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위를 끝내고...

중앙위원회는 비대위원장을 선출했다. 어느 당처럼 옹립식을 하지 않은 것을 차원높은 민주노동당의 민주주의를 확인했다고 자위해야할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허나 비대위가 꾸려져야할만큼 비상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입으로만 위기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비대위에다가 힘 실어주는 짓은 못하겠다는 식의 딴지클럽도 있었다. 비대위원장 역시 혁신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지만 정작 그 혁신의 모습이 어떤 것이 되어야할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당 깨겠다는 소리까지 했었던 사람들은 당 나갈 날자를 아예 못박아버리는 취지의 발언도 했다. 중앙위가 시작되기 전에는 당 학생위원회 소속 당원들이 조승수를 엿먹이는 피켓팅도 했다. 이놈의 학위는 어떻게 30대 중반 된 넘도 있는데 대가리는 텅텅 비었는지...

 

비대위가 꾸려졌는데도 답답함은 여전하다. 아니 더 심각해진다.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봐도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는다. 대규모 탈당사태가 벌어지고 있는데 이들에게 잠시 머뭇거릴 수 있을만한 의제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당을 쇄신하자는 측의 목소리가 반영된듯한 중앙위였지만 가장 밝은 웃음을 지으면서 회의장을 빠져나가던 그룹은 이용대, 백승우를 비롯한 경기동부의 그들이었다. 저들의 저토록 밝은 웃음은 뭘 의미하는 것일까?

 

늦은 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에 방향이 같은 정책연구원과 함께 귀가길에 올랐다. 귀가라고 해봐야 얹혀사는 다른 동지의 자취방이었지만. 혼자가는 것보다는 심심하지 않아야 할 동행길인데, 버스 타고 가는 내내 그 정책연구원과 한 마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 어찌되었든 간에 당은 살리고 봐야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누구보다도 책임감이 강하고 연구실적이 월등하고 특히 한미 FTA와 관련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조차 당이 어떻게 하면 부활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이다.

 

중앙위가 끝난 후 뒷풀이 자리에서도 이 정책연구원, 비대위가 어떤 일을 해야할 것인지를 가지고 논의를 이끌었다. 그런 사람이었는데 버스를 함께 타고 가면서도 둘이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나의 갑갑함이 그에게 전해지고 그의 갑갑함은 나에게 전해졌을 거다.

 

도착지가 가까워졌을 무렵, 그 정책연구원이 "담배 있냐?"고 물었다. 담뱃갑을 살펴보니 6개비가 남아 있었다. 주섬주섬 담배를 꺼내는데 이 정책연구원, 지금 월급도 안나오고 돈도 떨어져 담배살 형편도 안 되고 교통카드 끊기면 당까지 걸어다녀야할 판이란다. 표시는 내지 않았지만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더라...

 

해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고 남은 것을 주자, 이 사람 두 개피를 달랑 꺼내더니 오늘 이거면 충분하다고 한다. 다 가져가란 말을 못하겠더라. 뉀장... 그것도 자존심이라고...

 

비대위가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 거취를 결정할 것이지만, 적어도 진보정당이라는 곳에서 자신의 열정을 불살랐던 사람들의 고민들이 이렇게 무참하게 내동댕이쳐지면 안 된다.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미래를 저당잡고 절망을 강요하는 것은 참기 어렵다. 비대위가 이 정책연구원에게 진보정치의 미래를 보여주기를 희망하지만 지금까지 상황으로는 기대하기가 어렵게 보인다.

 

그 정책연구원과 헤어지고 돌아선 그 시간부터 바람이 차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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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4 12:38 2008/01/14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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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 날 밤늦게까지(여기가 한국이 아니라서...) 중앙위 생중계를 보면서 "피 좀 묻혀야 한다"는 행인님 말씀에 적극 공감을 했더랬지요.
    아무래도 심상정 위원장은 비례대표 명단을 '잘' 만들어 보는 걸로 승부수를 둘려는 모양인데... 탈당하는 당원들이 "이 당이 진보정당 맞냐?"고 묻고 있지 "이러다간 비례대표 주사파가 다 먹지 않겠냐?"라고 묻고 있는 게 아니라면, 종북주의/패권주의가 궁극적으로는 그런 인간들이 다수파가 되게끔 돌아가는 현재의 '운동' 자체를 완전히 뜯어고쳐야 하는 문제라면, 방향 아무래도 잘못 잡았다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구요. 어쨌든, 일단은 기대 수위를 낮추고 지켜볼랍니다..

    중간에 학위 야그를 하셨길래.. 작년 학위 위원장을 보고 참 골때린다 싶었던 것이, 제가 학생 때는 NL이었다가 탈퇴한 사람인데, 제가 NL 소속일 때 동기생이었던 친구더군요. 속으로 딱 드는 생각이, 야 니가 지금 '학생위원장'을 하고 있으면 어쩌냐 이것밖에 없었다는...

