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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12/16
    [한겨레펌]결혼제국
    내맴
  2. 2008/12/15
    [일다펌]“감정을 들여다본 적이 있나요” (2)
    내맴
  3. 2008/12/07
    너무 힘들다는 얘기를
    내맴
  4. 2008/12/02
    [일다펌]관계
    내맴
  5. 2008/11/21
    가야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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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8/11/19
    [펌]매우 좋은 글
    내맴
  7. 2008/10/27
    [일다펌]관계, 우울증, 반추
    내맴
  8. 2008/10/22
    이하나
    내맴
  9. 2008/07/30
    [일다펌]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소설
    내맴
  10. 2008/07/30
    [일다펌]어김없이 욱신대는 마음의 흉터
    내맴

[한겨레펌]결혼제국

여성들이여, 두려워 말고 혼자 살아봐! 김일주 기자 » 〈결혼제국〉 〈결혼제국〉 우에노 지즈코·노부타 사요코 지음, 정선철 옮김/이매진·1만4000원 일본 페미니즘 대표 논객 2인 결혼대기조·애인예비군 내몰린 비혼여성 불리한 현실 톺아보기 결혼 대기조, 애인 예비군. 일본의 여성주의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가 <결혼제국>에서 점점 늘고 있는 일본의 30대 비혼 여성들을 묘사한 말이다. “남자가 나타나면 제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몰라요”라며 인생 설계를 미뤄 ‘결혼 대기조’이고, 만날 만한 남자는 이미 결혼해버려 실제로 불륜 시장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애인 예비군’이라는 것이다. 1970년대부터 전세계적으로 진행된 성혁명으로 ‘성·결혼·사랑’이라는 낭만적 사랑의 삼위일체가 붕괴되며 흔들리는 결혼제도를 똑똑히 접한 이들은 비혼·저출산 현상을 처음 겪은 세대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이들은 왜 텅 빈 제도를 부여잡고 ‘결혼제국의 난민’이 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가? <결혼제국>은 30대 여성에 초점을 맞춰 일본 여성들의 현실을 날카롭게 짚어낸 대담집이다. 일본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논객인 우에노 교수와 하라주쿠 상담소 소장으로 현장에서 다양한 문제를 지닌 여성들을 두루 상담해 온 노부타 사요코의 만남은 철저히 현실에 발붙인 사회학적 성찰을 빚어내며 문제 해결의 통찰력을 제시한다. 이들의 수다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 이유는 그들이 처한 현실과 한국 여성들의 현실이 분명 흡사하기 때문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비혼자들이 살아가기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사회다. 예순인 지금까지 혼자 살고 있는 우에노 교수는 말한다. “여성은 독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지나칠 정도로 제재를 받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정체성 면에서도. 결혼제도에 들어가든 들어가지 않든, 특정한 남자를 만나든 만나지 않든 간에, 결국은 가부장제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됩니다. 여자들은 지금까지 독신 여성들이 받아온 제재를 줄곧 봐왔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우르르 눈사태처럼 결혼에 몰려드는 거죠.” » 여성들이여, 두려워 말고 혼자 살아봐! 그는 일본의 비혼을 ‘모라토리엄 비혼’이라고 일컫는다. 일본의 30대 여성들은 ‘포스트 남녀고용기회균등법 세대’로, 여성도 정규직으로 일하며 경제력을 확보하기 시작한 세대다. 하지만 경제불황이 시작된 뒤 여성 정규직이 사라져버리고 대부분의 여성들이 파견직이나 파트타임 등 비정규직으로 내몰렸다. 이들은 고도경제성장기의 단물을 빨아먹은 마지막 세대인 부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따라서 딸의 부양을 바라는 부모와 때가 되어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줄 누군가를 막연히 기다리며 “지금의 인생은 일시적”이라 믿는 딸이 공생관계를 이룬다. 우에노 교수는 미숙련 노동력인 이들이 10년 뒤에는 최하위 계층으로 고정될 가능성을 경고한다. 그는 남성과 여성의 ‘젠더 병’도 지적한다. ‘남자에게 선택받지 않아도 나는 나’라는 한마디가 여자들 입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고, “남자들은 소유하는 것 말고는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고, 여자들은 소유당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우에노 교수가 “특정의 유일한 이성에게 자기 신체의 성적 사용권을 평생에 걸쳐 배타적으로 양도하는 계약”이라고 말하는 결혼 계약은 이런 젠더 병에도 뿌리를 대고 있다. 노부타 소장은 30대, 아니 모든 세대의 여성들이 시선의 방향을 바꿔주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자기 완결’을 이루지 못한 자신을 타박하며 “자기의 ‘마음’만 쳐다보고, ‘치유’라는 이상한 말만 외쳐대는 것은, 일시적인 위안을 위해 양배추의 껍질을 벗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출구가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나를 찾거나, 자신을 찾는 여행을 떠나거나, 지금 이 상태의 자기를 좋아하고자 하거나, 이런 나라도 치유받고 싶다는 에너지와 시간이 있다면, 시험삼아 우에노 지즈코의 책을 한 권 읽어봤으면 한다.” 우에노 교수는 이미 붕괴된 낭만적 사랑의 이데올로기 위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결혼제국’을 넘어 ‘혈연과 가족을 초월한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탐색해보자고 제안한다. “하나의 일이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시작됐다고 한다면, 어느 시점에서 끝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출산이 문제라면 생산연령 인구의 남녀가 혼외 자녀의 육아 비용을 나눠 부담해 싱글맘이 안심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정책을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다. “초고령화 사회는 머지않아 찾아올 것이고, 빠르든 늦든 간에, 평균 수명이 남성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 여성은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모두 독신”이 되기 때문에 비혼자로 홀로 남는 걸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는 덧붙인다. “한번 (혼자) 살아봐! 내 쪽이 선배야.” 김일주 기자 pear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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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펌]“감정을 들여다본 적이 있나요”

“감정을 들여다본 적이 있나요”
지혜가 되는 감정, 색안경이 되는 감정
 
[여성주의 저널 일다] 최현정
삶은 감정 경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강렬한 감정이 몰아칠 때도 있고, 미처 인식하지 못한 사이 떠오르고 사라지는 감정들도 있습니다. 우린 매 순간 생각과 감정과 감각에 둘러싸여 지냅니다. 단지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요. 다만 우리가 특히 주목하게 된 어떤 감정은 하나의 의미가 되어 우리 기억에 남습니다.
 
의미 있는 우리 감정 중에는 희락이 있는가 하면 비애가 있지요. 물론 이런 고상한 감정만 있는 것도 아니지요. 분노와 불안, 두려움, 죄책감, 수치심처럼 숨기고 싶은 감정들도 있습니다. 열정과 의욕, 반대로 무기력과 같은 에너지 형태로 다가오는 감정들도 있습니다. 어찌됐건, 이름 지을 수 있는 무수한 감정들은 다 그 만한 이유를 가지고 시작되고 무언가에 영향을 받아 나타납니다.
 
이렇게 매일의 동반자라 할 수 있는 감정을 혹시 지극히 들여다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우린 감정을 늘 느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통 감정이라 하면 익숙합니다. 그런데 감정을 제대로 느끼는가는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감정을 느끼고 인식할 때도 있지만, 느껴지기는 하는데도 무슨 감정인지 잘 모를 때가 있고, 감정이 있는데도 인식조차 못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감정이 어디서 연유하고 무엇을 느끼는지도 모른 채 감정을 없애려 하는데 더 능합니다. 우리에게 인식되지 못하고 이렇게 흩어져버린 감정들은 통증과 긴장으로 몸에 남아 우리를 괴롭힐 때도 있고, 언제든 불쑥 튀어올라 마음을 어지럽히기도 합니다.
 
감정을 제대로 느끼는 방법
 
▲ [성장정원]    © 일러스트-정은
‘감정에 휘둘린다’, ‘감정적이다’는 말이 있지요. 심리학에서 본다면 감정에 압도된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하고 감정에 치우쳐 사태를 판단하거나 슬기로운 해결책을 모색하지 못하는 경우이겠지요. 그런데 감정 그 자체에 이러한 부정적 속성이 담겨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 보지 않은 결과입니다. 사실 감정은 세상을 좀더 명료하게 다시 바라보고, 스스로의 욕구를 다시 인식하라는 하나의 신호이자 안내자입니다.

