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로 호치민 12 - 스콜, 그 장대한 폭우
꽤 오래 전부터, 한국에서도 '장마'라는 개념이 과거와는 달라졌다고 본다. 예전에 '장마'라고 하는 건, 마치 한 겨울에 3한 4온 오듯이, 장마구름대가 머무를 때에는 주구장창 비가 오다가 구름대가 위 아래로 오르내리는 잠깐 사이 날이 좀 개다가 뭐 이런 주기성이라는 게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상당히 오래 전부터 이런 '장마'보다는, 장마라고는 하는데 비도 거의 안 오는 그런 날이 계속 되다가 정작 장마 끝났다고 하면 그 때부터 국지성 폭우가 쏟아져 내리는 현상을 겪게 되었다. 하긴 뭐 한 겨울 3한 4온 없어진 것도 오래 되었으니. 이게 다 기후변화때문인가...
이제 한국도 아열대기후국가가 되었다면서 구라를 치고, 그 증거로 국지성 폭우를 동남아지역의 스콜에 빗대어 이빨을 까는 게 그냥 이젠 진짜 그런갑다 하는 수준까지 갔다. 하지만 진짜 오리지날 골수 스콜을 만나고 나면 그따위 개구라는 그냥 개구라임이 드러나게 되는데...
예전에 하노이에서 스콜에 오지게 당했던 일이 있었다. 당시 하노이를 가게 된 건 그곳 대학과 국제학술교류때문이었는데, 세미나와 토론회가 이어지는 일정이었고, 게다가 그때 호치민 묘 방문일정이 있었는데, 사전에 오리엔테이션 과정에서 호치민 묘는 정장을 하고 가야한다는 말이 있어서 겸사겸사 핑계로 양복을 한 벌 빼서 준비하고 구두도 새 걸 마련해서 장도에 올랐었다.
토론회 한 번 하고 이동을 하는데 그만 스콜을 만났다. 곳곳에 호수고 강이고 연못이고 즐비한 하노이다보니 배수가 잘 될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왠걸, 비 쏟아지고나서 수 분도 지나지 않아 맨홀이 들고 일어서며 하수가 역류를 하고, 하늘에서는 그야말로 장대같은 빗줄기가 구멍이 난 듯 콸콸 쏟아져 내렸다.
하필 도보로 이동하던 길 한 복판에서 비를 만났는데, 일이 안 되려고 하니 근처에 비 피할 마땅한 장소도 없어 노점에 쳐 놓은 파라솔 밑에 여럿이 욱이고 들어가 섰는데, 이놈의 파라솔이 작기도 하려니와 장대비와 바람에 속절이 없어 오는 비를 피할 게재가 아니었다. 게다가 순간 차오르는 물이 무릎을 넘어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난데없는 상황에 숏다리를 한탄하는 것도 잠시, 키가 큰 놈이고 작은 놈이고 간에 이젠 물살에 몸이 실실 밀리기 시작하는데 겁이 더럭 났다. 이러단 죽는다는 생각이 퍼뜩 들다보니 누가 먼저라고 할 새도 없이 물살을 헤치고 한참을 걸어 그래도 비가 들이치지 않는 건물을 찾아 들어갔다. 이미 비는 다 맞은 상태였는데, 건물이라고 해봐야 도로와 구분되는 턱도 없는 건물이다보니 발 아래로 물은 다 들어차고 이건 어떻게 피할 방법이 없더랬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비가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불과 15분-20분 사이에 이 일이 벌어졌던 것 같다. 그러더니 급작스레 비가 그쳤는데, 비가 그치자마자 해가 뜨고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하늘은 맑고 높았더랬다. 한기가 들 정도로 물에 젖었다가 내리 쬐는 햇볕이 반갑기 그지 없었으나 반가움도 잠시, 꼴랑 단 한 번 입어본 양복과 단 한 번 신어본 구두는 완전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고, 양복은 나중에 세탁을 하여 입을만하게 정비가 되었으나 구두는 종래 망가진 것을 되돌릴 길이 없어 그만 버리게 되었다.
정작 호치민 묘는 정장을 하지 않더라도 반바지만 안 입고 쓰레빠나 샌달만 안 신으면 들어갈 수 있더라...
암튼 그렇기는 한데, 지난번 호이안과 안방에서는 다행인지 어쩐지 스콜 한 번 겪질 않았다. 며칠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그렇게 비가 쏟아진 적이 없었더랬다. 그런데 이번 호치민에서는 매일 매일 한 차례씩 스콜을 경험하게 되었다. 스콜에 대한 경계심을 갖지 않고 있다가 첫 날 당한 스콜로 인하여 우산이나 비옷을 준비하지 않은 것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난 비가 피해가는 사람이 아니던가. 해서 스콜을 절묘하게 피해다닌 덕분에 예전처럼 스콜에 당하는 일은 없었더랬다만.
스멀스멀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오, 이거 한바탕 하겠는걸, 이렇게 생각하자마자 바로 우르릉 하면서 쏟아지기 시작한다.
순간적으로 세상이 깜깜해지면서 폭우가 쏟아져 내린다. 이건 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나마 빗줄기가 좀 걷히는 상황. 비에 가려졌던 건물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언제 쏟아졌냐는 듯이 슬금슬금 구름이 걷혀가면서 햇살 등장.
와, 이건 뭐 아무리 짧은 시간 쏟아지는 거라지만 저 밑에 있음 막 오돌오돌 한다. 그런데도 이 와중에 오토바이 타고 달리는 시민들을 보면 대단하다고 감탄사가 절로 나올 밖에. 호치민도 배수가 썩 잘되어 있지는 않다고 한다. 시민들은 그래서 불만이 꽤 높다고. 잠깐 놀다 가는 입장에서야 장대한 스콜을 보면서 우와 우와 우와 하면 되지만,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어떨지 모르겠다. 익숙해져서 별 생각이 없을라나?
그나저나 스콜이 문제가 아니라 기후변화로 인하여 호치민 일대가 물에 잠길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연합뉴스: "2050년까지 1억 5천만명 주거지 바다 잠겨 ... 방콕. 상하이 위험"
기사의 큰 제목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작은 제목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베트남 남부는 전역 수몰 가능성"... 예상지역을 보니 호치민을 기점으로 남중국해에 인접한 지역은 죄다 가라 앉는 것으로 나온다. 헐... 스콜 따위가 지금 문제가 아닌 거다. 앞으로 30년 정도, 즉 한 세대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는 건데, 그 안에 인류가 대오각성해서 뭔가 뾰족한 수를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긴 뭐 기왕 이렇게 된 거 평소 지론대로 기냥 죄다 절멸각으로 가는 게 더 바람직할 수도 있겠다만, 호치민 일대가 가라앉으면 서울이 무사할라나 모르겠고, 이 아름다운 세계가 수몰된다는 게 아주 서글프기도 하다.
하루 한 번 스콜 지나가면, 오토바이와 오래된 차량에서 내뿜은 매연으로 질식할 것 같은 대기가 청량해진다. 그렇게 한 번씩 정화의 시간을 경험하고 나면 영혼도 세탁이 될 듯하다. 그냥 이렇게 하루 한 번 비 좀 맞고, 그러면서 노닥노닥 살 수 있으면 짱 좋겠다만, 오래도록 그렇게 못하게 되는 건 여간 안타깝잖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