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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흐주의·아베나리우스주의의 변종들에 대하여: 제1장

한동백 | 집행위원


1. 마흐주의·아베나리우스주의란 무엇인가?


주관적 관념론에 대한 유물론적 비판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체계적으로 제시되었다. 레닌은 이 저술에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주관적 관념론의 필수적 구성물인 ‘소여된 표상에 대한 절대화’의 잡다한 형태를 다루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은 세계 요소(Weltelemente)와 원리적 동격(Prinzipialkoordination)이다.

두 개념은 각각 E. 마흐와 R. 아베나리우스주의가 전개한 철학의 중심 개념으로 기능하였다. 레닌은 두 개념을 중심으로 연관된 내용을 파악해 가면서 두 이데올로그의 세계사적 본질을 폭로하였다. 그는 로씨야 내 혁명운동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마흐주의와 아베나리우스주의를 절충하려는 시도,대표적으로 A. 보그다노프의 경험일원론을 체계적으로 비판하였다.

우리가 이와 같은, 과거 레닌의 행적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역사적으로도 확인되는 바와 같이)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혁명 실천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 요소와 원리적 동격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각각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α. 세계 요소


세계 요소에 대해 마흐는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설명하였다:

“감각은 ‘사물의 상징’이 아니다. 오히려 ‘사물’이야말로 상대적 안정성을 가지고 있는 감각 복합을 나타내는 사유상징(Gedankensymbol)이다. 사물(물체)이 아니라 색, 음, 압력, 공간, 시간(우리가 보통 감각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세계의 본래적 요소(Element)이다.”1

감각은 외적 객관대상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사물이야말로 감각적 의식의 복합체로서 ‘사유상징’이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감각 복합체 또는 감각 단위색, 음, 압력, 공간, 시간가 바로 요소이다. 이러한 요소에 의해 ‘실재’가 ‘구성’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만일 물체가 마흐가 말하는 것처럼 ‘감각의 복합’(Empfindungskomplexe)이거나 버클리가 말한 것처럼 ‘감각의 결합’이라고 한다면, 이로부터는 불가피하게 세계 전체가 나의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2이 도출된다.

마흐는 또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세계는 우리의 감각으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옳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오직 우리의 감각에 관해서만 알 뿐이고, 감각이 거기에서 나온다고 하는 저 핵심이나 핵심들 간의 상호작용을 가정하는 것은 전연 쓸데없는 공연한 일이 된다. 그런 견해를 좋아할 수 있는 것은 어중간한 실재론이나 어중간한 비판론뿐이다.”3

마흐는 과거 잉글랜드의 신학자 버클리의 유아론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마흐의 주장은 참으로 자기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그가 “쓸데없는 공연한 일”이라고 간주한 것이 정말 쓸데없고 공연하다면, 그의 언표하는 것을 읽어내는, 해석해내는 독자의 ‘지식’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그는 이러한 상황을 전제하고 자신의 견해를 내보이는 것인가? 그의 주장을 세계를 바라보는 ‘전제’로 삼는다면,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도 쓸데없는 공연한 일"4이 될 뿐이며, 종국에는 “자아만이 존재하고 다른 모든 사람은 외부 세계와 마찬가지로 쓸데없는 ‘핵심’의 범주’”4에 속하게 된다. 레닌은 마흐 체계의 이러한 근본적인 모순을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폭로한다:

“우리의 감각은 일반적으로는 유기체 내에서, 특수적으로는 우리의 뇌수 내에서 진행되는 일정한 과정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마흐는 지극히 명확하게 이것을 ‘가정’하고 있다자연과학의 입장에 서 있으면서 이것을 가정하지 않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실례지만 이것이야말로 우리 철학자가 쓸데없는 공연한 일이라고 선언한 바로 그 "핵심과 핵심 간 상호작용"의 ‘가정’이 아닌가! 물체는 감각의 복합이라고들 말한다. 그리고 이 이상으로 더 나아가서 감각을 우리의 감각 기관에 물체가 작용한 결과라고 간주하는 것은 형이상학이니 쓸데없는 공연한 가정이니 뭐니 하고 마흐는 우리에게 확언한다. 전적으로 버클리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뇌수는 물체이다. 따라서 뇌수도 또한 각각의 복합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감각의 복합의 도움을 빌어 나(그런데 나라는 것이 또한 감각의 복합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는 감각의 복합을 감각하는 셈이 된다.”6

