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우체국
-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낸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06/05 01:08 2005/06/05 01:08
Posted by 흐린날
태그

맑은사람

2005/06/05 01:06

### 2004년 봄, 어딘가로부터 글을 부탁받고 쓴 글인데, 우여곡절 끝에 활자화되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 어떤 선생이 이런 말을 했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지 말라.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다만 열심히 해라”

그때는 참 이상한 선생이라고 생각했다. 모두 최선을 다하라는 세상에, 최선을 다하지 말라니.

그런데, 최선을 다하는 건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한 사람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떠났다. 아주 멀리.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버렸다. 그가 조금만 더 나태했더라면, 그가 조금만 요령을 피웠더라면,,, 가슴 쥐어뜯으며 억울해하지만, 그것은 내가 억울해 할 일이 아니다. 그가 떠나기 전에도, 그가 떠난 뒤인 지금도, 다른 사람들이 후회하며 되돌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는 떠나도록 되어있었나 보다. 왜? 그는 늘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지금은 번쩍거리는 통유리로 감싸인 건물들이 으리으리하게 들어선 서울 창신동 언덕배기. 1995년 11월말, 그곳에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사무실이 있다. 그곳에 김종배도 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전노협 마지막 대의원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정종을 좋아하는 그는 동원빌딩 5층 넓은 사무실 한가운데 놓인 난로 위 물이 보글보글 끓는 주전자 속에 정종 댓병을 박아두고, 틈틈이 홀짝거리며 회의자료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벌써 두병째다. 사무실 온기라고는 그 난로에서 나오는 미지근한 기운 뿐인데, 따뜻한 정종으로 추위를 견디며 전노협 해산대의원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마지막이고, 이젠 해산할 조직. 무에 그리 날밤 새우며 할 일이 있었냐고 묻지 마라. 1995년 겨울, 그는 그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모두들 새로 태어나는 조직 ‘민주노총’ 일구기에 여념이 없을 때, 그는 이제 사라질 조직 ‘전노협’에 파묻혀 있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다른 동지들은 이미 민주노총에서 새 보직을 받은 뒤였고, 일부는 벌써부터 민주노총으로 출근하는 때였다. 그래서 사무실은 더욱 넓어 보였고, 그는 남아서 전노협 해산대의원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누군들 사그러지는 조직 뒤치다꺼리가 내켰을까. 그러나 그는 다시 정종 한 잔…, 일이 지겨워서 들이키는 술이 아니었다. 술이 좋아 마신 술도 아니었다. 그가 전노협을 정리하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너무도 허접스러워 지금은 고물상에서도 받아줄 것 같지 않은 철제의자, 철제책상 따위의 개수 등을 헤아리며 전노협의 자산목록을 정리했다. 또 사업보고 한 자 한 자를 꼼꼼히 훑어봤고, 자료집도 그 어느때보다 폼나게 편집했다. 평가 내용 역시 어느 한 대목 대충 넘기지 않았다.

1995년 12월3일. 전노협 해산 대의원대회. 전노협 마지막 위원장 양규헌은 조합원들이 반듯하게 접어서 눈물 삼키며 전해준 푸른색 전노협 깃발을 가슴에 품었다. 연세대학교 강당은 살아 움직이고 실천하는 노동자들의 회한에 찬 슬픔으로 가득찼다. 전노협의 역사를 되새기니 서럽고, 박창수열사를 생각하니 억울하고, 지난 투쟁 한 꺼풀 한 꺼풀 모조리 목숨 건 일들이었다.

지나온 전노협의 역사에 김종배가 있었고, 그 김종배 역시 강당 한 구석에서 소도둑같이 큰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런 전노협과 김종배다. 함부러 전노협을, 그리고 김종배를 입에 올리지 마라. 그것은 역사다.

 


민주노총은 출범했고, 전노협은 해산했다.

모두 새로운 민주노총, 또는 산별연맹으로 발빠르게 자신의 운동 전망을 세워내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남았다. 물론 김종배동지가 남기를 원했는지는 알 수 없다.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는 일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림을 그려보려 해도 엄두조차 나지 않는 일, 그 일을 김종배가 시작했다. 전노협 자료를 정리하고, 전노협 백서를 쓰는 일이었다.

