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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자에 대하여 〔 下 〕」 『총명한 유물론』 제3집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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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료하게도, 그리스도, 네로, 모차르트, 괴벨스, 크로마뇽인 사냥꾼, 소크라테스, 크산티페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동등하게 기술하는 추상적-공통적 특징을 발견하려는 그 어떠한 시도라도, 이는 인식적으로 가치 있는 것을 그 자체 내부에 은폐하며, [탐구자를] 사안의 핵심을 결코 표현하지 못하는 극도로 빈약한 추상화가 아닌 다른 곳으로도 인도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한, 이 교착 상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마르크스와 그가 붙잡은 더욱 견실한 논리─‘보편자’라는 문제에 대한 더욱 진지하고 구체적인 개념으로 향하는 것이다:
“ … 인간의 본질은 각 개인에게 내재한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다.”1
여기서 확실하게 적절성 있는 것은 마르크스의 추론 방식의 기저에 깔린 사회학적 원리뿐 아니라 논리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만약 논리학의 언어로 번역된다면, 그것은 이를 의미할 것이다: 즉, 그것이 인간이든 혹은 다른 어떠한 유이든 간에, 그 유의 본질을 표현하는 보편적 정의들은, 그 유의 모든 특수한 표본이 소유하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러한 추상적이고 공통적인 ‘특징’ 가운데서는 효과적으로 탐구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 본성 일반의 ‘본질’─그리고 개별 인간 존재에 있어 인간 본성의 [본질]─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회-역사적 제 관계의 ‘전체적 총체(entire totality)’, 즉 ‘전체적 앙상블(entire ensemble)’에 대한 과학에 기반한 비판적 분석을 통하지 않고서는, 즉 사례 연구 접근법과 인간 사회 전체 및 특정 개인의 발생과 진화 과정을 지배해 왔으며 현재 실제로 지배하고 있는 규제력에 대한 파악을 통하지 않고서는 밝혀질 수 없다.
특수한 개인은, 그가─정확히 자신의 개별성을 통하여─역사적으로 발전된 능력들(특히 인간적인 생명 활동의 방식)의 특정한 총합, 즉 자신보다 앞서 그리고 자신과는 독립적으로 발전해 왔으며 그가 교육의 과정(인간의 자기-완성)을 통해 흡수하는 문화의 특정한 파편을 실현하는 한에서, 그 단어의 엄밀하고 정확한 의미에서의 ‘인간’을 대표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문화의 개별적 구현체, 즉 인간 내면의 ‘보편자’로 옳게 취급될 수 있다. 따라서, 보편적인 ‘인간의 본질’은 오직 문화로서, 즉 역사적으로 확립되었으며 진화 중인 모든 특별히 인간적인 생명 활동 제 형태의 집합체(aggregate)로서, 즉 이것들의 앙상블의 전체로서만 실재한다. 이리 이해된 ‘보편자’는, 참으로, 개개인의 무언의 범칭(汎稱)적 ‘유사성’(generic ‘similarity’)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내부에서 수차례에 걸쳐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보충적이고 본질적으로 상호 의존적인─그리하여 동일한 난자로부터 발전한 어느 생물학적 종의 신체 기관이 그러하듯 긴밀하고도 유연하게 공통 기원의 유대로 묶여 있는─‘특유의’(‘특수한’) 영역들로 분절된 하나의 실재를 대표한다.
다시 말해, ‘인간 내면의 일반성’의 이론적-논리적 규정, 곧 인간 존재의 구체적 보편자는, 위에서 본 바에 따르면, 오직 인간에게 특유한 활동의 많고도 다양한 형태들, 사회적 인간의 능력들과 그것들에 상응하는 욕구들이 서로로부터 전개되어 나오고 서로 상호작용하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 필연적인가를 밝혀내는 데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또한 실제로 그러하다.
따라서 인간 내면의 ‘가장 공통적인’ 정의를 찾으려 할 때─이 과제는 개별 인간에게서 형식적 동일성, 곧 ‘추상적’ 특징을 추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나 본질적으로나 다른 모든 것의 출현에 대한 보편적 토대이자 조건이 되는, 바로 그 현실적이며 따라서 특별한 인간적 생명 활동의 형태를 확정하는 데 있다.
문화인류학 및 형질 인류학, 고고학의 자료와 완전히 합치하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유물론적 관념은, 사회적 인간이 자기 자신이 창조한 도구를 가지고 자연(외적 자연과 자기 자신의 자연 모두)을 직접적으로 개조하는 것, 곧 노동 속에서 인간 존재의 그 ‘보편적’ 형태를 본다.
