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역

매일 매일 눈에 띄게 두발의 사막화가 진행되어 가고 있다. 신체부위의 최정점에 위치하고 있는 "이마"라는 부위가 점점 넓어져 간다. 달려라 번개호의 본네트 위에 선명하게 씌여져 있던 "M"자가 얼굴 상단부에 만들어지는 이 상황은 누가 뭐래도 슬픈 상황이다. 머리털 구획이 최전성기를 구가했을 때와 비교하여 최소 3cm이상 위로 올라가고 있는 얼굴표면적의 확장현상은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일 게다. 연초에 발견한 노안증세로 상당기간 충격을 먹었었는데, 이젠 머리털까지 슬픈 연말을 예고한다. 뉜장...

 

다른 넘은 다 짤려도 절대 짤리지 않을 것 같았던 친구넘이 실직을 했다. 말이 좋아 명예퇴직이지, 결국 직장이 없어진 건데, 이녀석이 이정도라면 다른 넘들, 특히 간당간당 하는 영세사업장에 다니던 넘들 앞날이 걱정천만이다. 어차피 백수의 한 세월을 달려 온 행인에겐 이 경제위기상황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로되, 애딸리고 주택대출금 깔린 이 넘들의 일상은 조만간 아비규환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쩔거나...

 

곳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마다 살기 힘들다, 어렵다는 얘기 뿐이다. 가진 거라고는 몸땡이 밖에 없는 사람들이 경기가 활황이던 시기라고 해서 어느날 갑자기 대박 터뜨렸다는 소식을 전해준 적도 없지만, 요즘 돌아보면 이건 해도 너무한다. 어째 이리 다들 힘들기만 한 건지.

 

지하도마다 넘쳐나는 노숙인들, 엊그제 된 추위에 몸들이나 성한지도 걱정이다만, 오지랖 넓게 남의 일 걱정할 시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이리 답답한지 모르겠다. 그냥 그렇다.

 

평생 통학이 되었던 출퇴근이 되었던 도보로든 차량으로든 30분 이상 거리를 다녀본 적이 없던 행인이 최근 편도 2시간 가량을 달려 공부한답시고 학교에 간다. 버스갈아타는 것도 모자라 전철 환승까지 한다는 거 아닌가. 밤 늦으막히 집에 가려면 전철 환승을 해야 하는데, 환승역에서 매일 콩을 파는 할머니가 계신다. 완두콩이며 강낭콩이며 등속을 작은 비닐 봉지에 담아 파는데, 한 봉지에 천원씩이다.

 

그 콩을 어디서 떼어다 파는지, 하루 몇 봉지나 파는지, 그거 팔아서 먹고 사시는데 도움은 되는지 도통 물어본 적이 없어서 알 수는 없지만 한 두어번 그 할머니께 콩을 사다 먹은 적이 있다. 경기 어려운 와중에 혹여나 이분도 장사 잘 안 되는 것은 아닌지 볼 때마다 걱정이다. 하긴 최근 들어 11시가 넘어서도 콩자루가 꽤나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 걱정이 단순한 기우는 아닐 듯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할머니, 이 추운 겨울날에 전철 승강장 한 모퉁이에서 찬바람 다 맞아가며 담요 한 장 무릎에 덮고 장사를 하시면서도 엔간해선 힘든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얼굴이 서걱거릴 정도로 찬바람이 불던 날엔 승강장을 올라가는 지하도 한켠에 자리를 펴지만 웬만해서는 승강장을 지키고 있는 이 할머니, 항상 표정이 밝다. 힘든 날도 있었겠지만, 어쨌거나 아직 행인은 이 할머니가 매우 고통스러워 한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은 없다.

 

환승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곳을 이용하는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다들 집으로 가는 사람들이겠지. 더울 때나 추울 때나 한결같이 그곳에 서서 저 멀리 전철이 들어오는지를 목을 길게 빼고 쳐다보던 사람들은 잠시후에 도착할 집에서 편한한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가운데에는 가끔 가다가 할머니께 콩 한 두봉지를 사서 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환승역에서는 또 먹고 살기 위한 작은 거래가 이루어지고, 천원짜리 한 두장을 받은 할머니는 흡족해하고 콩 한 두 봉지를 산 사람들은 다시 전철을 기다린다.

 

집으로 가는 전철은 꽤나 뜸하게 온다. 아무래도 교외선인데다가 가는 거리가 멀다보니 그럴 거다. 하지만 기다리다보면 전철은 온다. 막차만 놓치지 않으면 집에 갈 수 있다. 환승역 승강장에서 찬바람 맞아가며 콩을 파는 할머니도 시간이 지나면 집으로 돌아가실 게다. 따뜻한 아랫목에 몸을 뉘이고 하루 종일 힘들었던 몸을 펴고 그렇게 편히 쉬실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쉬실 수 있어야 할 거다. 이 겨울이 가면, 환승역 승강장에 전철이 들어 오듯이 따땃한 봄날이 올 게다. 꼭 와야만 한다. 할머니가 힘든 얼굴을 하지 않는 것은 언젠가 반드시 봄이 올 것을 믿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뭐 아니어도 할 수 없지만.

 

다음번엔 할머니에게 완두콩 한 봉지를 사가지고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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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8 18:21 2008/12/08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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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잠시 그 환승역에 함께 하게 해주시네요. 두발님의 사막화가 진행되더라도, 그 번뜩이는 눈빛과 말솜씨는 여전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좋은 글 고맙고요.ㅎ

  2. foract/ 어익후~! 오랜만이네요. 독일생활은 어찌 적응이 잘 되어가고 있으신지. 다이나믹 코리아에서 두발 사막화를 견디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 행인에게 자주 방문하시어 좋은 이야기 좀 건네주시길 바람돠! ㅎㅎ

  3. 두발님들(어찌나 귀하신 분들인지..)이 보다 매몰차게 떠나가는 외에는 그럭저럭 지내고 있어요.ㅋ 종종 뵐게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