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경향신문 2007. 11. 17)


우리 주변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자신의 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챙겨야 한다’는 사람과 ‘휴일에도 나와서 일해주면 기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후자에 속하는 편인 필자로서는 읽는 내내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 책이다.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성실해야 한다” “노동은 내 존재의의” 등의 신념을 철저히 내면화하며 살아온 ‘범생이’에게 ‘노동지상주의’를 근본부터 꼬집는 이 책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라는 구호는 한국사회에서 1980년대만 해도 자본가를 향한 공격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불과 20년 사이 이 구호는 ‘유연한’ 고용·해고 덕에 낙오된 사람들이 쓰러져 가는 것을 정당화해 주는 이데올로기로 바뀌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이라는 정기간행물을 발간해온 독일의 좌파 지식인 그룹 ‘크리시스(Krisis)’는 이러한 변화는 ‘노동지상주의’ 자체가 가진 한계에서 나온 당연한 귀결로 본다. 이들은 ‘일자리 창출’과 ‘완전고용’을 이루겠다는 좌파와 우파 모두의 다짐은 부정돼야 한다고 본다. 오히려 “누가, 그리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 완전 고용돼야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더욱 근본적인 입장이다.

우리는 ‘여유로움’이 ‘자유시간’으로 바뀐 세상에 살고 있다. 여유로움은 무언가를 획득하려는 활동 과정에서 분리된 여분이 아니라 그 자체가 완전히 자립적인 삶의 목적이었지만 자유시간은 더 많은 노동을 뽑아내기 위한 준비시간일 뿐이다. 비극은 ‘추상적 노동’이라는 것이 생겨난 근대 자본주의 산업문명에서 시작한다. 가치 증식이라는 목적만을 향해 움직이는 상품생산 경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노동은 구체적인 활동과 시간의 리듬에서 분리돼 나와 양과 질로 ‘추상화’됐다.

저자들은 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노동-마르크스주의자들이 당혹스러워하며 페이지를 넘겨 버렸던 그 ‘어두운’ 마르크스를 외면하지 않고 말이다. “‘노동’은 그 본질상 자유롭지 못하고, 비인간적이며, 비사회적이고, 사적 소유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사적 소유에 의해 창조된 활동이다. 사적 소유의 지양은 ‘노동’의 지양으로 이해될 때만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845). 단지 노동 시간을 줄이자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재생산을 경영, 시장, 교환과 돈에서 해방시키자는 뜻이다. 공허해 보이기도 하고, 현실성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근본적 문제제기는 곱씹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본래 놀이인(호모루덴스)으로 태어났다’는 호이징하의 말을 떠올려 보면 더욱 그렇다. 김남시 옮김. 1만5000원

〈손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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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5 10:47 2011/11/15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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