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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 제3장 (3)」 『총명한 유물론』 제3집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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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인식의 발전에 관한
마르크스의 관점
우리가 주지하듯, 사유에서 추상과 구체의 관계 문제는 마르크스 전에 더 일반적인, 또 다른 문제: “어떤 과학적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가?”1하는 문제와의 연관 속에서 제기되었다.
이 물음은 과학적 발전을 하나의 자연사적 과정으로 파악하는 견해를 전제한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는 인류 사상의 지난 성과 전부를 무시하는, 정신문화 발전에 대한 좌경적 견해에 언제나 단호히 반대해 왔다. 과학에서는, 정신문화의 다른 모든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제 진보는 언제나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으로가 아니라 이전 발전이 창조한 가치를 더욱 발전시켜서 달성된다; 로크식 빈 서판(tabula rasa)으로서가 아니라 이론적으로 발전한 두뇌로서 말이다.
이전 이론적 발전의 결과를 전유하는 것이 단순히 기성의 공식을 물려받는 문제가 아니라, 사실, 생활, 실천에 대한 그것의 조응을 기준으로 그것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는 복잡한 과정이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새로운 이론은, 그것이 그 내용과 의의에서 아무리 혁명적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이전의 이론적 발전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의 과정에서 탄생한다. 레닌은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문화의 지지자들이 내세운 좌익적 견해에 맞선 투쟁에서 이 점을 강조했는데,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문화는 ‘생활에서 직접’ 발전시켜야 하며, 인류 사상의 모든 성과는 쓸모없는 폐기물로서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론이 혁명적일수록, 그것은 이전 이론적 발전의 진정한 계승자로서 역할을 더욱 크게 수행하며, 과학이 이전 발전에서 축적한 '합리적 핵심'을 그만큼 더 많이 전유한다. 그것은 과학과 이론의 발전에서 하나의 필연적 법칙이다. 경험적으로 주어진 자료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개념은 언제나 이 사실에 대한 낡은 이론적 해석을 혁명적으로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이전에 발전된 이론과의 '비판적 결산'은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론의 정립 그 자체의 필연적 요소이자 사실에 대한 이론적 분석의 요소이다. 『자본론』의 부제, 제2의 표제가 『자본주의적 생산의 비판적 분석』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본론』에서, 정치경제학의 전체 선행 역사 속에서 발전된 개념에 대한 분석은 본질적으로 경제 현실의 완강한 사실에 대한 분석과 유기적으로 일치한다. 과학적-이론적 탐구의 이 두 측면은 하나의 단일한 과정에서 일치 혹은 융합한다. 그 어느 쪽도 다른 한쪽 없이는 생각될 수도 가능하지도 않다. 사실의 분석 밖에서 비판적인 개념 분석이 불가능한 것처럼, 사실의 이론적 분석도 그것이 표현될 개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논리학은 이 사정을 충분히 고려한다.
바로 이것이 변증법이, 귀납적 계기와 연역적 계기의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일치가 일어나는 영역, 양자가 불가분하게 연결되고 상호 전제하는 탐구의 계기로 구성되는 영역인 까닭이다.
낡은 논리학은 귀납을 경험적 사실에 대한 분석, 사실의 분석적 규정의 형성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 다소 일관성을 유지했다. 그것이 귀납이 새로운 지식 획득의 유일하지는 않더라도 기본 형태로 나타난 이유이다. 연역은 주로 개념에 대한 분석으로서, 개념 내부에서 구분을 확립하는 과정으로 간주되었다. 그러한 것으로서, 연역은 대체로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개념을 획득하는 형태라기보다는, 이미 머릿속에 있는 기존 지식을 해설하거나 서술하는 과정이자 형태로 나타났다. 요점은, 인간이 (물론 그가 실제로 사실에 대한 개념을 형성한다는 조건 아래에서) 결코 텅 빈 의식을 가지고 사실의 분석에 착수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교육을 통해 발전된 의식을 가지고 착수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그는 언제나 일정한 개념을 염두에 두고 사실에 접근한다.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러한 조건 없이 그는 일반적으로 사실을 능동적으로 파악하거나 개념화할 수 없다─기껏해야 그것을 수동적으로 관조할 수 있을 뿐이다.
