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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헤겔의 구체 개념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 제3장 (2) 총명한 유물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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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의 구체 개념

 

우리는 헤겔이 지식의 발전을 사람의 의지나 의식 따위에 의존하지 않는 법칙의 지배를 받는 역사적 과정으로서 이해한다는 첫 번째 인물임을 알고 있다. 그는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법칙을 지식 발전의 전 과정을 지배하는 법칙으로서 발견했다.

 

이 법칙은 무엇보다 인류 정신문화의 진보적 발전이라는 단순히 경험적으로 표명된 사실로 보인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인간의 정신문화, 그 정신세계는 점진적으로 풍부해지고 있으며,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며,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더욱 구체적인 것이 된다. 그 모든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정신세계는 참된 다양성 속의 통일을 구성하는 동일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 통일된 세계로 존재한다.

 

추상에서 구체로의 운동은 헤겔에게서 무엇보다 ‘정신의 왕국’의 건설이 완성되는 경험적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자연적 형식으로 나타난다. 처음에 이 왕국(인간 문화의 영역)은 당연히 수립된 형태 속에서 불완전하고, 빈곤한, 즉 극도로 추상적이며,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점점 더 복잡해지고, 풍부해지며, 다양해지는, 즉 구체적인 것으로 된다.

 

여기기까지는 아직 어떤 변증법적인 것도 관념론적인 것도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관념론은, 그리고 동시에 특히 헤겔의 변증법은 그 후에, 즉 헤겔이 ‘정신의 왕국’, 의식의 영역의 발전 추진력의 문제를 따질 때 시작한다. 헤겔 철학의 독특한 점은 발전의 이념이 오직 의식의 현상에만 완전히 적용된다는 사실에 있다.

 

그의 입장에서 정신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은 발전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 속에 얼어붙은 사진처럼, 태초부터 앞으로 다가올 모든 시간에 걸쳐 동일한 것으로 의식과 대면한다. 의식은 움직임 없는 그림, 즉 서로에 대해 동일한 관계 속에 영원히 서 있는 이 사물의 영역을 능동적으로 사고함으로써 지치지 않는 능동적 본성을 실현한다. 그러한 실현의 활동성 또한 그 자체 속에 그 자신의 발전에서 주된 원인을 포함하고 있다.

 

정신은 유일한 구체성, 즉 서로가 서로로 이행하는, 살아있는 채로 상호작용하는 현상의 유일하게 발전된 것이자 발전하고 있는 체계이다. 그의 입장에서 이 후자의 특성은 전적으로 자연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그에게 자연은 하나부터 열까지 추상적이며, 바로 그것의 본질상 형이상학적이다: 모든 자연의 현상은 서로 나란히, 서로의 외부에 있는 채로, 서로에 대해 고립된 채로 존재한다. 헤겔이 표현하듯이, 자연은 자체 내부에 그것의 추상적 계기로, 즉 서로 곁에 나란히 그리고 서로에 대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각각의 사물, 대상, 과정으로 무너져 내린다. 기껏해야, 참된 변증법은 자연 내부에 오직 희미하게 반영되거나 어렴풋이 보일 뿐이다.

 

헤겔 철학의 관념론적 본성은 여기에서 매우 두드러진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는 즉각적으로 현대 자연과학, 즉 자연에 관한 지식의 형이상학적 한계를 자연 자체로, 그것의 영원한 속성의 결과로 본다.

 

