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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자에 대하여〔 中 〕

보편자에 대하여 〔 총명한 유물론 3


AA AB AC AD AE AF AG AH AI AJ AK AL AM AN AO AP AQ AR AS AT AU AV AW AX AY AZ BA BB BC BD BE BF BG BH BI BJ BK BL BM BN BO BP BQ BR BS BT BU BV BW BX

만약 우리가 살아있는 언어와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정신의 진화를 통해 ‘보편자’라는 용어가 획득한 다양한 (그리고 그에 상반되는) 의미들의 발생학적 유사성이라는 문제로 되돌아온다면, 문제는 그 의미 중에서 확실하게 기원적 의미로 간주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의미를 식별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리된다면 [우리는] 시간상 가장 먼저 떠오르고 본질적으로 가장 단순했던 이 의미가 어떻게, 그리고 왜 그토록 확장되어 그 반대의 의미, 혹은 애초에 전제되지 않았던 의미까지 포함하게 되었는가를 밝혀내야 한다.

 

우리는 먼 조상들이 ‘추상적 대상’이나 ‘구성물’을 창조해 내려는 성향을 가졌다고 거의 추정하기는 어려우므로, ‘공통자’라는 용어가 ‘공통 조상’이나 ‘공동의 밭’과 같은 용어에서 간직해 온 의미를 본래 의미로 가정하는 것이 더 논리적일 것이다. 이는 현존하는 언어학적 증거를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마르크스는 이리 단언하였다: “그러나 노년의 헤겔은 후대에 독일어와 노르딕어에서 보편[das Allgermeine]이 공동의 토지만을 의미하고, 특정한, 특수한[das Sundre, Besondere]이 공동의 토지에서 분할된 사유 재산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뭐라고 말할까?”1

 

따라서 이제, 용어의 이 본래 단순한, 혹은 헤겔이 표현했듯이 진정으로 일반적인 의미가 주어졌을 때, ‘개별적인 것’, 분리된 것, 특수한 것 또는 구체적인 것보다 시간적으로나 본질적으로나 앞질러 ‘공통자’(‘보편자’)를 확립하는 그 개념이, 신플라톤주의자들과 중세 그리스도교 스콜라 철학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보편자의 개념을 채색하고 있는 그 정교한 신비주의에 대한 어떠한 암시조차 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이로써 ‘보편자’는 ‘사유’와 동의어가 되었고, 사유는 처음부터 비신체적(incorporeal)이고 영적(spiritualised)이며 전적으로 비물질적인(exclusively immaterial) 무언가로서 ‘로고스’, 즉 단어로 여겨졌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것의 본래적-보편적 의미에서의 ‘보편자’는 마음속에서, 그리고 따라서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 속에서, 그것이 물이든, 불이든, 혹은 아주 작은 균질한 입자들(‘불가분자’)이든 간에, 완전히 형체(형상)를 가진 물질에 대한 동의어로서 명백히 드러난다. 이 개념은 소박해 보일 수도 있고(비록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투박하게 감각적이며, “과도하게 유물론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여기에는 신비주의가 없으며 그런 아주 미미한 경향성조차 없다.

 

이 맥락에서 유물론의 몇 반대자들이 끊임없이 주장하는 것처럼 유물론을 “잘 위장된 플라톤주의”라고 비난함은 상당히 부적절해 보이는데, (반대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유물론은 필연적으로 보편자의 객관적 실재에 관한 명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만약 누군가가 처음부터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보편자는 사유일 뿐이라는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마르크스와 스피노자뿐만 아니라 탈레스와 데모크리토스까지도 ‘숨겨진 플라톤주의자’로 여겨질 것이다.

 

