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아랍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어서..

뭘 읽어보면 좋을까 기웃거리는데..

'이슬람의 세계사'가 좋다고 하지만..

책 두께를 보니 기가 죽어서 펼쳐보질 못하겠고..

도서관에서 이책 저책 뒤적이다..

두께도 적당하고, 내 수준에 맞을 것 같은 책을 발견했다.

 

하룻밤에.. 한권으로.. 등등 이런 류의 제목을 단 개론서들이

질을 담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걱정도 됐는데

앞장을 펼치니추천사에 이희수씨 글이 있는 걸 보고 쭉 읽었다.

나같이 중동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사람은 읽으면 참 좋은책.

 

(최근 중동사 부분에서 좀 더 봐야할 것은, 필요에 따라 미국과 손을 잡았던 나라들도 그 정권이 그랬던 것이지 그게 그 나라 다수의 지지를 얻은 것은 아니라는 것.)

 

 

하룻밤에 읽는 중동사 - 5천 년 중동과 이슬람의 역사를 한눈에 읽는다
하룻밤에 읽는 중동사 - 5천 년 중동과 이슬람의 역사를 한눈에 읽는다
미야자키 마사카츠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아래는 읽은 거 안 까먹게 정리.

 

이상하게 더보기가 안되네요..;;

 

 

 

 

중동middle east은 영국이 자국의 위치를 기준으로 오스만 제국의 영역을 '근동',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을 '중동', 동아시를 '극동'이라 부른데서 유래. '중동'은 유럽을 기준으로 만든 이름이며, 유럽이 세계에 식민지를 확대하던 19세기의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벨기에 역사가 앙리 피렌이 '무함마드 없이는 샤를마뉴도 없다'고 지적
 
이슬람 세계는 '움마'라 불리는 이슬람 공동체가 팽창하는 방식으로 확장되었다. 마함마드가 메카에서 포교를 시작할 때는 신과 개인의 계약에 따른 신앙을 설파했지만, 포교의 거점을 야스리브로 옮긴 뒤에는 예언자이며 신도를 지도하는 무함마드와 신도의 계야에 따른 신앙으로 바뀌었다.
 
19세기 유럽적인 '네이션'이라는 개념이 들어오기 전에는 중동에서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란'이라는 말은 그리스인이 이란고원에 사는 주민들 스스로가 아리아인이라 자칭한다고 전하며 이란고원을 아리아나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역사적으로 이란인은 페르시아인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이들이 이란고원 서쪽 땅을 페르시스라 불렀고, 여기에서 세력을 확대하여 대제국을 세운데서 나온 이름이다.
 
'헬레니즘 시대'란 기원전 4세기 중반 알렉산드로스왕이 페르시아 제국(아케메네스 왕조)을 정복한 뒤부터,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가 세운 이집트가 기원전 1세기 후반 로마 제국에 의해 통합될 때까지 지중해 지역과 중동 지역에서 그리스 문화와 학술이 지배적이었던 시대를 가리킨다.
 
파르티아에서 받은 태양산 미트라가 동서로 전해져 로마에서는 군신 미트라스로, 동아시에서는 미래불 미륵이 되었다!!! 그렇구나!!
 
알렉산드로스 이후 파르티아가 세워져 중동을 장악하고, 서기 3세기 초 사산 왕조가 이를 쓰러트린다. 사산왕조는 아르케메네스 왕조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복고적 왕조였다. 사산 왕조(뭍의 제국)는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해양 제국)을 상대로 장기간에 걸쳐 싸웠고, 국력이 약해진 양쪽 다 아랍인에게 주도권을 넘긴다.
 
사산왕조와 비잔틴제국의 전쟁으로 페르시아만에서 유프라테스강을 거쳐 북상하는 교역로사 쇠퇴하고, 홍해에서 시리아로 낙타를 이용한 상단 무역이 활발해졌다. 메카가 상업의 중심도시가 된다.
 
무함메드는 메카를 탈출해 야스리브(메디나)로 이동한다.(헤지라) 야스리브에서 확대된 이슬람 교단은 메카를 점령한다.
 
무함마드 사후 '칼리프'('무함마드의 대리인'이란 뜻)가 이슬람 교단을 주재한다.
 
1대~4대 칼리프가 정통칼리프
 
4대 칼리프 알리 이후 우마이야 가문의 무아위야가 칼리프라 칭하며 부족으로 세습된다.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후계자는 무함마드와 혈연이 닿아야 한다면서 알리 이외의 칼리프를 부정했다.
알리를 초대 이맘, 알리의 첫째 아들 하산을 2대 이맘, 둘째 아들 후세인을 3대 이맘으로 부른다.
시아파 사람들은 이맘들이 수니파에 독살되거나 옥사할 정도로 비극적인 말로를 겪었다고 주장한다.
이스마일파는 음주 등으로 이맘이 되지 못한 6대 이맘의 아들이 7대 이맘이라고 주장한다.
 
시아는 '시아 알리'(알리의 분파)의 약자
수니는 무함마드의 순나(관행, 범례)에 따르는 사람들
 
우마이야 왕조의 대정복 운동이 끝나자 제국은 혼란에 빠지고 직할지 시리아에서조차 정부의 지배가 통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그런 와중에 무함마드의 하심 가문이 교단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운동이 이란고원을 중심으로 격렬해진다. 이란의 시아파 반체제 세력은 압바스 가문의 아부 알 압바스를 초대 칼리프로 하는 새 왕조를 세웠다. 압바스 가문은 안정된 정권을 위해 다수파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시아파를 탄압했다.
 
압바스왕조는 꾸란에 기초한 이슬람교도의 평등을 실현하는 데 힘을 써 아랍인에 대한 연금 지급과 면세 특권을 폐지, 비압립인 유력자를 관리로 적극 채용했다. 정복왕조 아랍제국이 이슬람 원리에 따라서 여러 민족이 평등하게 통합되는 이슬람 제국으로 모습을 바꾸었는데 이를 '압바스혁명'이라고 한다.
 