따라서 인간을 ‘노동 도구를 생산하는 존재’로 규정한 프랭클린의 유명한 정의에 마르크스가 깊은 공감을 표했음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노동 도구를 생산하는 존재라는 바로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인간은] 생각하고, 말하고, 음악을 작곡하고, 도덕 규범을 따르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 일반’을 ‘노동 도구를 생산하는 존재’로 규정한 것만큼, 보편자를 구체적 보편자로 파악하는 마르크스주의적 개념과, 특수한 것과 개별적인 것에 대한 그 사고방식을 더 잘 보여주는 사례는 달리 제시될 수 없다.
낡은, 전통적인 형식 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위의 정의는 ‘보편적’이기에는 너무 ‘구체적’이다. 이는 순전한 형식적 추상화에 의해 모차르트, 레프 톨스토이, 라파엘 그리고 칸트와 같은, 인류라는 종의 의심할 여지 없는 대표자들까지 직접 포괄하도록 확장될 수 없다. 형식적으로 보자면, 이 정의는 예컨대 제조공장이나 작업장의 피고용인들과 같은 제한된 범위의 개인들에게만 관련된다. 심지어 이 기계들의 생산자가 아니라 사용자인 노동자들조차 공식적으로 그것[‘노동 도구를 생산하는 존재’]2에 대한 자격을 갖추지 못할 것이다. 그 결과, ‘보편자’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가진 낡은 논리는 그 정의를 ‘보편적’이라기보다는 엄격하게 ‘특수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즉 그것을 ‘인간 일반’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특정한 인간 직업에 대한 정의로 판단함이 옳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랭클린은 ‘인간 일반’이라는 문제와 관련된 수많은 사실·견해를 바탕으로 훨씬 더 진지하고 심오한 논리적 관점을 취함으로써, [이 문제에의] 이 논리와의 쟁론에서 본질적으로 옳았음을 증명한다; 철학의 품에서, 그리고 특히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피히테와 헤겔의 논리적 담론들 속에서 수 세기 동안 줄곧 무르익어 온 바로 그 논리 말이다. 실상 이 논리는 『자본론』과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 그리고 역사와 근대에 대한 유물론적 파악 속에서 자신의 구체적인 과학적 적용을 이루었다.
이 ‘보편자’ 구상은, 보편자가 이미 정신 속으로, 더 엄밀하게는 정신을 표현하도록 요청된 ‘단어’로 자신의 길을 찾아 들어가는 한정성 속에서 ‘보편자’에 몰두했던 플라톤, 헤겔,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카르납에게서 다소 명시적으로 나타나는 바와 같은 ‘개념’ 혹은 ‘사유’와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보편자(‘구체적 보편자’)는 오성적 추상(intellectual abstraction)이라기보다는 우선 특수한 개별자 자신의 실체이자 그들 상호작용의 구체적 형태로서, 이는 특수한 개별자의 감각적 잡다(sensuous variety)에 대립한다. 그 자체로 보편자는, 자신의 구체적 확실성 속에서 ‘특수자와 개별자의 총체적 보물’을 자기 내에 구현하며, 이는 단지 하나의 가능성으로서만이 아니라 확장의 필연성으로서, 즉 단순한 형태가 다양하게 분할된 현실로 이행하는 ‘실재적 펼쳐짐(real explication)’으로서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보편자’는 다양한 현상의 추상적 동일성(유사성)으로 이해될 수 없으며, 이러한 류의 동일성은 현상을 동일한 이름이나 고유명사 또는 용어로 묶는 데서 그 근거가 될 수 없다. 보편자의 ‘자기 확장’의 필연성, 즉 그것 자기 운동의 원동력(dynamo)은 ‘모순의 긴장’, 즉 형식의 내적 모순이라는 형태로 보편자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에 따라 우리는 그 자체 내부에서도 그것 자신의 특수한 계기들의 차이로 분화 가능한 무언가로서 보편자를 이해하도록 이끌리게 된다. 그것들 사이의 관계는 대립물의 동일성, 즉 그것들의 살아있는 구체적 통일성, 혹은 상호 침투의 관계이다.