‘보편자’를 ‘사유’와 동일시하는 것은, 그것이 ‘경험주의적’ 분파에 속하든 혹은 명백히 합리주의적인 분파에 속하든 간에, 모든 철학적 관념론 체계의 출발점이며, 이는 어떠한 증거도 없이 받아들여진 공리 혹은 중세로부터 물려받은 순전한 편견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것이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문화의 발전 속에서 ‘단어(Word)’와 ‘사유’의 언어적 ‘외면화’에 부여되어 온 그 진정으로 어마어마한 역할에서 비롯된다. 사실상, 이 역할이야말로 ‘보편자’가 오직 그리고 배타적으로 ‘로고스’의 형태, 즉 단어, 용어 혹은 언어적 기호의 의미라는 형태로만 자신의 현존하는 존재(그 실재성)를 소유한다는 착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보편자’에 대해 성찰하는 철학적 사유가 그것의 발생 이래 ‘보편자’를 그것의 언어적 표현과 언어적 존재 속에서 다루어 왔으므로, 이 전통은 ‘보편자’와 ‘단어의 감각(의미)’의 동일성에 관한 교리를, 놀랍지 않게도, 자연스러운 전제이자 그것이 딛고 서 있는 토대, 그것이 호흡하는 공기, 한 마디로 ‘자명한’ 어떤 것으로 곧장 간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특정한 철학적 성찰이 처음부터 그 언어적 존재에서 ‘보편자’를 취급하였다는 사실만으로는 여기에 등호를 표기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덧붙인다면, 현대 신실증주의자들이 절대 진리로 받아들이는 그 편견이, 신실증주의자들에게는 전혀 달갑지 않은 존재인 헤겔에게 결코 그런 방식으로 간주되지 않았음을 말하고자 한다. 헤겔 또한, 철학은 보편적인 것에 관한 학문인 데 반해, 보편적인 것은 사유오직 사유, 그리고 정확히 사유이며, 사유 이외의 그 무엇도 될 수 없다라는 이론에 근거하여, 유물론이 철학 체계로서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진정으로 믿었다. 그럼에도 이 편견의 최근류 옹호자들과 비교했을 때 헤겔의 심오한 통찰은 다음의 사실, 즉 그가 진부할 정도의 한 가지 단순명쾌한 진리, 즉 ‘사유’(사고하기)가 단어들이나 ‘발화’의 연쇄들 속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동들과 행위들 속에서도, 그리고 따라서 이러한 행위들의 제 결과 속에서도 표현(완수·객관화·해명)되며, 그 결과 중 결코 작지 않은 부분이 인간 노동의 산물, 즉 그의 목적이 있는다시 말해 이성적인활동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완벽히 이해했다는 점에 있었다. 그리하여, 헤겔에 따르면 ‘사유의 형식’은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실행되든, 어떠한 형태로 ‘해명’되든 간에 인간의 이성적인 노력 내에서 발견되고 조사될 수 있었다. 따라서 헤겔에 의해 ‘로고스’ 또한신실증주의자들이 오늘날까지 주장해 온 바와 같이 단순히 화법의 패턴이나 단어들의 연쇄, 발화들, 그리고 후자의 형식적 변형들로 구성된 패턴으로서만이 아니라‘말’과 ‘실체’(Sage und Sache), 즉 ‘행위’와 ‘활동성’ 모두의 형식, 체계 그리고 의미로서 이해된다.

 

헤겔은 사유(=보편자)가 (내적이든 외적이든) 언어와 동일시되었던 그 편견의 권위를 극적으로 약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우회적인 방식으로 그 편견의 굴레로 되돌아간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단어’를 아마도 ‘사유의 현존재(Dasein)’의 유일한 형식은 아니라고 간주했을지라도, 그것[단어]이시간적으로나 본질적으로나그 ‘현존재’[‘사유의 현존재’]의 첫 번째 형식이라는 중요성을 따로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헤겔적 개념 하에서, 사유하는 정신은 첫째로 ‘명명하는(naming)’ 힘으로서 깨어나며, 정신이 ‘단어’ 속에서 그리고 ‘단어’를 통하여 스스로를 실현한 후에야 비로소 그것은 작업 도구, 정치적 사안, 교회와 공장의 건립, 헌법들의 제정 및 그 밖의 ‘외부적’ 행위 속에서의 그것의 ‘자기 체현(self-embodiment)’으로 이행한다.

 

이 지점에서도 ‘단어’는 ‘보편자’의 첫 번째 구현체이자, 그 ‘구현’의 모든 순환을 완성하는 마지막 자기표현으로 나타난다. 절대정신은 마침내 논리학에 관한 논고에서 스스로를 파악한다.