 
감정이 느껴지면 대체로 우리는 억누르거나, 피하거나, 아니라고 부인하거나, 무분별하게 폭발시킬 줄은 알지만, 가만히 쭉 감정을 느끼는 데는 익숙지 않지요. 안내자를 잃은 마음은 길을 잃고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지요. 감정이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건네는지, 이면에 숨겨진 우리의 욕구가 무엇인지 알아차리려면 감정을 제대로 느껴야 합니다.
 
제대로 느낀다 함은 마음을 막거나 판단하지 말고 그저 쭉 느끼라는 겁니다. 감정은 몸의 감각을 동반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데리고 나타납니다. 이 감각과 생각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은 채 감정을 허용해주는 것이 ‘쭉 느끼는’ 방법입니다. 고요한 태풍의 눈에 서서 소용돌이를 바라본다고 할까요.
 
판단하지 않고 그저 끄덕끄덕하면서 ‘그렇구나’ 하면서 모든 감각을 느끼고 생각을 지켜보는 경험은 아주 소중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새 소용돌이는 가라앉고 지혜로운 눈이 하나 생깁니다. 그 눈은 내 진실한 모습을 보고 있고, 세상의 진실된 모습을 봅니다.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한 그대로 진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스스로의 감정에 끄덕끄덕해주기란 몹시도 힘든 일입니다. 감정을 중시 여기지 않는 환경에서 자라는 경우 이러한 어려움은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리네한이라는 심리학자는 ‘정서를 무시하는 환경’이 심리적 역량 발달을 저해한다고 말합니다. 심리적 역량이란 스트레스가 닥칠 때 이에 압도되지 않은 채 감정을 잘 조절하고 지혜롭게 상황을 해결해가는 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소년이 울고 있으면 ‘남자답지 못하니 뚝 그치라’고 다그칠 때가 많지요. 애정을 얻고자 하는 남아에게 ‘마마보이’라는 굴레를 씌우기도 합니다. 폭력을 경험한 소녀에게 ‘창피한 일’이라고 망각을 지시하는 일도 너무 흔합니다. 이는 감정이 용납되지 않는 ‘정서무시환경’의 모습입니다. 다양한 감정과 욕구를 무시당한 채 억눌리기만 하는 십대 아이들이 퉁명스럽고 때로는 과격한 모습으로 변하는 것도 ‘정서무시환경’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감정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감정 자체를 탓하게 하고 ‘감정이란 붙들어 매야 할 것’이라고 치부해버리면, 사람은 점차 자기 감정을 들여다 보지 않게 됩니다. 그럼 어느 새 감정은 보이지 않는 색안경이 되어 우리 본연의 지혜로운 눈을 가리웁니다. 감정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정서를 무시하는 사회에 억눌린 사람들
 
삶을 파괴한 고통을 인정받지 못할 때에도 감정은 색안경이 됩니다. 1970-1980년대 정권 정당화를 위해서 무고한 사람을 간첩이라 몰고 고문을 자행하며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사건들이 무수했습니다. 지금 30년이 다 되도록 이 분통함을 해소할 길이 없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이웃은 물론 친지들 마저 무죄를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고 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아무리 ‘아니야’하고 말해도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던 사무친 경험은 이제 원통함과 분노가 되어 있었습니다. 인정받지 못한 분노는 유령처럼 떠돌면서 가족에게 표출되기도 했지요. 어떤 분은 가족이 아주 사소한 일로 자기 말에 반대하기만 해도 솟구치는 분노를 억제하기 힘들어 폭력적인 사람으로 변하고 만다고 했습니다. 사회가 개인의 정당한 분노를 배척한 결과입니다.
 
분노는 이분의 건강한 욕구입니다. 결백을 증명 받고 삶이 침해 당했다고 인정받고자 하는 소망은 삶의 의지이자 당연한 바람입니다. 그러나 이를 존중하지 않고 배척하는 환경에서 분노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가족을 향해 어긋납니다. 이분에게는 ‘건강하지 못하다’는 또 다른 오명이 씌워집니다. 사회가 총체적으로 ‘정서무시환경’이 되는 셈입니다.
 
정서를 무시하는 사회에서 힘을 되찾는 열쇠는 공감하는 사람들에게 쥐어져 있다고 봅니다. 누구든 상처를 씻고자 한다면 공감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또 공감은 시도하는 자에게도 더 폭넓은 세상을 선사합니다.
 
코훗이라는 심리학자는 한 개인의 진실한 내면과 만나기 위해서는 공감이 필수적이라고 말했죠. 공감 받은 자는 더 진솔하게 마음을 열 수 있고, 공감하는 자는 경험의 폭이 확장됩니다. 서로 진솔해질 수 있다면 단절된 거리는 그만큼 줄어듭니다. 그러니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기꺼이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합니다. 이해가 충분히 되었다면 우리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터입니다.
 
공감은 감정이입이나 투사와는 다르다
 
그런데 마음 이야기에서는 매번 공감하라는 결론을 내리지만 한번도 어떻게 공감하는가를 이야기해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공감이란 과연 뭘까요. 공감은 매우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힘을 필요로 합니다. 그저 단지 같이 느낀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최대한 온전히 이해하고 인정하고자 노력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잘 듣고, 잘 질문하는 것도 필요하지요.
 
원래 사람에게는 상대방의 감정 경험을 마치 내 것처럼 느끼는 능력이 있습니다. 실제로 타인의 감정 표현을 볼 때와, 실제로 내가 감정을 느낄 때에는 공통된 신경기전이 작동한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다쳐서 아파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 있다면, 실제로 우리가 직접 다쳤을 때 통증을 느끼는 뇌 부위가 활성화된다고 합니다. 내가 직접 통증을 느낄 때나 타인의 통증을 보고 있을 때에 같은 뇌의 네트워크가 작동된다는 말이지요. 어찌 보면 공감이란 생물학적으로 부여된 능력이자 인간으로서의 의무라 할 수 있을 란지요.
 
그렇지만 감각을 같이 느낀다 해서 공감이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자기만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타인이 되어보고 경험을 떠올려볼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이는 단지 시작점에 불과합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공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와 타인을 혼동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공감은 감정이입이나 동감과는 다릅니다. 타인의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입각해서 위로를 전달하려 할 수 있겠으나, 실은 내가 가진 내 감정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두 사람이 있을 때 어떤 감정이 전해져 온다면, 이 감정을 해석할 때 그것이 내 생각에 국한된 문제는 아닌지 잘 변별해야 합니다. 감정에 대한 나의 해석일 뿐인데도 상대가 그럴 것이라고 단정하는 경우를 심리학에서는 ‘투사’라고 합니다.
 
서로의 경계를 잘 유지하면서 공감해주기
 
삶을 파괴당한 경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정당한 욕구로 분노를 주로 경험하는 분들도 있지만,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주로 경험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가족에게 미안함을 느끼면서 원래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것도 이분의 건강한 의지이고, 그러한 와중에 관계에서 미안함을 경험한다는 것은 또 엄청난 능력입니다.
 
그런데 만약, 분노가 보다 타당하다고 생각하면서 미안함을 주로 느끼는 분에게 ‘당신에게는 분명 분노가 있다. 미안함은 잘못된 감정이다’고 한다면 이는 자기 안의 분노를 투사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미안함은 약한 감정이라는 선입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투사는 오히려 이 분의 건강한 의지를 꺾고 자기의 강인함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투사는 자기와 타인을 구분 짓지 못한 결과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공감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대부분의 관계에서 우리는 두 사람 사이의 경계를 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고 무엇은 상대에게서 오는 것인지 잘 구별할 줄 압니다. 그런데 경계가 섞여 버리면, 내 문제가 곧 상대의 문제가 되어 우리는 상대를 진실되게 바라보지 못하고 내 감정에 휩싸여 상대를 오해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래서 공감을 잘 하려면 자 나신을 아는 것이 우선입니다. 무엇이 내 마음인지 잘 변별할 수 있어야 나도 색안경을 걷어내고 세상과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을 잘 알려면 나에게도 공감이 필요하지요. 공감 받아야 내 진솔한 마음을 들여다 볼 힘이 생기니까요.
 
