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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백 | 집행위원
2. 인식의 상승 도정
두 번째로 역시 각 부분적 운동의 발전 추이에 대한 실제적인 내용을 서술하기에 앞서 부문 이데올로기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며, 또 어떻게 형성될 수밖에 없는지의 원리를 인식의 발전 법칙에 관한 유물 변증법적 해명에 주안점을 두어 간략하게 살펴보아야 하겠다. 글은 부문 이데올로기의 형성에 관여하는 모든 낱개의 심리적 내용을 일일이 검토하지는 않을 것이며, 일반론을 논하는 수준에 그칠 것이다.
자본주의 기본모순의 외화로서 개별적 사회현상은 각 부문 이데올로기의 존립 근거이다. 예컨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의 저항은 그에 조응하는 저항의식을 요구하는데, 이 의식은 규정된, 그리고 특징적이고 객관적인 차별이 실재할 때라야 발생하고 발전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존재로서 개별적 현상은 특정한 형식과 내용을 지니는 사회적 의식을 형성하는 반영론적 근거이다. 즉 그것이 반동적이든, 아니면 혁명적이든 특정한 내용과 형식의 사회적 의식은 오로지 그에 대응되는 특정한 내용과 형식을 지니는 사회적 존재가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자본이 재생하는 사회적 관계의 그물망 내부에서 생활을 영유하고 있다고 하여 태어날 때부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의식은 한국 사회의 수많은 사회적 병폐, 즉 모순을 겪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실천적 경과를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다. 어떠한 사회에서 자신이 가진 자연스러운 욕구, 또는 사회적 욕구를 충족할 수 없거나 그러기 매우 힘든 경우 누구나 자신이 겪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출세주의를 통해 ‘극복’하려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사회 체제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계급투쟁으로 나아갈 것이다. 반대로 자본을 수호하는 정치적 입장을 견지할 수밖에 없는 당파, 즉 자본가, 반동적 성직자, 부르주아 국가기구 관료 등도 현재의 낡은 체제를 유지해야 하는 이해관계를 가질 것이다. 이들 역시 나름의 사유 과정을 거치면서 자본주의를 옹위하기 위한 계급투쟁을 수행한다.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계급투쟁, 자본주의를 옹위하기 위한 계급투쟁은 계급투쟁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계급투쟁은 아니다. 후자는 그것이 자기의식에 다다른 수준일 수는 있을지라도, 본질적으로는 언급한 바와 같이 소외된 활동이다. 즉 그것은 자본의 강제 명령으로서 외적 합목적성에 종속되는 자연발생성의 발로일 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계급투쟁은 자연발생적인 수준에서 목적의식적인 수준까지 매우 다양한 양상을 지닌다.
자연발생적인 수준에서 사회모순에의 반대 의식 일반을 준거로 두는 계급투쟁은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법칙에 대한 본질을 인식한 것과 거의 관련이 없이 진행된다. 그것은 복잡한 대상화 작용의 특수성에 의하여 우연적으로 자본에 대항하는 외양을 띠는 것으로 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즉 그것이 자본에 우연적 단계에서 대항하는 성격을 지니는 만큼, 그 반대 의식도 일시적인 수준에서만 유지되고 그친다. 이 과정에서 이념적 전진과 후퇴가 진동하는 소부르주아적 혼란이 등장한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이 혼란이 외부로의 의식성의 주입으로써 극복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폭동이 단순히 짓눌려 온 사람들의 반란이었다면, 체계적인 파업은 이미 그 자체로 계급투쟁의 맹아를 표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맹아일 뿐이다. 저절로 일어난 이 파업들은 노동조합주의적인 것일 뿐, 아직 사회민주주의적이지 않은 투쟁이었다. 그 파업들은 노동자와 고용주의 대립이 각성되고 있음을 알려주었지만, 노동자들에게는 현대의 정치 및 사회 체제 전체와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타협할 수 없는 대립 관계에 놓여 있다는 의식, 즉 사회민주주의 의식이 없었다. … 우리는 사회민주주의 의식이 노동자들에게 있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오직 외부에서 들여올 수 있을 뿐이었다.”1
혼란의 물적 근원은 자본의 자기 증식과 직접, 그리고 필연적인 방식으로 연관된 존립 구조를 가진다. 상품생산이 고도로 발전한 사회에서 인간관계가 상품교환관계를 매개로 하여, 직접적으로 상호 의존적이지 않고, 오히려 “완전히 자립적으로, 이 특정한 전체에 결합되는 경우”2에는 개개인의 인식주관 영역에서 대상의 운동을 특수한 관계의 재생산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왜곡하는 상(像)이 야기된다. 여기서는 대상을 단지 직접적이고 서로 본래 분리되어 있는 추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직접성이 전체와 매개되지 않은 채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예컨대 교환가치 속에 표현된 노동은 서로 완전히 개별화한 개체적 노동임이 전제3되는데, 이 역시 노동과 교환가치의 관계를 보여주는 한 실재적인 단면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처음부터 사회적 노동, 즉 여러 생산자 사이에서 불균등하게 할당된 노동이기 때문”4에 자본주의 현실의 본질적 관계에 대한 탐구는 단지 “각 부분들의 본래적인 상호 독립성을 상정하는 허구적인 가정을 고찰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면”5 올바르게 이루어질 수 없다. 