한때 전국의 주요한 투쟁을 지휘하며 책임졌고, 노동운동의 중심이었던 창신동 전노협 사무실, 이미 그 중심은 명륜동 민주노총 사무실로 옮겨간 뒤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갈 때는 짐짓 활기찼던 그곳이, 이제는 무척이나 을씨년스럽다. 구석에 박혀 쌓아진 자료는 수백상자였다. 그나마 상자라도 차지하고 있는 자료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필사한 자료 낱장들이 흩어져 있고, 천장에서는 물이 새서 사무실을 눅눅하게 했고, 자료를 들추면 쥐들이 발빠르게 도망갔다. 옛날 책 곳곳에는 곰팡이가 번져있었고, 너무 방치되서 글씨가 뭉개진 자료들이 허다했다.

김종배는 그것을 치우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떠난 사람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아무도 돕지 않은 것을 섭섭해하지도 않았다. 아니, 혹여 원망하고 섭섭해 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그런 마음을 겉으로 드러낸 적이 없다. 남겨진 자료를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을 때, 그는 전국을 돌며 지노협과 단체 자료들을 모았다. 그리고 역설했다. 자료의 소중함과 기록의 중요함을 말하고 또 말했다. 그리고, 실제 종이쪽지 하나 소홀히 하지 않음으로써 보는 이들을 숙연케했다.

전노협 백서를 쓰고 운동사를 쓰자고 해산대의원대회 때 결의는 했지만, 주요한 지도부는 감옥에 있거나 새 조직 건설 때문에 바빴다. 자연스레 전노협 백서발간위원회는 조직적 지원과,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그래도 김종배는 묵묵히 함께 일할 활동가들을 모아냈다. 돈이 필요하면 돈도 끌어댔고, 자기 온 몸을 바쳤음은 물론이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그가 편안하게 등을 뜨신 방 바닥에 맡기고 잠들었던 날이 며칠이나 됐을까.

게다가 김종배는 그 빌어먹을 돈을 아끼기 위해 또 일을 벌였다.

 


뻔한 사업기금에 책장에 드는 비용 아끼겠다고 널빤지를 사다가 한쪽에서는 사포질을 해 나무먼지가 뿌옇게 일고, 한쪽 방에서는 페인트칠이 끝난 널빤지를 말리고 있었다. 그 일이 끝나면 못질을 하여 책장을 짤 모양이었다. 타자기나 지금은 사라진 전용워드프로세서로 작성된 문서는 파일이 없어 일일이 컴퓨터에 타이핑해야 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그 많은 자료들을 아둔하게도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본 끔찍한 장면 중의 하나였다. 분류가 끝난 자료는 달아나지 않도록 묶어야 하는데 그는 아교풀을 사다가 손수 떡제본을 하고 있었다. 그전에 기획사를 운영해본 경험이 있다지만 이 또한 끔찍했다.(차남호, 김종배 추모집 「꼭 필요한 사람은 늘 먼저 떠나는가」, “그리움 대신에 ‘긴장’을 남기는” 중에서)

 


우리는 미처 지나간 자료들의 가치를 몰랐고, 기록의 중요함을 몰랐던 때, 그는 그것들을 제 몸보다 귀히 돌보았다. 그리고 결국 일년 반 남짓해 전화번호부 책만큼이나 두꺼운 책 열 세권짜리 ‘전노협 백서’가 우리 눈 앞에 탄생했다.

 


백서팀이 쓴 발간사는 1980~90년대 동지들을 “불굴의 투지로 삶 전체를 부딪쳐감으로써, 자기를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자유롭고자 했던 인간들…”이라고 불렀다. 어쩌면 이 말은 바로 그 자신을 향해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헌사를 통해 밝힌 전노협이라는 시대의 역사적 진실은 다름 아닌 ‘인간미’ 그 자체였던 것이다. “전노협 백서는 바로 역사 속의 그들에게 바친다. 설사 그들이 지금은 탕아가 되고, 적이 되고, 자신들이 경멸했던 산업전사의 쓰레기가 되고, 노동귀족이 되었다 할지라도, 망설임 없이 그들의 1980~90년대 삶에 바친다.”