 

인류의 실천적이고 ‘대상적(gegenständliche)’인 삶에 대하여, 그것은 ‘단어’를 시작과 끝으로 하는 그 순환의 매개적 연결 고리이자 체계의 ‘중간항(Medius Terminus)’을 구성한다. 여기에서도 ‘보편자’와 ‘단어’의 동일시가 일어나지만, 사도 요한이나 카르납에게서처럼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은 아니다. 헤겔은 그 특유의 방식으로 낡은 편견을 산산조각 내는 것으로 시작한 뒤, 정교한 변증법적 메커니즘을 사용하여 그 편견을 과거의 모든 권리와 함께 복원한다.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이 정립한, 헤겔 논리학(변증법)의 성과들에 대한 근본적으로 유물론적인 재해석은, 가장 직접적이고 정확한 의미에서의 ‘보편자’의 객관적 실재에 대한 긍정과 연결되어 있었다하지만 이는 이 ‘보편자’를 ‘사유’와 동일시했던 플라톤과 헤겔의 의미와는 전혀 달랐는데, 그들[앞의 두 사상가]은 이 사유가 인간과 인류 이전에, 그 너머에, 그리고 인류와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오직 ‘단어’ 속에서만 독립적인 존재[실체]를 얻는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물질적 현상의 규제성(regularity of material phenomena)이라는 의미에서, 즉 항상 잘 정의된 어떤 ‘전체’에서, 그리고 모든 구성 요소가 본질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는 어떤 자기-발전하는 ‘총체성’에서 결합력을 지배하는 법칙이라는 의미에서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사상은 ‘모든’ 데이터가 공통된 ‘특징’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발생의 통일성과 동일한 ‘공통 조상’으로부터의 유래 때문에, 혹은 더 정확하게는, 명확히 물질적인(즉, 사유나 단어로부터 독립적인) 성격을 가진 동일한 ‘실체’의 광범위하게 가변적인 변형물들로서 그것들이 출현했기 때문에 발전한 것이다.

 

그리하여, ‘동일한 친족’의 현상들즉 동질적인 현상들이 반드시 자신들을 ‘동일한 친족’으로 귀속하기 위한 유일한 근거로서 ‘가족 유사성’을 소유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현상들 내부의 ‘보편자’는 차이, 심지어는 대립물을 통해서도 똑같이 잘 외적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이것은 이 현상들을 ‘전체’의 상호 보완적인 구성 부분으로 만든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각 단위에게 다소 우연적인 어떤 ‘유사성’이나 ‘특징’의 힘에 기반한, 혹은 그것의 구체적인 본질, 특수성 또는 개별성과는 완전히 무관한 형식적 ‘동일성’에 기반한 그 ‘집합’에 귀속된 무정형의 단위들의 집합(amorphous set of units)이 아니라, 어떤 진정으로 현실적인 앙상블, 즉 어떠한 ‘유기적 총체성’에 도달한다.

 

한편으로, ‘전체’의 모든 구성 부분의 특수한 혹은 개별적인 특징 속에서 예외 없이수많은 동질적인 현상들 각각의 내부에서스스로를 드러내는 그 ‘보편자’는, 그 자체로 “특수한 것만큼이나 실재하는” 것이며, 다른 ‘특수한’ 개체들, 즉 그것의 파생물과 나란히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신비주의적 요소도 없는데, 왜냐하면 아버지는 매우 자주 그의 아들들과 나란히 오랜 시간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그가 더는 살아있지 않더라도, 그는 분명 한때 존재했어야만 하며, 즉 필연적으로 ‘현존하는 존재’의 범주에 속한 것으로 사유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발생학적으로 이해된 ‘보편자’는 결코 단지 추상화의 에테르 속에, 혹은 오직 단어와 사유의 요소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명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또한 그것의 존재가 그것의 변형물들, 그것의 파생물들, 혹은 보편적으로 의존적인 특수한 개체들의 실재성을 결코 무효화하거나 약화하지도 않는다.

 

『자본론』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에서, 위에서 간략히 설명된 ‘보편자’라는 개념은 방법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여기에서 자본을 가치 및 화폐와 구별되는 것으로 고찰하는 한에서 자본은 자본 일반, 즉 자본으로서의 가치를 단순한 가치나 화폐와 구별하는 규정들의 총괄이다. 가치, 화폐, 유통 등, 가격 등은 전제되어 있고 노동 등도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자본의 특수한 형태나 다른 개별 자본들과 구별되는 개별 자본 등과는 아직 관계가 없다. 우리는 자본의 등장 과정에 머물러 있다. 이 변증법적 등장 과정은 자본이 이루어지는 현실적 운동의 관념적 표현일 뿐이다. 그 이후의 관계들은 이 맹아로부터의 발전으로 고찰될 것이다. 그러나 일정한 지점에 정립되어 있는 특정한 형태를 고정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이 일어난다.”2

이는 헤겔이 위 인용문에서 삼각형, 사각형 그리고 오각형 등을 통해 드러낸 것과 같은 ‘가치’와 ‘자본’의 상호 관계를 명징하게 선언한 것이며, 더욱이 이중적인 의미로 표현한 것이다.

