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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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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2/25
    19만 원짜리 주주 되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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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변화, 그리고 화장실

 

내가 요즘 돈벌이도 없고 집에서 살림하는 시간도 많아지니 생기는 작은 변화가 있다. 이를테면 감자 사러 시장 가서 감자만 사온다거나 한다. 사실 이건 큰 변화다. 얼만 전만 하더라도 온통 먹을 것 투성이인 시장에 갔다면 몇 가지는 더 사왔야 한다. 감자만 달랑 사들고서는 '집에 가면 밥있어!'를 맘 속으로 수십 번 외친다는 건 예전엔 상상도 못했던 경험이었다.

 

그저께 밤 늦게 집에 들어와 출출해서 며칠 전에 마나님이 사다 둔 도너츠를 먹었다. 한 입 깨물기 전까지는 이게 슈크림 도너츠인 줄 몰랐다. 순간 냉장고에 둘 것 그랬나 하는 약간의 후회가 들긴 했다. 살짝 시큼한 맛이 돌았는데, 유통기한을 보니 하루가 더 남아서 그냥 열심히 세 개 다 먹어치웠다. 먹고 나니 속이 요만큼 화끈거렸다.

 

약간이라도 의심가는 음식은 죄다 버려댔었다. 조금이라도 찝찝한 음식은 손도 안댔었다. 다 마나님이 해치웠다. 그런데 이젠 내가 음식 남겨놓기 싫어서, 아까와서 그 시큼한 슈크림 도너츠를 다 먹어버린 것이다.

 

 

도너츠 세 개 해치우고 이것저것 하다가 새벽에야 잠을 잤다.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화장실이 급해졌다. 어딘지는 잘 모르겠는데 공중 화장실이 있는 그런 곳이었다. 엄마가 꿈 속에서 저쪽 화장실을 쓰란다. 눈에 보이는 더 가까운 곳에 화장실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가지 말고 베개 두 개를 들고 따라 오란다. 왠 베개? 지저분한 화장실에 가는데, 깨끗할 리 없는 공중 화장실에 베개를, 그것도 불편하게 두 개씩이나 들고 갈 이유가 도대체 뭔가? 이쪽 화장실보다 멀기도 하고 베개 들고 갔다가 똥이라도 묻으면 빨래하기도 귀찮아질테니 가까운 화장실로 갔다.

 

가까운 화장실도 참 요상했는데, 내가 들어간 출입문 반대쪽으로도 문이 나 있는 게 사람들이 길을 가로지르는 곳으로 이용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독특한 건 이 화장실은 밭이기도 했다. 고랑에다가 일보나 보다. 사람들이 가로질러 가기도 하니 눈치를 살치다가 인기척이 없어서 한쪽 켠에 쭈그리고 앉으려 했는데 왼쪽 발이 바닥에 깊이 뭍혀버렸다. 똥탕은 아닌 듯 했으나 왠지 좀 그래서 깊숙히 박힌 발을 힘겹게 빼고 다시 자리를 잡으려 했다. 근데 영 폼이 안나오는 것이었다. 이렇게 불편해서는 일을 못볼 듯했다.

 

고랑에서 싸기를 포기하니 한쪽 편에 두 개의 문이 달려 있었다. 저기로 가면 되겠구나. 나란히 있는 두 개의 문 중 오른쪽 문으로 들어갔다. 이것 참. 문을 열어보니 수세식 변기 사이에 칸막이가 없었다. 여기서 일 보다 왼쪽 문으로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그것도 낭패다. 뭐 이래. 그래도 싸야겠다. 그런데 변기에 대변이 있는 것이다. 물을 제대로 내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것부터 내려야지 하고 물을 내렸는데 물이 시원하게 내려가지 않고 퍽퍽 튀면서 내 다리에 똥물이 튀었다. 아, 뭐야. 이곳도 포기하고 다른 곳을 찾아나섰다. 그때 잠이 깼다.

 

 

아침이었다. 요즘의 내 일상으로 보면 꼭뚜 새벽이었다. 새벽녘에 잠을 잤으니 이 시간에 깰 리가 없었다. 어, 이렇게 일찍? 배가 살살 아팠다. 진짜 반가운 화장실로 갔다. 주루룩주루룩. 도너츠가 화근이 될 줄이야. 먹던대로 먹고 하던대로 하고 살아야 하나?

 

 

손짓, 부름, 부탁... 뭐 이런 거

 

어제 오후 늦게 레디앙을 방문했다. 그저께 민주노동당 언론담당 정책연구원이랑 잠시 담소를 나누었는데, 내게 레디앙 소식을 물었다. 내가 19만원짜리 주주라고 떠들고 다녔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나도 조만간 사이트를 오픈한다는 소식만 들었지 어찌 돌아가는지 아는 게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디앙이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문득 정말로 레디앙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어차피 여의도에 갈 일도 있고 해서 어제 오후 레디앙에 먼저 들렀다.

 

19만원짜리 소액주주 주제에 간섭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해서 몇 마디 거들게 되었다. 오픈 날짜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주주들에게 전화든, 메일이든, 문자든 보내심이 어떨지. 언론담당 정책연구원의 의견이었는데 내가 전했다. 레디앙 편집국장 이광호 아찌는 주주 메일링리스트를 만들어서 뉴스레터도 보내려고 하는데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고 한다. 레디앙은 나름대로 오래 준비한 인터넷 매체이긴 하지만 예상보다 어려움이 많고 그래서 준비도 기대보다 화려하지 못하다. 안타까운 일이다.

 

야스피스는 내게 편집기자 할 생각 없냐고 물었다. 난 그게 뭐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광호 아찌도 이런저런 일을 해 줄 수 없겠냐고 했다. 언론사에서, 그 근처에서도 일해본 적이 없어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나 스스로도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래서 내 주변 정리하던 거 마저 하고 4월에 와서 도울 수 있는 일을 얘기해보자고만 했다.

