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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학에서의 모순 문제」 『총명한 유물론』 제3집 봄호
„Problema protivorechiya v logike“, Dialekticheskoe protivorechie, Moskva: Politizdat, 1979, 122-43.
E. V. Il'enkov | 구 소련 유물론 철학자·논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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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분명히 밝히자면, “논리학”이라는 용어는 사고의 과학, 즉 개념 발달의 형식과 패턴에 대한 과학만을 의미하며, 그 외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최근 이를 특별히 주목해야만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용어가─심지어 ‘유일하게 현대적인’ 그리고 ‘유일하게 과학적인’ 논리를 지칭하기 위해서조차─전혀 다른 대상, 즉 ‘과학의 언어’에 바쳐진 책과 논문의 제목에 빈번히 등장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토의되고 있는 것은 사고 내의, 개념의 발전 과정 내의, 과학의 발전 과정 내의 모순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위 ‘과학의 언어’ 속에 있는, 발전하는 사고에서 모순의 표현 형식들에 관한 순전히 특수한 문제를 일단 제쳐두고자 한다. 이는 온갖 존중과 가장 세심한 고찰을 받을 가치가 있는 문제이지만, [지금 토의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문제이다.
우리가 토의하고 있는 논리에서는 결코 언어 일반 내의, 하물며 인위적인 ‘과학의 언어’ 내의 사고 표현의 특수한 형식들이 고찰되는 게 아니라, 언어 내에서만 실현되는 것은 아닌 ‘자연사적 과정’(K. 마르크스)으로서 이해되는 사고 자체의 형식들이 고찰된다.
물론 사고의 형식은 언어, 즉 언어의 형식으로 표현(그리고 실현)되지만, 이 둘 사이의 근본 차이를 간과함은 심각한 오류이며, 논리학자에게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실수일 것이다. 사고의 형식과 언어 내에서의 사고 표현의 형식들 사이에는 등호가 놓일 수 없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언어 일반이 그 안에서 사고가 실현되고, ‘발현되며’, ‘외화되고’, 그리하여 연구되는 그 유일한 ‘외적 형식’이라는 저 오래된 철학적 편견의 토대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그렇다, ‘언어’의 형식과 규범이야말로 관찰과 연구에 접근 가능한 유일한 ‘사고 형식’, 즉 논리적 규범이다. 그러나 이 편견은,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려졌듯, 사고에 관한 과학에 있어 심각한 결과들을 초래할 수 있으며, 특히 사고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형식과 법칙을 연구하는 과학으로서의 논리학을 어떠한 객관적인 근거와 정당성도 갖지 않으며 가질 수도 없는, 그리하여 상호 합의(‘규약적으로’)에 의해 확립되는 순전히 주관적인 ‘규칙’의 체계로 완전히 퇴행시킬 위험을 내포한다; 이리 해석된 ‘논리학’은 필연적으로 파니코프스키가 언젠가 위반했던 저 규약(convention)1과 닮은 무언가로 변질된다. 그 징표 아래에서 논리학이 스토아학파와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에 의해 쌓아졌던, 사고의 형식과 언어의 형식의 동일시는 물론 나름의 역사적 정당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것은 레테의 강물 속에 잠겼다.
헤겔은 묘사된 편견을 오래전에 청산했다 (비록 완벽히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언어’를 유일한 형태는 아닐지라도 최초의, 그리하여 최종적이자 최고이며 가장 부합하는 ‘사유의 힘의 현현’의 형태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 편견의 위신을 간단한 물음으로 흔들었다: 그런데 사유가 오직 언어 속에서만, 오직 말(발화) 속에서만, 오직 말하기 속에서만, 그리고 이 말하기의 도식적 묘사(v graficheskom izobrazhenii) 속에서만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형태들을 발견(발현)한다고 누가 말했는가? 인간은 자신의 행동, 위업, 사물을 빚어내는 행위, 문명의 대상적 신체의 창조 속에서 자신을 사유하는 존재로서 발견하지 않는가? 어쩌면 이 물음은 순전히 수사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왜 사고를 오로지 언어적 표현 형태로서만 연구해야 하는 것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구시대적인 ‘논리’와 진정 현대적인 논리 사이의 경계선이 그어졌다. 사유의 형식, 즉 그것의 논리적 형식을 여전히 탐구하고자 하는 논리학은, 여기서 처음으로 [사유의] 형식의 발현인 언어적 형식에의 연구로부터 자신을 의식적으로 분리해 냈으며, 그리하여 처음으로 사유의 논리적 형식과 법칙들을 자신의 특별한 관심과 고찰 대상으로서 선별해 냈다. 위에서 설명한 구시대의 순전히 형식적인 논리의 근본 결함은 헤겔만이 아니라 그의 수다한 철학적 반대자들에 의해서도 아주 명확하게 인식되었다. 그 예로, A. 트렌델렌부르크(Trendelenburg)는 전통 논리학이 언어 속에서 자신을 자각했으며, 많은 측면에서 “자기 내로 심화된 문법”이라 불릴 수 있다는 사실을 확정했다.2 L. 포이어바흐도 같은 취지로 이 문제에 대해 다음을 표명하였다: “오직 형이상학적 관계만이 논리적 관계이며, 범주론으로서의 형이상학만이 진정 심오한 논리이다. 이것이 헤겔의 심오한 사상이다. 소위 논리적 형식이라는 것은 추상적이고 기초적인 언어 형식일 뿐이다; 하지만 언어는 사고가 아니다─만약 그렇다면 가장 뛰어난 언변가가 가장 뛰어난 사상가여야 할 것이다.”3 다소 무례할 수 있겠지만, 이는 완전히 사실이다.
