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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예술

 

  타인의 고통에 예민해 진다는 건 사랑과 보살핌으로 주변을 물들이기 위한 초석이지만, 그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사람이 너무 많은 이 시대에 무슨 과욕이냐 싶을 수도 있지만, 사실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민감해 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하루 10분 이상씩 돌이켜 볼 여유를 갖고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타인의 아픔을 눈치 챌 수 있다. 사람들은 이를 애써 무시할 뿐이다. 감당하지 못할 아픔들에 버거워지기 싫어서. 이런 식으로 자신의 한계를 긋는 작업을 계속하는 까닭에 사람들은 그 이상을 알기가 어렵다. 그 이상을 실천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영웅이 아닌 이상 '모든'사람의 고통에 민감해질 필요는 없다. 나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내가 손 내밀면 잡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민감해질 필요는 있다. 이러한 노력이 더 넓은 세상, 더 많은 사람에게 뻗어나갈 수 있을 거란 믿음을 가지고. 

 

 타인의 고통을 아는 사람이 그 고통을 어루만져주고, 치유해 주고 싶다면 응당 타인의 고통을 느끼고 있음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날 것으로 표현하기보다 '타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해 주는 것이 상대방에게 더 '필요'하다. 

 

  자신이 느끼는 고통을 상대방이 공감하길 바라지 않는 사람. 공감해 주더라도 표현해 주지 않길 바라는 사람. 또 적극 표현해 주길 바라는 사람. 타인의 고통에 접근하기 위해선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럼 누가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지를 어떻게 알 것인가?  이건 정말 어려운 문제다. 충분한 시간을 나누기, 풍부한 감수성으로 타인의 감정 느끼기, 자기가 느낀 것을 표현해내기... 이런 경험들이 역사적으로 축적된 것이 음악, 미술, 문학, 역사, 철학 즉, 예술과 인문학이다. 예술과 인문학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사람에게 가는 길'을 찾는 이들을 위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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