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 김연수

한 번, 두 번, 

세 번 쯤 다시 뒤적거리고서 전체 얼개가 얼추 맞춰지는 구성.

이런 구성이 좋은데, 아주 좋은데,

그냥 무협지나 읽고 싶은 마음상태일 땐, 좀 번거롭게 느껴지네 ㅋ

 

주제들이 연달아 너무 비슷한 거 아닌지 싶다.

이전 작에서도, 그 이전 작에서도,

관계에서 소통의 불가능성과 그것을 뛰어넘는 가능성으로서 사랑.

내가 보는 게 전부이진 않겠지만,

큰 줄기에서 그다지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 순간은 가능하기도, 가능하지 않기도 한데,

김연수의 작품은 가능하지 않은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실상, 우리는 매 순간 이별하며 살아가는데.

 

이런 생각이 들지만, 어쨋든, 좋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자음과모음, 2012

 

2014/02/18 16:55 2014/02/18 16:55

달로 간 코미디언_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소설집에 실려 있는 걸 읽었다.

 

우연과 우연의 중첩이, 실은 한치의 어긋남 없는 필연이라는 것.

그래서 1982년 권투선수의 죽음과 2001년 쌍둥이빌딩이 무너진 일은,

모든 이의 삶을 좌지우지 한다는 것.

누군 가의 고통은 웃을 일이 아니라는 것.

하지만 그것이 웃을 일이 아니기 위해서는, 그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

'우리 인생의 이야기'란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 기침이나 한숨 소리, 혹은 침 삼키는 소리 같은 데 담겨 있다는 것.

듣는 사람이 없으면, 세계는 침묵이고 암흑이라는 것.

보이지 않으면,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

그리하여 세계의 그 어느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는 것.

하지만....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이해한다는 건, 세계 그 자체. 세계의 전부라는 것.

그곳에는 나 혼자뿐이지만, 혼자뿐이지 않다는 것.

그것은 사랑?

 

 

//

 

 

이 소설집에 실린 다른 단편 '당신들 모두 서른살이 됐을때'에서는

양들은 평화롭게 풀을 뜯고, "아빠, 나는 아빠가 보고 싶어. 지금은 이 마음 하나 뿐이야.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 꿈속에서라도 한 번 나와줘. 나는 아빠를 힘껏 끌어안고 놔주지 않을 거야. 떠나지 못하게 절대 놔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아빠한테 말할거야.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로 끝나는 편지의 구절들, 세상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어떻게 자신을 위로했는지, 어느 날 새벽에 본 불길은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얼마나 참혹했는지, 또 자신의 미래는 얼마나 어두운지에 대해서, 얘기한다.

저 편지는 윤용헌 열사의 아들이 쓴 편지글..

용산참사가.. 3주기가 내일인가.. 읽으면서 울컥거렸다. 이런 세상에 살고 있지만, 역시 김연수 어법에 따르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들으려고 무척 귀를 기울이며, 또 그의 두려움을 이해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살만한 곳이다.

 

소설집 제목과 같은 단편, '세상의 끝 여자친구'는, 세상의 끝 메타세쿼이어 이야기다. 함께 보냈기에, 그곳은 세상의 끝. 그 메타세쿼이어는 수 억년을 살며, 이야기를 기억할 게다.

 

 

작가는 누군가를 사랑하는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고 얘기한다.

이해라는 건, 죽을만큼의 노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의 사랑이란 건, 내 감정의 도취에 불과할 뿐이었다는 자각에 깊숙이 아리다.

그랬었고, 지금도 그렇다.

 

김연수의 소설은 눈으로 훑듯이 읽어서는 뭉텅뭉텅 찢겨진 책을 읽는 기분이 든다.

단어 하나 허투로 쓰는 게 없어서 꼼꼼히, 기억하며 읽어야 아귀가 맞춰진다.

하지만 아무리 꼼꼼히 읽어도 그 활자를 다 외울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최소한 한 번은 다시 읽게 된다.

처음으로 되돌아가면, 역시, 허투로 쓰인 단어가 없었구나,라는 감탄이 나온다.

음.. 그리고 이렇게 얘기하는 게 어떨지 모르겠지만, 김연수는 똑똑하다. 많이. 부럽도록.

 

 

 

 

세계의 끝 여자친구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문학동네, 2009
2012/01/20 11:06 2012/01/20 11:06

리아의 나라

읽으면서 내내 불편하고 찜찜했다.

 

몽족이 미국의 병원에서 진료받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들을 바탕으로, 문화의 충돌과 이해에 대해 얘기한다. 질문이 복합적인데, 우선 몽족 아이가 미국의 병원에서 겪어야 했던 일들이 단지 몽족에게 국한된 일은 아니라는 점에서 현대의학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책을 읽어가면서 불편했던 건, 그 문화적 차이가 여타 관계들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전제를 갖고 서술했다는 느낌때문이었다.

 

환자를 시술의 대상으로만 파악하는 현대의학에 대한 비판이 낯설지는 않은 세상이다. 책의 한 구절처럼, 한 인간에게 생명이 우선인지, 혼이 우선인지는 가치관의 문제일 수 있다. 병원과 현대 사회는 이런 질문을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비판에 동의하지만, 이게 단지 물질만능에서 벗어난 가치관을 찾는 걸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사회의학이 아닌 생의학 패러다임이 승리하게 된 역사적 배경, 그러니까, 자본주의적인 의료의 발달을 주목해야하지 않을까. 병원에서 겪는 불편함(모멸감, 좌절감 등등 부정적인 여러 감정)은 몽족에게 더 극단적으로 표현됐을 뿐,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감정이다. 내국인이 의료를 이용하며 겪은 그 불편함은 책임의 화살을 문화의 차이에게 돌릴 수 없듯이, 몽족 또한 오히려 다른 갈등요소를 찾아야하지 않나 생각한다. 

 

약간 이어지는 맥락에서, 미국 문화와 몽족 문화를 대립시키며 설명하는 방식에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다. 이를테면 미국은 개인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데 반해, 몽족은 공동체를 우선적인 가치로 둔다는 식의 설명 말이다. 미국에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더 많을지는 모르지만, 그 사회에도 공동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생의학 패러다임이 현대의학의 주류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한국의 세태가, 모두가 지극히 경쟁을 강요받고 분자화된 개인으로 쪼개져 있다는 데 동의하지만, 그럼 이게 한국의 문화인 것일까.. 문화와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함께 묶여 있는 것인가? 아니, 그러니까, 대체 문화란 무엇인가? 

책에서 대비한 몽족과 미국의 차이는 오히려 그 생산양식과 생산관계의 상이함에서 비롯된 것이지 않을까? 그러니까, 한국을 보자면 1900년 조선과 2000년 한국 사이에서 차이를 문화의 차이라고 볼 것인지, 다른 요소들의 차이로 볼 것인지, 그런 질문이다. 당연히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는 없다. 난 몽족과 미국의 생활양식 차이를 '문화'라는 단어로만 설명하기에는 너무 공백이 많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모습을 봐도 그렇지만, 과학기술이 세계 여느 나라에 뒤지 않는 한국에도 점집과 굿은 흔하고, 얼마나 신뢰하든 대개 사주 한 번쯤은 보러간다. 미국의 합리성에 기반한 문화와 몽족의 비합리적인 문화의 충돌이라는 관점은 허구적이라고 말하려는 건데, 책 각주에도 몇 사례가 소개되어 있지만, 미국 내에도 종교적인 의식으로 병을 치료하려는 시도는 광범위하다. 소위 서구문명은 '합리성'을 다른 가치보다 우선하는 가치로 삼지만, 이게 그 사회가 얼마나 합리적이느냐와는 전혀 별개이다. 자본주의만 봐도 비합리의 극치인데. 그 합리성이 다른 문명에는 부재하다고 믿는 게 서구문명의 오만함이다. 이걸 비판하기 위해 비합리적인 것도 훌륭한 가치라고 설명해버리는 류가 있지만, 난 맥을 잘못 짚었다고 생각한다. 몽족이 자신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나름의 합리적인 사고가 있기 때문이다. 왜 병이 생기는지, 어떻게 할 때 병이 낫는지 등에 대한. 그런데, 비합리적인 것도 훌륭한 가치라고 설명하는 류들은 비슷한 접근으로 서구문명과 구별되는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문화들을 모조리 긍정해버리기도 한다. 한국의 전통의학에도 역사가 있고, 2천년 전의 것이 결코 그대로 이어져 오지 않는다. 그 안에서 많은 경험과 비판이 축적되고,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계승하는데, 오히려 최근에 전통이라면 무엇이든지 긍정하려는 반역사적인 태도가 널리 승인받고 있다. 이런 게 문화상대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지 않나 싶다. 어떤 문화가 서구문명과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다 해도, 그것들은 순일할 수도 없고 나름의 방식으로 투닥거리고 있을 게다.

 

역시 이어지는 맥락에서, 저자가 제안하는 문화상대주의는 사회의 여러 모순을 문화로 환원하는 효과를 가지지 않는지 의구심을 갖고 있다. 모든 것은 '차이'일 뿐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계급적인 불평등도 노력하면 해소가능한 '차이'가 되버린다.

근래 읽은 이글턴의 책이 계속 떠올랐는데, 이글턴은 기독교/이슬람 급진주의는 종교로 정치를 대체하려는 시도이고 문화주의자들(문화상대주의, 뉴에이지 등)은 문화로 정치를 대체하려 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은꼴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보편성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읽는 내내, 이 이야기들이 머리속을 맴돌았다. 이글턴이 우려하는 게 이런 접근이겠구나 싶었다. 모든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 이야기는 듣기 좋지만, 보편성을 전제하지 않는 차이는 오히려 소통의 단절을 의미한다. 서로의 문화를 지키는 게 우선이라면 소통을 지연하는 게 최선이니까. 이 책의 저자가 이런 보편성을 찾아낼 가능성을 완전히 외면하고 있지는 않다. 인간으로서 겪는 고통을 서로 이해하는 장면들이 실려있다. 다만, 그런 공감에 둘러쳐진 장벽을 압도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한국말을 잘 못하는 어떤 이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둘 다 영어에 능숙하지 못했고, 상대방에게는 한국인 동행이 있었다. 대화는 동행을 가운데 두고 진행되었다. 상대방은 자신의 말을 모국어로 삼지 않은, 그래서 충분히 전달할 수 없는 동행에게 말을 하고, 동행은 나에게 한국어로 말을 해준다. 상대방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다 할 수가 없고, 나는 한국인 동행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한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최대한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들을 선택하기 위해 마치 어린아이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은 태도로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쨋든 나는 내가 자유롭게 선택한 어휘들로 말을 하고 있었고 상대방은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어휘 중 극히 일부만 골라쓸 수 밖에 없던 거였다. 상대방이 자기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있다면, 나보다 뭘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을 텐데. 상대방도 느꼈을 것 같은데 순식간에 위계가 만들어지는 걸 경험했다. 지금도 떠올려보면 답답하고, 어떻게 했어야할지 잘 모르겠다.

몽족이 미국 병원에서 부딪힌 여러 문제 중 언어 문제가 큰 문제였으리가 생각한다. 책 저자는 통역자가 아닌 문화중개인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내 경험에서 그 사람과 대화 중 위계 관계가 만들어졌던 건, 서로 문화가 달라서가 아니라 언어라는 실물적인 장벽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장벽 너머에서 내가 더 대화의 주도권을 가진 건, 이곳이 한국이기 때문일텐데, 한편 만약 그 사람이 미국인이었다면, 절대 그런 상황이 되지 않았을거다. 그러니까, '문화', '언어'라는  어떤 독립적인 요소가 장벽인 게 아니라, 그 요소들이 장벽이게 하는 정치/사회적 맥락이 존재한다.

 

대충 할 말은 거의 다 했는데, 읽으면서 가장 크게 꺼끌렸던 걸 마저 짚어야겠다. 저자는 몽족이 미국으로 이주해오게 된 배경을 마치 중립적인 위치에서 바라보는 것 마냥 서술한다. 베트남 전쟁안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세력이 후방을 교란시킨다. 이건 마치 게임 중계와 비슷하다. 미국과 월맹이라는 두 나라가 전쟁을 하고 있고, 서로 동맹세력을 많이 끌어들여 전쟁에서 이기려 하는 거다. 한국전쟁을 서술할 때도 대개 이런 식이잖은가. 이런 서술에서는 미국에 맞서 삶의 터전을 지키려 했던 베트남 민중의 항쟁이 온데간데 없고(한국전쟁을 얘기할 때 미군정에 맞서 정치파업을 하고 게릴라 항쟁을 벌이던 이들의 역사가 사라진 것처럼), CIA의 지원을 받은 몽족 전투부대가 베트남 민중의 삶을 파괴하는 데 협조한 것임을 삭제한다. 라오스 인민전선이 라오스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라오스 민중이 미국과 맞서 싸우는것을 몽족이 깨트리려 했던 것임을 서술하지 않는다. 물론 그 안에 더 역사 깊은 갈등들이 담겨있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베트남 전쟁을 스타크래프트 같이 그려서는 안되는 거다. 저자는 부정적인 의미로 라오스 정부측 입장을 인용한다.

"미국은 태국의 반동분자들과 공모해 메오족에게 압력을 넣어 라오스를 탈출하여 태국으로 가도록 하고 있다. 이 일의 목적인 인도주의 원칙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들의 노동력을 싼 값에 착취하고, 그들을 병사로 키워 나중에 이 나라로 돌려보내 평화를 깨기 위함이다."

하지만 난 이 인식에 공감한다. 

