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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노당 대우조선 국민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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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8/02/20
    새로운 유형의 노이로제 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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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당 대우조선 국민기업

조선업 노조들, 대우조선 매각에 '공동 총파업' 불사

"국제적 투기자본 골드만삭스 선정은 금속노동자에 대한 도전"

최인희 기자 flyhigh@jinbo.net / 2008년04월28일 18시53분

정부와 산업은행이 추진하고 있는 대우조선해양 매각과 관련해 조선업종 노동조합들이 '공동 총파업' 등 강력 대응을 시사했다.

전국금속노동조합은 지난 21일 산업은행이 대우조선 매각 주간사로 골드만삭스를 선정, 발표하자 24일 삼호중공업지회에서 긴급 조선분과대표자회의를 열었다. STX조선지회, SLS조선지회, 부산한진중공업지회, 울산한진중공업지회, 삼호중공업, 현대미포조선노조, 대우조선노조, 삼성중공업노동자협의회 등 회의에 참석한 8개 조선업종 노조 대표자들은 이날 '대우조선해양의 매각에 따른 공동투쟁결의문'을 발표했다.

"일방적인 매각, 조선업 전체의 피해를 불러올 것"

조선업종 노조 대표자들은 골드만삭스가 대우조선해양을 해외 매각하기 위한 전초단계로 기술유출과 국부손실, 방산 업체에 대한 국가기밀 누설 등의 문제를 불러올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결의문에서 "국제적 투기자본인 골드만삭스를 매각 주간사로 선정한 것은 15만 금속노동자에 대한 중대한 도전임과 동시에 조선 산업의 공동화를 부추기는 촉매제로 전환되어 노동조건 저하 및 고용불안 심화 등 조선업 전체의 피해로 확산될 것"이라고 우려하며 "대우조선해양의 바람직한 매각 절차와 방법이 쟁취될 때까지 공동 투쟁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기업의 독점적 횡포를 철저히 배제할 것 △대우조선노동조합과 고용협약서 체결을 통한 노동조합 승계와 단협 승계를 이행할 것 △매각 과정에서 나타난 부적격 업체에 대해 인수 참여를 원천 차단할 것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정부와 산업은행이 이같은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시에는 "15만 금속노조 및 조선분과 사업장 조합원들이 매각 공동투쟁 전선을 구축하여 총파업 투쟁은 물론 대정부 투쟁을 강도 높게 펼쳐 나갈 것"이라는 각오다. 금속노조는 이와 별도로 5월 말께 공청회를 개최하여 대우조선해양 매각의 부당성을 알리고, 대우조선노조가 3차 산업은행 상경투쟁에 나설 즈음 전국 단위의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민주노동당, "대우조선 국민기업화" 제안

한편 '민생대장정'을 진행하며 거제에 머물고 있는 민주노동당 의원들도 오늘 오후 2시에 거제시청에서 '대우조선해양 국민기업화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권영길 의원, 홍희덕·이정희 국회의원 당선자, 이수호·최순영 비대위원 등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대우조선해양은 정부 마음대로 해외투기자본이나 사기업에 팔아 넘겨도 되는 기업이 아니"라며 "국민 세금으로 살려낸 만큼 국민 소유 기업이라고 보는 게 옳다"고 주장했다.

"골드만삭스가 실사를 통해 기술자산을 파헤칠 경우 기술유출이 우려된다"면서 "매각 이후 인수기업의 자본회수를 위한 자산매각과 사업축소, 대규모 구조조정이 예상되며 결국 매각의 부담과 고통은 노동자와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떠넘겨질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이에 따라 민주노동당은 "대우조선해양의 국민기업화 등 문제의 합리적 해결을 위해 당 차원의 대책기구 구성과 시민사회단체들과의 공동 대응방안을 마련하겠다"며 "국회 차원의 대책 마련도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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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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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축하합니다~

더 이상 숨어있지 않기로 했다.

내 상처를 더 이상 뒤에 숨어서 슬퍼하지 않기로 했다.

거리낌없이 말하고 다닐테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긴 했지만.

 

 

 

"이혼 축하합니다~"

 

마지막 스캔들이라는 드라마에서 정준호가 최진실에게 불러준 노래.

