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거장미의 땅

2017.06.21.

 

며칠 전, 아~주 우연히, <장미의 땅> 이라는 다큐 영화를 봤다.

영화는 PKK(쿠르디스탄 노동자당)의 여성 게릴라 부대 이야기다. 그동안 나에게 쿠르드족 이야기는, 신문 기사 한 구절 쯤으로 스쳐지나갔던 게 전부였다. 영화를 보고나서야 PKK에 대해서 처음 찾아보게 되었고, 쿠르디스탄의 의미도 알게 되었고, 몰랐던 세계가 이렇게 넓다는 사실에 또 겸손해진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꺼내는 이상은 사실 공허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될까 조심스럽지만, 어쨋든 난 그렇게 느겼다. 선배 게릴라는 정치학습이 중요하다며, 우리의 투쟁은 단순히 무장투쟁이 아니라 정치투쟁이고 이데올로기 투쟁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 정치투쟁을 위해 꺼내는 내용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물신성, 여성의 성이 전리품으로 취급되는 현실 등등인데, 너무 거칠었다. 만들고자 하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반면, 제작국가별로 다른 각 총기의 특성, 총기 관리법, 미제 수류탄과 소련제 수류탄의 차이 등 게릴라 투쟁과 관련된 내용들은 굳이 저런 인터뷰를 넣어야하나 싶을 정도로 구체적이었다. 아마도 감독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을 것 같다.

게릴라 대원들은 '신은 위대하다'고 외치며 자살테터를 하는 IS를 비판하고 적개심을 보이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PKK 지도자 아포(압둘라 오잘란, 1999년 이후 수감 중)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종교적 신념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 걸까 싶었다. 이것도 감독의 의도였을지도.

요즘 PKK는 터키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다. 터키 정부의 일방적인 주장일 수도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하지만, 영화가 보여준 PKK를 떠올려 볼 때, 저 활동이 테러와도 연결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에게 인사를 제대로 못하고 입산했다는 대목이 가장 가슴 메였다. 한국의 현대사도 겹쳐 보이고...... PKK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야기하고 있지만 저 상황에서 어떤 선택지가 있었을까 라는 질문이 떠오르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내가 외부의 시선으로 너무 한가하게 재단하고 있는 건 아닌지. 10년 전 쯤 같은 내용의 영화를 보았다면 난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영화를 보면서 내내 던졌던 질문이다.

군주에게, 제국주의 열강에게 지배받지 않는 자유로운 인민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꿈이 근대 민족주의의 바탕일 터. 비슷한 맥락에서 러시아혁명도, 중국혁명도 민족국가 구성이 당면 과제였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곳에서 압제에서 벗어나고 민족 독립을 목표로 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민족을 위로부터 내려오는 가상의 보편성이라 쳐도, 그것은 현실에 실재하는 규범이고 현실을 움직이는 힘을 갖고 있다. 그리고 민족은 종족주의, 부족주의와는 결이 다른 개념이다. 요즘 난, 민족주의를 부족주의 쯤으로 격하시켜 생각(그런데 종족 차원에서 민족주의를 설파하는 무리가 있던 것도 사실)하면서, 계급과 민족을 대립시키는 도식으로 역사를 재단해왔던 것에 대해 반성을 많이 하고 있다. 부정과 비판의 차이를 잘 몰랐던 것.

뭔가 정리하려는 끄적거림은 아니고, 요지는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 + 더 깊게 알아봐야겠다는 다짐.

덧. 근래 터키는 IS를 공격하겠다는 구실을 들어 오히려 PKK를 공격하고 있다고 한다. PKK의 보복테러도 있다고 하고. 어쨋든 터키 군부 정권이 나쁜 놈들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F52Q4WgO-s8

2017/08/10 17:18 2017/08/10 17:18

보는거판의 미로

호평을 많이 접한 탓에 봐야겠다 마음먹고는 내내 미뤄왔던 영화.

 

좀 잔혹한 판타지 정도로 알고 봤는데,

배경이 스페인 내전이다.

 

영화 중간중간 끔찍한 장면들 덕분에 몸서리치면서 봤다.

도무지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고문들.

한 없이 나약해지는 걸 느낀다.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일지, 답은 열려있는 것 같은데,

어느쪽이든, 현실은, 오필리어의 동화와 달리,

그리 정의롭지도, 따뜻하지도 않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2014/09/20 21:24 2014/09/20 21:24

보는거가끔 꺼내보는 사진 모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14/08/16 20:20 2014/08/16 20:20

보는거인샬라, 2012

아직 개봉은 안한 거 같고.. 자막과 영상을 받아서 봤다.

 


 

(본지 거진 8달만에 이어 쓰는 건데, 당시 저 첫줄을 써놓고 말았었다. 찾아보니 지금도 개봉은 안한 듯하다.)

 

클로에는 의사다.

팔레스타인 진료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이스라엘의 군인집에서 잔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높은 장벽이 가로막혀 있고,

클로에는 매일 진료소를 오가기 위해 검문을 받는다.

 

영화는 시작부터 파국을 예고한다.