그가 인류의 보편적인 진실과 가치에 의거해서 더 크고 길고 넓은 안목으로 인간과 삶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임을 이보다 더 잘 나타내는 문구는 없을 것이다. 절망과 배신, 나약함과 비굴함까지도 껴안아 주고싶어 했던 사람, 이런 사람을 활동가로 가질 수 있었던 시대는 분명 행복한 시대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우리 역시 시대의 행운아들이다. (김하경, 김종배 추모집 「꼭 필요한 사람은 늘 먼저 떠나는가」, “새벽에 떠난 사람” 중에서)

 


1997년 7월. 많이 덥지 않았던 날, 전노협백서 출판기념식이 열렸다. 김종배는 해내고 말았다. 절대로 가능하지 않아 보이던 일을 그는 해냈다. 그랬다. 책장 수십개도 그 큰 손으로 다 만들어냈고(전노협 백서팀이 문을 닫으며 그 책장들을 처치할 수 없어서 결국 동원빌딩 건물 뒤편에 버려야 했을 때, 종배형이 얼마나 안타까워했던가. 탐욕스러운 내가 버리기 아깝다는 핑계로 그 책장 두 개를 갖겠다고 했을 때, 종배형은 또 페인트를 사다가 책장 칠을 다시 해줬다. 아! 난 얼마나 욕심많고 철없는 후배였던가), 그 많은 책장들에 그 많은 자료를 다 정리해서 채워냈고, 드디어는 믿기지 않게도 전노협백서를 만들어낸 것이다.

다들 이렇게 이야기했다. “김종배가 했기 때문에 나왔다”라고.

우리는 비겁하게도 입에 발린 감탄만 했을 뿐이다. 백서가 나올때까지 그가 했을 온갖 마음고생, 몸고생은 비켜갔다. 만들어질 책의 두께와 깊이만큼 몹쓸 병 때문에 자꾸만 튀어나오던 그의 눈알은 점점 그 큰 안경알에 가까워졌고, 그가 매일 먹어야할 알약의 개수도 늘어만 갔는데…, 우리는 정작 그런 사실은 외면했다.

우리가 목전에 닥친 일조차 칭얼대며 내일로 미루고 있을 때, 그는 한겨울엔 냉수마찰로 잠을 쫓으며, 한여름엔 쏟아지는 땀에 몸을 적시며 그 일을 해낸 것이다.

그때 자원활동을 했던 고계형동지는 그를 “사철나무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남들이 뭐라 해도, 상황이 아무리 자신한테 불리해도, 항상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 과거에 머물지 않고 항상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면서 살았던 사람. 남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준 사람 (중략) 형은 몸 안에 보조 동력기 같은 게 하나 더 있는 것 같았다 (중략) 아무리 몸이 안 좋고, 발간 작업이 난관에 부딪쳐도 항상 묵묵히 일하며, 새로운 힘을 찾고 새로운 시도를 끊임없이 하곤 했다. 그래서 우리도 힘을 잃지 않고 끝까지 함께할 수 있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때일수록 종배형을 추억하는 이유일 것이다. 남은 사람들끼리 서로에게 종배형이 되어줘야 하지 않을까? (고계형, 김종배동지 4주기 추모집 「질그릇의 투박함으로」, “기억” 중에서)

 


고계형동지는 또 “종배형을 잊기엔 그가 남긴 자욱이 너무 깊고 푸르다”고 했다. 그렇다. 그 자욱이 너무 깊고 푸르러서 우리는 그를 잊지 못한다.

 


그가 마치 인생의 목표처럼 매달렸던 전노협백서가 나온 뒤에도 그는 여전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도 그런 큰 일을 해낸 뒤라면 크게 앓거나 긴장을 놓아버리거나 이제는 좀 쉬어야겠다고 생색을 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어느 틈엔가 공공부문노동조합대표자회의(공노대)라는 곳에서 이미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어찌보면 당췌 그가 정들 것 같지 않던 그곳 공노대에서 그는 또 날밤새며 자료집을 내고, 밤새 소주잔 기울이며 사람들을 모아냈고, 조직 안에 민주적이지 않은 것이 발견되면 치열하게 싸워서 바꿔냈다. 그는 왜 언제나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 것인가. 도대체 왜.

