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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09/09
    오산 이주노동자를 만나다.
    간장 오타맨...
  2. 2004/09/09
    오산 다솜 공부방은 기차길 옆 공부방
    간장 오타맨...
  3. 2004/09/07
    오산 다솜교회 이틀날...
    간장 오타맨...
  4. 2004/09/07
    오산에 왔습니다.
    간장 오타맨...
  5. 2004/09/06
    소심함에 대한 변명....(8)
    간장 오타맨...

80대 어른신들의 대화....

  • 등록일
    2004/09/14 01:14
  • 수정일
    2004/09/14 01:14

지하철 80대 어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마냥 즐거웠다. 그분들의 대화... 한세기 남한의 변천사를 훤히 내다보는 안목... 초등학교 동창인 그분들의 대화에서 난 그 나이에 살아있을지... 아니면 변화되어가는 남한에 대해 회고할 무엇가가 있는지 대화를 들으며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일제시대를 거쳐 격동의 한반도를 몸소 겪었던 그분들....

40년전 서울과 수원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있었다.

용산과 수원 허허벌판인 그곳에 그분들의 초등학교 그리고 30대와 40대가 녹아있었다. 초등학교 동창회를 일찍하시고 술한잔 반주로 거하게 한 늙었지만 노련한 그분들의 대화는 참 다정다감하게 내 귓가를 때렸다.



 

어린시절 할머니와 할아버지로 부터 들어봄직한 전설같은 변천사... 그분들의 기억에 역사 이야기가 나올때마나 추억이 방울방울 맺혀있던 것들이 떨어지는 듯한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듣는 것 만으로도 참 행복하였다 할 수 있다. 그분들의 대화는 정말 한세기를 관통하는 한반도의 역사일 것이다.

 

관악산을 배경으로 한 그분들의 추억 지금은 수원을 지나올때 하늘을 치쳐 떠받는 흉물인 아파트를 보면서 그분들은 어떠한 생각을 하셨을까? 허허벌판 그리고 그분들이 뛰어놀고 가족동반으로 나들이 온 그 곳은 이미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나 그분들이 노닐던 곳은 아니리라.... 아마도 그분들은 변화와 세월이라는 무게감에서 자신을 회고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분들은 그 세월의 깊이만큼 깊게 페인 주름과 시간이 가져다준 몸의 노세화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생을 함께 동고동락한 벗들이 있기에 그리 인생 회고는 힘들지 않을 것이다.

 

새것이 대접받는 사회에서 그분들은 이미 노세화되어 퇴역한지 한참이 지났지만... 그분들은 역사과정에서 틀림없이 주역이었던 시기가 있을 것이다. 그분들이 주역이었던 황금기 그분들은 어떻게 정리하고 있을까? 생각하니 참 궁금하여 귀의 볼륨을 더 높여가며 그분들의 대화를 들었다.

 

그분들은 인생에서 일정 성공의 맛을 본 사람들이다. 아이들이 장성하여 가정을 이루고 독립하여 이미 손자가 대학생이 되고, 시집 장가갈 나이가 무르익은 장성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분들은 집에서 이미 가장으로서 주도권을 아들에게 넘겨준 분들이라.... 낙은 오로지 많은 양은 아니지만 살아남은 친구들과 약주(소주) 한두잔을 먹으로면서 함께 늙은 몸을 유지하고, 자신들의 황금기를 추억 속에서 끄집어 내며....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겠다.

 

그분들은 죽음이 주는 고통 그리고 80세가 되기 이전 이미 고인이된 친구들을 떠올리며... 빨리가야지 하며 한숨을 내쉬지만.... 인간사 오래살고 싶은 욕망은 이 단어에서 반추되어 때린다. 그분들은 삶에서 지금이 가장 행복할 시기가 아닐까...

