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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라는 현실은

  • 등록일
    2005/02/09 08:19
  • 수정일
    2005/02/09 08:19

* 이 글은 미류님의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에 관련된 글입니다.

글을 읽고 나는 어째서 그렇게 사회적 교섭을 반대하였나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내가 좌파적 지향을 갖고 있어서, 아니면 사회적 교섭이 되면 필연적으로 벌어질 상황이라는 가정 때문에 그러나 아니다.



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운동은 노동자들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활동이라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세상이 썩어 문드러져도 노동자들이 일어나 세상을 바꿀 수 밖에 없는 필연적 사회라 생각하고 있다. 그 길에 난 맑스-레닌이라는 이론을 옛 선배들로 부터 교육받아왔고, 내가 바라던 바라지 않던 그 안에서 활동이라는 미숙한 행동들을 전개해 왔었다. 나도 어찌 보면 내가 의도하지 않은 길 다른 동아리나 과를 선택하였다면 난 과연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을 해보았다. 나의 인식의 절반이상은 내가 의도하지 않게 훈련되거나 주입되었지만 난 그걸 거부하지 않고 지금 길을 걸어가고 있다. 내가 훈련받고 주입된 그 활동이라는 과정에서 내가 보아왔던 노동자 민중의 현실을 보아서 일거라 짐작만 해본다.

 

내가 민주노총 대대를 보고 실망한 것은, 아직도 한국내 노동운동이 지도를 획득하지 못하고 주체로서 스스로가 서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감과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이 서서히 자주적이지 않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에 실망 또는 좌절이 닿아 있었다.

 

내 주변에 아는 동료들 중에 일부는 부문운동이라는 것을 위해 환경운동연합이나 다른 운동영역에서 시민사회 또는 진보적 단체일을 하는 이도 몇몇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래 가지 않아 정체성, 생계라는 문제로 자신의 역사에서 운동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지워갔다.

 

내가 운동하는 이유는 정치를 지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조그마한 바램... 세상의 주인은 노동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고, 그들이 역사의 주체로서 주인으로서 정치의 주인으로서 서는 길에 함께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바램은 이전부터 서서히 조금씩 주저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바램하는 것은 큰 것도 아니다. 예전 그 노동자들의 역동성을 보고 싶고 악법철폐라는 단어에도 스스름 없이 머리띠 묶어가며 투쟁의 길로 나서는 그 모습에서 희망을 보아왔다고 본다.

 

그러나 현실은 내가 바램하는데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아니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 현실이 되었다 말해야 겠다. 우린 언젠가부터 대공장 노조의 투쟁에 대해 사회적 파장력과 이슈라는 이유로 모든 단체가 달려들면서 연대투쟁에 적극적으로 매진하였다. 그러나 소규모 중소영세사업장, 장기투쟁사업장 등 단위노조를 견인할 힘조차 버거운 노동자투쟁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사회적 파장력과 이슈로서 부재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 투쟁이 갖고 있는 사회적 함의가 크지 않아서 그런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우린 매몰차게 그들의 투쟁에 대해서는 외면하였다. 간혹 이러한 중소영세사업장 이나 장기투쟁사업장, 단위가 열악하지만 주체적으로 투쟁하는 곳이 성과가 있어 보이면 머리를 들이밀듯이 달려드는 모습... 하이애나 근성을 발견하고는 소슬아 친다.

 

정작 어려운 시기에는 외면으로 일색하던 곳에서부터의 관심, 씁쓸하다 못해 참 기막힐 때가 많다. 어려울때 도와달라고 절규할때의 모습..... 그러나 이게 내가 보고 있는 현실이다.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생겨나고 사회적으로 민주주의가 확대되었다고 난리 친다. 그래 80년대 그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목청껏 외쳐부르던 그 함성소리와 투쟁소리는 비장함을 주지만, 그 시민사회단체들이 활동하는 범위에는 정작 시민들은 없다. 

 

대의제가 만연한 현실 주인의식이 실종된 현실 그게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활동이라는 틀에서 노동자 민중은 실종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지금에는 활동이라는 공간에서 대중은 조직화의 대상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다. 자신들의 조직적 힘을 얼마나 확신하는지 모르지만, 우리내 96년 학생운동을 붕괴의 일로에 접어들게한 김영삼의 한총련 탄압으로 인한 학생운동의 고립이다. 일명 연세대 사태후 한총련은 대학생들의 대중적 운동으로서 그 조직력과 학생회 장악력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기본 5만동력을 자랑하던 한총련 출범식은 이 이후 1만이 모이기 힘들게 되었다. 그렇다고 한총련만의 문제일까? 아니다 좌파운동을 자임하던 학생정치조직 세력 또한 이로 인해 크나큰 피해를 받았다.  그 당시 한총련 강화를 말하면 우파계 학생운동 세력과 한총련 개혁을 외치던 좌파계 학생운동들의 몰락은 공동의 적의 한총련 탄압으로 일단락 되었다. 공동의 적으로부터 당해야 했던 사항에 공동으로 대처하지 못한데서 오는 무기력함이라 할 것이다.

 

나에게 있어 사회적 합의는 비유하자면 한총련 탄압하던 연세대 사태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게 한다. 철저히 노-노 갈등으로 부추기며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에 대해 언론은 다양한 입장을 내세우며 서서히 목을 조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적 교섭이 되었을 때의 큰 문제는 노동운동이 이를 거부할 수 있는 힘 조차 없으면 대의제로 진행해온 대의원들의 결정으로 입게된 타격은 고스란히 조합원들에게 간다는 것이다.

 

그 고통은 민주노총 대대장에서 싸우는 것보다 더 큰 파장력을 갖고 한국 태극기가 나부끼는 곳곳에서 소리소문 없이 서서히 노조를 압박하거나 무기력화 시킬 것이다. 투쟁하는 비정규직노조는 더이상 희망도 없이 자신이 비정규직이라는 현실만을 한탄해야 할 것이다.

모든 내용은 사회적 교섭에서 이루어지고 이에 맞게 비정규직 양산과 정규직 보전이 보장되는 테이블이기에....

 

내가 바라는 세상은 노동자 민중이 웃음을 머금을 수 있는 세상이다, 이 세상도 훈육의 결과이지만, 난 그 훈육의 과정에서 이 길을 위해서는 맑스-레닌주의뿐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훈육은 받고 있지 않지만 맑스-레닌주의는 아직도 유효하다 생각되어진다.

 

한국의 사상계가 춘추전국시대이지만 난 아직도 구좌파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민주노총 대대와 현실 벌어지는 투쟁들은 나로하여금 서글프게 때론 분노를 때로는 고민을 때로는 슬픔을 안겨 준다. 그 길에 노동자 민중들이 없기에.... 노동자 민중에 대한 정치를 보고 싶다는 선언이 아닌 실천이 대동단결이 아닌 일치단결 기치에서 민주의 한길 투쟁의 한길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러나 이 길은 지금 멀게만 느껴진다. 자본주의하에서 철저히 투쟁의 장이 되어야 할 운동이 투쟁을 외면한 정치일색이라는 현실이 눈물나도록 서럽게 다가온다. 내가 과거라는 망령에 너무 사로잡혀 있지 않나 때론 불안하지만 그 과거엔 최소 진정성과 동지애가 있었다.

끈끈한......

 

간장 오타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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