유라시아에서 사상 최대의 영역을 지배한 몽골 제국을 '세계사'의 기점으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이는 중화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에 편중된 시각이다. 원 제국을 지탱한 색목인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였다. 유라시아의 뭍과 바다를 연결한 몽골 제국의 네트워크는 그 이전의 사막, 초원 바다를 잇는 이슬람 상업권 네트워크 위에 만들어진 것이다.
 
투르크인은 점차 소그드 상업권에 편입되어 갔고, 10세기에 수피가 활발하게 포교하였다.
투르크인은 1)중동에 진출하여 아랍인과 이란인을 능가하는 지배민족이 되고, 2)아프가니스탄에서 북인도로 이슬람 세계를 확대하고, 3)소그드(현재의 우즈베키스탄 등) 지방의 지배 세력이 되고, 4)실크로드 동쪽의 타림분지로 이주하여 이슬람교(중국어로는 청진교)를 퍼뜨리고 현재의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를 건설
 
압바스 왕조는 맘루크(군사 노예)를 공하여 권력 유지를 꾀했다. 맘루크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가 아닌 투르크인 슬라브인 쿠르드인 등의 용병을 가리키는데, 유목 투르크인이 중심을 이루었다. 투르크멘족은 족장 셀주크의 지도 아래 이슬람교로 집단 개종했고, 11세기 초 족장 토긜베그는 압바스 왕조로부터 칼리자의 보호자로 인정받고 칼리프로부터 '술탄'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투르크인이 비잔틴제국을 격파하자 비잔틴 황제는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청해 십자군 파견이 시작되었다.
(참고 - 로마는 동로마, 서로마로 나뉘어졌고 서로마는 일찍 멸망. 동로마는 비잔티움으로 불림.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의 전신으로 로마교황을 보호하는 댓가로 관을 받음)
 
몽골군의 침입으로 이슬람세계가 큰 위기에 빠졌을 때 투르크인 맘루크는 몽골군의 이집트 진출을 저지하고 1250년 술탄 지위를 빼앗아 이집트에 맘루크 왕조를 세웠다.
몽골 제국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투르크화 이슬람화한 몽골인 티무르가 티무르 왕조를 열었다.(1370년) 티무르가 약체화된 이후 티무의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부르는 인도로 쫓겨 가 1526년 무굴제국을 세운다.
파키스탄은 이런 연장선에서 탄생했다.
 
오스만 왕조는 여러 군웅 가운데 하나였으나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다. 콘스탄티노플은 파괴되지 않고 '이스탄불'로 이름을 바꾸어 그대로 수도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지배한 영역에서 투르크인은 소수민족이었다. 따라서 투르크어를 말하고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전부 제국 신민으로 받아들였다. 제국 통치의 바탕은 '종교'였다.
 
이란 고원에 시아파를 국교로 삼는 사파비 왕조가 만들어진다.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에 퍼진 내셔널리즘에 자극받아 그리스독립전쟁이 일어났고, 오스만 제국은 열강의 개입으로 패배했다.
 
'범슬라브주의'는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추진된 슬라브 민족의 통일과 연합을 지향하는 운동이다. 1877년 러시아는 슬라브인의 지원을 얻어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 전쟁으로 발칸반도의 슬라브 민족이 여러 나라로 독립한다.
 
이란에서는 미르자 알리 무함마드가 시아파 신앙을 이용하여 민중을 조직했으나 1850년 총살당한다. 1906년 국민의회가 개설되어 헌법에 상당하는 기본법이 채택되지만 러시아군이 개입하여 신체제를 무너뜨렸다.
 
독일은 베를린, 비잔티움(이스탄불), 바드다드를 철도로 연결하는 3B 정책을 펴고, 영국은 케이프타운, 카이로, 캘커타를 잇는 3C 정책을 편다. 이 대립의 충돌로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다.
 
1889년, 사관학교 청년들을 중심으로 '통일진보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것이 '청년 투르크'의 모체였다. 1913년 '청년 투르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엔베르 파샤 등 3명에 의한 군사독재가 시작된다. 엔베르 파샤는 '범투르크주의'라는 민족주의로 투르크인의 부흥을 꾀했다. 
 
투르크정부(오스만 제국)는 투르크가 영토를 회복하도록 돕겠다는 독일의 제안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이 때 영국은 오스만 제국 내의 아랍인을 조직하여 오스만 제국을 배후에서 위협하는 작전을 썼다. 청년투르크 혁명 이후 아랍인 사이에서는 반투르크 의식이 고양되었다. 영국은 전쟁이 끝나면 아랍인을 독립시켜 주겠다고 약속하고 하심 가문의 후세인과 두 아들 압둘라(훗날 요르단 초대 국왕)와 파이살(훗날 이라크 국왕)을 지도자로 내세워 아랍 반란군을 조직했다. 그러나 강화회의에서 영국은 아랍을 독립시키겠다는 약속을 져버렸다.
 
패전 후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공동식민지 같은 상태가 되었고, 케말 파샤가 1923년 앙카라를 수도로 하는 터키공화국을 수립하여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아나톨리아를 점령하고 있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의 군대를 격파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터키에 양보한 배경에는 러시아혁명이 있었다. 혁명이 중동으로 파급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의 주선으로 만들어진 이란 카자흐 여단의 대령 팔레비는 러시아혁명으로 러시아 세력이 후퇴하는 정세를 이용하여 1925년 이란에 '팔레비 왕조'를 창립하고 왕위에 올랐다.
 
팔레스타인 문제, 이라크 문제, 쿠르드인 문제 등의 중동 분쟁이 생긴 뿌리는,
1) 1916년의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 2)1915~1916년에 교환된 '후세인-맥마흔 서한', 3)1917년의 '벨푸어선언' 등의 협정이 서로 모순되었다는 데 있었다.
 