공노대는 다시 공공연맹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그 공공연맹과 민철노련, 공익노련이 함께 1999년 지금의 공공연맹으로 출범했다. 옛 공공연맹을 만들며, 다시 공공 3조직 통합을 하며, 그가 편안히 보낸 날이 과연 며칠이나 됐을까.

공공부문 노조가 그런 발전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는 누구보다 헌신적이었다.

그는 무슨 일을 시작하면 그 속에 온 몸을 담궈버렸다. 그래서 투쟁을 같이 해본 사람들은 그의 따스함과 사랑을 금새 눈치챌 수밖에 없다. 서울지하철 동지들은 유난히 그를 ‘형’이나 ‘아우’처럼 챙기고 찾았고 의지했다. 1994년 6.24 파업에서부터 1998년 4.19 파업에 이르기까지 서울지하철 파업투쟁에는 늘 그가 함께했다. 공공부문 파업은 마치 첩보전을 방불케하는 비밀스러운 전술 운영이 필요한 터다. 그는 전장의 참모처럼 대오의 일진일퇴를 고민하고 함께 움직였다.

또 조폐공사 구조조정 반대투쟁은 어떠했는가. 조폐창을 통폐합하겠다고 난리를 떨었고, 노조가 막아내기 위해 파업을 벌인 투쟁이었다. 게다가 나중에는 무리한 구조조정이 파업을 유발시켜서 노조를 깨기 위한 공작이었음이 드러났다. 김종배가 빠질 리 없다. 어렵고 전망이 안 보이는 싸움이었지만 그는 늘 나섰고, 조폐공사 동지들은 김종배를 ‘우리 조합원’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사무치게 서러운 투쟁을 벌여냈지만, 결국 옥천창이 폐쇄되고 조합원들이 경산으로 떠나던날 저녁 그는 “조합원들이 탄 버스가 떠나는데 낯익은 여성조합원이 버스 창문 너머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는거야. 알아들을 수 없어 입모양으로 ‘뭐라구요’라고 물었더니 손가락으로 창문에다 ‘고생했어요’라고 쓰더라”라며, 특유의 웃음을 짓는데, 그의 눈을 들여다보니 눈물이 고여 있었다.

 


조직이건 개인이건 어려움이 닥칠 때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이 있고 도움받고 싶은 사람이 있다. 내 자신이 혼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 정말 보고픈 동지가 있다. 보통사람과 좀 다른 면이 있는, 큰 덩치에 모든 일에 여유와 믿음이 있는 행동, 때론 싱겁기도 한 언제나 나의 머릿속에서 그리움과 보고픔이 떠나지 않는 김종배동지 (중략) 나이는 적지만 모든 일에서 정신적 지주였고, 옆에 없으면 왠지 불안하고, 옆에 있으면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기게 하는 동지 (강승회, 김종배 추모집 「꼭 필요한 사람은 늘 먼저 떠나는가」,“편지” 중에서)

 


때로 그는 과감한 추진력 때문에 적잖은 오해와 견제도 받았다. 어떤 큰 사업장은 의무금을 무기로 그를 자르려고까지 했다. 사업장의 크고작음에 연연하지 않았기에, 자랑거리라고는 사업장 규모밖에는 없었던 큰 사업장 입장에서는 같잖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작은 사업장의 이해를 먼저 헤아렸고, 잘못된 일은 절대로 좋은 게 좋은 식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이런 그의 강직한 성격 탓에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정작 주위 사람들의 걱정과 달리 그 자신은 여유로웠다. 허허로이 웃으며, “그렇게 하면 안되지”라며 장난스레 입을 삐죽거리거나, 사람좋게 웃었다.