 

첫째로, ‘가치 일반’의 개념은 ‘모든’ 특수한 가치 유형들(예: 상품, 노동력, 자본, 지대, 이자 등) 내에서 임의로 식별될 수 있는 저 추상적-보편적인 ‘특징들’의 총합의 관점에서 정의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사람 사이에 존재할 수도 있는(그리고 실제로 존재해 왔고 존재하고 있는) 단 하나의 명백하게 ‘특수한’ 관계즉 하나의 상품을 다른 상품과 직접 교환하는 관계, 다시 말해 ‘프록코트 한 벌 = 직물 10미터’라는 등식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통해 도출된다.

 

이 가치-유형적 실재에 대한 분석은가장 단순한 형태로 축약된발전의 더 높은 단계에서 마주하게 되는(재현되는) ‘가치 일반’의 저 정의를 드러내며, 또한 후자[발전의 더 높은 단계]의 분석을 화폐, 노동력 그리고 자본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로서 드러낸다. 하지만, 가치 관계의 이 모든 ‘특수한 형태들’로부터 (그것들 모두에게 ‘공통자’인 것으로서) 직접적인 추상화를 통해 이 정의들을 추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로, 쟁점이 ‘자본 일반의 구체적인 정의’인 때에도, 마르크스가 특히 지적했듯이, “경제학적인 특성보다 논리적인 특성(un caractère plus logique qu’économiste)”이라는 주요 고려 사항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3

2. 하지만 특수한 현실적 자본들과 구별되는 자본 일반은 그 자체가 하나의 현실적 실존이다. 이는 평범한 경제학에 의해서도 비록 이해되지는 않고 있을지라도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균등화 등에 관한 그것의 이론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계기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일반적 형태의 자본은 개별 자본가들에게 속하지만, 자본으로서의 기본적인 형태(elemenentarische Form)에 있어서는 은행들에 축적되어 있거나 은행들에 의해 배분되고, 리카도가 말한 바와 같이 생산의 욕구들에 비례하여 그토록 훌륭하게 배분되는 자본을 이룬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대부 등을 통해 상이한 나라 사이의 조정자가 된다. 따라서 증식되기 위해서 이중적으로 정립되어야 하고, 이 이중적인 형태로 이중으로 증식되어야 하는 것이 자본 일반의 한 법칙이라면, 예를 들어 다른 민족에 대립해서 자본 그 자체(par excellence)를 대표하는 어떠한 특수한 민족의 자본은 증식되기 위해서 제3의 민족에게 대부되어야 한다. 이 경우에 이중 정립, 자기 자신에게 타인의 것으로서 관계하는 것은 빌어먹을 정도로 현실적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것은 한편으로 단지 종차[differentia specifica]의 정신적[gedachte] 표식인 데 반해, 그것은 동시에 특수한 것과 개별적인 것의 형태와 공존하는 하나의 규정된 현실적 형태이다.4  대수학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a, b, c가 숫자 일체, 일반이라면, 이들은 이들을 일반적 요소로 전제하는 a/b, b/c, c/b, c/a, b/a 등에 대하여 전체 숫자이다.5

물론, 이 비유는여느 비유가 그러하듯이논리적 상호 관련성의 ‘보편자’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는 순전히 위에서 논의한 상의 실례일 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역시, 그것은 ‘보편자’에 대한 변증법적 구상의 한 중요한 측면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데 활용될 수 있다. 이 경우, ‘보편자’는 비록 일반적인 형태이기는 하나, 명확히 규정적인 수인 a, b, c로서 다시 출현한다. 이는 틀림없이 ‘수 일반(number in general)’이며, 그것의 기본적 형태에 있는 수와 같거나, “그것의 가장 단순한 규정성으로 변환된” 임의의 수와 같지만, 이는 규정성 혹은 ‘특수성’의 최종적인 소실(ultimate loss)이 없는 때에 그러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수의 특정한 유형들 내에서의 ‘내재성(inherence)’이 박탈된 ‘수 일반’이라는 형식적 개념은 단지 이름일 뿐; 이는 ‘보편자’가 그것의 ‘특수한 본성’의 조건에서 표현되는 그러한 개념이 아니다.