 

 

며칠 전 강동에서 구의원 출마하는 황씨가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했다. 내가 강동에서 도와준 거 소문나면 서대문에서 죽는다고 했다. 그 전화 받기 전에는 거제에서 전화가 왔었다. 지역위 사이트 만들어야 하는데 도와달란다. 난 그런 일 해본지 너무 오래되어서 할 수도 없고 지금은 인맥도 다 떨어져서 소개시켜 줄 사람도 없다고 했다. 내 사직 소식을 듣고서 한 지역 활동가가 지방선거 정책 만드는 거 도와달라고 했었다. 난 그때 상태가 무지 좋지 못한 상황이라서 도저히 도와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요전에 봉포항 만나러 속초갔을 때, 농담이었지만 놀면서 쉬면서 그 동네 선거나 같이 해 보는 건 어떠냐는 얘기도 들었다. 서대문에서는 내가 선거일을 당연히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분위기다.

 

주변에서 손짓을 한다. 함께 일해보자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주로 선거철이라 선거일이기는 하지만 레디앙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아주 잠깐 진보정치연구소 연구실장과 사무국장과 얘기한 적도 있었는데 연구소에 필요한 몇 가지 일을 같이 해보는 것도 어떻겠냐는 제안도 받았다.

 

 

그들에게는 내가 필요하기도 하겠고, 할 일 없는 나에게 일거리를 제공하고자 하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나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러한 제안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겠다. 난 오래오래 쉬고 싶지만 내가 다 쉴 때까지 이러한 제안들이 유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제안이 재미없거나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흥미롭지 못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몽창 다 깨끗하게 거절하는 것도 왠지 아쉽다.

 

만나는 사람들마다의 제안에 솔깃하는 건 내 귀가 얇은 탓일 수도 있다. 그래도 그 모든 게 다 기회인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내가 정작 하고 싶어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깨닫는 것 같다. 그 깨달음을 위한 스스로의 노력이 차분히 있어야 거절할 것은 거절하고 깊숙히 개입할 일에는 열정을 쏟게 될 것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지혜로운 판단을 하지 못해 기대에서는 무척 벗어난 인생의 길을 가버리게 된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때마다 기회와 나의 선택의 시기를 맞추어가며 살아왔다. 인생의 기로란 이런 것인가 보다. 내 삶에서 아귀가 맞지 않는 첫 시절인 것 같다. 어쩌면 주변의 손짓, 부름, 부탁은 부담이기도 하지만 내 다음 인생을 위한 친절한 재촉일 수도 있다.

 

 

뒤로 미루기와 놀기

 

하던 일 때려치우고 할 일 없이 놀아도 영 해야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몸에 아픈 구석이 있으니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6년 가까이 일을 하다보니 사무실에 쌓인 내 물건들이 한 아름보다 더하다. 정리해야 한다. 내 컴퓨터가 한계에 다달았으니 업그레이드도 해야 한다. 맘 먹은 바가 있으니 자전거도 장만해야 한다. 오랜 동안 쓸고 닦지 못한 집안 구석구석도 손봐야 한다. 공부를 한다거나 나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도 차분히 해야 할 때이다. 무엇보다도 나를 성찰하는 데에 게을러서는 안되는 시점이다. 시간의 여유란 할 일 없을 때 누리는 게 아니라 할 일을 느긋하게 할 때 누리는 것이다.

 

 

조금 전에 여의도 당사 근처에서 돌아왔다. 어제 오후 늦게 행인에게 빌려줄 책들이 있어서 들고 나가기는 했지만 애초에는 사무실 한 켠에 아직 남아있는 나의 자리를 정리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하루에 다 정리하지 못할 양이긴 하지만 하는 만큼이라도 해 두면 좋을 일이다.

 

낮에 집에서 몇몇과 채팅을 하고 이래저래 알아볼 것 알아본다고 서핑하다가 늦게 나갔다. 수다 좀 떨다보니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 저녁도 오래 앉아 먹고 나서는 새벽 1시가 다 되도록 당구를 쳤다. 이 시간이 재미없었거나 후회되지는 않는다. 맛나는 삼겹살 배불리 먹고, 즐겁게 당구도 쳤으니 잘 논 것이다.

 

사람들과 즐겁게 노는 건 나의 정신 건강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나에게는 꿀꿀한 시간을 집에서 혼자 보내는 것보다는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당구를 치는 게 훨씬 이롭다. 지금 내 처지에 노는 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뒤로 미루기'이다. 이 점이 나의 생활태도의 문제 중에 하나다. 이왕 제대로 푹 쉬기로 마음 먹었으니 해야 할 일을 천천히 해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을 당장 하지 않는 것은 하기가 싫어서이다. 하기 싫은 이유는 아마도 '회피'에 있는 듯하다. 단지 게으름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이 '회피'는 두려움이나 자신감 상실 등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사무실 내 책상과 책장을 정리해버림으로써 내가 6년 가까이 공들여 일한 일터에서 멀어지는 걸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당에서 일하는 걸 나는 영광으로 여겼다. 내 인생을 바쳐야 하는 공간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떠나야 할 때가 되어 떠나와 놓고선 여직 나의 마음은 기대고 있는 듯하다. 나의 짝꿍을 제외하면 당을 나의 전부로 여기고 있었으니, 당과의 인연을, 끈끈한 나의 일부가 아닌 객체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심리적 이별이란 이렇게 어려운가 보다. 두려움이 내 마음 속 깊이 틀어 앉아 열심히 저항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픈 몸을 건강하게 하려면 병원도 가야 하고 운동도 해야 한다. 일을 핑계로 얼마나 오래 미루어 왔던가. 그토록 미루어 온 일을 지금도 미루고 있는 건 나를 존중하지 못하는 태도일 수 있다. 건강한 몸뚱이를 바라면서도 이를 위해 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니.