1) 영국의 중동 전문가 사이크스와 프랑스 외교관 피코가 러시아의 동의를 얻어 체결한 비밀 협정으로 3국이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3분할할 것을 담고 있다. 러시아혁명정부가 이 비밀협정을 공개했다.
2) 아랍의 지도자 후세인과 영국 고등판무관 맥마흔은 1차대전후 아랍인 국가의 건설을 인정하는 데 합의했다.
3) 영국의 외무장관 밸푸어가 유대인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편지로, 팔레스타인 내에 유대인의 민족적 향토를 건설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한다는 내용이다.
 
오스만 제국이 1차 세계대전으로 붕괴하자 쿠르드인에게도 독립의 기회가 왔지만, 터키가 로잔조약으로 현재의 영토를 회복했다. 쿠르드인 거주지역 모술에서 석유가 나오는 데 주목한 영국은 그 지역을 모술주로 삼아 이라크에 편입시켰다. 쿠르드인 거주지역은 터키, 이라크, 이란으로 분단되어 있다. 터키는 쿠르드인의 존재를 부정하며 동화정책을 취해왔고, 이라크에서는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쿠르드인이 이란편에 서자 50만명이나 되는 쿠르드인을 이주시키고 5000명을 살해했다. 1991년 걸프전쟁 직후에는 후세인 정권에 대한 쿠르드인의 반란이 진압되면서 100만명 이상이 터키, 이란, 이라크 북부 산악 지대로 도주했다.
 
와하브파 원리주의 운동은 18세기 전반에 발생했고, 호족 사우드 가문의 지원을 받아 고양되었다. 영국이 지원한 하심 가문의 후세인은 사우드 가문의 정적으로, 사우드 가문은 헤자즈 지방으로 침공하여 1924년 후세인을 퇴위시켰다.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세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등으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진다.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다음 날 이를 부당하다고 본 아랍의 군대가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하여 팔레스타인 전쟁(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스라엘은 영국군의 기지에서 무기를 조잘하여 아랍군을 압도한다. 휴전협정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전역의 8할을 영토로 하여 독립한다. 팔레스타인인은 난민 캠프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트란스요르단은 요르단강 서안을, 이집트는 가자 지구를 자국령에 포함시켰다.
 
아라비아어라는 공통 언어와 공통 역사를 가진 아랍 세계 사람들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될 필요가 있다는 바스주의가 제창된다. 1947년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바스주의 실현을 위한 '바스당'이 결성된다. 1950년 이라크에서도 바스당이 결성된다.
 
1943년 이집트의 제안으로 아랍연맹이 결성된다. 당시 영국은 하심가문을 통해 이라크와 요르단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고, 아랍연맹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다. 아랍의 주도권을 원하던 이집트는 하심가문의 정적 사우드 가문(사우디아라비아)의 지지로 카이로에 아랍연맹의 본부를 둔다. 아랍연맹은 아랍 제국의 독립을 지원하고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가 들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1958년 2월, 이집트의 나세르 정권과 시리아의 바스당 정권이 손을 잡고 나세르를 대통령으로 하는 '아랍연합공화국'을 세웠다. 양국은 소련의 지원 아래, 구지배층이 주도하는 질서에 도전하는 자세를 분명히 했다. 친서구파인 이라크, 요르단의 하심가문 연합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손을 잡고 민족운동의 고양을 저지하려 한다. 그런데 1958년 7월, 카셈을 중심으로 하는 청년 장교가 혁명을 일으켜 하심 가문의 왕을 타도한다. 그 결과 이라크에서 여국의 영향력이 후퇴하고, 이러한 변화로 중동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될 것을 우려한 미국과 영국은 민족운동의 확산을 저지한다.
 
이란에서는 1951년 수상이 된 민족주의자 모사데그가 석유산업의 국영화를 단행하고 영국과 국교를 단절한다. 모사데그의 급진 정책에 반대하는 친서구파 팔레비 국왕은 1953년 모사데그를 해임했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팔레비가 최정적으로 승리한다.
 
이집트의 나세르는 인도의 네루,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과 함께 냉전에 참여하지 않는 비동맹의 길을 선택한다. 1955년에는 중국과 국교를 수립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선택한다. 1956년 이스라엘군이 반이스라엘 게릴라 기지를 공격한다는 구실로 시나이반도로 쳐들어가 제압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는 쌍방의 전투에 개입한다는 구실로 수에즈운하 지대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나세르 정권의 타도를 꾀한다.(제2차 중동전쟁) 하지만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지 못해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군은 철수하고, 나세르의 존재감은 강화되었다. 1964년 나세르는 팔레스타인땅을 되찾자고 제창하고, 아랍제국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결성한다. 의장은 전 사우디아라비아 유엔 대사가 맡고, 해방군은 이집트군이 맡았다.
 
이라크의 카셈은 석유에서 나오는 수입을 이집트와 나누는 것이 못마땅해 나세르와 결별한다. 나세르의 경제정책에 불만을 품은 시리아도 1961년 결별한다.
 
카셈은 1963년 쿠데타로 살해되고 바스당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라크의 쿠데타가 영향을 미쳐 시리아에서는 다음달에 혁명이 일어나 바스당 정권이 수립된다. 하지만 석유를 둘러싼 갈등으로 이라크와 시리아의 바스당 사이에 대립이 생겼다.
 
시리아의 바스당은 이스라엘과의 분쟁을 격화시킴으로써 국내 정치의 모순을 밖으로 돌리려했다.  시리아와 이집트는 동맹을 맺어 수에즈전쟁 당시 시나이반도에 배치되었던 유엔군의 철수를 실현시키고, 티란해협을 봉쇄하여 이스라엘 함선을 묶어 두려고 했다. 이스라엘은 티란해협 봉쇄가 개전의 충분한 명분이 된다고 보고 1967년 6월 5일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기습했다.(제3차 중동전쟁) 6일간의 전투로 이스라엘군은 이집트의 시나이반도, 시리아의 골란고원, 요르단강 서안을 점령했다.
 