이 노래를 들으면서 뭔가 통쾌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우리에게는 이런 노래가 좀 있어줘야 돼.

슬픈 일이겠지만

아무튼 누군가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저런 노래.

 

 

 

나도 요즘 나에게 상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래서 원피스, 가방, 귀걸이, 팔찌 등을 사들였다.

귀걸이, 팔찌는 천원짜리.. 훗.

다 합해서 5만원 정도 쓰고 나니까

더 이상 필요한 것도, 사고 싶은 것도 없더라.

소심하기 이루말할 데가 없구나.

 

 

 

 

왜 나 혼자서 이런 아픔들을 견뎌내야 하는 걸까?

권선징악이라는 주제는 생각보다 매력적인 것이라는 걸 알았다.

비현실적이지만

나쁜 놈을 응징하는 구도.

나름대로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나쁜 놈들이 응징받는 사례는 정말 드물다는 거.

 

 

 

TV에서 이런 말도 나왔드랬다.

"행복해져야 합니다~"

 

엄마가 옆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눈물을 감출 수가 없더라.

하품하는 척 했지만.

 

나는 지금 과연 행복한가?

행복하지 않다.

내가 해왔던 활동들이 모두 부질없게 느껴지고

내 삶이 내 것이 아닌 것만 같다.

 

 

마지막 스캔들에 나왔던 것처럼

근사한 케잌에 촛불을 꽂으며 누군가 나에게 이런 노래를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낙태 축하합니다~"

 

 

 

너무 잔인한가?

어찌됐든

난 어깨를 들썩이며 펑펑 울어제껴야 한다.

 

내가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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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다.

어떻게 기록을 남겨야 할까.

지난 1년의 시간을 되돌아본 결과

연애 관계 속에서 나는 성적 대상화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괴롭다.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걸 알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연애에 푹 빠져서

연애 지상주의 분위기에 물들다보면

언젠가 절벽으로 뚝 떨어져 버리기 십상이다.

앞으로 맺게 될 수많은 관계들을 어떻게 맺어나가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연애가 끝나고 나서 수많은 여성주의 서적들을 읽으며

나의 과거를 객관화시키고, 사회구조화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을 한다는 것이, 연애를 한다는 것이

'가족', '결혼'이라는 것과 맞물려서

순식간에 비참하고 형편없는 것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은 사람과 충돌한다면

그 때 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선택했을 때 나는 그 충격과 외로움을 온전히 버텨낼 수 있을까.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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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D를 선택한 히피족

LSD를 선택한 히피족
히피문화 속 ‘여성’의 의미-1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현주
<’성 해방’의 기치를 내걸었던 히피운동 속 여성들의 위치는 어떠했을까. “모든 반문화 운동이라는 것이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소외 받는 계층들의 특별한 경험들에 대한 자리를 마련해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세일라 휘틀리의 지적은 과거의 문화운동뿐 아니라 오늘날 진보적 운동들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말이다. 일다는 3회에 걸친 연재를 통해 사랑과 평화를 갈구했던 히피운동에서 여성의 위치와, 그 안에서 여성뮤지션들의 고민은 어떠했는지 조망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샌프란시스코에 갈 때는 머리에 꽃을 꽂아요.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다정한 사람들을 만날 거에요/ …거기에는 모든 세대와 새로운 설명이 있어요.” 스콧 맥켄지(Scott McKenzie)가 부른 노래 ‘샌프란시스코(San Fransisco)’의 가사처럼, 1960년대 중반 샌프란시스코는 머리에 꽃을 단 히피들의 낙원처럼 보였다. 덥수룩하게 늘어뜨린 머리칼과 수염, 인디언처럼 총 천연색의 복장에 장신구를 하고, 느릿느릿 무리 지어 걸어 다니고 있는 이들은 처음에는 기성세대의 눈에 위협적이라기보다는 한심하고 철없는 젊은이들처럼 보였다.