 

빨래를 한다거나 설거지는 한다거나 하는 자잘한 일들에서 나는 작은 만족감을 얻는다. 집안일에 익숙해지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이런 일이라도 집에서 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러나 여기서 그쳐서는 안된다. 내가 하고 싶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에 더 많은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 즉, 의지를 가져야 한다.

 

지금 나의 심리적인 상태로서는 자전거가 있어야 운동을 하게 될 것이고, 컴퓨터가 있어야 내가 바라는 적극적인 작업을 하게 될 것이고, 병을 치료해야 더 많은 의욕을 가지게 될 것이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나의 의지가 약하다. 의지가 약한 건 그 다음의 일에 대한 자신감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두렵고 자신감을 갖지 못해 회피하는 나, 그런 삶의 태도를 갖는 지금의 내가 바로 위기가 아닌가 싶다. 놀더라도 내가 할 일을 회피하고 않고 놀아야 시간의 여유를 더욱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마티스와 불멸의 색채화가들>전]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살 지가 고민이라 했다. 또 하나의 나의 고민은 회피하는 나 자신이다. 몸도 마음도 건강한 생활을 위해서 나의 태도는 바꾸어야 한다.

 

 

<마티스와 불멸의 색채화가들>전

 

이 글은 전시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글이다. <마티스와 불멸의 색채화가들>전은 지난 3월 5일에 막을 내렸고, 나는 가지 못했다. 가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 나는 무엇을 하고 살까 고민 중이다. 다른 심각한 고민들도 있지만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니니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무엇'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자. '무엇'이란 꼭 '직업'은 아니다. 하고 싶은 것과 돈벌이가 일치하는 삶이 곧,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이라 생각한다. 내게 그런 복이 올까는 자신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 고민하는 건 '돈벌이'보다는 '하고 싶은 것'이 과연 무엇인가이다.

 

민주노동당직을 사직한 건 잘 한 일인 것 같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잘 된 일이 될 것 같다. 아직 민주노동당과 심리적 이별은 하지 못해 헤매고는 있으나 이것도 어떻게든 정리될 것도 같다.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잘 그만두었다'를 여전히 강조하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지 않다. 하던 일을 그만 두어버리고 나니 앞으로 할 일이 잡히질 않는 나의 상황에 반전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은 한동안 나의 자아를 잠식한 존재가 아닌였던가. 나에게서 민주노동당을 떼어 내려 하니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를 점점 더 알 수 없어진다.

 

이런 상황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상황 자체가 나에게는 큰 혼란이다. 이 혼란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는 싶지만 자꾸 회피하게 된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삶을 기대하는 나 스스로에게 가장 큰 독 중 하나가 나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하면서 살고 싶은 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알아내는 것도 힘들어한다.

 

 

<마티스와 불멸의 색채화가들>전은 2월 경에 지나가는 길에서 광고를 보고 알게 되었다. 3월 5일까지였으니 시간을 내서 가고자 했지만 이래저래 시간이 맞질 않았다. 정신 바짝차리고 꼭 봐야겠다고 맘을 굳게 먹었다면 시간을 낼 수도 있었겠지만 요즘 나의 의지란, 가는 한숨에도 날라가 버리는 가벼움을 몸뚱아리로 가지고 있다.

 

마티스 등의 작품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강렬이 든 어느날이었다. 혼자 집에 있었다. 왜 보고 싶어 할까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한 때 그림을 배웠었고 계속 그리고 싶어 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나는 한 때, 그림을 그리던 시절과 그 이후 민주노동당에서 일하기 전에 인터넷에서 그림을 모았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돈이 있으면 헌책방에서 그림책을 샀다. 유명한 작가의 그림책들.

 

지금도 나의 책 무더기 속에는 마티스의 작품집이 있다. 최고로 유명하고 높이 평가받는 작품들만 엑기스로 모아놓은 컬렉션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만족스러운 작품집이다. 그러니까, 한 때는 이런 작품집을 모으고, 인쇄된 한 작품 한 작품을 감상했던 적이 있었다.

 

그날 문득, 예전에 이러고 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마티스의 작품집과 그 주변에 꼽혀 있는 다른 화가들의 작품집을 보면서 행복해 했었다. 그래, 행.복. 그 기억이 살아나자 난 너무 슬퍼졌다. 난 지금 행복하지가 않다. 무엇을 하고 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는 불행 속에 있다. 그림을 감상하는 행복을 잊고 살 정도로 생활은 팍팍할 따름이다. 나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날 울었다. 집에서 혼자 울었다. 소금기 꽤나 빠지도록 울었다. 평소에 운동도 하지 않으니 땀보다도 짠 눈물이었을 것이다.

 

 

<마티스와 불멸의 색채화가들>전은 나에게 이런 의미가 되었다. '가보지도 못한 곳, 그래서 더 선망하게 된 곳'. 마티스의 작품을 실제로 보게 될 날은 언젠가 올 듯하다. 하지만 나에게 마티스만 있는 것은 아니니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게 된다면, 그리고 나 스스로 작품들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면 가야겠다. 중요한 건 보는 게 아니다. 보고 있는 내가 어떤 생각과 느낌을 갖는지를 깊이 알아보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림에 강한 반응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하고 살까? 예전의 꿈과 의지를 찾을 수 있을까? 꼭 그 길이 아닐 수는 있다. 하지만 예전의 꿈과 의지를 확인할 필요는 있는 듯하다. 내 인생은 길 것이기 때문에 시간에 쫓길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내가 정작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를 알아보기를 회피한다면 죽을 때까지 떠돌이 마음을 간직한 채 불행하게 살 것이다.

 

과연 나는 무엇을 하고 살게 될까.

 

 

 

추억도 나도 영원하지 않다

 

3월 9일(목)-10일(금), 이틀 동안 동해안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의 목적은 첫째 놀고 쉬는 것이었고, 둘째 앞으로의 날을 고민하는 것이었다. 둘째 고민은 여행에서도 지속되고 얘기되었지만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앞으로 뭐하고 살지 생각하는 시간은 한 동안 계속될 것이다.

