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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가능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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α. 인구 폭발과 인구 조절
인류의 미래에 관한 우려의 주된 원인 중 하나는 세계 인구의 증가이다. 우리 행성의 모든 자원에 대한 인당 소비량의 증가, 그리고 그에 따른 생산량의 증가와 그로부터 말미암은 자연 환경에 대한 커져가는 압력은 무시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주지하듯이, 토마스 맬서스는 주어진 천연 자원이 늘어나는 인구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으며, 토양의 비옥도는 인간 요구의 증대에 비해 줄어들고 있다고 믿은 최초의 사람 중 한명이다. 그의 이름은 여러 문헌에서 언급되지만,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의 저작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나는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맬서스의 저서 『인구의 원리에 관한 에세이』의 한 구절을 인용하도록 하겠다.
“생존수단의 증가 속도가 아무리 빨라지더라도, 인구 증가가 그것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은, 적어도 식량이 생명을 지탱할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나누어진 뒤에는, 자명한 사실임에 분명하다. 인구를 이러한 수준으로 유지하는데 있어서 필요 이상으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은, 어른들이 죽음으로써 그들을 위한 공간이 만들어지지 않는 한, 죽을 수밖에 없다.”1
맬서스는 이를 18세기 말에 썼지만,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상을 추종하고 있다. 우리와 동시대의 인물인 페어차일드 박사는 1950년대에 출판된 그의 저서 『방탕한 세기(The Prodigal Century)』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그의 창의적인 능력을 가장 부지런하게 발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자연적이고 생물학적인 인구 증가를 감당할 수 있을만큼 생산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창의적인 능력을 가장 부지런히 발휘하여 자연적이고 생물학적인 인구 증가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생산 기술을 빠르게 발전시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식량 공급에 대한 압력은 언제나 기아, 불행, 갈등, 고통, 그리고 결국 죽음을 낳았다. 인류가 존재한 이래 지난 몇세대까지, 과잉인구는 전세계적으로 고질적인 사회 문제였다.”2
그리고 저명한 미국 과학자 가랫 하딘은 1971년 『쓸모 있는 과학자(The Relevant Scientist)』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문명과 존엄이 모든 곳에서 생존할 수 있을 가능성은 적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다른 곳에서보다 그 가능성이 높다. 운이 좋은 소수는 좋게 포장된 의도에 의해 위협받는 문명의 관리자의 역할을 수행해야만 한다.”
물론, 맬서스의 견해의 모든 동조자들이 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잘 알려진 영국 연구자 릿치 칼더경은 『국제 관계(Foreign Affairs)』에 게재한 “오래된 주택 담보 대출(Mortgaging the Old Homestead)”라는 논평에서 지구의 인구를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 질병과 기근이 필요하거나 바람직하다고 노골적으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원자폭탄의 발명과 페니실린의, 그리고 여러 치명적인 질병들에 대한 다른 여러 효과적인 약물적 대비책의 발견의 의의를 똑같이 취급한다.3
칼더는 이 약물들이야말로 오늘날의 인구 폭발에 근본적인 책임이 있으며, 그 막대한 해로운 영향은 핵무기에 비교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칼더에 의하면 이는 과학자들의 헌신적인, 그리고 선한 의도를 지닌 작업의 예상치 못한, 계획에 없던, 그리고 때로는 위험한 결과인 것이다.
결국, 인구의 무제한적 증가는, 우리 행성의 제한된 자원을 고려할 때 우려스러우며 위험으로 가득차 있다.
이제 인구 증가와 그 조절의 문제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해보자.
많은 인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약간의 변동과 가끔씩의 침체기를 제외하면 지구 전체 인구 규모는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증가해 왔으며, 그 성장 속도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아래 F. Baade가 작성한 표가 이러한 성장에 대한 명확한 상을 보여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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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학자들이 유엔의 요청으로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2000년에 지구의 인구는 49억에서 69억으로 추정된다. 가장 현실적인 수치는 63억 명으로 간주된다. 인구의 연간 증가율은 현재 약 6천만~7천만 명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구 증가율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신맬서스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자연적인 생물학적 원인에 의한 것일까, 아니면 기술과 문화의 발전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식하려는 사람들의 오랜 경향에 의한 것일까?
둘 다 아니다. 아무도 인구 증가가 인간의 특정한 생물학적 변화의 결과라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인구 증가의 진정한 이유는 사망률의 지속적인 감소와 그에 따른 기대수명의 증가이다. 사망률의 감소는 의료 서비스 수준의 개선을 포함한, 비록 상대적이지만,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사회적 생산의 효율성의 고도화에 따른 전반적인 생활수준의 개선에 의한 것이다.
