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헤어드레서

from the movie 2011/08/17 18:34

** 스포일러있음

 

어릴 적부터 영화를 좋아했지만

줄곧 코폴라나 스콜세지 같은 남성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남성들이 주인공인 영화들을 좋아했었다.

물론 이들의 영화 속에서는 '여성'인물의 존재감이 없다.

있다하면 거의가 섹스 어필한 남성 주인공의 상대역이나,

경제적으로 남성에게 의존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로 등장하기 일쑤였다.

 

조금 더 머리가 커서는, 제인 캠피온이나 퍼시 애들론의 영화를 보며 위안삼은 적이 많았다.

특히 캠피온의 '내 책상위의 천사'는 중고등학교 내내 나를 사로잡던 영화였다.

줄곧 타인에 의해 정체성의 규정되는 여성들의 삶, 그 속에서 오는 자아 분열, 

그러나 흔들리지 않고 나를 찾아나가는 유명 작가의 생애.

디 아워스를 보면서는 미칠 것만 같았는데 이 영화는 보는 내내 행복감을 주었다.

 

헤어드레서는 '내 책상위의 천사'와 거의 유사한 플롯이어서 이야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늘어지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감독 특유의 유머로 이를 극복하는 장점도 있다.

캠피온의 영화와 다른 게 있다면, 주인공에게 처해진 계급적 차이 정도?

 

독특한 스타일에 뚱뚱한데다, 가난한 싱글맘인 카티는 자기만의 미용실을 갖기 위해 이런 저런 방법들을 동원한다. 그 과정에서 우정과 사랑을 쌓고 사기와 협박도 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다. 내 책상 위의 천사에서 등장한 자넷 프레임은 지독한 소외 속에서도 결국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영광까지 얻지만, 헤어드레서의 카티는 원하던 모든 것들이 수포로 돌아가고도 다시 희망을 찾는....어찌 보면 무척이나 억척스러운 여자로 등장한다. 뚱뚱한 사람은 게으르다는 편견을 깬다.

 

한국계 출신 배우가 연기하는 베트남 이주노동자 티엔의 눈빛이 좀 예사롭지 않았다.

보는 내내 '이 사람도 카티를 사기치고 도망가는 거 아닌가?'하는 의심을 하게 만들 정도로,

관객들은 카티와  티엔의 섹스 장면에서 소리를 질렀는데

괴성인지 환호인지 무엇인지 모를 감정의 결을 느꼈다.

 

남성 이주노동자가 허락도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에서 약간의 폭력성이 느껴졌던 건...나 뿐이었을까.

좋아하는 감정이 들면 막 원칙적으로 합의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섹스할 수도 있는데....

만일 그 자가 백인이었다면 이 경계의 애매함을 찜찜하게 안고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카티가 뚱뚱이와 홀쭉이가 될 것이라 말하며 그의 키스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까맣고 홀쭉한 남성과 하얗고 뚱뚱한 여성이 벌이는 섹스는

젠더, 인종, 외모 등 모든 차별의 변수들이 애초부터 무의미한 것처럼 보였다. 혹은 그것의 경계들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면인 것 같기도 했다. 솔직히 나에게는 지울 수  없는 젠더적 함의, 거기에 내가 안고 있던 인종적 편견이 덧 씌워져 불편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참 아름다워보였다.

 

'그냥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지, 사랑한다는 데 웬 말이 많아, 부인이 있으면 어떻고 잠깐의 사랑을 할 수도 있지 뭘 그래'

 

그래, 그럴 수도 있다. 카티의 삶은 항상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긍정해왔다.

 

컴플렉스 가득한 여성이 그걸 걷어내고 자기를 위한 삶을 산다는 흔한 내러티브

하지만 도리스 되리는 전작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친숙함'을 놀랍도록 매력적으로 그린다.

 

휴가 기간 내내 아빠를 돌보고 나서

짬내 찾은 극장, 겨우 영화 한 편 보고 다시 돌아왔다.

거의 한 달 가까이를 못 나가봤다.

 

영도는 멀어서라도 못 간다지만

서울 한복판 찬 길바닥에서 무척 외롭고 고된 농성을 했다던 피해자 동지의 모습이 밟힌다.


그녀와, 함께 봤으면 좋았을텐데....

 

Dorris Dorrie, 헤어드레서(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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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7 18:34 2011/08/17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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