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볼까 말까...

2007/11/22 20:48

TV가 고장났다.

 

7년 전 혼자살게 되면서 이런저런 살림살이를 장만했지만, TV는 사지 않았다.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날을 샐 때까지 줄기장창 보는 내 폐인기질을 아는지라, 아예 두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 4년 전, 이사를 하게 됐다.

후배녀석이 뭘 사줄까 묻더니, 새 TV를 사왔다.

처음 사왔을 땐, "일부러 안두고 사는건데 왜 사왔냐"고 지랄했지만,

난 금새 고것에 쏙 빠져들었다.

특히 피곤한 날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리모콘만 쥐고 쇼파에 철퍼덕 엎어져서 날을 새곤 했다.

TV가 없던 시절보다 집에서 책읽는 시간, 청소하는 시간, 영화보는 시간, 일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어갔다.

 

며칠 전, 그날도 역시 리모콘 부여잡고 TV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화면이 먹통이 되더니 쿵쿵쿵쿵,,, 소리만 계속된다.

고것이 고장난 것이다.

쿵쿵쿵쿵 소리는, 마치 성치않은 심장이 박동치는 소리같이 들린다.

 

TV 상표를 보니, 그 유명한 '인간중심의 디지털 세상'을 만들겠노라는 LG전자.

때리릭 전화를 걸어 상태를 설명했더니, AS기사가 왔다.

TV를 뜯어보더니,

기사 "이상하네~ 여기로 이사오기 전엔 어디 사셨어요?"

나 "그건 왜요?"

기사 "혹시 지하에서 사셨나 해서..."

나 "전 지하에서 살다 왔지만, 이 TV는 여기와서 산거예요. 그러니까! 산 지 3년 좀 넘었다는 거죠."

기사 "아니,,, 그런데 왜 이러지? 습기찬 곳에 오래 두거나 했을 때나 생기는 고장인데,,,"

나 "고칠 수 없나요?"

기사 "그게, 좀 중요한 부품이 나간 거라,,,5만원입니다"

나 "그럼 안고칠래요~ 수백만원짜리도 아니고 20만원짜리 TV, 5만원주고 고치기는 그렇네요~"

기사 "그러게요, 왜 이게 나갔을까요... 혹시 필요하시면 연락주세요"

 

우쒸~ TV 고치는 데 5만원을 쓰느니, 차라리 TV의 덫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삼자 싶었다.

그 뒤로 집에 들어갔을 때, 리모콘을 손에 쥐어도 별 힘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저쪽 "네~ 안녕하십니까~ *** 고객님이십니까?"

나 "어디시죠?"
저쪽 "LG전자입니다"

나 "LG전자에서 어떻게 내 핸드폰을 알죠?

저쪽 "며칠 전 TV 때문에 서비스센터로 전화하지 않으셨습니까?"
허걱, 늘상 함부로 내 핸드폰으로 전화질해대는 각종 업체에 민감해있던 터라,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는데,,,

일단 핸드폰 번호를 알 이유는 있었던 곳에서 온 전화다.

그런데,

저쪽 "네~ 서비스는 잘 받으셨습니까?"라며 염장을 긁는다.

나 "20만원짜리 가전제품 고치는 데 5만원 달라는 데 어떻게 고칩니까?"

저쪽 "네~ 구입한 지 1년이 넘으면 무상AS는 안됩니다"

나 "아 놔~ 누가 공짜로 고쳐달래요? 잘나가는 기업 제품이 3년만에 작살났다는 것에 대해 항의하는 겁니다"

그/런/데,

저쪽, 여전히 지나치게 친절한 목소리로

"아~ 네~ 또 필요한 것 없으십니까?"라고 하는 것이다.

이 무슨... 내 필요한 것에 대해 충족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항의하고 있는데, '또 필요한 것?'!!!

'또' 라는 단어를 붙이려면, 고장난 거 고쳐주고 난 다음에 써야 하는 것 아닌가?