논리학이 사고의 과학이라면, 논리학은 사고의 모든 양상을 경험적 자료로 연구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여기에는 물론 언어적 표현, 즉 사고의 언어적 형태도 포함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이 문제의] 도처에서 보이듯, 논리학은 논리적 형식 그 자체를; 사유의 형식 그 자체를, 그것의 언어적-용어적 및 구문론적 의상으로부터, 즉 의상이 실제 그러한 바인 ‘외적 형식’으로부터의 온전한 독립성 속에서 발견해 낼 의무가 있다.
만약 논리적 형식들이 주변 세계에 대해 말하는 행위에서뿐만 아니라, 세계를 실제로 변화시키는 행위에서, 즉 인간 실천 속에서도 자신을 드러낸다면, 실천은 인간의 말과 그의 언어적으로 형상화된 자기의식을 지배하는 논리적 주형(logicheskikh figur)의 '올바름'에 대한 기준이 된다. 논리적 형식(도식·형상)이란, 구체적으로 그 활동이 어떤 대상을 향하고 있든 간에─그것이 단어든, 사물이든, 사건이든, 역사적 상황이든─인간 활동 전반이 그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형식이다.
그리고 만약 어떤 형상을 우리가 사고가 진행되는 언어적 형식에서만 발견하고, 인간의 실제적 행위 속에서(그것들의 추상적 도식으로서) 이를 발견할 수 없다면, 이는 우리가 논리적 형식과 마주한 것이 전혀 아니라 그저 언어의 형식에 불과한 것과 마주했음을 말해준다. 실천은 논리에 있어서도 진리의 기준이자, 우리가 논리적 형식을 다루고 있는지 아닌지에의 결정자로 남는다.
당연하게도, 논리학을 사고에 관한 과학으로, 즉 단어 속에서나 말하기 및 그 말하기의 도식적 기록 속에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심지어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행위 속에서, 외부 세계를 변화시키는 활동 속에서, 완전히 실제적인 사물들을 동반한 실험 속에서, 노동 대상의 창조와 인간 사이 관계의 변혁 과정 속에서 실현되는 활동으로 이해할 때, 사태는 낡은, 순수하게 형식적인 논리의 옹호자들의 눈에 비치는 것과는 현저하게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들[“순수하게 형식적인 논리의 옹호자들”]은 사고 자체에 대해서라기보다, 사물의 언어적 '정의'의 구성 안에서 '주어와 술어들'을 결합하는 방식에 대해, 상호 간 서로를 상쇄하는 ‘진술 연언’에 대해, 그리고 그와 유사한,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언어학적 성격을 지닌 상황들에 대해 논했던 자들이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실제 사고가 이루어지는 진정한 논리적 형식은 바로 모순의 부재가 아니라, 바로 그 모순 자체이며, 이는 과학, 기술, 그리고 ‘도덕’의 발전이라는 형태로 실현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헤겔은 “모순은 진리의 기준으로, 모순의 부재는 오류의 기준”4이라는 역설적인 주장을 할 권리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악명 높은 “모순 배제”의 원칙을 사고의 법칙, 즉 절대적이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진리의 기준”이라는 지위에서 박탈할 권리가 있었다.
헤겔은 이를 통해 낡은 형식 논리를 그것의 요구사항들과 함께 결코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심오한 이해의 구성 안에서 그것을 ‘지양’한다. 특히 그는 소위 모순 배제의 ‘합리적 핵심’을, 모순 그 자체로 사태가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보는데, 왜냐하면 ‘모순’이란 그것의 해소와 함께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모순 배제’의 원칙은 여기서 사고의 실제적 법칙, 즉 실제적·논리적 형식의 현실적 측면을 추상적으로 정식화하는 ‘명제’로 정당하게 해석된다. 그리고 이 실제적 사고 법칙은 ‘대립물’이 단순히 그 자체로, 서로 간의 연관 밖에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에까지 이르는 그것들의 통일성 속에서 파악된다는 점에 있으며, 이때 ‘대립물’과 그것들의 ‘동일성’ 모두는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넘어가는, 상호 전제적인 이행의 계기들로서 표현된다.