공감하는 자의 사려 깊은 한 마디는 상대방 마음 안에 메아리가 됩니다. 그래서 앞으로 그 사람이 다시 힘겨워질 때 마다 마음 속에 울려 큰 힘이 됩니다. 그 힘으로 사람은 상처를 버팁니다. 컨버그라는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상실을 겪을 때, 마음 안에 자리 잡힌 긍정적 인간관계 상에 의지하면서 자기 힘을 회복해간다고 합니다. 이것이 곧 건강한 애도라고 했습니다. 상실을 애도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공감하는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긍정적인 인간관계 상마저 파괴당했다면 새로운 동반자가 더욱 절실할 것입니다.
 
공감은 마음의 힘을 강화해주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원천입니다. 그래서 마음 이야기는 늘 공감을 결론으로 끝맺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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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힘들다는 얘기를

쓰고 싶었다. 싸이에. 근데 비번이 왜 안 맞는거야!? 해킹 당했나?-_- 장녀 역할이 너무 힘들어서 글 좀 갈기려고 그랬더니.. 엉엉. 별 게 다 나를 괴롭힌다. 난 스물일곱이고, 여자일 뿐이고. 왜케 사는 게 이렇지? 망해가는 운동판 속에서 망해가는 울집을 지키기 위해 아둥바둥 몸이 부서져라 살고 있다 우리 집에는 돈 버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 대학원 간 동생 2년 전에 퇴직한 아빠 그리고 엄마 2년 전에 받은 퇴직금 다 까먹으면 아마 우리집은 망하겠지. 4인 가족.. 돈 나가는 게 너무 무섭다.. 장녀일 뿐이고 여자일 뿐이고 여자라서 당해야 하는 고통들.. 울고 싶다. 근데 사실 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앞으로. 앞으로. 그 누군가처럼 그 뒈질 놈처럼 뒤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가고 있다. 이러다 절벽에서 뚝 떨어진다고 할 지라도. 고통을 딛고 다시 담담해지고 있다. 니가 가지 못한 그 길을, 나는 갈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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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펌]관계

사랑은 왜 이렇게 아픈 것일까
상처가 맞물리는 ‘사랑의 화학반응’ 예방할 수 있어
 
[여성주의 저널 일다] 최현정
사랑은 참 힘든 일입니다. 연애 말입니다. 하지만 사랑만큼의 매혹이 또 없는지라 우리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사랑에 뛰어듭니다. 주체할 수 없이 빠져들기도 하지요. 많은 사람들은 사랑을 기다리거나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의 유통기한에 관한 뇌 연구결과를 궁금해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사랑했던 사실을 망각한 채 사랑을 의심합니다.
 
사랑, 사랑, 누가 말했던가요. 설탕과 크림을 잔뜩 부은 인스턴트 커피 맛이 곧 사랑이라 믿는 것은 허황이겠지요. 어쩌면 직접 심혈을 기울여 뽑은 달고 씁쓸하면서도 시큼한 커피 맛이 연애의 맛에 더 가깝겠지요. 이 오묘한 맛은 사람을 사로잡기 충분한지라, 어떤 심리학자는 ‘사랑중독’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사랑이란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쩌면 우리는 사랑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중독되어 있을 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릭슨이라는 심리학자는 인간성장의 여덟 단계를 설명하면서 20대와 30대는 친밀감을 추구하고 의미 있는 관계를 찾는 과제를 가진다고 했습니다. 물론 연애에만 국한된 친밀감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요. 사람 만나기를 두려워하든, 사람이 싫어 마음을 꽁꽁 걸어 잠갔던 간에, 사람들의 아주 깊은 내면에는 관계에 관한 갖가지 갈등과 욕구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과 만나고 헤어지기까지의 긴 인생 동안 의미 있는 누군가가 되고 싶으며, 의미 있는 누군가를 필요로 합니다. 연애도 그 과정 중 하나이겠지요.
 
연애를 하려 한다면 관계를 맺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연애도 관계인데, 관계 중에서도 아주 섬세한 관계로 꼽히지요. 연애할 때 오고 가는 사랑이란 아주 매력적이고 화려한 감정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는 때로 사랑에 요구되는 역량을 기르려는 연습을 하기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매력에 치중합니다. 또한 솔직한 모습이 탄로났다고 여겨질 때에는 도망가거나 감추려 하면서 되려 사랑을 잃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을 잃으면 마음이 얼마나 아픕니까.
 
괴로움의 대상은 과연 무엇인가: 멜랑과 콜리의 이야기
 
심리학에서는 관계를 얘기할 때, 어린 시절에 관계에 대한 안정적인 표상이 자리 잡혔는가를 묻습니다. 관계표상이란 무얼까요? 과거에 중요한 사람들과 경험했던 관계의 기억이 하나의 상으로서 마음 안에 자리잡은 것입니다. 이것은 관계와 관련된 기능을 합니다.
 
관계표상은 관계 안에서 유발되는 다양한 감정의 기원이 됩니다. 우리는 이 관계표상에 근거하여 관계가 어떨 것이라고 예상하며, 만약 관계 안에서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역시 관계표상에 입각하여 상황을 해석하고 대처하게 됩니다.
 
서로 바빠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연인이 있습니다. 멜랑은 콜리와 드디어 만날 날을 약속하면서 전화를 하는데, 이놈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일이 늦게 끝날 것 같아”라고 말합니다. 멜랑은 갑자기 끝없는 절망감에 휩싸입니다. 콜리가 자기를 보고 싶지 않아서 약속을 미룬다고 생각하고, 만나지 못한 사이 사랑이 식어버린 것은 아닌가 걱정합니다.
 
멜랑에게는 관계에서 버려지는데 대한 불안감이 심했기 때문에, 사소한 미적거림이라도 거절처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멜랑은 자기는 늘 거절당하고 버려지고 사랑 받을 만한 구석이 없다고 느끼고 있었으며, 그의 관계표상 안에서 상대방은 차갑고, 거부적이며, 그에게 싫증을 느끼는 누군가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식었다고 믿고, 이미 콜리에게는 다른 멋진 누군가가 생겼을지 모른다는 상상에 이르면서, 관계는 이제 끝났다는 확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렇게 관계표상이 불안정하면 관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힘들어집니다. 콜리는 콜리라는 개인 그 자체가 아닌, 멜랑이 가진 관계표상의 반영물이 됩니다.
 
과거에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던 양육자나 매몰차게 떠나간 옛 연인은 가슴 시린 대상표상으로 남아 훗날 사랑하는 역량에 영향을 미칩니다. 멜랑은 집이 어려워 부모님이 밤낮으로 일을 해야 했습니다. 멜랑은 어린 시절 학예발표회 때 끝내 오지 않았던 부모님을 애타게 기다리던 기억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멜랑은 집에서는 어린 동생을 돌보아야 했으며, 밤늦게 부모님이 돌아오면 혹여 피곤하시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아이로서 당연한 욕구마저 숨겨야 했습니다. “늦을 것 같다”는 콜리의 말에, 멜랑은 부모님이 온다 해놓고는 오지 않았던 발표회가 떠올랐던 겁니다.
 