‘사랑’과 ‘자유’ 그리고 ‘평화’를 주장하는 이들의 모습 속에는 지금까지 기성세대의 가치에 반기를 들고 노골적으로 저항을 해 오던 반항적인 젊은이의 공격성은 없었다. 으슥한 거리를 걷고 있는 현명한 중년의 신사라면, 파키스탄인들에게 발길질을 가하는 스킨헤드족에게 충고를 늘어놓는 것보다는 모르는 채 지나가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또한 런던의 카나비 스트리트에서를 허름하게 차려 입고 지나갔다가는 깔끔하게 차려 입은 모드족들의 삿대질을 당하게 될 터였다.

하지만 미국에선 오히려 일반노동자들이 머리가 긴 사람만 보면 “꽃이나 좋아하는 호모새끼들”이라며 폭력을 가하곤 했다. 이 “계집애 같은” 히피들이 무슨 저항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가진 것은 낭만적인 구호들과 거세된 듯한 표정, 그리고 LSD(환각제) 뿐인 것처럼 보였다.

하위집단이 선택한 약물의 ‘남성성’

히피족과 LSD의 긴밀한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1960년대 초중반 런던에 나타난 모드족과 그들이 애용한 진정제, 암페타민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모드족(Mods)은 1950년대 영국의 경제적 급성장의 시기를 거쳐 나타난 ‘풍요의 아이들’이었지만, 부모세대의 가치관에 반감을 가지고 모든 일에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나 이들이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도시문명이나 산업화를 거부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에 대해 낭만적인 기대감을 가지며, 속도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강박증적으로 외모에 신경을 썼다. 프랑스 댄디풍의 줄무늬 양복에, 스프레이로 짧은 머리를 부풀린 이들은 말 그대로 “패션 잡지에서 그대로 튀어 나온”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들은 항상 길거리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매만졌고, 옷을 더럽힐 염려가 없는 유선형디자인의 이탈리아제 베스파 스쿠터를 몰고 다녔다.

백인노동자 계층이 주를 이루었던 모드족은 평일에는 자본의 ‘맹목적인 연료로 소비되는 것을 묵묵히 감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삶을 증폭하여 노동의 과정에서 나온 자본의 상품들의 적극적인 소비자가 되기를 원했고, 상류층의 사교파티에서나 어울릴 옷들을 자신들의 뒷골목으로 끌어내렸다. 모드족은 20세기의 모던 드럭(modern drug)이라고 할 수 있는 암페타민을 이용했는데, 암페타민은 불면증을 유도하는 효과가 있었다. 따라서 잠과 게으름을 경멸하는 모드족들이 6일간의 지루한 노동이 끝나고 난 후, 48시간 동안의 주말을 잠을 자지 않고 즐기는 데 몰두할 수 있었다. 이는 남성다운 청년이 주말 내내 어머니의 영역에서 벗어나 거칠고 추운 공간을 돌아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암페타민은 여성에 대한 성욕은 억제시키고 공격성과 속도감을 증대시킴으로써 그들의 남성주의적인 성향에 영향을 미쳤다. 모드족들은 여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남자친구들의 눈에 띄기 위하여 멋을 부렸다. 히피족들에게 사랑의 행위는 하나의 목적이었지만, 모드족들의 연애는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모드족의 우상이 된 ‘더 후(The Who)’의 공연장에서는 “늙기 전에 죽어버리고 싶다”는 노랫말과 함께 기타를 때려 부수는 일이 연례가 되어가고 있었다.

평화를 가져오는 약물, LSD

모드족을 비롯한 대부분의 하위문화 집단이 선택한 드럭이 남성성과 공격성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평화주의와 자연에의 회귀, 그리고 자유로운 사랑을 주장하는 히피족들에게 환각제인 LSD는 최고의 선택으로 보인다. 히피족이 만약 암페타민이나, 사람을 차분하게 진정시켜 내면으로 파고들게 하는 코카인같은 드럭을 선택했다면 그들의 성향은 현재 우리가 기억하는 것과 상당히 달라져 있었을 지도 모른다.

가장 강력한 환각제 중의 하나인 LSD(Lysergic Acid Diethlamide)는 호밀에 생기는 곰팡이인 맥각에서 추출되는 화학물질로, 1938년 스위스 화학자인 앨버트 호프만이 처음으로 곰팡이에서 추출해냈다. 호프만은 1943년 LSD의 성질을 연구하는 실험을 하던 중 실수로 피부에 LSD액 소량을 주입시켰다가 이상한 의식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LSD를 복용하면 혈관 수축물질인 세로토닌의 반응에 이상이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것이 뇌에 어떻게 작용하는 지는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미량만 복용해도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이한 왜곡과 심한 환각과 망상을 불러일으키거나, 충동적인 개방성, 혹은 사랑의 감정상태를 끌어온다.