 

앞만보고 무작정 달려온길... 일제 강점기를 거쳐 조국해방과 분단의 아픔....민족상간의 전쟁인 6.25, 4.19혁명, 5.16 군사쿠데타, 베트남 파병, 유신, 5.18 광주무장혁명, 전두환 군부독재에서 현 노무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조국의 근대화에 한 복판을 관통하였다. 그분들의 대화는 어찌보면 한편의 근현대사이다. 40년 안양천을 이야기하였고, 40년전 관악역 부근 관악산 계곡을 이야기하였고, 40년전 땔감을 주워 밥해먹던 이야기를 하였고, 40년전 아파트가 들어서기 이전의 서울과 수원의 철길 주변을 이야기하였고, 이미 대성하여 가장이된 아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였고, 손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분들읜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리라 생각해본다. 그러나 지금 회고하면서 맞이하는 삶은 그분들의 것이다. 인생의 긴 여로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그때는 그랬지... 그리고 아쉬웠던 기억들을 떠올리는 그분들의 모습과 이야기가 나에겐 참 정감어리게 다가왔다.

 

내가 그 나이때 살아있다면 난 어찌할까 잠시 상념에 잡혀보았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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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어 좋은 이밤에... 나에게 물어본다.

  • 등록일
    2004/09/10 23:32
  • 수정일
    2004/09/10 23:32

오산 기차길 옆 다솜공부방에서 바람소리와 기차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차분해집니다.

낮 아이들의 한바탕 소동은 밤이 오면 고요의 바다로 변합니다. 낮의 시끌벅적함이 사라진 지금 나만의 시간을 가져봅니다.

 

이 곳은 정말 정막함이 감도는 조용한 동네입니다.

개소리도 들리지 않고 사람들 지나가는 소리 또한 들리지 않습니다. 오로지 소리가 들린다면 기차길 옆에 공부방이 위치하여 오산역을 바삐 지나가는 기차 소리와 내가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소리(지금 꽃다지 "손을 잡아야 해"라는 노래 소리)와 자판기 두드리는 소리뿐입니다.



만약에 사람의 인생이 컴퓨터 처럼 포맷이 될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 좋지 않은 기억... 가슴 속 깊이 간직하거나 묻어둔 멍 덩어리.... 삶에 지친 자... 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위한 포멧(희망과 좌절이 없는 삶의 냄세가 듬뿍 담긴 내용들로만 충만한 디스켓으로 업그레이드)을 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까요... 매일매일 인간사에서 벌어진 고통과 번뇌를 포맷하면서 삶의 고통과 번뇌로부터 자유로움을 갈 구 할 수 있으려만... 그러나 인간사는 기계와 같이 포맷이 되지 않고 고통과 번뇌를 지니고 살아가야 합니다. 혹자들은 이러한 고통과 번뇌가 있기에 인간사 아름답지 않은까라는 생각을 가져보지만... 낭만적 발상은 삶의 찌든이 희망을 갈구해 보았지만 구원을 얻지 못한 이에겐 정말 치욕과도 같은 절망의 나락입니다. 타임머신은 없더라고 삶의 희망과 좌절이 없는 업그레이드 기계가 있다면 전쟁, 기아, 자연파괴, 불신이 없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왜 인간은 강하면서도 나약한 존재일까요.

나에게 물어봅니다. 그러나 답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냥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보다는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정처없이 떠돌고 싶습니다. 바람이 불어 좋은 날.... 어디론가 바람에 의지한 채 떠나고 싶습니다. 어떤 동화에서 나온 무지개를 찾아나선 아이들 처럼... 나 또한 바람의 끝이 어딘지 찾아가고 싶습니다.

 

조용한 공간에서 나를 되돌아 봅니다.

과연 내 인생사를 정리할 수 있을까? 어린시절 추억이 듬성듬성 떠오르고, 중학교 친구들 몇명과 수학여행, 고등학교 죽마고우라 지칭하던 이들과 종로6가 중앙시장 안 선술집에서 막걸리잔을 치켜들며 외쳤던 우리는 영원한 친구... 대학때 집회, 선배와 폐인이 되도록 술마셨던 기억... 졸업후 지금까지 듬성듬성 기억은 나는데... 이 듬성듬성 기억나는 기억을 이어주는 끈이 없는 것 같고, 이어나가기엔 무엇인가 좀 부족합니다.

