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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계획 제3장 (4)」 『총명한 유물론』 제3집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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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 속에서의 통일, 1929-1933년
이미 확인한 바와 같이,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형태는 기계들과 공장의 특정 공정, 사무실의 특정 부서, 집단농장 노동의 일부분 등을 직접 전담하는 돌격대였다.
“돌격대란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생산계획을 완수하기로 결의한 노동자 집단을 의미한다. 돌격대의 구성원들은 업무의 수행에 있어 상호원조를 제공할 것을 서약하며, 노동규율과 제반 수칙을 엄격히 준수한다. 또한 이들은 원자재와 공구를 세심히 다루고, 생산의 합리화와 제품의 품질 향상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무를 지닌다. 사회주의 경쟁은 돌격대 내부의 개별 노동자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돌격대들 사이에서도 전개된다. 이러한 돌격노동의 가장 대중적인 형태는 약 10명 내외로 구성된 돌격대 집단이다.”1
1929년 4월에, 이미 트베르-모스크바-이바노보 협약의 사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업소들 사이에서 체결된 경제적, 정치적 협약이라는 새로운 국면이 시작됐다.
“이러한 협약들은 통상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무사항들을 포함하고 있다: 사회주의 경쟁 참가자들 스스로가 무단결근을 근절하는 것은 물론, 여타 노동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그러한 습관에 맞서 투쟁하는 것, 계획에 따라 생산량을 증대하고 개선하기 위해 노동시간을 온전히 활용하는 것, 부주의로 인한 낭비를 제거하는 것, 생산원가를 절감하는 것, 그리고 달성해야 할 구체적인 절감액을 명시함으로써 원자재의 낭비를 예방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2
약 2천 명의 노동자들이 이러한 연쇄돌격대3에 참가했으며, 이들의 활동에 힘입어 생산량은 경이로운 수준으로 상승했다.
로스토프 공장의 모범은 레닌그라드의 카를 마르크스 기계공장과 모스크바의 대규모 전기공장(에레크트로자보드), 미티시의 철도차량공장 등 수많은 기업소들로 확장됐다.4 대규모 공업기업소들에 적합했던 이러한 조직형태는 기술자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협력을 이끌어내는 데에 매우 유용한 것이라는 사실이 확증됐다. 1930년 5월에 또 다른 새로운 형태가 등장했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적 예인선 운동이었다. 사회적 예인선 운동은 선진적인 공장이 다른 낙후한 공장을 돕기 위해 나서는 방식인데, 마치 성과가 좋은 예인선이 좌초된 선박을 구원하러 나서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형태의 자발적인 노력은 자명하게도 산업기밀이 없거나, 시장에서 서로를 퇴출시키려 경쟁할 필요가 없는 체제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북캅카스의 아르툠 탄광에서 일하던 광부들로부터 시작됐다. 1914년에 자본주의적 경영 하에서 아르툠 탄광은 1,300톤의 일일생산량을 거뒀다. 1930년에, 탄광의 생산량은 2,300톤을 넘어섰다. 아르툠 탄광의 광부들은 이웃 “10월 혁명” 탄광이 정해진 양에 한참 못 미치는 생산량을 거두고, 1,200톤이 아니라 하루당 700-900톤을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자 “예인하기로” 결정했다. 예인돌격대는 4명의 돌격대원들과 2명의 기사, 갱도위원회 위원 1명, 갱도 관리자, 지역당위원회 서기, 두 곳의 지역신문 기자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뒤처진 탄광의 현황을 면밀히 조사하여 문제점을 찾아냈고, “10월 혁명” 탄광 경영진을 설득하여 자신들을 해당 탄광의 인력편제에 정식으로 편입시켰다. 예인돌격대는 매 교대근무가 끝날 때마다 기술진 및 관리진들과 짧은 회의를 강행하여 설비고장의 원인을 분석했고, 전체 노동자 회의에서는 더 나은 작업방식을 제안했다. 또한, 예인돌격대원 스스로가 실천적 모범을 보임으로써, 단 40일 만에 예인돌격대는 낙후됐던 탄광의 상황을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해당 탄광은 전체 할당량을 채우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수백 명의 소속 노동자들 스스로가 돌격대원으로 거듭나게 됐다.5