개별적으로 현상하는 사회문제 또한 그것이 그저 타자와의 분절 속에서 표지된 추상적인 상이성 일반의 틀 내에서 고찰될 때에는 보편적 연관은 파악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탐구자는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조건을 창출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자본주의 경제가 자신과 조응하는 상부구조를 매개하여 개개인이 자본주의의 구체성을 취할 수 없도록 상쇄 작용을 가한다는 사실에 있다.6 최근 반동 선전과 민주주의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맥 빠진 소리는 디지털 영역에서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은 심지어 고도의 기술적 능력을 선보이고 있다. 물론 자본제의 특유한 물질적 생산의 메커니즘과 지배계급의 세뇌 수단인 제도적 교육이 소외를 가속화하더라도 그것이 자본주의 경제에서 증폭되는 고유한 모순에 의한 자연발생적 반대 작용의 재생산을 완전히 무력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반대 작용의 운동 경향은 문제의 해소와는 무관한, 또는 오히려 이에 적대적인 것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발생적인 계급투쟁은 목적의식적인 투쟁의 조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법칙, 즉 특정한 내용을 지니는 사회발전의 합법칙성을 이해하는 것에 다다른다는 것은, 우리에게 반영되었던 사회적 존재를 인식─상대적 진리로서─했다는 것인데, 이러한 인식은 항상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으로”라는 방향성을 띠며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P. 코프닌(Kopnin)에 따르면 객관적 실재인 구체(O1)에 대한 단초적인 경험, 즉 낮은 수준의 실천(P1)에서 추상적 사유의 정립(구체에서 추상)으로, 그리고 추상적 사유에서 이론지가 발달(Z)하여 재차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이념적 실천(P₂, 추상에서 구체)으로 나아가는 순서로 진행된다. 이 전체 과정은 반영물의 근거인 객관적 실재의 부정의 부정─인식주관의 매개를 거치는 과정─을 통한 풍부화한 복귀(O₂)인데, 이 복귀는 실천을 통한 자연 및 사회적 현존의 개조로 나타난다. 이 진행 구조는 특정한 관념이나 실천 양태, 그리고 자립적인 사회적 실재에 완전히 닫힌, 단절적인 과정이 아니며, 항상 구체적 사유의 내용이 추상적 사유의 구성물과 연관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예를 들어, 개념판단은 항상 현존재, 반성, 필연성의 판단을 전제하는 동시에, 가장 근접한 판단으로서 현존재 판단은 항상 이미 무엇에 대해 인식된 현재적 수준에서 작동되는 (저차적인) 개념판단의 내용을 전제하고 이루어진다. 인식의 상승이란 이미 인식된 사물로써 조직화된 구조물을 실천으로 검증해 가면서 그 내부의 모순을 발견하고, 이 새로운 모순을 다시 극복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코프닌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해명하고 있다:
“진리 자체는 인간이 객관적 실재를 파악해가는 사회적-역사적 과정이다. … 진리와 오류의 대치에 있어서 이 상대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식의 현실적 과정에서는 비진리, 즉 오류의 여러 계기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있는 순수한 형태의 진리란 없다는 데 있다. 진리는 그밖의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순수한 형태로는 다만 추상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인식운동의 각각의 현실적 과정은 참이 아닌 데서 참으로 가는 운동을 의미하나, 그 과정은 환상이나 오류의 여러 계기로부터 해방되지 않는다. 그 어떠한 이론도, 과학발전의 경과로 인해 참이 아닌 점이 발견되는 여러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로서 또 객관적으로 참인 지식이 오류의 여러 계기를 자기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식의 발전이 일정단계에 도달하면 과학의 여러 진리(고정화됨으로써)는 그 시대의 오류가 된다.”7
예를 들어, 인류는 지구가 구체임을 벌써 고대에 인식하였지만,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것은 (물론 고대에 이미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한 학자가 존재하였지만)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디거스, 갈릴레이, 브루노 등 생산력 발전 정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기 시작한 근세에 이르러서야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즉 인류는 고대에 지구가 구체라는 것을 인식하였고, 일정한 구체가 천체에서 운동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으며, 이 경과 속에서, 이 인식 과정에서 모순이 크게 발견되지는 않았던 천동설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금성 밝기 관측이 진행된 이후 천동설은 그 학설 자체가 극복되지 않은 모순을 내재한, 결함 있는 체계로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발전은, 아무런 부정적 기반 없이 추동된 것이 아니다. 지동설은 천동설이 발전하면서 그간 쌓아놓은 몇 가지 특정한 사유방식─프톨레마이오스 이후 이어진 천체운동을 수학화하는 고유한 방식들─을 기반으로 하여, 그것의 대립자로서 발전한 것이다.
