 자체의 경제적, 정치적 역량과 군대에, 그리고 평화의 유지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모든 나라 인민들의 도덕적 지지에 기대는 한편, “평화를 해치는 데에 관심이 없고,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소련과 같은 나라와 무역관계를 발전시키기를 원하는 국가들의 사리분별력”에도 또한 기대고 있다고 말했다. 소련의 외교정책은 “평화를 유지하고 모든 나라들과의 교역관계를 강화하는” 것을 위함이었다.3
제2차 5개년 계획의 성공은 제1차 5개년 계획의 그것보다 훨씬 더 두드러졌다. 실제로 그 당시의 공업생산량은 2배 이상 증가했으며 생산의 모든 증가분은 사회주의 국영기업소에서 비롯되었다. 사적 산업은 소규모 수공업자에 의해 대표되는 미비한─전체 중 0.03%의─비중으로 추락했다.4 더군다나, 소련의 공업생산량 중 80%는 새로 건설되거나 완전하게 재건축된 모든 종류의 공장들이 차지했다.5 농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30년 이후 소규모의 개인경작을 대체한 24만 개의 집단농장(협동농장)들은 모든 소농 가구의 93%를 통합했으며, 경작지의 97%를 차지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농업은 집단농장을 보조하는 6천 개의 국영 기계-트랙터 기지(MTS)의 창설을 통해 재건되었다.
1928년에 전체 인구의 5%에 달했던 자본주의적 분자들─즉 이웃의 땅을 빌려 고용된 노동력의 도움을 받아 농사를 짓던 부농(쿨라크)과 사적 무역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던 일부 사람들─은 계급으로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으며, 보다 유익한 일에 종사하게 되었다.6 개인 상인들은 1928년에 여전히 소매무역의 2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비중은 1930년에 5.6%밖에 되지 않았으며, 이후 국영무역 또는 협동조합 무역에 의해 완전히 흡수됐다.7
삶의 질에 있어서, 계획은 실질적으로 1937년까지 수행됐다. 실질임금은 2배로 늘어났으며, 집단농장에서 각 농민 가구의 소득은 3.5배로 증가했다.8 제1차 5개년 계획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재도입됐던 배급제는 식료품과 원자재가 매우 풍족해짐에 따라 1934년에 폐지됐다.
“인간의 의식에서의 자본주의적 잔재들”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진보가 이룩됐다. 스타하노프 운동은 5개년 계획의 이 측면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답변이었다. 스탈린은 이를 “현재의 기술적 수준을 넘어서고, 기존의 설계된 생산능력를 넘어서며, 기존의 생산계획과 추정치들을 넘어선다는 목표를 세운 근로남녀의 운동”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의미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스타하노프 운동은 또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간극을 일소하는 데에 필요한 노동계급의 문화적, 기술적 수준의 상승의 “첫 시작”을 의미했다. 이러한 간극의 제거에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인지, 즉, “각자가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를 위해 수행한 노동에 따라서, 그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소비품들을 배분받는” 조건에서 “그가 수행한 노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발전한 개인으로서의 필요에 따라서, 각자가 수행한 노동에 따라, 능력에 따라 일하고 소비품들을 배분받는”9 조건으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인지가 달려있다. 스타하노프 운동에 참여한 인원이 제2차 5개년 계획10이 끝날 무렵 노동계급의 약 25%를 망라했다는 사실은, 인간의 의식에 있어서 비사회주의적 영향력의 일소와 개인적 이해관계에 의해 제약됐던 낡은 사고의 보다 폭넓은 사고에 의한 대체가 어느 정도 순탄하게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전의 계획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결과는 대외적 난관으로 인해 극도로 복잡해진 정세 아래에서 달성되었다. 1933년부터 1937년의 몇 년 동안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상황을 거듭 상기하게 되었다. 1939년 3월 소련 공산당 제18차 대회에서 제2차 5개년 계획의 결과를 총화하며 몰로토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제2차 5개년 계획에서도 중공업의 성장이 대중적 소비품목들을 생산하는 산업보다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기록에 남겨야만 한다. 그 주된 원인은 제2차 5개년 계획을 이행하는 동안 산업 발전 계획에 중요한 수정을 가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1차 5개년 계획 도중에 그랬듯이, 국제정세는 우리에게 기존에 정했던 것보다 군수공업의 발전 속도를 더욱 높일 수밖에 없도록 했으며, (보로실로프 동지가 이번 대회에서 한 연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이 부분에서 상당한 성과를 내었다. 이는 중공업 확장의 현저한 가속화를 요구했으며, 경공업 발전의 속도를 낮추는 대가로 이루어졌다.”11