여기까지는 참고 읽었다. 그런데 저자는 몽족이 고난을 겪으며 피난 하는 과정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듣자니 어느 이스라엘 아기에 대해 쓴 글이 떠올랐다.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을 피해 숨어 있었는데 아기가 울기 시작하자 당황한 엄마가 아이의 입을 너무 틀어막는 바람에 아기가 질식사하고 만 것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 구절을 읽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 더 읽지 못하고 한참 덮어뒀다가 나중에 다시 펼쳤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떠오른 가장 큰 고민은, 저자의 정치적 태도와 문화상대주의에 인과가 있기 않을까,라는 질문이었다. 문화상대주의가 착취를 은폐하며 자본주의를 공고하게 하는 효과를 낳고 있고, 저자는 그런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정치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한국에도 '다문화'라는 얘기가 많이 흘러나온다. 조심스럽다.

 

 

리아의 나라 - 몽족 아이, 미국인 의사들 그리고 두 문화의 충돌
리아의 나라 - 몽족 아이, 미국인 의사들 그리고 두 문화의 충돌
앤 패디먼
윌북, 2010
2012/01/11 22:38 2012/01/11 22:38

하룻밤에 읽는 중동사 _ 미야자키 마사카츠

 

중동, 아랍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어서..

뭘 읽어보면 좋을까 기웃거리는데..

'이슬람의 세계사'가 좋다고 하지만..

책 두께를 보니 기가 죽어서 펼쳐보질 못하겠고..

도서관에서 이책 저책 뒤적이다..

두께도 적당하고, 내 수준에 맞을 것 같은 책을 발견했다.

 

하룻밤에.. 한권으로.. 등등 이런 류의 제목을 단 개론서들이

질을 담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걱정도 됐는데

앞장을 펼치니추천사에 이희수씨 글이 있는 걸 보고 쭉 읽었다.

나같이 중동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사람은 읽으면 참 좋은책.

 

(최근 중동사 부분에서 좀 더 봐야할 것은, 필요에 따라 미국과 손을 잡았던 나라들도 그 정권이 그랬던 것이지 그게 그 나라 다수의 지지를 얻은 것은 아니라는 것.)

 

 

하룻밤에 읽는 중동사 - 5천 년 중동과 이슬람의 역사를 한눈에 읽는다
하룻밤에 읽는 중동사 - 5천 년 중동과 이슬람의 역사를 한눈에 읽는다
미야자키 마사카츠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아래는 읽은 거 안 까먹게 정리.

 

이상하게 더보기가 안되네요..;;

 

 

 

 

중동middle east은 영국이 자국의 위치를 기준으로 오스만 제국의 영역을 '근동',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을 '중동', 동아시를 '극동'이라 부른데서 유래. '중동'은 유럽을 기준으로 만든 이름이며, 유럽이 세계에 식민지를 확대하던 19세기의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벨기에 역사가 앙리 피렌이 '무함마드 없이는 샤를마뉴도 없다'고 지적
 
이슬람 세계는 '움마'라 불리는 이슬람 공동체가 팽창하는 방식으로 확장되었다. 마함마드가 메카에서 포교를 시작할 때는 신과 개인의 계약에 따른 신앙을 설파했지만, 포교의 거점을 야스리브로 옮긴 뒤에는 예언자이며 신도를 지도하는 무함마드와 신도의 계야에 따른 신앙으로 바뀌었다.
 
19세기 유럽적인 '네이션'이라는 개념이 들어오기 전에는 중동에서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란'이라는 말은 그리스인이 이란고원에 사는 주민들 스스로가 아리아인이라 자칭한다고 전하며 이란고원을 아리아나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역사적으로 이란인은 페르시아인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이들이 이란고원 서쪽 땅을 페르시스라 불렀고, 여기에서 세력을 확대하여 대제국을 세운데서 나온 이름이다.
 
'헬레니즘 시대'란 기원전 4세기 중반 알렉산드로스왕이 페르시아 제국(아케메네스 왕조)을 정복한 뒤부터,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가 세운 이집트가 기원전 1세기 후반 로마 제국에 의해 통합될 때까지 지중해 지역과 중동 지역에서 그리스 문화와 학술이 지배적이었던 시대를 가리킨다.
 
파르티아에서 받은 태양산 미트라가 동서로 전해져 로마에서는 군신 미트라스로, 동아시에서는 미래불 미륵이 되었다!!! 그렇구나!!
 
알렉산드로스 이후 파르티아가 세워져 중동을 장악하고, 서기 3세기 초 사산 왕조가 이를 쓰러트린다. 사산왕조는 아르케메네스 왕조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복고적 왕조였다. 사산 왕조(뭍의 제국)는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해양 제국)을 상대로 장기간에 걸쳐 싸웠고, 국력이 약해진 양쪽 다 아랍인에게 주도권을 넘긴다.
 
사산왕조와 비잔틴제국의 전쟁으로 페르시아만에서 유프라테스강을 거쳐 북상하는 교역로사 쇠퇴하고, 홍해에서 시리아로 낙타를 이용한 상단 무역이 활발해졌다. 메카가 상업의 중심도시가 된다.
 
무함메드는 메카를 탈출해 야스리브(메디나)로 이동한다.(헤지라) 야스리브에서 확대된 이슬람 교단은 메카를 점령한다.
 
무함마드 사후 '칼리프'('무함마드의 대리인'이란 뜻)가 이슬람 교단을 주재한다.
 
1대~4대 칼리프가 정통칼리프
 
4대 칼리프 알리 이후 우마이야 가문의 무아위야가 칼리프라 칭하며 부족으로 세습된다.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후계자는 무함마드와 혈연이 닿아야 한다면서 알리 이외의 칼리프를 부정했다.
알리를 초대 이맘, 알리의 첫째 아들 하산을 2대 이맘, 둘째 아들 후세인을 3대 이맘으로 부른다.
시아파 사람들은 이맘들이 수니파에 독살되거나 옥사할 정도로 비극적인 말로를 겪었다고 주장한다.
이스마일파는 음주 등으로 이맘이 되지 못한 6대 이맘의 아들이 7대 이맘이라고 주장한다.
 
시아는 '시아 알리'(알리의 분파)의 약자
수니는 무함마드의 순나(관행, 범례)에 따르는 사람들
 
우마이야 왕조의 대정복 운동이 끝나자 제국은 혼란에 빠지고 직할지 시리아에서조차 정부의 지배가 통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그런 와중에 무함마드의 하심 가문이 교단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운동이 이란고원을 중심으로 격렬해진다. 이란의 시아파 반체제 세력은 압바스 가문의 아부 알 압바스를 초대 칼리프로 하는 새 왕조를 세웠다. 압바스 가문은 안정된 정권을 위해 다수파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시아파를 탄압했다.
 
압바스왕조는 꾸란에 기초한 이슬람교도의 평등을 실현하는 데 힘을 써 아랍인에 대한 연금 지급과 면세 특권을 폐지, 비압립인 유력자를 관리로 적극 채용했다. 정복왕조 아랍제국이 이슬람 원리에 따라서 여러 민족이 평등하게 통합되는 이슬람 제국으로 모습을 바꾸었는데 이를 '압바스혁명'이라고 한다.
 
유라시아에서 사상 최대의 영역을 지배한 몽골 제국을 '세계사'의 기점으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이는 중화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에 편중된 시각이다. 원 제국을 지탱한 색목인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였다. 유라시아의 뭍과 바다를 연결한 몽골 제국의 네트워크는 그 이전의 사막, 초원 바다를 잇는 이슬람 상업권 네트워크 위에 만들어진 것이다.
 
투르크인은 점차 소그드 상업권에 편입되어 갔고, 10세기에 수피가 활발하게 포교하였다.
투르크인은 1)중동에 진출하여 아랍인과 이란인을 능가하는 지배민족이 되고, 2)아프가니스탄에서 북인도로 이슬람 세계를 확대하고, 3)소그드(현재의 우즈베키스탄 등) 지방의 지배 세력이 되고, 4)실크로드 동쪽의 타림분지로 이주하여 이슬람교(중국어로는 청진교)를 퍼뜨리고 현재의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를 건설
 
압바스 왕조는 맘루크(군사 노예)를 공하여 권력 유지를 꾀했다. 맘루크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가 아닌 투르크인 슬라브인 쿠르드인 등의 용병을 가리키는데, 유목 투르크인이 중심을 이루었다. 투르크멘족은 족장 셀주크의 지도 아래 이슬람교로 집단 개종했고, 11세기 초 족장 토긜베그는 압바스 왕조로부터 칼리자의 보호자로 인정받고 칼리프로부터 '술탄'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투르크인이 비잔틴제국을 격파하자 비잔틴 황제는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청해 십자군 파견이 시작되었다.
(참고 - 로마는 동로마, 서로마로 나뉘어졌고 서로마는 일찍 멸망. 동로마는 비잔티움으로 불림.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의 전신으로 로마교황을 보호하는 댓가로 관을 받음)
 
몽골군의 침입으로 이슬람세계가 큰 위기에 빠졌을 때 투르크인 맘루크는 몽골군의 이집트 진출을 저지하고 1250년 술탄 지위를 빼앗아 이집트에 맘루크 왕조를 세웠다.
몽골 제국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투르크화 이슬람화한 몽골인 티무르가 티무르 왕조를 열었다.(1370년) 티무르가 약체화된 이후 티무의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부르는 인도로 쫓겨 가 1526년 무굴제국을 세운다.
파키스탄은 이런 연장선에서 탄생했다.
 
오스만 왕조는 여러 군웅 가운데 하나였으나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다. 콘스탄티노플은 파괴되지 않고 '이스탄불'로 이름을 바꾸어 그대로 수도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지배한 영역에서 투르크인은 소수민족이었다. 따라서 투르크어를 말하고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전부 제국 신민으로 받아들였다. 제국 통치의 바탕은 '종교'였다.
 
이란 고원에 시아파를 국교로 삼는 사파비 왕조가 만들어진다.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에 퍼진 내셔널리즘에 자극받아 그리스독립전쟁이 일어났고, 오스만 제국은 열강의 개입으로 패배했다.
 
'범슬라브주의'는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추진된 슬라브 민족의 통일과 연합을 지향하는 운동이다. 1877년 러시아는 슬라브인의 지원을 얻어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 전쟁으로 발칸반도의 슬라브 민족이 여러 나라로 독립한다.
 
이란에서는 미르자 알리 무함마드가 시아파 신앙을 이용하여 민중을 조직했으나 1850년 총살당한다. 1906년 국민의회가 개설되어 헌법에 상당하는 기본법이 채택되지만 러시아군이 개입하여 신체제를 무너뜨렸다.
 
독일은 베를린, 비잔티움(이스탄불), 바드다드를 철도로 연결하는 3B 정책을 펴고, 영국은 케이프타운, 카이로, 캘커타를 잇는 3C 정책을 편다. 이 대립의 충돌로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다.
 
1889년, 사관학교 청년들을 중심으로 '통일진보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것이 '청년 투르크'의 모체였다. 1913년 '청년 투르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엔베르 파샤 등 3명에 의한 군사독재가 시작된다. 엔베르 파샤는 '범투르크주의'라는 민족주의로 투르크인의 부흥을 꾀했다. 
 
투르크정부(오스만 제국)는 투르크가 영토를 회복하도록 돕겠다는 독일의 제안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이 때 영국은 오스만 제국 내의 아랍인을 조직하여 오스만 제국을 배후에서 위협하는 작전을 썼다. 청년투르크 혁명 이후 아랍인 사이에서는 반투르크 의식이 고양되었다. 영국은 전쟁이 끝나면 아랍인을 독립시켜 주겠다고 약속하고 하심 가문의 후세인과 두 아들 압둘라(훗날 요르단 초대 국왕)와 파이살(훗날 이라크 국왕)을 지도자로 내세워 아랍 반란군을 조직했다. 그러나 강화회의에서 영국은 아랍을 독립시키겠다는 약속을 져버렸다.
 
패전 후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공동식민지 같은 상태가 되었고, 케말 파샤가 1923년 앙카라를 수도로 하는 터키공화국을 수립하여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아나톨리아를 점령하고 있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의 군대를 격파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터키에 양보한 배경에는 러시아혁명이 있었다. 혁명이 중동으로 파급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의 주선으로 만들어진 이란 카자흐 여단의 대령 팔레비는 러시아혁명으로 러시아 세력이 후퇴하는 정세를 이용하여 1925년 이란에 '팔레비 왕조'를 창립하고 왕위에 올랐다.
 
팔레스타인 문제, 이라크 문제, 쿠르드인 문제 등의 중동 분쟁이 생긴 뿌리는,
1) 1916년의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 2)1915~1916년에 교환된 '후세인-맥마흔 서한', 3)1917년의 '벨푸어선언' 등의 협정이 서로 모순되었다는 데 있었다.
 
1) 영국의 중동 전문가 사이크스와 프랑스 외교관 피코가 러시아의 동의를 얻어 체결한 비밀 협정으로 3국이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3분할할 것을 담고 있다. 러시아혁명정부가 이 비밀협정을 공개했다.
2) 아랍의 지도자 후세인과 영국 고등판무관 맥마흔은 1차대전후 아랍인 국가의 건설을 인정하는 데 합의했다.
3) 영국의 외무장관 밸푸어가 유대인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편지로, 팔레스타인 내에 유대인의 민족적 향토를 건설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한다는 내용이다.
 