 

치열하게 살고자 하였으나 늘 치열함은 저열함으로 변질되고... 열정은 실리로 변경되고... 약속은 핑계로 바뀌고.... 자신감은 나약함으로 바뀌어가는 현실에서 나의 좌표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어렵지만 가난하지만 불행하지만 희망을 갈구 하건만 난 무엇을 위해 마음을 졸이는가?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바람에게 물어볼까... 바람은 말없이 찬바람만 나에게 가득주면서 그냥 지나쳐 지나갑니다. 바람은 나의 물음에 아무런 댓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아무도 나에게 답은 줄 수 없을 꺼야... 답은 내 옆에 있는데 내가 보고자 하지 않을 수도 아니면 알면서도 회피할 수도 있는 것이야... 그럴꺼야 회피 아니면 보고자 하지 않는 것이겠지... 아마도

 

바람이라면 높은 곳에서 사물을 볼 수 있으련만... 난 바람처럼 대범하지도 못하구나 시야도 협소하고... 하지만 한가지는 자신있구나.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직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난 사람과의 관계에서 늘 소원하지 못하였구나

 

내 중심성이 강한 것일까.. 아마도

그래 그럴꺼야 그래서 여지까지 버터왔으니까... 중심성을 원칙으로 삼았구나. 그래도 서른중반나이 원칙인지 존심인지 고집인지 모르는 개똥철학은 갖고 있었구나...

 

나를 돌아봅니다.

난 무엇하나 해놓은 것도 없고, 어디로 갈지 마음이 서질 않는다.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나의 나약한 심정은 이를 허용치 않는구나... 개탄스럽다. 뭐가 그리 조급한지 뭐가 그리 원망스러웠는지.... 나참 나란 놈은 개똥철학에 푹 바쪘구나....

 

나는 운동을 시작할때부터 늘 사고하고 선택을 하였다. 그러나 돌아보건데 그렇질 못하였구나... 시작할때는.... 평생하지 않을 것이면 시작하지도 말자.... 마음속 깊이 열심히 하지 않을 것이면 시작하지도 말자. 그래서 내가 선택하여 결정한 조직은 아니지만 조직에 가입하고 운동을 시작하였다.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난 내가 처한 과의 기조에 따라 운동의 이념적 경향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내가 선택하지 못하였지만, 최선을 다하고자는 노력하였다. 늘 선거때만 되면 이 기조가 흔들리지만... 소수의 한계와 대중들에 대한 적개심... 불온 선전유인물로 인해 고개숙여야 했을 후배들을 위로하면서.... 한 학우였던 내가 한 학우라는 유인물에서 받아야 했을 좌절... 그건 기존 정치판 비판이 학내에서도 고스란히 이전된 암적 존재에 대한 적개심이였다. 이러한 과정을 숫하게 반복하였다. 그러나 우린 힘이 없이 없어서... 대중을 장악하지 못한 소수이기에 그렇다고 위로하며 추수렸었지... 이도 못내 우리를 위한 변명이었구나... 그래도 우린 이 변명의 위로에 힘을 빌어 살아가지 않았는가... 이 변명이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는 구나... 갈구에 대한 욕망의 끈 모질게도 길다.

 

새로운 시작과 다시 후배들을 추스려 보면서 함께가자 우리 이 길을....

그래 난 그랬었지... 그리고 학교를 옮겼지.... 후배의 배신에 참을 수 없는 치욕을 벗어나기위해... 새롭게 시작한 공간도 그리 소원하지 못하였구나... 나의 회피는 또다른 부피의 고통을  나에게 안겨주었지... 그래 회피는 시작을 원점으로 돌리는 놈이였다.

 

치열함과 몰락의 길로 접어드는 학생운동권의 무수한 담론에서 우린 원칙이라는 것을 우리스스로 정하여 지키고자 열망하였지.... 그러나 이러한 친구들은 이제 다 떠나고 친목회로 전락한 모습 속에서 분노가 소스라쳤었지.... 우리가 친목회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절망감이 나를 감싸않았다. 이들에게 원망도 해보았지만 이도 성치 않는구나... 우리는 89년 노동해방문학에서 추창한 합-비합동시건설론을 기치로 내걸었지만.... 운동의 고난의 서막을 우리 스스로가 파고 들어갔지.... 공개학정조 운동은 우리에게 대중성을 가져다 주기보다는 변유에서 말하는 정반합에 따른 양질의 전화법칙(아마도 좌파라고 자임하던 이들은 변유에서 말한 양질이 전화법칙에 근거하여 질적 확대를 통한 양적확대를 추구하였다. 이는 한사람의 열걸음보다 한사람의 열걸음이 낳다는 말에서 나타난다 생각한다. 이에 난 긴호흡 강한걸음이라는 말을 좋아했나 보다. 지금 양적확대는 이루어졌으나 질적확대는 매우 취약한 상태라 판단하고 있다.)을 우리 스스로 파기시켜 버린 무오류를 범하였지... 선배들은 비합이 힘들다며 스스로 자수하거나 이념을 폐기하며 자신의 역사도 부정하는 무오류를 범하였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이념이 난무하고... 과거가 부정되는 지금 우린 무엇을 갖고 투쟁하였던가.... 백무산 시인의 강령... 은 어찌보면 과거 우리 스스로가 선택하고 치열하게 살았던 모든 것의 부정은 운동의 부정이라는 질타를 이 시에서 하고 있다. 지식인들이 선엄적으로 선언한 이론적 한계가 과연 올바른지 행위인가... 난 아니라 생각한다. 우리의 투쟁과 사고, 이념은 아직도 틀림없다고 본다.