사실 제2차 5개년 계획 시기는 독일에서의 나치 정권의 수립, 그리고 복수전을 노골적으로 준비하는 시기였으며, 이탈리아와 일본의 침략적인 파시스트 세력과 동맹을 맺은 시기였고,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렸던 에티오피아와 스페인, 중국에 대한 연쇄적인 침략의 시기였다. 소련 입장에서 정세를 특히 복잡하게 만들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소련 공산당 제17차 대회(1934)12 에서 스탈린에 의한, 그리고 1935년 제7차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에서 몰로토프에 의한 나치 지도자들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소련의 피해를 대가로 한 팽창계획이 여전히 옳다고 말할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에 관한 것이었다—이 노골적으로 무시당했다는 점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방 국가들, 특히 영국에서는 히틀러와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고 다른 이웃 국가들은 내버려 두는 '일방향 총'으로 행동하는 것이 좋다는 견해가 공개적으로 표출되기도 했다.13 이 시기는 그러한 전망을 침략에 대한 집단적 저항이라는 전망으로 대체하기 위한 소련 외교의 정력적인 활동이 전개됐던 시기였다. 이 시기는 또한 독일-소련의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동방의 로카르노 조약”을 체결하려는 시도들과 소련의 국제연맹 가입이 이루어진 시기였으며, 소련이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방위협정을 맺은 시기였고 (독일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를 방어하기 위해 대(對)이탈리아 석유 산업에 대한 제재에 동참할 것을 소련이 제의한 시기(1935)였으며, 소련이 침략자들에 맞서 스페인 공화국과 중국에 대한 집단적 지지를 요구하고 압박했던 시기였고, 타국의 지원을 독려하기 위해 파시스트 블록의 두 피해국에 대해 소련이 단독으로 군수물자 및 기타 물자들을 지원한 시기(1936-7)였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들은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서방 국가들에서는—특히 소련이 내놓은 제안들에 관해—불간섭의 이념에 의해 외교정책이 좌우됐던 정부들이 집권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제18차 당 대회에서 이 정책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불간섭 정책은 침략을 방임하는 것이고, 전쟁에 자유를 주며, 결과적으로 전쟁을 세계대전으로 전환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간섭 정책에는, 침략자들이 흉악한 일을 감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열망, 말하자면 일본이 중국과, 더 좋게는 소련과의 전쟁에 얽히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독일이 유럽에서의 문제들에 몰두하여 소련과의 전쟁에 얽히는 것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열의와 욕망이 엿보인다: 즉, 전쟁 참전국들이 전쟁의 수렁에 깊게 빠져들게끔 하여, 그들을 은근히 부추기며 그들이 서로 싸워서 쇠약해지고 기진맥진하게 만든 다음, 그들이 충분히 약해졌을 때 팔팔하게 현장에 나서서, 물론 ‘평화를 위해’ 나서서 약해진 교전국에게 요구조건을 강요하려는 것이다.”14
스탈린은 이것이 불간섭 정책의 지지자들에게 있어 “중대한 실수”로 끝날지도 모르는 크고 위험한 정치적 도박으로 된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소련은 당연하게도 그러한 전망을 두고 안심할 수 없었다.
이러한 국제적 정세와 공격 위협의 증가를 염두에 둔 채, 우리는 소비에트 재정에서의 군비 부담의 증가를 나타내는 다음의 표가 보여주고 있는 2차 5개년 계획의 건설적 목표에 대한 심각한 방해를 이해해야 한다.
연도 | 국방비 지출액 | 전체 예산에서 국방비 지출 비중 |
1933년 | 14억 루블 | 3.5% |
1934년 | 50억 루블 | 9.5% |
1935년 | 82억 루블 | 12.0% |
1936년 | 149억 루블 | 17.2% |
1937년 | 170~175억 루블 | 17.4% |
이 기간에 붉은 군대의 병력은 1933년 56만 2천명에서 이듬해 94만 명으로, 1937년에는 130만 명으로 증가했다.15 이 예상치 못한 추가 부담이 없었다면 경제 및 문화 발전이 얼마나 더 빠르게 진행되었을지, 소련의 모든 사람들은 충분한 기회와 자극을 통해 깨달았을 것이다.
1940년에 국방비가 561억 루블으로 예산의 30%를 넘어섰고, 1927년에 혁명 10주년을 기념하여 도입됐던 7시간 노동제가 그해 다시 8시간 노동제로 대체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16
1939년에 채택되었지만 1938년부터 1942년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제3차 5개년 계획도 1941년 6월 독일의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대부분 완수됐다. 1946년 3월에 채택된 제4차 5개년 계획 시행령의 첫 번째 항목에 있는 이 시기에 관한, 잘 알려지지는 않은 요약문을 인용하는 게 좋을 것이다:
“사회주의적 공업은 급속도로 발전했다. 공업생산량은 연평균 13%의 증가율을 보였다. 특히 중공업의 발전에서 커다란 진보가 있었다. 제3차 5개년 계획의 첫 3년 동안 생산수단의 생산량은 50% 이상 증가했다. … 공업은 소련의 동부 지역들에서 빠르게 발전했다. 우랄 지역과 볼가강 유역,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공업생산량은 제3차 5개년 계획의 첫 3년 동안 50% 증가했다. … 1940년도 곡물생산량은 1억 1,900만 톤에 달했다. 나라의 동부에 소련의 가장 풍족한 곡창지대의 하나가 형성되었다. … 천여 개의 국영 제분소와 공장, 광산, 전력발전소와 기타 기업소들이 가동에 들어갔다. 이 당시 자본투자의 3분의 1은 소련 동부 지역에 할애됐다. … 1940년에 우리나라에서는 1913년의 생산량보다 4배 가까이 많은 1,500만 톤의 철이 생산됐고, 1913년의 생산량보다 4.5배 많은 1,830만 톤의 강철이 생산됐고, 1913년의 생산량보다 5.5배 많은 1억 6,600만 톤의 석탄이 생산됐고, 1913년의 생산량보다 1,700만 톤 더 많은 3,830만 톤의 상업용 작물들이 생산됐으며, 1913년의 생산량보다 3.5배 더 많은 270만 톤의 목화가 생산됐다. 사회주의적 공업의 도움에 힘입어, 철도망의 재건이 착수됐다. … 이에 소련 인민들의 생활 및 문화적 수준의 지속적인 발전이 뒤따랐다.”