 

 

첫날, 숙소인 영랑호리조트에 도착했을 때 영랑호는 왠지 겨울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재섭는 골프장은 빼고. 예전에도 영랑호를 방문했을 때에는 눈이 내린 겨울이었다. 춥고 쌀쌀한 바람이 불기는 해도 영랑호는 겨울의 황량함이 살짝 느껴지는 그런 때가 좋아 보인다. 예전 방문 때에도 묵었던 영랑호리조트에 묵었는데 그때는 참 좋았던 시설이 지금은 낡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사이에 아주 잘 꾸며진 리조트며 팬션이며 콘도를 수없이 지나쳐 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추위가 몸속을 깊이 파고들 때까지, 경포호에 비하면 작고 아담한(?) 호수인 영랑호 물가를 천천히 거닐었다. 물은 무척 더러워 기분을 깨긴 했으나 호수는 평온한 분위기를 풍겨 '쉬러 온 자'에겐 좋은 벗이었다.

 

 

저녁은 우수사랑의 솜씨로 맛나는 음식을 먹었다. 쇠고기 불고기와 돼지 불고기 두 가지를 모두 준비했다. 부러운 주부의 솜씨였다. 나도 그런 경지에 오를 날이 오겠지. 8일(수)에 저녁밥으로 무엇을 준비할까 고심한 적이 있었는데, 파란꼬리가 카레 재료를 사다두었으니 이왕 카레가 편할 듯했다. 감자에 싹이 나서 새로 사야했는데, 그래서 점심 식사 전에 모래내 시장에 나가서 감자를 사왔다. 먹는 건 절대 못참는 내가 배고픔을 참으며 시장통을 헤매고서는 '필요한 감자'만 달랑 사왔다는 건 나 스스로도 놀란 일이었다. 기이한 현상이었다. 빵이며 튀김이며 오뎅이며 순대며 떡볶이며 호떡이며 등등을 그냥 지나치다니... '집에 가서 밥 차려먹으면 돼'하면서...

 

이런 변화는 주부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는 게 우수사랑의 의견이다. 아줌마답게 다음부터는 밥먹고 배부를 때 시장엘 가란다. 그게 살림하는 아줌마들의 노하우란다. 금요일 아침에는 파란꼬리가 밥을 잘 먹고 출근했을까 걱정이 들었느데 이런 걱정은 예전과는 다른 걱정이었다. 파란꼬리의 건강과 안전에 대한 걱정은 항상 있었지만 '밥을 먹었을까'는 새롭다. 사람은 확실히 변한다. 사랑받기 위해서라도 이제 나는 열심히 밥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저녁을 뽀지게 먹었다. 헉헉대며... ㅎㅎ

 

우수사랑이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우수사랑의 남편과 함께 동명항에서 회를 떠왔다. 잡어들이기는 했으나 그 가격에 그만한 양을 먹을 수 있는 건 동명항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동명항도 예전의 맛과 싱싱함과 저렴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한다. 속초 바로 위에 있는 고성군 땅 봉포항이 더 낫단다. 다음에는 봉포항에서 회를 떠야겠다.

 

'봉포항'은 9시경에 영랑호로 왔다. 교육이 있어서 늦었단다. 우수사랑 내외와 봉포항과의 수다는 이런 저런, 정해놓지 않은 얘기들이었다. 동명항의 회는 밤 늦게까지 안주가 되었다.

 

 

금요일 아침은 별미로 시작했다. 늦게 일어나서 아침도 늦었다. 동명항에서 멀지 않은 '사돈집'이라는 곰치국 식당이었다. 그곳에서 곰치는 최고의 해장음식이란다. 물곰탕이라는 메뉴로 있었다. 흐믈흐믈한 고깃살이 독특했다. 아구를 먹다보면 아주 흐믈흐믈한 부위가 있는데 꼭 그런 느낌이다. 물곰탕은 생선만 곰치로 바꾸었지 재료는 여느 매운탕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럼에도 아주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데다가 속도 아주 편한 음식이었다. 보통의 매운탕이라면 아침 첫 식사로는 자극적이어서 약간 거북할텐데 말이다.

 

 

사돈집의 곰치국을 먹고나서 바닷가 한번 구경하고 봉포항과는 헤어졌다. 선거 준비로 일이 바쁘니 계속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이들이 있으니 본격적인 등산은 어렵고 설악산 권금성에 케이블카나 타고 오르려 했는데, 바람이 세게 분다고 케이블카를 운행하지 않았다. 산 구경은 해야 하겠고 오대산 상원사로 가기로 했다.

 

 

상원사 가는 길에 배가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지만 봉포항이 소개해 준 입암리 막국수를 먹으러 갔다. 입암리 이정표도 쉽게 찾을 수 있었고 '입암메밀타운'이라는 음식점은 폼나고 크게도 지어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5천원짜리임에도 이런 맛을 가지고 있다는 건 큰 축복이었다. 나는 물막국수를 먹었는데 그 많은 양을 몇 젓가락으로 술술 다 넘겨버렸다.

 

양양공항 근처의 '실로암'이라는 막국수집이 있다. 10여년 전에 처음 갔을 때 아주 감동적으로 먹었던 기억이 있다. 국수와 동치미가 따로 나와서 동치미를 국수에 부어 말아 먹었었다. 아주 독특한 막국수를 잊을 수 없었다. 두어번 먹어본 후 한참 후에야 작년에 다시 가게 되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약간 헤매고 찾은 실로암은 달라져 있었다. 동치미를 부어 먹는 막국수가 아니었다. 만들어져 나왔다. 나름대로 개성있는 맛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왠지 옛날 맛은 아니었다. 그래도 난 만족스럽게 먹었다. 좀 비싸기도 했지만...