비슷한 방식들은 기업소와 기업소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같은 공장 안에서 작업장과 작업장 사이에서도 활용됐다. 유럽을 여행(우수한 실적에 대한 보상으로서)했던 ‘압하지야’의 돌격대원들이 오데사를 통해 소련으로 돌아왔을 때 이들은 뒤처진 오데사의 특정 작업반들을 돕기 위해 1명의 노동자로 구성된 돌격대를 조직했다.6
1930년대 여름에 이 운동은 공업 및 재무 호응계획의 등장을 통해 또 한 단계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것은 아마도 전체적인 발전의 도정에서 가장 의의깊은 사건이었을 것이다. 해당 공장이 속한 국영 트러스트나 상급 중앙기관이 모든 작업현장에 내려보내는 계획 초안에는 해당 연도 동안에 그 공장에 보장될 자재와 연료의 수량, 설비와 자금의 액수가 명시되어 있었다. 또한, 이 초안은 예상되는 노동생산성과 함께, 생산물의 수량과 품질, 가짓수와 가격 까지 규정하고 있었다. 호응계획의 목적은 모든 직장과 부서, 구획별로 이 계획 초안을 진지하게 토의에 부쳐서 수정, 보완하는 데에 있었다. 토의 과정에서 공급된 자금과 자재의 보다 합리적인 이용, 기계설비의 효율적인 가동, 그리고 더 높은 노동생산성을 담보하기 위한 방도들이 합의됐다. 이로써 상부에서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이 미처 내다보지 못했던 공장 내부의 숨은 예비가 아낌없이 발굴됐다. 노동자들 자신이 직접 낸 창의적인 제안의 원천은 바로 그들의 풍부한 현장 경험과 사회주의적 경쟁에서의 각의한 협약들을 통해 스스로 다진 맹세였다.
이 운동은 레닌그라드의 칼 맑스 기계제작소에서 시작됐다. 기계제작소의 가동 첫 해 동안에, 노동자들은 (예를 들어) 주조공장에서 11,000톤이 아니라 14,500톤을 생산할 수 있으며, 제1 기계작업장은 경영진이 계획했던 월 150대를 넘어서서, 월 200대의 정경기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모스크바 전기공장의 노동자들은 호응계획을 통해 점화플러그와 전구로부터 거대한 터빈설비들에 이르기까지 온갖 생산물들을 포괄하는 1931년도 계획 초안의 총생산액을 기존의 약 1억 3,600만 루블에서 1억 7,800만 루블로 높여 잡았다. 이것은 여러 작업장들에서 며칠 동안 정규 노동시간이 끝난 뒤 진행된 대중토의(필자 역시 초대를 받아 직접 참관하는 영광을 누렸던 회의들)를 통해 이루어졌다. 더욱이, 이 공장에서는 그해 12월 초에 이미 계획을 완수했는데, 이는 1931년 한 해를 통틀어 호응계획마저도 초과달성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거대한 드네프르 댐의 건설 과정에서 당초의 계획은 콘크리트 42만 7천 입방미터를 타설하는 것이었지만 노동자들은 50만 입방미터를 타설하는 호응계획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호응계획의 완수 과정을 확인한 결과, 원래 42만 7천 입방미터가 할당됐던 바로 그 시간에 실제로 타설된 콘크리트는 51만 8천 입방미터에 달했다.
우랄-쿠즈바스 철강제작소의 호응계획은 각 부문의 수천 명의 노동자들에 의해 토론에 부쳐졌다. 우랄 지역 노동조합평의회가 “발행”한 노동자 제안 “대출”에 응답하여, 5,000건 이상의 합리화 제안들이 접수됐고, 그 중 일부는 100만 루블 이상의 절약효과를 가져다주었다.7 호응계획은 또한 집단농장으로도 확대되어, 경작지 면적의 확대, 수확량의 증대, 그리고 농기계의 효율적인 활용으로 이어졌다.
1931년 4월 국가계획위원회 총회에서 V.V. 쿠이비셰프 의장은 호응계획이 최근 몇 달 동안 강력한 운동으로 자리잡았으며, 이는 “계획의 완수와 초과달성, 극도의 절약, 그리고 산업 내부 자원의 전면적인 동원을 위한 노동계급의 투쟁의 가장 진정한 형태 중 하나”를 보여준다고 언급했다. “1930년과 1931년에 공장들에서 산업 및 재무 호응계획 작성의 경험은 노동계급의 가장 높은 수준의 정치적, 경제적 성숙도를 보여주었다. 연간, 분기별 계획의 수립 과정에서 광범위한 대중의 참여는 이 기간에 진정한 계획사업의 독보적인 본보기를 보여주었는데, 이 중 몇 가지 사례들은 트러스트들과 국가계획기구 내 계획부서들의 사업과 비교해도 결코 질적으로 뒤처지지 않았다.”8