그는 다른 동지 혹은 다른 조직이 자신을 괴롭게 할 때 "도대체 왜들 그러는거야?"라는 말을 혹여 했더라도 많이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그럼 우리 이렇게 해보자"라는 말을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옛 공공연맹 사무처장을 맡아 그와 함께 일했던 강승회 동지는 추모집에서 “거대조직에서 종배 너 사퇴시키면 연맹비 내고 참여하겠다고 했을 때 거대조직보다 네가 더 필요해 거절했었지. 결국 너는 그 조직의 역사적 파업을 이끌어 냈다. 그것이 네가 가진 힘이다”라고 회고했다.

 


아! 그는 또 따뜻한 사람이었다.

조폐공사와 만도기계의 구조조정 반대투쟁 선두에 섰던 지도부가 명동성당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할 때, 그는 단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명동성당에 들렀다. 전국이 다 제 집인 양 부지런히 돌아다니던 그였지만, 틈나는대로, 시간이 없을 땐 새벽녘이라도 농성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투박한 손으로 캘리포니아 김밥을 싸오고, 누런 주전자에 생맥주를 담아오고, 농성장에서는 찾기 힘든 먹을거리들을 양손에 들고 나타나서 이빨을 드러내고 씨익 웃던 그를 누가 잊을 수 있을까.

 


시골에 계신 어머니를 보고싶을 때마다 봐야겠다며 그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은 자주색 프라이드 왜건을 장만했다. 어머니가 계신 진부보다 투쟁 현장에 더 자주 오가야했던 그 프라이드. 그는 그 차를 ‘엔터프라이드’라 칭하며 전국 투쟁현장을 누볐다.

그런 그의 마음 속에는 항상 어머니가 계셨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일을 그리 열심히 했다 하니, 얼마나 어머니 속을 썩였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니다. 그가 징역에 있을 때 어머니에게 쓴 엽서에는 어머니를 향한 그의 사랑이 그대로 묻어난다. “항상 건강하세요. 엄마 곁에서 숨쉬고, 웃고 싶어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바꾸지 않을 그래서 언제나 보고 싶은 엄마”

그는 또 “번개와 천둥이 심한 날, 바람이 거센 날, 눈보라치는 날, 멀리 떨어진 곳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선 안됩니다. 헛된 기다림이 쉬울까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근심과 걱정 속에 빠지기 때문이지요. 겨울엔 먼길 떠나지 마세요. 언제나 제 의견을 존중하시는 어머니! 겨울에, 언땅 위로 달리는 저 위태로운 기계들을 믿을 수 없어요. 겨울엔 절대로 먼길 떠나오지 마세요.”라고 썼다. 머나먼 도시 감옥에 갇힌 그는 어머니가 먼 곳까지 아들을 면회하러 찾아오는 것이 못내 걱정스러워 이런 편지글을 쓴 것이다.

그는 참으로 따뜻한 사람이었다.

 


빌어먹을,,, 그에 대해 쓰자니 욕만 나온다.

그는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서 있다. 그의 왕성했던 활동, 그 활동의 강직함, 그리고 그의 맑고 깨끗함. 나는 도저히 그것들을 다 쓸 수 없다. 내가 조금만 더 감성적이라면, 그게 안된다면 천박하더라도 현란한 글재주라도 있었다면. 아니 내가 조금만 더 그를 잘 안다면…

 


“그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타협을 하지 않았다. 그럴 때의 그는 정말 도발적이다. 그는 정치적 견해로 고립되어도 일로써 그 난관을 넘어서곤 했다. 그래서 그는 남들보다 아니 나보다 두 배는 바쁘게 살았다. 전국을 누비고 사람들과 만나 술을 기울이다가도 사무실에 들어와서는 자료집을 만들다 쪼그려 자곤 했었다. 체력이 정말 좋구나 생각을 했는데, 그 때 그런 그의 쉼없는 활동을 말리지 못했던 것은 사고 이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이종회, 김종배동지 3주기 추모집 「늦은 나를 질책할 수 있다면」 “지금도 함께하는 종배를 생각하며” 중에서)

 


그런데, 참 이상하기도 하다. 그렇게 일을 짊어지고 살았다면, 그는 늘 일에 찌들어 힘든 표정이었어야 하는데, 왜 그의 눈빛은 늘 살아있고, 얼굴에는 늘 생기가 돌았을까. 우리는 겨우 하룻밤 일하면서도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단 채 짜증스럽다는 것을 표현하지 못해 안달인데 말이다.