 

남한운동의 현실적 상황을 왜 외적존재에서 규정하고 이론적 위기로 치닫아야 한는가? 그리고 소련의 붕괴가 가지고온 방향에서 왜 맑스-레닌주의가 부정되어야 하는가? 일국적 사회주의 운동이 부정되는 지금... 우린 운동에 있어서 스스로 이념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난 신좌파의 상상력은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교조와 개량성이라 판단한다. 68혁명이 승리한 투쟁인가? 아니다 68혁명은 자본에 대한 유럽사회주의자의 투항을 통한 개량의 길이라 본다. 소련 처럼 혁명(러시아 혁명 1905년, 1917년 혁명은 아직도 생생하다.)을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유럽은 사회,정치,경제,문화에서 우위를 점하였다. 자본주의가 소련 붕괴로 스스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소련의 붕괴를 통해 자본주의 필연적 소멸의 시간을 연장하였을 뿐이라 생각한다.

 

우린 또다른 운동과 투쟁하여야 한다.

시민사회운동의 대두 그리고 부문운동의 대두.... 운동의 외적 영향력을 확대강화시켜나갔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과 사회를 바라보는 사고의 틀이 동일하다 볼 수 있는가? 파편화되고 분업화된 지금... 우리에겐 혁명의 주역이 누구냐는 반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맑스에 의해 생명력인 존재로 태동한 프롤레타리아(노동자계급)는 이제 낡은 것으로 치부되는 현실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맑스 당에서 주창되는 "당은 노동자계급의 무기이다."라는 말이 아직도 남한에서 유효한 단어인가... 남한의 진보정당은 아직 이길로 나서기에는 역부족이다. 이후 어찌될지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이를 주창하던 공산당은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스스로의 한계점이라 할 수 있다. 소련은 브레지네프에서 후르시초프에 이르는 코민포름에 대한 유럽사회주의자들의 태도는 이를 단적으로 들어내 준다. 특히 알튀세르는 코민포름에 대한 적개심은 그 단적인 예라 하겠다. 철학자로서의 삶은 존경받아야 하나 그가 맑시스트였다는 점에서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가 맑스주의자이기 이전 그는 혁명에 있어 역동성을 부정한 인물이라 나는 판단한다. 프랑스가 보여준 개량성을 우린 지켜봐야 한다. 프랑스 공산당의 몰락 그건 아마도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비판을 위한 비판을 행했던 유럽의 사회주의자들 또한 소련 붕괴의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90년대 초반부터 읽기 시작한 알튀세르, 그람시, 루카치, 푸코, 네그리, 가타리 등의 저서는 이념적으로 빈약한 우리에게 있어 모색이라는 주요한 화두는 던져 주었지만.... 더욱더 포스트주의적 경향성을 우리에게 던져주었다. 89년 소련과 동구사회주의권 붕괴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저해하는 오류성 또한 범하였다. 그렇다 나는 본다. 아직도 난 구좌파이기에.... 틀림없다. 노동자 중심성... 그 때 이야기되었던 PT독재, 무장혁명, 프롤레라리아트 당은 변함없다. 그러나 지금 운동지형에선 이를 비판하는 이가 많다. 그러나 레닌에 대한 부정은 이해한다. 그러나 레닌이 국가의 혁명, 무엇을 할 것인가, 제국주의론, 유물론과 경험비판이론 등에서 밝힌 실천활동 속에서 이끌어낸 투쟁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운동적 정체성에 대한 회손은 아닌가 반문하고 싶다.