아랍 제국에 의지해서 팔레스타인을 되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 팔레스타인인은 PLO를 전투조직으로 재편한다. 파타하의 창설에 관여하고 대변인으로 활약하던 아라파트가 PLO 3대 의장에 취임한다.  PLO는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기관이라 자처하며 최고의결기관은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 정규군으로는 파타하의 무장노선을 계승한 팔레스타인해방군을 뒀다.
 
팔레스타인 난민 대다수가 유입된 요르단에서는 난민이 커다란 세력이 되었다. PLO는 이스라엘과 싸우기 전에 보수적인 유르단 왕부터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1970년 요르단 왕 후세인은 암만의 PLO를 섬멸하라고 명령한다. 친PLO인 시리아는 육군을 요르단에 파견했고, 미국은 항공모함을 이스라엘 앞바다에 파견하여 요르단을 지원했다. 결국 PLO는 요르단 내 거점을 잃고 지도부와 주력부대를 레바논으로 옮겼다.
 
이집트에서 나세르 이후 사다트 정권은 시리아, 요르단과 이스라엘을 침공한다.(4차 중동전쟁) 미국은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소련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원했다. 산유국은 원유 가격을 인상하는 방법으로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원했다. 전쟁 결과 이집트는 쉐즈운하의 통항을 재개할 수 있었고 PLO는 팔레스타인의 합법적 대표로 인정되었다.
 
레바논은 1944년 프랑스에서 독립했고, 고대 페니키아를 계승했다. 1930년대 이후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도, 수상은 수니파, 국회의장은 시아파, 부수상과 국회부의장은 그리스정교도가 임명되는 관행으로 질서가 유지되었다. 레바논 정부는 PLO에게 자치정부나 다름없는 특권을 주고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도 묵인했다. 그러나 1975년 마론파 민병이 팔레스타인인 버스를 공격하여 이슬람교도 27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내전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시리아는 이슬람 편에서 참전했지만, 나중에는 레바논의 종파균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하여 마론파를 지원했다. 1982년 이후 이스라엘은 PLO를 레바논에서 몰아내고 친이스라엘적인 마론파 정권을 세우기 위해 레바논 남부의 베이루트를 침공했다. 시리아의 지원을 얻은 이슬람교도,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헤즈볼라가 이스라엘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여 내전은 장기화됐다. 
 
레바논의 PLO 전투원 1만명은 미국의 중재로 베이루트에서 철수하고 PLO본부를 튀니지로 옮겼다. PLO후퇴로 기세가 오른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의 토지를 수용하고 유대인 입식지를 확대한다. 팔레스타인 민중과 이스라엘군의 충돌이 잇따랐고 '인티파다'라는 민중의 자발적인 투석 투쟁이 일어난다. 1988년에는 이슬람원리주의 조직 '하마스'가 ㅜ쟁의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반도를 되찾는 것을 최대의 정치적 과제로 삼은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소련과의 우호조약을 깨고 미국에 접근하여 키신저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교섭을 시작했다. 1979년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카이로의 아랍연맹본부는 튀니지의 수도로 옮겨졌다.
 
1993년 PLO의장 아라파트와 이스라엘 수상 라빈은 파레스타인잠정자치협정을 조인했다. 그러나 라빈은 유대교도에게 암살되고 2001년 이스라엘 선거에서 우파 샤론이 총리가 되면서 평화 협상이 중지된다. 2003년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유대인 입식지와 팔레스타인 거주지 사이에 거대한 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란에서는 시아파를 중심으로 민중봉기가 일어나 1979년 1월 팔레비 국왕이 망명한다. 시아파 최고성직자 호메이니는 반대파를 숙청하고 자신이 이슬람 신앙에 기초한 법률을 제정하여 통치한다. 
 
소련은 이란혁명이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영내에 파급될까 두려워했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 세력을 탄압해오던 아민 공산당 정권이 이란혁명을 아프가니스탄으로 불러들일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고 아민을 물러나게 하기 위하여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이슬람 국가들에서 많은 의용군이 이슬람전사(무자헤딘)로서 아프가니스탄에 집결했고, 미국은 소련의 세력 확대를 막기위해 게릴라 세력에게 무기를 지원했다.  소련철군 이후 혼란의 와중에 '탈레반'이라는 원리주의 집단이 카불을 점령한다.
 
미국은 이란혁명으로 '중동의 헌병'을 잃고 큰 타격을 받았다. 미국은 방어벽이 될만한 세력으로 이라크의 바스당 지도자 사담 후세인을 선택했다. 이라크에서는 시아파가 다수이지만 강권으로 수니파 정권을 유지해온 만큼, 후세인은 이란혁명이 이라크 남부 시아파에 파급되는 것을 우려했다. 1980년 후세인이 이란을 공격하면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1982년 이후 이란군이 우위에 서자 미국은 이라크에 무기와 경제를 원조한다.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채무가 늘어나자 후세인은 산유국 쿠웨이트를 침공한다. 이것은 석유 이권을 가지고 있던 미국에 노골적으로 도전한 것이었다. 미국은 군대를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했고 유엔안보리는 이라크를 침략자로 규정했다. 소련도 미국을 지지했다. 이라크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점령 지역에서 철수하면 이라크도 쿠웨이트에서 철수하겠다며 팔레스타인 문제와 쿠웨이트를 엮어서 아랍인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요르단, 예맨, 튀니지, PLO는 이라크를 지지했다. 걸프전쟁에 패한 이라크 국내에서는 남부 시아파 민중이 후세인 독재에 반대하여 봉기하고, 북부 쿠르드인이 봉기하여 유전 지대를 점거했다. 미국은 이라크가 분열하고 혼란에 빠지만 그 혼란이 페르시안 만안으로 파급될까 두려워서 후세인 정권 타도를 보류한다. 전쟁 이후 성스러운 아라비아반도에 미군 진주를 허용했다고 하여 사우디아라비아의 위신이 크게 흔들렸고, 이라크를 지지한 PLO의 처지가 어려워졌다.
 
