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튀세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재론) 노트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의 쟁점들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의 쟁점들
윤소영
공감, 2007

 

 

읽고서 전체적으로 정리는 못하고, 글 하나하나 띄엄띄엄 정리하고 있다. ('중국-동아시아 왕조사 개관'은 http://blog.jinbo.net/imaginer/230 여기에 짧게 정리.)

지금 정리하는 건, 알튀세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재론).

('보편의 상 아래에서'는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지 도무지 모르겠다. 글자들이 춤을 추네..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옮겼고, 옮기면서 내가 이해한 것을 조금 덧붙였다.(잘못 이해한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 

알튀세르 및 윤소영에 대한 캘리니코스 적인 입장에서 비판은 마르크스21에 실린 강동훈의 '윤소영 교수의 알튀세르주의'.

[윤소영 교수의 알튀세르주의.pdf (544.09 KB) 다운받기]

 

 

 

알튀세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재론)

(http://blog.aladin.co.kr/vara/926413 이 글은 쟁점들 책에 실려있는 것과 몇몇 구절이 다르다.)

 

캘리니코스는 반-반-알튀세르주의를 주장하는 입장으로, 마오주의로 인한 (알튀세르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의 '무시', '곡해'를 제기하려는 입장과 거의 동일하다. 캘리니코스는 알튀세르가 헤겔주의를 비판하는 데에서 긍정적 요소를 찾고, 니체와 하이데거의 영향을 강조하며 차이의 철학으로 간주한다. 이 때문에 알튀세르의 자기비판을 부정하고 인식론(스피노자가 아닌 라카토스)과 최종심(분석마르크스주의)의 복권을 주장한다. 여기서는 이런 반-반-알튀세르주의를 비판한다.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1960-65)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의 철학을 '절단과 토픽', '구조인과성과 과잉결정성', '이데올로기'(현실에 대한 가상작용과 상징에 대한 가상작용)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정리한다.

초기 알튀세르는 경험주의로 특징지어지는 인식론을 비판한다. 역사인식론은 '과학의 역사'에 대해 '과학의 철학'의 우위를 전제하지만, 알튀세르는 반대로 이야기 한다. "알기 위해서 '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한다. "진리는 그 자신의 지표다."  과학적 연구보다 실험과 교육이 먼저 존재한다면, 이는 과학 연구의 '응용'이 아니라 '융합'이다.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자운동의 관계 또한 마찬기지다.(철학에 대한 역사의 우위)

알튀세르는 바슐라르, 스피노자의 인식과정론을 마르크스의 방법과 결합한다. (G : 일반성)(이론적 실천은 현실의 대상이 아닌 “지식의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인식과정 :     G I(인식의 대상) G II(수단) G III(생산물)
                        G I(가상, 표상) G II(개념) G III(새로운 개념)

G I과 G III 사이에 인식론적 절단이 발생하는데, G II를 문제설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문제설정은 G III에서 개념의 '부재'를 강조한다.(이데올로기론은 마르크스의 문제설정에 대한 징후적 독해의 결과) G II에서 이데올로기적 문제설정과 과학적 문제설정은 인식론적 '절단'을 겪는다. 알튀세르는 철학을 '이론적 실천'으로 정의함에 따라, 인식을 생산적 노동으로 이해한다.(철학은 이론에 대한 이론 : 어떤 이론이 과학인가 아닌가를 확인하는 활동이 철학이라는 뜻)

인식과정론과 짝이 되는 구조인과론은 '생산양식(경제)'라는 최종심을 갖는 '사회구성체'라는 구조에 주목한다. 구조는 '지배심을 갖는 구조'로 정치(노예제), 이데올로기(봉건제), 경제(자본주의)가 지배심이 된다. 구조인과론은 과잉결정론을 상대화한다. 구조인과론은 재생산과 이행의 관계에 난점이 있다.(어느 때에는 이행이 일어나고, 어느 때에는 재생산이 일어나는가?)
발 리바르는 '역사의 동력'으로서 생산력-생산관계의 모순, 계급투쟁 사이의 긴장에 주목한다. 발리바르는 공시성-재생산, 통시성-이행으로 설명하는데, 공시성-재생산은 동역학(구조적 경향)이고, 통시성-이행은 구조적 변혁이다. 하지만 통시성-이행에 대한 설명은 이중적인데, 계보학(생산력-생산관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우연척 출현)과 이행적 생산양식론(매뉴팩처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비조응)이 그것이다. 생산력-생산관계의 조응으로 특징지어지는 봉건제에서 비조응으로 특징지어지는 매뉴팩처로의 이행을 설명할 때에는 재생산과 이행이 분리된다. 매뉴팩처의 비조응이 기계제대공업의 조응으로 이행하는 것은 목적론적으로 설명된다.