오스만 제국이 1차 세계대전으로 붕괴하자 쿠르드인에게도 독립의 기회가 왔지만, 터키가 로잔조약으로 현재의 영토를 회복했다. 쿠르드인 거주지역 모술에서 석유가 나오는 데 주목한 영국은 그 지역을 모술주로 삼아 이라크에 편입시켰다. 쿠르드인 거주지역은 터키, 이라크, 이란으로 분단되어 있다. 터키는 쿠르드인의 존재를 부정하며 동화정책을 취해왔고, 이라크에서는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쿠르드인이 이란편에 서자 50만명이나 되는 쿠르드인을 이주시키고 5000명을 살해했다. 1991년 걸프전쟁 직후에는 후세인 정권에 대한 쿠르드인의 반란이 진압되면서 100만명 이상이 터키, 이란, 이라크 북부 산악 지대로 도주했다.
 
와하브파 원리주의 운동은 18세기 전반에 발생했고, 호족 사우드 가문의 지원을 받아 고양되었다. 영국이 지원한 하심 가문의 후세인은 사우드 가문의 정적으로, 사우드 가문은 헤자즈 지방으로 침공하여 1924년 후세인을 퇴위시켰다.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세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등으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진다.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다음 날 이를 부당하다고 본 아랍의 군대가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하여 팔레스타인 전쟁(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스라엘은 영국군의 기지에서 무기를 조잘하여 아랍군을 압도한다. 휴전협정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전역의 8할을 영토로 하여 독립한다. 팔레스타인인은 난민 캠프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트란스요르단은 요르단강 서안을, 이집트는 가자 지구를 자국령에 포함시켰다.
 
아라비아어라는 공통 언어와 공통 역사를 가진 아랍 세계 사람들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될 필요가 있다는 바스주의가 제창된다. 1947년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바스주의 실현을 위한 '바스당'이 결성된다. 1950년 이라크에서도 바스당이 결성된다.
 
1943년 이집트의 제안으로 아랍연맹이 결성된다. 당시 영국은 하심가문을 통해 이라크와 요르단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고, 아랍연맹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다. 아랍의 주도권을 원하던 이집트는 하심가문의 정적 사우드 가문(사우디아라비아)의 지지로 카이로에 아랍연맹의 본부를 둔다. 아랍연맹은 아랍 제국의 독립을 지원하고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가 들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1958년 2월, 이집트의 나세르 정권과 시리아의 바스당 정권이 손을 잡고 나세르를 대통령으로 하는 '아랍연합공화국'을 세웠다. 양국은 소련의 지원 아래, 구지배층이 주도하는 질서에 도전하는 자세를 분명히 했다. 친서구파인 이라크, 요르단의 하심가문 연합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손을 잡고 민족운동의 고양을 저지하려 한다. 그런데 1958년 7월, 카셈을 중심으로 하는 청년 장교가 혁명을 일으켜 하심 가문의 왕을 타도한다. 그 결과 이라크에서 여국의 영향력이 후퇴하고, 이러한 변화로 중동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될 것을 우려한 미국과 영국은 민족운동의 확산을 저지한다.
 
이란에서는 1951년 수상이 된 민족주의자 모사데그가 석유산업의 국영화를 단행하고 영국과 국교를 단절한다. 모사데그의 급진 정책에 반대하는 친서구파 팔레비 국왕은 1953년 모사데그를 해임했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팔레비가 최정적으로 승리한다.
 
이집트의 나세르는 인도의 네루,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과 함께 냉전에 참여하지 않는 비동맹의 길을 선택한다. 1955년에는 중국과 국교를 수립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선택한다. 1956년 이스라엘군이 반이스라엘 게릴라 기지를 공격한다는 구실로 시나이반도로 쳐들어가 제압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는 쌍방의 전투에 개입한다는 구실로 수에즈운하 지대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나세르 정권의 타도를 꾀한다.(제2차 중동전쟁) 하지만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지 못해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군은 철수하고, 나세르의 존재감은 강화되었다. 1964년 나세르는 팔레스타인땅을 되찾자고 제창하고, 아랍제국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결성한다. 의장은 전 사우디아라비아 유엔 대사가 맡고, 해방군은 이집트군이 맡았다.
 
이라크의 카셈은 석유에서 나오는 수입을 이집트와 나누는 것이 못마땅해 나세르와 결별한다. 나세르의 경제정책에 불만을 품은 시리아도 1961년 결별한다.
 
카셈은 1963년 쿠데타로 살해되고 바스당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라크의 쿠데타가 영향을 미쳐 시리아에서는 다음달에 혁명이 일어나 바스당 정권이 수립된다. 하지만 석유를 둘러싼 갈등으로 이라크와 시리아의 바스당 사이에 대립이 생겼다.
 
시리아의 바스당은 이스라엘과의 분쟁을 격화시킴으로써 국내 정치의 모순을 밖으로 돌리려했다.  시리아와 이집트는 동맹을 맺어 수에즈전쟁 당시 시나이반도에 배치되었던 유엔군의 철수를 실현시키고, 티란해협을 봉쇄하여 이스라엘 함선을 묶어 두려고 했다. 이스라엘은 티란해협 봉쇄가 개전의 충분한 명분이 된다고 보고 1967년 6월 5일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기습했다.(제3차 중동전쟁) 6일간의 전투로 이스라엘군은 이집트의 시나이반도, 시리아의 골란고원, 요르단강 서안을 점령했다.
 
아랍 제국에 의지해서 팔레스타인을 되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 팔레스타인인은 PLO를 전투조직으로 재편한다. 파타하의 창설에 관여하고 대변인으로 활약하던 아라파트가 PLO 3대 의장에 취임한다.  PLO는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기관이라 자처하며 최고의결기관은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 정규군으로는 파타하의 무장노선을 계승한 팔레스타인해방군을 뒀다.
 
팔레스타인 난민 대다수가 유입된 요르단에서는 난민이 커다란 세력이 되었다. PLO는 이스라엘과 싸우기 전에 보수적인 유르단 왕부터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1970년 요르단 왕 후세인은 암만의 PLO를 섬멸하라고 명령한다. 친PLO인 시리아는 육군을 요르단에 파견했고, 미국은 항공모함을 이스라엘 앞바다에 파견하여 요르단을 지원했다. 결국 PLO는 요르단 내 거점을 잃고 지도부와 주력부대를 레바논으로 옮겼다.
 
이집트에서 나세르 이후 사다트 정권은 시리아, 요르단과 이스라엘을 침공한다.(4차 중동전쟁) 미국은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소련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원했다. 산유국은 원유 가격을 인상하는 방법으로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원했다. 전쟁 결과 이집트는 쉐즈운하의 통항을 재개할 수 있었고 PLO는 팔레스타인의 합법적 대표로 인정되었다.
 
레바논은 1944년 프랑스에서 독립했고, 고대 페니키아를 계승했다. 1930년대 이후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도, 수상은 수니파, 국회의장은 시아파, 부수상과 국회부의장은 그리스정교도가 임명되는 관행으로 질서가 유지되었다. 레바논 정부는 PLO에게 자치정부나 다름없는 특권을 주고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도 묵인했다. 그러나 1975년 마론파 민병이 팔레스타인인 버스를 공격하여 이슬람교도 27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내전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시리아는 이슬람 편에서 참전했지만, 나중에는 레바논의 종파균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하여 마론파를 지원했다. 1982년 이후 이스라엘은 PLO를 레바논에서 몰아내고 친이스라엘적인 마론파 정권을 세우기 위해 레바논 남부의 베이루트를 침공했다. 시리아의 지원을 얻은 이슬람교도,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헤즈볼라가 이스라엘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여 내전은 장기화됐다. 
 
레바논의 PLO 전투원 1만명은 미국의 중재로 베이루트에서 철수하고 PLO본부를 튀니지로 옮겼다. PLO후퇴로 기세가 오른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의 토지를 수용하고 유대인 입식지를 확대한다. 팔레스타인 민중과 이스라엘군의 충돌이 잇따랐고 '인티파다'라는 민중의 자발적인 투석 투쟁이 일어난다. 1988년에는 이슬람원리주의 조직 '하마스'가 ㅜ쟁의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반도를 되찾는 것을 최대의 정치적 과제로 삼은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소련과의 우호조약을 깨고 미국에 접근하여 키신저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교섭을 시작했다. 1979년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카이로의 아랍연맹본부는 튀니지의 수도로 옮겨졌다.
 
1993년 PLO의장 아라파트와 이스라엘 수상 라빈은 파레스타인잠정자치협정을 조인했다. 그러나 라빈은 유대교도에게 암살되고 2001년 이스라엘 선거에서 우파 샤론이 총리가 되면서 평화 협상이 중지된다. 2003년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유대인 입식지와 팔레스타인 거주지 사이에 거대한 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란에서는 시아파를 중심으로 민중봉기가 일어나 1979년 1월 팔레비 국왕이 망명한다. 시아파 최고성직자 호메이니는 반대파를 숙청하고 자신이 이슬람 신앙에 기초한 법률을 제정하여 통치한다. 
 
소련은 이란혁명이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영내에 파급될까 두려워했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 세력을 탄압해오던 아민 공산당 정권이 이란혁명을 아프가니스탄으로 불러들일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고 아민을 물러나게 하기 위하여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이슬람 국가들에서 많은 의용군이 이슬람전사(무자헤딘)로서 아프가니스탄에 집결했고, 미국은 소련의 세력 확대를 막기위해 게릴라 세력에게 무기를 지원했다.  소련철군 이후 혼란의 와중에 '탈레반'이라는 원리주의 집단이 카불을 점령한다.
 
미국은 이란혁명으로 '중동의 헌병'을 잃고 큰 타격을 받았다. 미국은 방어벽이 될만한 세력으로 이라크의 바스당 지도자 사담 후세인을 선택했다. 이라크에서는 시아파가 다수이지만 강권으로 수니파 정권을 유지해온 만큼, 후세인은 이란혁명이 이라크 남부 시아파에 파급되는 것을 우려했다. 1980년 후세인이 이란을 공격하면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1982년 이후 이란군이 우위에 서자 미국은 이라크에 무기와 경제를 원조한다.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채무가 늘어나자 후세인은 산유국 쿠웨이트를 침공한다. 이것은 석유 이권을 가지고 있던 미국에 노골적으로 도전한 것이었다. 미국은 군대를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했고 유엔안보리는 이라크를 침략자로 규정했다. 소련도 미국을 지지했다. 이라크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점령 지역에서 철수하면 이라크도 쿠웨이트에서 철수하겠다며 팔레스타인 문제와 쿠웨이트를 엮어서 아랍인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요르단, 예맨, 튀니지, PLO는 이라크를 지지했다. 걸프전쟁에 패한 이라크 국내에서는 남부 시아파 민중이 후세인 독재에 반대하여 봉기하고, 북부 쿠르드인이 봉기하여 유전 지대를 점거했다. 미국은 이라크가 분열하고 혼란에 빠지만 그 혼란이 페르시안 만안으로 파급될까 두려워서 후세인 정권 타도를 보류한다. 전쟁 이후 성스러운 아라비아반도에 미군 진주를 허용했다고 하여 사우디아라비아의 위신이 크게 흔들렸고, 이라크를 지지한 PLO의 처지가 어려워졌다.
 
미국은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며 2003년 이라크 침공을 강행한다. 이라크 북부 쿠르드인 부대와 호응하여 침공 한달 만에 이라크 전역을 제압했다. 미국의 주장과는 달리 이라크에서는 대량살상무기가 발견되지 않았다.
 
러시아연방에서 이탈하기를 원하는 체첸인은 공화국을 세우고 1991년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체첸의 독립을 인정하면 석유파이프라인을 잃게 되므로 러시아군이 체첸으로 침공한다. 체첸인은 남부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계속했다.
중동middle east은 영국이 자국의 위치를 기준으로 오스만 제국의 영역을 '근동',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을 '중동', 동아시를 '극동'이라 부른데서 유래. '중동'은 유럽을 기준으로 만든 이름이며, 유럽이 세계에 식민지를 확대하던 19세기의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벨기에 역사가 앙리 피렌이 '무함마드 없이는 샤를마뉴도 없다'고 지적
 
이슬람 세계는 '움마'라 불리는 이슬람 공동체가 팽창하는 방식으로 확장되었다. 마함마드가 메카에서 포교를 시작할 때는 신과 개인의 계약에 따른 신앙을 설파했지만, 포교의 거점을 야스리브로 옮긴 뒤에는 예언자이며 신도를 지도하는 무함마드와 신도의 계야에 따른 신앙으로 바뀌었다.
 
19세기 유럽적인 '네이션'이라는 개념이 들어오기 전에는 중동에서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란'이라는 말은 그리스인이 이란고원에 사는 주민들 스스로가 아리아인이라 자칭한다고 전하며 이란고원을 아리아나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역사적으로 이란인은 페르시아인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이들이 이란고원 서쪽 땅을 페르시스라 불렀고, 여기에서 세력을 확대하여 대제국을 세운데서 나온 이름이다.
 
'헬레니즘 시대'란 기원전 4세기 중반 알렉산드로스왕이 페르시아 제국(아케메네스 왕조)을 정복한 뒤부터,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가 세운 이집트가 기원전 1세기 후반 로마 제국에 의해 통합될 때까지 지중해 지역과 중동 지역에서 그리스 문화와 학술이 지배적이었던 시대를 가리킨다.
 
파르티아에서 믿은 태양신 미트라가 동서로 전해져 로마에서는 군신 미트라스로, 동아시에서는 미래불 미륵이 되었다!!! (그렇구나!!)
 