멜랑은 콜리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그럼 만나지 말자”고 전합니다. 멜랑은 아마도 이렇게 버림받는 느낌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 욕구를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항상 차가운 사람으로 돌변하면서 상황을 피하고자 했을 겁니다. 마치 콜리가 곧 떠나버리기라도 하듯이, 멜랑은 선수를 쳐 자기가 먼저 떠났다는 식으로 대꾸하면서 버림받는 두려움을 방지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콜리는 일이 늦게 끝나 멜랑을 일찍 볼 수 없다는 마음에 애가 탔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만나지 말자’는 멜랑의 차가운 태도에 화가 솟구칩니다. 콜리의 어머니는 아프고 우울했었고, 엄마를 원하는 콜리에게 늘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타이르곤 했습니다. 콜리는 필요했던 자리에 엄마가 없었던 사실에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엄마가 갑자기 죽어버릴 까봐 두려웠습니다. 멜랑의 차가운 목소리를 듣자마자, 콜리는 엄마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가 돌아옴을 느낍니다. 콜리는 자기의 애타는 마음을 몰라주는 멜랑에게 화가 나 “그럼 관두자”고 말하곤 전화를 끊습니다.
 
불안과 왜곡, 반복되는 연애관계의 패턴
 
관계는 왜곡되고 과격해지며,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여 불안정해집니다. 이 관계 안에서 연인은 온전한 상대로 존재하지 않고, 다만 나의 관계표상으로서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만약 사랑 때문에 괴롭다면, 괴로움의 대상이 무엇인지 곰곰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괴로움을 유발하는 사람이 우리가 사랑하는 상대방인지, 혹은 나의 대상표상인지 말입니다. 멜랑과 콜리의 상황은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곧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일어난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는 손을 쓸 도리가 없습니다. 멜랑은 집안형편이 어려웠고, 콜리의 어머니는 아팠습니다. 그 대신 우리의 가슴 아픈 기억을 알아차리고, 그것 때문에 힘들었던 나 자신을 위로해줄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에 대처했던 우리의 습관을 바꿈으로써 훗날로 고통이 번지지 않게 막을 수 있습니다.
 
영이라는 심리학자는 우리 각자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고통을 반복하는 삶의 패턴을 살아가게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각자 나름대로의 대처법을 만들었는데, 도리어 그 대처법이 고통을 영속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 먼저 차갑게 돌아섰던 멜랑의 대처법처럼 말입니다. 멜랑은 늘 관계에서 먼저 돌아섰기 때문에 멜랑이 그토록 바라던 오래된 따뜻한 관계는 지켜나가기 힘들지 모릅니다.
 
또 콜리는 자기 엄마 같은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려 늘 엄마 같은 사람을 만났고, 엄마처럼 차가운 사람에게 상처를 입어 화를 낸 채 관계를 끝맺곤 했습니다. 이렇게 연애관계에서 패턴이 반복되고 서로 상처와 고통이 맞물리는 사람끼리 만나게 되는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사랑의 화학반응’이라고 말하지요.
 
상처를 방어하기보다 진실한 욕구를 표현하는 노력
 
영은 심리치료를 통해서 자기 과거를 탐색하고 애도하며, 건강하지 못했던 대처법을 인식하고 건강한 대처법을 익히면서 고통스러운 화학반응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멜랑은 아무도 오지 않았던 발표회 기억을 슬퍼하고, 자기 욕구를 내색하지 못한 채 늘 어른스럽게 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을 애도합니다. 그리고 차갑게 돌아서기 보다는 “네가 너무나 보고 싶으니 늦게라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콜리는 엄마가 언제 떠날지 몰라 두려워 화도 못 냈던 어린 시절을 위로 받습니다. 그래서 “일이 늦게 끝나 너를 먼저 보지 못해 너무나 아쉽다”고 말합니다.
 
그럼 멜랑은 있지도 않은 콜리의 새로운 상대를 상상하며 질투하고 괴로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실은 질투하는 그 대상도 멜랑 자신이 꿈꾸고 소망하는 자기 모습, 즉 버림받지 않을 정도로 멋진 누군가라는 상상의 대상이겠지요. 콜리는 자기가 화를 냈기 때문에 결국 멜랑이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어린 시절을 위로해줄 수 있다면 더 좋은 일이 없겠지요.
 
사람은 두려움이 생기면 자기를 방어하려고 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표현하기보다는 무섭게 화내는 모습을 내보이게 됩니다. 바르데츠키라는 심리학자는 화란 곧 나약하고 상처받은 자기의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상처를 방어하려고 갑옷을 두르기보다는 내 안의 진실한 욕구를 가려내고 이를 건강하게 표현하는 게 훨씬 좋은 결과를 선사합니다. 마음을 들여다 보면 어떤 욕구는 상처를 방어하고 분노를 표출하고자 하는 욕구이고, 어떤 욕구는 사랑과 따뜻함을 소망하는 진실된 욕구입니다. 진실된 욕구를 가려내어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처를 방어하고자 하는 욕구를 표출하게 되면 상대방에게도 상처가 되니까요. 하지만 진실된 욕구 표현에는 상대의 상처도 어루만지는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사랑은 힘겨울 수밖에 없나 봅니다. 성숙한 마음을 요구하는 일이고요. 하지만 사랑은 하면 할수록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과 오래도록 사랑해도 좋지만, 만약 헤어졌다면 그 다음에는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게 분명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내가 더 탄탄해졌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사랑으로 아팠음에도 다시 사랑하려 하는 나 자신에게 격려를 전해주십시오.
 
사랑하는 괴로움에 시달리던 저에게 누군가가 따뜻하게 전한 말을 나누고 싶습니다. 연애하는 두 사람은 험난한 계곡 위로 걸쳐진 다리의 양쪽기둥과 같은 존재라고 그러시더군요. 만약 한쪽 기둥이 출렁거릴 때 다른 쪽 기둥마저 덩달아 출렁댄다면 다리는 겉잡을 수 없이 위험해집니다. 하지만 한쪽이 출렁댈 때 다른 쪽 기둥이 탄탄하게 버텨준다면 출렁임은 곧 멈추겠지요.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에 흔들리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곁에서 탄탄하게 상대를 지켜주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2008/12/01 [10:42] ⓒ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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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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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매우 좋은 글

이혼하는 부모가 고려해야 할 것
부모의 갈등으로 후유증 겪는 아이들을 위하여
 
[여성주의 저널 일다] 최현정
혼인으로 구성된 가족이 배우자 사이의 갈등으로 헤어질 수 있습니다. 이 때 가족구성원으로서 아이들도 충분히 배려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모두 쉽게 동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배우자와의 이별이 당사자들에게 워낙 큰 스트레스이다 보니, 아이들에게 관심을 쏟기란 쉽지 않습니다.
 
부모의 갈등이나 헤어짐으로 상처와 혼란에 휩싸인 아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부부 사이에 갈등이 있다거나 서로 헤어지게 된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항상 문제가 일어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아이 때문에’ 부부갈등을 덮어두고 사는 것은 부모 당사자들의 심리적 건강에 해로울 테니까 이도 좋은 해결책이 아닌 듯싶습니다.
 
또 많은 경우 우리는 특정 양육자가 부재하다는 데서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 합니다. 엄마 없는 아이 혹은 아빠 없는 아이, 혹은 이혼한 집 아이라서 말썽을 예상합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이별의 슬픔을 곪게 하는 원인인 점은 알아채지 못한 채 말이지요.
 
이별 사건의 후유증은 헤어지는 고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분명히 이별이 더 나은 선택이었을 때, 수많은 다른 이별에서 그러하듯이 마음 다치지 않게 잘 이별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면 아이들은 괜한 편견으로 상처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정직한 모습을 보이는 일이 중요해
 
부모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진실하게 대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아이들의 혼란스러움을 보살펴줄 수 있는가를 짚어본다면 아이와 함께 고비를 넘겨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양육자의 입장에서 현명하게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면, 아이의 고통도 덜하고 한편으로는 아이의 혼란스러움으로 인해 부모의 고통이 가중되는 상황도 예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부모는 아이에게 별거와 이혼이 무엇인지, 그리고 부모의 솔직한 심정이 무엇인지 숨기게 됩니다. 대개 어린아이일수록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설명을 빠뜨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 부모 자신이 좌절감이나 수치심에 빠지고 주변의 비난이 거세지면, 가족이 헤어진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금기시되기도 합니다. 덮어둔 경우에 아이는 갖가지 고민에 빠집니다. 나 때문인가 죄책감에 휩싸일 수도 있고, 분노를 품으면서 우울해 질 우려도 있습니다.
 