추상적으로 고정된 대립에서와 마찬가지로 추상적으로 고정된 통일성(동일성)으로의 이러한 이행을, 소위 형식 논리에서 설명하는 사고의 법칙에 따라 추론하는 방식으로는 포착하고 표현할 수 없다. 이 방식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의 합리적-논리적인 이행 대신, 단순 관용어구들의 보조를 받아 그 이행을 그저 훌쩍 건너뛴다(‘한편으로는’ 모든 사물 속에서 동일성이 고정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차이, 동일성의 부재, 대립이 고정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물들이 동일하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대립한다... ‘어떠한 한 관계’에서는 사태가 그러하지만, ‘다른 관계에서는’ 정반대이다...).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의 이행─즉 대립물들이 서로로 전화하는 과정이자 각 대립물 속에, 그것들 자체의 규정들의 구성 내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그 과정─을 탐구하고 추적하고 표현해야 마땅할 지점에서, 한 대립물로부터 다른 대립물로의 어마어마한 비약을 감행하는 이 오래되고 매우 끈질긴 방식에 대하여, 헤겔은 매우 독설적으로 조소하고 있다.
이 아이러니가 오늘날까지도 많은 ‘논리학자’에게 가닿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모순을 지금까지도 사고의 일시적인 질병이자, 사고로부터 가장 엄격한 방식으로 추방해야 마땅할 변칙으로 여기는 이 ‘논리학자’들이, 스스로 한 장에서는 A라 말하면서, 이어지는 장(심지어는 바로 같은 장)에서는 ~A라고 말하고, 기본적인 비논리성에 대한 비난으로부터는 이 A를 “동일한 의미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관계들에서” 사용하는 것이라는 그러한 확언으로 도망친다면─즉, 동일한 용어 아래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그와 정반대인 것들을 [이 ‘논리학자’들이] “품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헤겔은 사유에 대한(사유에 있어서!) 그 유명한 ‘모순 배제’가 법칙이 아니라, 실제 사유(과학과 기술의 발전) 속에서 결코 그리고 어디에서도 실현되지 않고 있으며 실현 가능하지도 않은, 단지 추상적으로 정식화된 요구사항일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바로 그 이유는, 이 요구사항의 형태로 정식화된 것은 법칙이 아니라 사유의 실재적 법칙이 지닌 대립적인 측면의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며, 이는 다른 하나의─정반대되는─측면 및 그것을 표현하는 ‘논리적’ 요구사항, 즉 사물들 사이의 “동일성뿐만 아니라”, “또한 차이 또한”, “마찬가지로 대립 또한” 파악하고 표현해야 한다는 요구사항 없이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발전적 사고의 변증법은 형식 논리조차 자기 자신을 고려하도록(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강제하지만, 형식 논리는 위에서 인용된 것들과 같은 언어적 관용구들의 보조를 받아, 결합할 수 없는 것들을 결합하면서, 또다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증법을 ‘고려’한다: “한편으로는/다른 한편으로는”─때로는 이러한 [구문으로 표현되는] 방식을 변증법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이러한 사고방식을 정당화하는 이론을 ‘변증법적 논리’라고 한다.
실재하는 발전적 사고의 변증법은 형식 논리조차 자기 자신을 고려하도록(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강제하지만, 형식 논리는 위에서 인용된 것들과 같은 언어적 관용구들의 보조를 받아, 결합할 수 없는 것들을 결합하면서, 또다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증법을 ‘고려’한다: “한편으로는/다른 한편으로는”─때로는 이러한 [구문으로 표현되는] 방식을 변증법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이러한 사고방식을 정당화하는 이론을 ‘변증법적 논리’라고 한다.
변증법적 논리는 사고에 전혀 다른 것, 즉 우선 첫째로, 동일한 하나의 연구 대상 내부의 실재적 대립물들을 (언어적인 것을 포함하여) 명확하게 확정(고정)할 것을 의무 지운다. 그리고 이 ‘첫 번째 사항’은 날카롭게 다듬어진 용어의 도움을 빌려 필연적으로 모순으로서 확정되는데, 이는 그 언어적 형태에 있어서 소위 형식적 모순, 즉 A와 ~A의 연언과 절대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둘째로, 단순히 ‘모순’의 확정만으로 사태가 종결되지 않으므로, 사유의 더 전진해 나가는 운동은 ‘모순적 연언’의 구성에 포함된 용어들을 이용하여 순전히 언어학적인 연습을 통해 확정된 모순을 소거하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대립물이 상호 이행(‘전화’)하는 것을 추적하고 항상 이 이행의 모든 ‘매개 고리’를 밝혀내는 데서 그것의 합리적 해소점(ratsional'nom razreshenii)을 지닌다. 더 나아가, 해당 이행의 필연성을 상호 전화에서의 대립항 각각의 구성에서 발견되어야 하며, 각각은 이론적이고 용어적으로 엄격한 정의로 표현되어야 한다. 기호 A로 지정된 대상이 오직 그 자체 안에서만,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자기 자신의 ‘부정’, 즉 ‘타자’, 반대되는 것, 다시 말해 ‘A가 아닌 것’을 내포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어떻게 해야지 언어 속에 내재한, 즉 필연적인 ‘매개변수’ 안에서의 자기 부정, 다시 말해 스스로가 자신을 그 반대물로 전화시켜야 할 필연성을 담고 있는 현실 상황을 포착할 수 있을까?