인구 증가가 계속된다면, 우리 행성의 자원은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되더라도 언젠가 고갈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인구는 계속 증가할까? 아니면 그 증가가 전쟁이나 전염병, 기근 외에 다른 요인들로 인해 억제될까?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맬서스주의적 개념은 오직 이 마지막 요인들만 인정하고 그것들의 인위적인 적용이나 출생률의 의무적인 절감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요인도 작용하고 있다: 바로 개별 가족들이 자신의 요구와 이익에 따라 인구 증가를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지난 몇백년 동안 이러한 자체적인 가족 계획은 점점 더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인구학자들은 인구 증가를 분석하면서 출생률이 서로 다른 나라들 그리고 시기 내에서 경제적, 사회적 요인들의 영향에 의해 변동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생활수준과 문화수준의 제고, 도시화의 증대 (이는 도시에 사는 인구의 비중이 늘어났음을 의미한다)는 일반적으로 출생률의 감소로 이어진다. 따라서 사망률의 감소는 출생률의 감소에 의해 상쇄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들의 연관은 각 나라에 고유한 특징을 지닌다. 발전도상국에서의 사망률의 감소는 출생률의 감소를 초월하였으며, 바로 이러한 상황이 오늘날의 신맬서스주의자들에게 우려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된 문제는 분명히 미래에도 자체적인 통제라는 요인이 인구 증가를 인간 욕구의 충족 가능성 증가율 이하로 낮추기에 충분히 효과적일지의 여부이다.
인구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서방의 대부분의 인구학자들과 연구자들은,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가족 계획은 불충분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출생률을 급격하게 낮추기 위한 충격 요법을 사용할 것을 촉구한다.
많은 소련 인구학자들은 세계적 차원에서의 극단적인 조치 없이도 개선된 사회적 및 경제적 조건이 얼마 안가 출생률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일부 개발도상국에서 임시방편으로 시행 중인 가족계획 프로그램의 신속성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리하여 보리스 울라니스5는 현재 10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출생률이 정점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빠르면 1980년부터 이러한 증가가 줄어들게 될 것이며, 다음 세기에는 세계 인구의 크기가 안정화될 것이라고, 즉 출생률이 사망률과 균형을 이룰 것이라고 믿는다.
사태가 정확히 이렇게 될 가능성이 있지만, 당분간은 인구 규모에 대한 문제는 열린 질문으로 놔두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미래에 사회는 특정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인구의 증감에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할 수도 있다. 1881년에 엥겔스는 카우츠키에게 다음과 같이 답장하였다:
“물론 인구가 너무 많아져서 그 이상의 증가를 억제해야만 할 추상적 가능성이 존재한다. 만일 공산주의 사회가 사물에 대한 생산을 통제하는 것처럼 인간의 생산 또한 통제해야만 한다면, 그 사회는, 그리고 그 사회만이 이를 어려움 없이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6
나는 엥겔스가 내놓은 이 견해가 그 타당성과 시의성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구 규모와 증가가 현 상태의 인류사회와 그 발전의 유일한 특성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구 조절의 개념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고찰되어야만 한다.
사회의 구조의 구체적 특성과 질적 구성을 규정하는 다른 특성 또한 중요하다. 그 중 하나는 생산에 참여하는 인구의 비중이다. 한 나라의 건장한 인구의 상당수가 자신의 힘을 쓸 곳을 찾지 못하고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상황일까?
주지하듯이, 자본주의 나라에서 항상 존재해왔고 또 때로는 엄청난 규모에 달하는 실업은, 인구 폭발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요인들에 의해 발생한다.
사회의 질적 구성은, 즉 직업과 교육 수준 및 패턴에 따른 인구의 배분은, 우리의 이익에 있어서 결코 무시될 수 없다. 건장한 인구의 규모가 생산 가능성과 조응하더라도, 인구의 질적 구성은 생산의 구조와 기술적 진보의 수준에 조응하지 않을 수 있다.
만일 양자가 조응하지 않는다면, 인구의 상당수는 사회적 생산과정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되고, 결국 삶의 터전을 잃게 된다. 이로 인해 실업이나 일체의 유용한 활동에 대한 무관심과 같은 현상이 발생한다. 많은 나라들의 상황이 이를 증명한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당수의 청년들은 직업도, 사회에서 설 자리 자체도 없다.