알렉산드로스 이후 파르티아가 세워져 중동을 장악하고, 서기 3세기 초 사산 왕조가 이를 쓰러트린다. 사산왕조는 아르케메네스 왕조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복고적 왕조였다. 사산 왕조(뭍의 제국)는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해양 제국)을 상대로 장기간에 걸쳐 싸웠고, 국력이 약해진 양쪽 다 아랍인에게 주도권을 넘긴다.
 
사산왕조와 비잔틴제국의 전쟁으로 페르시아만에서 유프라테스강을 거쳐 북상하는 교역로가 쇠퇴하고, 홍해에서 시리아로 낙타를 이용한 상단 무역이 활발해졌다. 메카가 상업의 중심도시가 된다.
 
무함메드는 메카를 탈출해 야스리브(메디나)로 이동한다.(헤지라) 야스리브에서 확대된 이슬람 교단은 메카를 점령한다.
 
무함마드 사후 '칼리프'('무함마드의 대리인'이란 뜻)가 이슬람 교단을 주재한다.
 
1대~4대 칼리프가 정통칼리프
 
4대 칼리프 알리 이후 우마이야 가문의 무아위야가 칼리프라 칭하며 부족으로 세습된다.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후계자는 무함마드와 혈연이 닿아야 한다면서 알리 이외의 칼리프를 부정했다.
그래서 알리를 초대 이맘, 알리의 첫째 아들 하산을 2대 이맘, 둘째 아들 후세인을 3대 이맘으로 부른다.
시아파 사람들은 이맘들이 수니파에 독살되거나 옥사할 정도로 비극적인 말로를 겪었다고 주장한다.
이스마일파는 음주 등으로 이맘이 되지 못한 6대 이맘의 아들이 7대 이맘이라고 주장한다.
 
시아는 '시아 알리'(알리의 분파)의 약자
수니는 무함마드의 순나(관행, 범례)에 따르는 사람들
 
우마이야 왕조의 대정복 운동이 끝나자 제국은 혼란에 빠지고 직할지 시리아에서조차 정부의 지배가 통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그런 와중에 무함마드의 하심 가문이 교단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운동이 이란고원을 중심으로 격렬해진다. 이란의 시아파 반체제 세력은 압바스 가문의 아부 알 압바스를 초대 칼리프로 하는 새 왕조를 세웠다. 왕조성립 이후 압바스 가문은 안정된 정권을 위해 다수파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시아파를 탄압했다.
 
압바스왕조는 꾸란에 기초한 이슬람교도의 평등을 실현하는 데 힘을 써 아랍인에 대한 연금 지급과 면세 특권을 폐지, 비압립인 유력자를 관리로 적극 채용했다. 정복왕조 아랍제국이 이슬람 원리에 따라서 여러 민족이 평등하게 통합되는 이슬람 제국으로 모습을 바꾸었는데 이를 '압바스혁명'이라고 한다.
 
유라시아에서 사상 최대의 영역을 지배한 몽골 제국을 '세계사'의 기점으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이는 중화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에 편중된 시각이다. 원 제국을 지탱한 색목인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였다. 유라시아의 뭍과 바다를 연결한 몽골 제국의 네트워크는 그 이전의 사막, 초원 바다를 잇는 이슬람 상업권 네트워크 위에 만들어진 것이다.
 
투르크인은 점차 소그드 상업권에 편입되어 갔고, 10세기에 수피가 활발하게 포교하였다.
투르크인은 1)중동에 진출하여 아랍인과 이란인을 능가하는 지배민족이 되고, 2)아프가니스탄에서 북인도로 이슬람 세계를 확대하고, 3)소그드(현재의 우즈베키스탄 등) 지방의 지배 세력이 되고, 4)실크로드 동쪽의 타림분지로 이주하여 이슬람교(중국어로는 청진교)를 퍼뜨리고 현재의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를 건설
 
압바스 왕조는 맘루크(군사 노예)를 공하여 권력 유지를 꾀했다. 맘루크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가 아닌 투르크인 슬라브인 쿠르드인 등의 용병을 가리키는데, 유목 투르크인이 중심을 이루었다. 투르크멘족은 족장 셀주크의 지도 아래 이슬람교로 집단 개종했고, 11세기 초 족장 토긜베그는 압바스 왕조로부터 칼리자의 보호자로 인정받고 칼리프로부터 '술탄'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투르크인이 비잔틴제국을 격파하자 비잔틴 황제는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청해 십자군 파견이 시작되었다.
(참고 - 로마는 동로마, 서로마로 나뉘어졌고 서로마는 일찍 멸망. 동로마는 비잔티움으로 불림.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의 전신으로 로마교황을 보호하는 댓가로 관을 받음)
 
몽골군의 침입으로 이슬람세계가 큰 위기에 빠졌을 때 투르크인 맘루크는 몽골군의 이집트 진출을 저지하고 1250년 술탄 지위를 빼앗아 이집트에 맘루크 왕조를 세웠다.
몽골 제국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투르크화 이슬람화한 몽골인 티무르가 티무르 왕조를 열었다.(1370년) 티무르가 약체화된 이후 티무의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부르는 인도로 쫓겨 가 1526년 무굴제국을 세운다.
파키스탄은 이런 연장선에서 탄생했다.
 
오스만 왕조는 여러 군웅 가운데 하나였으나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다. 콘스탄티노플은 파괴되지 않고 '이스탄불'로 이름을 바꾸어 그대로 수도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지배한 영역에서 투르크인은 소수민족이었다. 따라서 투르크어를 말하고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전부 제국 신민으로 받아들였다. 제국 통치의 바탕은 '종교'였다.
 
이란 고원에 시아파를 국교로 삼는 사파비 왕조가 만들어진다.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에 퍼진 내셔널리즘에 자극받아 그리스독립전쟁이 일어났고, 오스만 제국은 열강의 개입으로 패배했다.
 
'범슬라브주의'는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추진된 슬라브 민족의 통일과 연합을 지향하는 운동이다. 1877년 러시아는 슬라브인의 지원을 얻어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 전쟁으로 발칸반도의 슬라브 민족이 여러 나라로 독립한다.
 
이란에서는 미르자 알리 무함마드가 시아파 신앙을 이용하여 민중을 조직했으나 1850년 총살당한다. 1906년 국민의회가 개설되어 헌법에 상당하는 기본법이 채택되지만 러시아군이 개입하여 신체제를 무너뜨렸다.
 
독일은 베를린, 비잔티움(이스탄불), 바드다드를 철도로 연결하는 3B 정책을 펴고, 영국은 케이프타운, 카이로, 캘커타를 잇는 3C 정책을 편다. 이 대립의 충돌로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다.
 
1889년, 사관학교 청년들을 중심으로 '통일진보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것이 '청년 투르크'의 모체였다. 1913년 '청년 투르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엔베르 파샤 등 3명에 의한 군사독재가 시작된다. 엔베르 파샤는 '범투르크주의'라는 민족주의로 투르크인의 부흥을 꾀했다. 
 
투르크정부(오스만 제국)는 투르크가 영토를 회복하도록 돕겠다는 독일의 제안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이 때 영국은 오스만 제국 내의 아랍인을 조직하여 오스만 제국을 배후에서 위협하는 작전을 썼다. 청년투르크 혁명 이후 아랍인 사이에서는 반투르크 의식이 고양되었다. 영국은 전쟁이 끝나면 아랍인을 독립시켜 주겠다고 약속하고 하심 가문의 후세인과 두 아들 압둘라(훗날 요르단 초대 국왕)와 파이살(훗날 이라크 국왕)을 지도자로 내세워 아랍 반란군을 조직했다. 그러나 강화회의에서 영국은 아랍을 독립시키겠다는 약속을 져버렸다.
 
패전 후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공동식민지 같은 상태가 되었고, 케말 파샤가 1923년 앙카라를 수도로 하는 터키공화국을 수립하여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아나톨리아를 점령하고 있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의 군대를 격파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터키에 양보한 배경에는 러시아혁명이 있었다. 혁명이 중동으로 파급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의 주선으로 만들어진 이란 카자흐 여단의 대령 팔레비는 러시아혁명으로 러시아 세력이 후퇴하는 정세를 이용하여 1925년 이란에 '팔레비 왕조'를 창립하고 왕위에 올랐다.
 
팔레스타인 문제, 이라크 문제, 쿠르드인 문제 등의 중동 분쟁이 생긴 뿌리는,
1) 1916년의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 2)1915~1916년에 교환된 '후세인-맥마흔 서한', 3)1917년의 '벨푸어선언' 등의 협정이 서로 모순되었다는 데 있었다.
 
1) 영국의 중동 전문가 사이크스와 프랑스 외교관 피코가 러시아의 동의를 얻어 체결한 비밀 협정으로 3국이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3분할할 것을 담고 있다. 러시아혁명정부가 이 비밀협정을 공개했다.
2) 아랍의 지도자 후세인과 영국 고등판무관 맥마흔은 1차대전후 아랍인 국가의 건설을 인정하는 데 합의했다.
3) 영국의 외무장관 밸푸어가 유대인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편지로, 팔레스타인 내에 유대인의 민족적 향토를 건설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한다는 내용이다.
 
오스만 제국이 1차 세계대전으로 붕괴하자 쿠르드인에게도 독립의 기회가 왔지만, 터키가 로잔조약으로 현재의 영토를 회복했다. 쿠르드인 거주지역 모술에서 석유가 나오는 데 주목한 영국은 그 지역을 모술주로 삼아 이라크에 편입시켰다. 쿠르드인 거주지역은 터키, 이라크, 이란으로 분단되어 있다. 터키는 쿠르드인의 존재를 부정하며 동화정책을 취해왔고, 이라크에서는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쿠르드인이 이란편에 서자 50만명이나 되는 쿠르드인을 이주시키고 5000명을 살해했다. 1991년 걸프전쟁 직후에는 후세인 정권에 대한 쿠르드인의 반란이 진압되면서 100만명 이상이 터키, 이란, 이라크 북부 산악 지대로 도주했다.
 
와하브파 원리주의 운동은 18세기 전반에 발생했고, 호족 사우드 가문의 지원을 받아 고양되었다. 영국이 지원한 하심 가문의 후세인은 사우드 가문의 정적으로, 사우드 가문은 헤자즈 지방으로 침공하여 1924년 후세인을 퇴위시켰다.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세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등으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진다.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다음 날 이를 부당하다고 본 아랍의 군대가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하여 팔레스타인 전쟁(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스라엘은 영국군의 기지에서 무기를 조잘하여 아랍군을 압도한다. 휴전협정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전역의 8할을 영토로 하여 독립한다. 팔레스타인인은 난민 캠프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트란스요르단은 요르단강 서안을, 이집트는 가자 지구를 자국령에 포함시켰다.
 
아라비아어라는 공통 언어와 공통 역사를 가진 아랍 세계 사람들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될 필요가 있다는 바스주의가 제창된다. 1947년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바스주의 실현을 위한 '바스당'이 결성된다. 1950년 이라크에서도 바스당이 결성된다.
 
1943년 이집트의 제안으로 아랍연맹이 결성된다. 당시 영국은 하심가문을 통해 이라크와 요르단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고, 아랍연맹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다. 아랍의 주도권을 원하던 이집트는 하심가문의 정적 사우드 가문(사우디아라비아)의 지지로 카이로에 아랍연맹의 본부를 둔다. 아랍연맹은 아랍 제국의 독립을 지원하고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가 들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1958년 2월, 이집트의 나세르 정권과 시리아의 바스당 정권이 손을 잡고 나세르를 대통령으로 하는 '아랍연합공화국'을 세웠다. 양국은 소련의 지원 아래, 구지배층이 주도하는 질서에 도전하는 자세를 분명히 했다. 친서구파인 이라크, 요르단의 하심가문 연합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손을 잡고 민족운동의 고양을 저지하려 한다. 그런데 1958년 7월, 카셈을 중심으로 하는 청년 장교가 혁명을 일으켜 하심 가문의 왕을 타도한다. 그 결과 이라크에서 여국의 영향력이 후퇴하고, 이러한 변화로 중동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될 것을 우려한 미국과 영국은 민족운동의 확산을 저지한다.
 
이란에서는 1951년 수상이 된 민족주의자 모사데그가 석유산업의 국영화를 단행하고 영국과 국교를 단절한다. 모사데그의 급진 정책에 반대하는 친서구파 팔레비 국왕은 1953년 모사데그를 해임했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팔레비가 최정적으로 승리한다.
 
이집트의 나세르는 인도의 네루,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과 함께 냉전에 참여하지 않는 비동맹의 길을 선택한다. 1955년에는 중국과 국교를 수립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선택한다. 1956년 이스라엘군이 반이스라엘 게릴라 기지를 공격한다는 구실로 시나이반도로 쳐들어가 제압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는 쌍방의 전투에 개입한다는 구실로 수에즈운하 지대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나세르 정권의 타도를 꾀한다.(제2차 중동전쟁) 하지만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지 못해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군은 철수하고, 나세르의 존재감은 강화되었다. 1964년 나세르는 팔레스타인땅을 되찾자고 제창하고, 아랍제국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결성한다. 의장은 전 사우디아라비아 유엔 대사가 맡고, 해방군은 이집트군이 맡았다.
 
이라크의 카셈은 석유에서 나오는 수입을 이집트와 나누는 것이 못마땅해 나세르와 결별한다. 나세르의 경제정책에 불만을 품은 시리아도 1961년 결별한다.
 
