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날] 이번엔 선거 끝나고 죽네 사네 하지 않길 바라며

3월 9일 오전 10:02  · 
 

지금 이런 이야기 하는 게 뭔 의미가 있겠냐 싶지만, 어차피 페북이라는 게 이런 얘기 하라고 있는 거지 논문 올리라고 있는 게 아니니까...

대선 때면 으레히 몇몇 사람들이 진보좌파정당의 후보는 낙선할 거 뻔히 알면서 왜 돈 쳐들여 나오는지 모르겠다는 소리를 한다. 게다가 이 후보들이 스스로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보니 당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도 아닌데 왜 쓸데 없이 출마해서 유력 후보 표나 갉아 먹느냐고 힐난하기도 한다.

진보좌파정당의 후보들은 나름 할 이야기가 있다. 본질적으로 선거를 무시하는 정당은 사회단체와 다를 바가 없다. 굳이 정당의 외피를 덮어 쓰고 있을 이유가 없다. 이 얘긴 즉슨, 정당이니까 후보를 냈고 후보로 나왔으니 선거운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거 가지곤 전혀 설명이 안 된다. 이런 설명은 다시 원래의 문제제기로 돌아간다. "그러면 정당 안 하면 되지"...

무엇보다도 없는 살림에 몸 버려 가며 이들이 선거에 나오는 이유는 선거가 벌어지는 시공간이 자신들의 존재의의를 대중에게 설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의 장이기 때문이다. 평상시에 이들에겐 마이크가 돌아가지 않는다. 스스로 마이크를 잡아봐야 돌아보는 이들도 적다. 매번 가장 열악하고 괴로운 밑바닥에 연대하지만, 거기선 연대대상의 말이 중요할 뿐 이들의 말이 중요하진 않다.

선거시기는 다르다. 그나마 이들에게도 관심이 돌아간다. 어떤 관심? 쟤들은 안 될 거 뻔히 알면서 왜 나왔데?라는 관심. 또는 왜 쳐 나와서 우리 후보 표 떼어가냐는 관심. 그 관심은 가끔 이들이 뭔가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게 만들기도 하는데, 이렇게 이들이 쬐끔이라도 중요할 땐 이런 부탁을 받게 된다. 다음에 표 줄게 이번엔 우리 다오...

이런 허접한 관심 내지 구걸이나 받게 되더라도 선거시기만큼 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과감하고 널리 알릴 마땅한 장을 찾기는 힘들다. 공인된 정당으로서 거리낌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대중에게 할 수 있는 이 시기를 놓친다는 건 정치활동에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에게 선거는 내가 여기 있으며, 내가 당신들과 있으며, 내가 저들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알리는 순간이다.

선거는 이들에게 부담스러운 시기이기도 하다. 단지 기탁금이나 선거운동비용이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말이 얼마나 대중들에게 동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며, 이 때가 지난 후 자신들이 뱉어 놓은 말을 또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에 대한 부담이다. 물론 어떤 어중이 떠중이들처럼, 선거때 잠깐 나왔다가 그 이후 종래 사라지는 자들은 다르겠지만, 적어도 진보좌파를 자임하는 정당과 그 후보는 그렇지 않다. 이 시기에 뱉은 말에 책임지지 않으면, 다음은 없다. 레토릭으로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없다'. 변변찮은 밑천으로나마 선거시기에 뱉은 말은 책임 져야 하며, 이들은 당선과 무관하게 그 말들에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다음이 없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선거라는 시공간은 이처럼 이 장에 참여한 자들로 하여금 책임을 지게 만든다. 그러한 결과는 바로 이들을 지켜본 대중들로 인해 유발된다. 대중들은 투표장 밖으로 빠져 나오는 순간 이전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의 기억 한 편에는 지푸라기만큼이나마 가벼운 뭔가라도 남아 있게 되며, 그 기억들은 언제든 소환된다. 그리고 아프지만, 그 기억들은 진보좌파 군소정당들에게 더 가혹하다.