우리는 오늘날 청년들에게 직업 훈련을 제공하는 것에는 굉장히 많은 시간과 사회적 자원의 상당한 부분이 든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기술적 진보가 진행됨에 따라, 이러한 직업 훈련은 더 많은 시간과 돈을 필요로 할 것이다.
산업 및 전문 인력은 직업 훈련을 받고 있는 현 세대의 청년들이 사회에 대한 자신들의 빛을 값을 수 있는 때인 10~15년 후의 공장과 사무실의 근무 환경을 염두에 두고 훈련되어야 한다.
결국 모든 청년 남성과 여성의 훈련은 사회와 그 생산력, 그리고 생산양식의 발전 계획에 복무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한 계획은 사회발전에 대한 장기적인 목표와 안목이 있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사회주의 나라들에서는 인력 훈련에 진지한 관심이 기울여지고 있으며, 이 분야에서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단순히 다양한 산업에 필요한 수의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교육 훈련과 전문 직업 훈련 간의 올바른 상관 관계를 찾아 각 개인의 재능과 능력 개발을 사회적 생산 요구 사항과 결합하는 것이 과제이다.
개인의 능력이 개별적인 층위에서 드러나고 개발되기 위해서 사회는 무엇보다도 경제의 요구를 충족하는 직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야만 한다. 소련이나 다른 사회주의 나라들의 경험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사회주의 사회의 발전에 따라 그 구성원들의 교육 수준은 빠르게 높아지고 있으며, 이는 노동의 전문화와 더불어 그 성격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모든 구성원들은 자신의 요구와 능력에 따른 직업을 제공받으며 동시에 사회적 생산의 요구에 복무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그러한 규제는 흥미있는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포함한 인민의 물질적, 정신적 욕구를 최대한으로 보장하고자 하는 국가가 담당한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일을 할 권리, 무상교육과 의료를 받을 권리, 휴식과 휴가에 대한 권리 등 사람다운 삶에 필요한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는다. 동시에, 모든 사람들은 사회의 요구에 복무하기 위해, 그리고 그의 능력에 맞게 일해야 한다.
장기적인 목표와 안목이 없는 사회는 그 인구의 양적, 질적 구성을 포함한 자신의 발전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그러한 사회는 앞서 언급한 종류의 목표를 세울 수 없다.
많은 서방 연구자들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회발전의 전반적인 통제에 관한 문제를 인구 규모를 억제하는 문제로 환원시키려는 것 같다. 그들은 그것이 마치 모든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병폐에 대한 만병통치약인 것으로 여긴다.
더욱이 산아제한은 그들이 보기에 위에서 내려먹이는 강제 할당량의 형태를 취해야만 한다.
인구 폭발에 대한 그 모든 이야기가 기근과 특정 나라들에서의 인구의 전반적인 낙후성의 실질적인 사회정치적 원인을 가리우기 위해 고안된 경우가 많다는 것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에콰도르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페드로 안토니오 사드는 영향력 있는 신문 엘 유니버설의 특파원이 제기한 “에콰도르의 사회적 문제가 출산에 있는건가요” 하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몇 년 전 저를 포함한 경제학 및 법학 학생들이 이 문제를 연구했습니다. 그 후 우리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지금까지도 채택하고 있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에콰도르의 인구가 매년 3.4%씩 증가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모든 땅을 과학적으로 이용한다면 에콰도르는 지금보다 4~5배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충분한 땅을 갖게 될 것입니다. … 이 문제가 제기되고 산아제한이 문제를 해결하는 올바른 수단으로 선전되고 있다는 사실은 다른 나라의 문제를 우리 토양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려는 계략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쟁취하고자 하는 미래, 즉 자유와 사회적 진보가 현실화되는 미래에는 생산 수준을 급격히 끌어올릴 수 있는 많은 인구가 요구될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앞서 언급된 그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근로인민대중을 오도하고 국가 변혁의 올바른 길에서 이탈하도록 고안된 계략입니다.”7
에티오피아의 마자 베켈8 또한 전아프리카 대륙과 관하여 같은 입장을 표력하였다.
앞서 지적했듯이 세계 인구 증가를 제한하기 위해 특별한 조치를 취해야하는지 여부에 대한 질문에 대한 확답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공산주의 하에서만 이 문제가 어려움 없이 해결될 것이라는 엥겔스의 말을 상기하는 것이 도움될 것이다.