카셈은 1963년 쿠데타로 살해되고 바스당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라크의 쿠데타가 영향을 미쳐 시리아에서는 다음달에 혁명이 일어나 바스당 정권이 수립된다. 하지만 석유를 둘러싼 갈등으로 이라크와 시리아의 바스당 사이에 대립이 생겼다.
 
시리아의 바스당은 이스라엘과의 분쟁을 격화시킴으로써 국내 정치의 모순을 밖으로 돌리려했다.  시리아와 이집트는 동맹을 맺어 수에즈전쟁 당시 시나이반도에 배치되었던 유엔군의 철수를 실현시키고, 티란해협을 봉쇄하여 이스라엘 함선을 묶어 두려고 했다. 이스라엘은 티란해협 봉쇄가 개전의 충분한 명분이 된다고 보고 1967년 6월 5일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기습했다.(제3차 중동전쟁) 6일간의 전투로 이스라엘군은 이집트의 시나이반도, 시리아의 골란고원, 요르단강 서안을 점령했다.
 
아랍 제국에 의지해서 팔레스타인을 되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 팔레스타인인은 PLO를 전투조직으로 재편한다. 파타하의 창설에 관여하고 대변인으로 활약하던 아라파트가 PLO 3대 의장에 취임한다.  PLO는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기관이라 자처하며 최고의결기관은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 정규군으로는 파타하의 무장노선을 계승한 팔레스타인해방군을 뒀다.
 
팔레스타인 난민 대다수가 유입된 요르단에서는 난민이 커다란 세력이 되었다. PLO는 이스라엘과 싸우기 전에 보수적인 유르단 왕부터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1970년 요르단 왕 후세인은 암만의 PLO를 섬멸하라고 명령한다. 친PLO인 시리아는 육군을 요르단에 파견했고, 미국은 항공모함을 이스라엘 앞바다에 파견하여 요르단을 지원했다. 결국 PLO는 요르단 내 거점을 잃고 지도부와 주력부대를 레바논으로 옮겼다.
 
이집트에서 나세르 이후 사다트 정권은 시리아, 요르단과 이스라엘을 침공한다.(4차 중동전쟁) 미국은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소련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원했다. 산유국은 원유 가격을 인상하는 방법으로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원했다. 전쟁 결과 이집트는 쉐즈운하의 통항을 재개할 수 있었고 PLO는 팔레스타인의 합법적 대표로 인정되었다.
 
레바논은 1944년 프랑스에서 독립했고, 고대 페니키아를 계승했다. 1930년대 이후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도, 수상은 수니파, 국회의장은 시아파, 부수상과 국회부의장은 그리스정교도가 임명되는 관행으로 질서가 유지되었다. 레바논 정부는 PLO에게 자치정부나 다름없는 특권을 주고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도 묵인했다. 그러나 1975년 마론파 민병이 팔레스타인인 버스를 공격하여 이슬람교도 27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내전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시리아는 이슬람 편에서 참전했지만, 나중에는 레바논의 종파균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하여 마론파를 지원했다. 1982년 이후 이스라엘은 PLO를 레바논에서 몰아내고 친이스라엘적인 마론파 정권을 세우기 위해 레바논 남부의 베이루트를 침공했다. 시리아의 지원을 얻은 이슬람교도,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헤즈볼라가 이스라엘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여 내전은 장기화됐다. 
 
레바논의 PLO 전투원 1만명은 미국의 중재로 베이루트에서 철수하고 PLO본부를 튀니지로 옮겼다. PLO후퇴로 기세가 오른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의 토지를 수용하고 유대인 입식지를 확대한다. 팔레스타인 민중과 이스라엘군의 충돌이 잇따랐고 '인티파다'라는 민중의 자발적인 투석 투쟁이 일어난다. 1988년에는 이슬람원리주의 조직 '하마스'가 ㅜ쟁의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반도를 되찾는 것을 최대의 정치적 과제로 삼은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소련과의 우호조약을 깨고 미국에 접근하여 키신저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교섭을 시작했다. 1979년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카이로의 아랍연맹본부는 튀니지의 수도로 옮겨졌다.
 
1993년 PLO의장 아라파트와 이스라엘 수상 라빈은 파레스타인잠정자치협정을 조인했다. 그러나 라빈은 유대교도에게 암살되고 2001년 이스라엘 선거에서 우파 샤론이 총리가 되면서 평화 협상이 중지된다. 2003년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유대인 입식지와 팔레스타인 거주지 사이에 거대한 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란에서는 시아파를 중심으로 민중봉기가 일어나 1979년 1월 팔레비 국왕이 망명한다. 시아파 최고성직자 호메이니는 반대파를 숙청하고 자신이 이슬람 신앙에 기초한 법률을 제정하여 통치한다. 
 
소련은 이란혁명이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영내에 파급될까 두려워했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 세력을 탄압해오던 아민 공산당 정권이 이란혁명을 아프가니스탄으로 불러들일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고 아민을 물러나게 하기 위하여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이슬람 국가들에서 많은 의용군이 이슬람전사(무자헤딘)로서 아프가니스탄에 집결했고, 미국은 소련의 세력 확대를 막기위해 게릴라 세력에게 무기를 지원했다.  소련철군 이후 혼란의 와중에 '탈레반'이라는 원리주의 집단이 카불을 점령한다.
 
미국은 이란혁명으로 '중동의 헌병'을 잃고 큰 타격을 받았다. 미국은 방어벽이 될만한 세력으로 이라크의 바스당 지도자 사담 후세인을 선택했다. 이라크에서는 시아파가 다수이지만 강권으로 수니파 정권을 유지해온 만큼, 후세인은 이란혁명이 이라크 남부 시아파에 파급되는 것을 우려했다. 1980년 후세인이 이란을 공격하면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1982년 이후 이란군이 우위에 서자 미국은 이라크에 무기와 경제를 원조한다.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채무가 늘어나자 후세인은 산유국 쿠웨이트를 침공한다. 이것은 석유 이권을 가지고 있던 미국에 노골적으로 도전한 것이었다. 미국은 군대를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했고 유엔안보리는 이라크를 침략자로 규정했다. 소련도 미국을 지지했다. 이라크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점령 지역에서 철수하면 이라크도 쿠웨이트에서 철수하겠다며 팔레스타인 문제와 쿠웨이트를 엮어서 아랍인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요르단, 예맨, 튀니지, PLO는 이라크를 지지했다. 걸프전쟁에 패한 이라크 국내에서는 남부 시아파 민중이 후세인 독재에 반대하여 봉기하고, 북부 쿠르드인이 봉기하여 유전 지대를 점거했다. 미국은 이라크가 분열하고 혼란에 빠지만 그 혼란이 페르시안 만안으로 파급될까 두려워서 후세인 정권 타도를 보류한다. 전쟁 이후 성스러운 아라비아반도에 미군 진주를 허용했다고 하여 사우디아라비아의 위신이 크게 흔들렸고, 이라크를 지지한 PLO의 처지가 어려워졌다.
 
미국은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며 2003년 이라크 침공을 강행한다. 이라크 북부 쿠르드인 부대와 호응하여 침공 한달 만에 이라크 전역을 제압했다. 미국의 주장과는 달리 이라크에서는 대량살상무기가 발견되지 않았다.
 
러시아연방에서 이탈하기를 원하는 체첸인은 공화국을 세우고 1991년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체첸의 독립을 인정하면 석유파이프라인을 잃게 되므로 러시아군이 체첸으로 침공한다. 체첸인은 남부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계속했다.
(찾아보니, 2011년에도 체첸 저항조직의 테러와 러시아의 학살이 이어지고 있다.. 체첸에는 '검은미망인'이라는 조직이 있는데, 러시아군에게서 자신 혹은 가족들이 살인, 약탈, 강간 등을 겪었던 여성들이 만든 테러조직이라고 한다.      아..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2011/11/24 12:28 2011/11/24 12:28

꽃같은 시절 _ 공선옥

음.. 공선옥 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은 다 담겨있다.

이 한결같음이 좋다.

 

어느 시골에서 돌부수는 공장에 맞서 싸우는 촌로들의 이야기다.

이 소설에 실린 이야기가, 현실 어딘가에선 거의 그대로 벌어지고 있을 것이기에,

처음엔 페이지 한장 한장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 속에 노래가 있고, 해학이 있고, ... 그러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있다.

우리네 삶은 그렇게, 삐걱이지만 기어코 돌아가는 것.

지금도, 100년전에도, 1000년전에도- 아마, 앞으로도.

 

몇 십 평생에, 내 하고픈 말 다할 수 있어서, 꽃같은 시절이었다는 그네들..

공선옥 소설이 따뜻한 건, 작가가 그 꽃시절을 함께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엔 그들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따로 있지 않고, 얽혀 있을 따름이다.

 

저승에서 함께 부르는 한풀이 노래가.. 참 아름답다.

 

 

공선옥 소설의 여성은, 김애란 소설의 여성과 또 다르다.

훨씬 집단적이다. 집단적으로 경험을 공유하고, 집단적으로 움직인다. 특수성보다는 보편성이.

 

 

꽃 같은 시절
꽃 같은 시절
공선옥
창비(창작과비평사), 2011
2011/11/22 10:01 2011/11/22 10:01

보는거슬리피 할로우 / 팀 버튼

책([슬리피 할로우])읽은 김에 영화도 봤다.

조니 뎁이 나오고, 팀 버튼이 감독이다.

 

목이 수도없이 댕강댕강 잘려나가는데,

어이구나,

좀 무섭다.

 

이카보드는 근거중심의 합리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사람이지만,

정작 현실을 대면할 때는 '여성'과 '아이'를 앞세우고 그 뒤에 숨어 살금살금 다가간다.

용맹을 자랑하던 브롬은 허무하게 쓰러졌고,

이카보드가 가진 도구들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들이 실재하는데,

해결의 실마리는 오히려 주술과 마법에 있었다.

재밌는 건, 주술은 여성이 돋보기는 남성이 사용한다는 거다.

 

소설에서도 그렇고, 영화에서도,

그 시기는 어느편이 월등하지 못하고 아웅다웅하는, 그런 시기였던 것 같다.

어느 편이든 세상을 해석하기 위한 노력이었는데, 그 사실이 쉽게 기각된다.

 

조니 뎁의 능청스러운 몸동작들, 표정들 - 타고난게로구나!

2011/11/15 15:11 2011/11/15 15:11

슬리피 할로우

아무아무아무 생각 없이,

그냥 도서관에서 신간에 꽂혀 있길래 빌려왔다.

사실, 요즘 영미문학을 읽어볼까하는 마음이 있긴 했는데,

그래서 이 책을 빌려온 건 아니다. 거리도 멀고.

 

 

좀 지루하게 읽었다.

당시에는 재밌는 이야기들일지 모르겠지만,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다만 당시 사람들의 관심사나 생각들을 볼 수 있어서 재밌었다는 거?

 

짧은 이야기들이 몇 편 실려 있고, 각 이야기는 좀 차이가 있지만 1800년대 초반? 그 쯤이 배경이다.

아메리칸 선주민을 몰아내고, 유럽에서 이주해온 이들이 터전을 꾸려 어느정도 정착을 이뤘고, 번창만 남겨놓은-

대체로 그런 분위기다.

해적과 해적이 남겨놓은 보물과 그 보물에 깃들어 있는 악의 기운...

이런 이야기가 많은데, 일확천금의 꿈은 어느 시기에나 있구나 싶으면서,

그 시기에는 이런 일확천금이 더 수월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

 

악마, 유령, 신선(?) 등에 대한 이야기와 사람들의 믿음은

1800년대 미국과 조선이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이 자신의 문명이 우월하다고 믿으며, 다른 세계을 정복하고 착취할 수 있었던 것을 되돌아보면,

근대라는 건 결국 그 세계가 얼마나 합리적인지와 별개로,

합리성을 다른 가치에 대해 우위로 두고 있다는, 그런 믿음인 것 같다.

합리성 이외에도 여러 가치들이 산재하는데, 그것들의 말소가 아니다.

 

산에 가서 술마시고 노는 걸 보다 보니 20년이 지났다더라는 이야기는, 신선과 놀다 도끼 자루가 썩었다는 이야기와 똑 닮았다. 전자는 창작자(작가의 창작이 아닌 전승을 기록한 것일수도 있지만)가 명시되어 있지만, 후자는 창작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게 다른건가? 그게 1800년대 미국과 조선의 차이였을까?

 

번역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구절이 많았다..

관용구일 것 같은데, 그냥 직역을 해놓는다든지(예를들면 바다에서 돼지들, 프라이팬을 탄다는데- 음..)

문맥이 어색하다든지..

오타도 있고..

편집자가 별로 신경안쓰고 출판한 것 같다.

 

 

 

슬리피 할로우
슬리피 할로우
워싱턴 어빙
생각의나무, 2011
2011/10/26 14:47 2011/10/26 14:47

신을 옹호하다 _ 테리 이글턴

 

 
 
이 책은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겨냥하고 있다. 신학을 합리적 이성으로 비판하는데 대해, 테리 이글턴은 합리성을 부정하는 식으로 답을 찾지 않는다. 테리 이글턴은 서두에서 과학을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동조하지 않으며, 종교와 정치를 함께 언급하겠다고 선언한다.
 
1-3장 까지는 특별히 애매한 부분이 없었는데, 4장에서 등장하는 개념어들은 난해하다. 종교가 문명과 문화가 결합시킬 수 있고, 상징형식의 하나라고 얘기하는데, 상징형식에는 성ㆍ예술도 있다. 문명과 문화의 범주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겠고, 성, 예술이 포함되는 상징형식이 문화와 어떻게 다른지도 잘 모르겠다. 책의 일관된 서술인, 해방ㆍ변혁의 정치를 문화ㆍ종교로 대체하는 것은 반정치적이라는 데 동의한다. 종교는 정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를테면 씨빌리떼의 정치와 연관지어볼 수 있을까?
 
