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 없는 대책
지당하신 말씀을 하신다고 해서 그게 다 오오 그런 거군 하는 동의를 얻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물경 3500만 명이 넘는 이용자의 신상정보가 털린 사건과 관련해 사이버테러대응센터 '관계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참으로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 들을 때마다 이토록 훌륭한 말씀을 하신 분에 대한 존경의 염이 솟구치는 것이 아니라 거침없는 뒷북에 대한 충격과 공포가 넘쳐 흐른다는 거다. 사실상 이 '관계자'께서 주옥같은 말씀을 하지 않으시더라도 "과실이 전혀 없더라도 PC가 악성코드에 감염될 수 있다는 점"을 모르는 "기업과 개인"은 없을 거다. 문제는 악성코드에 감염된 PC를 통해 털리는 나의 신상이 애초에 그렇게 털릴만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
다시 말해, 회원가입을 위해서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실명과 주민등록번호를 기입해야 하고, 그에 더불어 각종 개인정보, 예컨대 전화번호나 다른 이메일주소 기타 등등까지 넣어줘야 하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이 난리가 날 이유가 원천적으로 없었다는 거다. 그렇다면 대응책은 아주 간단한 건데, 이넘의 실명인증이나 주민등록번호 수집체계 자체를 없애야 하는 것이고 더 나가 주민등록번호라는 요상한 시스템을 없애야 한다는 거.
그러나 이 '관계자'의 대책은 "반드시 비밀번호를 변경해 달라"는 애절한 절규. 뭐하자는 건가? 이번 사건이 내 비밀번호가 알려져서 일어난 거냐? 해킹으로 죄다 긁어가는데 하찮은 개인의 비밀번호가 뭔 소용이라고...
사람들이 그닥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이런 거다. 우린 보통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민쯩을 까는 짓은 하지 않는다. 구매상품이 식칼이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그 식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지 아니면 철전지 원수를 찾아가 뼈와 살을 바르는 데 쓸지 알 수 없지만, 판매자는 실명과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와 주소, 취미, 특기, 관심사, 종교, 뭐 이런 개인정보를 일일이 물은 후 장부에 기록하면서 유관업체와 정보교환을 해도 되겠냐고 묻는 엽기적인 짓은 하지 않는다. 만일 그따위 짓을 했다간 아마 며칠 내로 그 가게 문 닫게 될 거다.
비근한 예로 '대포폰'이라는 것이 있다. 혹시 멧 데이먼이 주연한 본 시리즈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하긴 뭐 그 영화에서만 그런 장면이 나오는 건 아닌데, 얘네들은 그냥 동네 점방에서 핸드폰 사서 한 번 통화하고 쓱 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 때 물건 파는 가게가 무슨 은밀한 장소에서 상대방 확인한 후 물건 내주는 그런 곳이 아니다. 진짜 말 그대로 동네 점방이다. 대충 다른 나라 사정이 이러하다. 이통사 돈벌어 주기 위해 정부가 애쓰는 한국과는 상황이 다르다. 따라서 그 동네, 대포폰이라는 말이 나올 수가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국에서는 온라인으로 뭔가를 하려고만 하면 민쯩을 까야한다. 핸드폰 하나 살 때도 통신업체에 벼라별 정보를 다 내준다. 하지만 이런 기이한 현상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현상을 유지하는 훌륭한 이유는 범죄예방, 청소년 보호 등이다. 예방? 보호? 온라인에서 민쯩 깠다고 해서 범죄예방효과가 탁월하게 나왔다는 보고는 본 바가 없고, 연령제한한답시고 청소년 접근을 주민번호로 막는 바람에 대한민국 청소년의 태반이 주민등록법 위반범들이 되었다. 아유, 그래서 애저녁에 청소년 보호위원회 같은 듣보잡들은 그저 깡그리 없애주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거늘... 이것들은 아직도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같잖은 짓들을 하고 있더라만은...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인식했는지 행정안전부가 결국 일종의 대안이라는 것을 내놨다. 요약하면, 인터넷 실명제 단계적 폐지, 주민번호 민간사용 사전승인제, 개인정보수집 포괄적 동의제 등이 그 대안이다. 더불어 불필요한 개인정보 자진삭제 범국민운동이라는 것도 벌인다고 하는데...
도통 이들이 뭘 먹고 사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 건 첫째, 문제제기가 시작된 것이 물경 20년이 가까운데, 그동안 뭘 했느냐는 것이며, 둘째, 대안이라는 것이 기껏 동상걸린 발등에 소변낙하하는 수준이라는 것 때문이다.