 

이곳 현지 사람들이 '실로암'보다는 '입암메밀타운'을 찾는단다. 이유는 맛이다. 변해버린 맛보다는 여전한 맛을 즐기나보다. '입암메밀타운'의 막국수는 실로암의 막국수와는 아주 다른 종류의 것이다. 육수가 아주 좋다. 다음에 또 가야지. 지금도 생각난다... 먹고싶다. 이번 여행 중 가장 강렬한 맛을 안겼다.

 

 

오대산을 처음 가본 건 95년이었다. 상원사와 월정사를 구경했었다. 깊은 산 중의 상원사. 크지 않은 절이었지만 깊이와 장중함이 느껴지는 절이었다. 철분 많고 찬 약수를 한모금 마시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이번 상원사 방문은 실망이었다. 건물도 신축하고 옛 건물도 칠을 새로 하는 등 절터를 정비했지만 촌스럽다는 느낌만 생겼을 뿐이었다. 이 절의 역사는 오래 되었기 때문에 고증을 제대로 해서 사옥을 잘 정리하거나 아니면 옛 스타일을 아니더라도 멋지게 정비하면 될 것을, 주제넘을 참견을 하자면, 졸부들이 하듯이 지들 보기에만 만족스러운 모양새로 만들어 놓았다. 약수도 한 모금 못 마시고 월정사로 내려갔다.

 

월정사도 공사를 하고 있었다. 이곳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큰 절로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달라진 느낌은 없었다. 그냥 그렇게 큰 절로 있다 싶었다. 상원사와 월정사 사이의 10여 km의 비포장도로에 대한 추억이 있는데, 그 추억도 왠지 과장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해 전 5월이었나,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상원사에서 월정사까지 파란꼬리와 함께 걸어 내려온 적이 있었다. 높고 굵게 뻗은 나무숲과 계곡 사이로 난 비포장 도로는 낭만 그 자체였다. 그 때 보았던 통나무 다리도 없어졌다. 확연히 티나게 달라진 건 사람의 손길이, 문명과 기계의 손길이 많이 닿아 닳고 닳아진 길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도, 계곡의 얼음과 굵은 나무 숲이 위로는 되었다.

 

 

추억 속의 그곳을 다시 확인하는 것은, 그곳이 여전할 때는 기쁨을, 달라졌을 때는 아쉬움을 남긴다. 이번엔 확실히 확인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은 사실이다. 강산에서 먹는 음식도 달라진다. 내게 가장 큰 아쉬움은 오대산의 실제 모습이 나의 추억과는 다르다는 데에 있다. 내 머릿속이 착각 속에 빠져 있던 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아쉬움은 컸다.

 

 

오대산에서 잠시 길을 돌려 경포호 근처의 초당리로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초당두부를 먹어보자고. 우수사랑의 큰 언니가 강릉에 산 적이 있었는데, 현지인들이 선호한다고 소개해 준 식당엘 갔다. 맛있었다. 훌륭한 두부인 건 사실이지만 지난 해 주의장의 안내로 먹었던 두부맛에는 못미친다. 밀양에서 언양으로 고개를 넘어가면 자리한 간판도 없는 허름한 두부집. 언제 한 번 다시 가 보아야겠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서부터는 조금씩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제 내 인생을 생각해야 하는 때가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결정을 내려야 하고, 계획을 세워야 하고, 행동을 해야 한다. 이 모든 게 버거울 따름이다.

 

다음 주에는 이런 부담을 다시 한번 미루게 될 강진 여행이 계획되어 있다. 지금으로써는 어떤 여행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속초보다는 마음이 더 무거울 듯하다.

 

 

말걸기, 주말 쯤 속초 구상 발표할 듯


말걸기, 주말 쯤 속초 구상 발표할 듯
 
 
 
지난 달 민주노동당 정책국장을 사임한 말걸기가 3월 9-10일(목,금) 양일 간 속초로 휴가를 떠나기로 한 사실이 알려졌다. 특히, 이 휴가는 최근 민주노동당 정책부장을 사임할 의사를 밝힌 우수사랑이 동행할 것으로 전해져 단순한 휴가가 아닐 것이라는 게 주변 인물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여기서 잠깐!] 아니 일을 관둔 넘이 휴가를 가요? 거 참 희한하네~에.
 
말걸기와 우수사랑이 휴가지로 속초를 선택한 이유는 아름다운 산과 바다 때문이 아니라 맛있는 해산물이 많기 때문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취재 결과 봉포항을 만나러 가는 게 아니냐는 추측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봉포항은 총선 직후 민주노동당 조직부장을 사임하고 속초에서 지역 조직을 건설한 볼세비키라고만 알려진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전화통화에서 갑작스럽게 휴가를 떠나게 된 이유를 묻자, 말걸기는 "요즘은 해물이 땡긴다"고만 대답할 뿐, 우수사랑과의 동행 이유, 봉포항을 만나려는 것 아니냐는 질문 등에는 썰렁한 농담으로만 답했다.
 
[잠깐만!] 썰렁한 농담이 뭔데? - "'말걸기'를 자판으로 두드리다 보면 가끔 실수로 '말거기'로 입력할 때가 있다. 혼자서 민망해 한다."정도.
 
말걸기가 휴가의 이유를 숨기는 가운데 몇 가지 추측들이 나돌고는 있으나 전문가들이 바라보는 유력한 이유는 앞으로의 당활동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특히, 이번 2006 지방선거를 얼마 앞두지 않은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에서의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근본적인 물음에 답해야 할 시점이라는 게 분석이다. 이러한 분석은 우수사랑과의 동행, 봉포항과의 조우 이유를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는 데에서 신뢰를 얻고 있다.
 