“이전에 알려졌던 오래된 진리 중 일부는 새로운 자료에 비추어 보면 틀리고 부정확한 것으로 밝혀지며, 과학은 이러한 부정확성을 제거”8한다. 이때 발전된 지식 체계는 전보다 “더욱 개선되었으며, 더욱 심오하고, 더욱 정확하고, 더욱 풍부하게 이해”9된 것이다. 과학 지식 발전의 경과에 관한 이러한 경험적 역사성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얻는 모든 진리를 영원하고, 한번에 완료되고 완성된 것으로 여길 여지는 없다.”9 “물론 복잡한 과학적 진리 가운데에도 최종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진리”11도 있다. 예컨대, “물질이 기본적이며 의식은 부차적이라는 과학적 명제, 세계는 운동하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명제, 자본주의는 영원하지 않으며 결국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체제가 이를 대체할 것이라는 명제”9가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려진 현상에 대한 구체적인 견해조차 새로운 역사적 조건과 새로운 실질적 자료에 따라 더욱 심화되고 명확해지며, 종종 [그 내용이] 크게 바뀐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9
상승하는 인식은 낡은 체계의 결함을 극복하기 위한 개념적 사유와 그 발전, 그에 관한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극복은 기존에 인식된 결함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즉 상승하는 인식의 내용과 형식은 극복되지 않은 모순을 내재한 체계와 그에 관한 낮은 수준의 인식으로부터 발전 과정을 거쳐 형성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목적의식적인 투쟁은 자연발생적인 투쟁을 매개로 성장한 결과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여전히 극히 소수의 인원에게만 이루어진다. 그런데, 발전을 이룬 목적의식적 활동을 담지하는 이 정예화된 인격은 자연발생적 투쟁울, 그것의 외부에서 개입하여 이를 목적의식적인 투쟁으로 상승시킬 수 있다. 이는 당적 지도나 이론적 선전 등을 통해 달성된다.
인간 심리의 지식 부위와 인식의 상승을 연동해 볼 때, 그것은 대상─생활 영위를 위해 처리해야 할,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사회문제들─을 단지 인상적인 범주의 연합에서 도출되는 ‘연역’의 결과로 이해함을 넘어, 탐구 대상에 관한 고정적이고 직접적인 표현형태가 특수한 운동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구체적이고 전포괄적인 언어·기호적 매개이며 그것이 자체 모순에 의한 변화의 양상에 놓여 있음을 이해하여 대상의 본질적 특성을 규정짓는 전체에 접근하는 것이다─그리고 접근은 매개 인식의 단계, 즉 매개의 주어진 문제 해결의 장에서 발견되는 모순을 더 넓은 범위의 체계에 종속하여 비로소 그것이 매개된 정합성으로 표현될 해소 가능한 모순임을 언어와 기호 및 개념을 수단으로 하여 차례로 확인해 나가는 과정이다. 심리학자 L. S. 비고츠키(Vygotsky)의 이론 연구와 실험 결과에 따르면, 고등 개념의 형성과 발전에서 핵심은 자신이 직면한 과업의 해결을 위하여 “스스로의 정신적 운용들을 숙달하고 지배”하는 것에 있다.14 “이들의 활동[개념 형성 및 발전을 위한 활동]은 … 스스로의 내적인 논리에 따라 다른 과정들과 독립적으로 발달하는 과정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호나 말에 의해 매개된 과정으로, 또한 주어진 과업의 해결을 위해 지향되는 과정으로 참여한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새로운 조합이나 종합 안에 도입된다. 오직 이 새로운 종합 안에서만, 참여하는 각자의 과정들이 그 진정한 기능적 의의를 획득하게 된다. 이것을 개념 발달 문제에 적용해 보면 연상의 축적, 주의력의 용량이나 안정성, 표상 집단의 축적 또는 결정적 경향의 존재 등은 이 요인들이 아무리 많이 발달하더라도 그들 자체가 개념의 형성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15