LSD는 주로 기분 좋은 각성효과를 가져온다고 알려져 있지만, 심리적으로 부정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약을 복용하거나 다른 약과 함께 복용하면 극심한 우울증 등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또한 LSD는 대부분의 다른 약물들과는 달리 중독성이 없다. 초기에 LSD는 각종 심리 치료, 특히 성기능 장애 치료 등 의학 분야에서만 연구, 활용됐으나 LSD의 환상적인 효과에 대한 소문은 급속하게 퍼져서 점차 많은 사람들이 LSD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히피공동체에서 찾은 낙원의 세계

LSD를 본격적으로 대중화한 사람은 티모시 리어리(Timothy Leary)였다.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 티모시 리어리는 LSD의 효능에 흠뻑 빠져, 대학에서는 LSD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이 신비의 약물이 ‘정신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사물의 진리를 깨닫게 하여 ‘신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또 ‘자기애가 아닌 집단에의 소속감’과 ‘타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약물이 평화를 가져 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티모시 리어리는 스스로가 LSD를 복용한 후 처음 만난 여성과 하루 만에 결혼식을 치렀으며, 그의 이런 모습과 여러 히피들이 집단으로 LSD를 복용하고 환각에 빠져들어 집단적인 사랑에 빠지는 모습이 TV를 통해 공개되면서 수많은 청년들이 히피공동체를 찾아 샌프란시스코로 모여들었다. 베트남전, “상대가 자본주의자가 아니라면 그것은 공산주의자로 없애버려야 한다”는 덜레스(1953년 D.D.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 반공주의자)식의 광적인 공산주의 혐오, 그리고 이기적인 소비지상주의에 지쳐있던 젊은이들은 샌프란시스코의 이 히피공통체에서 이상적인 낙원의 모습을 발견했다.

히피족들은 이 낙원을 미래의 어떤 상상의 공간이 아닌, 언어가 존재하기 이전의 모습으로 상정했다. LSD에 취한 이들은 환각 상태에서 이성적인 언어가 무너지고, 시간과 공간 등 모든 견고해 보이는 것들이 왜곡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데, 히피들은 꿈을 꾸는 듯 느리게 공중을 부유하는 듯한 이 상태가 어머니의 자궁 속에 들어가 있는 경험과 다름없다고 느꼈다. 모든 자연의 근본과도 같은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울려오는 무의식의 메시지와 접촉하려고 했는데 이 메시지는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 완전한 자유와 사랑이 있는 세계였다.

히피의 남성들은 스스로를 아버지의 폭압에서 벗어나 어머니의 손길에 의해 순화되고 중성화된 인간으로 보았으며, 거친 남성성 과시하는 행위를 폭력적인 것으로 간주하곤 했다. 또한 성 억압적인 당시의 가치관에 대항하여 프리섹스주의를 실천하면서, 자신들의 ‘성의 해방’을 통하여 ‘성의 평등’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연 구체적인 문제를 무시한 프리섹스주의적인 성의 해방이 성의 평등과 동의어가 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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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운동의 여성주의적 한계

히피운동의 여성주의적 한계
히피문화 속 ‘여성’의 의미-2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현주
1969년 8월, 뉴욕 근교의 한 농장에서 사흘간 열린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유토피아와 같은 사랑과 평화의 황홀경을 보여주었다. 애초에 유료콘서트로 기획되었으나 모든 표가 매진되고 표를 구하지 못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자 주최 측은 무료공연을 선언한다. 히피들은 지금까지 음반기획사들이 꾸려 온 비싼 공연들에 불만을 표시해 왔고, 물질주의를 배격하고 공유정신을 내세웠던 히피들이 공연티켓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구걸이나 도둑질, 대마초를 키워 파는 방법들뿐이었다.