만약 과학적 언어의 최고의 가치를 ‘사물’의 실재적 모순성, 즉 대상 안에 존재하는 상호 전제적이면서 동시에 상호 부정적인 ‘계기들’─바로 이 계기들 속에 해당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변화시켜야 할 필요성, 즉 그것의 '자기부정'이 존재함─을 용어들 속에 명확하고 엄밀하며 적절하게 고정시키는 능력에 있다고 본다면, 우리는 이론적 개념의 구성 내에서(즉, 사물에 대한, ‘사태의 핵심’에 대한 전개된 이론적 이해의 구성 내에서) 모순되는 규정들을 결합하는 것이 인간의 사고 속에서,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상황들에 대한 ‘진술’의 구문론적 구조이자 언어적 표현 속에서 객관적 실재를 반영하는 유일하게 적절한 형식이 된다는 사실에 동의해야 할 것이다.
연구 대상의 실재적 모순은, 만약 그것이 올바르고 정확하게 파악되었다면, 사고 내에 반영되며, 바로 모순으로서 ‘진술’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과학의 현실적 언어─자연사적으로 발전하는 과학의 용어 체계와 그것의 ‘구문론’─는 그 안에서 모순들을 그것의 부재로서가 아니라 모순들로서 표현하는(‘진술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충분히 유연하다.
모순은, 다른 어떠한 논리적 범주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식 속에 반영된(다소간 충만하게, 정확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반영되었는지는 이미 다른 문제이다) ‘존재’의 발전의 보편적 형식, 즉 의식 외부 세계의 자연-사물적이고 사회-역사적인 발전에 다름 아니다. 논리적 범주들은 이 일반적 발전의 의식으로서의 형식이다. 당연하게도, 그것들이 더 정확하고, 더 충만하며, 더 구체적으로 의식될수록(그리고 과학의 언어 속에 표현될수록), 그것들은 인간에게 논리적 범주들로서, 논리적 사고 형식들의 기능 내에서, 사고 발전의 보편적 규범들로서, 그리하여 또한 개별적으로 실현되는 사고와 현실에 대한 이론적 의식의 논리적 도식들로서 더욱더 ‘성공적으로’ 봉사하게 된다.
이는 변증법(보편적인 발전론으로서, 일반적인 형태로서)이 헤겔과 마르크스주의의 논리이며, 마르크스-레닌주의가 현대 과학에 제시하는 현대 유물론의 인식론이라는 V. I. 레닌의 잘 알려진 입장과 관련이 있다.
변증법과 나란히 나타나거나, 그것의 '보충'을 구성하거나, 혹은 학자들의 정신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에서 이와 경쟁할 수 있는 그 어떤 다른 논리도 존재하지 않는데, 이는 사고에 대한 변증법적 이해(대문자 L로 표기한 논리학)가 자신의 개념 구성 안에, 낡은 순수 형식 논리가 스스로 함유는 하고 있었으되 ‘사고의 법칙’이라는 절대적으로 반박 불가능한 의미를 부여했던 저 모든 ‘합리적 핵심’을 특수한 것으로서의 자격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사정에 있다.
낡은 형식 논리는 이미 헤겔적 구상에 따르면 ‘지양’되었다. 즉, 그것은 그 표현 형식의 부적절함에서 정화된 그것의 합리적 계기들 속에 보존되었으며, ‘사고에 관한 과학’이라는 역할을 자처하며 이 사고에 절대적으로 반박 불가능한 '올바름'의 제 규범을 처방하는 독립 과학으로서는 사장(死藏)되었다. 당연히 실로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한 역할을 자처하는 형식 논리는 필연적으로 변증법과 대립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순의 문제에서 그러하다.