주어진 문제의 해결을 위한 욕구의 발생에 앞서 놓인 것은, 그러한 해결의 대상이 될 사회적 실재의 물적-경험적 내용물16이다. “노동과정은 원래 사람들이 살아가도록 강요된 객관적 조건에 대한 반응에 불과했다. 이러한 반응은 인류의 최초 욕구에서 발생했는데, 이는 식량 생산과 사람들 자신의 생산으로 시작되었다. …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활동적이었어서 객관적 현실에 대한 이상적인 상을 창조하는 능력을 습득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들의 이러한 사회적 상호작용이 객관적 실재를 변형하는 방향으로 지향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17 개개의 상이한 능력 수준의 형성과 발전에 있어 이 조건의 변수화(變數化)는 개개인 특유의 “기질(disposition)” 속에서만 가능하다. 단 “기질이 능력으로 발달하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 수많은 구체적인 상황에 달려있다.”18 오히려 비고츠키에 의하면 “실행 지성”이 발달해 나가는 일반적 경로, 즉 도구와 기호 조작의 성과는 “[심리적 활동 개체의] 자연적 형태들을 곧 능가하고, 행위를 조직하는 수단으로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이 모든 기능을 급진적으로 재구조화한다.”19
객관적인 사회적 실재는 초기 단계의 종국적 목표 표상을 규정한다. 예컨대 “[무언가를] 조준하는 포병의 입장에서는 최종 목표가 포탄의 실질적 궤적을 결정짓는 자질 중 하나임은 틀림없다.”20 이 최종 목표는 객관적인 도달 지점─“표적”을 “적중하는 일”일 것이며, 어떠한 것이 “표적”이 되는지는 전적으로 그 사회의 객관적인 역사적 총체성에 빚을 진다. 그런데 개별 인식주관 단위에서 이를 고찰한다면, 주어진 물절-경험적 요인은 그 본래의 존재 양식에 있어 경험의 제약을 수반하므로 개별 인식주관에게 곧바로 전체에 대한 상을 제공해 줄 수는 없다. 오랫동안 전장이라는 특수한 경험적 시공에서 “표적”을 “적중”하고자 매진한 포병은 흔히 그러한 시공의 외부에서 더이상 “표적의 적중”이 무용해졌을 때, 이에 요구되는 진일보한 전체를 민첩하게 구성하지 못한다─모든 자연발생적인 사유형식과 내용은 그 인식주관의 경험적 내용을 반영하지만, 이 경험적 내용을 구성하는 사회적 존재, 즉 각자 상이한 사회환경에서 사회적 의식을 촉발시킨 구체는 각자 상이한 내용을 지니고 있고, 이는 편향된 목표 설정 및 설정된 목표에 도달하는 방식의 제한성으로 현상할 수 있다. 모든 인식주관이 단초적인, 그리고 즉자적 수준에서 가지는 표상물은 그 내용이 모두 다르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서의 청년은, 청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복합적인 조건에 따른 사회적 규정력을 받게 된다. 여기에는 청년이 겪는 실업, 상대적으로 빈곤한 개인 재산 수준, 사회적 기반의 불안정성 및 기타 특수한 사회적 관계의 요소들이 포함된다. 당연히 청년 규정만이 아닌, 구체적인 생활 수준에 따라 받게 되는 사회적 규정력도 포함되어 더욱 복잡한 단초적 표상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머지 않아 이러한 경험에만 기초한 모종의 정신적 범주 체계는 다른 경험과 비교되었을 때 수많은 논리적 모순을 야기함으로써 잠재적으로 인식의 자체 발전의 계기를 축적한다. S. L. 루빈쉬테인(Rubinshtein)은 사고의 발달 단계에서 인식자는, 잡다로 현상하는 갖가지 추상적 범주의 자체 모순을 발판으로 삼아 점차 그것의 구체적인 존재 방식을 드러낼 수 있으며, 이는 인식주관에게 대상에 대한 더 적합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예컨대, “[추상적 범주 체계인] 존재론적 범주의 ‘둥지’에서 결정, 반성, 상호작용의 장소가 정의”21되고, “이는 주어진 현상의 종류에 특정한 것의 표현으로서의 본질 개념과 비교될 수 있다.”9 본질론적 범주 단계에 이르러서는 “변화와 반대되는 불변의 것, 보존이 아니라 변화의 대립물, 즉 변화 속에서 기본적인 것의 재현, 재생산이 두드러진다.”9 경험적 제약성과 행동 원리 수준의 명백한 연관성은 노동 분업이 직접적 생산자의 인식 상에 끼치는 여러 부정적인 특성과 그 결과로서 사회적 해악을 해명해 주는 열쇠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발전된 이해는 “[개별] 주체의 문제, 즉 특수한 과정(물질의 운동 형태)과 그에 상응하는 존재 양식─특수한 존재 양식의 주체의 문제”24로서 생겨난 것을 자신의 발생 기점으로 가진다.25
