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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소설이 주는 떨림. 희열.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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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18
    책 읽는 연어(1)
    emily

책 읽는 연어

 사춘기 시절에 나는 책을 통해서 사랑을 배우고, 세상을 배웠다. 23살 즈음 사랑에 대한 지독한 열병이 식어가는 시기에, 세상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던 시기에 책을 읽고 나서 느끼는 감정에 변화가 왔다. 나는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지만, 오래간만에 만난 사람은 내가 머리카락이 많이 자랐음을 알아채는 것 처럼, 난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아주 간만에  찌릿한 소설책을 한권 읽음으로 인해서 비로소 그 변화를 눈치채게 되었다. 나는 책을 통해서 나의 경험을 반추하면서, 화자의 이야기와 나의 경험을 함께 버무려 질겅질겅 씹고 있었던 것이다.

  변화는 내 몸에 아주 잘 맞는 옷을 입은 것 처럼 편안함을 주었다. 때로 경이롭기도 했다.  화자를 잘 이해할 수 있어서 편안했고, 내 몸속에 흐르는 물줄기와 비슷한 다른 사람의 몸 속에도 흐른다 사실에 경이로웠다. 작가들은  내가 경험했지만 미처 표현하지 못한 그것을 책 위에 유려하게 펼쳐 놓는다. 

 그 유려함에 잔잔히 흐르던 내 안의 물줄기는 갑자기 또 하나의 물살을 만나며 소용돌이 친다. 감정의 파도타기. 희열. 떨림. 문학 작품을 읽는 기쁨!  나는 루이제 린저, 베른하르트 슐링크 만큼이나 글을 잘 쓰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내가 책을 펼쳐들어, 탐독하는 순간에 비로소 작가의 몸에 흐르던 물줄기와 나의 그것이 하나 됨이 체현된다. 책을 정말 맛있게 읽은 후에는, 한명의 독자로써 작품을 완성하는 일에 동참하는 기분이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더 리더』(2009 봄) :

루이제 린저, 『생의 한가운데』(2008 겨울)

아모스 오즈, 『나의 미카엘』(2008 겨울)

오쿠다 히데오, 『남쪽으로 튀어』(2008 가을) 

한강, 『채식주의자』(2008 여름)

최인훈, 『광장』(2008 봄) 

황석영, 『바리데기』(2007 가을)

어반 얄롬,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2007 가을),

박현욱, 『아내가 결혼했다』(2007 가을)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2007 여름),

로맹가리,『유럽의 교육』(2006 겨울),

라우다 에스키벨,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2006 겨울)

에밀 아자르,『자기 앞의 생』(2006 겨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동안의 고독』(2006 가을)

루이스 세뿔베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2006 여름)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2006 여름)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2006 여름)

알베르 까뮈, 『이방인』(2006 여름)

카렐 차페크, 『호르두발』(2004 봄)

카렐 차페크, 『평범한 인생』(2004 가을)

프란츠 카프카, 『변신, 시골의사』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안도현, 『연어』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파트리크 쥐스킨트, 『좀머 씨 이야기』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이만교, 『결혼은 미친짓이다』

 

  그때 그때 물길이 만남는 순간을 기록으로 남겨놓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이제라도 제목이라도 기록할 마음을 먹은 게 다행이다. 차차 독후감을 써 내려 가야겠다. “처음에는 마구 읽기만 하다가 나중에 가서 비로소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메모해 두지 않으면 무엇을 읽고 무엇을 안 읽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더 리더, 195)

 

 

 



Bernhard Schrink, 『Der Vorleser』

한국어판 : 김재혁 옮김,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이레

 

왜일까? 왜 예전엔 아름답던 것이 나중에 돌이켜보면, 단지 그것이 추한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느닷없이 깨지고 마는 것일까? 상대방이 그동안 내내 애인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왜 행복한 결혼 생활의 추억은 망가지고 마는 것일까? 그런 상황 속에서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동안은 행복했는데! 마지막이 고통스러우면 때로는 행복에 대한 기억도 오래가지 못한다. 행복이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 때에만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고통을 잉태한 것들은 반드시 고통스럽게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일까? 의식적인 고통이든, 무의식적인 고통이든 간에? 그러면 무엇이 의식적인 고통이고 무엇이 무의식적인 고통인가?(43)

 

그녀는 진지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샤워실과 침대로 이끌기 전 반 시간가량 그녀에게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어주어야 했다. 이제 나도 샤워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그녀의 집에 올 때 함께 가져온 욕망은 책을 읽어주다 보면 사라지고 말았다. 여러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어느 정도 뚜렷이 드러나고 또 그들에게서 생동감이 느껴지도록 작품을 읽으려면 집중력이 꽤 필요했기 때문이다. 샤워를 하면서 욕망은 다시 살아났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이것이 우리 만남의 의식儀式이 되었다.(49)

 