가장 단순한 일반화에서도, 귀납은 연역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사실을 개념으로 표현하며, 그것은 사실에 대한 새로운 분석적 규정이 동시에, 이 사실을 해석하는 기초로 기능하는 개념의 새롭고 더욱 구체적인 규정으로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실에 대한 분석적 규정은 전혀 형성되지 않는다.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실에 대한 각각의 새로운 귀납적 규정은, 그가 언젠가 사회로부터 익힌 어떤 기성의 개념, 어떤 개념 체계를 고려하여 형성된다. '아무런 편견도 없이', 어떤 '선입견'도 없이 사실을 표현한다고 믿는 사람은 실제로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반대로, 그는 종종 가장 진부하고 터무니없는 관념의 노예임이 드러난다.
여기서도 다른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자유는 필연성으로부터 도피하려 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필연성을 의식적으로 숙달함에 있다. 진정으로 편견 없는 사람은 아무런 '선입견'도 없이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전유한 올바른 개념의 도움으로 그것을 행한다.
철학적 범주와 관련하여, 이것은 경험론에 대한 엥겔스의 비판에서 매우 설득력 있게 논증되었다: 어떠한 논리적 범주로부터도 자유롭다고 자부하는 자연과학자는 그것에 관한 가장 진부한 관념의 포로임이 드러난다. 그 자신은 사실로부터 그것을 형성할 수 없다─그것은 오직 인류만이 자신의 발전 과정에서 할 수 있는 것을 [그가] 한다는 주장과 같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실제로 언제나 철학으로부터 논리적 범주를 빌려온다. 문제는 오직 그가 어떤 철학으로부터 그것을 빌려올 것인가이다: 아무짝에 쓸모없는 유행하는 체계로부터인가, 아니면 인류 사상의 전체 역사와 그 성과의 연구에 기초한, 실제로 발전의 정점을 이루는 체계로부터인가.
이는 물론 철학의 개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과학의 범주에도 동일한 일이 일어난다. 인간은 결코 '처음부터', '사실에서 직접' 추론을 시작하지 않는다. 위대한 러시아 과학자 이반 파블로프는 일찍이, 머릿속에 관념이 없으면 사실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관념 없는 맹목적 관조와 귀납은, '순수 사유'와 마찬가지로, 상상의 산물이다.
경험론은 “오직 반박할 수 없는 사실만을 가지고 작업한다”고 전제하지만, “실제로는 주로 전통적 관념을, 즉 선행자의 사유가 낳은 대체로 낡은 산물을 가지고 작업한다.”2 그것이 경험론자가 추상을 현실과, 현실을 추상과 쉽게 혼동하고, 주관적 환상을 객관적 사실로, 객관적 사실과 그것을 표현하는 개념을 추상과 환상으로 여기는 이유이다. 그는 통례적으로 추상적으로 자명한 이치를 사실의 규정으로 내세운다.
이로부터, '경험적 귀납' 그 자체가 사실을 고찰하는 기초로 기능하는 관념과 개념을 구체화하는 형태를, 다시 말해 연역의 형태 혹은 추상을 통해 사실로부터 획득된 새롭고 더욱 상세한 규정으로 원래의 개념을 채우는 과정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 나온다.