이러한 단초적인 표상들, 헤겔의 표현대로라면 ‘단초적인 것’, ‘최초적인 것’은 인식의 상승 도정에서 형성되는 중간물(P1 → Z)이 지니는 규정성을 결정한다. 이 중간물은 (설정된 목표 대상에 한해) ‘보편적인 형태’를 띠는 대상들, 즉 추상적 보편과 이를 위주로 한 조작 산물의 잡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표상물이 지니는 경험적 제약성은 실제로 그것을 구성하는 내용적 측면인 추상적 보편의 고유한 성질, 즉 복귀-재생산 운동 사이클을 체계 내 목적으로 지녀서 목표-내재적 매개를 거치는 것으로 표현되는 경향적 보편이 아닌, 다른 말로, 전체적 연관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고찰된 보편이라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이러한 보편은 제한된 경험에서 당분간은 ‘들어맞아 보이는’ (일개 범주로서) 〈공통항〉 및 (복귀-재생산 구조가 부재한) 〈일정 매개가 내용을 형성한 것으로서 공통〉을 각이한 사태·국면에 그대로,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것으로 표징된다. 잡다한 추상적 보편의 ‘묶음’이 지니는 모순을 그 본질로 하는 경험적 제약성은 개념적 사유로 상승하기 전까지는 극복되지 않은 채로, 그 자체 내에 새로운 경험을 추상적 보편화하는 방식으로, 그 주관적 규정성의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잔존한다. 이 특수한 사고형식은 그 “감각표상 및 관념의 재료 속으로 ‘침잠(沈潛)’해서 그 속에 ‘가라앉아’ 있음으로써 외적인 실재의 형태[실천]로 의식적인 사고작용에 대립”26함을 거듭하며 그 규정력을 확보한다. 그리고 이러한 객관(실천 형태)-주관(중간적 표상물)의 변증법적 과정이라는 응집 작용을 통해 형성된 이데올로기적 체계, 즉 이 특수한 사회적 의식은 그것이 특정한 부문 운동에서 작동하는 수많은 개별적 사상으로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체계는 사태를 구성하는 일부 측면으로서의 표층 범주와 그 범주 간 연계를 바르게 볼 수 있겠지만, 그보다 심층에 속하는 범주 간 연계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다. 그리고 기존에 표층을 파악하였던 모든 방식은 앞서 언급하였던 과정 그대로로, 주관 상에서 그 규정력을 보존하게 된다. 총체적-사회적 존재27의 변증법적 복귀 운동의 일부 측면만을 파악하여 그것을 추상화한 사유형식은 한계를 지니게 되고, 이는 설정된 목표에 도달하는 데서 방해 요인으로 작용, 목적 지향 활동의 실패를 야기한다.
예를 들어, 한 개별적 여성 임노동자는 자신이 겪는 생활상에서 궁핍화의 근원을 따질 때, 그것을 정부의 일정한 여성정책의 차이 문제로 환원하는 방식을 택할 수 있다.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사회정책의 성격에 따라 개별적인 궁핍화 수준에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은 검증된 것이라는 점에서, 해당 여성 임노동자는 상대적으로 표층에 드러난 범주의 연관을 옳게 고려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임의의 실천을 통해 ‘확인’된 것이며, 또한 실천을 총화하여 형성한 이론적 형식으로 되고, 그것은 이어질 실천의 이론적 근거로 된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타당하게 밝힌 그대로, 상대적·절대적 궁핍화의 심화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운동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추동되는 것이며,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사회정책이 근본적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 역시 필연적이다. 결국 개량주의는 총체성의 사유의 부재 속에서, 산재하는 사회문제 해소의 실패로 귀결된다. 이 실패는 단지 그것의 실행 절차에서의 오류에 기인하는 게 아니라, 역사적인 전체의 물질적 생산 구조에서 유래하는, 본래적이며 예정된 실패이다. 인식의 영역에서 이 사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상대적·절대적 궁핍화의 심화가 필연이라는 의식은 앞서 파악된 표층 범주에서 심층 범주로의 인식의 상승이 진행되어야지만 획득될 수 있다.