나는 모든 게 다 내 책임이라고 말했다. 내가 너무 생각이나 조심성 없이 그리고 애정 없이 행동한 것이다. 나는 그녀가 상처받은 것을 이해했다. 또 나 따위가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녀가 상처받지 않은 것도 이해했다. 나는 그녀가 나로 인해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의 행동을 그냥 단순하게 보아 넘길 수는 없었음을 이해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녀가 나로 인해 상처받았음을 고백했을 때 나는 행복했다.(56)

 

모든 사람이 다 그럴까? 나는 젊었을 때 지나치게 자신감을 느끼거나 지나치게 자신 없어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나 자신을 너무 무능력하고 초라하며 보잘것없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스스로 전체적으로 보아 성공했으니 모든 일에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감을 느낄 때는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해결해 내곤 했다. 그러나 더없이 작은 실패 하나도 나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확신시키기에 충분했다. 자신감을 다시 얻는 것은 결코 성공에 따르는 결과가 아니었다. 내가 이룬 것은 나중에 비교해보면 내가 실제로 해낼 수 있다고 기대하거나 남에게 인정을 기대했던 것에 비참할 정도로 못미쳤으며, 내가 그것을 실패로 느끼느냐 성공으로 느끼느냐는 오로지 나의 기분에 달려 있었다.(74)

 

그분도 한 때 감정이 풍부한 청년이었겠지만,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다 보니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감정들이 말라 죽었는지도 모른다.(150)

 

“네가 어렸을 때 엄마가 네게 무엇이 좋은지 너보다 잘 알고 있으면 네가 마구 화내던 것 생각 안 나니? 어린아이들의 경우에도 그런 이야기를 어느 수준까지 하는 게 좋은 건지가 정말 문제겠지. 이것은 철학적인 문제야. 하지만 철학은 어린아이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아. 철학은 아이들 문제를 교육학에 넘겨주었어. 그런데 교육학이 아이들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어. 철학은 아이들을 잊었어.”(152)

 

“하지만 어른들의 경우에는 내가 그들에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좋다고 여기는 것보다 우위에 두려고 하면 절대 안 돼.”(154)

 

“만일 네가 서술한 상황이 그 사람에게 어쩌다가 생긴 것이거나 아니면 유전적인 것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라면, 너는 당연히 행동을 해야 한다. 네가 상대방을 위해 무엇이 좋은 건지 알고 있고 그 사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너는 당연히 그 사람이 그에 대해 눈을 뜨도록 해주어야 한다. 물론 최종 결정은 본인에게 맡겨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해야 해. 그 사람과 직접 말야. 그 사람 등 뒤에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단다.”(154)

 

우리가 말하는 것이 진리인가 아닌가 여부는 우리의 행동에 달려 있기 때문에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186)

 

한나는 펜에 힘을 잔뜩 주어 쓴 것 같았다. 종이 뒷면에까지 글씨 자국이 났기 때문이다. 내 주소 역시 힘을 잔뜩 주어 썼다. 한가운데를 접은 편지지의 아래쪽 면과 위쪽 면에 박힌 글씨 자국을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198)

 

나는 한나의 글씨체를 들여다보면서 그것을 쓰느라고 그녀가 얼마나 많은 힘을 소모하였으며 또 얼마나 투쟁을 해야 했을지 깨달았다. 나는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동시에 나는 그녀가 불쌍했다. 너무나 지연되고 실패한 그녀의 인생이 불쌍했고, 그녀 인생 전체의 지연과 실패가 가엾게 느껴졌다. 어느 누가 제때를 놓쳤을 경우, 어느 누가 무엇을 너무 오랬동안 거부했을 경우, 또 어느 누구에게 무엇이 너무나 오랫동안 거부되었을 경우, 그것이 나중에 가서 설사 힘차게 시작되고 또 환희에 찬 환영을 받는다고 해도, 나는 그것은 이미 때가 너무 늦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너무 늦은’이라는 것은 없고 ‘늦은’이라는 것만 있는 것인가, ‘늦은’ 것이 ‘결코 없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199~200)

 

“나는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런저런 일을 하게 만들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어. 그리고 넌 알 거야. 너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누구도 너한테 해명을 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야. 그렇기 때문에 법정 역시 나한테 해명을 요구할 수 없었어. 하지만 죽은 사람들은 내게 그것을 요구할 수 있어. 그들은 나를 이해하거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법정에 있을 수는 없었지. 하지만 그들이 그곳에 있었다면, 그들은 나를 특히 잘 이해했을 거야. 이곳 교도소에서 그들은 나하고 자주 같이 있었어. 그들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매일 밤 나를 찾아왔어. 재판을 받기 전에는 나는 그들이 나한테 오려고 하면 쫓아버릴 수 있었어.”(210)

 

나는 지난 오랜 세월 우리의 이야기가 정말로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우리의 이야기가 행복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는 뜻은 아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그것이 슬픈 이야기냐 아니면 행복한 이야기냐 하는 물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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