 

나는 아직도 과거는 틀림없었다고 생각한다.

과거는 올바랐지만 소련붕괴라는 충격은 어찌보면 우리 스스로 미성숙한 사회주의자였기에 90년대 초중반부터 현재까지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았는지 판단이 든다. 자본의 악락함을 보라... 그리고 미국 제국주의자에 이어 유럽 제국주의를 보라... 그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어떠한 투쟁을 하였는가... 유고 티토니즘과 이를 뒤받침하는 노동자 자주관리론(이도 공장단위로 생산력 경쟁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다. 필연적으로 생산력이 높은 공장과 생산력이 낮은 공장에서 노동의 소외는 심각한 양태로 나타날 것이다.) 스페인 몬드라곤(공동체 운동은 일정 소수의 공동체는 유지하나 전지구적 공동체로 전환하기엔 역부족이다.) 등 자본주의를 혁명으로 투쟁하기보다는 순응하면서 개선하는 책을 썻다. 그들의 진보정당론은 외형적으로 확대되었지만 지금 유럽 공산당과 좌파정당의 몰락은 그들의 현주소가 아닐까....

 

그러나 시대를 이끌어 나아갈 거대흐름에 우린 제동걸 힘과 헤게모니를 놓쳤다.

진보정당운동, 시민사회의 대두, 민주노총 합법화 등 과거 우리가 주장하였던 이슈들이 현실화된 지금.... 우리는 무엇을 이제 기치로 내걸어야 하나.... 이보다 우린 무엇을 갖고 투쟁을 하여야 하는가? 모든 사안을 반자본주의라 규정하고 반자본적인 요소들만 갖고 투쟁을 이끌어내야 하는가? 그러나 우린 과거에 비해 많은 힘을 잃었다. 우리에겐 단일한 슬로건과 공동의 사고가 희미해졌다. 아니 정확히 사라졌다. 다양한 이슈는 대두되어지나 이 이슈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핵심적 논의는 묵살되어진다. 환경, 여성, 노동, 문화, 정보통신, 소수자운동에 있어서 근원적 문제는 국가를 유지하는 정권과 자본가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문에서 더이상 확장시키지 못하고 문제를 이슈에 한정짖고 있다. 역량이 부재하여서 그런지 투쟁이 정권과 자본가 투쟁으로 이끌어 내지 못한다. 이보다 더욱더 큰 문제는 우리 스스로 점점 자본이 쳐놓은 덫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그래서 난 칙칙하거나 암울하다. 그래도 희망은 아직 저버리진 않았다. 이러하기에 불안함과 초조함이 더해지나 보다.

 

이제는 희망을 말하고자 한다. 가장늦은 때가 가장빠른때라는 맨투맨 문장에서 나오는 글귀에 힘을 입어서....

 

나의 서둘지만 간략한 생각을 나열해 보았다. 정리를 해볼라고 노력하는데 잘 안된다. 인식이 부재하여서 그런가 보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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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축구

  • 등록일
    2004/09/10 19:42
  • 수정일
    2004/09/10 19:42

간만에 축구를 해보았다.

오산 다솜공부방 아이들과 오산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운동장을 뛰놀며 축구를 하였다.

얼마만에 공을 갖고 축구를 하였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즐겁게 축구를 하였다.

 

아이들과 운동장에 있는 축구 골대로 각각 편갈라 동네 축구를 하였다. 공을 중심으로 뛰어다니며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 수 있다는 날이 언제였던가 오산공부방에 와서야 이전 동네 축구를 하던 추억이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지금은 없어져 버린 동네 골목길... 정확히 말해 동네 골목길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빌라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골목길은 주차장이지 더이상 골목길이 아니다.

 

예전 골목길에 돌로 골대를 세워 아이들과 동네 축구를 매일 학교 파하면 하였다. 다른 놀이도 많았지만 전체가 뛰어가며 놀이하는 것이 흔치 않은 지라 축구만큼 함께 뛰어놀면서 즐기는 놀이는 적었다.

 

매일 동네 골목은 우리들가 갖고간 축구공으로 동네 아이들이 함께 뛰어노는 장이다.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다.