현대 자연과학이 소심하게 물자체의 변증법(dialectics of the things themselves)을 현실화하기 시작하는 곳에서 그는 또한 실재적 구체성의, 현상의 생생한 변증법적 상호작용의 ‘맹아’를 본다. 따라서 그는 유기적 생명 속에서 불완전한 구체성의 형태를 본다. 그는 여기에서 각각 개별적 구성 부분이 오직 서로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존재하고 또 의미를 지니며, 동물 유기체의 모든 부분을 연결하는 살아있는 상호작용을 발견한다: 이러한 상호작용 밖에서 그것은 일반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절단된 한 손은 부패하며, 심지어 외적인 형태상에서도 손이기를 그치고,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이름상에서 손이기를 그치게 된다. 그것은 추상적으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 헤겔은 자신이 정신적 세계의 예외적 속성이라고 간주하는 구체성의 희미한 닮은꼴을 본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화학의 세계에서 내적 상호작용은 훨씬 더 약하지만, 여기에도 그것의 맹아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여기서 산소는, 비록 수소와 결합하여 물의 구성 원소가 되지 않더라도, 수소와 병존할 수 있으며 실제로 존재한다. 이러한 관계는 유기체에게는 불가능하다: 손은 머리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고, 손과 머리는 오직 그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이러한 상호 연관과 상호 규정 속에서만 존재한다. 오직 기계적 속성만을 소유한 입자만이 동일한 입자로 남아있으며, 이는 동일한 종류의 다른 입자와 맺는 기계적 결합의 종류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이러한 결합으로부터 고립되거나 추출된, 그것의 추상된 형태 속에서도 그것은 여전히 동일한 것으로 남으며, 몸으로부터 ‘추상된’ 손처럼 부패하거나 망가지지 않을 것이다.

 

헤겔적 체계의 본성은 추상적인 기계론의 영역으로 시작하고 비교적 구체적인 유기적 생명의 영역으로 끝나는 단계의 체계로 세워졌다. 피라미드 전체는 그 전체 의미가 구체성 속에, 즉 그것의 모든 현상의 절대적 상호연관 속에 놓여있는 정신에 의해 완성된다.

 

이러한 헤겔적 구조물의 허점은 어디에 있을까?

 

먼저 그것은 참으로 의식적 변증법을 포함하지 않았던 당대 자연과학의 역사적으로 제한된 개념을 자연 그 자체의 절대적 성질로 간주한 데에 있다.

 

전체로서 자연이 서로를 상호 규정하는 물질 운동 형태의 실제로 발전하는 통합된 체계이며, 인간을 포함하여 실재적이고 객관적인 구체성이라는 사실에 대해, 이 사실은 헤겔에 의해 그의 체계 안에서 신비화되어 있는데, 그 안에서 추상적인 것, 즉 기계론은 정신적 구체성의 표현이다.

 

그는 사유하는 이성의 운동, 개념의 영역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운동 형태에도 내재적 구체성, 즉 자연 전체 내의 현상의 실재 상호 규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헤겔은 동일한 방식으로 사회의 경제적 생활 영역을 생각한다. 그에게 그것은 ‘욕구와 오성’의 영역, 서로에 대해 고립된 단일한 개인이 상호작용하는 영역이며, 그 각자는 오직 단일한 추상적 개인으로서, 일종의 사회적 원자로서 자기 자신을 보존해야만 하므로 타자와 연결된다.

 

여기에서도 헤겔이 (그는 영국의 경제학 이론가들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당대 경제학의 형이상학적 한계를 경제 영역 자체의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오성적 성질로 간주했다는 것을 확인하기란 쉽다. 경제적 생활, 시민 사회의 영역은 지극히 오성에 의해 지배되는, 즉 헤겔적 용어에서, 추상적으로 일면적 의식 형태이다.

 

이 영역에서 대립물은 매개되지 않고, 화해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며, 그것은 서로 충돌하고, 서로를 거부하며, 동일한 형이상학적 대립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현실적 발전은 여기에서는 불가능하다. 하나의 동일한 관계, 욕구와 그것을 충족시키는 수단 사이의 영원한 관계가 여기에서 영원히 재생산된다.

 

따라서 경제적 영역의 모든 추상적 극단이 해결되는 어떤 높은 단계로의 가능한 이행 형태는 법적[법률적] 현실성으로의 이행이다. 법은 경제적 생활의 영역 내부에서는 그 추상적 요소로 분해되어 표현되는 가장 높은 구체성으로서 등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헤겔의 논리학, 즉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적 개념이 그러나 동시에 본질적으로 관념론적 개념이 존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에 기능한다는 것을 본다. 자연과학에서, 헤겔의 개념은 자연에 대한 주어진 지식의 수준을 영속화하고, 사회학에서 그것은 경제적 소유 형태와 그 소유를 승인하는 법률 모두에 대한 변호론적 태도를 지지한다.