1. 인간 쓰레기
 
1장에서 이글턴은 신학이 세상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믿음(신뢰)과 사랑이라고 설명한다. 예수는 이런 사랑과 자비를 상징하며, ‘아나빔’(사회에서 버림받은 인간쓰레기)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 ‘아나빔’이 주춧돌이 될 하나님의 나라라는 유토피아는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고, 그것은 가혹한 인간 현실을 직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현실을 바꾸기 위해 순교와 같은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비극이다. 순교는 자살과는 다른 죽음으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죽음이다. 혁명가의 삶이 혁명가가 지향하는 삶과 일치할 수는 없는데, 현재 혁명가의 삶을 율법으로 삼는 것은 죽음과 같은 상태이다. 비극을 인식한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가 큰 문제없이 나아가고 있다고 보는 자유주의의 관점과 대비된다. 자유주의(인본주의)는 신학에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신의 위치에 인간을 세워놓은 것에 불과하다. 비극은 현실이 더 나은 세상으로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을 요구한다.
 
이하 발췌
 
하느님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지 않고 뭔가가 존재하는 이유 자체이며, 모든 실체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창조자 하느님은 어떤 의도가 담긴 기능적 목적에서가 아니라 창조하는 일 자체를 좋아하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세상을 만들어낸 예술가이자 탐미주의자다. 천지창조는 최초의 ‘동기 없는 행위, 무상의 행위’였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세상이 어떤 앞선 과정의 필연적 결과, 피할 수 없는 인과 사슬의 결말이 아니라는 사실의 증거다.(이런 설명에서 자연스럽게 편의의 유물론이 떠오른다.)
 
세상이 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지배하는 규칙을 선험적인 원칙으로부터 추론해낼 수 없고, 세상은 오직 그 자체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데 이것은 세상이 하느님 자신의 자유를 함께 누리는 데서 연유한다. 급진적 낭만주의자들이-이 맥락에선 카를 마르크스까지 포함하여-제기하는 의문은 그 같은 존재 방식을 현실화 하려면 어떤 정치적 변혁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과학과 신학은 대부분의 경우에 같은 종류의 대상을 다루지 않는다. 과학과 신학의 다툼은 어느 쪽의 ‘설명’이 더 나은지를 놓고 벌어지는 게 아니다. 쟁점은 우주의 기원을 말할 때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느냐다. 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과학은 충분하게 멀리 올라가지 않는다.(왜 애초에 무언가가 존재하게 되었는지) 신학자는 우리가 설명을 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주가 설명 가능할 정도로 앞뒤가 들어맞는 것이라고 우리가 가정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따위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거칠게 말해 미적이라 할 이유 때문에 과학이 가능하다는 얘기다.(신학은 일종의 메타-과학) 이런 근원적 의문들의 답이 반드시 ‘하느님 때문에’는 아니고, 이런 질문을 신학자나 과학자만 던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도덕성은 우주 자체만큼이나 목적도 이유도 없다. 예수가 가르치는 도덕은 무모하고 비현실적이며 장래에 대비하지 않는, 상식을 벗어난 것이다. 하느님에게 우리가 지는 의미는 우리에게 애완용 몽구스가 지니는 의미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하느님은 우리를 그냥 방치해 둘 수 있고, 이런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가 바로 자유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우리가 이처럼 자유로울 때 하느님에게 가장 깊이 속하게 된다고 말한다.
 
니체의 관점에서 볼 때 절대적인 힘이 신에게서 인간에게 그대로 옮겨지지 않으면 신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죽음을 불러온다. 파우스트 식으로 인간은 무한한 듯해 보이는 자신의 힘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런 병폐를 치유하는 전통적인 방법이 [...] 이른바 비극 예술이라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된 것들이 감히 창조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이는 자기창출에 대한 부르주아의 위대한 신화라 부를만한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스스로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은 부르주아적 환상의 전형이고(자유롭고 완전한 주체-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 관계의 맥락 속에서만 우리의 자유가 크고 든든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데서 역사적 숱한 재앙이 시작됐다.
 
자유주의와 종교적 믿음이 반드시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의 이론적 원천 중 하나가 기독교의 자유의지 개념이다. 니체는 자유주의와 기독교가 실상은 한 가지 아니냐고 생각해서 훗날 나치스와 스탈린주의자들이 그랬듯이 둘을 싸잡아 비난했다. 
 
신약성경에는 영웅적이라 할 이야기가 없다. 예수는 구세주치고는 너무나 구차스럽다. 유대인의 전통적 관점에서 보면 살해당한 메시아란 말도 안 되게 변칙적인 것, 혹은 형용모순이다. 무한한 자족적 기쁨의 삶에 근원이 되며 예수가 ‘아버지’라고 일컫는 이 존재는 심판자가 아니고 가부장도 아니며 비난하는 사람도 아니고, 초자아 또한 아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든 하느님이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신앙) 예수의 사명은 인간의 유약함을 인정하는 것이지, 그 때문에 인간을 벌주고 야단치는 게 아니다.
 
성경에서 심판자나 비난자로 등장하는 하느님의 이름은 사탄이다. 사탄은 이를테면 못되게 구는 힘센 왕초로 해석된 하느님이다.[이런 해석도 나름대로 하느님을 비추는 괜찮은 방식의 하나다.]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사탄적이고 초자아적인 이미지가 뒤집어 지면서, 율법과 욕망 간의 위험한 교착상태-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실재’라 부르는 것-가 풀리기 시작한다. 교착상태에서 우리는 율법 자체와 병적으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우리 자신을 쓰레기라 생각하며 삶을 끝내려는 충동을 프로이트는 ‘죽음 충동’이라 불렀는데, 이의 정반대가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랑이다. 병적인 교착상태에서 해방돼 복음서에서 영생이라 일컫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음 충동에 시달리며 죽음과 다름없는 거짓된 영생을 살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죽느냐, 사느냐-)
 
갈보리에서 심하게 매질당해 피투성이가 된 희생양이 이제는 율법의 진정한 시니피앙(기표)이 됐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영생을 누리지 못하고, 사랑을 하면 공권력이 우리를 죽인다. 세속주의자들은 이를 환상과 현실도피로 규정하지만, 거꾸로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것이 복음서의 가차 없는 요구들을 완화해 준다. 예수를 본뜬다는 것은 예수의 삶만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모방한다는 뜻이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며, 예수의 자기희생에 담긴 궁극적 의미가 드러나는 곳이다. 이처럼 격렬하게 사랑하는 하느님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형상은 고문 받고 처형당한 정치범이다.[아나빔] 로마는 정치범만을 십자가에서 처형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새 술을 헌 부대에 담는 신중한 개량주의적 프로젝트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무엇을 전위적으로 보여주고 깨우치는 일이다. 이 일에서 중도는 허락되지 않는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환전상들의 좌판을 뒤엎어버린 데서 알 수 있듯이, 월 스트리트에서 인기 있을 인물이 아니다.
 
인간들의 유감스러운 상태[원죄]를 고려할 때 이처럼 노골적인 유토피아는 쉽게 이룰 수 없다. 엉망진창으로 뒤틀려 있는 세상에서 자기실현은 결국 자기를 버리는 행위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는 사실 자체가 비극이다. 복음서에 따르면 두 종류의 ‘죽음 속의 삶’이 있다. 하나는 지옥과도 같은 비참한 삶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집착을 버릴 수 있을 때 누리게 되는 풍성한 삶이다. 그런데 두 삶을 구분하기가 항상 쉽지는 않다.
 
독신은 성 그 자체에 적대적인 게 아니다. 희생이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버린다는 의미이다. 강제적인 금욕 생활에서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찾으려 한다면 최악의 잘못일 터이다. 혁명가가 이루고자 하는 사회의 바람직한 이미지들에 혁명가와 그의 삶이 포함되기는 어렵다. 순교자는 자기가 지닌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지만, 가능하다면 그러지 않아도 되기를 바란다. 반면에 자살자는 견디기 힘든 부담이 돼버린 삶을 기꺼이 내던진다. 순교자는 타인을 위해 죽음을 택하는 사람이다.
 
못쓰게 돼버린 우리 세상을 포기할 각오가 되었을 때, 그제서야 우리는 미래의 참된 삶을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다. 이런 마음가짐은 비관주의가 아니라 현실주의다. 우리는 그런 삶이 과연 가능한지를 확실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자기 비우기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처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냉정한 현실주의를 유지하면서,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극악하고 충격적이며 지긋지긋한 실재, 그 메두사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에만 어떤 형태로든 부활이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죄 없이 고통 받은 사람의 그런 끔직한 형상을 역사의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인류의 무한정한 진보라는 순진한 꿈을 곧이곧대로 믿을 가능성이 크다.
 
믿음이란 본디 무엇 혹은 누군가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헌신과 충성을 뜻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일차적인 것은 초월자인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명제에 동의하느냐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랑에 대한 약속을 충실하게 믿고 지키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헌신이다.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자라면, 우리 인류가 비록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했으나 놀랍게도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믿음 따위는 가질 필요가 없다. 상황이 그렇다는 점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한결같이 나쁜 방향으로 무신론적인데, 그에 반해 마르크스와 니체는 대체로 좋은 방향으로 무신론적이다. 무자비하게 실리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에 내몰린 이른바 영적인 가치가 피난처로 삼은 곳의 하나가 뉴에이지다. 마르크스가 종교를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라고 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게 바로 이런 상황이다. 마르크스가 공격한 종교는 실리만을 추구하는 물질주의자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종교, 즉 영적인 것을 현실에서 분리하여 감상적으로만 이해하는 유형의 종교였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낭만주의의 한 특징은 그것이 공리주의의 이면이라는 점이다. 뉴에이지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할 곳을 제공할 뿐이지 세상을 변화시킬 사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신경증의 징후가 그러듯이, 이런 유형의 종교적 믿음은 좌절된 욕망을 표현하는 동시에 그 욕망을 추방한다. 우리가 물질적으로 변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으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낭만주의처럼, 그런 믿음은 무정한 세계에 대한 반발이기는 하되 감정과 가치라는 한정된 영역 안에서만 맴돈다.
 
이슬람 급진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는 [...] 낭만주의나 뉴에이지와 달리, [...] 불만을 품은 소수의 교리를 넘어선 대중운동이다. 근본주의는 단순히 세상으로부터 도피처를 찾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나선다. 근본주의는 비현실적인데, 이는 근본주의가 헛된 꿈을 꾸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의 가치가 이전 시대의 자본주의, 즉 산업자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뉴에이지가 탈정치적인 데 비해 근본주의는 반정치적이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정치적 투쟁을 일삼기는 하나 근본에서는 문화주의의 한 형태로서 정치를 종교로 대체하고자 한다. 문화가 지나치게 비대해져서 정치를 완전히 집어삼키는 우려스러운 경향을 보이는 시대에 이런 근본주의가 싹튼다. (종교의 부흥이 정치적인 형태를 띄는) 형상은 본래적인 정치의 회복이 아니라 실패를 반영한다. 근대 혹은 현대라고 불리는 시대는 [...] 종교의 의미가 퇴색하지만, 동시에 종교의 폐해 또한 줄어드는 게 사실이다.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오면 종교는 다시 공공 영역으로 나아가고 집단화 되는데, [...] 우리는 지금 후기자본주의 세계의 재주술화라는 우려해야할 현상을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혁명적 민족주의가 끝나는 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시작된다.(포스트모더니즘이 정치를 문화로 대체한다면, 근본주의는 그 문화/정치를 종교로 대체한다.)
자본주의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몰라도, 지금까지는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상부구조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현시점의 문제는, [...] 종교가 시장경제에 의해 축출된 영적인 가치들의 몇 안 되는 피난처 중 하나로서 방어적이고 편집증적이며 거의 병적으로 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2. 배신당한 혁명
 
2장에서는 자유주의/합리주의 혁명이 자기 모순에 부딪힌 역사를 설명한다. 자유주의, 합리주의, 계몽주의는 인류의 소중한 유산이다. 하지만 그 자유주의, 합리주의 아래에서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 원폭 등이 있었고, 근대가 이전 시대에 비해 진보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자유주의는 그 시대에 존재하는 결함은 일시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역사가 끊임없이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 편을 택한다. 반면 급진주의자란 우리의 상황이 지금은 극도로 나쁘지만 바람직한 방향으로 많이 개선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자유주의자들이 믿음과 이성, 종교와 과학을 대비시키지만 종교와 과학은 서로 다루는 대상이 다르고, 이성/과학이 믿음과 무관하지도 않다. 자유주의는 맹목적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며 테러리즘을 비난하지만, 실상 테러리즘은 자유주의/합리주의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졌던 서구문명의 만행 때문에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다. 오히려 서구는 이슬람 세계에 폭력적으로 개입해 근본주의 이외의 다른 정치세력을 말살시켰다. 이성/믿음을 부당하게 대립시키며 어느 한편을 말살시키려는 시도는 이지러진 복수로 돌아올 뿐이다.
 