 

실로 추상화의 그 매우 구체적인 특성 탓에 수학에서 ‘추상적 보편’은 ‘구체적 보편’과 일치한다. 하지만 ‘수 일반’(즉, a, b, c 등)은 모든 유형의 수, 즉 ‘a’, ‘b’, ‘c’ 등, 다시 말해 일종의 ‘벽돌’이나 ‘원자’와 같은 것들 사이에서 ‘같음’을 추상화(추출)하는 형식적 연산을 수행한 때에도 얻어진다. 이 수들은 기호 형성에 관계없이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유지되지만, 기호 형성 방식은 순전히 구성 부분일 뿐이다. 하지만 대수학의 밖에 발을 내딛게 되면 그 단순함은 소멸하는데, ‘보편자’ 개념이 대수학에서 가장 단순한 기초 사례와 같은 형태, 즉 조정된 형태로대수학상에서 잘 발달된 형태반드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 일은 수학 자체에서도 일어나는데, 가령 ‘일반적인 도형’으로서의 삼각형이 정사각형이나 오각형 속에서 결코 그대로 유지되지 않으며, 내재성 속에서나 관조 속에서 주어지지도 않는 경우가 그것이다. 비록 그것이 그것들의 구성 내에서 분석적으로 식별될 수는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것은 실로 분석에 의한 것이어야지, 그저 이용 가능한 ‘공통 특징’을 따로 떼어내는 추상화에 의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보편자와 특수자 그리고 개별자 사이의 변증법적 상호 관계라는 상황을 취급해 보자. 이때 ‘보편자’는 원리적으로 특수한 개체들의 구성 내부에서 형식적 추상화를 통해 공통적이고 동일한 것을 드러냄으로써 규명될 수 없다. 이는 ‘인간’이라는 개념, ‘인간 본질’의 정의, 그리고 인간에의 ‘특정한 일반적 정의’를 찾는 과정의 그 이론적 난점에서 가장 명백하게 보인다.

 

이러한 어려움은 베르코르의 유명한 풍자 소설 『자연의 동물들(Les animaux de natures)』에서 탁월한 재치로 묘사되었다. 열대우림의 덤불 속에서 기이한 생물들의 공동체가 발견되었다. 현대 인류학의 몇 가지 표준에 따르면, 그것들은 유인원 또는 다른 원시인류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는 동물적인, 혹은 순전히 생물학적인 세계로부터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세계로 발전해 온, 독특하며 지금까지 관찰되지 않은 과도기적인 형태이다. 문제는, 트로피족(저자 자신이 무리 부족에게 부여한 이름)가 인간과 동물 사이의 거의 식별하기 힘들지만, 지극히 중요한 경계선을 넘어섰는가의 여부이다.

 

언뜻 보면 이 질문은 순전히 학문적인 의미를 가질 따름이며, 특정 생물학자나 인류학자에게만 관심사일지 모른다. 하지만 머지않아 이 소설은 법적·윤리적·정치적 측면뿐 아니라 철학적 문제까지 포함하여 우리 시대의 근본 문제들과 얽혀 있음을 알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그 생명체 중 하나를 살해한다. 만약 트로피족이 인간이라면, 이 행위는 그를 살인자로 낙인찍는다. 만약 그것들이 동물이라면 그에게 있어 범죄의 체소(體素)는 존재하지 않는다. 노(老) 사제는 동일한 질문으로 스스로를 괴롭혔다. 만약 트로피족이 인간이라면, 이 사제는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세례 의식을 치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만약 트로피족이 동물이라면 그는 펭귄에게 세례를 베풀어 하늘에 큰 문제를 일으켰던 성(聖) 마엘의 죄악을 되풀이할 위험에 처한다. 하지만 이기적인 제조업체의 이익 때문에 또다른 요인이 작용하는데이들은 즉시 트로피족을 이상적인 노동력으로 규정한다. 길들이기 쉬우며, 노동조합이나 계급투쟁에의 자각이 불가능한, 또는 생리적 욕구 외의 그 어떠한 요구에의 자각이 불가능한 동물은 사업가에게 참으로 꿈의 대상이 아니겠는가?

