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생각_펌 - 2005/04/26 23:50

[1] 사촌의 집들이

 

얼마전 사촌이 집들이를 했다.

어릴 때부터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살던 모습을 좀 알고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야기 들어보니 이건 완전 딴세상이다.

 

이 날 집들이 참가자는 우리집의 3남매와 올케, 작은 아버지네 2남매와 올케.

그 멤버중 하나는 학창시절 학업은 접어두고 햄버거 알바부터 자장면집 알바까지 두루 섭렵한 건 알고 있었지만,

또 다른 녀석이 동네 자장면집 배달부 오토바이 뒤에 타고 다니며 물건 훔치기를 일삼았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만만치 않은 가출 경력들과 도둑질, 각종 야비한 작태들, 거기에 큰소리 한번으로 이내 수그러들었던 비굴함의 기억까지...

물론 '나 잘났어!'와 개구쟁이들의 괴롭힘을 퇴치해준 기억도 만만치 않게 섞여있다.

 

난 거의 기억이 안 난다! 아니 들은 바도 없는 것 같다!

사실 기억력도 별로 안좋아서 대학교때 일도 기억에 별로 없다.

하지만 꽤 생뚱맞은 지라 나만 혼자 딴 세상에 산 기분이다.

동생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난 주로 자기들을 많이 도와준 존재였던 모양인데,

하긴 그게 부모에게 부여받은 첫째의 역할이지.

동생들의 인생역정을 듣다보니 너무 티미하게 살았다 싶은 생각도 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동네에서 발견한 괴이한 친구의 무용담처럼 떠들어댄다.

만약 현재의 이야기라면, 이미 어른이 되었는 데 행한 엽기행각이라면, 이렇게 손쉽게 떠들어댈 수 있을까?

 

이렇게 무용담식으로 말하는 모습에서 아래의 2가지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데,

첫 번째는 어른 스스로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 할 지라도- 어린이 시절의 모습을 타자화시키는 것. 즉, 이미 내가 아닌 존재로 인식 내지는 단정하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탁월한 기억력으로 인해 당시의 행동은 기억이 나지만  일상을 지내던 감성과 문화를 잃게 되는 것. 따라서 매우 관찰자적 서술을 하는 방식이 가능하게 된다. 물론 몇가지 충격적인 감정은 그대로 머리속에 남아있겠지만...

 

간혹 어린이를 어른의 미숙한 단계이거나 어른으로의 발전 단계로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운 것은 어른인 나조차도 자신의 어린 시절과 심각한 단절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저 세월의 무게일까?

어떻든 적어도 지금은 어른과 완전 다른 객체라는 생각이 든다.



[2] 어린이 이야기, 그 거세된 꿈

 

[어린이 이야기, 그 거세된 꿈](최기숙 지음, 책세상), 이건 책의 이름이다.

대체로 동화, 특히 전래동화를 분석한 책을 보면 결론이 비슷하다.

 

대략의 뉘앙스는 다음과 같다.

'동화는 어린이에게 매우 위험할 수 있다'

'동화는 어른의 이야기일 뿐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전래민담도 원래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현대적인 재해석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차피 100% 완벽한 스토리는 없기 때문에 동화를 잘 고르는 것보다 어린이들이 이를 통해 토론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 책 역시 이러한 대략의 기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집었을 때, '과연 진정한 어린이의 꿈은?'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는 상당히 많이 무너졌다.

 

대신 예상치 못한 것을 얻었다.

그것은 바로 어른의 일상과 꿈이다.

태어날 때부터 너무나 뛰어난 아이는 부모로부터 '역적의 집안이 될 것이 두려워' 죽임을 당하게 된다. 행태는 어른의 아동 살해지만 실제 어른 자신의 변혁의 가능성을 제단하고 스스로 자해한 꼴이다.

시아버지의 먹을 것이 줄어드는 것을 아들의 탓으로 돌리고 아이를 죽이려한 부모는 효사상의 억지스러운 사회지배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남동생보다 힘이 더 장사였으나 '남자의 기를 죽일 수 없어' 일부러 씨름에 져주고 끝내 죽임을 당하는 누이는 남녀차별사상의 희생양이다.

아버지보다 권력 높은 이를 자신의 꾀로 응징하려는 아이를 보면서 어른스러운 기만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아이들은 남다르거나 뛰어나거나 매우 순진한 천사의 모습으로 존재해야 한다.

바로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의 꿈이다.

 

어린이가 바라는, 어린이에 맞는 이야기를 만든다는 건

어쩌면 어른들에겐 불가능한 프로젝트일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실 어떠한 이야기를 접하든, 어떠한 현상에 맞닥뜨리든, 그것을 해석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나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나에게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아이들에게도 좋지 않을까 싶은 추천 동화가 몇가지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어린이의 세계는 꽤 미지의 세계이다.

 

* 사족 - 해님달님에서 어둠이 싫다며 여동생이 해님이 되었고, 그런 여동생이 얄미워 오빠가 여동생에게 모래를 뿌리는 바람에 해는 눈부시게 되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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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26 23:50 2005/04/26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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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sj 2005/04/27 05: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걱 그래요?
    난 부끄럼쟁이 여동생이 해가 되어서 사람들이 자길 못처다 보게 하려고 빛난다..글고 그 남매가 아직도 서로 못만나서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뭐 그렇게 끝나는 동화를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옛이야기는 워낙에 원전과 다른 버젼이 많아서리..
    근데..그 외전도 역시 역사를 거쳐 온 것이기에 옛이야기로서의 의미는 있을것 같지 않나요?
    하긴 요즘 처럼 대량 생산의 시대에는 옛이야기의 변질이라는게 역사성을 못가지겠죠?

  2. jineeya 2005/04/27 17: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lsj/그렇군여. 역시 외전이 많은게야.
    저 자신은 누군가 동화의 맥락을 알려주면 그에 대해 서로 소통하면서 알게되는 게 많은데요.
    하지만 완전히 반대로 뭔가 아무 생각없이 보고 받아들여도 아무런 문제가 안되는 텍스트(이것도 기준이 애매하지만)도 바라게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