군소 진보좌파정당은 이 모든 걸 걸고 선거에 임한다. 그래서 비록 당선의 가능성이 로또 맞을 가능성보다 낮은 걸 뻔히 알면서도 돈 버리고 시간 버리고 몸 버리면서 선거에 나선다. 여기서 뱉은 말을 책임 지마, 다음 선거까지 책임 지는 모습을 보이겠다, 그러니 우리를 외면하지 말고 지켜봐달라, 이게 군소 진보좌파정당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는 비아냥을 견뎌 가며 선거에 나오는 목적이다.

그런데 이렇게 선거를 통해 보인 모습에 책임을 져야 하는 건 유력 후보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놈이 되든 그놈이 그놈이라는 냉소에서부터, 저 쉑히는 죽어도 당선시키면 안 된다는 #저쪽이_싫어서_투표하는_민주주의 일지라도, 선거시기는 어쨌든 어떤 놈이 후보고, 그놈이 어떤 당에서 나왔고, 뭐라고 씨부리는지 사람들이 돌아보고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이러한 상황은 유력 정당과 후보로 하여금 긴장하게 만들고, 이들이 들고 나왔던 '공약'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부담을 형성하게 된다. 동시에 유력 정당과 후보로 하여금 어떤 '공약'은 대중들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주며, 자신들이 내건 약속들의 경중을 재고하게 만드는 효과를 유발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되면, 당선자는 지가 당선되었다고 해서 이제부터 내 꼴리는 대로 다 하겠다는 마음을 먹지 못하게 만드는 브레이크가 만들어진다. 역대 대통령들이 자신들이 내세운 공약이라고 해서 뭐든 제 마음대로 다 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구조에서 나오게 된다.

물론 예외적으로 박근혜처럼 알고 봤더니 순실이 하고 싶은 대로 했던 케이스나, 문재인처럼 뭘 하려고 했었는지 모르겠는 케이스도 있다만, 아무튼 이런 예외를 빼고, 적어도 민주주의적 절차를 정상적으로 밟아 대통령이 되었다면, 지가 하고 싶었다고 뭐든 다 할 수 없고, 그렇게 만드는 절차가 바로 선거시기인 거다.

나도 페북에 그놈이 그놈이고, 이번 선거 완전 개판이고, 그냥 인류가 지향할 방향은 멸절밖에 없다고 주절거려 왔지만, 가만 보면 지나치게 걱정들이 많은 거 같다. 누가 되면 검찰공화국이 되어 전 국민이 죄다 검찰에게 불려가 일년에 대여섯번은 조서를 쓰고 나올 것 같고, 다른 누가 되면 전국이 대장동 곱창동이 되고 개구라에 사기나 당하다가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길 거 같다.

근거 없는 걱정들은 아니겠지만, 바로 이렇게 걱정걱정 늘어놓는 태극기/조국기 부대거나, 이런 걱정걱정을 보면서 없던 걱정걱정이 생겨난 사람이거나, 또는 이 와중에 도대체 뭘 걱정걱정해야 하는 건지 헷갈려하는 사람들이 선거시기를 통해 이런 저런 걸 알게 되고 같이 이야길 하게 되고 생각도 하게 되면, 바로 그런 힘이 누가 대통령이 되든 지 쏠리는 대로 못하게 만드는 브레이크가 된다.

그러니 누굴 찍어야 나라가 잘 된다거나 누굴 찍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들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거다. 내가 뭐 황희 정승도 아닌데 너도 옳고 너도 옳다고 할 일은 아니지만, 기왕 선거는 끝나가고 있고,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건 또 그 이후 대응할 일이니 개표방송 보다가 빡이 쳐서 연장질을 하거나 마빡을 깨거나 하지들은 말았음 싶다. 선거운동원들만이 아니라 선거시기를 살아온 모든 사람들이 애쓴 건데, 개표가 끝난 그 한 순간에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하지들 않기를 바란다.

물론 난 그냥 깔끔하게 개표 끝나는 순간 태평양 한 가운데 혜성이 떨어져 인류가 절멸하길 바란다만,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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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14 13:37 2022/03/14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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