쎈치멘탈

오늘 어떤 영화잡지사에서 하는 간담회에 참석했는데, 뭐 얼떨결에 참석한 거였지만 나름 간만에 여러 사람들과 유쾌하게 떠들다 왔다. 비가 오더라... 근데, 이게 참 거시기한 것이 오랜만에 강남나들이 간 김에 거기서 있었던 설왕설래를 좀 정리해볼라고 했으나, 이건 우째 고유명사가 10분도 되지 않아 뇌세포에서 삭제된다는 말이냐... 어린 시절 숨가쁘게 마셔댔던 연탄가스 중독의 후유증인지, 도대체 뇌세포의 기억용량이 이렇게 부족하다니, ㅆㅂ...

 

기억의 정리를 위해서 블로그를 했던 건지, 그것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거나 오늘도 뭔가를 보고 읽고 생각하고 기억하기 위해 애쓴다. 비가 오는데... 자꾸 기억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은 왜 이리 오래 가슴에 남는단 말이냐. 아니, 어쩌면 뭔가를 봐도 못 본척 흘려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 자꾸만 자꾸만 눈에 밟히고 심장에 울린다. 아, 지금 나는 그럴 수 없는데,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간만에 통화를 한 동생의 목소리는 그래도 밝아서 좋다. 속이야 시커멓게 썩어들어갈지도 모르겠다만. 지 형이나 마찬가지로 20대가 되기 전에 생업전선에 뛰어들어 거의 20년 가까이 쎄가 빠지게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 겨우 겨우 아파트 한 채 장만했다 싶었더니만, 입주할 날은 아직도 먼데 은행 대출이자가 언제 오를지 몰라 전전긍긍. 입맛 당기는 거 애써 외면하고, 입고 싶은 거 안 입고, 놀고 싶은 거 안 놀고, 뻑하면 경운기 소리가 나는 구닥다리 소형차를 그나마 애지중지 하면서 아끼고 모은 돈으로 그넘의 펀든지 주식인지 쬐끔 찝적거렸더니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반쪽의 반의 반쪽으로 개털이 되고. 오죽 속이 터지겠냐... (그래도 형보다 훨씬 나은 놈 아닌가... 쩝...)

 

하지만 동생의 목소리는 밝다. 그래, 그래야지. 누구는 조국이랍시고 찾아와 돈 몇 푼 벌어보려 맨 땅에 박치기를 하면서 제 한 몸 뉘일 공간이 없어 고시원을 전전하다 뉘신지도 모를 사람이 휘두른 칼에 맞아 비명횡사를 하고, 누구는 애들 신발 한 켤레 사주지 못하는 처지를 비관하다 스스로 한 많은 이 세상을 하직하고, 또 누구는 근 100일을 단식한 것도 모자라 용역깡패들에게 뼈마디가 부러지도록 얻어터진 채 농성장을 쫒겨나는 이 시대에, 어쩌면 일복 터져 쥐꼬리만한 월급이라도 받으면서 그나마 직장이라도 잡고 있는 너는 씩씩한 목소리라도 잃지 말아야지.

 

은행장들이 지들 연봉을 삭감하는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겠다고 대갈일성. 그런데 그놈의 대가리들은 도대체 뭔 깡으로 그렇게 쉽게 직원들 임금은 동결하겠다고 큰 소릴 칠까. 하여튼 이 대가리썽들 하는 짓이라곤. 주가는 떨어져, 상품은 안 팔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원가절감하겠다는 어떤 기업가의 소신에 찬 목소리가 티비에 흘러나올 때, 아 저거 저러다가 또 얼마나 많은 직원들을 짤라내게 될까 하고 덜컥 심장이 내려 앉는다. 100% 비정규직을 가동해 자동차를 생산한다는 어떤 훌륭한 기업에선 사람 알기를 컨베이어 벨트 사이에 낀 롤러만도 못하게 여긴다. 뉘미...

 

온 세계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갑자기 대오각성, 보이진 않는 손에 대한 신뢰를 철회하고 죄다 보이는 손질을 하겠다고 난린데, 그런다고 신자유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 체제가 일대 전환을 하겠나? 아, 물론 전환이야 하겠지. 1%의 일에는 80%가 끼어들 필요가 없다고 과감히 주장하는 어느 장관의 아메바수준의 아이큐가 추구하는 그 아름다운 세상으로 끊임없이 전환하겠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진복자라고 하던 지쟈스의 제자들이 갑자기 눈까뤼에 힘을 주고 뵈는 것만 믿겠다며 십자가를 밟고 지나간다고 해도, 고시원을 전전하던 조선족 노동자와 애기 신발 한 켤레 사줄 형편이 안 되는 서민층에겐 뭐 별로 바뀐 것도 없다.