따라서 이번 무료축제는 그들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것이기도 하면서, 타인이 기획하고 마련한 축제에 초대된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축제를 만들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물과 음식이 부족하고 화장실도 엉망인데다가 사흘 내내 폭우가 쏟아져 내리는 등 객관적인 상황은 엉망이었지만 우드스탁의 젊은이들은 음식과 약 등을 서로 나누어 쓰면서 평화의 제전을 만들어 낸다.

우드스탁의 평화와 알타몬트의 폭력

30만~40만의 젊은이들이 뿜어대는 대마초의 연기와 LSD의 기운 가운데 슬라이 앤 패밀리 스톤은 대표적인 드럭송 ‘나는 너를 더 높은 곳으로 데려가고 싶어’(I want to take you higher)를 부르고 크로스비 스틸 내시 앤 영은 ‘나무 배’(Wooden Ship)를 통해 불만스러운 나라를 버리고 (노아의 방주와도 같은 나무배를 타고) 유토피아로 떠나자고 노래한다.

반전의 메시지도 빠지지 않았다. 컨트리 조 맥도널드는 ‘I feel like I'm fixing to die rag’에서 “전쟁터에 나간 아들이 관에 실려 돌아오는 첫 번째 부모가 되라”고 말하면서 베트남 전에 찬성한 사람들을 향해 냉소적인 저주를 내뱉었다. 그룹 Byrds의 데이빗 크로스비는 “만약 정치가들이 LSD를 맛본다면 전쟁은 끝나게 될 텐데”라며 자신들의 천국이 모든 공간으로 전이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말했다.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의 보컬 그레이스 슬릭(Grace Slick)은 그녀를 둘러싸고 음악을 듣는 젊은이들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그녀는 공연에서 “우리는 자유, 그 중에서도 프리섹스를 이야기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관중들 사이에서는 “성적인 반응이나 남성성을 과시하려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없으”며, “LSD에 취해 서로에 대한 사랑에 빠져있는 공동체적인 상태가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레이스 슬릭의 이러한 평가는 사랑과 평화의 축제인 1969년의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그대로 증명되는 듯 했다.

하지만 바로 몇 달 뒤 열린 알타몬트(Altamont) 페스티벌에서 우드스탁의 꿈은 악몽으로 변한다. 우드스탁의 열기를 재현하고 싶었던 롤링 스톤즈는 다른 유명한 사이키델릭 밴드들을 초청하여 콘서트를 연다. 그러나 롤링 스톤즈가 경호대로 불렀던 악명 높은 오토바이 폭주족 헬스 엔젤스(Hell's Angels)의 멤버가, 백인여성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한 흑인관객을 죽이는 비극이 벌어진다. 또한 약물과용으로 3명이 사망하고, 여러 폭력 사태가 끊이지 않는 등 온갖 끔찍한 사고들이 벌어져 가장 추악한 행사로 기록되었다.

공연장 밖에서도 알타몬트 페스티벌에서의 문제를 예외적인 일로 묻어버릴 수 없게 만드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집단생활을 하던 히피 찰스 맨슨이 비틀즈 곡 ‘Helter, Skelter’에서 영감을 얻어 여배우 샤론 데이트를 교살시키고, 히피들의 상징적인 장소 하이트 애쉬베리에서는 LSD에 만취한 여성이 집단강간을 당한 후 살해된 채 발견됐다. 사람들은 1960년대 젊은이들의 저항운동이 그 이면을 드러내며 막을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사랑’예찬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히피운동이 왜 실패한 시도가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뚜렷한 해답을 제시하기 힘들다. 현실과 동떨어져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유토피아적 관념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어떤 저항적인 코드든지 기존 의미체계 속으로 끌어당겨 대량생산되는 상품의 형태로 전환시켜버리는 지배문화의 무차별적 힘이 이들의 순수함을 변질시킨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히피운동이 평화나 사랑, 자연과 같은 특정 사안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이고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외부의 권력관계를 그대로 번복했다는데 그 모순이 자리 잡고 있었다.

히피 그룹들은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의식을 공유하긴 했지만, 그 반대의 구호는 추상적인 것에 불과했고, 대체적으로 정치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당시 베트남전과 함께 가장 핵심적인 쟁점 중 하나였던 흑인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대부분 백인 중산층 자녀였던 이들은 그들의 부모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흑인들도 그들의 문제를 ‘사랑’에 대한 예찬만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하지만 상황은 달랐다.