 

경제학에 대한 헤겔의 태도는 더욱 상세히 고찰되어야 한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유익하다: 한편으로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 사이의 대립이 가장 명확하게 보이는 곳이 바로 여기, 구체성 개념 내부이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관념론적 변증법이 경제학 그 자체의 대상이 갖는 진정으로 변증법적인 성격을 부정하고, 그것을 추상적 오성적 규정이 대상의 성격과 완전히 일치하는 영역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부르주아 경제학의 고전가(스미스, 리카도 등)의 사고가 갖는 형이상학적 성격을 완전히 정당화해준다는 점이 똑같이 명확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헤겔 변증법의 관념론은 스미스, 리카도, 세이에게서 그 탐구의 형이상학적 방식의 결과인 것과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

 

그의 접근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인가? 그에게 경제적 생활 영역은 구체의 영역이 아니며, 역사적으로 발전해 왔고 실제 구체적 영역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사람과 사물 간의 상호작용 체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헤겔에게 경제는 단지 ‘구체적 정신’의 수많은 표현 중 하나, 즉 사람의 어떤 높은 [단계의] 본성의 추상적 표현에 불과하다. 이 높은 [단계의] 본성은 또한 경제 활동의 형태 속에서 일면적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다름아닌 법과 경제적 생활, 정치와 그 밖의 모든 것의 실체인 목적-지향적으로 행동하는 의지이다. 목적 지향적 (이성) 의지는 그것의 생산물 내에서, 그것의 양식경제, 법, 정치 등내에 추상적 및 일면적으로 표현되는 구체적 실체로서 나타난다. 이것이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한; 목적-지향적 이성 의지(혹은 단순한 이성, 왜냐하면 헤겔에게 인간 안에 존재하는 이성의 한 존재 형태이기 때문에)가 사회적 활동의 모든 형태의 보편적·구체적 실체로서 제시되는 한, 그는 당연히 경제를 오직 이성 의지의 표현으로서; 그것의 많은 표현 중 하나로서; 사회적 개인의 이성과 의지의 일면적인 (추상적) 표현으로서 취급한다.

 

따라서 경제의 모든 규정, 경제적 생활의 모든 범주(가치, 이윤, 임금 등)는 이성적 의지의 추상적 양태로, 사회적 존재의 특수하고 분명한 형태로 나타난다. 경제에서 이성은 그것의 보편적 본성에 부합하지 않고 단지 그것의 단일한 일면적 추상적 표현으로만 등장한다. 구체적·보편적 의지는 오직 법과 국가 안에서만 그것의 본성에 적합한 형태를 창조한다. 헤겔이 의하면 국가는 모든 특수하고, 명백한, 따라서 경제, 욕구의 영역, ‘욕구의 체계’를 포함한 그것의 추상적 표현 형태를 자체 내에 포괄하는 보편 의지(universal will)의 구체적 실재이다.

 

경제 내부에서 인간적인 모든 것의 보편적 구체적 실체인 이성적 의지는 극도로 일면적이고 추상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따라서 인간의 경제적 활동 영역은 개인의 의식과 의지와는 무관하게 발생하고 발전하는 인간과 사물 사이 상호작용의 구체적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특수과학의 대상을 형성할 수 없으며, 오직 이성 의지의 보편적 규정의 체계 내에서만, 즉 정신 철학 내에서, 국가 법철학 내에서만 고찰될 수 있다. 여기에서 그것은 이성 활동의 특수한 영역 중 하나로서, 역사 속에서 작용하는 이성의 추상적 표현 형태로서 나타난다.

 

경제에 대한, 그것이 사회적 삶의 모든 다른 표현과의 변증법적 상호연관의 본성에 대한, 사회 전체에서 그것의 역할에 대한 마르크스와 헤겔의 견해 사이에 있는 양극적 대립을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는 무엇보다도 유물론자로서 헤겔과 대립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특징은 그에게 그 대상의 변증법에 대한 더 심오한 견해를 발전시킬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유물론이라는 점이다.

 

마르크스에게 인간의 경제적 상호작용 영역은 그 자체의 특수한 내적 운동 법칙을 가진 사회적 생활의 완전히 구체적인 영역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사람의 사회적 활동의 다른 모든 형태에 대해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보이며 정확히 이러한 이유로 특수과학의 대상을 구성한다. 사람 사이의 경제적 상호작용 체계는 역사적으로 발생하고 역사적으로 발전한 체계로서 나타나며, 그것의 모든 측면은 발생적 통일성(발생학적)을 통해 서로 상호 연관되어 있다.