그러나 이는 ‘보편자 그 자체’라는 개념의 변증법적-유물론적 정의의 범위를 훨씬 능가하는 또다른 주제이다. 그럼에도 이 논문의 제약성 내에 머물면서, ‘보편자’에 대한 이러한 구상과 그것이 과학적으로 이해되는 방식들이 철학적 변증법의 독점적 소유의 구성물이 아니라는 점이 덧붙여져야 한다. 과학은─신실증주의자들의 인식론적 및 ‘논리적’ 구성물 속에 표현된 그것의 재현이라기보다 진정한 과학으로서─언제나 ‘보편자’에 대한 유사한 파악으로부터 다소 일관되게 진척해 왔다. 종종 그것은 자신의 대표자들에 의해 공언된 의도적인 논리적 명제와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이 경향은 경제학의 일반적 범주인 ‘가치’ 개념의 전 사례사 전반에서 용이하게 추적될 수 있다.
‘가치 그 자체’라는 추상물은 물론, 이러한 추상물을 묘사하는 단어 자체도 시장 관계만큼이나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어 ‘axia’, 독일어 ‘Weyt’ 등은 페티, 스미스 또는 리카도가 만들어 낸 단어가 아니다. 상인이나 농부는 사고팔 수 있는 모든 것, 즉 ‘값(cost)’이 드는 모든 것에 항상 ‘가치’ 또는 ‘값’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만약 경제학 이론가들이 오늘날까지 과학에서 제출하는 순전히 명목론적인 형식 논리의 지침에 따라 ‘가치 그 자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려 했다면, 그들은 결단코 실패했을 것이다. 사실상, ‘가치’라는 용어는 결코 그 시작부터, 진부한 단어 사용이 일부 사람으로 하여금 ‘가치 있는’ 것이라 불리는 대상 각각에 속한다고 생각하도록 이끈 어떤 추상적이고 공통된 요소를 적용한 것의 결과였던 적이 없었다. 만약 그러한 경우라면, 그것은 그 어떠한 상점 주인이라도 이미 가지고 있을 ‘가치’의 의미에 관한 관념들을 정리하는 일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즉, ‘가치’라는 단어는 적용 가능한 그러한 현상의 ‘특징들’을 순전히 사실에 입각하여 나열하는 일이 될 것이며, 그것으로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기획은 순전히 그 용어의 적용 가능성을 명확히 하는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경제학의 고전이 완전히 다른 측면 속에서 이 문제를 취급했다는 것이며, 또한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이 개념─실재적 보편자에 대한 이해 속에서 발견되는 그러한 방식으로 찾아졌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이들이 이 문제를 제기한 방식의 본질을 밝혀냈다.
영국 최초의 경제학자인 윌리엄 페티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가치 개념에 도달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페루 땅에서 은 1온스를 캐내 런던으로 가져오는 데 걸리는 시간과 옥수수 1부셸을 생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같다면, 전자는 후자의 자연 가격이 된다.”3
우리는 이 명제에서 비록 ‘가치’라는 용어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자연 가격’은 언급되어 있음을 지나가는 길에 지적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부’의 생산·분배·축적에 관한 이후의 과학 전체에 근간이 되는 가치 개념의 탄생을 불 보듯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개념은 용어 속에 구현된 일반적 관념이라기보다 하나의 실재적 개념인 한에서, 헤겔의 삼각형 예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특수자’ 사이의 하나의 ‘특수자’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보편적인 것으로 판명되며, 따라서 ‘가치 일반’를 대표하는, ‘경험 속에서’ 주어진 하나의 실재적 현상을 여기서 표현(반영)한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고전은 가치를 보편적인 형태로 정의하는 이러한 방식을 우연히 발견했다. 하지만 그들은 개념이 형성된 후 이를 사용하려는 시도에서 사유와 ‘보편자’에 대한 존 로크의 사상에 입각한 논리적 기준에 따라 일관성 있게 ‘검증’하려 했고, 곧바로 몇 가지 역설과 모순에 직면하게 되었다. [로크의 방식에서 이해된] ‘보편자’라는 용어를 이윤이나 자본과 같은 특별한 변형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이루어질 때마다 결코 이것이 확증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변형들과 모순됨으로써 부정될 뿐이다.