 

트로피족의 본질에 관한 논쟁은 수백 명의 사람과 수십 가지 교리 및 이론을 얽히게 하며, 점점 더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지면서, 그와 전혀 다른 문제와 가치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한다. 등장인물은 명백하고 모호하지 않은 답을 내릴 수 있는 기준을 깊이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트로피족에 대해서는 어떠한 ‘인간적 특징’을 강조하면 인간 범주에 속하나; 다른 것을 강조하면 그렇지 않다. 이 특징들을 모두 합산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데, 그리되면 트로피족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간’을 정의해 온 ‘특징’의 수를 늘리고, 그 중 트로피족을 지금까지 알려진 인류와 구별 짓는 단 하나의 특징을 도입한다면, 트로피족은 자동으로 인류의 경계 밖에 남겨지게 된다. 그것들의 수를 줄이고, 기존에 알려진 트로피족과 인류가 소유한 ‘특징’만을 영역으로 한정한다면, [우리는] 트로피족을 인류의 일원으로 승인하고 그에 따른 모든 권리를 부여하는 정의에 도달하게 된다. 이 사고는 악순환 속에 갇혀 있다. 참으로, 트로피족의 본질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인간의 본질을 명징히 정의하는 것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는 트로피족이 호모 사피엔스의 한 변종으로서 접근되어야 하는지 아닌지가 사전에 결정되어 있지 않는 한 수행될 수 없다.

 

더욱이, 지금까지 인간을 묘사해 온 저 ‘공통 특징’ 하나하나를 둔 새로운 논쟁이 즉시 타오른다. ‘사고’에 의해 의미되는 바는 무엇인가? ‘언어’와 ‘말’에 의해 의미되는 바는 무엇인가? 한 가지 의미에서 동물들 또한 사고와 말을 가지지만, 또다른 의미에서는 오직 인간만이 그것을 가진다. 이리하여, 각각의 인간적 특성은 ‘인간’의 정의와 동일한 방식으로 논쟁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논쟁은 끝이 없으며, 의견 차이와 비방은 가장 일반적이고 중요한 철학적·윤리적·지식론적 개념의 영역에까지 이르러 더욱 격렬하고 폭력적으로 재점화된다.

 

실상 법의 테두리에 있는 사람들에 있어서도 사정은 결코 단순함과는 거리가 멀다. 모든 사람이 ‘인간처럼’ 살고 행동하는가? 아니, 그들은 종종 동물보다 더 참혹하게 행동하지 않는가? 따라서 이 논쟁은 어떠한 종류의 삶이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거나 혹은 되지 않아야 하는지에 관한 논의로 진화한다.

 

인간을 동물로부터, ‘비인간’으로부터 오인할 여지 없이 구별해낼 수 있는 이 ‘공통적이고 본질적인 특징’을 찾으려는 모든 시도는, 아주 오래된 논리적 문제 속으로 반복해서 비틀거리며 빠져든다. 그 ‘공통 특징’은 그 유(類)를 구성하는 집합이 명징하게 정의되었을(well-defined) 때, 주어진 종의 ‘모든’ 개체로부터 추상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러한 ‘집합’을 식별하기 위한 일반적 기준, 즉 찾고자 하는 바로 그 ‘공통 특징’이 미리 존재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실제로 뜨거운 물은 차가운 물과 구별하기 쉽다. 하지만 [뜨거운 물에 온도가 거의 근접하는] 따뜻한 물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돌 하나는 더미를 만들지 않으며, 두 개 또한 그러하지 않다. 그렇다면 하나의 ‘더미’를 위해 얼마나 많은 돌들이 요구될 것인가? 머리가 벗겨져 가는 사람이 그것을 넘어서면 대머리가 되는 그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가 어떠한 명확한 경계가 존재하기라도 할까? 그게 아니라면, 그와 반대로, 어떠한 경계든 어떠한 확실성이든, 그것은 단지 인위적인 분류라는 목적만을 위해 그려져야 할 상상의 선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 선 어디에 그어져야 하는가? “그것은 권력자들이 택한 곳으로 지나가게 될 것이다”라고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후회 섞인 어조로 언급한다. 실로, 사유에 대한 주관적-관념론적 이론은 이 종류의 의사결정을 권력자들에게 위임한다. 그리하여 ‘권력자들’의 목소리는 진리의 척도가 되고, 그들의 의지는 ‘보편적 의지’가 되는데, 이 명분의 뒤편에는 가면을 벗은 자의성과 심지어 개인적인 사리사욕이 명백히 포착된다.