 

경제적 관계 체계는 개인의 의지와 의식이 그것의 형성 과정에 있어 가장 능동적인 역할을 함에도, 순전히 상대적일 뿐 아니라 그의 의지와 의식으로부터 추상적으로 독립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의식적 의지가 체계의 형성에 참여하는 바로 그 본성은, 미리 그리고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정신의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지와 의식을 부여받은 인간을 결합시키는 경제적 관계의 체계 그 자체에 의해 규정된다. 다시 말해, 의지와 이성 그 자체는 여기서 어떤 다른 실체의 양태로서, 즉 그것의 추상적 표현이자 산물로서 나타난다. 경제 체계의 발전에 관여하는 개인의 의지와 의식에 대한 모든 규정은, 이 체계 운동의 산물로 해석되면서, 문자 그대로 총체로서의 체계의 내적 자기 운동의 본성으로부터 연역된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게 헤겔적 구성과 비교되어 정확히 그 반대로 보인다: 모든 게 똑바로 서 있게 된다. 변증법이 헤겔적 입장에서 일반적으로 가능한 것보다 훨씬 더 전면적으로 그리고 완전한 분량으로 경제에 대한 이해에 적용된다는 사실에 대해 주된 원인이자 조건으로 작용하는 것은 유물론이다.

 

헤겔에게 있어, 구체성이라는 범주는 오직 그때 그리고 거기에서만, 즉 우리가 의식적 의지와 그것의 산물을 다루는 바로 그때와 그 장소에서만, 오직 정신과 그것의 산물, 그것의 외화(Entäusserungen)의 영역에서만 전적으로 적용 가능하다.

 

마르크스의 견해에서, 변증법의 이 가장 중요한 범주는 자연적 및 사회적 존재의 그 어떤 영역에서도, 그 어떤 정신과도 무관하게 도처에 전적으로 적용 가능하며, 이러한 기초 위에서 정신 그 자체 삶의 현상, 즉 사유·논리학의 영역을 포함한 사회적 의식의 모든 영역의 발전에 적용 가능하다.

 

헤겔적 구조물과 그것의 관념론적 출발점에 따르면, 자연 속의 그 어떤 운동 형태도 구체적 형태로서, 즉 내적으로 상호작용하는 현상의 역사적으로 출현하는 자기 발전적 체계로서 이해될 수 없다. 그러한 모든 영역은 그것이 정신적 과정에 개입될 때, 즉 누군가가 그것을 정신의 산물 혹은 정신적 실체의 양태로 해석하는 데 성공할 때만 구체성과 어떤 관계를 획득한다. 구체성이라는 속성은 자기 발전하는 정신의 배타적인 독점물임이 입증되는 반면, 자연 그 자체는(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갖는 물질적 측면을 포함하여) 그것의 존재 속에 구체성을 전혀 갖지 못한다. 헤겔의 눈에 상호연관은 일반적으로 오직 관념적 상호연관으로서만, 정신이나 개념에 의해 정립된 것으로서만 가능하다.

 

변증법의 핵심 범주 중 하나인 구체성 범주는, 따라서 헤겔의 체계 내에서 그것을 자연과학이나 사회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에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무력화되어 있다. 요컨대, 구체성 범주와 결과적으로 이 범주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변증법 전체는 정신 영역 외에는 그 무엇에도 적용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난다. 다른 모든 것에 대하여 그것은 오직 이러한 다른 사물이 순수하게 관념론적으로, 즉 보편 정신의 표현으로서, 절대정신이자 절대 이념의 구체적 충만함과 풍부함의 일면적(추상적) 표현으로서 해석되는 한에서만 적용 가능하다.

 

헤겔의 구체성 개념의  관념론적 제약성, 개념의 협소함은, 자연은 정적인 것이며 발전은 오직 정신의 영역에만 속한다는 관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구체성은 참으로 발전, 그것도 변증법적 발전, 즉 모순을 통한 자기-발전과 불가분한 관계에 있다. 후자를 헤겔은 의식 속에서만 보았고 그 외의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의 구체성 개념의 협소함이 생겨나는데, 이 개념은 협소한 그대로 후에 자연의 전 영역으로 확장된다.