형식 논리에는 기껏해야 예비 학습적(프로페데우틱) 역할만이 보존되며, 그렇기에 V. I. 레닌은 이 ‘논리학’을 중등학교의 초급 학년들에서 가르칠 것을 권고한다. 물론, 이는 그것의 단순한 규칙에의 [낡은 형식 논리가 추구했던]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사고의 법칙’이라는 의미를 박탈하는 그러한 수정과 제한을 받아들인 한에서 그리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 수정과 제한은 그 경계 밖에서는 이 규칙이 자신들의 반박 불가능한 성격을 상실하게 만드는 그 경계를 획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는, 때때로 이 교과목을 학생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그 용어 뭉텅이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후에라야 그리되어야 한다. “사물들의 가장 평범한 관계들”(V. I. 레닌)에 관한 추론의 초보적인 문화를 보장하는 규칙은 모든 사람에게 가용한 ‘자연어’로 서술하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서술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서술되고 습득된 형식 논리의 권고 사항들은 (그중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터무니없는 모순으로부터, 그리고 아무런 객관적 근거 없이 하나의 단정적 주장으로부터 그 정반대로 비약하는 어린아이 같은 방식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규칙도 포함되는데) 사람이 충분히 성숙했을 때, 사물과 상황 그리고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언사 속에 담긴 모순─이 모순들을 두려워하거나 언어적 기교로 그것을 모면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포착하고 ‘표명’하는 것을 결코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모순 배제’가 그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인 ‘사고의 법칙’으로, 그리고 그 때문에 그와 마찬가지로 ‘언어’의 절대적 규범으로서 제시될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그 경우 이 지극히 정당한 요구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모순을 ‘언표’하는 것에 대한 금지로, 그것들을 침묵시키라는 요구로, 혹은 I. S. 나르스키가 표현하듯 그것들을 ‘차단’하라는, 즉 의식의 주변부로 밀어내어 그것들이 차분한 고찰에 몰두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라는 요구로 변모하며, 고찰은 이로 인해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형식 논리는 참으로 변증법의 적대자로, 그것의 습득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변모한다. 그러한 해석에서 형식 논리 그 자체는 물론 조금도 잘못이 없다. 오늘날 형식 논리는, 그 가장 건실한 대표자들의 입을 빌린다 하더라도, 사고에 관한 과학, 즉 사고의 법칙과 형태에 관한 과학이라는 역할을 자처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모순의 변증법적 개념에 대하여 단순히 ‘형식 논리’의 이름으로만이 아니라, ‘현대 형식 논리’(그리고 심지어는 단순히 ‘현대 논리’)의 이름으로 쟁론을 벌이며, 이때 이들은 현대 수리논리를 염두에 두고 있다.
전통적인 (헤겔 전, 심지어 칸트 전의) 형식 논리와는 대조적으로, 진정으로 현대적인 수리논리는 결코 스스로를 사고의 과학으로 간주한 적이 없음을 유념해야 한다. 수학 논리학은 현대 수학의 매우 전문적인 분야로, 모든 전문 수학자가 그 언어와 기법의 복잡성을 아는 것은 아니다. 이 분야는 엄격하게 정의된 (그리고 결코 모든 것은 아닌) 특정한 수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따라서 이 규칙(‘알고리즘’)은 수리논리가 사고 일반의 규칙-법칙으로서 개발된 적이 없으며, 수리논리는 이러한 것을 다루지 않았다(비록 일부 수학자 사이에서 유사한 류의 혼란이 생겨났지만). 수리논리는 지극히 중요하지만 그만큼 지극히 특수한 과제, 즉 ‘명제 논리’의 과정에서 ‘명제’들을 순수하게 형식적으로 변환하는 과제이자 동일한 기호-상징의 다른 조합들로부터 그와 동일한 기호-상징의 어떤 조합들을 순수하게 형식적으로 도출해내는 절차라는 과제를 해결하는 데 전념하는 사유가 지침으로 삼는, 그러한 도식을 항상 취급해왔다. 이와 관련하여 수리논리는 새로운 기호-상징을 도입하는 자신만의 특수한 규칙들, 그리고 이미 도입된 기호-상징을 통해 그것들을 정의하는 규칙들을 개발하는데, 이 규칙들은 그 총체로서 순수하게 형식적인 ‘진술’ 절차에서 기호-상징을 정확하게 다루는 기법을 구성하며, 이 기법은 그러한 계산의 ‘정확성’을 보장한다. 수리논리에서 특수하고도 유일한 연구 대상은 기호-상징과 그것들을 기호 구조(‘통사론’)로 결합하는 방식이다. 수리논리의 모든 ‘규칙’은 매우 특수한 분야에 맞춰 만들어진 것이다. 이 특수한 분야 내에서 그 규칙들은 논쟁의 여지가 없고, 예외가 없는 중요성과 권위를 지닌다. 