아이가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는 수준에서 부모가 정직한 모습을 보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쉬운 말로 얘기해줬을 때 아이는 놀라운 이해력과 공감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부모가 놀랄 정도로요.
 
첫 번째로 별거를 설명해주고, 시간이 지난 뒤에 이혼을 설명합니다. 별거 혹은 이혼의 뜻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별거를 시작하면서부터 별거가 무엇인지, 또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이혼이 결정되면 이혼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한번으로 그치지 말고, 아이가 확실히 이해할 때까지 반복적으로 말해줍니다.
 
아이가 언제든 궁금한 점은 질문할 수 있도록 부모가 마음을 열어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시시콜콜한 아이의 걱정을 모두 정리해주십시오. 학원은 누가 데려다 주냐고 묻는 아이에게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 혼내기보다는, 학원은 누가 데려다 줄거니 걱정 말라고 하는 게 더 좋겠지요.
 
이때 가장 중요하게, 부모가 헤어진 상황에서 아이가 전혀 책임이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전달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대체로 자기 탓을 하게 됩니다. 만약 헤어지기 전에 아이 학교성적으로 부모가 싸우는 모습을 보였다면, 혹시 아이가 동생과 싸우고 난 뒤에 그랬다면, 아이는 자신이 모자라고 못된 아이라서 부모가 헤어지게 되었고, 부모가 자기를 버릴 거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부모는 이를 점검하고, 아이를 안심시켜주는 일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아이가 이런 짐을 안고 크게 된다면, 감정을 표현하거나 인간관계 안에서 이별을 다루는 방식에 서툴러질 수 있습니다.
 
상대 배우자를 비난할 때 아이가 느끼는 압박감
 
▲ 자료 일러스트 [어머니와 딸]   © 정은 작
그렇다고 부부갈등의 적나라함이나 부모가 서로에게 가진 적대감과 애증을 낱낱이 들춰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가장 안타까운 상황은 부모가 자기 상실감을 아이에게서 보상받으려 할 때 발생합니다. 만약 부모가 사랑을 잃은 자기 슬픔을 외면하기 위해서 아이를 자기 편으로 끌어당기고 상대 배우자를 비난하게 된다면, 아이는 극심한 혼란스러움에 빠질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일수록, 부모를 각기 독립적인 사람으로 간주하지 못하고 부모 말에 쉽게 좌우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어른들 문제는 아이가 판단할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복잡하고 압도적인 것들인지라, 아이는 부모의 비난과 편가르기에 휘말리면서 자율적인 생각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특히 아이는 부모에게서 버림받을까 두려워 최대한 혼란을 숨기고 특정 부모 편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때조차 특정 부모를 보호하거나 의리를 지켜야 한답시고 괜한 책임감을 지려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은 자기 고통과 욕구를 숨긴 채 타인에게 헌신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자라기 쉽습니다. (완전 나잖아..)
 
아이의 정체성이나 사회성 발달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만약 엄마가 아빠를 나쁜 사람으로 매도한다면 남아는 건강한 남성역할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남자인 자신을 비난할 위험도 있습니다. 만약 아빠가 엄마를 비난한다면 여아는 엄마와 닮은 자기 속성을 부정하면서 자신을 깎아 내릴지 모르고, 훗날에 사람과 만나고 헤어질 때 드는 감정을 감당하지 못해 힘들어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부부관계가 성인이 된 아이에게 슬프게 기억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위해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상대 배우자를 아이양육자로서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를 위한 상대 배우자의 마음은 최대한 아이에게 전달해주고, 아이가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다면 내가 좋은 부모라는 자신감도 커질 수 있습니다.
 
상실감 극복할 수 있도록, 아이만의 심리적 공간 허용해야
 
그러나 이해는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아이는 통제감을 잃은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 부모의 이별이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입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 드는 무력감이란 보통이 아니겠지요. 그래서 임상심리학자들은 일상의 다른 영역에서 아이의 통제감을 회복시켜주라 말합니다. 이를테면 위험하지 않는 한 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헤어짐이라는 상실감을 서서히 극복할 수 있는 시간을 줍니다. 마치 아기에게 ‘젖떼는 시기’가 필요하듯이, 매일 보던 엄마나 아빠를 못 보게 되었을 때 겪는 상실감을 대체할 수 있는 여유를 주십시오. 헤어진 엄마의 물건을 가지도록 허락한다든지, 아빠를 상징하는 물건을 지니고 다닐 수 있도록 해준다든지 말입니다. 아이가 애착하는 물건을 절대로 훼손해서는 안됩니다. 언제든 양 부모와 접촉할 권리를 당연히 주어야 하고, 아이의 심리적 공간도 그대로 허용해야 합니다. 가능하지 않을 경우에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무력하게 부모를 빼앗겼다거나 부모에게서 버림받았다고 느끼면 깊이 분노가 자라날 수 있습니다. 화가 나서 하지 않던 말썽을 저지르기도 하고 갑자기 애기가 되어서 칭얼대거나 때로는 배변을 못 가리는 경우도 생기지요. 이 분노 표현과 실수 중에서 혼낼 것과 감싸줄 것을 현명하게 가리는 어려운 일을 부모가 해주면 좋겠습니다.
 
말썽은 표면일 뿐이고 이면에 놓인 다른 이유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화는 실은 아이 스스로도 잘 모르는 우울이나 상실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빠가 보고 싶어서 슬픈 아이는 엄마에게 못되게 구는 방식으로 슬픔을 표현하게 됩니다. 엄마가 그 속마음의 슬픔을 감싸주면서 아빠가 보고 싶은 마음을 인식하게 해주고, 이를 화나 말썽으로 표출하기보다는 말로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준다면 최선이겠습니다.
 
재혼하는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재혼 당사자들은 서로에게 익숙하겠지만 아이들은 응당 낯설게 느낍니다. 신중한 설명과 허용, 그리고 아이들에게 심리적 여유를 누릴 권리를 인정해 주는 것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헤어진 당사자로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닐 터이지만, 가파른 길 오르는 중에 아이 손을 단단히 잡아주세요. 내가 내 아이를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면 아마도 더 기운이 날 겁니다. 한편으로는 사랑을 잃었지만 다른 사랑을 찾으시길 바라며, 아이와의 사랑도 오래도록 든든히 지켜가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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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펌]관계, 우울증, 반추

관계에서 존중받지 못한 경험, 우울 증가시켜
 
시달렸다고 해서 반드시 우울로 귀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달린 여성들이 스트레스를 해결할 수 있는 장치가 과연 마련되어 있는가도 꼼꼼히 따져보아야 하겠습니다. 시달리면서도 스트레스를 해결할 수 없었던 여성들은 우울의 고통을 거쳐야만 했을 것입니다. 놀렌-혹세마는 여성들이 스트레스 환경에 더하여 고통을 배출할 수 있는 기회도 적기 때문에 우울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세상에서 여성이 자기 삶을 자기 영위대로 통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속으로만 삭히거나, 반복해서 생각만 하게 되고 행동을 취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반추한다’고 말합니다. 곱씹고 또 곱씹고, 내가 무얼 잘못했나, 상황은 이래야 하지 않았나 생각하며, 때로는 울분을 삭히는 것을 반추라 하겠습니다.
 
특히, 사회구조적인 스트레스 상황에 처한 여성은 스스로 상황을 바꾸거나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주로 반추하기 쉽습니다. 반추는 우울감을 증폭시키는 중요한 원인으로, 구체적인 문제해결 방안을 촉구하는 생각을 막기 때문에 우울을 지속시키기도 합니다. 삶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박탈당한 여성은 반추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반추는 여성을 “수동성과 절망에 사로잡히게 한다”고 놀렌-혹세마는 주장합니다.
 