 

이것과 연결된 것이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에 대한 헤겔의 해석이다. 헤겔에 따르면, 그것은 자연과 역사를 포함한 실재 전체가 정신의 자기 자신으로의 상승임을 의미하며, 이는 정신성의 순수하게 추상적인 표현의 영역으로서 ‘기계론’으로부터 구체적인 인간 정신에 이르는 수다한 단계를 거쳐 가는 과정이다. 자기 자신으로의 상승은 절대적, 비인간적, 신적 정신에 의해 수행된다. 그러한 것으로서, 이 정신은 그것이 일면적이고 추상화된 방식으로 '기계론', '화학론', 또는 '유기체'로서 자신을 드러내기 전부터 이미 그 자체로(an sich) 구체적이다.

 

이것이 헤겔의 체계에서 순수 논리학이 자연에 대한 철학적 고찰에 선행하는 이유이며, 후자(자연철학)는 구체적인 논리적 정신이 공간과 시간의 형태 속에서 더욱 충만하고 구체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sich entäussert) 수많은 단계로서 제시된다.

 

따라서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은 헤겔에게 논리적 이념에 의한 세계의 생성과 일치한다. 그리하여 사유에 의한 세계의 정신적 재생산 법칙은 이 세계가 개념의 창조적 힘이 생산하는 법칙으로서 여기에서 직접적으로 표명된다.

 

이러한 헤겔적 환상은, 마르크스가 보여주었듯이, 순전히 실재에 대한 철학자이자 논리학자의 일면적인 견해에 근거하고 있다. 논리학 전문가로서 헤겔은 도처에서, 무엇보다도 '사태의 논리보다는 논리의 사태'에 관심을 가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은 오직 논리적-이론적 활동의 주체로서만 취급되며, 세계는 오직 대상으로서, 즉 이 활동 속에서 가공되는 재료로서만 고려된다. 이러한 추상은 어떤 한계 내에서는 논리학에서 정당화되며, 논리학이 이러한 한계를 명심하고 있는 한, 이 추상 속에는 관념론적인 것이 전혀 없다.

 

그러나 헤겔의 접근법은 이러한 한계를 제거한다. 그는 사유를 단순히 그리고 단지 인간의 능력 중 하나로서만이 아니라, 또한 다른 모든 인간의 능력과 활동 종류의 실체적 원천으로서, 즉 그것의 본질적 기초로서 취급한다. 그는 외부 세계, 즉 인간 외부의 자연을 실천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 또한 인간 내부에 있는 정신적 원리의 표현으로 취급한다. 실천적 세계 변형의 실제 과정은 그의 철학에서 순수하게 정신적인 활동, 즉 그 최종 분석에서는, 순수하게 논리적인 활동의 결과이자 표현으로 나타나는 데 반해, 인류의 물질적 문화 전체는 사유의 산물로서, ‘대상화된 개념(reified concept)’으로서, ‘개념의 타자-존재(other-being of the concept)’로서 나타난다.

 

현실에서 사유 발전의 직접적 토대는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정확히 사회적 인간에 의한 자연 변혁, 즉 실천이다. 만약 사유의 이러한 객관적, 실천적 토대가 사유의 산물로서, 즉 그것의 물질적 실현 속에서의 사유로서 제시된다면, 우리는 사유가 오직 외관상으로만 객관성을 다룰 뿐이며, 실제 사실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사유는 오직 사유 자신만을, 즉 그것 자신의 ‘타자-존재’만을 다룰 뿐이라는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 논리적 규정, 즉 외부의 객관적 세계가 사유에 빚지고 있는 그러한 규정은, 이 세계의 절대적이고 유일하게 참된 규정으로서 나타난다.

 

논리학의 관점은 헤겔에게 절대적인 것이자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다. 만약 인간 본질이 사유에 있으며, 객관적 실재의 본질이 사유의 산물, 즉 ‘소외된 개념’에 있다고 믿는다면, 사유의 발전 법칙은 실재 세계 발전의 법칙으로서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헤겔에게 인간과 개념적 사유가 완전한 동의어이며, 세계와 개념적 세계, 즉 논리적으로 전유된 세계 또한 마찬가지인 이유이다. 실제로는 오직 이론적으로 사유하는 두뇌의 활동만을 결정하는 법칙이, 인간의 그리고 객관적 세계의 발전과 실천의 최고 법칙으로서 주조된다.