연역과 귀납의 낡은 대립은 유물론적 변증법에서 합리적으로 지양된다. 연역은 개념에 선험적으로 포함된 규정을 형식적으로 도출하는 수단이기를 그치고, 그 운동, 내적 상호작용 속에서 사실에 대한 지식을 실제적으로 발전시키는 수단이 된다. 이 연역은 유기적으로 경험적 계기를 포함한다: 그것은 경험적 사실에 대한 엄밀한 분석을 통해, 즉 귀납을 통해 진행된다. 그러나 이 경우, '귀납'과 '연역'이라는 명칭은 유물론적 변증법의 방법과 추론적, 오성 논리학(intellect-oriented logic)의 그에 상응하는 방법 사이의 외적이고 형식적인 유사성만을 표현한다. 실제로 그것은 귀납도 연역도 아니라, 오히려 양자를 지양된 계기로서 포함하는 제3의 방법이다. 여기서 양자는, 상호 전제하는 대립물로서 동시에 실현되며, 바로 그것의 상호작용을 통해 논리적 발전의 새롭고 더 높은 형태로 귀결된다.
사실에 대한 분석과 개념에 대한 분석의 유기적 결합이라는 이 더 높은 형태가 바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이다. 그것이 사물의 객관적 본성에 조응하는 지식 발전의 유일한 논리적 형태이다. 요점은, 다른 어떤 방법도 역사적으로 발생하고 발전한 현실로서의 객관적 구체성을 사유 속에서 재생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는 그것을 할 수 없다.
이러한 것으로서,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은 결코 단순히 다른 어떤 방식으로 획득된 기존 지식을 서술하는 방법이 아니다. 그러나 『자본론』의 방법을 진부한 신칸트주의 정신으로 왜곡한 수정주의자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종종 이런 것으로 제시해왔다.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이 그런 식으로 해석되는 것이 루돌프 힐퍼딩의 방식이다. 힐퍼딩은 마르크스의 1857-8년 경제 초고의 서문(“첫 번째 경로에서 완전한 발상은 추상적 규정이 될 때까지 농축될 것이다; 두 번째 경로에서 추상적 규정은 사유를 통한 구체의 재생산으로 이어진다”)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귀납과 연역을 동등한 가치를 지닌 지식의 원천으로 동일시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는 이미 이것에서 분명하다. 오히려 연역은 단지 서술의 과학적 방법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최종적인 분석에서 일반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의 서술로 실제로 도달하려 한다면, 정신에서 귀납이 선행해야 한다.”3 힐퍼딩은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을 연역이라 부르고, 전통적으로 이해되는 연역과의 외적 유사성만을 고려하여 그것을 극도로 일면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면서, 그것이 실재적 사실의 연구 방법으로서 갖는 어떠한 장점도 부정하고, 그것을 단순히 기존 지식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형태로 격하시킨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이 지식은 사전에 다른 방식으로, 즉 귀납적 방식으로 획득되어야 한다.
잘 알려진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전체로서의 경제와 사회화』의 저자인 칼 레너는 자신의 저작 서문에서 동일한 사고 경로를 걷는다. 그는 『자본론』에서 적용된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의 본질을, 레너에 따르면, 마르크스가 자신의 동시대인에게서 익힌, 독일 철학자에게 특유한 서술 방식으로 격하시킨다. 이 서술 방식이 현대 독자에게 전혀 낯설어졌다는 이유로, 레너는 그것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긴다. “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만큼 이토록 방대한 경험적 자료에서 성장해 나온 책을 알지 못하며, 그 서술 방법이 이처럼 연역적이고 추상적인 책도 거의 알지 못한다.”4 따라서 레너는 마르크스 이론의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즉 “경험적 사실의 가시적인 증거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고, 그렇게 점차 추상적 개념으로 나아가는”5 방식으로, 즉 귀납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긴다. 이 경우 레너는, 서술의 방법이 탐구의 방법에 조응하게 될 것이며, 반면 『자본론』에서 양자는 모순 속에 있다고 여긴다.
