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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시온주의 동맹의 배신」 『총명한 유물론』 제3집 봄호
“The Treachery of the Nazi-Zionist Alliance”, Consortium News, June 24, 2024.
S. Moore1 | 영화제작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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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에게 불편한 사실이겠으나, 이스라엘의 현재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홀로코스트로 치닫던 시기에 나치 독일과 소수의 영향력 있는 시온주의자 집단이 각자의 인종적-민족주의(ethno-nationalist) 국가 건설을 위해 동맹을 맺으면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1933년 8월 25일, 독일 시온주의자들은 나치 정부와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일부 부유한 독일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것을 허용하는 대신, 팔레스타인 유대인 공동체에 수출되는 독일 상품을 구매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거래의 일환으로 시온주의자들은 히틀러 집권과 함께 시작된 독일 상품 불매(boycott) 운동을 종식시키기 위해 전 세계 유대인 사회에 로비를 벌이기로 합의했다.
1933년 독일 시온주의 연맹이 나치당에 보낸 각서는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독일이 시온주의자의 협력을 수용한다면, 이것들[(these)원문 그대로]은 해외 유대인들이 반(反)독일 불매 운동을 지지하지 않도록 설득할 것이다." (Lucy Dawidowicz, 『The War Against the Jews: 1933–1945』, 231–232쪽 참조)
이른바 '이전 협정' 또는 '하아바라 협정'—자금이 이체된 텔아비브 소재 회사의 이름을 딴 명칭—은 나치 독일의 공식 대표들에 의해 추인되었다.
시온주의자들에게 이 거래는 부유한 독일 유대인이 자본의 일부를 보전하고 팔레스타인에 정착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나치에게 이 협정은 독일 내 유대인 인구의 일부(1933~1939년 사이 6만 명)를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불매 운동을 실패로 몰아가고 독일 상품의 세계 수출 시장을 열어 경제를 부양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대다수가 비시온주의자이거나 반시온주의자였던 전 세계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나치에 맞서 싸울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무기 하나를 빼앗아 간 처참한 배신이었다.
뱃머리에 히브리어로 선명(船名)이 새겨지고 갑판에 하켄크로이츠 깃발이 게양된 하아바라 수송선 '텔아비브호'의 기괴한 모습이 이 동맹을 상징했다.
협정 체결 이전 수십 년 동안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온주의자들의 노력은 더디기만 했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내 조국 건설을 약속한 1917년 밸푸어 선언 이후에도 영국 당국은 유대인 이민을 제한했고, 유대인들은 토착 아랍 인구를 밀어낼 만큼의 토지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920년까지 유대인이 구입할 수 있었던 팔레스타인 토지는 전체의 2%에도 미치지 못했다.
시온주의자들에게 히틀러의 부상은 팔레스타인 이민을 폭발적으로 촉진할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이스라엘의 미래 지도자 다비드 벤구리온은 이렇게 말했다: "수년간 시온주의 선전이 하지 못한 일을 재앙이 하룻밤 사이에 해냈다."
독일계 유대인 저널리스트이자 역사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도 마찬가지이다.
"반유대주의는 압도적인 힘이었고, 유대인들은 그것을 이용하든지 그것에 삼켜지든지 해야 했다. 다비드 벤구리온 일파와 같은 전문가의 손에서 이 '추진력'은 … 끓는 물이 증기력을 생산하는 데 이용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될 터였다."
1. 누구를 구해야 하는가
그러나 시온주의 기획에서 빠져 있었던 것은, 소외되고 공격받으며 살해되고 있던 유럽 유대인 대다수의 운명이었다.
이스라엘 기자 톰 세게브는 영국 위임통치령의 역사를 다룬 저서 『일곱 번째 백만(Le Septième Million)』(539쪽 참조)에서 "유럽 유대인을 구하는 일은 [시온주의] 지배 계층의 우선순위 목록 최상위에 놓이지 않았다"고 썼다. 오히려 "국가 건설이 그들의 눈에는 근본적인 것이었다."
1938년 시온주의 노동당 대회에서 벤구리온은, 영국이 유럽에서 수천 명의 유대인 어린이를 구출하겠다는 제안을 한 뒤, 누구를 구해야 하는지에 관한 자신의 공식을 제시했다.