마르크스는 역설 생성의 근원을 규명하고 탈출구를 제출한 바로 그 인물이었는데, 이는 정확히 그가 ‘보편자’의 본성 및 그것이 ‘특수자’ 그리고 ‘개별자’와 맺는 상호 관계들에 관한 더욱 심오하고 변증법적인 구상을 따랐기 때문이다. “자연 속 보편 실재는 법칙”(엥겔스)이나, 또한 그것은 현실 속의 법칙이다(이에 대한 증거는 현대 자연과학, 특히 미시 물리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각각의 특수한 입자의 운동이 따를 것으로 기대되는 하나의 규칙으로서 결코 절대적으로 수행(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의 특수한(개별적인) 발현 각각에서의 ‘보편자’에 대한 ‘위배’ 혹은 ‘부정’을 통하여, 개별 현상의 다소 복잡한 어떤 집합체의 행위(behavior of some more or less complex ensemble) 속에서 그 자신을 현시하는 하나의 경향성으로서만 수행(관철)된다. 결과적으로, 인간 정신은 어떤 경우에도 이를 고려에 넣어야만 한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가치에 대한 일반적 정의(가치 법칙)는 한 재화를 다른 재화로 직접 교환하는 것에의 분석 과정, 즉 역사적으로 가장 먼저, 따라서 논리적으로 가장 단순한 가치의 구체화만을 취함으로써 도출된다. 마르크스는 이를 화폐·이윤·지대 등 (가치에 기초하여 전개된) 모든 다른 특수한 형태를 배제함으로써 수행했다. 마르크스에 의해 지적된 바와 같이, 리카도의 가치 분석에 있는 결함은 정확히 그가 보편적 형태에 있는 가치 문제에 접근하면서 “이윤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한 점에 있었다. 이것이 리카도의 추상을 불완전하게, 그리고 그에 따라 형식적인 것으로 만든다.
마르크스는 이윤뿐만 아니라 심지어 화폐까지─모든 후속 형성물이 분석의 이 단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가정하므로, 그에게 있어 문제 해결은 곧 보편적 형태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분석되는 것은 오직 직접적이며 비화폐적인 교환뿐이다. 개별자를 보편의 영역으로 상승시키는 이러한 것은 단순한 형식적 추상화 행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곧바로 밝혀진다.
여기서 단순 상품 형태를 이윤·지대·이자 및 가치의 다른 특수한 ‘유형들’로부터 구별 짓는 그 차이물들은, 비본질적인 것으로서 버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차이들에 대한 이론적 서술은 가치의 일반적 형태에서의 정의와 정확히 일치한다. 리카도적 추상의 불완전함과 그와 결부된 ‘형식성’은, 한편으로는 그것을 구성하는 동안 모든 다른 고차적인 ‘가치’ 유형들(특히 그리고 특별히 이윤)의 존재를 [가치에서] 배제하지 못한 리카도의 무능력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적 상품 교환의 구별들을 포함한 모든 구별로부터의 배제를 통해 그것이 형성되었다는 점에 정확히 놓여 있다. 리카도의 분석은 또다른 어려움을 야기하는데, 그것은 바로 ‘공통자’가 결국 ‘특수자’와 완전히 분리되어 더는 이론적 서술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보편자’에 대한 변증법적 구상과 순전히 형식적인 구상 사이의 차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변증법적-유물론적 구상을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의 해석으로부터 구별한 것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철학에 관한 서구의 문건들에서 헤겔의 보편자 구상과 마르크스 및 레닌의 보편자 구상 사이에 등호가 너무나 자주 놓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범주에 대한 정통 헤겔주의적 관념은, 그것의 변증법적 가치들이 무엇이든, 헤겔 자신이 그토록 거부하는 바로 그 “형이상학적” 관점과 어느 한 결정적인 지점에서는 일치함이 명백하다. 이는 헤겔 논리학의 원리들이 실재하는 세상사 문제에의 분석에 적용될 때마다 특별한 명료함과 함께 드러난다.