철학과 과학자의 자생적 철학, 레닌과 철학,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1966~68)

알튀세르의 최초의 자기비판은 1966년 문화혁명과 1968년 5월 사이에 시도된다. ' 스피노자 그룹'이라는 비공개 연구회의 토론 과정에서 철학의 정의에 대한 정정, 철학의 대상으로서 토픽에 대한 소묘가 제시된다. 철학은 인식과정론이 아니라 유심론 및 관념론의 과학에 대한 착취에 반대하는 투쟁이라는 의미에서 과학에 대한 봉사로 정의된다.(과학에 대한 철학에서 과학을 위한 철학으로 이행) 또한 과학과의 관계에만 주목하는 '일방적' 정의가 과학과 동시에 정치와의 관계에 주목하는 '쌍방적' 정의로 정정된다.(철학은 이론(과학)에서 정치를 대표하고 정치에서 과학을 대표한다.) 이 때 마르크스주의는 토픽을 갖는 과학으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는 과학이기도 하다.(마르크스주의 : 이데올로기+과학/여타 이론 : 이데올로기, 절단에 대한 토픽의 우위)
초기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일반의 매커니즘을 ‘현실에 대한 가상작용’으로 정의한다. 알튀세르는 자기비판하며 여기에 상징의 문제를 고려한다.(R-S-I) 이데올로기는 상징을 매개로 하는 교통관계이고, 주체는 이데올로기 실천 속에서 감정을 교통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과학적 비판은 무력하다.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기능에 불과하지 않다. 생산력에 대한 생산관계의 우위 때문에 재생산은 이행과 분리되지 않고(구조인과론의 우위가 과잉결정론의 우위로 변화),  이행은 경제적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모순의 과잉결정 또는 해후로 인식된다.

존 루이스에 대한 답변, 자기비판의 요소들, 아미앵에서의 주장(1968 5월~ 1975)

1968년 5월 이후에도 자기비판은 계속된다. 가상적 정통을 재구성하며 경제학비판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의 통일성을 복원한다. 철학을 ‘최종심에서 이론적 계급투쟁’이라고 정의하면서 절단(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구분)에 대한 토픽의 우위를 강조하고, 응축(이행)과 구별되는 치환(재생산)을 과소결정이라고 부르면서 주목한다.
 

위기의 저작(1977~78)

알튀세르는 자기비판을 중단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론’을 제시한다.마르크스의 곤란과 공백에 주목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쇄신의 기회로 활용하자고 제안한다. 알튀세르의 현재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절단에 대한 토픽의 우위, 구조인과론에 대한 과잉결정론의 우위로 귀결되는 자기비판의 유효성을 강조해야 한다.


보론 : 재생산과 이행의 토픽
경제와 이데올로기라는 구조는 몇가지 제도의 기능에 의해 재생산 된다. 그러나 경제적/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기능 외에도 억압적 국가장치의 기능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자본과 국가의 계급권력은 동의적 권력과 강제적 권력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열역학에 유비하면 구조는 엔트로피이고, 제도는 그것을 감소시키는 네겐트로피이다.엔트로피의 작용이 지속되듯, 경제와 이데올로기의 고유한 모순 때문에 재생산의 위기가 발생한다. 경제적 재생산의 위기는 금융화/궁핍화로 귀결되고, 이데올로기적 재생산의 위기는 새로운 공산주의로 귀결된다. 금융화/궁핍화와 공산주의가 해후할 때 이행이 시작된다.
재생산의 위기는 경제적/이데올로기적 배제와 절멸인 극단적 폭력을 수반힌다. 이에 대한 자명한 봉기적/해방적 개념이 안전이라면(윤소영은 이것이 증명이 필요없는 자명한 것이고, 그러므로 관개체적이라고 전제한다. 관개체적이기 때문에 적대의 주체들 속에서 호혜적으로 제도화될 수 있다.), 그것을 제도화 하는 구성적/시빌리테적 개념은 안전보장이다.(cf. 자유/평등이라는 봉기적 개념과 인권의 정치라는 구성적 개념) 공산주의는 (금융화/궁핍화와 해후하기 위해서는) 노동에 대한 권리를 옹호할 뿐만 아니라, 성적 차이를 추가할 권리, 지적 차이를 제거할 권리, 생태파괴/질병/전탱으로부터의 안전에 대한 권리도 발명해내야 한다.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는 공산주의를 위한 사회운동의 이상과 이념을 제시한다. 이런 이상/이념의 현실적 토대는 경제적/이데올로기적 구조의 변혁을 통한 정치의 지양(계급의 종언?)이고, 노동자연합이라는 제도가 그것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갖는다.사회운동이 ‘다른수단[대항 폭력]에 의한 정치의 계속’일 수는 없고, 공산주의를 위한 사회운동에서는 전위당의 역할도 존재할 수 없다.