평소 말걸기는 우수사랑과의 정치적 연대뿐만이 아니라 상근자로서의 감성적 연대도 강했던 것으로 알려져왔고, 이들은 봉포항과도 비슷한 경험을 공유했다는 증언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휴가 일정이 주말 직전인 금요일까지라는 데에도 분석이 뒤따르고 있다. "차량 통행이 적은 주 중을 선택했을 뿐"이라는 말걸기의 답변과는 달리 이번 주말 쯤 입장을 발표해야 다음 주 초부터는 어찌되었든 새로운 모색을 위해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직 후 한 달 동안 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반성도 있는 듯 보인다.
 
또한, 주변 인물들이 말걸기에게 지역에서 선거 업무를 수행할 것을 종용하고 있는 가운데 그들의 입장을 고려한 면도 있다는 분석도 있다. 하루라도 서둘러 당활동에 대한 입장이 정해져야 주변인물도 이에 맞게 선거 업무를 좀 더 구체적으로 기획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뭐가 석연치 않은 휴가를 갑작스레 떠나는 말걸기가 돌아오게 되는 금요일 밤이나, 늦어도 주말까지는 정치활동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발표할 것으로 예상되어 그 결과가 주목된다.(2006-03-08 <지저분한 일기> 말걸기 기자)

 

<전가복(全家福)>을 먹다.

 

한편으로는 무척 억울하고 슬픈 일이기는 하나, 또 한편으로는 '축복'할 법한 일이 있다. 우수사랑이 사직을 결심한 일이다. 뭐, 7년 세월을 정리하는데 스트레스 안 받을 리는 없고...(스트레스에는 맛있는 음식이 좋다!)

 

우수사랑이 6일(월) 낮에 전화 한통을 내게 건네더니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했다. 그 순간 확 땡기는 건 별로 없었는데 요즘 제일 먹고 싶은 훠거탕은 비싸니 만두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러자 우수사랑이 최근 정보 하나 입수했는데 이촌에 요리 잘 하는 중국집이 있다더라. 이촌역 근처에 [야래향(夜來香/02-797-7179)]이라는 중국요리집이 소문이 났단다.

 

중국집? 중국요리? 코~올!

(게다가 사준다고까지 했으니 얼마나 감사, 또 감사할 일인가!)

 

오늘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이촌역에서 만났다. 좀 헤맸다. 그래서 이 요리집을 찾아갈 지 모르는 블로거들을 위해 찾아가는 팁을 하나 알려주려고 한다. 이촌역(1,4호선) 4번출구로 나와서 조금만 가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시라. 차로까지 직진하지 말고 골목길 한 블럭만 가서 왼쪽으로 터~언 하시고 주욱 가다보면 오른편에 상가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 2층에 [야래향(夜來香)]이 있다.

 

안에 들어가 보니 격조 높은 중국요리집이라기보다는 잘 정돈되고 깔끔한 분위기의 식당이었다. 밥먹기 좋다. 우수사랑이 메뉴판을 보더기 <전가복(全家福)>을 먹잔다. 다양한 해물과 송이, 청경채 등을 센 불에 삽시간에 익히는 요리인 모양이다. 근데 이 비싼걸? 대짜 65,000원, 소짜 55,000원. 헉! 이 요리가 이곳의 백미라고 들었단다. 사준대는데 감사히 먹어야지.

 

재료가 무척싱싱하다. 짜거나 맵거나 자극적이지 않았다. 간장과 고추기름에 살짝 찍어서 먹으면 좋다. 맛이 얕지가 않다. 지금은 밤이라 그런지 그 맛과 빛깔을 묘사하기 귀찮아지니 궁금하신 블로거는 무슨 수를 쓰든 돈 다발 들고 함 가보시라. 후회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후회한다면 말걸기가... "그랬소?"하고 한 마디만 할테니 내게 보상은 기대하지 말고...

 

<전가복(全家福)>을 먹고나서 매운 짬뽕을 하나 나누어 먹었는데, 이것도 국물 맛이 깊고 재료가 싱싱해 <전가복(全家福)> 다음으로 먹는 식사로 손색이 없었다. 이 집의 짬뽕은 신촌의 완차이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었다. 여기에는 맵지 않은 짬뽕도 있었는데 <전가복(全家福)>이 해물덩어리인지라 한국사람 입맛에는 매콤하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듯하다. 하지만 그 맵지 않은 짬뽕 맛도 다음에는 꼭 음미하고 싶다.

 

대부분의 중국요리집과 달리 아쉬움을 달래는 마지막 코오~스, 후식도 두 가지나 나왔다. 이런 데는 첨 가봐서 나 혼자서 내심 무척 감동해마지 않았다. 개찹쌀떡과 리치. 다른 요리집은 둘 중 하나만 주던데... 아닌가?

 

이상 기억을 위하야 남겨 논 기록. 그래도 <전가복(全家福)>이 무슨 요리인지 검색하다 보니 유래를 찾았다. 슬픈 일 후에 기쁜 일. 그 잔치를 위한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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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가복 全家福 (네이버 지식 검색에서)

 

진시황 35년, 진시황은 유학자들의 학문과 사상을 온갖 방법으로 탄압했다. 당시 주현(朱賢) 이란 유생이 있었는데, 그는 진시황의 모진 탄압을 피해 산 속 동굴에서 숨어 지냈다. 낮에 는 자고 밤에 일어나 생의 풀과 열매를 먹으며 은둔했다.