폭탄이 터지고, 아이를 잃은 이스라엘인 부모가 오열한다.

그러니까 팔레스타인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인이다.

 

클로에는 이편과 저편,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는 존재다.

클로에는 에바(이스라엘 군인)와 랑드, 파이살, 양편 관계를 모두 포기하지 못한다.

현실을 알아갈수록 마음은 팔레스타인에 기울지만, 자신이 가진 것들을 다 놓을 수 없다.

팔레스타인 친구들의 저항운동을 묵인하거나 소극적으로 동참하는 게 자신의 최선이다.

 

이편과 저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이,

팔레스타인 친구 랑드는 사산을 하고,

클로에는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 실상 저편에 서는 것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이편에 들어서겠다고 마음을 먹고서,

그 일을 한 순간,

영화의 첫 장면이 되풀이된다.

 

너무 처참했다.

더 괴로운 건, 이게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순간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을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영화는 내용의 비극성과 맞물려, 여러 질문을 수려하게 던진다.

 

여러모로 오락가락하는 나에겐 뼈아픈 질문이다.

이를테면,

넌 노동자계급을 이야기하고 있고, 그 편에 서겠다 이야기 하지만

정말 그들과 함께하는가? 넌 '프롤레타리아'가 될 수 있는가?

난 언제든지, 이 공간을 떠날 수 있지 않은가?

난 클로에 같은 이방인에 불과하지 않은가?

 

현실에서, 일상적으로 그렇게 네편/내편이 구분지어지지는 않지만,

(애당초 '대중으로서' 노동자들은 혁명적이지 않다.)

결정적인 순간에 대한 질문일터이다.

자신의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선택지는 사치일 뿐이다.

난 나에게 선택지가 던져질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극의 마지막은,

이 비극이 어떻게 무한회귀하는지를 보여주며,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지 질문한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복합적이다.

극 중에서 에바는 자신도 힘들다고, 이 싸움으로 얻는 것이 있지 않다고 하소연한다.

실제 그러할 것이다. 그 전쟁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따로 있을테니까.

그런데, 그래서 에바는 면죄부를 얻을 수 있을까?

자신의 동생을, 성전에 내보낸 파이살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른 채, 파이살과 랑드를 도운 클로에는?

 

구조가 문제라고 퉁치며 답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끔찍하고, 처참하다.

영화를 보고나서 한참이나 서럽게 울었다.

 

 

난 죽은 듯 살기보다 죽어서 존재하길 바란다.

아무도 내게서 존재할 권리를 빼앗지 못하리라.

난 벽이 아니며 돌이 아니다.

고개를 들고 내 아기에게 가리라.

내 피여 내 이야기를 해다오.

사랑했던 모든 이들이여 안녕히.

천국에서 다시 만나기를.

인샬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13/12/15 11:34 2013/12/15 11:34

보는거헌트

덴마크 영화.

전에 봤던 in a better world 도 덴마크 영화였던 것 같은데,

비슷한 정서인거 같다.

 

항변조차 할 수 없는 그 막막함.

누가 누구를 단죄하는 건, 언제나 위험한 일.

하지만 단죄하지 않는 것도 위험한 일.

 

클라라를 미워하지 않는 건 대단한 일.

 

미워하려면 앞에서 미워하면 좋겠다. 뒤에서 말 퍼트리지 말고.

뒷말하지 않도록, 나도, 조심하고, 노력해야는데.

 

매즈 미켈슨 좋다.

2013/09/16 22:45 2013/09/16 22:45

보는거언터쳐블

갱스터 영화 중 수작이라는데, 뭐가 그런건지 잘 모르겠다-

법을 지키는 게 정의라는 식의 조악한 논리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데,

덕분에 죽일 놈과 살릴 놈이 명확히 나눠지긴 했지만,

그닥 공감하기엔...

이야기를 단순하게 끌고가기 위해서 저런 설정은 어쩔 수 없었을지도.

 

 

 

미국은 조폭도 재무부 요원들이 잡는다는 말에 솔깃해서 봤다.

미국은 대통령 경호도 재무부에서 한다고 한다.

실제 알 카포네는 탈세로 복역했다고 한다.

거참.

 

돈이 제일인 세상의 선두주자답게,

모범을 보여준다.

2011/11/15 15:40 2011/11/15 15:40

보는거슬리피 할로우 / 팀 버튼

책([슬리피 할로우])읽은 김에 영화도 봤다.

조니 뎁이 나오고, 팀 버튼이 감독이다.

 

목이 수도없이 댕강댕강 잘려나가는데,

어이구나,

좀 무섭다.

 

이카보드는 근거중심의 합리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사람이지만,

정작 현실을 대면할 때는 '여성'과 '아이'를 앞세우고 그 뒤에 숨어 살금살금 다가간다.

용맹을 자랑하던 브롬은 허무하게 쓰러졌고,

이카보드가 가진 도구들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들이 실재하는데,

해결의 실마리는 오히려 주술과 마법에 있었다.

재밌는 건, 주술은 여성이 돋보기는 남성이 사용한다는 거다.