그리하여 마흐는 이 소여된 감각, 감각 소여, 즉 요소를 세계의 최종적인 ‘구성물’로 간주한다. 그러나 마흐는 또한 “이 과제["유기적 세계에서 감각이 도달하는 범위"; 레닌]가 단 하나의 특수한 경우에라도 해결되지 않는 한 이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7고 언급한다.

이는 오늘날 현대 주관적 관념론을 대표하는 분석철학 가지각색의 아류가 저지르는 자기모순과 무엇이 다른가? 이 학파의 주된 학설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것, 소여된 감각의 보여주는 표상, 또는 그러한 표상의 형식조차 결함한 ‘어떠한 심상’만을 다룰 수 있으며, 그것의 근원에는 접근할 수 없다. 즉, 우리는 이러한 ‘경험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신경생리학적으로 타당하다! 또한 그것은 앞으로의 신경학적인 연구에서 지속적으로 밝혀져야 할 문제이다! 도대체 이 두 가지 언표된 사실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인가? 개별적 경험이 불러오는 협소함에서 우리가 절대 벗어날 수 없음은, 우리가 인식으로써 유기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객관세계, 객관대상의 영역으로 접근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토대 위에서, ‘접근의 불가능성’이 엄연히 객관대상의 세계의 영역에 속하는 신경생리학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신경생리학은 객관대상에 속하지 않는 영역을 다룬다는 것인가? 만약에 정말로 그렇다면 신경생리학은 ‘소여된 감각’, ‘요소’의 결합물로 된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면 그러한 요소를 통해 ‘요소의 복합체’를 설명하는, 즉 그 논리적 당위를 정초하는 객관성·사실성은 도대체 어떻게 보장되는가? 그것은 어떻게 하여 타당한 방식으로 정립될 수 있는 것인가? 주관적 관념론자들이 이러한 질문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자기 논리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주관적 관념론자들은 이러한 악순환에 조금의 관심도 없으며, 이미 정해진 유아론적 견해를 반복할 뿐이다. 그래서 마흐는 또한 이렇게 언급하는 것이다:

“온갖 물리적 체험을 감각 즉 심리적 요소로써 건축[aufzubauen]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으나, 현재 물리학에서 사용되고 있는 요소, 즉 질량과 운동(이 특수과학에만 쓸모 있는 경직성[Starrheit]을 갖고 있는)으로써 어떤 심리적 체험을 표현[darstellen]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다.”8

“온갖 물리적 체험을 감각 즉 심리적 요소”를 통해 “건축”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는 ‘건축’이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객관적 현상을 당장에 우리의 주관 속에서 주관적 범주로 단순화하거나, 그것에 대한 해석의 심리적 대상으로서 설정할 수는 있다. 이는 가능하다. 비록 그것이 어떠한 그릇된 견해를 가능하게 하는 주관적 범주를 구성하든, 그것이 아니든, 무관하게 말이다. 즉 이러한 의미에서의 건축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순전히 말로 하는 건축이며 신앙주의의 밀수입에 사용되는 공허한 스콜라학"9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객관적 현상, 즉 외부 객관적 실재의 반영 결과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관적 범주의 구성이 곧 물리적 체험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 체험은 객관세계의 영역에서 과정의 총체로서 운동하는 객관적 실재와 직접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객관적 실재의 연관을 주관적 범주로는 ‘만들어낼’ 수 없다. 만약에 후자를 통해 물리적 대상을 언급된 주관적 범주와 직접적으로 동일시한다면, 그것은 동화에서나 나오는 요술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마흐의 전반적 주장의 맥락 속에서 위의 주장을 해석한다면, 그는 후자를 긍정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의 현대 주관적 관념론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는 필수 요소로 등장한다.