우선 실명제 단계적 폐지인데, 기왕에 인터넷 실명제라는 거 자체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이건 뭐 전부 영삼이 후손들도 아니고 뭔 실명제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따위 실명제 계속 유지하다가 오늘날 이 사태가 터진 거다. 실상 실명제를 도입한 이유는 키보드 위를 달리는 손가락의 품위를 도모하는 한편, 지들 비윗장 뒤틀리는 소리는 처음부터 막아버리겠다는 취지 외에 다른 것이 없었더랬다. 선거법 상 실명제가 가진 목적이 그거 외에 뭐가 있겠나? 따라서 온라인 실명제라는 건 지금 당장 폐지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
주민번호 민간 사용 사전승인제라는 것도 웃기긴 마찬가진데, 우선 이 발상은 정부가 주민등록번호를 폐지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걸 보여준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축산물 이력추적체제와 똑같은 시스템을 사람에게 적용한다는 거 자체가 문제인데도, 행정의 효율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앞세워 존치에 급급했던 정부는 정권이 몇 번 바뀌어도 대를 이어 이걸 간직하려고 노력한다. 박통의 업적이 천추에 길이 남는 순간이다. 이 뭐...
더불어 사전승인을 한다고 한들, 실질적으로 민간업체가 주민등록번호를 받지 못하도록 강제하지 않는 한 민간업체가 알아서 주민번호를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정부도 하는데 민간이라고 왜 못하겠는가? 미국의 사회보장번호가 애초 민간사용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민간에 널리 유통되고 있는 현실을 보라. 그나마 걔들은 번호라도 바꿀 수 있고 번호 가지고 그 사람의 신원을 추정할 수도 없다. 한국의 주민번호는 그래서 더 위험한 거고.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역시 주민등록번호라는 제도를 없애야 한다. 기본적으로 이름과 생년월일, 주소와 전화번호만 있으면 개인 식별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고, 이걸로 전산시스템 만드는 것도 그닥 어렵지 않고, 지금 주민등록번호로 할 수 있는 일 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민등록법 자체가 이걸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특히 주소지 신고의무제라는 주민등록법상의 제도는 주민등록번호가 없어도 되는 이유가 된다. 청문회 할 때마다 문제가 되는 위장전입이라는 사안은 사실 현행 주민등록제도가 가지고 있는 양날의 칼이다. 이건 뭐 기회가 생기면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고, 어쨌든 현행 주민등록법만 가지고도 주민등록번호 없이 주민행정을 수행하는 데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행안부가 부랴부랴 뭔가 해볼라고 노력하는 것은 가상하다면, 얘들 하는 짓을 믿을 수가 없는 이유는 또 있다. 지들이 뭔가 잘 해보겠다고 노력한다는 티를 내려면 적어도 지들이 잘 못하고 있다고 비판받는 것에 대한 반성의 자세를 먼저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얘들은 전혀 그렇질 않다. 전자주민증을 보자. 주민등록번호 때문에 난리가 나고, 이걸 없애니 마니 하는 와중에 아예 주민번호를 칩에다 박아 넣겠다고 하는 행안부. 얘네들이 내놓는 대책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을까?
언젠가 국회에서 전자주민증 관련 간담회를 진행하고 나올 때, 인권단체들이 정부정책에 너무 많은 오해를 한다고 볼멘 소리를 하시던 행안부 관계자가 있었는데, 그 분에게 했던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정부는 오해받을 짓을 하면서 이해해달라고 하고, 우리는 이해하고 싶어도 오해할 수밖에 없어 답답하다.'
정치적으로 아주 순화된 발언이었는데, 이걸 달리 표현하면 이렇게 된다. 오해? 오555555555해eeeeeee?
더불어 '범국민운동'이라는 거, 이건 아예 코멘트를 생략하도록 하자. 이건 뭐 남대문이 무너져도 모금운동하자고 하고 저축은행 터져도 모금운동 하자고 하는 사고방식에서는 너무 자연스러운 대안이라 할 말도 없다. 이러다가 주식투자로 망한 사람 돕기 모금운동 하자고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만.
결론은 간단하다. 주민등록번호, 이거 없애라는 거다. 더불어 지문날인 좀 없애고. 그러면 나도 민쯩 만들 의향이 있다니까? 나도 민쯩 까는 아름다운 행동을 해보고 싶다 이거야. 주민번호 없애고, 지문날인 없애면, 니들도 이런 일 안 당해서 좋고 나도 민쯩 만들어서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먹고 알먹고 둥지태워 불쬐고, 얼마나 좋냐, 이것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