호응계획으로부터 도출된 자연스러운 발전의 결과로, 이번에도 레닌그라드에서 독립채산제 돌격대(cost-accounting brigade)가 등장했다. 이 조직의 목표는 그 이름이 암시하듯 각 구성원의 작업에 이른바 “루블에 의한 통제”라는 방식을 적용함으로써 생산물의 질을 제고하는 데에 있었다. 통상적으로, 이 조직은 단일교대근무의 틀 안에서 구성됐다. 독립채산제 돌격대와 작업장 혹은 공장 경영진 사이에 체결된 협약은 일종의 변형된 호응계획이었으며, 이를 통해 돌격대는 작업장 책임자가 부여한 “주문”을 완수하고, 초과달성할 것을 약속했다. 이 “주문”에는 협약기간(하루에서 한 달 사이) 동안 필요한 자재의 수량과 비용, 공급시기와 방법, 원자재, 설비, 반제품, 공구 등의 소모기준, 시급제에 기반한 임금기금, 생산물의 수량과 품질, 그리고 무단결근 및 불량품 발생 허용치 등이 모두 정확한 수치로 명시됐으며, 노동자들은 이에 따른 의무를 짊어졌다.
1932년 제9차 노동조합 대회에서 당시 소련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장을 맡았던 N. M. 슈베르니크는 독립채산제 돌격대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독립채산제 돌격대는 사회주의적 경쟁의 기본적인 형태이자, 개별 기업의 노동을 조직할 수 있는 가장 완성된 형태이다. ⋯ 독립채산제 돌격대는 노동자가 생산과정에 마땅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전적으로 보장하며,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에게 인민경제를 통제하는 법을 가르치는 문제를 해결해준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1931년 2월 초만 해도 소련 전역에 130명의 노동자들로 구성된 10개의 돌격대만이 존재했으나, 1932년 4월 1일에 이르러 그 수는 155,000개로 급증했으며 구성원 또한 약 150만 명에 달했다. 이 운동이 처음 시작된 레닌그라드에서는 노동자들의 70%가 독립채산제 돌격대원이었으며, 모스크바에는 40만 명의 대원들을 보유한 3만 개의 돌격대가, 우크라이나에는 30만 명의 대원들을 보유한 25,000개의 돌격대가 있었다.9
이 무렵 사회주의 경쟁운동은 전체적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1931년 말에 약 275만 명이었던 돌격대원들의 숫자는 1932년 말에 이르러 400만 명으로 증가했다.10 1931년 4/4분기만 해도 노동조합은 공장들에서 250만 명 이상이 참여한 82,532회의 생산회의를 조직했다. 1930년 한 해 동안 노동자들은 273,000건의 합리화 제안을 내놓았고, 그 중 약 절반에 다소 못 미치는 제안들이 실제로 채택 밀 실현됨으로써 4,100만 루블을 넘는 절약효과를 거두었다. 1931년에 노동자들은 542,000건의 합리화 제안을 내놓았고, 그의 3분의 1만이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억 4,300만 루블 이상의 비용절감효과를 거두었다.11 노동의 과정뿐만 아니라, 노동에 관한 계획을 수립하는 데에 있어서 인민들의 지적 협력을 이끌어내는 사회주의 경쟁의 지대한 중요성에 관해 언급되고 기록된 모든 것은 이제 현실로 증명되고 있었다.
경쟁운동은 농민들에게까지 확대됐다. 1929년, 이바노보의 한 직물공장은 코스트로마(Kostroma) 주의 셀초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당시 이 마을의 윤작과 목초의 적절한 활용 상태는 엉망이었다. 이에 공장의 일을 돕기 위해 도시로 자주 나갔던 젊은 농부들이 마을 회의를 설득하여, 해당 직물공장에 다음과 같은 도전장을 내밀게 됐다:
“우리 셀초 마을의 농민들은 귀측에 경쟁을 제의한다. 우리는 농학자의 도움을 받아 수확량을 늘리고 더욱 합리적인 방식으로 농사를 지을 것을 약속한다. 그 대가로 우리는 귀측이 더 좋은 품질의 옥양목을 더 저렴한 가격에 생산해줄 것을 요청한다.”
해당 서신은 1929년 4월 13일 공장 회의에서 낭독됐으며, 현장에 상당한 놀라움을 자아냈다. 농촌 마을과 어떻게 경쟁을 조직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해당 공장이 연간계획상 49만 5천 루블을 절약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절반조차 절약하지 못했다는 점이 지적됐다. 이에 회의에서는 마을로 가서 계약을 체결할 세 명의 노동자들을 선출했으며, 협약은 절차에 따라 정식으로 체결됐다. 공장측은 생산성을 11% 높이고, 불량률(bad work)을 8%에서 4%로 줄이며, 폐기물을 최소 절반 가량 줄이고, 모든 고의적인 무단결근을 근절하며, 모든 직조기의 생산량을 기록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생산원가를 7% 절감할 것을 약속했다. 반면, 농민들은 아마의 파종을 위해 국가와의 계약면적을 기존 43에이커에서 72에이커로 늘리기로 약속했는데, 여기에는 집단으로 경작할 12에이커의 토지가 포함됐다. 또한, 이들은 집단경작지에서 발생한 수익으로 농기구를 구입하고, 더 나은 농법을 통해 수확량을 7% 증대시키기로 약속했다.12
이러한 종류의 경쟁의 다른 예시는 웹 부부의 “소비에트 공산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소비에트 공산주의” 제2권, 738쪽)