미국은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며 2003년 이라크 침공을 강행한다. 이라크 북부 쿠르드인 부대와 호응하여 침공 한달 만에 이라크 전역을 제압했다. 미국의 주장과는 달리 이라크에서는 대량살상무기가 발견되지 않았다.
 
러시아연방에서 이탈하기를 원하는 체첸인은 공화국을 세우고 1991년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체첸의 독립을 인정하면 석유파이프라인을 잃게 되므로 러시아군이 체첸으로 침공한다. 체첸인은 남부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계속했다.
중동middle east은 영국이 자국의 위치를 기준으로 오스만 제국의 영역을 '근동',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을 '중동', 동아시를 '극동'이라 부른데서 유래. '중동'은 유럽을 기준으로 만든 이름이며, 유럽이 세계에 식민지를 확대하던 19세기의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벨기에 역사가 앙리 피렌이 '무함마드 없이는 샤를마뉴도 없다'고 지적
 
이슬람 세계는 '움마'라 불리는 이슬람 공동체가 팽창하는 방식으로 확장되었다. 마함마드가 메카에서 포교를 시작할 때는 신과 개인의 계약에 따른 신앙을 설파했지만, 포교의 거점을 야스리브로 옮긴 뒤에는 예언자이며 신도를 지도하는 무함마드와 신도의 계야에 따른 신앙으로 바뀌었다.
 
19세기 유럽적인 '네이션'이라는 개념이 들어오기 전에는 중동에서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란'이라는 말은 그리스인이 이란고원에 사는 주민들 스스로가 아리아인이라 자칭한다고 전하며 이란고원을 아리아나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역사적으로 이란인은 페르시아인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이들이 이란고원 서쪽 땅을 페르시스라 불렀고, 여기에서 세력을 확대하여 대제국을 세운데서 나온 이름이다.
 
'헬레니즘 시대'란 기원전 4세기 중반 알렉산드로스왕이 페르시아 제국(아케메네스 왕조)을 정복한 뒤부터,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가 세운 이집트가 기원전 1세기 후반 로마 제국에 의해 통합될 때까지 지중해 지역과 중동 지역에서 그리스 문화와 학술이 지배적이었던 시대를 가리킨다.
 
파르티아에서 믿은 태양신 미트라가 동서로 전해져 로마에서는 군신 미트라스로, 동아시에서는 미래불 미륵이 되었다!!! (그렇구나!!)
 
알렉산드로스 이후 파르티아가 세워져 중동을 장악하고, 서기 3세기 초 사산 왕조가 이를 쓰러트린다. 사산왕조는 아르케메네스 왕조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복고적 왕조였다. 사산 왕조(뭍의 제국)는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해양 제국)을 상대로 장기간에 걸쳐 싸웠고, 국력이 약해진 양쪽 다 아랍인에게 주도권을 넘긴다.
 
사산왕조와 비잔틴제국의 전쟁으로 페르시아만에서 유프라테스강을 거쳐 북상하는 교역로가 쇠퇴하고, 홍해에서 시리아로 낙타를 이용한 상단 무역이 활발해졌다. 메카가 상업의 중심도시가 된다.
 
무함메드는 메카를 탈출해 야스리브(메디나)로 이동한다.(헤지라) 야스리브에서 확대된 이슬람 교단은 메카를 점령한다.
 
무함마드 사후 '칼리프'('무함마드의 대리인'이란 뜻)가 이슬람 교단을 주재한다.
 
1대~4대 칼리프가 정통칼리프
 
4대 칼리프 알리 이후 우마이야 가문의 무아위야가 칼리프라 칭하며 부족으로 세습된다.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후계자는 무함마드와 혈연이 닿아야 한다면서 알리 이외의 칼리프를 부정했다.
그래서 알리를 초대 이맘, 알리의 첫째 아들 하산을 2대 이맘, 둘째 아들 후세인을 3대 이맘으로 부른다.
시아파 사람들은 이맘들이 수니파에 독살되거나 옥사할 정도로 비극적인 말로를 겪었다고 주장한다.
이스마일파는 음주 등으로 이맘이 되지 못한 6대 이맘의 아들이 7대 이맘이라고 주장한다.
 
시아는 '시아 알리'(알리의 분파)의 약자
수니는 무함마드의 순나(관행, 범례)에 따르는 사람들
 
우마이야 왕조의 대정복 운동이 끝나자 제국은 혼란에 빠지고 직할지 시리아에서조차 정부의 지배가 통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그런 와중에 무함마드의 하심 가문이 교단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운동이 이란고원을 중심으로 격렬해진다. 이란의 시아파 반체제 세력은 압바스 가문의 아부 알 압바스를 초대 칼리프로 하는 새 왕조를 세웠다. 왕조성립 이후 압바스 가문은 안정된 정권을 위해 다수파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시아파를 탄압했다.
 
압바스왕조는 꾸란에 기초한 이슬람교도의 평등을 실현하는 데 힘을 써 아랍인에 대한 연금 지급과 면세 특권을 폐지, 비압립인 유력자를 관리로 적극 채용했다. 정복왕조 아랍제국이 이슬람 원리에 따라서 여러 민족이 평등하게 통합되는 이슬람 제국으로 모습을 바꾸었는데 이를 '압바스혁명'이라고 한다.
 
유라시아에서 사상 최대의 영역을 지배한 몽골 제국을 '세계사'의 기점으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이는 중화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에 편중된 시각이다. 원 제국을 지탱한 색목인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였다. 유라시아의 뭍과 바다를 연결한 몽골 제국의 네트워크는 그 이전의 사막, 초원 바다를 잇는 이슬람 상업권 네트워크 위에 만들어진 것이다.
 