인류의 특정한 사회적-역사적 발달 국면에서 주체적 규정력을 얻은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파악하지 못한 실천, 그 실천을 반영한 사유물은 사태를 낱개의 정적인 추상물로 형성한다. 특정한 구체적 현실성에 대한 경험을 그 성립·형성 근거로 지니는 이러한 즉자적 존재 규정으로서의 추상물을 모아놓은 사유 내용과 형식에서 사태에 대한 본질적 연관의 고려는 제한적으로만 이루어진다. 이 추상물은 앞선 과정을 거쳐 그 특유의 자기 보존력(保存力)을 형성한다. 이 보존력의 연쇄작용을 끊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총체적으로 활동하는 구체적인 것인 객관적 운동의 실제적 매개 작용·연관 작용의 전 측면을 옳게 파악해낼 수 없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이론적-실천적 재현과 객관적 총체성 간 불일치에 기초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부문 이데올로기가 사태의 일부 측면에 대해서는 타당한 인식을 표현하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운동의 당사자로 설정된 집단의 경험에만 집착하거나, 또는 잡다한 추상적 ‘개별자’─추상적인 한에서 추상적 보편자와 다르지 않은─의 나열에 그치는 이유이다. 헤겔은 일찍이 『정신현상학』에서 이러한 보편에 기초한 지(知)가 내적 부정성으로써 철저히 찢어져, 결국 〈자기의식〉에 이르러 생사를 건 인정 투쟁에 돌입하게 됨을 역설하였는데, 이는 물론 인식 진보의 필연적 계기이다. 인간사회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문제들의 심연이 경제적인 재생산 구조임을 이해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경험적 제약성을 극복하고, 자신과 자기의 외부에서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존재의 제 계기 사이의 관계를 대상화하여 이론적으로 전유하는 속에서 이루어진다.
낡은 사회에 대한 모든 자연발생적 저항은 그에 상응하는 이데올로기 체계를 필연적으로 지닌다. 그것은 자연발생적 수준에 대응되는 이론적 내용이 일정한 수준에서 자기동일성을 지니게 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특징은 형이상학적이며, 사회의 제반 현상을 설명하는 데서 자본주의의 본질, 즉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운동법칙을 이해한 것과 거리가 먼, 그리고 사회경제적 요인을 경시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태운동에서 심층생태학과 같은 경우, 생태 파괴에 대한 비판적 의식 일반이 들어가 있으나 그 견해의 실질은 인간이 겪는 경제적 문제들─사회개조의 경과와 사회적 실천 및 층계화한 사회 제 모순을 현실적으로 매개할 수 없는 즉자적 수준에 정체되어 있으며, 대개 고대 헤르메스주의나 티베트 밀교 등의 영성주의가 전하는 ‘영적 경험’을 참고하여 생태문제를 신비화하는 방향으로 퇴행한다. 심한 경우 그것은 인간 일반에 대한 증오 사상으로 변질된다. 다른 예로는 J. E. 러브록(Lovelock)의 가이아이론이 있다. 비록 러브록 자신이 부정하였지만, 이 이론은 목적론을 인간과 지구 간의 관계에 접목한 대표적인 사례일 수밖에 없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지구는 자체의 자기 조절적인 복합 메커니즘에 따른 항상적 균형을 지니고 있다. 이때문에 지구는 외부에서 유입되는 강력한 충격, 또는 (심지어 지구 내부에서) 생태에의 인류의 파괴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행성 항상성, 즉 자체의 비생물권 및 생물권과의 유기적인 상호 관계로써 이내 정해진 최적의 행성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28 그러나 이는 생산 활동의 규모가 가져올 충격이 오로지 인간적 방식대로 제어되지 않고 있을 때, 그 충격이 지구의 행성 항상성의 가능 범위를 초과하여 환경에 영구적인 왜곡을 초래할 수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그의 견해는 인간이 지구의 자기 조절 메커니즘의 벗어날 수 없는 희생자, 즉 지구 ‘자체 활동’의 절대적인 피정립적 존재일 뿐이라는 결론으로 향한다. 이는 그의 관점이 인간에 대한 심층생태학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으로 전락할 잠재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가이아이론은 인간과 자연의 적대 심화, 즉 물질대사의 균열에 있어 자본의 파괴적 운동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 생태 이론을 전개했을 때의 그 논리적 귀결을 보여주며, 자본제적 노동 분업 구조 하에서 한 생태 과학자의 소외된 의식을 표지한다. 이 모든 시도는 어떠한 경험적 요인─영성주의적 경험, 지구과학자로서 겪은 제한된 이론적 경험 등─으로부터 비롯된 파편적 표상 체계를 무리하게 전체를 포괄하는 문제에 적용하여 (비록 러브록의 구상과는 일치하지 않더라도) 생태 문제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자아내게 하는 방식으로써 ‘해결’하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그러나 상기한 모든 이데올로기 체계는 생태의 구조적 특질의 변화가 인간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기초적인 수준에서 승인하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현재까지 광범위한 분야에서 전개되는 생태 파괴의 객관성을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독점자본의 후원으로써 유지되는 일련의 사이비 과학의 ‘연구’에 비해 문제의 본질에 더 접근해 있다. 우리가 적지 않은 부문 운동에서 발견하게 되는 수다한 ‘부문 이데올로기’는 그 현상형태에 있어, 주요 적용 영역의 상이성에 상응하는 수준의 내용적 차이가 있을지언정 본질적으로는 전술(前述)한 대로의 성격을 필연적으로 일정 지닌다.