1930년 전연방공산당 제16차 대회 정치보고에서 스탈린은 사회주의 경쟁의 새로운 국면의 정치적, 경제적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13
“우리의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실 중 하나가─가장 중요한 사실은 아닐지라도─현재로서는 공장과 제작소들의 사회주의 경쟁, 경쟁을 통해 거둔 성과에 대한 수십만 노동자들의 상호점검, 그리고 돌격대 운동의 광범위한 전개라는 점은 이제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중의 심리와 노동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있어 거대한 혁명이 일어났으며, 이것이 우리 공장과 제작소의 면모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은 오직 맹목적인 자들만이 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과거만 해도, 우리 내부에서는 돌격대 운동의 ‘인위성’과 ‘실행불가능성’을 떠드는 목소리들이 들려오곤 했다. 오늘날 이러한 ‘현자’들은 더 이상 조소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며, 그저 시대에 뒤떨어진 ‘노회한 자’들로 취급받을 뿐이다. 오늘날 경쟁과 돌격대 운동의 대업은 이미 승리했으며 공고해진 대업이다. ⋯ 사회주의 경쟁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노동에 대한 인간의 관점에 근본적인 혁명을 일으켰다는 점에 있다. 노동을 과거에 취급되었던 방식인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짐으로부터 명예의 문제, 영광의 문제, 용기와 영웅주의의 문제로 변모시켰기 때문이다. ⋯ 이미 세 차례의 혁명을 거쳐온 우리의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의 토양에 거름을 주기 위해 노동강도의 강화와 대중적 돌격대 운동을 수용할 것이라 생각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의 노동계급은 자본주의를 위해 노동강도의 강화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완전히 매장하고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이를 수용했다.”
제1장에서 고찰한 제1차 5개년 계획의 결과는, 무엇보다도 소련 지도자들에 의해 사회주의 경쟁 운동이 거둔 지고의 승리로 간주되었다. 그 척도가 된 것은 단순히 양적인 결과─1934년 전연방공산당 제17차 대회에서 몰로토프가 제시한 최종수치에 따르면 공업부문 계획의 96.4% 달성─뿐만 아니라, 노동생산성의 향상이었다. 1932년 말까지 노동생산성은 41% 이상 증가했다.14 물론, 원래 계획은 (1933년 말까지) 110%라는 훨씬 더 큰 폭의 증가를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농촌으로부터 막대한 수의 노동자가 유입되면서(공업부문의 인력은 약 1,100만 명에서 2,200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이는 계획치보다 50% 이상 초과한 수치였다), 공장들은 5개년 계획 시작 전 소련 공업을 1913년 수준으로 회복시켰던 선진적인 노동자들보다 정치적 발전수준이 낮은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로 채워지게 됐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토록 큰 폭의 전반적인 생산성 향상을 이룩한 것은 실질적인 성공이었다. 더욱이, 이 측면에서의 계획 미달은 스탈린이 훗날 지적했듯이, 이 새로운 노동력이 초창기부터 가장 현대적인 기계들을 다룰 수 있도록 훈련받았다는 사실에 의해 상쇄됐다. 그리고 이는 차기 5개년 계획에서 커다란 가치를 발휘하게 될 것이었다.
1933년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에서 제1차 5개년 계획 결과를 보고하며 스탈린은 1933년 1월에 사회주의 경쟁과 돌격대 작업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노동자들과 기술자, 집단농장 농민들의 “활동과 자기헌신, 열정, 주도성”이 없이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15