이하 발췌
 
기독교 믿음에 따르면 인간의 사악함은 큰 부분이 역사적 이유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정치적 실천을 통해 어느 정도 순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악덕이 얼마나 크고 끈덕진가를 고려할 때, 이런 설명과 대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또한 기독교의 믿음에 속한다. 인간이라는 종의 구조 자체에 결함과 모순이 없다고 단정하기 힘들며, 그런 결함과 모순은 역사적 관점에서 다룰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신앙의 성서적인 유형과 이데올로기적 유형[성 요한이 ‘이 세상의 권력’이라 부른 것과 어떤 방식으로든 결탁한 해석] 사이의 구분[...]은 무작정 전제할 게 결코 아니며 끝없이 논의해야 할 문제다. 이 [...] 작업에 대해 니체는 키르케고르의 어법을 빌려 ‘기독교 세계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구해내는 일’이라고 했다. 우리가 교회의 결함과 실패를 거론할 때 취하는 관점은 다른 무엇보다도 유대-기독교 유산 자체에서 비롯된 가치들의 관점이다.
 
자유주의 계몽주의의 역사는 인간 해방의 고무적인 역사로서 무한히 귀중한 유산이다. 이런 견해를 마르크스만큼 굳게 지닌 사상가는 없었다. 계몽주의의 가치들, 많은 부분이 유대-기독교에 기원을 두고 있는 그 가치들을 포스트모더니즘의 방자하고 어리석은 비난으로부터 지켜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근대성이 피임법과 히로시마 원폭, 해방운동과 생물학전을 동시에 뜻한다고 역설한다. 근대성이 긍정적인 현상이냐 부정적 현상이냐 하는 의문에 대해 급진주의는 단호하게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이라고 답한다.
 
테일러는 “‘종교’와 ‘과학’ 간의 전적인 대결이라는 관념은 키마이라 같은 가공의 괴물,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라고 주장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체와 객체의 만남을 대립이 아니라 협력으로 본다. 이 관계에서 주체인 정신은 객체인 현실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객체에 내재한 명료성을 겉으로 드러냄으로써 객체만이 아니라 주체 자신의 힘까지 알찬 자기실현으로 이끈다. 일체의 주관적 관념론과 달리 아퀴나스는 이런 상호관계에서 객체 쪽을 강조했다. 아퀴나스에게 이 세상은 우리 마음대로 만들고 조절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알 수 없는 타자성을 구현하고 있는 선물, 우리가 그 물질적 밀도와 자율성을 존중해야 하는 선물이다. 신학자와 과학자는 적어도 이 같은 존중을 공유한다.
 
진보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그런 믿음에 짙게 덧칠된 이데올로기가 문제일 뿐이다. 과거를 지움으로써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사람들은 과거가 결국은 복수의 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뿐이다.(종교를 지우려고만 해서는 극복할 수 없다)
 
종교는 오만하게 거부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끈질기게 해독해야 할 대상이다. 이성이 합리성과는 무관한 관심과 욕망들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이성은 보다 견실해져서 그 욕망들이 무법 상태로 치닫고 결국에는 이성 자체까지 압도하게 되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 프로이트 학파에서 말하듯이 억압은 욕망을 더 강화시킬 뿐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역사라는 상승하는 곡조의 절정에서 힘차게 울려 퍼지는 소리처럼 도래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장엄한 역사적 진화의 완성이 아니라, 인간이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가운데 보편적 평화와 정의가 살아 숨 쉬는 하느님의 통치 시대를 예시한 모든 역사적 발화점의 마무리다. 이처럼 기독교 신학은 진보라는 오만한 관념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역사를 바꾸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발터 벤야민도 인식했듯이, 하느님의 통치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산발적이고 자주 불운했던 투쟁들, 영원의 관점이라 할 것에 따라 ‘지금시간’이라는 하나의 순간에 모여 일관된 이야기로 구현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투쟁들을 이른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자유주의적 계몽정신의 원대한 이상 자체에는 시비를 걸 일이 거의 없다. 다만, 그 이상들을 실현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마다 어떤 가차 없는 힘에 의해 이상이 비틀어져 정반대의 것으로 전화하고, 그 결과 누군가의 자유가 다른 누구에게는 착취가 되며, 이론상의 평등이 현실에서는 불평등을 낳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는 따위의 의문을 짐짓 순진한 태도로 제기할 뿐이다. 자유주의는 또한 자아를 원자론적으로 생각하고 인간관계를 냉정한 계약관계로 보며 윤리를 공리주의라는 빈약한 관점에서 해석하는 경향을 조장한다.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테러는 전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게 아마드와 나 자신의 견해다. 자살폭탄테러가 결국은 서구 탓이라는 뜻도 아니다. 자살폭탄테러의 책임은 자살폭탄테러범 자신이 져야 한다. 얘기의 초점은 그 같은 범죄 행위가 값지게 생각되는 환경이 조성되는 데 서구 세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테러에 대한 억압이 아닌, 테러가 조성되는 조건 자체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다-반폭력)
 
 
3. 믿음과 이성
 
2장에 이어 믿음과 이성의 관계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믿음과 이성은 서로 대립하지 않으며, 과학 또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믿고 있던 것이 사실과 다르다 해서 그것이 비이성적인 것으로 등치될 수는 없다. 우리는 어떠한 믿음을 이성에 근거해 일일이 선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아는 것만으로 행동하지는 않고, 행동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필요에 공감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객관성에 대한 믿음을 환상으로 치부할 때, 근본주의는 종교적 믿음으로 모든 것을 환원시킨다. 이 둘은 믿음과 이성의 관계를 고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이하 발췌
 
우리는 믿음과 이성이라는 문제를 만나게 되는데, 이는 결코 신학적인 주제에 그치지 않는다.
믿음이란 대체로 진위에 입각한 명제의 성격보다는 발화와 동시에 그 말이 나타내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수행적 성격을 띤다. “하느님 아버지를 저는 믿나이다.”라는 신앙고백이 뜻하는 바는 [...] “나는 당신을 신뢰한다.”라는 발화와 더 비슷하다. 이에 반해 악마는 하느님이 있음을 인정한다고 예부터 알려졌지만, 하느님을 믿지는 않는다.
지식과 믿음의 관계는 무척 복잡하다. 예컨대 어떤 믿음은 합리적이지만 진실이 아닐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이 이러저러한 신조들을, 비록 나중에는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당시의 가정들과 지식 아래서는 옳다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인 것은 합리적이었다.
여기서 유의해야할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면서 믿을 수 있듯이 알면서 믿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처럼 극적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일이 우리에게 지식 한 점을 보태는 데 그치지 않고 믿음에까지 영향을 주려면, 우리의 말과 행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을 단지 ‘증명될 수 없는 어떤 명제들을 받아들이는 일’로 축소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사람들을 움직여 인종차별이 없는 사회의 가능성을 믿게 만드는 것은 일련의 명제들이 아니라 일련의 헌신이다. 그들이 피부색 때문에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이 움직여 행동에 나서려면 그에 앞서 이미 정의라는 개념과 정의의 실현 가능성에 어느 정도 헌신하고 있어야 한다. 사실에 대한 인식만으로는 정의 실현을 위한 행동을 유발하기에 충분치 않다.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라는 [...] 말은 사회주의나 페미니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맥락을 달리해 적용할 수 있다. 예컨대 당신이 여성해방운동에 뜨거운 관심을 가질 때 가부장제의 작동 방식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 정통 교리에서 믿음은 진정한 지식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며, 이 점은 일상의 삶에도 어느 정도 적용된다. 또한 혁명이론은 대중의 혁명운동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주장과도 맥이 통하는 바가 있다. 지식은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서 얻어지고, 적극적 참여를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이 행동을 유발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행동을 거치면서 믿음의 내용이 분명히 규정되기도 한다. 나아가 우리는 흔히 사람에 대해서보다는 사물에 대하여 아는 걸 지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음과 지식이 서로 얽히는 또 다른 방식에는 눈길이 가지 않기 쉽다. 누군가를 믿을 때에만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에게 자신을 완전히 드러낼 수 있으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에 대해 진정으로 알게 된다는 점 말이다. [...] 결국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믿음도 사랑의 한 형태다.) 낭만이라는 불안정한 매력과 욕망이라는 어수선한 환상을 떨쳐내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거의 불가능한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그래서 사회주의를 포기할 수 없다.)
 
우리의 지식과 믿음 전부가 허구라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절대적인 정당화, 즉 증거에 대한 갈망은 신경증일 뿐이지 칭찬해야할 끈기가 아니다.
 
지금까지 나는 다른 주제들과 함께 이성이 우리의 궁극적 토대가 아니라는 점을 몇몇 측면에서 검토해보았다. 예컨대 이성은 우리의 헌신을 필요로 하는데, 그 헌신 자체가 이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니체라면 “진리에 대한 이처럼 집요하고 냉혹한 의지 뒤에는 과연 어떤 원망과 악의, 불안 혹은 지배욕이 숨어 있을까?”하고 물었을 법하다.]
 
찰스 테일러의 지적에 따르면 사적인 이해관계에 좌우되지 않고 과학적 객관성을 지니는 근대적 주체는 전근대의 종교적 금욕주의와 그것이 표방한 ‘세상에 대한 경멸’에 기원을 둔다. 이러한 인식론에서는 흥미롭게도 세상에 대한 앎이 세상에 대한 거부를 수반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해방과 복지를 위해 세상 속의 자기 처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겐 어떤 의미로든 객관성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보다 처지가 좋아서 그리 안달할 이유가 없는 일부 사람들은 객관성이란 환상일 따름이라고 거리낌 없이 주장하는데, 포스트모더니스트들도 이 부류에 속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확신이라는 개념을 무척 싫어해서, 대단치도 않은 이 일상적 개념을 놓고 온갖 이론을 동원해 소동을 피운다. 그런 면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근본주의는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근본주의 역시 확신에 대해서 야단을 떨지 않는가.
 
믿음은 그게 어떤 종류든 기본적으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뭔가를 믿겠다고 의식적으로 결정하는 경우보다는 그냥 이미 믿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아니면 적어도 이미 특정한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그쪽을 믿겠다는 의식적 결정을 내리게 된다.
믿음이 궁극적으로 선택의 문제가 아님을 기독교에서는 은총이란 개념으로 나타낸다.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세상 자체가 선물이듯 믿음 또한 선물이다. 믿음은 의식적인 행위만은 아닌 까닭에 생각만으로 믿음을 버리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러려면 다른 부분들도 함께 변해야 한다. 예컨대 평생 보수적으로 살아온 사람이 어떤 생각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고 갑자기 혁명가로 변신하지는 않는다.(믿음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믿음을 의지로 결정한다-주의주의, 믿음은 고정되어 있다-결정론)
 
 
4. 문화와 야만
 
모든 것을 신앙/종교로 환원시키는 신앙주의/근본주의는 이성의 극단적인 배타성에 대한 반기로 등장한 것이다. 서구는 다문화주의를 수용하지 못하고, 영국 총리가 제시하는 ‘공통의 문화’는 자유주의로의 귀화를 의미한다. 문명과 문화의 대립이 심화되는데, 문명과 문화를 융합시키려 했던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적 시도는 크게 좌절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치를 문화로 대체하며, 극단적인 문화주의는 문화가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고 간주한다. 종교(문화)적 차원에서 구성된 공동체로 사회적 해방을 대체하려는 근본주의자들의 시도와 포스트모더니즘은 상호 교접한다. 하지만 해방은 역사의 진보에 희생이 함께함을 직시하는 비극적인 인본주의를 견지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이 희생은 믿음과 사랑에서 가능하다.
(문명과 문화의 범주를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하겠다.)
 
이하 발췌
 
서구가 거대담론을 내버리고 있던 시점에 하필 이슬람주의 테러라는 새로운 거대담론이 돌출하여 서구를 당혹케 했다고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이는 두 사건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말이며, 상황을 실제보다 훨씬 역설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자본주의가 이제 유일한 선택이 됐다는 뜻으로 사방에서 떠들어대는 ‘역사의 죽음’이라는 명제는 세계 지배를 꿈꾸는 서구의 오만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바로 이 같은 침략적 정책이 급진적 이슬람이라는 형태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따라서 역사가 끝났다는 주장의 허위성이 입증됐다. 
 
믿음이 지금처럼 범람하는 데는 불가지론적인 후기자본주의 문명 자체도 일조를 했다. 근본주의가 태동할 여건을 조성하는 데 후기자본주의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성이 지나치게 지배적이고 타산적이며 도구적이 되면 급기야 너무나 천박해져서 합리적인 믿음이 번성할 수 있는 토대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결과 믿음은 신학자들이 신앙주의라고 부르는 유형의 비합리주의로 타락하면서 이성에 완전히 등을 돌려버린다. 이런 상황에서는 광신에 빠지기 쉽다. 합리주의와 신앙주의는 좌우만 바뀐 거울상처럼 서로 닮았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대규모의 전 지구적 인구 이동을 촉진했고, 그로 인해 서구에서 이른바 다문화주의가 탄생했다. 여기에도 모순이 하나 있는데, 다름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세계적인 규모로 번창할수록 국민에 대한 국가의 장악력을 위협하게 된다는 점이다. 문화는 권력이 우리 삶의 구체적인 경험들과 결합하여 우리를 더 확고히 장악하도록 해줌으로써 권력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 못한 권력은 삶에서 유리된 냉담한 것으로 비치기 때문에 국민의 절대적 충성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권력이 충성을 확보하려면 자신을 문화에 새겨 넣어야 한다. 그러니 수많고 다양한 문화들에서 동시에 기반을 잡아야 하는 권력은 큰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다.
다문화주의가 기존 질서에 위협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테러리스트를 키우기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저하게 분열적인 정부 정책을 시민들이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히 탄탄한 문화적 합의가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통의 문화를 보다 급진적으로 해석하면, 모두가 똑같은 것을 믿는 문화가 아니라 모두가 동등한 지위를 갖고 서로 협력하여 공통된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문화라는 뜻이 된다. 공통의 문화가 지금은 주변에서 맴도는 문화전통들을 포용하게 될 경우,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문화는 현재의 것과 무척 다를 터이다. 우선 훨씬 다채로운 문화가 될 것이다. 모든 구성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이뤄내는 문화는 새로운 사람들을 자기 방식대로만 받아들이는 획일적인 문화에 비해 더 혼성적이고 덜 균일하게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평등은 차이를 만들어낸다.
 