히피운동이 사그라질 무렵 미디어에서는 히피 청년들에게 날마다 ‘집으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이들의 중산층 부모들은 ‘여전히 너희를 사랑한다’는 피켓을 들고 다니면서 그들의 하얀 자녀들이 짧은 방랑을 끝마치고 안식처로 되돌아 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저항적인 흑인청년들에 대해서는 냉혹한 시선을 보냈다. 당시 FBI국장이었던 에드가 후버(Edgar Hoover)는 급진적인 흑인 학생집단인 블랙 팬더스당을 ‘국가 최대의 적’으로 규정짓고 폭력적인 탄압정책을 펼쳤다. 히피들이 그들의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흑인들은 그들의 집 안에서도 끌려 나와 폭행을 당했다.

히피공동체 그루피의 의미

히피운동은 당시 여성해방운동에 대해서는 보다 더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사이키델릭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밴드로 평가되는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보컬이면서 히피들의 히로인이었던 그레이스 슬릭도 여성해방운동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다른 많은 중요한 사안들 앞에서 그건 터무니없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이다. 왜 갑자기 요리를 못한다고 선언하고 그것에 대해 불평을 해 대는지. 여기 이 집에서 많은 남자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아무도 나에게 요리하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그레이스 슬릭이 요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당시 제퍼슨 에어플레인 멤버들이 공동 거주하던 샌프란시스코의 집에서는 셀리 만(Sally Mann)이라는 나이 어린 그루피(groupie)가 요리와 세탁 등 모든 가사 일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루피들을 소개한 1969년 롤링스톤즈(The Rolling Stone)의 기사에 따르자면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멤버들은 셀리 만에게 고맙다고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레이스 슬릭은 자신이 여성이면서도 히피문화내의 여성의 문제, 그루피들의 문제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션이라면 어디든지 따라다니는 열성 소녀팬들을 지칭하는 모멸적인 표현 ‘그루피’란 개념이 생긴 것이, 남성적이고 여성폄하적인 성격을 가진 파워풀한 남근 록(Cock Rock)이 주류가 된 1970년대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여성적 가치를 중시하고 성의 해방을 내세웠던 1960년대란 것은 얼핏 이상하게 여겨질 지 모른다. 하지만 1960년대 중후반 히피운동에서 예찬한 여성성이 단지 자연으로서의 어머니, 즉 현대사회에서 벗어나 자궁으로 퇴행하고 싶어하는 소년들을 위한 개념이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히피운동이 주장했던 자유의 한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집에서 벗어나 남성들처럼 저항의 길을 가고 싶어했던 여성들에게 허용되었던 것은 오직 ‘프리섹스로의 길’뿐이었다.

모든 가치를 전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내세웠던 급진적인 뮤지션 프랭크 자파(Frank Zappa)는 그루피들을 ‘성 해방의 자유의 전사’로 묘사하며 모멸적인 예찬론을 폈다. “결국 그녀(그루피)들의 대부분은 사무직 노동자나 공장 노동자 같은 평범한 남자들과 결혼하겠지. 남자들은 화려한 성적모험을 거친 (성적으로) 기술이 뛰어난 소녀들을 얻게 되니 행운이 되겠고, 이건 나라 전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야. 남자들은 더 행복해지고, 그들은 자기 일을 더 잘하게 될 테니까.”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추앙받는 지미 헨드릭스 역시 “나는 (내가 연주를 했던) 도시를 오직 그곳의 여자들에 의해서만 기억한다. 너를 둘러싸고 네 양말을 빨아주고 네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무엇이든 하는 여자들 말이야”라고 말하며 그의 여정에 그루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야기했다.

가사노동, 히피여성들에게 주어진 의무

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는 1970년대 펑크 무브먼트에서 여성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등장하기 이전에 록음악에 여성은 부재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이야기한다. 1960년대 록음악에서 여성이 어떤 의미로든 존재한 흔적을 찾는다면 그것은 그루피에게서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제니스 조플린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그나마도 자신을 견뎌내지 못하고 약물 중독으로 사라지지 않았는가) 여성이 그 시대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착실히 타이프 치는 것을 배워 비서로서 사회에 진출하는 것보다는 그루피가 되어 그 자신이 추앙하는 뮤지션의 삶의 태도를 흡수해 버리는 것이 여성에게는 매우 급진적인 선택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선택의 대가로 그루피들은 자신들이 혐오했던 평범한 가사일들을 자신의 영웅을 위해서는 불평 없이 해내야 했다.