  2. 토요일에, 비대위 꾸려졌다는 기사를 보자마자 거실 있던 옆지기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탈당 조금 미뤄야겠다.' 그리고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서 이것저것 설명했죠. 비록 지리멸렬한 페이퍼 당원이지만, 민주노동당이라는 이름이 너무 아깝다, 아깝다 싶었거든요. 원래는 당비를 노들야학으로 돌려버리려고 했는데(^^;;), 그냥 추가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내는 당비가, 행인님이나 저기 위해 정책연구원님 담배값이 되야되는데, 싶어요.

  3. 정치인의 언행이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지, 한마디 한마디에 얼마나 큰 책임이 실려야 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비상대책위 위원장으로서 좀 더 과감하고 단호해야할 때도 있어야 하고
    힘들더라도 손에 피를 묻힐 각오는 되어 있어야 할터인데
    중앙위에서의 비대위원장으로서의 언행은 너무 조심스럽고 소극적이란 느낌이었습니다.
    비대위를 구성하는 것 자체가 단합에 방점이 찍힌 조치인데
    처음부터 저렇게 조심스러우면
    한계를 안고 출발한 비대위의 전망 역시 크게 기대하기 힘든 상황으로 가는건 아닌지.

    심상정 비대위가 이 땅의 좌파가 차고있는 민족주의의 족쇄를 끊어버리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기자간담회에선 혁신의 단초를 내보이기는 했지만 얼마나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돌파할지는 좀 더 두고봐야겠죠.

    나도 학위에 대해 한마디^^
    이번 학위 위원장 선거가 가관이더군요
    98학번이라....
    그럼 지금 몇살이야?
    전 위원장은 92학번이더군요
    학위야? 청년위? 아님 중장년위?
    하긴 옜날부터 얘네들 졸업하고도 슬리퍼 신고 주구장창 학교에 남아 꼬두각시 조정하듯 하던 행태야 모르는건 아니지만요^^

  4. 삐딱선/ ^^

    박노인/ 정말...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네요... ㅠㅠ

    루시앙/ 참 어이가 없죠...

  5. 에잇 눈물 나잖아요. 어찌하다보니 살아온 처지가 그래서인지 지인의 요청으로 그날 인터넷 생중계 메인카메라 잡고 있었습당.

    거리로 쫓겨난 비정규직 노동자들, 밀려 나가고 죽어나가는 이주 노동자들이 지금 현재 진행형으로 속수무책으로 점점 늘어나고 있는 이 상황, 그들과 제대로 한 편이 되어 세상을 변혁해 나가야할려면 진짜 치열하게 치고박으면서 토론하고 며칠밤을 새워 서로의 입장과 그간의 썩고 썩은 당내의 여러 산적한 문제에 대해 갑론 을박을 해도 모지랄텐데~ 대개들 휘딱 빨리 안건 처리하고 비대위에 넘기고 집에 돌아가야지하는 분위기로 느껴지는게 착각일려나요? 그리고 공천권이라는 떡 고물을 가지고 정파끼리의 담합과 봉합에 치중해 있다는 인상만 강하더군요. 각 정파들은 자기 입장들만 앵무새처럼 되뇌우면서 대충의 표현만 입만 벙긋벙긋하고 계시더군요. 어째건간에 심상정 체재의 비대위가 변혁과 민노당 곪고 썩은곳에 대한 수술을 잘 수행해 나갈수 있을런지 의문만 강해지더군요. 썩은것들은 완전히 도려내고 약을 바르고 해서 새 살을 돋게해야하는데 대충 꼬매놓고 나중에 환자 손도 쓸수없게 되고나서 땅을 치고 후회해봐야 아무 소용 없을텐데 말입니다. 참 이상야릇한 분위기더랍니다.

  6. 당의 미래가 걱정스럽군요. 뽀족한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 것이 비극이네요.

  7. 처절한기타맨/ 말씀하신 그런 분위기, 휘딱 넘기고 집에 가자는 분위기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긴 뭐 그날 중앙위가 사회현안을 놓고 치고박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는 한계도 있긴 했습니다만, 그런 이야기가 나올 수 없다는 것 자체가 문제죠. 비대위가 절개수술까지 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다만, 절개하고 적출해야하는 것이 뭔지 파악하는 것만이라도 제대로 하길 바라는 거죠. 그래야 뭘 도려낼 것인지 뭘 채울 것인지를 알 수 있는데 지금은 그런 상황조차 되지 못하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어쨌든 짧으면 대의원대회까지, 길면 총선까지 뭔가 해보고 거취는 그 다음에 생각해보렵니다.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기타맨님이 많은 말씀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foog/ 뾰족한 해결책을 찾는 것은 지금부터가 될 겁니다. 아마 많은 저항이 있겠죠. 벌써 엄청나긴 하더라구요. ㅎㅎ 그러나 말씀하신 비극을 전망으로 바꾸기 위해서라도 조금만 더 응원해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