투르크인은 점차 소그드 상업권에 편입되어 갔고, 10세기에 수피가 활발하게 포교하였다.
투르크인은 1)중동에 진출하여 아랍인과 이란인을 능가하는 지배민족이 되고, 2)아프가니스탄에서 북인도로 이슬람 세계를 확대하고, 3)소그드(현재의 우즈베키스탄 등) 지방의 지배 세력이 되고, 4)실크로드 동쪽의 타림분지로 이주하여 이슬람교(중국어로는 청진교)를 퍼뜨리고 현재의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를 건설
 
압바스 왕조는 맘루크(군사 노예)를 공하여 권력 유지를 꾀했다. 맘루크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가 아닌 투르크인 슬라브인 쿠르드인 등의 용병을 가리키는데, 유목 투르크인이 중심을 이루었다. 투르크멘족은 족장 셀주크의 지도 아래 이슬람교로 집단 개종했고, 11세기 초 족장 토긜베그는 압바스 왕조로부터 칼리자의 보호자로 인정받고 칼리프로부터 '술탄'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투르크인이 비잔틴제국을 격파하자 비잔틴 황제는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청해 십자군 파견이 시작되었다.
(참고 - 로마는 동로마, 서로마로 나뉘어졌고 서로마는 일찍 멸망. 동로마는 비잔티움으로 불림.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의 전신으로 로마교황을 보호하는 댓가로 관을 받음)
 
몽골군의 침입으로 이슬람세계가 큰 위기에 빠졌을 때 투르크인 맘루크는 몽골군의 이집트 진출을 저지하고 1250년 술탄 지위를 빼앗아 이집트에 맘루크 왕조를 세웠다.
몽골 제국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투르크화 이슬람화한 몽골인 티무르가 티무르 왕조를 열었다.(1370년) 티무르가 약체화된 이후 티무의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부르는 인도로 쫓겨 가 1526년 무굴제국을 세운다.
파키스탄은 이런 연장선에서 탄생했다.
 
오스만 왕조는 여러 군웅 가운데 하나였으나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다. 콘스탄티노플은 파괴되지 않고 '이스탄불'로 이름을 바꾸어 그대로 수도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지배한 영역에서 투르크인은 소수민족이었다. 따라서 투르크어를 말하고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전부 제국 신민으로 받아들였다. 제국 통치의 바탕은 '종교'였다.
 
이란 고원에 시아파를 국교로 삼는 사파비 왕조가 만들어진다.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에 퍼진 내셔널리즘에 자극받아 그리스독립전쟁이 일어났고, 오스만 제국은 열강의 개입으로 패배했다.
 
'범슬라브주의'는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추진된 슬라브 민족의 통일과 연합을 지향하는 운동이다. 1877년 러시아는 슬라브인의 지원을 얻어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 전쟁으로 발칸반도의 슬라브 민족이 여러 나라로 독립한다.
 
이란에서는 미르자 알리 무함마드가 시아파 신앙을 이용하여 민중을 조직했으나 1850년 총살당한다. 1906년 국민의회가 개설되어 헌법에 상당하는 기본법이 채택되지만 러시아군이 개입하여 신체제를 무너뜨렸다.
 
독일은 베를린, 비잔티움(이스탄불), 바드다드를 철도로 연결하는 3B 정책을 펴고, 영국은 케이프타운, 카이로, 캘커타를 잇는 3C 정책을 편다. 이 대립의 충돌로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다.
 
1889년, 사관학교 청년들을 중심으로 '통일진보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것이 '청년 투르크'의 모체였다. 1913년 '청년 투르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엔베르 파샤 등 3명에 의한 군사독재가 시작된다. 엔베르 파샤는 '범투르크주의'라는 민족주의로 투르크인의 부흥을 꾀했다. 
 
투르크정부(오스만 제국)는 투르크가 영토를 회복하도록 돕겠다는 독일의 제안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이 때 영국은 오스만 제국 내의 아랍인을 조직하여 오스만 제국을 배후에서 위협하는 작전을 썼다. 청년투르크 혁명 이후 아랍인 사이에서는 반투르크 의식이 고양되었다. 영국은 전쟁이 끝나면 아랍인을 독립시켜 주겠다고 약속하고 하심 가문의 후세인과 두 아들 압둘라(훗날 요르단 초대 국왕)와 파이살(훗날 이라크 국왕)을 지도자로 내세워 아랍 반란군을 조직했다. 그러나 강화회의에서 영국은 아랍을 독립시키겠다는 약속을 져버렸다.
 
패전 후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공동식민지 같은 상태가 되었고, 케말 파샤가 1923년 앙카라를 수도로 하는 터키공화국을 수립하여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아나톨리아를 점령하고 있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의 군대를 격파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터키에 양보한 배경에는 러시아혁명이 있었다. 혁명이 중동으로 파급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의 주선으로 만들어진 이란 카자흐 여단의 대령 팔레비는 러시아혁명으로 러시아 세력이 후퇴하는 정세를 이용하여 1925년 이란에 '팔레비 왕조'를 창립하고 왕위에 올랐다.
 
팔레스타인 문제, 이라크 문제, 쿠르드인 문제 등의 중동 분쟁이 생긴 뿌리는,
1) 1916년의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 2)1915~1916년에 교환된 '후세인-맥마흔 서한', 3)1917년의 '벨푸어선언' 등의 협정이 서로 모순되었다는 데 있었다.
 
1) 영국의 중동 전문가 사이크스와 프랑스 외교관 피코가 러시아의 동의를 얻어 체결한 비밀 협정으로 3국이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3분할할 것을 담고 있다. 러시아혁명정부가 이 비밀협정을 공개했다.
2) 아랍의 지도자 후세인과 영국 고등판무관 맥마흔은 1차대전후 아랍인 국가의 건설을 인정하는 데 합의했다.
3) 영국의 외무장관 밸푸어가 유대인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편지로, 팔레스타인 내에 유대인의 민족적 향토를 건설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한다는 내용이다.
 