그 결과, 레너는 현대 자본주의의 경험적 현상을 그것이 표면에 나타나는 방식 그대로 무비판적으로 일반화하면서, 자신의 일반화를 이 현상의 본질에 대한 이론적 표현인 양 내세운다. 이 경로를 따라 그는, 예를 들어, 주식을 구매하는 노동자는 그럼으로써 사회적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되고, 그 결과 자본의 자동적인 '민주화'와 사회적 생산의 '사회화'가 이루어지고, [이것은] 혁명을 불필요하게 만든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리하여 레너는 현상을 연구하는 마르크스의 방법을 변호론의 방법으로 대체하면서, 그것을 서술 방식의 차이로 위장한다.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은 또한, (순수 분석적 방식으로 미리 획득된) 이용 가능한 추상을 하나의 체계 속에서 순수 논리적으로 종합하는 방법으로도 해석될 수 없다. 인식이 먼저 수많은 추상을 산출하는 ‘순수한’ 분석으로 이루어지고, 마찬가지로 ‘순수한’ 종합이 뒤따른다는 관념은 연역 없는 귀납이라는 발상과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 인식론의 허구이다.
이 견해를 입증하기 위해 17세기와 18세기 과학의 발전이 종종 예로 인용되지만, 사실은 자주 무의식적으로 훼손된다. 설령 그 시대의 특징이 실제로 사실에 대한 분석적 태도였다는 것을 동의한다 하더라도(비록 종합은 이론가의 환상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도 역시 수행되었지만), 그것이 인류의 과학적 발전의 최초 단계가 아니었으며 그 시대의 특징인 ‘일면적 분석’이 고대 그리스 과학을 전제로 삼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유럽 과학적 발전의 실질적인 최초 단계인 고대 그리스 과학은, 사물에 대한 일반화된 종합적 견해로 훨씬 더 특징지어진다. 17세기와 18세기 형이상학의 역사를 언급할 때에는, 그것이 사상 발전의 첫 번째 위대한 시기가 아니라 두 번째 위대한 시기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 경우, 사실을 사유 속에서 가공하는 역사적 최초 단계에서 나타난 것은 분석이 아니라 종합이다.
인용된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그것을 통해 보여주고자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의 것을 보여준다.
분석과 종합은, 연역과 귀납이 그러하듯, 사유 과정의 불가분한 내적 대립물이고 언제나 그래왔다. 특정 시대에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의 손상 위에서 과대평가되었다 해서, 그것을 미래에 사유가 따라야 할 법칙으로, 즉, 각 과학이 먼저 순수한 분석적 발전 단계를 거친 뒤 그 기반 위에서 종합적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논리적 법칙이자 규범으로 격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은 구체가 이미 추상으로 ‘증류’된 경우에만, 그때 그곳에서만 적용될 수 있다는 견해의 기반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관념이다.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은 무엇보다도 먼저 실재적 경험적 사실에의 분석 방법이다.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은 자신의 내적으로 필연적인 대립물로서 역방향 운동을 유기적으로 자신 안에 포함한다: 이 경로의 각 단계는 정확히 감각적으로 주어진 구체성에서 그것의 추상적-이론적 표현으로의 상승 행위이다. 그것이 사유 속에서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이 동시에, 관조와 관념 속의 구체에서 개념 속의 구체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운동인 이유이다.
구체적 진리로의 상승 경로에서 종합되는, 감각적으로 주어진 사실의 추상적 규정은 운동 과정 자체에서 형성된다. 그것은 결코 이른바 순수 분석적이라는 이전의 논리적 인식 단계의 산물로 미리 만들어진 채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이 감각 경험적 구체성의 추상적 표현으로의 순수 분석적 환원을 시간상으로도 본질상으로도 선행하는 특수한 논리적 발전 단계로서 전제한다는 주장에서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 의미는 실재에 대한 이론적 고찰이 충분히 발전된 어휘, 자생적으로 형성된 용어, 추상적 일반 관념 체계의 존재를 전제한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의식 속에 객관적 실재의 반영에서 이 ‘순수 분석적’ 단계는 오직 논리적-이론적 활동의 전제 조건일 뿐, 그것의 첫 단계가 아니다.
이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은 사유 활동의, 관조와 관념을 개념으로 논리적으로 변환하는 특수한 형태이다. 그것은 결코 인위적 절차도, 이미 존재하는 지식의 서술 방식도, 추상을 체계 속에서 결합하는 형식적 방법도 아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철학을 통해 확립된 인류의 이론적 발전의 자연법칙이며, 그 다음으로 의식적으로 적용되는 이론 발전의 방법이다.