제2차 5개년 계획의 완수 과정에서 사회주의 경쟁에 참여한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 앞에는 훨씬 더 넓은 지평이 열렸으며, 그 결과는 지난 4년보다 훨씬 더 중대했다. 우선, 호응계획과 독립채산제 돌격대라는 개념은 이전처럼 단계적으로 도달한 결과물이 아니라, 새로운 5개년 계획의 수립을 논의하는 단계에서부터 이미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 결과는 이미 1933년부터 가시화됐는데, 바로 '아래로부터의 호응계획' 방식을 통해 수립된 기술·산업·재무계획운동이 출현한 것이었다. 몰로토프는 앞서 언급한 1934년 당 대회 보고에서, 레닌그라드의 여러 공장에서 시작된 이 운동을 가리켜 '모범으로 삼을 만한' 운동이라고 평가했다."16
“경제기관원 및 기술직 종사자뿐만 아니라 공장의 모든 노동자가 참여하여 각 부서와 공정, 그리고 개별 기계의 기술적 역량과 생산능력을 검증하고, 이를 통해 해당 공장의 생산자원을 발굴하는 데 능동적으로 기여하며 수립되는 기술·산업·재무계획은, 우리의 발전속도를 앞당기기 위한 가장 훌륭한 사회주의적 투쟁의 형태 중 하나이다. 이러한 “기술·산업·재무계획”의 구상은 “대충대충” 처리하던 과거의 경제관리관습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이 계획은 자신의 공장에 대한 모든 노동자의 책임감을 고취시키며, 바로 그 지점에 우리의 위대한 힘이 존재한다.”
이러한 계획의 수립은 진정 노동자들이 생산의 경제적·노동적 측면뿐만 아니라 기술적 측면까지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이는 앞선 과정을 통해 배출된, 현대적 기계에 어느 정도 익숙한 거대한 노동자 부대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과정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다루는 기계와 기술적 공정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더 깊은 지식을 습득하도록 고취했다. 공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갖게 하는 이러한 자극이 없었더라면, 그와 같은 발전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첫 번째 모범 중 하나는 레닌그라드의 “스베틀라나” 공장이었다. 2,0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기술진과 공동으로 기술·산업·재무계획을 수립하는 데에 참가했다. 이 작업에는 각 기계설비마다 ‘기술등록부’를 작성하는 사업, 즉 해당 공작기계의 모든 생산예비뿐만 아니라 그 고유한 특성들을 전면적으로 대조하고 확인하는 작업이 포함되었다. 이와 함께, 낡은 기계를 보다 현대적인 자동공작기계로 교체하는 계획을 세우고, 공장의 모든 제품의 제조공정단계들을 더욱 정밀하게 확정하며, 공장 부지·전력·석탄자원, 그리고 공장내부운송체계의 이용율을 극대화하기 위한 조사사업도 병행됐다. 또한, 제품의 품질기준을 더 높이 설정하고, 수입자재를 국산자재로 대체하기 위한 대책들이 제기됐으며, 노동력 편성 및 관리방식을 더울 합리적으로 조직하였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호응계획을 통해 상부에서 내려온 초안과 비교하여 1,141명의 인력을 절감했으며, 노동생산성을 계획보다 30% 더 높이 끌어올렸다. 또한 원가를 요구치보다 거의 10%나 추가로 절감했고, 공장의 수입자재수요를 125만 루블에서 63,000루블로 대폭 감소시켰다. 이 모범은 소련 전역으로 널리 확산됐으며, 소련 공산당(CPSU)의 탁월한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키로프(Kirov)는 이 운동을 가리켜 '진정한 사회주의적 노동조직의 표본이자, 사회주의의 참다운 면모'라고 높이 평가했다.17 특히 그는 이 운동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사이의 차이를 소멸한다’는 측면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고 선언했는데, 그 이유는 노동자가 생산계획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때 비로소 자신이 다루는 기계와 작업반, 더 나아가 공장 전체를 창조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하는 진정한 주인으로 격상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33년 말 약 사회주의 경쟁에 참여하는 노동자, 사무원 2,300만 명 중 4분의 3이 사회주의 경쟁에 참가했고, 공업에서 돌격대원들의 숫자는 400만 명을 넘어섰다. 노동자들의 3분의 1은 “독립채산제 돌격대”의 구성원들이었다.18
번역: 김의진 | 사무위원
2026년 7월 5일
- A. Aluf, Development of Socialist Methods and Forms of Labour, Moskva: Cooperative Publishing Society of Foreign Workers in the U.S.S.R., 1932, 14.