 

이제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공통적이고 본질적인 특징’, 즉 인류의 규정적이고 특정한 구별, 다시 말해 ‘인간(man)’과 ‘인간적인 것(human)’에 대한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정의를 당초 생각했던 것만큼 쉬이 찾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기에, 베르코르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철학적·사회학적 개념에서 해답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후자에서 진리의 척도는 어디에 있는가? 각 척도는 스스로 보편적 중요성을 주장하며, 보편자 개념에 대한 독점적 소유권을 주장하므로, 실제로는 그 어떠한 ‘공통자’도, 그 사이의 합의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커다란 물음표와 함께 끝나며, 한편 소설의 주인공은 그다지 부럽지 않게, 뷔리당의 당나귀(Buridan’s ass)의 처지에 처하게 되는데, 즉 왼쪽에는 마르크스주의적 ‘보편자’ 개념이, 오른쪽에는 그리스도교적 ‘보편자’ 개념이 놓여 있으며, 이것들은 ‘보편자’에 대한 상호 배타적인 두 개념이다. 어느 쪽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베르코르의 주인공은 작가와 더불어, 두 가르침을 화해시킬 만한 제3의 대안, 즉 그들 사이의 ‘공통자’, 다시 말해 ‘보편자’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기꺼이 선택하려 할 것이다.

 

베르코르는 이 소설의 러시아어판 후기에서 “모든 자는 무엇보다 먼저 인간이며, 그 다음에야 플라톤, 그리스도 또는 마르크스의 추종자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적는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마르크스주의와 그리스도교의 차이를 강조하기보다는, 그 기준에 따라 두 사상 사이의 공통점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6 순전히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만, 이게 이론적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까? ‘인간 본성’, 즉 인간 안의 보편자가, 그것이 『자본론』의 저자의 것이든, 『산상수훈』의 것이든 간에, 특정한 교리에 대한 그의 고수 속에 결코 있지 않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는 어디에 있는가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엇보다도 우선 인간이라는 명제 속에 있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베르코르가 “물질적 생산 과정 속의 실제적 인간 관계”에서 출발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편협한 시각”에 반박하기 위해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이었다. 하지만 베르코르의 답변과 같은 식의 모든 대답은 우리를 소설의 시작, 즉 인간의 본질에 대한 모든 논쟁의 출발점, 논쟁의 대상을 단순히 명명하는 단계로 되돌려 놓을 것이다. 이러한 교착 상태, 이러한 동어반복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전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트로피족의 이야기로부터 내려져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결론이 있는데, 베르코르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를 내리기를 거부한다. 즉, 소설 속 등장인물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사하는 논리, 다시 말해 인류의 모든 개별적 대표자, 곧 그 자체로서의 모든 개별자가 소유한 특징인 ‘공통자’로부터의 추상화라는 방식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 정의를 찾으려는 그 논리로부터는 동어반복 외에 그 무엇도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이다. 명백히, ‘보편자’에 대한 이러한 관념에 기초한 논리는 사유를 교착 상태의 밖으로 끌어내는 데 실패할 것이며, 그 결과 ‘인간 일반’이라는 관념은 다소 파악하기 어려운 채로 남는다. 철학적 및 사회학적 사유의 역사는 위에서 기술된, 베르코르의 소설 속 등장인물의 불운한 사건들이 그러하듯이, 그 점을 그에 못지않게 명징히 증명한다.

 

번역: 한동백 | 집행위원

 

2026년 4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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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 Marx, “Karl Marx To Engels, 25 March 1868”, MECW, Vol. 42, ed. J. Cohen et al, London: Lawrence & Wishart, 2010, 558.텍스트로 돌아가기
  2. K. Marx, “Economic Manuscripts of 1857-58 (First Version of Capital)”, MECW, Vol. 28, ed. J. Cohen et al, London: Lawrence & Wishart, 2010, 236.텍스트로 돌아가기
  3. Ibid., 378-9.텍스트로 돌아가기
  4. Ibid., 378.텍스트로 돌아가기
  5. Ibid., 379.텍스트로 돌아가기
  6. Verkor, Liudi ili zhivognye?, Moskva, 1957, 223.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