이 범위를 벗어난 것─순수하게 형식적인 ‘명제 논리’라는 과제가 아닌 여타의 과제들을 해결하려 할 때, 수리논리가 개발한 모든 규칙은 그 스스로의 일면적 성격뿐만 아니라 그 어떤 의미도 즉시 상실하고야 만다. 심지어 수학의 범위 내에서도 그러한데, 왜냐하면 수학은 결코 자신의 순수하게 형식적인 측면이나 자신의 용어 체계, 그리고 자신의 ‘통사론’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수학자의 실제 사유는 형식적 진술의 규칙이나 형식적 ‘증명’의 연쇄를 구축하는 규칙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심오한 법칙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수학자들 스스로가 이를 탁월하게 이해하고 있으므로, 수리논리에 대하여─심지어 수학의 범위 내에서조차─무엇보다 신실증주의자들이 그것[논리학]에 강요하는 그러한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N. 부르바키는 이렇게 적었다: “각각의 수학 이론은, 수학의 특수한 필요들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적응된 채 모든 본질적인 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형식 논리’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논리와 일치하는 논리의 규칙들에 따라, 서로로부터 도출되는 명제들의 연쇄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의 ‘논리성’은, 권위 있는 저자의 말을 잇자면, “단지 수학자가 자신의 사유에 부여하는 외적인 형식이자, 사유를 다른 사유들과 결합할 수 있게 만드는 도구이며, 말하자면 수학에 고유한 언어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이 언어의 어휘를 정리하고 그 통사론을 정밀하게 하는 것은 매우 유용한 일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작업은 공리적 방법의 측면의 하나, 구체적으로는 논리 형식주의(혹은 이른바 ‘로지스틱스’)라고 불러야 할 측면을 구성한다. 하지만─그리고 우리는 이 점을 강조한다만─이는 단지 한 측면일 뿐이며, 게다가 가장 흥미롭지 않은 측면이다. … ”5
이러한 이유로 수리논리 규칙은 변증법적 논리(또는 더 정확하게는 그 어떤 형용사도 붙지 않는 순정의 논리)에 의해 밝혀지는 사고의 법칙에 대한 경쟁자일 수도, 적수일 수도 없으며, 심지어 단순한 보완 원리조차 될 수 없고, 결코 그리되었던 적도 없었다. 그들은 단순히 다른 것─즉 기호 상징 일부 조합을 동일한 기호-상징의 다른 조합으로 변환하는 절차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절차의 틀 안에서 수리논리의 제 규칙은 절대적이고, 반박 불가능하며, 단호한데, 따라서 ‘명제 논리’라는 특수한 과제의 해결에 전념하는 이 사유는, [이 규칙에] 그 어떤 의심이나 숙고도 없이, 이를 엄격하게 준수하여 이에 복종해야만 한다. 여기서 모순 배제 또한 절대적인 힘을 지니는데, 이는 기호-상징과 그것 자체의 부정을 결합하는 ‘명제’에 대하여, 즉 아무리 긴 ‘명제들’의 연쇄 혹은 기호-상징들의 연쇄라 할지라도 그 구성 안에서 A와 ~A의 ‘연언’에 부과되는 금지 조항이다. 여기서 이러한 금지는 충분히 정당한데, 왜냐하면 ‘모순’뿐만 아니라, 동일한 기호-상징의 정의와 적용에 있어 아주 사소한 모호함조차도 즉시 형식적 연산으로부터의 그 모든 장점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형식적 연산의 과정에서 기호-상징은 엄격하게 그 자신으로, 즉 변하지 않는 상태에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간단한 이유 탓에, 형식 추론의 구성 내에서 기호-상징들을 다루는 규칙을 사고 작용의 다른 어떤 사례들로 확장하려는, 즉 이에 ‘사고 일반의 법칙’, 논리 법칙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려는 모든 시도는, 형법 조항들을 싱크로파소트론(Synchrophasotron)의 전자기장 내 소립자들의 운동이나 망토개코원숭이(Papio hamadryas) 무리 내의 상호관계에 ‘적용’하려는 노력보다 결코 더 지적인 기획이 아니다. 변화하는 대상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는 사유를, 인공적인 기호 구조의 구성 요소로서 기호-상징(혹은 반드시 기호-상징이어야 하는)─불변의 대상을 다루기 위한 특별한 규칙의 지시에 종속시키는 것은 부조리하다.
그럼에도 형식적(기호적) 체계들을 구축하는 특수한 규칙들을 ‘논리적’ 규범의 지위로, 즉 사고 일반의 보편적 규범의 지위로 격상시키며 기어코 이를 시도하게 될 때, 현실적으로 발전하는 사유(그 역사적 발전 과정에 있는 과학)는 결국 하나의 거대한 오해처럼, 논리적 규범들에 대한 끊임없는 위반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비논리적인 과정처럼 보이게 된다. 비합리주의자들은 그저 손을 비비며 기뻐할 따름이다. 논리와 ‘논리성’(즉 ‘무모순성’)에 관해 앞서 그려낸 해석은 그들에게 언제나 자양분을 제공하는 토양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논리성’에 대한 순전히 형식적인 이해와 비합리주의는 서로 필연적인 상호보완 관계에 놓여 있는데, 이는 사고의 진정한 논리가 저쪽에서도 이쪽에서도 포착되지도 표현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적어도 셸링, 쇼펜하우어, 베르그송을 떠올려 볼 만하다.