 

오늘 아이들과 축구경기를 하면서 지금 과거 동네아이들과 시끌벅쩍하게 축구공을 갖고 동네를 뛰어놀던 기억을 회상해 보았다.

 

우리동네에선 아이들이 축구공을 갖고 노는 것은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학교 운동장에서 농구공을 갖고 노는 이는 종종 눈에 뛴다.

 

골목길을 가로 지르면서 함께 뛰어노는 놀이가 사라진 지금.... 그때가 그립다.

그리고 무수히 많았던 놀이들을 지금 아이들은 알고 있을까.

학원과 학교를 오가며 교육 전사로 거듭나는 아이들이 오늘따라 더 처량하게 보인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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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이주노동자를 만나다.

  • 등록일
    2004/09/09 15:10
  • 수정일
    2004/09/09 15:10

어제 장창원 목사님과 진실게임 비스무리한 것을 해보았습니다.

4년이라는 인연을 이어오면서 장창원 목사님이 살아온 날들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해보지 못한 저로서는 오산에 내려와 장목사님의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인생의 여로를 알 수 있었습니다.

 

장목사님의 인생은 참 굵고 멋졌습니다.

첫사랑에 대한 애절함, 대학교때의 질풍노도 시기, 목사가 되기까지의 과정, 목사가 되고 난 후 장목사님이 삶. 가족에 대해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꼬박 새벽까지 이어져온 이 이야기는 내가 살아가는데 좌우명으로 생각하고 나 또한 장목사님 처럼 노동자들에 대한 신심어린 마음을 갖고 살아가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장목사님 이야기중 첫사랑에 대한 애절함.... 그 애절함은 장목사님이 철학적 신념을 쌓는 주요한 도구가 되었고, 고려대 1978년 9월 13일 그 당시 1학년이 었던 장목사님의 학내 민주화 투쟁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참 기록해야할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침 6시 30분까지 이런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저도 간헐적으로 저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 해 보았지만, 장목사님처럼 인생을 정리하지 못한 터라 부분적으로 내가 살아온 과정을 뜨문뜨문 이야기 하였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서울 유학,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학생운동, 현재까지 전 정리한게 별로 없어 이야기 할게 없습니다.

 

아침 어김없이 놀이방 아이들을 데리러 아침 7시 30분부터 장목사님의 하루는 시작 되었습니다. 장목사님은 아무리 늦게 자더라고 아침 7시 30분부터 이주노동자 아이들과 만남을 통하여 하루를 어김없이 시작합니다. 필리핀 이주노동자 자제, 방글라데시 모자 가정인 이주노동자 자제,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 자제를 데리고 한신대 근처인 안녕지역을 돌며 이주노동자들과의 인사를 시작으로 힘찬 하루를 시작합니다. 저 또한 장목사님을 따라 다녔던 터이라 많은 이주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참 그들과 허물이 없이 지내는 장목사님의 넉넉함 마음이 부러웠다.

 

아이들의 해맑은 일터로 나가는 이주노동자의 자식 사랑에 대한 마음이 짠하게 전달 될 수 있었습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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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다솜 공부방은 기차길 옆 공부방

  • 등록일
    2004/09/09 14:46
  • 수정일
    2004/09/09 14:46

인천 만석동에 위치한 오래된 기차길 옆 공부방.... 푸른영상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제가 인천에 있을때 인천 인권영화제에 관여를 좀 해서 1999년도 인천 인권영화제에서 푸른영상에서 만든 인천 만석동... 대우중공업과 만석동 부두를 오가는 기찻길 옆 공부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의 일상 그리고 그 곳 사람들의 번뇌를 뼈속 깊이 각인할 수 있었던 다큐멘터리 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상근하였던 사무실이 인천 송림동이라 그리고 멀지 않아 기차길옆 공부방을 가보았답니다.)와 흡사한 오산 다솜공부방(놀이방)은 저마다 사연을 간직한 이들의 보금자리입니다. 