오스만 제국이 1차 세계대전으로 붕괴하자 쿠르드인에게도 독립의 기회가 왔지만, 터키가 로잔조약으로 현재의 영토를 회복했다. 쿠르드인 거주지역 모술에서 석유가 나오는 데 주목한 영국은 그 지역을 모술주로 삼아 이라크에 편입시켰다. 쿠르드인 거주지역은 터키, 이라크, 이란으로 분단되어 있다. 터키는 쿠르드인의 존재를 부정하며 동화정책을 취해왔고, 이라크에서는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쿠르드인이 이란편에 서자 50만명이나 되는 쿠르드인을 이주시키고 5000명을 살해했다. 1991년 걸프전쟁 직후에는 후세인 정권에 대한 쿠르드인의 반란이 진압되면서 100만명 이상이 터키, 이란, 이라크 북부 산악 지대로 도주했다.
 
와하브파 원리주의 운동은 18세기 전반에 발생했고, 호족 사우드 가문의 지원을 받아 고양되었다. 영국이 지원한 하심 가문의 후세인은 사우드 가문의 정적으로, 사우드 가문은 헤자즈 지방으로 침공하여 1924년 후세인을 퇴위시켰다.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세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등으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진다.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다음 날 이를 부당하다고 본 아랍의 군대가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하여 팔레스타인 전쟁(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스라엘은 영국군의 기지에서 무기를 조잘하여 아랍군을 압도한다. 휴전협정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전역의 8할을 영토로 하여 독립한다. 팔레스타인인은 난민 캠프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트란스요르단은 요르단강 서안을, 이집트는 가자 지구를 자국령에 포함시켰다.
 
아라비아어라는 공통 언어와 공통 역사를 가진 아랍 세계 사람들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될 필요가 있다는 바스주의가 제창된다. 1947년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바스주의 실현을 위한 '바스당'이 결성된다. 1950년 이라크에서도 바스당이 결성된다.
 
1943년 이집트의 제안으로 아랍연맹이 결성된다. 당시 영국은 하심가문을 통해 이라크와 요르단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고, 아랍연맹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다. 아랍의 주도권을 원하던 이집트는 하심가문의 정적 사우드 가문(사우디아라비아)의 지지로 카이로에 아랍연맹의 본부를 둔다. 아랍연맹은 아랍 제국의 독립을 지원하고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가 들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1958년 2월, 이집트의 나세르 정권과 시리아의 바스당 정권이 손을 잡고 나세르를 대통령으로 하는 '아랍연합공화국'을 세웠다. 양국은 소련의 지원 아래, 구지배층이 주도하는 질서에 도전하는 자세를 분명히 했다. 친서구파인 이라크, 요르단의 하심가문 연합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손을 잡고 민족운동의 고양을 저지하려 한다. 그런데 1958년 7월, 카셈을 중심으로 하는 청년 장교가 혁명을 일으켜 하심 가문의 왕을 타도한다. 그 결과 이라크에서 여국의 영향력이 후퇴하고, 이러한 변화로 중동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될 것을 우려한 미국과 영국은 민족운동의 확산을 저지한다.
 
이란에서는 1951년 수상이 된 민족주의자 모사데그가 석유산업의 국영화를 단행하고 영국과 국교를 단절한다. 모사데그의 급진 정책에 반대하는 친서구파 팔레비 국왕은 1953년 모사데그를 해임했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팔레비가 최정적으로 승리한다.
 
이집트의 나세르는 인도의 네루,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과 함께 냉전에 참여하지 않는 비동맹의 길을 선택한다. 1955년에는 중국과 국교를 수립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선택한다. 1956년 이스라엘군이 반이스라엘 게릴라 기지를 공격한다는 구실로 시나이반도로 쳐들어가 제압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는 쌍방의 전투에 개입한다는 구실로 수에즈운하 지대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나세르 정권의 타도를 꾀한다.(제2차 중동전쟁) 하지만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지 못해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군은 철수하고, 나세르의 존재감은 강화되었다. 1964년 나세르는 팔레스타인땅을 되찾자고 제창하고, 아랍제국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결성한다. 의장은 전 사우디아라비아 유엔 대사가 맡고, 해방군은 이집트군이 맡았다.
 
이라크의 카셈은 석유에서 나오는 수입을 이집트와 나누는 것이 못마땅해 나세르와 결별한다. 나세르의 경제정책에 불만을 품은 시리아도 1961년 결별한다.
 
카셈은 1963년 쿠데타로 살해되고 바스당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라크의 쿠데타가 영향을 미쳐 시리아에서는 다음달에 혁명이 일어나 바스당 정권이 수립된다. 하지만 석유를 둘러싼 갈등으로 이라크와 시리아의 바스당 사이에 대립이 생겼다.
 
시리아의 바스당은 이스라엘과의 분쟁을 격화시킴으로써 국내 정치의 모순을 밖으로 돌리려했다.  시리아와 이집트는 동맹을 맺어 수에즈전쟁 당시 시나이반도에 배치되었던 유엔군의 철수를 실현시키고, 티란해협을 봉쇄하여 이스라엘 함선을 묶어 두려고 했다. 이스라엘은 티란해협 봉쇄가 개전의 충분한 명분이 된다고 보고 1967년 6월 5일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기습했다.(제3차 중동전쟁) 6일간의 전투로 이스라엘군은 이집트의 시나이반도, 시리아의 골란고원, 요르단강 서안을 점령했다.
 
아랍 제국에 의지해서 팔레스타인을 되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 팔레스타인인은 PLO를 전투조직으로 재편한다. 파타하의 창설에 관여하고 대변인으로 활약하던 아라파트가 PLO 3대 의장에 취임한다.  PLO는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기관이라 자처하며 최고의결기관은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 정규군으로는 파타하의 무장노선을 계승한 팔레스타인해방군을 뒀다.
 
팔레스타인 난민 대다수가 유입된 요르단에서는 난민이 커다란 세력이 되었다. PLO는 이스라엘과 싸우기 전에 보수적인 유르단 왕부터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1970년 요르단 왕 후세인은 암만의 PLO를 섬멸하라고 명령한다. 친PLO인 시리아는 육군을 요르단에 파견했고, 미국은 항공모함을 이스라엘 앞바다에 파견하여 요르단을 지원했다. 결국 PLO는 요르단 내 거점을 잃고 지도부와 주력부대를 레바논으로 옮겼다.
 