과학의 진정한 언어(형식적 접근 방식에서의 사유는 언어라는 형식에만 고정되어 있다)가 모순을 표현할 수 없도록(구성할 수 없도록) 특별히 설계되고 구성된 언어의 한계에 종속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심지어 가장 재치 있는 신실증주의 대표자들조차도 이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I. 라카토스는 현대 과학의 현실적 장치를 형식적으로 무모순적인 기호 체계 구축의 ‘규칙’이라는 무조건적인 독재에 종속시키려는 경향이, 오직 단 하나의 결말, 즉 현학적으로 정교해진 ‘언어’라는 모습 아래 과학의 현존 상태가 동결되고 그 모든 발전은 ‘배제’ 상태에 놓이게 되는 저 ‘이상적인’ 상태로만 이어질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만약 개념들의 정의 내에서 ‘사고의 모순’이 없는 것이 이상으로, 그리고 이 이상에 부합하는 논리적 규범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당연히 사고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은, 추후의 연구와 사태의 본질에 대한 더 깊고 구체적인 이해 속에서 모순들에 대한 해소를 탐색하고 발견할 대신, ‘과학의 언어’로부터 그 안에 진술된 모든 ‘모순’을 소거하는 데로 향해야만 할 것이다.
‘사유 속의 모순’에 대한 변증법적 논리학의 태도는 다음과 같은 점, 즉 과학의 운동(즉 실재적 사고)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며 그 언어-구문론적 형식에 있어서는 수리논리에 의해 정당하게 배제되는 상호 부정적인 ‘진술들의 연언’과 절대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는 개념 정의상의 모순들을, 사고로부터 소거하지 말고 오히려 그 표현을 극한의 명확함과 쉽게 식별 가능한 소리 및 표기에 이르기까지 날카로이 세우는 데 있으며, 이는 물론 그 지점에서 안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형식적(언어적)인 것이 아닌 실제적인─이론적이고 실험-실천적인─해소를 요구하는 명확하게 정식화된 과제 앞에 사고를 직면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된 과학이 항상 해왔던 방식이다.
그리고 모순, 나아가 정반대의 지점에 이르는 모순은 항상 과학의 성장 지점, 즉 아직 알려지지 않은 현실의 영역으로 사고가 돌파하는 지점을 나타내 왔다.
반면, 사유 속의 모순을 언제나 변칙으로, ‘규정되지 않은 용어’의 결과로, 혹은 용어를 다루는 부주의함의 지표로 해석하도록 강제하는 논리는, 과학(과학자들의 사고)을 언제나 그와는 정반대인 다른 길로 향하게 했다. 이 길은 순전한 언어학적 교묘함과 정교한 언어적 기교─모순적인 객관적 상황에 대한 ‘기술’을 ‘비모순적’인 것으로, 그리하여 사람들과 그들의 사고에 아무런 불편함도 주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기교─의 도움으로 사물과 상황의 현존하는 ‘기술’로부터 모순을 소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용어들을 붙들고 벌이는, 헛된 스콜라적 씨름의 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변증법적 논리와 형식 논리라는 두 갈래 길이 갈라지게 되는데, 형식 논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절대화된 학문이다. 따라서 두 논리학자가 과학과 사유하는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권고 사항에는 차이가 있다.
학교에서 배운 ‘과학 용어’로 표현했을 때 ‘모순적’이거나 ‘A와 ~A의 연언’으로 쓰이는 상황을 만났다고 해서 “이건 불가능해”라고 섣불리 단정하지 마라. 그런 일은 흔히 일어난다. 그리고 이 사실을, 당신이 전에 어딘가에서 ‘논리적 오류’를 범했다는 점과 그러한 ‘기록 형식’이 오로지 당신이 지금까지 ‘명확화되지 않아서 서로 [거짓] 일치를 이룬 술어’, 혹은 ‘의미는 다르지만 불완전하게 표현된 술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는 점으로 설명하려 애쓰지 마라. 만약 그렇다면, 과학의 언어에서 드러난 ‘모순’은 ‘술어의 정교화’와 당신이 이전에 범한 용어상의 부주의함 및 중의성을 교정함으로써 해결되어야만 할 것이며, 나타난 ‘사유 속의 모순’에 대한 다른 근거들을 찾는 것은 물론 불필요할뿐더러 그 근거를 찾을 곳도 없는 것이다.
이런 류의 사항에서 확인에 확인을 거듭함은 물론 항상 유용하다. 어쩌면 당신은 실제 그런 실수를 저질렀을지도 모르고, 그 결과 스스로 모순되는 말, 즉 당신의 부정확한 진술 하나와 또 다른 부정확한 진술 사이의 모순에 빠진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용어를 명확히 하라”─그러면 모든 게 풀릴 것이리라.