실로 모든 구성원이 사회의 목표를 이해하고 자신의 목표처럼 여기는 그러한 사회만이 인구 통제 문제에 대한 권고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한 사회는 모든 구성원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그러한 조치를 대대적으로 실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해 우리는 산업 플랜트, 철도 및 기타 국가적으로 중요한 프로젝트를 건설하는 데 소련의 청년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한 수많은 사례들을 들 수 있다. 현재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공공 기관의 요청에 따라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와 아무르 강을 연결하는 철로를 건설하고 있으며, 카마 강에 자동차 공장을 건설하고 있있다. 과거에는 수십만 명의 청년들이 카자흐스탄 북부로 가서 광활한 황무지를 개척했으며, 그보다 훨씬 이전인 1930년대에는 청년 남성과 여성들이 자원봉사팀을 구성하여 마그니토고르스크에 소련 최초의 철강 공장 중 하나를 건설하였다.
그 어느 나라이든간에,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 그 나라의 인민들이 공통된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자발적인 대중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게 된다.
인구의 규모는 무한정 증가할 수 없다. 그러나 수세기와 수천년에 걸친 인류의 발전에 관해서는, 러시아 과학자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의 이 예측은 실로 옳았다:
“인류는 영원히 지구에 갇혀 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빛과 우주를 향해, 대기권 너머로 나아가는 미비한 첫 걸음을 내딛고 더. 나아가 태양계 인근 우주의 전체를 정복해 나갈 것이다.”9
오늘날 사람들이 우주 공간의 자원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 확답하기는 어렵다. 이는 과학적 예측과 공상 과학 소설에서의 끝없는 사색의 주제이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소행성의 물질을 활용하여 대형 유인 우주 정거장을 건설하고 다른 행성에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러한 꿈이 어떻게 실현될지 추측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하지만 지구의 자원이 고갈되기 훨씬 전인 오늘날에도 장거리 우주 여행과 태양계의 다른 행성으로 향하는 길은 개척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은 소수만이 우주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가까운 미래에 관해서만 타당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16세기 초에 처음 몇 명의 사람들이 유럽을 떠나 새로 발견된 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났을 때, 그 뒤를 이어 수백만 명의 정착민이 생겨나고, 그 결과 수억 명의 인구를 합친 수많은 새로운 국가들이 생겨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었을까? 결국, 지구의 인구와 먼 미래의 인구 수는 우리가 보기엔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이제 우리는 지구의 한계 내에서, 21세기라는 기간 동안 인류 발전의 다음 단계를 검토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어떤 조건들이 실제로 필요할까? 의식주부터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는 욕구, 교육을 받고, 예술을 즐기고 싶은 욕구까지, 우리에게 필수적인 욕구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이를 예증하기 위해, 우리는 그 충족이 자연 환경 및 그 자원과 관련된 물질적, 육체적(혹은 오히려 생리적) 욕구에만 집중할 것이다. 보다 일반적인 형태로 요약하자면, 이러한 욕구들은 생활 공간, 식량, 다양한 종류의 자재 및 에너지에 대한 욕구로 정리될 수 있다. 그러한 욕구들의 충족은 천연자원의 사용과 소비,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존재와 활동을 가능하게 하고 (좁은 의미에서) 편안하게 만드는 환경의 구체적인 특성(대기의 구성과 온도, 물의 가용성과 구성)에 의해 좌우된다.
따라서 미래에는 지구의 자원의 한계와 자연 환경의 제요소가 인구 증가에, 그리고 결국 생산과 소비의 성장에 제약을 가할 가능성이 있다.
편역: 박서준 | 집행위원
2024년 10월 10일
- O. Ruhle, Brot für sechs Milliarden, Leipzig-Berlin: Urania-Verlag, 1961, 112-3.
- H. P. Fairchild, The Prodigal Century, New York: Philosophical Library, 1950, 15.
- R. Calder, “Mortgaging the Old Homestead”, Foreign Affairs, 48 (2), January 1970: 207-20.
- F. Baade, Der Wettlauf zum Jahre 2000, 2 durchgesehene Auflage, Berlin, 1968.
- Ц. Урланис, В c6. Марксистско-ленинская теория народонаселения, M., 《Мысль》, 1971.
- K. Marx & F. Engels, Selected Correspondence, Moscow, 1975
- P. Saada, El Universal, 25 apr. 1970.
- M. Bekele, “False Prophets of Doom”, The UNESCO Courier, July-August, 1974.
- K. Э. Циолковский, На Луне, M.,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