전쟁으로 인한 그 중도반단이라는 끔찍한 결과에 못지않게, 200여 개의 산업부문들이을 포괄했던 제3차 5개년 계획의 이러한 발전상이, 소련의 지난 모든 역사가 가르쳐주었던 교훈들을 더욱 선명하게 했을 뿐이라는 점을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17
번역: 김의진 | 회원
2024년 12월 10일
- V. M. Molotov, Tasks of the Second Five Tear Plan, Moscow & Leningrad: Co-operative Publishing Society of Foreign Workers in the U.S.S.R., 1934, 110-1.
- Leninism, 1944, 486.
- Ibid., 482, 484-93.
- Ibid., 631, 635, 637.
- V. M. Molotov, Tretii Pyatiletnii Plan, 1939, 7.
- Ibid., 6.
- V. M. Molotov, Fulfilment of First Five Tear Plan, Moscow: 1933, 207.
- Razvitie Sovetskoi Ekonomiki, 1940, 562-3.
- Leninism, 1944, 546-8.
- A. Lyapin, Sotsialitlicheskaya Organizatsia Obschestvetinogo Truda, 1945, 25.
- Tretii Pyatiletnii Plan, 1939, 8.
- Leninism, 1944, 484-5.; Speech by V. M. Molotov, Soviet Progress 1930-34, London & Moscow: Anglo-Russian Parliamentary Committee, 1935: 16-7.
- 한 가지 추가적인 설명도 빼놓을 수 없다. 영국의 공공학교와 대학교에서 사용됐던 가장 권위있고 공인된 유럽사 교과서는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에 대해 평가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반 사실은 히틀러가 미래에 동방에서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는 한편 서방에서 방어적인 태도를 유지할 의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히틀러가 동방을 향한 돌진을 서방에서 프랑스에 대한 공세와 어떻게 결합시킬 수 있을지 판단하는 것은 정확히 말해 어렵다. (...) 동방을 향한 만약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원한다면 소비에트 공화국과 궁국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독일의 침략 노선은 한동안 평화적인 경제적 침략의 형태로 이루어질지 모르며, 영국이나 프랑스, 혹은 그 어떤 민주국가들과의 일체의 충돌을 적어도 피하고 있다. 광대한 자원과 넘치는 인구, 깊은 상실감과 상처를 앉고 있는 독일이 해외의 모든 영토들을 단번에 상실했고, 아울러 유럽에서의 팽창이 가로막혔다고 여긴 것은 명백하게 오판이었다. 팽창의 야욕을 완벽하게, 합법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대상이며, 크고 강력한 국가가 어디론가 확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사실이다. 독일처럼 매우 풍부한 인력과 과학적 지식, 에너지를 갖춘 나라가 새장에 갇혀서 잠자코 있을 것이라고 보는 관점은 타당치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A. J. Giant & H. W. V. Temperley Agatha Ramm, Europe in the Nineteenth Century: 1789-1905, 5th Edition, London & NYC: Longmans, Green & Co, 1939, 684-6.)
- Leninism, 1944, 626.
- 소련의 국가예산 통계 및 국방비에 지출된 예산 비율은 A. Baykov, The Development of the Soviet Economic System, New York: MacMillan Company, 1947.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붉은 군대의 숫자에 관한 통계는 Soviet Progress 1930-34, 1935, 41.과 Soviet National Economy, London & Moscow: Anglo-Russian Parliamentary Committee, 1936.에 기록된 연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이러한 양상과 상반되는 면모는 파시스트의 침략이라는 위험이 사라진 후 소련의 국방비 지출의 급격한 감소─상대적인 측면에서, 절대적인 측면에서 모두─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이상의 지표들은 1947년 2월 20일의 연설에서 소련 재정성에 의해 제시됐다. 국방비는 1943년에 총지출에서 52.2%를 차지했으며, 1944년에는 52.2%를, 1945년에는 42.9%를, 1946년에는 23.9%를, 1947년에는 18%를, 1948년에는 17%를 차지했다.
- 1941년 6월까지 계획 성과에 관한 간략한 통계는 N. Voznesensky, “The War Economy of the USSR in the Period of the Patriotic War”, Voyennaya Ekonomika SSSR, 1947: 14-5.을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