하지만, ‘술어의 불명확성’을 찾기 위한 끝없는 세심한 탐색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오류가 발견되지 않고, 전에 제시했던 모든 추론 과정(이 문제에 대해 이전에 언급했던 모든 내용)을 확인하고 또 확인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모순이 계속해서 반복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한 경우라면 형식 논리는 내버려 두고, ‘술어’에 대한 연구로부터 그 표현 속에서 ‘모순’이 드러난 바로 그 현실에의 독자적인 연구로 넘어가라. 이 경우라면 당신은 올바르게(용어적 성격의 오류 없이) 표현된(‘명제화된’) 객관적 모순에 직면한 것이다. [이를 통해 당신은] 자기 자신과 맺는 탐구 대상의 모순, 즉 과학의 언어 속에─그것의 현존하며 역사적으로 형성된, 그리고 당신이 학교에서 습득한 그 언어 속─완전히 정확하고 올바르게 명제화된 객관적-변증법적 모순에 직면한 것이다.
이 경우 당신이 마음을 써야 할 것은 ‘언어’가 아니며, 언어를 검토하고 정교화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언어를 사용하여, 그 정의들의 구성 속에서 당신 앞에 대상의 모순들이 드러나게 된 그 관념(즉, 사안의 본질에 대한 이해)을 상승시켜야 한다. 여기서는 당신의 과학이 다루고 있는 그 대상에 대한 더 깊고 구체적인 이해에, 즉 이 관념의 상승에 마음 써야 하는 것이지, 결코 그것을 ‘오류’라 하여 ‘소거’하는 것에 마음 써서는 안 된다.
관념을 상승시키는 과정(사안의 본질을 이해하는 과정)은 ‘용어를 정교화하는 절차’와는 매우 다른 과정이다. 관념을 상승시킨다는 것은 그것에 반영된 모순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킨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들의 ‘언어’를 소거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모순을 그 모든 예리함과 긴장 속에서 고정하고, 이러한 모순이 당신의 관념의 원형(protoplasm)인 실재의 운동 속에서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해소되는지, 즉 당신이 포착한 모순의 양극을 어떤 ‘매개 고리’로 이어주는지 규명해 나가는 것이다.
이 과제의 해결에는 이제 결코 언어적인 것이 아닌 기법이 요구되는데, 이는 ‘언어’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사용하는 숙련도뿐만 아니라, 지성의 논리적 교양, 변증법적 해석 속에 있는 논리적 범주에 대한 지식, 그리고 이 범주를 전문 용어나 흔히 쓰이는 말이 아니라 사유의 형식으로서, 즉 객관적 실재를 탐구하는 능동적인 논리적 형식으로 사용하는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과학적 의식에 반영되면서, 그리고 수천 년에 걸친 그들의 실천 활동을 통한 검증으로써 바로 그 범주의 논리적 정의가 구성된, 엄격한 객관적 정의 속에 있는 모순 범주는 수리논리에서 ‘모순’에 부여되는 그러한 정의가─‘진리의 영점’, ‘혼란’ 그리고 ‘거짓’과 동의어인─아니다. 기호의 여타 조합들로부터 기호의 특정한 조합들(‘연언’)을 형식적으로 도출하는 것과 관련하여 이 정의는 타당하나, 그것은 사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므로 이 개념에 대한 논리적 정의들로서의 의의를 지니지 못한다.
말해진 바에 비추어 볼 때, “현대 논리의 수단들로 변증법의 장치를 개선하려는” 시도, 그리고 특히 그것을 ‘연언’, ‘정밀화’, ‘명제’ 등의 용어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수리논리의 언어로 모순의 문제를 해소하려는 시도는, 장미와 피쿠스를 교배시켜 잡종을 얻으려는 노력만큼이나 실현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타당해 보인다. 이 두 ‘논리’의 표현형과 유전형의 차이는 그 발전 과정에서 너무나 벌어져 버려서, 이들의 결합으로부터 생존 가능한 후손을 얻기를 전망하기란 불가능할 정도이다.<끝>
번역: 한동백 | 집행위원
2026년 5월 15일
- 〔역자 주〕 여기서 언급된 파니코프스키는 소련의 유명한 풍자 소설인 I. Ilf와 Y. Petrov의 『황금 송아지(Золотой телёнок)』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소설 속에서 가짜 ‘슈미트 중위의 아들’ 노릇을 하며 구걸과 사기를 치던 '전문 사기꾼들'은 서로의 구역을 침범하지 않기로 합의를 맺는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파니코프스키는 다른 사기꾼의 비옥한 구역을 몰래 침범하여 이 ‘신사협정(규약)’을 깨버린다.

- Sm.: Trendelenburg A. Logicheskie issledovaniya, t. 1. Moskva, 1868, 32.

- Feyyerbakh L. Sochineniya, t. 1. Moskva - Leningrad, 1923, 13.

- Gegel' G. V. F. Raboty raznykh let, t. 1. Moskva, 1970, 265.

- Burbaki N. Ocherki po istorii matematiki, Moskva, 1963, 247-8[강조는 필자의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