한편, 이성애관계 혹은 혼인관계, 가족관계 안에서 존중을 받지 못하는 경험도 심리학 문헌에서 우울 유발 요인으로 다루어집니다. 어떤 여성들은 어디로 이사한다거나, 오래 써야 하는 값비싼 살림살이를 구입한다거나, 자녀 양육을 고민하는 등, 중요한 의사결정 상황에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기회를 제한당하기도 합니다.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할 기회가 박탈되고, 자기 마음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없다는 느낌은 우울을 증가시킵니다. 침묵해야 하는 상황에서 여성은 우울해집니다.
 
중장년층 여성에게는 이것이 상실감으로 이어지는 듯 보입니다. 갖은 고생을 버티고 가족을 보살피고 나니, 세월은 흘렀고 자신이 늙어가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됩니다. 이 경우 여성은 일생에서 겪어야 했던 다양한 ‘잃음’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잃은 여성이 많습니다. 더하여 아이를 잃은 여성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여성도 있고, 배우지 못한 채 주기만 하여 한이 된 여성도 있습니다.
 
무릎이 쑤시고 자궁 건강이 좋지 못한데 딱히 치료법이 없어 쇠약해짐을 떠안고 지켜봐야 하는 여성도 있습니다. 친정 부모도 돌아가시고, 자녀도 출가시키고, 남편이 병들 때, 기운을 잃고 기쁨과 희망마저 잊어버리는 아주 쓸쓸하고 텅 빈 우울을 견디는 여성도 있습니다.
 
다른 삶을 살던 여성들은 또 다른 ‘잃음’을 겪어야 했겠지요. 시라노스키라는 학자는 여성들에게 대인관계는 참 중요하며, 여성은 관계를 보살피고자 하는 책임감이 크고 관계에 헌신하기 때문에, 관계를 잃거나 관계에서 갈등이 발생할 경우 우울감을 겪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따뜻한 관계는 여성을 우울로부터 보호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므로, 어떤 학자들은 여성이 관계 안에서 우울을 보다 잘 이겨낼 수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는 남성의 우울증
 
물론 남성들도 시달리지요. 어떤 우울한 남성들은 내면으로는 깊이 암울한 감정이 존재하더라도, 밖으로 분출하는 방식으로 고통에 대처하기 때문에 기존의 우울증처럼 보이지 않는 우울을 앓습니다. 게다가 남성은 우울감 때문에 치료받으러 올 가능성도 적고, 우울하다고 말하지 않기도 합니다. 대체로 감정을 숨기면서 살아가는 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남성들의 우울을 보살피기 위해 남성우울증 개념을 새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일부 남성들은 같은 우울을 겪으면서도, 술이나 약물, 성적 행동 등 자극적인 활동에 몰두하거나 폭력적으로 변하거나, 지나치게 일에 매달리면서 고통스러운 감정으로부터 피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예전과 달리 의사 결정능력이 떨어지고, 유난히 미래를 염려하고 두려워하거나, 친구나 가족을 피하고 혼자 있으면서 자율성에 몰두하게 되기도 합니다. 실패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자책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탓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내면의 나약한 자기 모습을 외면하기 위해 겉으로 보다 거칠고 우월한 듯 행동해 보입니다. 대체로 사회의 전형적인 남성상에 보다 충실해야 한다고 믿는 남성들이 이렇듯 전형적인 우울과는 다른 양상으로 우울을 겪게 된다고 합니다. 전형적인 남성상에 일치하는 방식으로 우울을 버티는 것이지요. 남성에게 독립심, 냉철함, 경쟁, 책임감이 중요하고, 약한 감정을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남성들은 나약한 자기 모습 앞에서 반대로 지나치게 강한 면모를 표출하고자 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반동형성’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내면의 고통을 부인하고, 내면의 우울을 가리게 되면서 고통은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이 분들을 뵈면 고뇌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날카롭게 화를 내는 모습에서, 내면의 극한 우울과 ‘분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지금까지 삶을 잘 통제하고 튼튼하게 꾸려왔건만 약해지거나 무력해서는 안 된다는 어떤 강한 당위가 얼마나 이분들에게 막중한 압력인지 전해지곤 합니다.
 
어떤 중년여성은 그릇이 깨질 듯이 큰소리로 달그락거리며 설거지를 하면서 기분을 풀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여성은 남편을 늘 곁에 두어야만 마음이 놓이기 때문에 남편의 헌신과 구속을 요구하게 된다고 털어놓습니다. 어떤 중년남성은 주변 사람들에게 버럭 분풀이를 하고 나서는 더 큰 죄책감에 괴롭다고 합니다.
 
우울해지는 까닭은 사람마다 각기 다름이 당연합니다. 어떻게 마음을 나누고 어떠한 방식으로 서로 곁에 있어주어야 할까요. 진심을 나누면 고통은 덜하련만, 그것이 참 어려운 일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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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나

[일다펌]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소설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소설
여성문학 시리즈-3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지하철 성희롱처럼 분노스러운 일부터 ‘넌 여성적이지 못해’와 같은 사소하게 짜증을 돋구는 언행까지 성차별적인 사태를 겪고 나면 누구나 잠시만이라도 여성들의 유토피아를 꿈꿀 것이다. 유토피아 소설은 세계의 문제점을 뽑아내서 이를 교정한 이상향 사회를 제시하여 미래에 대한 개혁적인 전망을 유도하는 이념적인 장르다. 페미니즘 역시 이 장르와 상당히 근접한 거리를 유지해왔다.

성차별적 현실을 뒤엎는 이상향 사회 제시

▲ 샬롯 퍼킨스 길먼의 <여자만의 나라>  
그런데 모든 구성원에게 평등한 대우를 보장해야 할 유토피아 소설이 언제나 성평등한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1516년 토머스 모어가 발표한 최초의 유토피아 소설 <유토피아>는 복종과 획일화를 요구하는 지극히 가부장적인 사회를 담았다. 1888년 에드워드 벨라미가 발표한 <회고> 역시 겉으로는 남성과 여성의 성적 차이를 존중하였다고 밝히고 있으나 실제로는 여성의 본성을 하찮은 것으로 규정하여 여성집단을 분리한 성차별적인 텍스트다.
 
벨라미가 소설을 쓸 당대는 남성과 여성의 동등함을 요구하는 여권신장운동이 막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결국 벨라미는 이 흐름에 반하여 남성과 여성이 본질주의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주장한 셈이다. 이처럼 유토피아 소설이 그리는 이상향 사회는 지극히 역사적으로 구조화돼 있으며, 따라서 어쩔 수 없이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1916년 발표된 샬롯 퍼킨스 길먼의 <여자만의 나라>는 최초의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소설이다. 샬롯 퍼킨스 길먼은 정형화된 여성상을 요구하는 남성적인 정신의료기술로 인해 서서히 미쳐가는 여성의 내면을 실감나게 형상화한 단편소설 <노란 벽지>로 유명한 페미니스트 작가다. <여자만의 나라>는 여성들 서로간의 애정과 민주정신, 탐구성에 바탕을 둔 세계 ‘헐랜드herland'에 3명의 지극히 평범한 남성이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이 남성들이 지닌 여성에 대한 편견은 헐랜드의 용감한 여인들에 의해 무참히 부서지고 만다.

이처럼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소설들은 성차별적 현실을 뒤엎는 이상향 사회를 구조적으로 제시하여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유토피아 소설의 고전적 양식은 사회 문제를 분석하는 포괄적인 틀을 제시하고 아울러 현실을 개혁해야 한다는 의지를 북돋워줄지는 모르나 소설을 읽는 맛은 꽤 떨어지는 편이다. 보통의 경우,지리적으로 괴리된 곳에 위치하며 초역사적인 속성을 띄고 있어서 백화점처럼 이상향 사회의 정보를 훑어보게 하는 차원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등이 전달하는 긴장감이나 인물 내면의 변화가 전달하는 생생함 같은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 마가렛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   

때문에 현대에 등장한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소설들은 장르의 법칙을 해체하여 보다 흥미로운 내용을 선보이고 있다. 이상사회와 디스토피아를 병치하거나 혹은 현실을 병치하는 방식, 열린 결말의 이용 등이 그 예다. 이는 디스토피아와의 근접을 초래하기도 한다.