이집트에서 나세르 이후 사다트 정권은 시리아, 요르단과 이스라엘을 침공한다.(4차 중동전쟁) 미국은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소련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원했다. 산유국은 원유 가격을 인상하는 방법으로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원했다. 전쟁 결과 이집트는 쉐즈운하의 통항을 재개할 수 있었고 PLO는 팔레스타인의 합법적 대표로 인정되었다.
 
레바논은 1944년 프랑스에서 독립했고, 고대 페니키아를 계승했다. 1930년대 이후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도, 수상은 수니파, 국회의장은 시아파, 부수상과 국회부의장은 그리스정교도가 임명되는 관행으로 질서가 유지되었다. 레바논 정부는 PLO에게 자치정부나 다름없는 특권을 주고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도 묵인했다. 그러나 1975년 마론파 민병이 팔레스타인인 버스를 공격하여 이슬람교도 27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내전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시리아는 이슬람 편에서 참전했지만, 나중에는 레바논의 종파균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하여 마론파를 지원했다. 1982년 이후 이스라엘은 PLO를 레바논에서 몰아내고 친이스라엘적인 마론파 정권을 세우기 위해 레바논 남부의 베이루트를 침공했다. 시리아의 지원을 얻은 이슬람교도,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헤즈볼라가 이스라엘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여 내전은 장기화됐다. 
 
레바논의 PLO 전투원 1만명은 미국의 중재로 베이루트에서 철수하고 PLO본부를 튀니지로 옮겼다. PLO후퇴로 기세가 오른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의 토지를 수용하고 유대인 입식지를 확대한다. 팔레스타인 민중과 이스라엘군의 충돌이 잇따랐고 '인티파다'라는 민중의 자발적인 투석 투쟁이 일어난다. 1988년에는 이슬람원리주의 조직 '하마스'가 ㅜ쟁의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반도를 되찾는 것을 최대의 정치적 과제로 삼은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소련과의 우호조약을 깨고 미국에 접근하여 키신저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교섭을 시작했다. 1979년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카이로의 아랍연맹본부는 튀니지의 수도로 옮겨졌다.
 
1993년 PLO의장 아라파트와 이스라엘 수상 라빈은 파레스타인잠정자치협정을 조인했다. 그러나 라빈은 유대교도에게 암살되고 2001년 이스라엘 선거에서 우파 샤론이 총리가 되면서 평화 협상이 중지된다. 2003년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유대인 입식지와 팔레스타인 거주지 사이에 거대한 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란에서는 시아파를 중심으로 민중봉기가 일어나 1979년 1월 팔레비 국왕이 망명한다. 시아파 최고성직자 호메이니는 반대파를 숙청하고 자신이 이슬람 신앙에 기초한 법률을 제정하여 통치한다. 
 
소련은 이란혁명이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영내에 파급될까 두려워했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 세력을 탄압해오던 아민 공산당 정권이 이란혁명을 아프가니스탄으로 불러들일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고 아민을 물러나게 하기 위하여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이슬람 국가들에서 많은 의용군이 이슬람전사(무자헤딘)로서 아프가니스탄에 집결했고, 미국은 소련의 세력 확대를 막기위해 게릴라 세력에게 무기를 지원했다.  소련철군 이후 혼란의 와중에 '탈레반'이라는 원리주의 집단이 카불을 점령한다.
 
미국은 이란혁명으로 '중동의 헌병'을 잃고 큰 타격을 받았다. 미국은 방어벽이 될만한 세력으로 이라크의 바스당 지도자 사담 후세인을 선택했다. 이라크에서는 시아파가 다수이지만 강권으로 수니파 정권을 유지해온 만큼, 후세인은 이란혁명이 이라크 남부 시아파에 파급되는 것을 우려했다. 1980년 후세인이 이란을 공격하면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1982년 이후 이란군이 우위에 서자 미국은 이라크에 무기와 경제를 원조한다.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채무가 늘어나자 후세인은 산유국 쿠웨이트를 침공한다. 이것은 석유 이권을 가지고 있던 미국에 노골적으로 도전한 것이었다. 미국은 군대를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했고 유엔안보리는 이라크를 침략자로 규정했다. 소련도 미국을 지지했다. 이라크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점령 지역에서 철수하면 이라크도 쿠웨이트에서 철수하겠다며 팔레스타인 문제와 쿠웨이트를 엮어서 아랍인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요르단, 예맨, 튀니지, PLO는 이라크를 지지했다. 걸프전쟁에 패한 이라크 국내에서는 남부 시아파 민중이 후세인 독재에 반대하여 봉기하고, 북부 쿠르드인이 봉기하여 유전 지대를 점거했다. 미국은 이라크가 분열하고 혼란에 빠지만 그 혼란이 페르시안 만안으로 파급될까 두려워서 후세인 정권 타도를 보류한다. 전쟁 이후 성스러운 아라비아반도에 미군 진주를 허용했다고 하여 사우디아라비아의 위신이 크게 흔들렸고, 이라크를 지지한 PLO의 처지가 어려워졌다.
 
미국은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며 2003년 이라크 침공을 강행한다. 이라크 북부 쿠르드인 부대와 호응하여 침공 한달 만에 이라크 전역을 제압했다. 미국의 주장과는 달리 이라크에서는 대량살상무기가 발견되지 않았다.
 
러시아연방에서 이탈하기를 원하는 체첸인은 공화국을 세우고 1991년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체첸의 독립을 인정하면 석유파이프라인을 잃게 되므로 러시아군이 체첸으로 침공한다. 체첸인은 남부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계속했다.
(찾아보니, 2011년에도 체첸 저항조직의 테러와 러시아의 학살이 이어지고 있다.. 체첸에는 '검은미망인'이라는 조직이 있는데, 러시아군에게서 자신 혹은 가족들이 살인, 약탈, 강간 등을 겪었던 여성들이 만든 테러조직이라고 한다.      아..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