β. 원리적 동격


원리적 동격은 객관의 총체가 주관과 항시 결합해 있음을 뜻하는, 아베나리우스주의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이다. 레닌은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학설의 본질은 "자아[des Ich]와 환경과의 불가분적[unufloesliche] 동격[즉 상호 관계적 연계]"(146쪽)이라는 명제에 있다.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자아’와 ‘비아’(非我, Nicht-Ich)라고 할 수 있다"고 아베나리우스는 거기에서 말한다. 전자와 후자, 즉 우리의 자아와 환경은 "항상 함께 발견되는 것"[immer ein Zusammen-Vorgefundenes]이다. "우리에 의해 발견되는 것[des Vorgefundenen]을 아무리 충분하게 기술하더라도 그 기술이 ‘환경’을 포함하는 것은, 그 환경을 자기의 환경으로 하는 어떤 자아 없이는[ohne ein Ich], 적어도 이 발견되는 것[das Vorgefundene]을 기술하는 자아 없이는 불가능하다"(146쪽). 이 경우에 자아는 동격의 중심항이라고 불리우며 환경은 대우항[對偶項, Gegenglied]이라고 불리운다(『인간의 세계 개념』, 제2판, 1905년, 83~84쪽, 148절 이하 참조).”10

객관 총체, 객관적 사물 세계, 객관대상 세계의 총체가 주관과 항시 결합해 있음은 곧 인식주관이 형성되기 전의 객관은 존재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론의 이러한 핵심적 내용에 따라 아베나리우스는, 운동이란 "감각을 일으킨다는 명제는 단지 겉보기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을 따름"11이라고 강변한다. 그는 감각의 형성 이전의 객관대상을 논하는 역시 감각적 의식에 따라 행해지므로, "어떠한 경험도 그것을 증명해 주지 않으며 또 어떠한 경험도 그것을 증명할 없다"4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의 견해에 따르면, "오히려 실체가 절대적으로 감각 없는 상태에 있다가 이후에 감각하게 된다는 것은 가설"4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구체적으로, "만일 우리가 관념적 관찰에 의하여 운동하는 실체 A에서 시작해서 일련의 중간 매체를 거쳐서 감각이 부여된 실체 B에 도달하는 운동을 과정을 걸쳐 추적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껏해야 도달된 운동의 접수와 동시에 감각이 실체 B 속에 발전 또는 발양한다는 것을 발견할 따름"14이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론이란 다음과 같다:

“이제야 당신은 자신을 뛰어넘으려고 하지 말며, 어떤 것을 당신이 파악[또는 포착]할 수 있는 방식과는 달리 파악하려 하지 말고, 의식이자 사물(Bewusstsein un Ding), 사물이자 의식으로서 파악하도록 하십시오. 또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양자 중의 어느 하나로서 파악하려 하지 말고, 나중에 가서야 비로소 양자로 분해되는 것, 즉 절대적으로 주관적-객관적이며 또 객관적-주관적인 것으로 파악하도록 하시오.”15

