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노래, 이승우

from the text 2013/07/13 17:10

70-80년대 박정희와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 정권 치하 속에서

혁명도 데모도 꿈꾸지 않은 자들에 대한 기록, 이라 하면 너무 단순화하는 걸까?

사실 이야기의 전형성 이랄까, 느껴지기는 한다. 작가 스스로도 밝혔듯 치밀하게 잘 쓴 소설도 아니다.

남성 화자가 펼쳐내는 상투적인 플롯, 특히 사촌 누이에 대한 잊혀지지 않는 사랑 뭐 이런 정형화된 텍스트가 이 소설속에서도 이야기의 한 축을 담당한다. 상상력이 거기까지인가 매번 질문하게 만드는.

낡은 폐허 건물에서 발견된 성경 필사, 대체 그 벽서의 기원은 무엇일까를 추적해나가다 

결국 고립된 수도원에서 생매장된 수도사들의 사연이 밝혀지는 다른 한 축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아내의 죽음을 보고서 군복을 벗고 수도사가 된 한정효

어리석은 사랑을 좇아, 세속적인 세상 속에서 얼키고 설기며 다시 수도원으로 들어오는 후

이 둘이 목격한 것은 죽음이었고, 결국 이들이 회귀한 것도 곧 죽음이었다. 

하나는 자의와 타의가, 사실은 후자가 강하게 작용한 처참한 죽음이지만

후와 한정효는 자발적인 죽음을 택한다. 그것만이 이들에게 유일한 평안을 선사했으리라. 

여전히 세상은 떠들썩하다. 그네들이 말하는 것처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정권 자체를 '그네들'손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변화하지 않은 시대, 정치라는 무대 위에서 삭제된 개인의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 책, 읽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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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3 17:10 2013/07/13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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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의 사랑학

from the text 2012/03/19 23:24

몇 해 전 사랑을 시작했다던 동지에게 추천해놓고,

나는 이제야 읽어보다.

 

목수정, 야성의 사랑학

 


 


사용자 삽입 이미지

 

 

며칠 밤새우면서 분노에 버닝하고 있을 때,

편하게 잠들기 위해 선택한 책이었다. 

가슴이 미어지곤 할 때, 내뱉고 싶은 말들은 엄청난데 이 무식한 뇌에 갇혀 봉인된 언어들을

목수정은 특유의 날카로움으로 끄집어낸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지독히도 '지옥'스러운 일상을 통찰하는 저자의 힘, 놀랍다. 

하지만 그 날카로움을 좀먹는 생각들이 곳곳에 보인다.

이성애 중심성, 퀴어적 감수성...이 전혀 없는, 심지어 '병'으로까지 규정하는

프로이트적 언어들을 비판의 도구로 한다는 것, 보는 내내 불편했다. 

 

야성의 사랑학이란 대체 뭘까.

성과 애가 결합된 것이 가장 완성도가 높은 사랑이라는 것도 결국 이데올로기 아닌가. 

 

'사랑', 누구에게나 삶의 화두일 것이지만 쉽게 생각나지도 않고 실현하기도 어려운 것,

사랑할 여유조차 없는 요즘, 진지하게 고민해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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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9 23:24 2012/03/19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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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디 하트만의 발견

from the text 2011/01/30 21:22

자본주의에서 성별분업 덕분으로 여성은 인간의 상호 의존과 욕구가 어떤 것인지를 배우는 경험을 해왔다. 남성들은 오랫동안 자본에 대항하여 싸워왔는데 한편에서 여성들은 무엇을 바라고 투쟁하는지를 알고 있다. 일반적인 법칙으로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서의 남성의 위치는 배려, 분담, 성장 등에 대한 인간적인 욕구의 인지를 방해하고 그러한 욕구를 격차가 없는 관계 속에서 가부장제적이지 않은 사회에서 실현하려는 능력도 박탈한다.....

 

우리들이 만들어야 하는 사회는 상호 의존을 인정하는 것이 수치가 아니라

해방인 사회이다.

 

-Heidi Hartman, "The Unhappy Marriage of Marxism and Feminism: Towards a More Progressive U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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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30 21:22 2011/01/30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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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춤이다, 김선우

from the text 2010/10/26 21:08

언제 다 읽었는지 모를 만큼

숨이 차도록 매혹적인 소설, '나는 춤이다'

최승희 생에 집착하던 춤과 사랑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이

시적인 서사로 가득하다.

 

여자가 표현하는 아름다움이

그토록 강한 것이었음을

당대 사람들은 알 수 있었을까.

 

어쩌면 최승희에 대한 김선우의 완고한 태도가

더 맘에 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얼하게 얼굴을 때리는 찬 바람이 분다.
살아가야 하고,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은 내 앞 길을
비춰주기라도 하는 듯
 
내 앞을 먼저 산 여자의 삶이
어느 새 나를 자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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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6 21:08 2010/10/26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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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세계에는 단 하나의 공간과 시간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주체에 따라 수많은 공간과 시간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개개의 주체는 자기 나름의 공간과 시간을 갖는 고유한 환경 속에 속해 있다.

 

- 야곱 폰 웩스쿨, '이론 생물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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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5 20:26 2010/10/25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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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파동을 기억하는가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쟁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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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5 03:16 2010/03/25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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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예뻤을 때,

from the text 2008/08/10 00:40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꽈르릉하고 무너지고

생각도 않던 곳에서

파란 하늘 같은 것이 보이곤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부릴 실마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다정한 선물을 바쳐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몰랐고

깨끗한 눈짓만을 남기고 모두 떠나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의 머리는 텅 비고

나의 마음은 무디었고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의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런 엉터리없는 일이 있느냐고

블라우스의 팔을 걷어올리고 비굴한 거리를 쏘다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넘쳤다

담배연기를 처음 마셨을 때처럼 어질어질하면서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마구 즐겼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아주 불행했고

나는 아주 얼빠졌었고

나는 무척 쓸쓸했다

 

때문에 결심했다 될수록이면 오래 살기로

나이 들어서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불란서의 루오 할아버지같이 그렇게.

신이현, '내가 가장 예뻤을 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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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0 00:40 2008/08/10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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