 

몇 년뒤 진시황이 죽고 그의 아들 호해(胡亥)가 제위에 오르자 주현도 집으로 돌아갔다. 그 러나 집에 당도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 허물어진 담벼락뿐이었다. 일 년 전 큰 홍수 가 나 주현의 아내와 자녀가 어디론가 피난을 간 것이었다. 주현은 상심한 나머지 죽을 마 음으로 강물에 뛰어들었다. 마침 지나가던 어부가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하고 그를 구해주 었고, 주현은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어부에게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어부가 말하기를, 작년 홍수 때 주(朱)씨성을 가진 한 소년을 구해 준 적이 있는데, 그 소년이 성실하고 재주가 많 은 것이 선비의 자식인 것 같다고 말하면서 소년이 살고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주현이 어부가 가르쳐준 곳을 찾아가 보니 과연 소년은 자신의 아들이었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난 어느 날, 길가에서 물고기를 팔고 있던 주현은 지나는 사람들 속에서 자기 아내를 발견했다. 뜻밖의 상봉에 두 사람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주현 가족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열기로 했다. 특별 손님으로 초대받은 어부는 주현 일가를 위하여 솜씨 좋은 요리사를 초빙했고, 요리사는 천신만고 끝에 다시 만난 주현 일가 를 축복하며 산해진미 좋은 재료로 심혈을 기울여 음식을 만들었다. 온 가족이 다 모이니 행복하다는 뜻에서 이 요리도 '全家福' 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중국 강남 일대의 전 통 요리로 사랑 받고 있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온 가족이 모여 찍은 가족 사진을 전가복 이 라고 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이 요리 이름에 담긴 좋은 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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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미식가겠지?

네이버 피셔님의 One & Only Fisher에 실린 [야래향(夜來香)] 탐방기

 

 

&quot;여자는 재미로 사랑을 하지 않아요.&quot;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 2005, 이안)>을 보다.

 

 

금융비적규직 사업 일환으로 발간하는 월간 <금비>라는 잡지가 있다. 이 잡지에 '영화보고 수다떨기'라는 꼭지가 있는데, 공짜로 영화보고 수다만 떨면 되는지라, 얼씨구나 좋다구나 무작정 영화를 보겠다고 나섰다. 3월호가 찍은 영화는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 2005, 이안)>이었다.

 

게이의 사랑을 다룬 영화, 그리고 이안의 작품이라는 얘길 듣고 그의 또 다른 작품 <결혼 피로연, 1993>을 떠올렸다. 이 영화에서는 갈등하지만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는 동성애를 보여주었다.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기 위해 상암CGV로 가던 길에서도 행복한 결말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브로크백 마운티>은 슬픈 영화다. 이 영화를 두고, '아름다운 사랑', '위대한 러브스토리'라는 수사를 붙이는 건 영화 팔아먹기 위한 비평에 불과하다. '슬프고 억울한 사랑'이라 해야 한다.

 

 

- 에니스 : "내가 너무 재미 없었지?"

- 캐시 : "여자는 재미로 사랑을 하지 않아요."

 

- 알마 : "난 바보가 아냐. 내가 모르는 줄 알아?"

 

- 잭 : "네게 난 가끔 만나는 친구일 뿐이지만, 난 널 20년이나 그리워했어."

 

- 로린 : "희한하게도 남편들은 자기 아내에게는 춤을 청하지 않지요."

 

 

부모를 잃고 누나와 형도 결혼한 후에 떠돌이 신세가 된 에니스 델 마와, 부모의 목장일을 도우며 사는 잭 트위스트는 어느 해 여름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양 방목일을 하게 되었다. 둘은 짧은 사랑을 했고 가슴 속으로만 타들어가는 이별을 했다. 에니스 델 마는 알마와 결혼해서 딸 둘을 낳았고 여전히 가난한 품팔이 인생을 살았다. 잭 트위스트는 농기계상의 딸 로린 뉴섬과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으며 장인의 사업을 이은 로린을 도우며 살았다. 이렇게 4년이 지났고 에니스와 잭은 다시 만났다. 서로에 대한 사랑을 다시 확인한 그들은 매년 한 두번씩 휴가가듯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에니스의 아내인 알마는 에니스와 잭의 첫 재회서부터 그들이 연인이라는 걸 알았다. 몇 년 후 에니스와 알마는 이혼을 했다. 이혼 후 에니스는 캐시와 사귀기도 했다. 캐시도 떠났다. 잭은, 갑부인 장인이 이혼만 한다면 주겠다는 위자료로 에니스와 목장을 가꾸길 원했다. 이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자기에게 춤을 청하지 않는 남편'을 둔 로린은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돈 버는 일에만 몰두했다. '춤을 청하지 않은 이유'는 훗날 깨닫는다.

 

 

여느 연인과 부부가 그렇듯이 에니스와 잭의 사랑도 대칭을 이루지는 않았다. 사랑을 양으로 잴 수는 없으니 각자의 사랑 중 누구의 것이 큰 지는 비교할 수는 없고, 단지 그 관계에 대한 생각이나 표현 방식, 삶의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음으로 에니스와 잭은 사랑하지만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잭은 에니스의 이혼을 반가워했다. 꿈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에니스는 잭의 인생 설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에니스가 잭을 '가끔 만나는 친구'로만 생각했을까? 에니스가 잭과 함께 살기를 거부한 건 잭인 남자이기 때문이었다.

 

운명을 거스르는 남녀의 사랑은 '낭만적'이고 '아름답고' '순수하며' '위대'하다. 그러나 두 게이의 사랑은 운명을 거스를 힘도 없었다. 그들만의 공간인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 듯 일년에 한두번 '밀회'를 가질 뿐이었다. 자연 빼고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그들만의 공간에서. 둘만의 공간에서는 행복하지만 따지고 보면 슬프고 억울할 따름이다. 캐시에게서 "여자는 재미로 사랑을 하지 않아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에니스의 마음은 어땠을까. 캐시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을 설명할 수도 없는 에니스, 슬프고 억울하지 않은가.