아베나리우스, 그리고 마흐 모두 스스로의 주장을 소박실재론에 대한 옹호라고 간주하였지만, 이는 “극히 값싼 궤변”16이다. 왜냐하면, 소박실재론에 들어서기 위한 첫 번째 전제는 주관의 외부에 자리 잡은 객관적 실재의 존재성을 승인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박실재론은 여기서 인간의 감각과 외부 실재의 객관이 서로 직접적으로 연장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감각을 외부 객관적 실재와 곧장 동일시한다. 소박실재론은 근대 초기 유물론의 경향으로서 매우 혼란한 (유물론적) 감각주의를 대표한다. 그러나 아베나리우스의 경우는 ‘제3의 기본 규정’실은 의식의 특정한 형태 규정성을 설정함으로써 객관과 주관 사이에 무한한 균열을 내놓은 다음, 주관에 결합하지 않은 객관은 없으므로, 모든 객관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주관적-객관적이며 또 객관적-주관적인 것으로 파악”할 것을 종용한다. 주관적 관념론자들에게 있어 감각은 외부의 실재와 완벽히 차단된 의식의 한 형태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마흐의 견해 또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원리적 동격에 대한 비판은 레닌이 인용한 N. 스미스의 비판에서 가장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아베나리우스의 논의 전체를 통하여 ‘경험’이라는 용어의 애매함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된다. 이 용어는 때로는 경험하는 행위를 의미하며 때로는 경험된 것을 의미한다. 후자의 의미는 자아의 본성이 문제될 때 강조된다. 경험이라는 용어의 이 두 가지 의미는 실제로는 절대적 입장과 상대적 입장 사이의 그의 중요한 구분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 두 관점은 그의 철학에서 진실로 융화되어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아베나리우스; 인용자]가 경험은 사고 속에서 관념적으로 보완된다[환경에 관한 온전한 기술(記述)은 관찰하는 자아라는 사고에 의하여 관념적으로 보완된다는 것; 레닌]는 요구를 정당한 것으로 허용할 때, 그는 자아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자신의 주장과 성공적으로 결합시킬 수 없는 승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어진 실체의 관념적 보완은, 물체를 우리의 감각이 파악할 수 없는 요소[자연과학에 의해 발견된 물질적 요소, 즉 원자, 저자 등을 말하는 것이지, 마흐나 아베나리우스에 의해 날조된 허구적 요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레닌]로 분해하거나 인간이 지구상에 한 사람도 생존하고 있지 않던 시기로까지 지구를 추적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인데,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경험의 보완이 아니라 경험되는 것의 보완이다. 그것은 오직 아베나리우스가 불가분적이라고 주장한 저 두 항[동격항; 레닌] 중 하나만을 보완할 따름이다.”17

원리적 동격은 그 동격이 ‘실질적인 논리’로 작동함에서, 대우항, 즉 외부 객관대상의 존재성을 전제해야만 한다. 만약 이러한 전제가 없다면 애당초 동격이라는 말은 있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도저히 ‘동격’이 되어야 하는 주체를 상정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 존재하기도 전, 지구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지구과학에 의해 숱하게 입증되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서 동격의 ‘중심항’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아베나리우스는 자기주장과 자연과학 간의 적대를 ‘극복’하기 위해 ‘잠재적 중심항’을 새로이 설정한다. 즉 인간이 존재하기도 전의 지구에서 ‘중심항’은 ‘0’이 아니라 가능성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 ‘중심항’은 가능적 중심항, 즉 ‘잠재적 중심항’으로서 존재한다! 우리는 어떠한 사태에 대해 온갖 형식적 가능성을 들먹이며 환상적인 논의를 ‘재개’할 수 있다. 아베나리우스의 시도도 바로 이러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허구의 가능성을 창출하여 그것을 실제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끌고 올 수 있다면, 실은 그보다 더한 환상적인 견해가 진지한 것으로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γ. 경험일원론