“독일의 모든 어린이를 영국으로 데려가면 전원을 구할 수 있고, 에레츠 이스라엘로 데려가면 그 절반만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나는 두 번째 해결책을 택할 것이다. 우리는 이 아이들의 생명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이익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에 데려오고자 한 것이 아무 아이나 다 포함하는 것은 아니었다. 동유럽과 러시아의 궁핍한 슈테틀(shtetl, 유대인 소도시) 출신 같은 이들은 해당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미래 대통령 하임 바이츠만은 1937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세계 시온주의자 대회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Ben Hecht, 『A Child of the Century』, 498쪽 참조)
“우리는 최상의 유대인 청년들만이 우리에게 오기를 원한다. … 교육받은 이들만이 들어오기를 원한다. … 다른 유대인들은 그들이 있는 곳에 머물며 어떤 운명이 기다리든 직면해야 할 것이다. 이 수백만 유대인구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묻은 먼지에 불과하며, 바람에 날려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텔아비브가 또 하나의 저급한 게토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실로 시온주의자들과 나치는 뜻이 통하는 사이였다. 양측 모두 당대에 갈수록 지지를 얻고 있던 개념인 인종적 순수성을 전제로 인종적-민족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있었으며, 양측 모두 유럽 내 유대인의 동화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독일 기자 클라우스 폴켄은 『비밀 접촉(The Secret Contacts)』 57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독일에서 다가오는 파시스트 지배의 위협에 대한 시온주의자들의 태도는 몇 가지 공통된 이데올로기적 전제에 의해 결정되었다. 파시스트들과 시온주의자들은 모두 비과학적인 인종 이론을 신봉했으며, '혈연적 민족성(Volkstum)' … 그리고 '인종적 배타성'과 같은 신비주의적 일반화에 대한 믿음에서 접점을 찾았다.”
2. 파시스트들과 뜻이 통하다
1933년 6월 21일 독일 시온주의 연맹이 나치당에 보낸 각서(루시 다비도비치, 『A Holocaust Reader』, 155쪽)는 자신들이 파시스트들과 의견을 같이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유대 민족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독일 국민과 그 민족적 및 인종적 현실과 명확하고 진실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준다. … 왜냐하면 우리 역시 잡혼(雜婚)에 반대하고 유대 집단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에 찬성하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시온주의 집행부의 수장이었던 사회학자 아르투어 루핀은 나치의 지배 인종 이론을 직접 원용했다.
그는 시온주의에 '인종적 순수성'이 필요하며 '오직 인종적으로 순수한 자만이 이 땅에 올 수 있다'고 믿었다. 나치 과학자들의 연구에 영감을 받아 아슈케나지 유대인이 예멘 유대인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두개골 계측을 실시했으며, 에티오피아 유대인의 이민에 대해서는 '혈연적 유대'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사실 일부 시온주의자들은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환영했다. 1937년 베를린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만난 시온주의 지하군 조직원 파이벨 폴케스는 독일의 공포 정치를 칭송했다.
“민족주의 유대인 진영은 독일의 급진적인 유대인 정책에 대해 큰 기쁨을 표명했다. 이 정책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를 증가시켜 유대인이 아랍인 다수를 넘어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폴켄, 『비밀 접촉』 74호 참조)
폴케스의 찬사에 아이히만이 화답했다. 아이히만은 "내가 유대인이었다면 열성적인 시온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사실 그 누구보다 열렬한 시온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인종과 국가 건설에 대한 유사한 견해 덕분에 나치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시온주의자들에게 특혜를 부여했다. (폴켄, 『비밀 접촉』 62호 참조) 시온주의자들은 1939년까지 자체 제복을 입고, 자체 깃발을 게양하며, 독자적 정치 철학을 표방할 수 있도록 허용된 유일한 비(非)나치 단체였다.
독일 선전부가 공산당, 사회민주당, 노동조합 및 기타 진보 단체가 발행하는 모든 신문을 금지한 반면, 시온주의 신문 『Jüdische Rundschau』는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아무 방해 없이 선전물을 발행할 수 있었다.
독일 시온주의자들과 달리 유럽의 유대인 대다수는 파시스트에 맞서 저항하고 있었다. 미국인 링컨 여단(Lincoln Brigade) 대원의 30%가 유대인이었던 스페인에서, 5,000명의 돔브로프스키 여단(Dombrovski Brigade) 전사 가운데 절반이 유대인이었던 폴란드에서 그들과 싸웠고, 동유럽 게토에 무기를 밀반입했으며, 다른 나라들이 구출에 나서도록 압박했다.
동시에 시온주의자들은 이러한 노력을 무산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었다.
1938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도주하는 독일, 오스트리아 유대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프랑스 에비앙레뱅(Évian-les-Bains)에서 32개국 국제회의가 소집되었을 때, 도미니카 공화국만이 유일하게 구출에 나서, 최대 10만 명의 유대인 난민에게 "비옥한 토지, 훌륭한 도로,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경찰력을 갖춘 공터"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Post Uganda Zionism on Trial』, 315쪽 참조)
관대한 제안에도 "시온주의자들의 적대감은 노골적이고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고 홀로코스트 연구자 S. B. 베이트 츠비(S. B. Beit Zvi)는 썼다.