나 "아니, 고장난 것도 못 고쳤는데, 필요한 거 뭘 해줬다고 '또 필요한 것 있냐'란 말입니까"

 

그/런/데,

저쪽, 역시나 지나치다 못해 기분나쁘기까지 하도록 친절한 목소리로

"아~네~ 그럼, 또 필요한 것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주십시오~"

 

요즘 어디가나 넘쳐나는 '친절한' 목소리들...

그 목소리를 내는 노동자들의 잘못은 아닐진데, 이제는 그 목소리들에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내용적으로는 해결해주는 것 하나 없고,

심지어 해결을 요구하기까지 하면서 (이를테면, 보험을 들어라, 경품을 줄테니 주민번호를 대라 등등)

목소리는 상냥, 친절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들.

이쪽의 이야기는 아랑곳 없이 자신들의 이야기만 하면서, 너무나 친절한 그 목소리들...

 

그러나, 온갖 항의와 막말을 감내해야 하는 건 '목소리'들의 몫이고,

그 목소리들을 고용한 자들은 그 '상냥친절' 뒤에 숨어서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가.

TV 만든 노동자나, TV 고장에 항의하는 고객들로부터 모욕을 당하는 목소리들에게 줄 임금 아껴서,

수백, 수천, 수억원 들인 광고로 '인간중심의 디지털세상'을 만들어가는 기특한 기업의 탈을 쓰고

숨/어/있/다

LG는 해고노동자가 40일 가까이 단식을 해도 눈 하나 꿈적 하지 않았었지...

 

파주시민 이씨의 20인치짜리 TV 하나 흔쾌히 고쳐주지 못하는 기업이, 무슨 인간중심의 디지털세상을 만들겠는가.

갈등~ TV! 고칠 것인가, 냅둘 것인가...

 

(그래도 비굴한 나는, 고민 중이다...5만원 주고 고치는 게, 20만원 주고 사는 것 보다는 훨 낫지 않을까... 흑~)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11/22 20:48 2007/11/22 20:48
Posted by 흐린날
태그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s://blog.jinbo.net/grayflag/trackback/176

댓글을 달아주세요

  1. 2007/11/22 21:38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TV 반대!!(무익!!...안보면서 유익한 시간을 보내지를 못해서 그렇지요...ㅡ.ㅜ)
  2. 2007/11/23 02:29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추천, 꾸욱~!!! ^^
  3. 2007/11/23 03:07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윽 저도 아무 생각없길 바라며 티비 켜면 잠들때까지 주구장창...
  4. 2007/11/23 16:31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저도 지역동지가 준 tv 4만 5천원주고 샀는데 고장이 나서리... 새로 얻었지만 그 굴레를 벗어나고자 차라리 늦게 들어간다는...ㅋ
  5. 2007/11/23 16:43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그럼 무한도전은, 왕과나는, 뽀로로의 대모험은....
  6. 2007/11/24 20:42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그냥 눈 딱 감고 5만원 주고 고치는 겝니다^^. 보고 싶으면 보고 안 보고 싶으면 안 보고...^^.
  7. 2007/11/26 15:46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음... 아무래도, 5만원은 써야할 듯...쩝...
    직접 짊어지고, 서비스센터를 찾아가면 출장비 정도는 깍이겠지요?
    이 굵은 팔뚝 뒀다 뭐에 쓸꼬... 드뎌 용처를 발견했노라~

<< PREV : [1] : ... [74] : [75] : [76] : [77] : [78] : [79] : [80] : [81] : [82] : ... [149] : NEXT >>

BLOG main image
by 흐린날

공지사항

카테고리

전체 (276)
일기장 (149)
기행문 (20)
좋아하는 글들 (47)
기고글들 (13)
내가찍은 세상 (45)
내가 쓴 기사 (1)
울엄니 작품 (2)

글 보관함

Total : 250921
Today : 115 Yesterday :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