- Ibid., 15-6.

- 제1차 5개년 계획 당시, 특정 공정의 돌격대만 잘해서는 전체적인 생산성을 높일 수 없다는 한계가 드러났다. 이에 따라 원자재 공급부터 최종조립까지, 즉 생산의 전 과정에 관여하는 여러 돌격대들이 수직적으로 결합하여 협약을 맺었는데, 이를 가리켜서 “연쇄돌격대”라고 불렸다. 일반적인 돌격대는 약 10명 내외의 소규모 집단인데, “약 2,000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했다는 것은 여러 개가 사슬처럼 연결된 거대한 집단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Ibid., 27-9.; Trade Unions of the U.S.S.R. and their Role in Building Socialism, 1930, 13.

- Development of Socialist Methods and Forms of Labour, 1932, 31-3.

- V. S. Bogushevsky, Socialist Industry in the U.S.S.R. Victorious, Moskva: Cooperative Publishing Society of Foreign Workers in the U.S.S.R., 1931. 22.

- Development of Socialist Methods and Forms of Labour, 1932, 34-7.; Ninth Congress of Trade Unions[Deviatyi Vsesoiuznyi S'ezd Professional'nykh Soiuzov SSSR, Stenog, Otchet], Moskva, 1933, 39-43.

- V. Kuibyshev, Stati i Rechi, Vol. 5, 97.

- Ninth Congress of Trade Unions, 1933, 31.

- Ibid., 145.

- Ibid., 44.

- Socialist Competition of the Masses, 1932, 41-3.

- J. V. Stalin, XVI Party Congress, 1930, 99-100, 152.

- Tasks of the Second Five Tear Plan, 1934, 21, 118.

- Leninism, 1944, 439.

- Tasks of the Second Five Tear Plan, 1934, 47-8.

- Sotsialistickeskoe Planirovanie Narodnogo Khoziaistva SSSR, 1946, 94-5.

- A. K. Abolin, October Resolution and the Trade Unions, Moskva: Co-operative Publishing Society of Foreign Workers in the U.S.S.R., 1933, 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