마가렛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는 얼핏 보기에는 남성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여 기계적으로 섹스와 임신을 제어하는 지극히 우울한 사회를 그리고 있지만, 성적 자유가 주어졌던 과거와 미래로 향하는 열린 결말을 통해 새로운 미래가 도래할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남겼다. 또한 여성들 간의 차이에 주목하고 있는 현대에 와서는, 추상적인 자매애에 기반을 둔 이상향 사회는 이미 설득력이 떨어졌으므로 다른 방식으로 우회하여 보다 치밀하게 이상향을 꿈꾸거나 이상향의 한계를 소설 속에서 제시하기도 한다.

두 개의 재판을 통해 제기된 논쟁적 이슈들

A. S. 바이어트의 <바벨탑>(1996)은 여성의 이혼과 성적 자유의 문제를 다룬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복적인 이상향 사회의 소멸을 그린 소설 속 텍스트 ‘배블탑’이 현실에 수용되는 과정을 통해 당대 여성이 처한 현실을 보다 날카롭게 파고든다. 역사 너머로 사라진 어느 여성 시인의 삶과 사랑을 추적하는 소설 <소유>로 유명한 A. S. 바이어트는 생경한 역사적인 자료들과 당대의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이슈들을 능숙하게 소설 속으로 삽입하여 읽는 재미를 배가시키는 법을 아는 작가다. 뿐만 아니라 어디엔가 꼭 있을 법한 전형적인 인물들을 포착해내는 능력이 있다. 흥미로운 신문기사들을 직조하여 소설화했다는 느낌을 줄 정도다.

<바벨탑>의 배경은 1960년대로 막 접어든,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판금 해제와 더불어 성문제와 일상적인 억압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기 시작한 영국사회다. 소설은 두 개의 재판을 다룬다. 하나는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 지성적인 여인 프레데리카의 이혼 소송이고 다른 하나는 누드모델 주드 메이슨이 쓴 유토피아 소설 '배블탑'의 음란 여부를 따지는 재판이다. 지은이는 이 두 개의 재판을 통해 교육받은 여성의 사회적 이미지와 역할모델, 여성의 성적 자유, 성도착적 내용을 다룬 매체에 대한 수용 여부와 같은 논쟁적인 이슈를 다룬다. 이 이슈들은 단독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지은이는 심리치료나 문학교육과 같은 인간의 심성을 다루는 영역의 역할을 진단하는 한편 막 생기기 시작한 클럽문화와 인도 등지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심리치료를 겸비한 신종교의식들을 소개하면서, 개인의 심성-특히 여성의 심성에 구조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프레데리카는 잘 나가던 문학 비평가였으나 언니가 어이없이 감전사를 당한 후 갑자기 결혼을 결심한다. 그녀가 선택한 사람은 문학적 교양과는 아무 상관없는 시골 귀족 나이젤이다. 프레데리카가 나이젤을 선택한 것은 나이젤이 프레데리카에게 성적인 만족을 통해 생명감을 주는 존재로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나이젤이 부유한 귀족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녀는 결혼의 구속력을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성적인 모험으로 시작한 결혼 생활은 기대 이상으로 억압적이다. 남편은 그녀가 일을 하는 것을 막으면서 집안에서 아이 양육에만 몰두하기를 바랬다. 그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는 평소에는 감춰져 있지만 그녀가 반항하며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면 즉시 튀어나온다. 남편에게 폭행당하고 손도끼로 등을 가격당한 후 그녀는 아이와 함께 집을 뛰쳐나오고 만다.

프레데리카의 이혼소송은 법정의 언어가 남성 중심적이며 개인의 삶과 심리를 잘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법 논리를 보다 잘 활용하는 자에게 관대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일상적인 상태, 그러니까 적당히 자존심을 지키고 상대의 사정을 봐주는 심정으로 법정과 맞섰던 그녀는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남편에게 당했던 폭력들은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채택되지 않았다. 반면 프레데리카가 집을 나온 후 가졌던 성관계들은 남편이 돈을 주고 고용한 심부름센터 직원에 의해 노골적으로 까발려진다. 프레데리카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교육을 잘 받은,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는 여성’이 되었다.

편견으로 작동되는 사회 시스템의 통제

▲ A. S. 바이어트의 <바벨탑> 
한편 주드 메이슨의 '배블탑' 소송 역시 법정과 법정을 지지하는 상식적인 사람들이 지닌 편견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배블탑'은 프레데리카가 출판을 제안한 소설로 아르토의 잔인극에 비견되는데, 성서의 바벨탑이 무너진 것처럼 이상향 사회가 무너져가는 과정을 그렸다.

 
이 소설의 사상적인 바탕에는 푸리에와 사드가 있다. 푸리에는 인간의 열정과 욕망을 모두 충족시켜주면 조화로운 세계가 온다고 믿었으며, 성도착으로 분류되는 사람들 또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설의 진행은 사드 후작의 사상을 빌려오는데, 컬버트와 그가 이끄는 집단은 모두에게 성적 자유를 허용하는 사회를 제창한다. 그러나 성적 자유는 반드시 조화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컬버트의 남자 시종 데미안이 컬버트의 애인 레이디 로즈에이스를 원하면서 상황은 점점 악화된다. 배블탑은 욕망을 좇아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강간하고 고문하는 세계로 변모한다. 결국 레이디 로즈에이스는 컬버트가 만든, 성적 자극을 주는 고문 기계에 의해 무참히 죽임을 당한다.

'배블탑'을 둘러싼 법정 논쟁은 ‘금기’를 넘어서는 성적인 내용을 다루는 매체에 대한 논쟁점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이 같은 논쟁은 주로 독자들의 반응과 이를 보다 미학적으로 점검한 문학 비평에 의해 근거들이 제시된다. 법정에서는 외설을 인간을 타락하고 부패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몇몇 독자들은 '배블탑'이 인간을 타락시킨다고 주장한다. '배블탑'과 같은 포르노는 인간을 신체의 부분으로만 국한시켜 반복적, 강박적인 기능만을 부여하여 수치심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인간성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몇몇은 '배블탑'이 세계의 추악함을 표현하는 계몽적인 텍스트라고 반발한다. 또한 실제적인 위험성 또한 점검하는데, 성적으로 가학경향을 가진 사람이 그러한 가학적인 내용이 담긴 소설을 읽으면 그 경향이 강화되는가를 검증하는 것이다.

이런 논쟁들은 결국에는 개인의 도착적인 성적 환상을 사회가 얼마나 허용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런데 '배블탑'의 저자 주드 메이슨은 흥미로운 주장을 제기한다. 자신이 다닌 엄격한 기숙사 학교에서 소설 속의 행위만큼이나 잔인한 매질이 일어났으며 자신이 그 학대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이는 환상을 가능케 한 현실로 관심을 되돌려야 한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또 한 가지는 1960년대인 데다가 법정에서 벌어지는 논쟁인 만큼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여성주의적 관점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프레데리카와 '배블탑'의 소송을 법 논리에 의한 내면적인 자유의 배제라는 측면에서 고찰하는 것으로 볼 때, 지은이는 적어도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지나친 억압이 여성의 성적 자유를 제한하는 도덕적인 억압과 결탁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두 가지 소송을 동시에 겪으면서 프레데리카는 '배블탑'의 저자 주드와 자신이 사회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혔다고 생각한다. 법정의 논리는 그녀와 주드가 이해할 수 없다. 사실 배심원 12명이 '배블탑'을 인간을 타락시키는 음란물로 낙인찍은 사건이나 프레데리카의 이혼 재판을 담당한 판사가 교육받은 여성에게 가진 편견은 별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편견이 사회 시스템을 움직이면서 다른 생각을 가진 개인들을 통제하려고 든다는 것이다. 이처럼 <바벨탑>은 이상향 사회를 소설 속 텍스트로 삽입하여 당대 현실과 병치한, 새로운 스타일의 유토피아 소설이다. 앞으로 등장할 페미니스트들의 유토피아 소설은 페미니즘이 직면한 문제나 여성들이 새롭게 부닥친 장벽과 같은 현실적인 소재들을 이상향과 비교하면서 흥미로운 내용을 펼쳐나갈 것으로 기대해도 괜찮을 것 같다.