김종배는 그런 사람이었다.

일에 치이거나 매인 사람이 아니라, 늘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고, 즐기고, 실패하면 좌절하는게 아니라 다른 방안을 마련하며 해나가는, 진지하지만 경직되지 않은 진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눈을 한번이라도 맞추고, 그의 일하는 모습을 한번이라도 눈여겨 본 사람이라면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소주라도 한잔 나눠 마셨다면, 도저히 잊지 못하게 되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도 좋은 김종배는 터무니없이 멍청했다. 왜 쉬어야 할 때를 몰랐을까. 왜 늘 열정적이었고, 그 열정은 멈추지 않았을까.

'노동해방'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그의 '육체'를 늘 피로하게 했고, 어처구니 없게도 피로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나태하지 않았던 그의 '건강'한 품성이 그를 느닷없는 사고로 몰아넣었으니 말이다.

그가 조금만 영악했더라면 하고 생각해보지만, 그랬더라면 우리의 기억 속의 그는 아주 딴 사람이 되버렸을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멍청했던 그가 미워 죽겠다.

 


지금도 나는 많지 않은 일을 가지고 "하기 싫어 죽겠다"고 징징거리며 그를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는 이런 철없는 후배들한테 결코 화를 내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좀 쉬었다가 다시 해봐. 금방 끝낼 수 있을거야"라고 말하며 웃을 뿐이었다. 그래도 징징거리면 "그럼 나가서 소주 한잔 하고 들어와서 할래?"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러면 철없는 후배는 남아있는 일을 금새 끝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마음이 여유로와지곤 했다. 그와 함께 기울이는 소주 잔이 너무도 가벼웠다.

 


“꼭 필요한 사람은 늘 먼저 떠나는가”

그가 떠난 1년 뒤 그를 아는 사람들이 엮어 낸 추모집의 제목이다. 한국감정원노조 위원장을 지낸 공재호동지가 쓴 추모글의 제목을 땄다. 김종배동지에 대한 글에서 빠지지 않는 말이 아마도 그가 꼭 필요했다는 말일 게다. 이 세상 누군들 필요치 않은 사람이 있을까 만은, 그를 아는 사람들은 꼭 그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마도, 그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제 몸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동지들! 최선을 다하지 말라. 최선을 다하면 맑고 깨끗한 사람으로 기억되리라,,, 그러나 그것뿐이다. 마석에 먼지묻은 조화와 함께 1년에 한번 추모될 뿐이다. 그 추모 행렬은 어느덧 잦아지리라. 그리고, 그 맑고 깨끗한 사람을 기억하는 자들 역시 모두 떠나게 되리라.

 


누구를 추모하며 썼을까. 그가 남긴 이 시(詩)를 보며 우리는 늦여름에 떠난 그를 기억한다.

 


당신을 떠나 보내고

 


늦가을,

당신을 떠나 보내고

낯선 영안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당신을 지우기 위해

모진 애를 씁니다.

포도에 떨어지는 젖은 낙엽을 밟으며

아무도 서로를 위로하지 못하는

서로의 슬픔을 싸안고

이제 아주 떠나버린 당신을,

애쓰지 않아도 시간속에 퇴색할

당신을 향한 슬픔을 잊기 위하여

모진 애를 씁니다.

 


그대는,

이미 추억이 되어서

슬픈 빛살처럼 머물 뿐인데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겠다며

몰려가는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지는 날이기도 합니다.

맹세한다고 했지만

번번히 우리들의 맹세는 되풀이됩니다.

그대가

떠나며 남긴 교훈보다는

떠나버린 빈 자리에서

우리의 가슴은 더욱 절실해집니다.

 


(김종배, 김종배유고집 「어머니, 겨울엔 먼길 떠나지 마세요」“당신을 떠나 보내고” 중에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06/05 01:06 2005/06/05 01:06
Posted by 흐린날
태그

### 2002년 12월, <노나메기> 기고글

 

국어사전에 '스승'이란 '자기를 가르쳐 주는 사람. 사부(師傅). 선생. 함장(丈)'이라고 나와있다.