문화와 문명을 절대적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 특정한 삶의 방식이라는 의미에서 문화는 문명의 이른바 보편적 가치들을 매개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 가장 절박한 문제의 하나는 문명이 문화 없이 존재할 수 없음에도 문화와 공존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에 있다. 문명은 고귀하지만 연약하고, 문화는 조야하지만 강력하다. 문명은 물질적인 이익을 지키기 위해 살상하는 반면, 문화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살상한다. 문명이 실용주의와 물질주의에 젖어갈수록 그것이 감당 못하는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욕구들을 채울 임무가 문화에 더 많이 주어지고, 문명과 문화 간의 반목은 한층 깊어진다.
 
종교는 문화와 문명 양쪽에 다 관여한다.
문화의 관점에서 믿음이란 사람들이 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문화에 대한 일방적 주장이 합리적인 토론을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문화란 내가 ‘누구인지’에 따라 내가 ‘어떻게 사는지’가 결정된다는 걸 의미하는데, 이것은 생물학적 인종주의와 상통하는 논리다.
포스트모던한 사상가들은 [...] 종래의 토대를 문화라는 새로운 유형의 토대로 대체한다.
문화가 종교를 대체한다는 생각이 터무니없지만은 않다. 종교와 마찬가지로 문화도 궁극적인 가치와 직관적 확신, 신성한 전통, 보증된 정체성, 공유된 신념과 상징적 행위, 그리고 초월의 느낌 등의 요소를 지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가 종교의 대체물 역할을 온전히 해낼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지난 두 세기 동안 문화 개념이 그토록 버거운 부담 아래 허덕인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예술작품이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다. 예술작품은 수정되고 치유되어야할 것들에 우리가 좀 더 민감해지도록 해줄 뿐이다.
이성은 너무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힘이어서 죽음을 이겨낼 수 없다. 하지만 그 사랑이 진정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피의 제물을 항상 묵묵히 인정하는” 사랑이어야 한다. 우리는 아름다움과 이상주의, 그리고 진보를 향한 열망을 높이 평가해야 하지만, 그 뿌리에는 많은 피와 비참함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마르크스나 니체 식으로 시인해야 한다.
 
문화가 종교의 역할을 적절히 대신하지 못한다면 정치의 역할도 대신할 수 없다. 근대성에서 탈근대성으로의 이행은 인간 삶의 중심이 정치에서 문화로 이동했다는 믿음과도 직결된다. 문화주의의 한 형태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얄궂게도 급진적 이슬람주의와 비슷한 데가 있다. 급진적 이슬람에서도 궁극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믿음과 가치관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슬람 급진주의는 서구의 약탈적 정책에 대한 반발로서만 생겨난 게 아니라,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다양한 형태를 띠었던 무슬림의 세속주의, 자유주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궤멸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일부에서는 종교적 언어가 정치적 담론을 대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종교와 정치를 하나로 결합하고자 하는 기독교 해방신학과는 정반대라고도 할 수 있다.
 
정치가 이 땅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처지를 바꿔놓겠다고 하면서도 지금까지 그들을 결집하지 못했다면, 문화가 정치를 대신하여 그 과업을 이루어낼 수 없다는 점도 거의 확실하다. 그렇다면 종교는 어떨까? 우리가 기독교 세계라고 부르는 것은 스스로를 문화와 문명의 통일체로 여겨왔다. 종교가 지금까지 인류가 이루어낸 가장 강력하고 끈질기며 보편적인 상징형식이라면 그건 부분적으로 이 때문이기도 하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일상적 관습을 그처럼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상징형식이 종교 이외에 또 있었는가? 그러나 억압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데는 종교도 문화만큼이나 무력하다.
 
마르크스주의가 문화와 문명의 화합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다면 그건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가 낭만주의적인 인본주의자인 동시에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의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문화와 문명 모두에 관한 것이다. 감각적 개별성과 보편성, 노동자와 세계시민, 지역적인 헌신과 국제적 연대, 육신을 지닌 개개인의 자유로운 자기실현과 인간 모두가 범세계적으로 협동하는 사회, 이 모두 관련된 사상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우리 시대에 엄청난 정치적 좌절을 겪었고, 출구를 잃은 급진적 충동들이 이동해 간 곳 중 하나가 하필이면 신학이다.
이런 현상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신학이 주장하는 진리들 중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많다 해도, 끊임없이 전문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아직 남아 있는 가장 야심찬 이론적 영역의 하나가 바로 신학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인간의 본질과 운명 그 자체를 주제로 삼아 생명의 초월적 근원이라고 상정되는 존재와 연관시켜 연구하는 학문이 아닌가.
 
나 같은 사람들과 디치킨스의 차이는 결국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비극적 인본주의의 차이로 귀착된다. 비극적 인본주의도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자유로운 번영을 염원하되, 그 같은 이상은 위가 최악의 것들을 직시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극적 인본주의는 사회주의적인 것이든 기독교나 정신분석학의 관점에 선 것이든 간에, 인간은 자기 비우기와 근본적인 개조를 통해서만 바로 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타
 
/과학과 신학 간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선물로 보느냐 아니냐 하는 데에 있다. 
 
/ “우주와 관련해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우주가 이해될 수 있다는 것” - 아인슈타인

 

 
 
 
2011/10/20 23:06 2011/10/20 23:06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_ 박민규

한 친구에게, 파릇한 연인이 선물해준 책을 가로채서 먼저 읽었다.

 

 

핑퐁, 카스테라 같은 이야기가 있을까봐 조마조마 했는데,

이거 로맨스소설이었다.

글이 박민규스럽지 않은 느낌.

연애소설로는 괜찮았는데, '박민규 작가'로서는 잘 모르겠다.

극적인 사건은, 정말 아무런 개연성이 없었고

감정의 흐름은 단면적이다.(그저 좋다, 밖에 없다.)

 

 

- 무슨 생각하는 지 알아. 하지만 쟤는 진심이야.

 

이런 거 좋다.

 

어떤 순간을 지키기 위해 도망가는 것,

그것을 쫓아가는 것,

이해하고 공감한다.

 

읽으며 어떤 연애가 떠올랐고,

그 찬란했던 시간들이 고마워졌다.

 

 

그리고 자우림 샤이닝이 흘러다녔다.

 

 

 

 

소설에 몇 번 나오던, 슈베르트 가곡 겨울나그네 중 보리수

 

 

 

 

 

 

성문 앞 우물가에,
보리수 한 그루 서 있네
그 보리수 그늘 아래서
나는 그리도 많은 단꿈을 꾸었지.
나는 그 보리수 가지에다
그토록 여러 번 사랑의 말을 새겼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나는 언제나 그 보리수에게,
나는 언제나 그 보리수에게 갔었지
 
나는 오늘도 깊은 밤을 지나
떠돌아 다녀야만 했네,
그때 어두움 속에서도
나는 눈을 감았지.
그리고 보리수 가지들이
쏴쏴 소리를 내며,
나를 부르는 것 같았네:
친구여, 나에게로 이리 오게나,
친구여, 나에게로 이리 오게나,
 
차가운 바람이
내 얼굴로 바로 불어 닥쳤네;
모자가 벗겨져 날아가 버렸지만,
나는 몸을 돌리지 않았네.
지금 나는 그곳으로부터
여러 시간이 걸리는 곳에 떨어져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쏴쏴 소리를 듣고 있네:
자네는 거기에서 안식을 찾을텐데,
자네는 거기에서 안식을 찾을텐데

 

성문 앞 우물가에,
보리수 한 그루 서 있네
그 보리수 그늘 아래서
나는 그리도 많은 단꿈을 꾸었지.
나는 그 보리수 가지에다
그토록 여러 번 사랑의 말을 새겼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나는 언제나 그 보리수에게,
나는 언제나 그 보리수에게 갔었지
 
나는 오늘도 깊은 밤을 지나
떠돌아 다녀야만 했네,
그때 어두움 속에서도
나는 눈을 감았지.
그리고 보리수 가지들이
쏴쏴 소리를 내며,
나를 부르는 것 같았네:
친구여, 나에게로 이리 오게나,
친구여, 나에게로 이리 오게나,
 
차가운 바람이
내 얼굴로 바로 불어 닥쳤네;
모자가 벗겨져 날아가 버렸지만,
나는 몸을 돌리지 않았네.
지금 나는 그곳으로부터
여러 시간이 걸리는 곳에 떨어져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쏴쏴 소리를 듣고 있네:
자네는 거기에서 안식을 찾을텐데,
자네는 거기에서 안식을 찾을텐데
[출처] 슈베르트- 보리수|작성자 바오

 

성문 앞 우물가에,
보리수 한 그루 서 있네
그 보리수 그늘 아래서
나는 그리도 많은 단꿈을 꾸었지.
나는 그 보리수 가지에다
그토록 여러 번 사랑의 말을 새겼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나는 언제나 그 보리수에게,
나는 언제나 그 보리수에게 갔었지
 
나는 오늘도 깊은 밤을 지나
떠돌아 다녀야만 했네,
그때 어두움 속에서도
나는 눈을 감았지.
그리고 보리수 가지들이
쏴쏴 소리를 내며,
나를 부르는 것 같았네:
친구여, 나에게로 이리 오게나,
친구여, 나에게로 이리 오게나,
 
차가운 바람이
내 얼굴로 바로 불어 닥쳤네;
모자가 벗겨져 날아가 버렸지만,
나는 몸을 돌리지 않았네.
지금 나는 그곳으로부터
여러 시간이 걸리는 곳에 떨어져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쏴쏴 소리를 듣고 있네:
자네는 거기에서 안식을 찾을텐데,
자네는 거기에서 안식을 찾을텐데
[출처] 슈베르트- 보리수|작성자 바오
2011/09/11 18:38 2011/09/11 18:38

보는거고백

일본영화를 즐겨보지 않는데, 볼 때마다 불편한 느낌이 있다.

추격자, 황해 같은 한국영화에서 느껴지는 어떤 게 있듯,(한국느와르의 어떤 교본이 만들어진 것 처럼)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일본영화에서 종종 느끼는 어떤 게 있다.

그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재주가 없어서 막막하네..

 

스포일러 잔뜩.

 

 

 

 

//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 중 다른 이의 죽음에 가담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다. 사쿠라미야만 빠질까?

누구는 복수를 위해, 누구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누구는 따돌림 당하지 않기 위해,

누구는 다른 사람의 꾀임에 빠져, 온갖 비틀림 속에서 죽고 죽인다.

 

마음이 약한 자가 그보다 더 약한 자에게 상처입힌다.

상처입은 자는 견디거나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는가.

 

타인에게 온갖 고통을 안기지만, 자신이 입는 상처는 조금도 견딜 수 없는

자의식과잉의 군상들-

이런 관계 속에서 생명은 무게가 있을 턱이 없다.

생명의 가치는 미리 주어진 게 아니라 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니까.

모두 관계 속에서 죽은 것이기도 하다. 얽히고 비틀린 관계.

실상, 전쟁이든 사회적죽음이라 일컬어지는 어떤 죽음이든 영화에서와 크게 다를 게 없다.

영화는 이런 이야기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갱생은 지옥에서부터 시작된다고, 그리고 장난이라고 말하며 영화가 끝난다.

폭탄설치가 장난이라는 건지, 갱생이 장난이라는 건지 이중적이지만 어느 편이든 해결되는 건 없다. 아무것도 교정되지 않았다. 그저 다 같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일 뿐.

 

죽음 앞에서 삶이 피 한방울 값보다 못해지는 상황이 분명 현실에 존재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죽으면서도 무엇인가 남기려는 노력으로 역사는 움직인다.

그래서 모든 죽음이 비극은 아니다. 살아남은 자를 비췄을 때 비극일 수 있다.

 

우중충한 하늘이 중간중간 끼워져있다.

OST 듣고 싶다. 노래가 radiohead 스럽다고 생각했는데, radiohead 노래 맞다.

 

 

 

 

//

일본영화를 일반화시켜 조금 더 적자면,

과잉되어 있다.

감정도, 상황도, 모든 게 과잉되어 있다. 이게 좀 힘들다.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가벼운 척 하려는 게 과잉되어 있기도 하다.

(한 번 일본영화, 과잉이란 검색어로 검색해보니, 뜻밖에 일본영화와 드라마는 감정이 과잉되지 않은 게 장점이라는 글이 있네..)

과잉시켜야 미세한 차이를 섬세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절제 속에서 섬세함이 더 드러나지 않나..

 

고백을 보면서 배틀로얄도 떠올랐다.

배틀로얄..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겠지만, 그 부풀려진 상황이 기괴했다.

일본 멜로 영화도 거의 보지 않는데, 그 과잉된 사랑의 감정에 이입이 잘 안돼서다.

하지만.. 평소 눈물 쭉쭉 빼는 신파도 어지간히 잘 보니,

단순히 감정의 과잉이라고 하기엔 좀 부족한 것 같은데,

암튼 뭔가 묘하게.. 마음에서 어긋난다..

2011/09/11 09:28 2011/09/11 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