개별적으로 행해진 각각의 귀납적 일반화는(“관조 속의 구체에서 사유 속의 추상으로”라는 공식에 따른) 실제로는 언제나 인식의 전반적 전진의 맥락 속에서 실현되며, 그런 의미에서 구체적 진리를 향한 일반적 운동에서 하나의 ‘사라지는 계기’에 불과하다. 그럼으로써 사유 속에서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과 사유의 변증법은 불가분하게 연결된다.
레닌이 헤겔 『논리의 학』 마지막 절에서 추상에서 구체로의 경로에 관한 헤겔의 장문의 규정을 주의 깊게 필사한 뒤 이를 다음과 같이 특징짓는 것은 이유 없는 일이 아니다:
“이 발췌는 변증법의 일종의 요약으로서 결코 나쁘지 않다.”
레닌이 인용한 규정은 추론을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으로 특징짓는다:
“ … 인식은 내용에서 내용으로 전진한다. 이 전진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규정한다. 그것은 단순한 규정성에서 시작하며, 각각의 후속하는 것은 더 풍부하고 더 구체적이다. 왜냐하면, 결과는 자신의 시초를 포함하고 있으며, 시초의 전개가 새로운 규정성을 통해 그것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것이 토대이다; 따라서 전진을 타자에서 타자로의 흐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절대적 방법에서 개념은 자신의 타자성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존하며, 보편적인 것은 자신의 특수화 속에서, 판단 속에서, 현실 속에서 보존된다; 그것은 규정의 각각의 다음 단계로 자신의 선행하는 내용 전체를 고양하며, 자신의 변증법적 전진을 통해 아무것도 잃지도 아무것도 뒤에 남기고 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획득한 모든 것을 함께 가지고 가면서, 자기 자신 위에서 풍부해지고 농축된다. … ”6
헤겔 『논리의 학』의 바로 이 절에서 대상의 추상적 보편적 규정성에서 점점 더 구체적이게 되는 구현으로의 상승이라는 이념이 서술되며, 레닌이 그의 노트에서 관념론이 가장 적게 느껴지고 변증법적 방법이 전면에 나서는 절로 꼽는다.
“주목할 만한 것은, 「절대정신」 장 전체에서 신에 대한 말은 거의 한마디도 나오지 않고(이따금 '신적인' '개념'이라는 표현이 무심결에 새어 나오는 경우조차 드물다)─그뿐 아니라, 특기할 것은(NB)─특별히 관념론적인 내용이 거의 없으며 오히려 변증법적 방법을 주된 주제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헤겔 논리학의 총결산, 최후의 결론이자 본질은 변증법적 방법이다─이것은 극히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헤겔의 저작 중 가장 관념론적인 이 저작에서 관념론은 가장 적고 유물론은 가장 많다. '모순적'이지만, 사실이다!”7
인식 과정에 대한 변증법적 견해에서,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방법은─관조와 관념 속에 주어진 대상의 보편적 이론적 규정에서 그것의 점점 더 구체적이게 되는 규정으로의 상승으로서─경험적 사실을 개념 속에서 이론적으로 올바르게 변환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서, 그리고 레닌이 헤겔의 『논리의 학』 마지막 장에 관한 자신의 노트와 평가에서 취하는 관점이다.
번역: 노준엽 | 집행위원
2026년 6월 8일
-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1978, 233.을 참고하라.

- Dialectics of Nature, 1974, 138.

- Die Neue Zeit, 2 (43), 1910/1911: 578. [이탈릭체; E. I.]

- K. Renner, Die Wirtschaft als Gesamtprozess und die Sozialisierung, Berlin: Dietz Verlag, 1924, 5-6.

- Ibid., 5.

- V. I. Lenin, “Conspectus of Hegel’s Book ‘The Science of Logic’”, Collected Works, Vol. 38, 231.

- Ibid., 2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