자신의 저서 『경험일원론』을 통하여 세계 요소와 원리적 동격을 마르크스주의 유물론과 절충하고자 하였던 보그다노프는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의 동격을 주장하여 감각하는 것이 곧 대상 실재라는 주관주의를 전개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신체 내의 ‘빨간색’과 그 신체들의 지각 내의 ‘빨간색 감각’은 경험의 동일한 요소이며, 우리가 단지 둘을 다르게 지정할 뿐이다. 신체는 우리가 ‘지각’할 때 ‘감각’이라고 부르는 요소들의 복합체이다. 이 명제는 너무나 중요해서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18 그는 객관적 대상과 심리적인 것인 감각을 체계적으로 구분하는 시도를 ‘이원론’이라 하였는데, 이러한 ‘비판’은 칸트조차 면할 수 없었다. 결국 ‘경험일원론’이란, 경험, 감각이 곧 외부 실재와 동격이라는 견해일 뿐이다.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당대 주관적 관념론자들의 주장과 보그다노프의 견해를 비교하여, 그가 제출한 경험일원론이 신칸트주의자들의 견해와 하등 차이가 없음을 입증하였다. 특징적으로, 보그다노프의 견해‘대체설’이 물리적 자연 자체도 직접적 성격을 띤 심리적 복합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라는 사상19, 즉 당대 흔히 제출되었던 가지각색의 신칸트주의 아류와 본질적 차이가 없었던 것임이 그의 저서 『경험일원론』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레닌이 언급한 그대로 보그다노프의 방식은, 관념론 철학자들이 자연·물질의 앞서 존재하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 추상적 관념을 “(더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직접적 복합”, 증명을 요하지 않는 직접적 소여로서의 “심리적인 것”에 더 가까운 것”20으로 만들고자 하였던 오래된 방식이었다.

이렇게 레닌이 ‘경험일원론’의 본질을 폭로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 등장한다. 바로 논리학에서 객관적 범주와 주관적 범주의 구분을 정식화하는 레닌의 논리학적 테제가 그것이다. 이에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자본주의적 세계 경제의 모든 분지(分枝)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모든 변화의 총화는 70명의 마르크스라 할지라도 다 포착할 수 없을 것이다. 성취될 수 있었던 최고의 것은 그러한 변화의 법칙이 발견되었다는 것, 그러한 변화 및 그 역사적 발전의 객관적 논리가 주요하고 기본적인 특징 면에서 중시되었다는 것이다.여기에서 객관적이라 함은 의식 있는 존재들, 즉 사람들의 사회가 의식 있는 존재의 생존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보그다노프가 자기의 "이론"으로써 역설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하찮은 소리뿐이다) 사회적 존재는 사람들의 사회적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의미이다. 여러분이 생활하며 경영하며 어린애를 낳으며 생산물을 만들고 교환한다는 것으로부터 객관적-필연적인 사건 연쇄가 발생한다. 이 발전의 연쇄는 여러분의 사회적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며, 그것에 의해서는 결코 남김없이 포착될 수 없다. 인류의 최고 임무는 경제적 진화(사회적 존재의 진화)의 객관적 논리를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특징 면에서 포착하여 인류의 사회적 의식과 모든 자본주의 국가의 선진 계급의 의식을 될 수 있는 대로 판연하여, 명백하게, 비판적으로 그 논리에 적응시키는 것이다.”21

논리학에서 범주는 크게 객관적 범주와 주관적 범주가 존재하며, 객관적 범주란 대상 사물의 규정되어 있는 존재 양식을 구성하는 객관적 요소이다. 반면 주관적 범주란 그것을 반영하여 형성된 범주이다. 우리는 “객관적 논리를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특징 면에서 포착”함을 통해 대상에 관한 주관 논리적 범주의 구체화를 실현한다. 구체화 과정에는 매개 사회적 실천, 즉 과학적 실천이 필수적인 것으로 된다. 결국에는 주관 논리학은 객관적 논리의 반영이며, 또 그것의 과학적 타당성 역시 객관적 논리의 전개 양상을 그것이 얼마나 옳게 반영하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인 범주의 총체, 즉 마르크스가 언급하였던 “수많은 규정의 집약(Zusammenfassung), 다양한 것의 통일”22은 개별적으로 전개되는 대상 사물 양식의 총체이자 구체적인 것이다. 이 총체는 객관적 논리학을 구성하며 모든 개별적 응용논리학의 존재 근거이다; 이 구체적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연관의 일정한 영역을 사상함으로써 형성된 모든 개념·판단·추론은 주관적 범주를 구성한다. 주관 논리학은 이러한 범주의 연관 방식을 다룬다; 구체적인 것의 재현으로서의 주관적 범주, 즉 객관적인 개념의 인식으로서 사유 내용은 “사유가 구체적인 것을 점취(占取)하고, 이를 정신적인 것으로서의 구체적인 것(ein geistig Konkretes)으로 재생산”23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 범주이며, 그것은 “결코 구체적인 것[객관적 범주의 총체: 인용자]의 발생 과정 자체(der Entstehungsprozeß des Konkreten selbst)는 아니다.”23 즉 존재와 사유는 동격이 아니다.

