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개봉은 안한 거 같고.. 자막과 영상을 받아서 봤다.

 


 

(본지 거진 8달만에 이어 쓰는 건데, 당시 저 첫줄을 써놓고 말았었다. 찾아보니 지금도 개봉은 안한 듯하다.)

 

클로에는 의사다.

팔레스타인 진료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이스라엘의 군인집에서 잔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높은 장벽이 가로막혀 있고,

클로에는 매일 진료소를 오가기 위해 검문을 받는다.

 

영화는 시작부터 파국을 예고한다.

폭탄이 터지고, 아이를 잃은 이스라엘인 부모가 오열한다.

그러니까 팔레스타인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인이다.

 

클로에는 이편과 저편,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는 존재다.

클로에는 에바(이스라엘 군인)와 랑드, 파이살, 양편 관계를 모두 포기하지 못한다.

현실을 알아갈수록 마음은 팔레스타인에 기울지만, 자신이 가진 것들을 다 놓을 수 없다.

팔레스타인 친구들의 저항운동을 묵인하거나 소극적으로 동참하는 게 자신의 최선이다.

 

이편과 저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이,

팔레스타인 친구 랑드는 사산을 하고,

클로에는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 실상 저편에 서는 것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이편에 들어서겠다고 마음을 먹고서,

그 일을 한 순간,

영화의 첫 장면이 되풀이된다.

 

너무 처참했다.

더 괴로운 건, 이게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순간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을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영화는 내용의 비극성과 맞물려, 여러 질문을 수려하게 던진다.

 

여러모로 오락가락하는 나에겐 뼈아픈 질문이다.

이를테면,

넌 노동자계급을 이야기하고 있고, 그 편에 서겠다 이야기 하지만

정말 그들과 함께하는가? 넌 '프롤레타리아'가 될 수 있는가?

난 언제든지, 이 공간을 떠날 수 있지 않은가?

난 클로에 같은 이방인에 불과하지 않은가?

 

현실에서, 일상적으로 그렇게 네편/내편이 구분지어지지는 않지만,

(애당초 '대중으로서' 노동자들은 혁명적이지 않다.)

결정적인 순간에 대한 질문일터이다.

자신의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선택지는 사치일 뿐이다.

난 나에게 선택지가 던져질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극의 마지막은,

이 비극이 어떻게 무한회귀하는지를 보여주며,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지 질문한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복합적이다.

극 중에서 에바는 자신도 힘들다고, 이 싸움으로 얻는 것이 있지 않다고 하소연한다.

실제 그러할 것이다. 그 전쟁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따로 있을테니까.

그런데, 그래서 에바는 면죄부를 얻을 수 있을까?

자신의 동생을, 성전에 내보낸 파이살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른 채, 파이살과 랑드를 도운 클로에는?

 

구조가 문제라고 퉁치며 답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끔찍하고, 처참하다.

영화를 보고나서 한참이나 서럽게 울었다.

 

 

난 죽은 듯 살기보다 죽어서 존재하길 바란다.

아무도 내게서 존재할 권리를 빼앗지 못하리라.

난 벽이 아니며 돌이 아니다.

고개를 들고 내 아기에게 가리라.

내 피여 내 이야기를 해다오.

사랑했던 모든 이들이여 안녕히.

천국에서 다시 만나기를.

인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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