실로, 헤겔이 기하학적 도형들의 활용을 통해─예를 들어 삼각형을 ‘일반적 도형’으로 고찰함으로써, 순수하게 형식적인 보편자 관념에 대비되는 자신의 ‘사변적’ 개념에 대해 논할 때 결과하는 인상은, 이 구상이 마르크스로 하여금 ‘가치’ 또는 ‘가치 그 자체’의 일반적 정의라는 문제에 대처할 수 있게 했던 전체 논리적 청사진을 이미 그 자체 내에 기성품의 형태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의미하고 순전히 형식적인 추상과 구별되는 헤겔의 “참된 보편성”이, 그가 말한 직접적이고 객관적인 의미로서 있거나, 혹은 ‘참된 보편자’ 자체가 ‘특수한 것’의 형태, 즉 ‘대타존재’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실, 또는 시공간 속에 주어진(즉, 인간 머리 밖에 존재하는) 경험적으로 현존하는 실재로서 관조 속에서 지각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언뜻 보기에는 그리 보일지도 모르지만, 헤겔 자신은 보편자와 특수자의 상호 관계를 수학적(기하학 포함) 상(mathematical images) 사이의 관계와 결코 유사하지 않음을 고집하는데, 이 유사성은 순전히 비유적인 의미에 불과하며, 진정한 본질을 왜곡하고 모호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헤겔에 의하면, 논리적 개념(보편자)을 명징하게 하기 위해 활용되는 기하학적 상은 지나치게 “감각적 실체로 가득 차 있어서” 부적절하므로, 이는 성경 속 신화처럼 끽해야 개념에 대한 잘 알려진 우화에 불과하다. 그가 오로지 순수하게 논리적인 범주, 즉 대문자로 표기된 개념(Concept)으로서만 접근하는 ‘참된 보편자’에 관해서라면, 그것은 ‘감각적 실체(sensuous substance)’ 또는 ‘감각적 질료(sensuous matter)’의 모든 잔재가 완전히 제거된 것으로, 그리고 ‘정신’의 정제된 비물질적 활동 영역 속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이 출발점을 가지고서 헤겔은 [당대] 유물론자들이 보편자에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 정교하게 비난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유물론자들은 보편자를 ‘다른 특수자 중의 한 특수자’로, 즉 시공간 속에 한정된 무언가로; ‘유한한’ 무언가로 변형시킴으로써 사실상 보편자를 ‘그 자체로서’ 폐기하는 효력을 가져왔다는 것이며, 그에 반해 보편자는 ‘내재적 완결성’과 ‘무한성’의 성격이라는 그것의 형식 안에서 명징하게 [시공간적 제약·특수성·유한성과] 구별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헤겔에 의하면, 엄밀하고도 정확한 의미의 ‘보편자 그 자체’가 오직 ‘순수 사유’의 영역에만 존재하며, ‘외적 실재’의 시간이나 공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다. 후자의 영역에서 이 ‘참된 보편자’의 일련의 ‘특수한 소외(particular estrangements)’, ‘실현(embodiments)’, ‘실체화(hypostases)’만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헤겔 논리학이 인간의 본질을 노동 도구를 생산하는 존재로 정의하는 것을 전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 즉 ‘논리적으로 부정확한’ 것으로 만들게 할 것이다. 헤겔에 의해 비판받았던 순수 형식 논리의 그 어떤 옹호자들과도 마찬가지로, 정통 헤겔주의자에게도(실제로 매우 중대한 의견 일치를 보인다!), 프랭클린이나 마르크스의 정의는 ‘보편자’가 되기에는 너무나 ‘구체적’이다. 노동 도구의 생산은 헤겔에 의해 인간 안에 있는 인간적인 모든 것의 기초로서가 아니라, 후자의 사유하는 자아의─비록 매우 중요할지라도─하나의 발현으로서 간주된다.
다시 말해, 보편성의 형식과 보편자에의 헤겔식 해석의 관념론은 실제로 그가 그토록 혐오하던 그것─이 범주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과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
더 나아가, 헤겔 논리학을 본래 형태로 활용하여 『자본론』 초입부의 논리적 추론의 타당성을 평가한다면, 그곳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이론] 전개 전체는 ‘부당하고’, ‘비논리적’인 것이다. 헤겔 논리학자는 그 자신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적 가치 분석이 보편자라는 범주에 대한 그 어떤 정의도 결여하고 있음은 옳았다 할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마르크스가 정의를 단지 ‘서술’했을 뿐 ‘가치 일반’의 그 어떤 특수한 형태도 이론적으로 ‘연역’해내는 데 실패했다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명 활동의 그 어떤 ‘참되게 보편적인’ 범주와 마찬가지로 ‘가치 일반’이란, 그것이 순전히 발현되거나 대상화될 뿐인 그 어떤 ‘외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에게 내재적인 형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헤겔 논리학이 형식 논리에 대해 어떤 이점을 가졌든 간에 몇 가지 중대한 변화가 도입되고 관념론의 모든 흔적이─무엇보다도 자연과 ‘보편자’의 지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근본적으로 제거되지 않는 한, 유물론 지향의 과학을 위한 무기로서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용납될 수 없음을 시사하는 것일 뿐이다. 헤겔의 관념론은 논리에 관하여 결코 ‘외적인’ 어떤 것을 구성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사고의 논리적 연쇄에 방향을 부여할 뿐이기 때문이다. 대립하는 범주들(한편으로는 보편자, 다른 한편으로는 특수자를 포함하여)의 이행들에 대해 논평할 때, 헤겔은 또한 그 접근의 도식에 일방향적인[폐쇄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예를 들어, 헤겔식 도식 아래에서는, 가치 정의에서 마르크스적 이행, 즉 개별자의 보편자로의 이행(변형)을 위한 자리가 전혀 없다. 헤겔에게 보편자는 ‘특수자’ 및 개별자로부터 자기 자신을 ‘소외시킬’ 특권을 가진 유일한 존재인 데 반해, 개별자는 변함없이 단지 보편성의 산물, 즉 하나의 ‘양태(mode)’로서만 나타나며, 오로지 특수할 뿐이기에 그 구성에 있어 빈곤하다.