나를 가르쳐 준 '스승'에 대해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니 막막해졌다. 도대체 아무도 떠오르지를 않는다. 내 삶이 길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30년 넘게 살아오면서 떠오르는 '스승'이 없는 것을 보니 '내가 참 복이 없나보다'라는 어리석은 생각까지 든다.

그러나, 어찌 내가 스승 없이 이만큼 자랐겠는가. 돌이켜보니, 내 주위에는 진정한 올바름에 대해 가르쳐주고, 또 나를 일깨워주는 스승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아닐까. 배우기보다 가르치려들고, 받아들이기보다 내치고, 따라하기보다 헐뜯고, 그러다 보니 나이 서른이 넘도록 나의 정서와 의식이 풍성하지 못하고 이처럼 앙상한 것은 아닐까.

덜컥 겁이 난다. 온전치 못하고 앙상하나마 지금껏 평탄하게 세상을 살아올 수 있었고, 이후로도 나를 풍성하게 가꿔나갈 수 있는 지혜를 나에게 가르쳐 준 사람들을 나는 잊고 살아왔던 것이다.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나의 스승들이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 옆에 해장국집이 있다. 지금은 그만두었지만 몇 달 전까지 그 밥집에서 일하는 청년이 있었다. 내가 그 집에서 몇 차례 밥을 먹으며 그와는 얼굴을 알아볼 사이가 됐다. 밥 먹을 때 어깨 넘어 듣자하니 그는 낮에는 해장국집에서 밤에는 PC방에서 일을 한다고 한다. 그때는 '젊은 나이에 참 고될텐데 표정은 늘 밝구나'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사무실 근처를 오가며 철가방을 실은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다니는 그를 종종 보게 됐다. 그는 그때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누나, 안녕하세요"라고 아는 체를 했다. 언젠가는 어두운 표정으로 혼자 앉아서 해장국을 퍼먹고 있는 내게 와서 "누나 일하는 곳은 많이 힘든 데죠?"라고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의 표정은 너무도 밝고 화사해서 난 문득문득 놀라기까지 했다.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하고, 그는 나를 잘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로부터 '따사로움'을 배웠다.

 

버스를 타고 다섯 시간 정도 가면 우리 집이 있다. 아니, 부모님의 집이 있다. 서울에서 사는 나는 바쁘다는 이유로 시골집에 1년에 한두 번 명절때나 찾아간다. 집에 가면, 난 서울에서 무척 힘들었다는 듯이 두 다리 죽 뻗고 누워서 책을 들춰보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잠을 잘 뿐이다. 엄마가 밥상을 내오면 자연스레 일어나 먹고, 다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잠을 자고, 다시 엄마가 깨우면 일어나 밥을 먹는다. 행여 밖에서 아빠가 같이 고추를 따자고 부를라치며 "이따가요~"라는 한마디만 내던진 채 다시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처박는다. 다시 서울로 올라올 때, 부모님은 '전화 자주 하라'는 다짐을 몇 번이나 받지만, 서울행 차를 타고나면 다 잊어버리고 만다. 결국 부모님이 전화를 걸고, 난 "지금 바빠요. 다시 전화할게요"라고 한다. 그렇지만 엄마, 아빠는 서울 나들이를 할 일이 생기면 내가 무거워서 싫다고 두고 온 김치며, 고추장이며, 집에서 딴 호박 따위를 싸고 지고 올라오신다. 그런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배웠노라고, 말만 뇌까리는 것이 얼마나 싸가지 없는 짓인 지 안다. 그렇지만, 나는 엄마 아빠한테 '사랑'을 배웠다. 그러나, 아직 나는 그 '사랑'을 부모님께 되돌려드리지 못하고 있다.