2005/03/14 [19:01] ⓒ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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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펌]어김없이 욱신대는 마음의 흉터

어김없이 욱신대는 마음의 흉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하여
 
[여성주의 저널 일다] 최현정
참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살아가는 방식이 가지각색이고, 각기 다른 생각과 다양한 감정을 품고 만나고 헤어집니다.
 
한번도 타인의 삶을 살아보지 못했으므로, 어떤 상황에서 누군가 나와 달리 느끼고 달리 행동했다면 이해심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대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도 나만의 감정에 부대낍니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화가 나고, 단절감과 거리감에 막막하고 서먹하며, 때로는 상처를 받아 돌아서기도 하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더 이상 깊이 있는 관계를 허용하지 않게 되지요.
 
반대로, 어떤 상황에서 나만 다른 감정을 느낍니다. 다들 아무렇지 않게 그럭저럭 사는 듯 한데, 어둠과 추위가 내게만 드리워진 듯 지독히 고독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관계들은 마치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집요하고, 새로운 만남은 불가능한 것만 같습니다. 가끔씩 똑같은 감정의 수렁에 빠져 매번 같은 분량의 괴로움이 남고, 어김없이 또 빠지곤 해서 변화에 대한 의지가 무참히 꺾이기도 합니다.
 
낯설지 않은 괴로움이 또 찾아왔구나 싶을 때
 
우리가 서로 다 다른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경험과 기억은 우리 각자를 고유하게 만듭니다. 어떤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이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를 통하여 우리는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은 또 그만의 자기가 있겠지요. 우리에게 어떤 고통이 반복되는 데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경험과 기억은 삶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우리 삶을 결정하는 완고한 지표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기억은 언어적이고 의식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말로 더 잘 풀어낼수록, 그 기억은 더 잘 정리된 기억으로 삶 그 자체에 머무릅니다. 그러니까 그런 기억은 곱게 치대어진 부드러운 밀가루 반죽처럼 손에 익어서, 창조적인 삶을 구워낼 수 있는 재료가 됩니다.
 
그런데 어떤 기억은 종잡을 수 없는 강한 감정이나 감각이라든지, 습관, 흔한 행동으로 전해지며, 끈적하고 거친 반죽처럼 삶에 달라붙어 불쑥불쑥 우릴 건드립니다. 낯설지 않은 괴로움이 또 찾아왔구나 싶을 때 그 감정을 조심스레 따라가보면, 우린 잊을래야 잊을 수 없어 잠시 덮어두었던 어떤 기억과 마주하게 됩니다.
 
혼자서 대면하기에는 너무 벅차서 아무렇게나 밀쳐내었던 ‘그 경험’은 왜 사라지지 않는지 원망스럽습니다. 해결되지 않은 묵은 감정은, 예측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옵니다. 나는 충분히 자라 이미 ‘어른’이 되었고 과거는 사라졌을지라도, 묵은 감정은 과거와는 전혀 다를법한 새로운 상황에서조차 똑같은 강도로 느껴집니다.
 
고독. 외로움. 긴장되고 불안정한 마음. 안달함. 창피함. 간섭 받는 느낌. 해꼬지 당하는 느낌. 무시당하는 느낌. 무가치함. 버려진 느낌. 어떤 강한 충동, 또 무엇이 있을까요. 무척 익숙하지만 괴로우며, 주로 또 자주 느껴지는 감정들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 감정은 아주 오래 전 일이 마음에 새겨진 흔적으로, 훗날 어김없이 욱신대지요. 어쩌면 희미한 흉터로 자연스럽게 남겨질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날 좀 보소’ 하는 것이겠지요.
 
사라지지 않는 기억, 그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 기억(memory)     © 정은 그림
특히나 욱신대는 일련의 상황을 엮어 심리학자들은 ‘갈등영역’이라고 부릅니다. 상황은 모두 달라 보일 수 있지만 신중히 연결해 보면 참으로 비슷한 사건들이어서 “아하” 하게 될 겁니다. 나의 갈등영역을 찾아봅시다. 물론 보기 싫습니다. 덮어두고 외면하고 없던 일로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고 싶지요. 당연하지요. 그렇지만 해볼만한 일입니다. 그러니 천천히, 해볼만하다 싶을 때 해보면 됩니다. 혼자 하기 힘들다면 믿을만한 누군가와 함께 해보면 좋겠지요.

 
고통이 느껴지는 상황은 대체로 어떤 경우였는지, 누구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때 특히나 강하게 욱신대는지요. 어떤 느낌이 퍼지고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지요. 어떤 기억이 되살아나는지요. 조용히 살펴보면 어슴푸레 어떤 가닥이 잡힙니다. 그 가닥이 바로 갈등영역입니다. 이를 따라 천천히 과거로 거슬러가다 보면, 우리는 과거 아주 작고 어리고 무기력했던 우리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할 수밖에 없었나요. 작은 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다만 홀로 버텨온 세월 안에서 스스로에게 수많은 꼬리표와 제재를 가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난 무가치해, 난 버림 받을 거야, 나는 그래 마땅해, 나는 속고 있어, 난 이겨야 해, 난 무능해, 난 이기적이야, 난 벌받아야 해, 난 꼭 잘해야 해.’ 스스로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했습니까.
 
그 말로 인해서 지금 내 앞의 새로운 상황과 관계들을 그저 그대로 볼 수 없게 되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미 자랐는데도, 어쩐지 자꾸만 작고 어린 나로 변하게 되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과거의 고통이 반복될 것만 같은 강한 불안에 겁부터 들어, 담을 쌓고 스스로를 무장하지요. 버려질 것 같아 되려 상처를 주고 떠나버리고, 미움 받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을 희생시키고, 무가치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완벽함을 추구해야 했듯 말입니다.
 
어린 나를 감싸줄 수 있을 만큼 나는 더 자랐으니까…
 
하지만 딱딱한 갑옷으로 나를 무장하거나 담을 쌓고 외면한다고 해서 감정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과거에는 그렇게 해야만 했을지라도,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도망가려 할수록 괴로움은 늘어납니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감당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감정을 받아들이며 버텨내는데 있습니다.
 
어떻게 버텨내야 할까요. 만약 갈등영역을 찾아가는 길에 어린 나를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아무도 곁에 없었지, 이제 내가 있다’ 해주십시오. 어린 나에게 ‘그랬냐, 그랬던 거로구나’ 하고 말해주십시오. 심리학자들은 감정을 ‘담아내 준다’고 얘기합니다. 감정을 감싸 안아주는 거지요. 그를 통해 지금 우리가 대면해야 하는 고통을 더 잘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예전보다는 더 지혜롭고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됩니다.
 
어린 나를 보듬고 위로해줄 수 있을 만큼 나는 더 자랐습니다. 과거는 우리 삶을 바꾸어 놓았지만, 지금 우리 힘은 생각보다 클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 버티면서 어느덧 훌쩍 자라난 나는 과거에 얼마나 괴로웠는가를 스스로 감싸주고 위로해줄 수 있습니다.

그게 지나면 으레 찾아왔던 괴로움은 서서히 잦아듭니다. 설령 잦아들지 않더라도, 분명 그를 감당할 힘이 커졌을 터이니 걱정 마십시오. 나는 예전보다 더 능숙하고 기특하며, 고통은 흘러갑니다. 고통은 반드시 흘러갈 것이니, 부여잡거나 없애려 하거나 끊어내려 하지 마십시오. 통제하면 할수록 더 시리게 죄어오는 게 고통이라 합니다. 창피하면 창피한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고통을 살피고 그대로 느끼고, 그럴 만 했다고 나의 마음을 허용해주세요. 그러면 세상이 조금씩 있는 그대로 보이게 된다 합니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 안에 작고 어린 그의 모습이 떠올라 다독여주고 싶을 때도 생기고, 나 역시 누군가로부터 먼저 다독임 받게 된다면 힘이 더 나게 될 테지요.
2008/07/24 [15:12] ⓒ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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