 

오산 다솜공부방에 오는 아이들의 사연을 들어보면 저마다 참 어려운 문제를 극복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됩니다. 저마다 가슴 속 멍을 갖고 사는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 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방 선생님 눈에 비친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선생님은 이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때론 기뻐하고 때론 슬퍼하며 동고동락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마음이야 다 한결 같지만 아이들의 장래 현 아이들이 밝게 자라지 못하는 모습에서 하루하루 번뇌를 쌓아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음이 짠합니다. 이 곳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자신의 목표 속에 삶을 영위하여야 하나 아이들에겐 하루하루가 전쟁입니다.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습니다. 늘 불안과 초조 그리고 자신앞에 놓은 거대한 암초에 좌초하며 삶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마음이 아픕니다. 이 곳 아이들의 사연을 모아 놓으면 아마 눈물로 강과 바다를 이룰 것입니다.



나란 놈에게 되물어 보았습니다. 넌 참 행복한 놈이구나.... 무엇이 부족하여 그리 번뇌하냐... 행복에 겨워 투정부리는 것은 아닌지... 이런저런 잡생각이 듭디다. 그리고 신영복 선생의 글귀가 떠오르면서 뇌를 강타 하더군요..."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오산 다솜공부방은 내가 살아가면서 잊고 지낸 사람들... 늘 아래를 보면서 살겠노라 생각하였건만 난 그러질 못하였음을 오산 다솜공부방에 와서 느끼꼈고, 내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어디라고 숨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다솜 공부방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아이들 하나하나의 사연을 들으면서 세상에 아직도 이리 어려운 사람들이 우리 주변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선생님의 아이들에 대한 내리사랑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 걱정... 아이들에 대한 작지만 소박한 소망을 들으면서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가슴을 줘 짜더군요...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이야기 입니다. 술을 먹고 듣는데... 술 잔이 왜이리도 투명한지... 눈가에 이슬이 송글송글 맺더군요...

 

아~~ 참 세상이리도 아름다운데 아이들에게 비친 세상은 어떨까... 다들 외적으로는 강한척 하지만 부모의 사랑이 부족해 늘 공부방 선생님에게 응석을 부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아이들이 얼마나 사랑에 목말라 했으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공부방 선생님에게 아이를 부탁하고 떠단 아버지가 내가 이 곳에 머물고 있을때 아이를 찾아 왔습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사준 크레파스, 공책, 스케치북을 들어 보이며 자랑하는 모습에서 아이가 얼마나 다른 아이들에게 이토록 자랑하고 싶었을까?  생각이 되더군요. 또 아버지와 이별은 하지만... 아버지가 찾아와 아이에게 사준 선물은 아마도 이 아이들에겐 희망을 보따리였을 것입니다. 그날 그 아이는 아마도 천국행 기차표를 받았을 기분이겠지요... 천국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세상 최고의 것을 지칭하는 단어로 손색이 없다고 봅니다.

 

어제는 한 아이가 이혼 한 어머니를 만났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아이와의 약손인 롤러브레이드를 사주었다 봅니다. 이 곳 공부방엔 롤러브레이드를 신고 올 수가 없지만 그 날만은 그 아이가 아이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시간을 공부방 선생님이 특별히 봐줘서 아이의 해맑은 미소를 볼 수 있었습니다. 참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살아야 할 아이들이 어른들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갖고 하루하루 산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엇하나 해줄 수 없고, 참 답답함만 느끼며 한숨을 휴~~~~~~~~~쉬어 보았답니다.

신이 있다면 왜 이렇게 불공평한 세상을 만들었는지 따져보고 싶더군요.

 

이 곳 아이들은 우리가 쉽게 결손가정이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렇지 않고 부모의 무관심으로 방치된 아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이 결손가정입니다. 부모의 이혼, 아버지의 알콜중독, 할머니와 사는 아이들 등 다 저마다 아픈 사연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한 아이들입니다. 이 곳 아이들은 다들 한가지씩의 가슴 아픈 사연을 치유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학교, 그 아이를 둘러싼 환경은 그 아이들이 가슴 아픈 사연을 딛고 잃어서기엔 사회의 시선은 따스하지 않습니다. 이 아이들에 대한 편견 또한 이 아이들이 가슴속 깊이 응어리진 멍을 치유하기 힘들게 만듭니다.

 

언론과 매스컴에서 연말만 되면 불우이웃에게 따스한 사랑을 이라는 연례행사를 일상행사로 전환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이 아이들이 밝게 자신의 삶을 가꾸어 나가기를 바램해 봅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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