노동운동이 의식적이라면, 인식 상의 한계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의 부분에 대한 ‘관통’에만 머무르는 이데올로기에의 비판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어떠한 인식 도상에서 응집하여 형성되었는지 파악하는 일이다. 그리고 또 그것이 어떻게 하여, 상승하기 시작하는 인식 과정의 중간물로 나타났는지, 그것이 현재 운동 발전 도정에서 어떠한 긍정적 의미를 지니는지까지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파악이 이루어져야지만 자연발생적 운동을 견인하는 건전한 비판이 이루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일부 부분적 인식에 머무르고 있는 각 운동에 대해서, 그 해당 의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운동가들이 실천 상에서 가장 쉽게 인식할 수 있을 만한 내용상의 한계를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파악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전체성의 관점이 들어서기 위해서는 인식상에서 직접적으로 반영된 특정 모순을 구성하는 범주에 대한 특정한 극복 방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29 이때 주어진 모순에 대한 극복으로 형성된, 과정으로서의 상(象)은 아직은 부문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충분히 소멸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이 경우 우리는 연대의 강화를 통해 새로운 한계의 내용을 파악하고 그 직접적 모순을 해소할 수 있도록 보조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보조로서 인식을 상승시키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노동운동이 구체적인 개별자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는 계기로 된다. 즉 계급운동이 지니고 있는 운동 상의 몇 가지 한계가, 부문 운동의 고유한 활동과의 연대를 통해 해소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계급운동은 청년으로서의 노동자, 여성으로서의 노동자, 장애인으로서의 노동자 등을 넘어서, 그것 자체 내에 지양·보존된 노동자로서의 청년, 노동자로서의 여성, 노동자로서의 장애인 등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구체적인 정립 활동으로서 보편-특수-개별의 전개를 통해 끊임없이 변화·발전하는 구체적 현실성에 내포한 다측면을 파악하는 것으로 된다. 왜냐하면 이렇게 형성되어가는 과정으로서 구체적 보편이란, 개별을 자체 내에 포괄하는 보편이지, 개별을 사상시키는 보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로써 각 의제에 대한 대처에서 노동운동은 오류와 그에 따른 맹동에 빠지는 게 아니라 진리, 목적의식적 실천을 성취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더욱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반복됨은 노동운동과 부문 운동 간 통일로 나아가고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통일은 한편으로 운동 전체가 그 이론적 고민과 실천에서 긍정적인 것을 지양·보존하고, 인식 상의 한계에서 비롯된, 그릇된 사유 규정을 폐기해 나가는 일반적 과정으로도 된다. 노동운동이 각 부문 운동의 상승하는 측면, 또는 그 상승의 실재적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노동중심성’이라는 ‘형식적 보편자’에만 얽매인다면 통일은 물론이고 가장 기초적인 견인조차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구체적인 것을 추상적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은 혁명에서 가장 크고 위험한 죄악이다.”30
2024년 9월 30일
- V. I. Lenin, 『무엇을 할 것인가』, 최호정 역, 서울: 박종철출판사, 1999, 36-7.
- E. V. Ilyenkov,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의 변증법」, 『맑스주의 변증법의 역사 I』, 문성원 외 역, 서울: 한울림, 1990, 230.
- MEW, Bd. 13, Berlin: Dietz-Verlag, 1961, 9 ff.
-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의 변증법」, 『맑스주의 변증법의 역사 I』, 1990, 230.
- 같은 책.
- 나중에 다루겠지만, 이 ‘상쇄’ 부분은 『무엇을 할 것인가』 제2장에서 레닌이 상세히 해명하고 있다.
- P. V. Kopnin, 『마르크스주의 인식론』, 김현근 역, 서울: 이성과현실사, 1988, 144-5.
- M. M. Rosental, Что такое марксистская теория познания, Москва: осполитиздат, 1955, 58.
- Loc. cit.
- Loc. cit.
- Ibid., 59.
- Loc. cit.
- Loc. cit.
- L. S. Vygotsky, 『생각과 말』, 배희철 & 김용호 역, 서울: 살림터, 2011, 260-1.
