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

예의-

문재인 대통령시대가 되었다. 누가 뭐래도 촛불광장이 만든 정권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연인원 천 칠백만이라는 사람들이 겨울 몇 달 동안 주말을 반납하고 광장에 섰었다. 그들은 국회를 두들겨 탄핵을 만들었고 부패한 권력을 기어코 파면시켰으며 다른 나라를 만들라며 다른 얼굴을 대통령 자리에 앉혔다. 촛불의 힘을 찬양하는 건 그래서 당연할 수 있다.

그런데 연인원 천 칠백만의 사람들이 다섯달 동안 광장을 덮기 전에, 오랜 기간 동안 광장으로 가는 길을 닦고, 닫힌 광장을 열기 위해 고군분투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가장 잘 알려진 사람들은 뭐니뭐니 해도 세월호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정권의 외면과 무시, 탄압과 폭력을 뚫고 광장으로 광장으로 달려가서 그곳을 지켰다. 개념도 없는 일베나 동원된 관제 데모대에 의해 핍박받고 설움 받을 때도 그들은 눈물을 삼키며 광장을 지켰다.

한겨울 모진 바람을 얇은 텐트로 견디면서 광장을 지키던 문화예술인들이 있었다. 광장 옆 차도를 지나는 차량의 웅웅거림과 진동이 잠을 못이루게 하고, 추위가 몸을 지치게 해도 그들은 예술작품을 광장에 세우고 아침마다 청소 퍼포먼스를 하며 광장을 지켰다.

광장의 지하에서는 몇년을 걸쳐 장애인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천형처럼 지고 살아야 하는 부양가족의무제와 등급제 폐지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장 앞장서서 정권의 문제와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고, 광장으로 올라가는 바로 그 길목을 몇 년 동안 사수하고 있었다.

이들 뿐이랴, 좀 더 멀리 가면 대한문 앞을 노동운동의 성지로 만든 쌍용자동차의 해고 노동자들이 있었고, 정권차원의 민영화와 구조조정에 맞서 연거푸 총파업을 실행했던 철도 노동자들이 있었으며, 고비고비마다 하늘을 이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 와중에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은 없지만, 2013년 12월에 정권퇴진을 목표로 선언하고 이후 3년을 광장의 모든 투쟁에 연대했던 노동당이 있었고, 정권에 의해 자행된 생태파괴와 비상식적 핵발전 등을 사회적 의제로 만들어낸 녹색당이 있었다. 이 두 당은 이번 대선에 후보조차 내지 못했지만, 그간 이 두 당이 싸우며 외쳐왔던 주장들은 이번 대선 기간에 여러 형태로 변주되면서 대선후보들에게 수용되었다.

이명박근혜 그 9년 동안 이렇게 광장을 열고, 광장을 사수하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난 겨울 드디어 광장은 촛불에 덮히고 횃불로 살아날 수 있었다. 그 광장이 있었기에 문재인 대통령의 시대도 열릴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광장을 뚫고 지킬 것이다. 지금껏 해왔던 구호를 외칠 것이며, 지금까지와 같이 투쟁할 것이다. 변한 건 정권이지만, 광장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두고 새삼스레 말이 돈다. 그동안 어디서 뭐하고 있다가 만만한 문재인 되니까 물어 뜯으려 하느냐며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시덥잖은 말을 던지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그 자부심은 인정하겠으나, 니들 몇이 어느날 광장에 천 칠백만 촛불을 만들어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 아님은 깨닫길 바란다.

지난 선거 시기 동안 불안감을 조성해서 알량한 진보후보 표 뜯느라 옛날 버릇 휘두르던 자들도 있었다. 그 변치않는 일관된 구걸정신은 인정하겠다만, 너희들의 그 잔망한 짓거리가 진보의 날개를 꺾고 결국 지난 이명박근혜 정권을 만드는데 일조했던 것임을 이제는 좀 깨닫기 바란다.

그리고 이렇게 앞서서 광장을 만들어낸 사람들을 모욕하는 건, 그 사람들에 대한 예의도 아닐 뿐더러 이제 막 대통령이 된 문재인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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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2 12:33 2017/05/12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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