 

헤겔 논리학의 실제 대상은, 그의 환상에도 불구하고, 오직 세계의 이론적 전유 과정, 즉 세계의 정신적 재생산 과정이다. 헤겔이 이 세계를 연구하는 한에서, 그는 실제적인 발견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가 이 대상을 그것이 실제로 그러한 것과는 다른 무언가, 즉 더 거대한 것세계 그 자체의 형성으로 간주하는 한에서, 그는 세계와 또한 사유에 대한 오류 섞인 이해의 경로를 걷게 된다. 그는 사유 과정 그 자체를 이해할 그 어떤 가능성마저 그 스스로 박탈한다. 논리적 활동을 생산하는 실제 조건이 그 활동 자신의 산물이자 결과로서 제시되는 한, 논리적 추론 과정은 공중에, 아니 오히려 ‘순수 사유의 에테르’ 속에 붕 뜨게 된다. 사유 기원이라는 사실 자체와 그 발전 법칙은 전적으로 설명 불가능해진다. 그것은 사유 외부에 놓인 그 무엇에서도 토대를 갖지 못한다. 토대는 사유 내부에 있다고 믿어진다. 그것이 바로 헤겔이 결국에는 논리적 능력, 즉 개념을 구별하고 결합하는 능력을 일종의 신성한 선물로서, 자기 발전하는 개념의 활동으로서 해석할 수밖에 없게 되는 이유이다. 이론적 인식의 운동에서 헤겔에 의해 발견된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법칙 역시 설명 불가능한 채로 남는다. 사유가 왜 다른 방식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움직이는가에 대한 질문은, 헤겔 철학에 의해 본질적으로 동어반복적인 방식으로 답변된다: 사유의 본래적이고 ‘창조될 수 없는’ 본성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동어반복은 단순한 동어반복이기를 그치고, 하나의 관념론적 거짓말이 된다.

 

그 지점이 바로 마르크스가 자신의 비판을 가하는 지점인데, 그는 여기서 설명이 전혀 부재하다는 점을 보여주며, 설명의 부재를 설명으로 통용시키려는 시도는 관념론과 다름없음을 보여준다.

 

마르크스는 객관적 세계의 데미우르고스로서 사유라는 헤겔적 개념을 폐기하지만, 그럼에도 헤겔이 비록 허위적인 관념론적 해석을 부여했을지언정 이론적 인식의 운동 속에서 확립한 그 법칙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마르크스가 지적하듯이,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은 실제 사실에서 인간 사유가 자신 외부에서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구체적 실재를 전유하기 위한 방법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게, 이 방법은 첫째, 해석되지 않은 구체성의 존재를; 둘째, 사유로부터 독립적으로 발전하는 사회적 인간의 실천적-객관적 활동을; 그리고 셋째, 의식 속에서 객관적 구체성이 반영되는 직접적인 감성적 형태, 즉 특수한 이론적 활동보다 앞서 그리고 그로부터 전적으로 독립적으로 형성된 경험적 의식, 관조, 관념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해서, 이론적 사유는 객관적 세계의 존재보다 사후적(posterior)이며, 더욱이 감각적 실천 활동의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형성된 또다른 형태의 의식마르크스가 언급한 바 있는 세계의 실천적-정신적 전유 양식(the practical spiritual mode of assimilation of the world)에 뒤이은 것이다.

 

헤겔은 이론적 사유의 이 모든 전제를 그것의 산물이자 결과로 제시한다. 마르크스는 모든 대상을 그것들의 적절한 위치에 되돌려 놓는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마르크스가 보여준 바와 같이,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은 그 어떤 신비주의도 없이 지극히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또한 이해되어야만 한다. 즉, 사유가 자신 외부에서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역사적으로 확립된 구체성을, 즉 사유 외부에서 그리고 사유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발전하는 세계를 개념 속에서, 개념의 운동 속에서 재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말이다.

 

번역: 노준엽 | 집행위원

 

2026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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