“시온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기금 모금 수입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저항했다(218쪽 참조). … 미국 유대인들이 도미니카 공화국의 식민지에 기부한다면, 유대인 국민 기금이나 케렌 하예소드[이스라엘 연합 호소 기금]에 대한 기부가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시온주의자들은 호주, 소련, 일본, 마다가스카르, 알래스카에 유대인을 재정착시키려는 여러 제안과 제의에도 적대적이었다. (Edwin Black, 『he Transfer Agreement』, 260쪽 참조)
미국 역사학자 에드윈 블랙은 이렇게 썼다. "팔레스타인을 대규모 이민의 '유일한' 합법적 목적지로 고집하면서, 세계 시온주의 기구는 1933년부터 독일 유대인을 에레츠 이스라엘 이외의 안식처나 거주지에 재정착시킬 기회를 거부했다." "시온주의자들의 입장은 명확했다. 팔레스타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안된다." (블랙, 『이전 협정』, 260쪽 참조)
홀로코스트가 한창이던 1943년에 이르러서도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이외의 지역에 정착하려는 유대인들을 계속 가로막았다.
미국 정통파 랍비의 대규모 행렬이 워싱턴 D.C.에서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유럽 유대인의 구출을 탄원했을 때,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대통령이 그들을 만나지 못하도록 만류했다.
미국 내 반유대주의 정서를 이용하여, 세계 유대인 회의 수장 랍비 스티븐 와이즈와 미국 유대인 위원회의 새뮤얼 로즌먼은 루스벨트에게, 시위하는 랍비들은 '미국 유대인을 대표하지 않는' 이민 1세대에 불과하며 루스벨트가 만나야 할 부류의 유대인이 아니라고 말했다. 실제로 랍비들이 백악관에 도착했을 때, 루스벨트가 만날 수 없다는 (거짓) 통보를 받았다.
3. 카스트너 열차
시온주의의 배신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건은 아마 없을 것이다. 헝가리 유대인의 운명을 놓고 나치와 부역한 카스트너 열차 사건이 그것이다.
절멸이 절정에 달한 1944년 4월, 아돌프 아이히만은 헝가리 구호 및 구출 위원회 위원장 요엘 브란트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연합군으로부터 트럭 1만 대와 기타 물자를 받는 대가로 헝가리 유대인 100만 명의 생명을 살려주겠다는 것이었다.
브란트는 즉각 이스탄불로 날아가 유대인 기구에 제안을 전달했으나, 브란트가 나중에 말했듯이 그들에게는 절박함이 전혀 없었다. 유럽의 학살보다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주에 더 관심이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부다페스트로 돌아온 아이히만은 브란트의 동료이자 시온주의 지도자인 루돌프 카스트너에게 또 다른 거래를 제안했다. 1인당 1,000달러(오늘날 화폐 가치로 약 25,000달러)를 받는 대가로, 카스트너의 가족과 친지를 포함한 대부분 부유한 유대인 1,684명이 열차를 타고 스위스로 탈출하도록 허용하겠다는 것이었다. 합의의 일환으로 카스트너는 헝가리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화장터로 보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동의했다.
1944년 5월에서 7월 사이에 43만 7,000명의 유대인—헝가리 농촌 지역 유대인 인구의 거의 전원—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고, 대부분 도착 즉시 가스실에서 살해되었다.
1954년, 한 이스라엘 판사는 카스트너가 일부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아이히만과 협상함으로써 "영혼을 악마에게 팔았으며" "헝가리 유대인 학살의 길을 닦았다"고 판결했다. 카스트너는 1957년 3월 15일 나치 부역을 이유로 이스라엘의 극우 민병대 레히(Lehi) 소속 요원에 의해 암살되었다. 카스트너는 후일 이스라엘에서 영웅으로 복권되었다.
많은 이들은 여전히, 하아바라 협정과 카스트너의 아이히만과의 거래가 수천 명의 유대인 생명을 구하고 유대인 조국 건설을 돕기 위한 실용적 결정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 저널리스트 레니 브레너가 하아바라에 대해 쓴 것처럼:
“생명을 구했다는 모든 변명은 진지한 고려 대상에서 엄격히 배제되어야 한다. … 그것이 구한 것은 생명이 아니라 재산이다. …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독일 유대인 부르주아지의 자산 일부이다.”
결국, 소수 시온주의자 집단의 나치 부역은 독일을 향한 세계적 불매 운동을 무너뜨렸고, 전 세계 반파시즘 저항을 약화시켰으며, 유럽 유대인의 학살에 일조했다.
실로, 시온주의-나치 동맹은 오늘날 이스라엘의 아파르트헤이트 및 학살 정책의 이데올로기적 토대 일부가 되었다.
번역: 김민규 | 집행위원
2026년 4월 3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