2010/12/16 13:51 2010/12/16 13:51

목적론/종말론

'목적론 대 종말론: 알튀세르와 데리다의 대화'

(- 에띠엔 발리바르) 후기

 

목적론종말론을 굳이 구분하려 생각해본적 없었고, 둘 다 형이상학의 한 형태일 뿐 역사의 시작과 끝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기각해야할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다 이 글에서 데리다가 목적론과 종말론을 구분하고, 목적론에 대한 대안으로 종말론을 제시한다는 내용을 읽으며 종말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종말론을 후쿠야마류의 역사의 종언으로 생각해왔는데, 철학적 의미에서 종말론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겠구나 싶다. 우선 알튀세르에게 있어 목적론역사에서의 단일한 기원을 상정하고, 그것이 헤겔적인 전개를 거쳐 단계/목적에 도달하는 과정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발리바르가 서술한 바에 따르면, 이미 주어진 목적의 실현으로서 역사적이고 지적인 과정,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목적을 갖는 과정에 대한 교리) 자본주의의 붕괴와 공산주의의 필연적 도래와 같은 목적을 향해 역사가 진화해간다는 의식에 목적론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맞게 이해한 거라면, 데리다가 목적론과 구분짓는 종말론은 앞으로 올 (해체불가능한) 정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불가능성을 명령ㆍ소환하는 PT의 메시아성(마르크스의 유령적 요소)과 관련된다. 이 메시아에 의한 심판은 임박한 혁명과 혁명적 운동의 분열이 역설적으로 공존하는 순간이고 결과가 발본적으로 불확실하다.

 

나의 현실적인 고민으로 질문을 옮겨보면, 소위 Turning point라고 부를 수 있는 역사의 결정적 국면이 존재할 것인가, 역사의 어느 한 국면을 특권화시키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만약 특권화 시키지 않는다면, 이를테면 1917의 러시아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등이다. 대중으로서 프롤레타리아가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순간, 그 임박한 파국의 순간, 심판의 순간을 상상치 않는 운동은 가능할 것인가? 사실 이런 류의 종말론이라면 나를 비롯한 주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던 것이고,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여기에 있었다. 분명히 마르크스 또한 부단히 진동했을 것이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가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이지도 않은 대안, 발본적으로 유물론적인 대안을 위해 필사적으로 투쟁'한다고 주장한다. 목적론과 종말론을 구분짓는 데리다의 비판과 달리, 역사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역사의 목적 뿐만 아니라 종언 또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임을 확인하고, 목적론/종말론이 아닌 변증법으로 역사를 조망하는 것이 진정 '유물론'적이라는 것이 데리다-알튀세르 사이에 유예되었던 대화의 결론으로 발리바르가 제시하는 내용이다. 유물론적 태도에서 변증법은 변혁을 장기적인 이행으로 사고하고, 따라서 역사를 끊임없는 과정으로 사고(미래는 오래 지속된다)하며 그 안에서 특별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마르크스에게서 충분히 드러나지 못했던 것(철학에서 유물변증법, 경제에서 논리와 역사의 결합 등)을 끌어내려는 내재적 비판이 진정 마르크스적인 것이고,  역사의 목적/종언이라는 관념론과 단절하는 게 유물론이었음을 밝혀내는 건 마르크스를 복원시키는 작업이다. 이것은 어느 순간에서나 혁명이 가능하다는 선험적인 주장혹 의지주의와 결별하는 것이고, 승리의 순간이 도래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지성으로 비관하며, 설사 심판의 순간으로 여겨지는 국면에서도 고독할 이행의 여정을 생각하며 차가운 지성을 견지하는 것이다. 이건 오랫동안 혁명에 대해 품어왔던 낭만적 감성과 저 극단에 있는 것이고, 그렇잖아도 보잘것없는 존재인 나를 더욱 위축시키지만, 가장 원칙적이고 발본적인 부정으로서 혁명이라는 관점을 기각했을 때 취해야할 당연한 귀결이고, 현실적으로도 타당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삶의 고통 없기를 바라지 말것이고, 되려 이 순간의 해탈이야 말로 아편같은 환상에 지나지 않으니, 부처의 가르침도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리라. 니체의 영원회귀 또한 다른 식으로 읽자면, 현실의 구질구질함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을 마다하지 말라는 것이지 않을까.(물론, 니체를 주목하는 사람들이 결코 이걸 얻으려 하는 것 같지는 않다만 말이다.)

2010/06/21 00:27 2010/06/21 0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