인식론과 논리학의 영역에서 감각주의자들은 주관적 범주를 소박실재론의 방식으로써 객관적 범주와 동격으로 놓는다. 그리고 이보다 더 관념론적으로 퇴화한 견해는 객관적 범주를 영원한 불가지의 영역으로 놓고 오로지 주관적 범주만을 사유 대상으로 놓을 수 있다고 본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이와 본질적으로는 같지만, 현상하는 것에 있어 훨씬 반동적인 견해란, 전통적인 의미에서 객관적 범주, 즉 과거 ‘전통적 철학에서 계승되어 온 객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객관이란 주관적 범주가 형성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첫 번째의 견해는 의식이 감각적인 것, 질료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있으며, 주관적 범주란 그러한 감각적인 것과 직접적으로 연장된 사물 규정일 뿐이라고 간주한다. 이러한 견해와 유사해 보이는 세 번째의 견해는 추론하는 것, 추론되어 형성된 표상이 곧 객관이라고 간주한다.

그들 철학이 또다른 형태경험일원론임을 철저히 파악하는 것은 현대 주관적 관념론의 계보의 마디마디에 대해 능동적으로 반격하는 데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다룰 모든 철학자가 그들 스스로가 어떠한 혼란한 글로 본질을 가리든 상관없이, 인식론과 논리학의 영역에서  번째의 견해를  요란한 형태로 반복하는 자들에 지나지 않음을 보게  것이다.

 

2024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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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 Mach, 『역학: 그 발전의 역사적-비판적 서술』, 제3판, 라이프치히, 1897, 473쪽; V. I. Lenin,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상)』, 박정호 역, 서울: 돌베개, 1992, 67-8.텍스트로 돌아가기
  2. 위의 책, 70.텍스트로 돌아가기
  3. 위의 책, 71.텍스트로 돌아가기
  4.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5.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6. 위의 책, 72.텍스트로 돌아가기
  7. 위의 책, 74.텍스트로 돌아가기
  8. E. Mach, 『인식과 오류』, 제2판, 1906, 12쪽, 각주; 위의 책, 75.텍스트로 돌아가기
  9. 위의 책, 76.텍스트로 돌아가기
  10. 위의 책, 99.텍스트로 돌아가기
  11. 위의 책, 78.텍스트로 돌아가기
  12.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13. 같은 책.텍스트로 돌아가기
  14. 위의 책, 79.텍스트로 돌아가기
  15. 위의 책, 100.텍스트로 돌아가기
  16. 위의 책, 101.텍스트로 돌아가기
  17. N. Smith, 아베나리우스의 순수 경험 철학, 『마음』, 제15권, 1906, 29쪽, 각주; 위의 책, 103-4.텍스트로 돌아가기
  18. A. A. Bogdanov, Empiriomonism, tran. D. G. Rowley, Leiden & Boston: Brill, 2020, 8-9.텍스트로 돌아가기
  19. 위의 책, 292.텍스트로 돌아가기
  20.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상)』, 1992, 292-3.텍스트로 돌아가기
  21. V. I. Lenin,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하)』, 박정호 역, 서울: 돌베개, 1992, 98.텍스트로 돌아가기
  22. K. Marx, “Einleitung zu den „Grundrissen“”, MEW, Bd. 42, Berlin: Dietz-Verlag, 1983, 35.텍스트로 돌아가기
  23. Loc. cit.텍스트로 돌아가기
  24. Loc. cit.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