하지만 경제(시장) 관계의 실제 사례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그는 ‘일반적 가치 형태’가 항상 생산의 조직에서 그 보편적인 형태는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상당히 오랜 시간을 걸쳐, 그것은 비록 우연히 발생했을지라도 생산에서 사람들과 사물들의 특정한 관계로 남아 있었다. 자본주의와 ‘자유 기업 사회’가 생겨나고 나서야 비로소 가치(즉, 생산물의 시장적인 형태)가 생산의 구성 부분 사이의 상호 관계의 일반적인 형태가 되었다.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것’의 보편자로의 이 유사한 이행은 드문 일이 아니라 역사 속 일반적인 현상이다. 역사 속에서─특히 인류와 그 문화의 역사에서─나중에 보편자가 되는 현상은 항상 ‘규칙에서 벗어난’ 예외, 변칙적인 현상, 특수하고 부분적인 것으로서 생겨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보편적인] 현상도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역사 속 모든 새로운 것이 예외 없이 모두에게 ‘공통적인’ 어떠한 것으로서, 갑자기 구체화된 ‘이념’으로 한꺼번에 등장한다면, 역사는 다소 신비로운 모습을 띨 것이다.
보편자에 대한 헤겔적-변증법적 구상에 대한 마르크스·레닌적 재고에 접근해야 한다면 바로 이러한 관점이어야 한다. 헤겔의 사유 속의 변증법적 경향들을 높이 평가하면서, 마르크스주의는 그의 구상을 깊이와 넓이 면에서 더 진척하게 하며, 그리하여 ‘보편자’ 범주를 구체적·역사적으로 진화하는 제 현상에의 탐구를 지배하는 논리학의 으뜸 범주로 바꾼다.
역사와 사유의 변증법에 대한 유물론적 구상의 맥락에서, 헤겔의 공식은 그 창시자의 언어에서와는 다른 의미를 지니며, 신비주의적 색체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보편자’는 ‘개별자의 보물창고 전체’를 그 자체 내에 포함하고 구현하는데, 이는 하나의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보편자로 향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의 내적 모순의 힘에 의해 ‘그 자체로부터’ 새롭지만 그에 못지않게 실재적이라 할 현상, 즉 실제적 진보의 다른 ‘개별적’ 형태들을 발전시키는, 전적으로 실재하는 특별한 현상(a totally real, special phenomenon)으로서 그렇다. 따라서 ‘참된 보편자’란 한 종류의 모든 구성 요소(each and every member of a class)에서 발견되는 특수한 형식이 아니라, 바로 그 ‘특수성’에 의해 드러나게 되고, 바로 그 ‘특수성’에 의해 ‘참된 보편자’가 되는 형식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플라톤-헤겔 계통의 신비주의적 잔재가 조금도 없다.<끝>
번역: 한동백 | 집행위원
2026년 4월 10일
- K. Marx, “Theses on Feuerbach”, § 6, MECW, Vol. 5, London: Lawrence & Wishart, 2010, 3.

- 〔역자 주〕 예를 들어, 소비재 부문에서 노동 도구를 직접 다루는 인간, 즉 소비재 부문 노동자는 노동 도구의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재의 생산자이므로 ‘노동 도구를 생산하는 존재’가 아니다.

- K. Marx, “Capital”, Chapter 2, Note, MECW, Vol. 35, ed. J. Cohen et al, London: Lawrence & Wishart, 2010, 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