- 위의 책, 261.
- D. 비티히(Wittich)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모든 종류의 인식은 그 출현, 내용, 발전의 두 가지 요소, 즉 a. 인식의 대상과, b. 인식이 이루어지는 실제적이고 일반적으로 사회적인 상황에 의해 규정된다고 간주된다. 인지의 결정성이 제시되는 데 사용되는 용어는 다양하다. … 여기서 “객관적-물질적”이라 불리는 것은 [인식의 결정 요인에 있어] 항상 만장일치에 가까운 정도로 지지되었다. … 여기서 “실천적-사회적”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되는, 두 번째로 강조된 인식의 결정성에 관한 용어는 훨씬 더 다양성을 띤다.” (D. Wittich, „Bemerkungen zum erkenntnistheoretischen Konzept der doppelten Determiniertheit des Erkennens“,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34 (3), 1986: 245.) 이를 인식의 “이중결정성(doppelten Determiniertheit)”(Loc. cit.)이라고 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이중결정성’ 개념을 확장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 M. Buhr & J. Schreiter, „Erkenntnis - gesellschaftliche Praxis - Handeln“, Deutsche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26 (6), 1978: 714.
- B. F. Lomov, “On Systems Determination of Psychological Phenomena and Behaviour”, Studia Psychologica, 31 (2), 1989: 95.
- L. S. Vygotsky & A. R. Luria, 『도구와 기호: 어린이 발달』, 비고츠키연구회 역, 서울: 살림터, 2012, 177.
- 『생각과 말』, 2011, 261.
- S. L. Rubinshtein, “The Individual and the World (Excerpts from an Unpublished Manuscript)”, Soviet Studies in Philosophy, 8 (4), 1970: 376.
- Loc. cit.
- Loc. cit.
- Ibid., 378.
- Ibid., 376-7.
- E. V. Ilyenkov,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 우기동, 이병수 역, 서울: 연구사, 1990, 143.
- 총체성은 오로지 역사적 발달 국면이라는 제한성 속에서만 그 존재를 확립하고, 또 자기 규정할 수 있다. 따라서, 인류 사회 형성 이래, 인간 생활과 인간을 규정짓고 또 그것을 구성하는 근거인 총체성은 사회적 존재의 총체성이 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이러한 역사관 기초는 실제 생산과 과정을, 그것도 직접적인 삶의 물질적 생산에서 출발해서 전개하는 것이며 이 생산과정과 연관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생겨나는 교류 형태 즉 시민 사회의 다양한 단계를 전체 역사의 기초로서 파악하는 것이다. 또한 그 기초는 시민 사회가 국가로서 어떤 행위를 하는가를 서술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울러 의식을 통해 생산되는 다양한 이론적 산물과 그 산물의 형태 전체를, 이를테면 종교, 철학, 도덕 등등을 시민 사회에서 설명하고 이런 의식의 산물과 형태가 발생하는 과정을 시민 사회의 다른 단계에서 추적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태가 전체적으로 서술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MEW, Bd. 3, Berlin: Dietz-Veralg, 1978, 37.; K. Marx, F. Engels, 『독일 이데올로기』, 제1권, 이병창 역, 서울: 먼빛으로, 2019, 82-3.)
- J. E. Lovelock, The Vanishing Face of Gaia: A Final Warning, NYC: Basic Books, 2009, 255 ff.
- 인식론에서 언급되는 범주는 본질적으로 논리학의 범주의 문제이기도 하다. 상이한 범주들로 구성된 특정 체계에 내재한 모순은, 그 특정 모순 체계에 상응하는 해결 방식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연쇄된 구체적 사태는 특정한 순차를 이루는 논리적 범주에 대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리옌코프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인 모든 과정이 발생하는 보편적 형식에 관한 과학인 논리학은 구체적 전체의 형성과정에서 연속적으로 계기하는 단계들을 반영하는 특수한 개념(논리적 범주)의 엄밀한 체계로 정의된다. 한 이론 내에서 연속적으로 계기하는 범주들의 전개는 인간의 의지와는 독립한 객관적 특징을 지닌다. 그러한 범주들의 연속적 전개는 경험적 근거를 갖는 이론적 지식의 연속적이고 객관적인 발전에 의해 우선적으로 표현된다. 그와 같은 표현형태로, 현실적인 역사과정의 객관적 연속은 우연적 사건들의 분열된 형태나 역사적 형태가 제거된 채 인간의 의식 내에 반영되는 것이다.”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 1990, 240-1.)
- V. I. Lenin, 「슬로건에 관하여」, 『레닌언론저작집』, 상권, 정용준 & 배진호 역, 서울: 말길, 1991, 2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