 

소설에서도 그렇고, 영화에서도,

그 시기는 어느편이 월등하지 못하고 아웅다웅하는, 그런 시기였던 것 같다.

어느 편이든 세상을 해석하기 위한 노력이었는데, 그 사실이 쉽게 기각된다.

 

조니 뎁의 능청스러운 몸동작들, 표정들 - 타고난게로구나!

2011/11/15 15:11 2011/11/15 15:11

보는거in a better world

잔잔한 영상과 소리가 포근했다.

폭력에 대해 질문한다.

누군가 나를 때리면, 나도 같이 때려야 당면한 폭력을 중단시킬 수 있을테다.

하지만 폭력은 폭력을 재생산한다.

 

감독은 그래서 나머지 뺨까지 내주자고 얘기한다.

 

단기적인 국면과 장기적이 국면 사이의 갈등-

 

빅 맨을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장면이 너무 서러웠다.

우리는 왜 이리들 살까.

2011/10/31 12:22 2011/10/31 12:22

보는거고백

일본영화를 즐겨보지 않는데, 볼 때마다 불편한 느낌이 있다.

추격자, 황해 같은 한국영화에서 느껴지는 어떤 게 있듯,(한국느와르의 어떤 교본이 만들어진 것 처럼)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일본영화에서 종종 느끼는 어떤 게 있다.

그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재주가 없어서 막막하네..

 

스포일러 잔뜩.

 

 

 

 

//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 중 다른 이의 죽음에 가담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다. 사쿠라미야만 빠질까?

누구는 복수를 위해, 누구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누구는 따돌림 당하지 않기 위해,

누구는 다른 사람의 꾀임에 빠져, 온갖 비틀림 속에서 죽고 죽인다.

 

마음이 약한 자가 그보다 더 약한 자에게 상처입힌다.

상처입은 자는 견디거나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는가.

 

타인에게 온갖 고통을 안기지만, 자신이 입는 상처는 조금도 견딜 수 없는

자의식과잉의 군상들-

이런 관계 속에서 생명은 무게가 있을 턱이 없다.

생명의 가치는 미리 주어진 게 아니라 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니까.

모두 관계 속에서 죽은 것이기도 하다. 얽히고 비틀린 관계.

실상, 전쟁이든 사회적죽음이라 일컬어지는 어떤 죽음이든 영화에서와 크게 다를 게 없다.

영화는 이런 이야기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갱생은 지옥에서부터 시작된다고, 그리고 장난이라고 말하며 영화가 끝난다.

폭탄설치가 장난이라는 건지, 갱생이 장난이라는 건지 이중적이지만 어느 편이든 해결되는 건 없다. 아무것도 교정되지 않았다. 그저 다 같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일 뿐.

 

죽음 앞에서 삶이 피 한방울 값보다 못해지는 상황이 분명 현실에 존재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죽으면서도 무엇인가 남기려는 노력으로 역사는 움직인다.

그래서 모든 죽음이 비극은 아니다. 살아남은 자를 비췄을 때 비극일 수 있다.

 

우중충한 하늘이 중간중간 끼워져있다.

OST 듣고 싶다. 노래가 radiohead 스럽다고 생각했는데, radiohead 노래 맞다.

 

 

 

 

//

일본영화를 일반화시켜 조금 더 적자면,

과잉되어 있다.

감정도, 상황도, 모든 게 과잉되어 있다. 이게 좀 힘들다.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가벼운 척 하려는 게 과잉되어 있기도 하다.

(한 번 일본영화, 과잉이란 검색어로 검색해보니, 뜻밖에 일본영화와 드라마는 감정이 과잉되지 않은 게 장점이라는 글이 있네..)

과잉시켜야 미세한 차이를 섬세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절제 속에서 섬세함이 더 드러나지 않나..

 

고백을 보면서 배틀로얄도 떠올랐다.

배틀로얄..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겠지만, 그 부풀려진 상황이 기괴했다.

일본 멜로 영화도 거의 보지 않는데, 그 과잉된 사랑의 감정에 이입이 잘 안돼서다.

하지만.. 평소 눈물 쭉쭉 빼는 신파도 어지간히 잘 보니,

단순히 감정의 과잉이라고 하기엔 좀 부족한 것 같은데,

암튼 뭔가 묘하게.. 마음에서 어긋난다..

2011/09/11 09:28 2011/09/11 09:28

보는거비몽

나쁜남자 이후, 김기덕 영화는 선뜻 고르기 어려웠다. -_-;

 

큰 맘 먹고 봤다.;

 

색감이 좋더라.

빨간색, 흑색. 세로로 가로지르는 천.

 

상대방의 꿈이 되지 않기 위해, 상대방이 되지 않기 위해 쥐어뜯고 자해하고.

꿈 속에서 서로의 연인을 만나고, 키스하고, 섹스하고, 죽이고.

상대의 연인이 자신임을 깨닫고.

현실은 꿈? 꿈 이후의 꿈?

 

....

 

 

비몽의 비가 날비일걸로 생각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당연하게 생각했을꼬.

2011/08/23 22:48 2011/08/23 2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