 

몇 달 째 싸우고 있지만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도리어 경찰이며 깡패들한테 잡혀가거나 두드려 맞을 뿐인 장기투쟁을 벌이는 노동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지치지 않는다. 아니, 지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쳤다고 해서 그만두거나 흩어지지 않는 것이다. 길게는 서너 달, 더 길게 삼사 년이 넘도록 투쟁을 벌이지만 결코 포기하거나 배반하지 않는다. 그런 동지들이 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해서도 굳센 팔뚝을 번쩍번쩍 들어올리며 목청껏 구호를 외친다. 농성하느라 한겨울 차가운 길바닥에서 한데 잠을 자도, 쓴 소주로 허허로이 몸을 덥힐 뿐 슬쩍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나지는 않는다. 나는 그 동지들로부터 '노동자'를 배운다. 나는 그들에게 모름지기 노동자의 진정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배운다. 그들의 삶에 계급이 있고, 전투가 있고, 민주주의가 있고, 그리고 동지가 있다.

 

경기도 마석에는 모란공원이라는 묘지가 있다. 그곳에는 많은 동지들이 있다. 평범한 노동자들을 노동운동의 길로 이끌어낸 노동자 전태일도 있고, 파업투쟁을 벌이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동지들 곁을 떠났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회보험노조 최진욱 동지가 있다. 민주노총 건설을 위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하다 병을 얻어서 숨을 거둔 동지들은 유구영, 최명아, 정성범, 한경석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자신이 속한 현장에 충실했고, 어찌 보면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고, 그러나 지금도 우리 곁에서 어깨 걸고 있는 그들로부터 나는 '긴장'을 배운다.

 

그리고 마석에는 또 한 동지가 있다. 덩치가 컸고, 손이 컸던 만큼 배포도 컸고, 가슴이 넓었던 그는 주위 동지들을 일깨우는 힘도 컸다. 백기완 선생이 "여기, 원통한 종배가 눈을 뜨고 누웠구나"라고 했던 것은 그의 떠난 빈자리가 그만큼 컸고, 또 그의 떠남이 그만큼 원통했기 때문이리라. 두 눈 부릅뜨고 노동현장이 좁다고 돌아다녔던 그는 늘 일을 짊어지고 살았지만, 일에 찌들어 힘든 표정이 아니라, 살아있는 눈과 생기 있는 낯빛을 가진 사람이었다. 늘 새로운 일을 만들어냈고, 즐겼고, 실패하면 좌절하는 게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다시 했다. 그래서 그와 눈을 한번이라도 맞춰봤거나, 그의 일하는 모습을 한번이라도 눈여겨봤거나, 그와 소주라도 한잔 같이 마셔본 사람들은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노동해방'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그의 '육체'를 늘 피로하게 했고, 어처구니 없게도 피로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나태하지 않았던 그의 '건강'한 품성이 그를 느닷없는 사고로 몰아넣었다. 지금 그의 육신은 썩어서 마석에 누워있지만, 여전히 나는 그로부터 진지하고 경직되지 않고, 여유롭지만 타협하지 않는 '노동운동'을 배운다.

 

나의 스승들은 어딘가에 또 있을 것이다. 그 많은 스승들은 나에게 그 많은 것들을 가르쳐줬다. 그런데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나는 아직도 여기 이 곳에서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그 스승들의 가르침은 그치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잠시 어깨가 스쳤던 스승도, 나와 함께 같은 일을 하며 같은 길을 가는 스승도, 육신은 비록 먼저 떠났지만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스승도, 모두 내 곁에 있는 스승들이다. 그 스승들이 아직 내 곁에 있는 이유는 내 '배움'이 모자라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려 할 때, 나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주고, 또 그 길을 똑바로 걷는 법을 가르쳐줄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06/05 01:03 2005/06/05 01:03
Posted by 흐린날
태그
<< PREV : [1] : ... [85] : [86] : [87] : [88] : [89] : [90] : [91] : [92] : NEXT >>

BLOG main image
by 흐린날

공지사항

카테고리

전체 (276)
일기장 (149)
기행문 (20)
좋아하는 글들 (47)
기고글들 (13)
내가찍은 세상 (45)
내가 쓴 기사 (1)
울엄니 작품 (2)

글 보관함

Total : 249171
Today : 31 Yesterday :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