 

어차피 죽겠네 살겠네 하고 난리를 피우는 자들이야말로, 이 체제에서 뭔가 떡고물이라도 줏어먹어보겠다고 있는 돈 없는 돈 처발라 땅을 사고, 아파트를 사고, 주식을 사고, 환치기를 했던 사람들 아니겠나. 기왕에 먹고 죽을라고 해도 입에 넣을 고린내 나는 동전푼도 없던 사람들은 지은 죄도 없이 덩달아 위기상황이라는 이 공황에서 두려움에 떤다. 게다가 최종적으로 가장 피를 봐야 하는 사람들은 암에푸 때 익히 경험했던 바, 바로 이 바닥 근처를 배회하는 사람들이다.

 

연봉 10%를 깎는다고 해도 어차피 받아나갈 연봉과 스톡과 기타 주머니에 채울 건덕지 합쳐 수억에서 수십억대를 넘어가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10% 깎여 나간 그 돈'만'이라도 끝내 움켜쥐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동안 졸라매고 살던 사람들의 허리띠를  척추디스크가 빠져 나올 정도로 더욱 조이고, 그나마 창자에 남아 있던 쌩똥과 숙변까지 죄다 긁어내 지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것. 아니라고? 이명박 휘하 쌍수브라더스 등등의 하는 짓들을 보면 그거보다 더 한 짓도 할 듯 싶다.

 

이 와중에 쥐뿔 암 것도 하지 못하는 서러운 행인은 아예 죄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연탄가스 중독 이래 메모리 용량이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져 버린 뇌 세포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만큼은 절대로 기억해주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 기형적으로 특수한 방향으로만 발달한 행인의 기억세포는 슬프고 피하고 싶은 일들만을 지능적으로 기억한다. 그리하여 오롯이 남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죄의식. 아, 씨바, 도대체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

 

비가 오려면 쎄게나 오지...

 

 

 

(그래서 결심한 것은, 뜬금 없이 터져나오는 외침. "나 다시 돌아갈래~!"

뭔 소리냐고? 언제부턴가 내 블로그가 참 점잖아졌다(풋~!). 원래부터 까칠하고 정신없던 내 글쓰기가 건전한 진보블로그 안에서는 그나마 많이 안정적이었다. 아, 그러다보니 예전에 어딘가에 글질하던 때의 행인이 가지고 있었던 그 천방지축 정신산만하던 방식은 사라졌다. 어떻게 썼었더라... 팔뚝에 담배빵을 놓은 것처럼 가슴속에 지져져 있는 이 죄의식을 잠깐의 키보드질로 백만분의 1이라도 덜어낼 수 있으면 하는 마음에서 앞으로 좀 더 까칠해져보련다. 아, 그렇다고 해서 뭐 어차피 게으른 블로거 행인이 갑자기 부지런히 포스팅을 날리는 모습으로 변신할 일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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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3 00:10 2008/10/23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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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간담회 이야기가 너무 짧아서 살짝 아쉽긴 하지만.. ^ ^;
    (그런데 생각나지 않는 고유명사라고 하시면..?)
    저도 간담회 후기 겸 써볼까 싶었는데..
    특히나 행인님의 주옥같은 비유들이 왜 이렇게 기억나지 않던지요.
    이야기를 하면서는 속으로 감탄하면서 들었던 말씀인데...
    이게 영 기억이 나지 않더랍니다.

    건 그렇고,
    동생분 이야기를 들으니...
    장남 노릇, 형 노릇 제대로 못하는 그런 부채의식이랄까..
    괜히 좀 마음이 짠하고만요.
    앞으로라도 좀 제대로 형노릇 좀 하고 싶은데 말이죠. ㅡ.ㅡ;

    추.
    비가 오는고만요..

  2. 민노씨/ 간담회는 즐거웠습니다. 덕분에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삐딱하게 살다보니 다른 건 다 좋은데, 가족으로서의 몫을 못한 부분에 대해선 참 미안하고 그렇네요. 다른 분들이 힘들여 싸우고 있는데 함께 하지 않고 있는 것도 걸리구요.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