 

한국에서도 통상의 가족을 이룬 동성애자들이 있다. 이성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있다. 그들이 겪었을, 겪게 될 지도 모르는, 어쩌면 겪길 바라는 동성과의 사랑을, 통상의 결혼에서의 '외도'나 '로맨스'로 보아야 할까? 나같은 헤테로야 이 영화를 보고 슬퍼하면 끝이지만, 동성애자들은 사무치는 아픔을 느껴야 할 지 모르겠다. 현실보다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오히려 '분개'할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에 대한 그들의 느낌을 듣길 바라는 것조차 해서는 안될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일상에서 사랑을 누릴 권리도 없는 에니스와 잭이 사랑을 이룬 결말은 슬플 따름이다. 에니스와 잭이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랑이 가능했다면 함께 살다가 성격차이로 헤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기회조차 없는 사랑이었다. 나는 20년이란 세월에서 쌓인 그들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겠다. 그냥 가슴이 아플 뿐이다.

 

 

사회가 허락하지 않은 사랑 때문에 가슴 아파한 사람들은 에니스와 잭으로 그치지 않는다. 알마와 로린 또한 배신감과 허무함으로 수십년을 살았고, 죽음까지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에니스와 잭의 관계를 알고 있던 알마와 알 수 없는 느낌으로 살아가던 로린. 그들이 불행한 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데에 그치지 않는다. 사랑받지 못함을 표현할 수도 없고 관계를 쉽게 떨칠 수도 없었다. 금기는 모두에게 상처를 남긴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첫 장면에서 동양화가 연상된다. 아름다운 산과 숲, 양떼를 담은 화면은 아름답다. 두 개의 노래가 흐르는 마지막 크레딧에서는 눈물이 난다. 영화 어디에서도 에니스와 잭은 '사랑한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연인'이 아니라 '친구'라는 게 더욱 슬프다. "He Was a Friend of M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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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한 지 얼마 안된 영화를 두고 이런저런 감정을 표현하기란 어렵다. 그 장면에서, 그 사건에서 어쨌다 저쨌다를 다 풀어버리면 글 읽는 사람은 김샐 것 같아서다. 시간이 더 지나면 하나하나에 대해서도 글을 써볼까...

 

 

마누라, 첫 출근하다

 

긴 시간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마누라가 오늘 교사로서 첫 출근을 했다.

 

학창시절의 기억은 결코 교사의 꿈을 꾸지 못하게 했단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던 모양이다. 새로운 삶을 모색했고, 살아가야 하는 삶이 교사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려받은 피에 이끌린 바도 있어 보인다. 아버지는 현직 교사이시고 할아버지는 교장, 증조부는 훈장이셨단다.

 

교육대학원을 진학했고 두 번만에 임용고시에 합격해서 오늘 아이들과 첫 만남을 맞이하게 된다. 학교의 방침으로 오늘 입학식에서, 가르치게 될 학생들과 그들의 학부모 앞에서 하게 될 취임사를 준비했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시가 한 편 있습니다. 한 시인이 사랑하는 사람이 오기로 한 자리에서 그 사람을 기다립니다. 어찌나 긴장을 하고 예민해져 있는지,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님이 오셨는가 하여 깜짝 놀랍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그를 향해 다가갑니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행동을 하는 것이지요. 저는 이런 자세로 살고 싶습니다." (마누라의 취임사 원고에서)

 

마누라는 아이들을 무척 사랑할 것이다. 이때문에 고생도 많을테다. 아이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어찌나 긴장을 하고 예민해' 할 지 상상도 간다. 지난 주부터는 온통 학교가서 아이들과 무엇을 해야 하나 머릿속이 가득했다. 아이들에게 해야 할 첫 마디가 무엇이어야 할까, 담임이 된 학급에서 반장은 어떻게 뽑아야 할까, 짝꿍은 어떻게 지어 줄까, 자리는? 번호는? 책은 어떻게 읽힐까... 등 무척 세세한 것까지 고민이 끝이 없다.

 

학교는 학교다. 대한민국 학교다. 양심을 갖고 있는 수많은 교사들의 고통의 현장이다. 무엇보다 상처투성이로 자랄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무지기수다. 좌절 또 좌절이 일상이 될 지 모르는 학교에서 건강한 교사로서 아이들과 건강하게 지내길 기원한다. 그리고, 앞으로 약 30년 간 꿈을 가꾸어야 할 마누라에게 축복을 기원한다.

 

다음은 취임사 원고에서 인용한 그 시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19만 원짜리 주주 되기

 

민주노동당은 선거 때마다 10만 원의 특별당비를 걷는다.

난 항상 기꺼이 특별당비를 냈다.

게다가 덤으로 내기도 했는데, 이번 지방선거에도 '덤'을 내기 위해 돼지를 키우고 있었다.

 

키우던 돼지가 3/5 쯤 찼던 1월이었던가... 갑자기 돼지를 당에 바치는 게 아까워졌다.

충성심이 줄었나? 애정이 애증으로 바뀌었나?

그러자 문득, 레디앙이 떠올랐다.

(레디앙은 새 인터넷신문이다. 좌익 빨갱이... 3월 중순에 오픈한다는데... 어떨랑가...)

 

그래서, 그 무거운 돼지를 들고 레디앙 사무실에 갔다.

(이 날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선거 때 잡아먹으려 한참동안이나 키운 돼지 레디앙이 잡아 드슈.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당시에는 후원계좌는 없고 주식 계좌만 있어서

1만 원 단위로만 돈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생각보다 돼지가 튼실히 자라서 19만 원이 넘는 돈이 나왔다.

천 원 단위는 잘라내고 레디앙 주식 19개 샀다.

 

근데... 왠지 투자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레디앙 관계자분들 섭섭해 하시겠지만...

그냥 힘들게, 그러나 의미있게 살려고 노력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렸다 는 뿌듯함을 느꼈다.

잘 되겠지...

 

아래 사진은 당시 사무실에 사진 기자도 없고 디카도 없어서 문선영 기자가 자기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이다. 오늘 사진을 보내주었다.

레디앙 잘 나가면 '생색낼 증거' ^^


사진 왼쪽은 전 민주노동당 기관지위원회 편집위원장이고 현재는 레디앙의 편집국장... 이광호 아찌... 오른쪽? 19만 원짜리 주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