가사를 돌보는 역할은 그루피들에게만 부여된 것이 아니라 히피공동체 전체에서 여성들에게 주어진 공동의 의무였다. 남성히피들이 대지의 어머니, 태고의 공간을 꿈꾸며 그곳을 찾아가는 여정을 떠나는 동안 여성들은 이 모험의 현실적인 필요들을 충족시켜주면서 어머니의 역할을 해야 했다. 공동체에서 바느질, 요리, 세탁, 아이 돌보기는 당연히 여성의 몫이었고, 자연친화적 이념 때문에 전기나 냉장고, 세탁기 같은 문명의 기기들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알로 거스리(프로테스탄트 포크음악의 대부로 평가 받는 우디 거스리의 아들)의 노래 ‘Alice's Restaurant’(1969)는 “쓰레기를 버려 벌금 50달러를 문 것이 전과자로 처리되어 베트남 전쟁의 징병결격자가 되는” 우스꽝스러운 현실을 담은 반전 송으로도 유명하지만, 저항문화집단에서 여성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노래이기도 하다.

교회를 개조해서 만든 공동체 ‘엘리스의 레스토랑’에서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꿈꾸는 남편은 늘 취해 있고, 모험을 꿈꾸는 젊은이들은 오고 가지만 엘리스는 이 모험가들의 지렛대가 되기 위해 거기 머물러 끊임없이 노동을 제공해야 한다. ‘엘리스의 레스토랑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후렴은 여성을 모든 반문화적인 모험의 디딤돌, 혹은 반문화의 영웅들에게 수유를 해주는 만인의 어머니 위치에 묶어두었던 남성들의 시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중적 잣대 속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분열증

이러한 여성에 대한 이중적인 관점은 히피운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히피운동에 모태가 된 1950년대의 반문화 비트닉의 영웅인 잭 캐루악(Jack Kerouack)은 사회에 염증을 느끼고 방랑적 여행을 떠나는 내용의 책 <길 위에서 On the Road>에서 ‘대지의 어머니’인 자연과 직접 대면하기 위해 땅에 구멍을 뚫고 자위를 한다. 이는 남성이 자연을 찾아 유토피아로 가는 과정이 여성이 가야 할 과정과는 일치할 수 없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여성이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주변부로 물러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실제로 잭 캐루악은 작가 지망생이었으며 이 여행에 동참하고 싶어했던 부인(조이스 존슨)의 요청을 방해가 된다면서 거절했으며, 자신의 남성친구와 함께 길을 떠났다. 여성은 언제나 ‘아이나 원하므로’ 진정한 방랑의 길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그런 그가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뒤, 어머니의 돈과 보호를 받으면서 글을 쓰고 평생 살아갔다는 것은 아이러니 한 일이다. 여성은 방해가 되는 한은 부르주아적인 가치를 추종하는 세력이며,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한에서는 모성적인 안식처를 제공하는 자연적 공간이었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던 정치적인 학생조직 SDS(민주 사회를 위한 학생 연합)를 탈퇴한 마지 피어스(Marge Percy)는 급진적인 학생운동 안에서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성 우월주의자들의 여성에 대한 관념은 인습적이고 가부장적이었다. 그들은 총을 멘 베트남 여성이 그려진 포스터를 가리키며 당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이 진짜 해방된 여성이지. 만약 당신이 저런 역할을 한다면 그때 나는 당신이 혁명가라고 믿을 거야.’ (중략) 여성은 패배자일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여성이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부르주아적인 주관성에 머물며, 게다가 그 사고가 선천적으로 반혁명적이라는 것이다.”

1960년대의 히피문화 안에서 여성들은 기존 가치에 반기를 둔 저항에 동참했으나 그 저항에서 배제된 것은 너무도 많았다. 남성들의 혁명이 성공을 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노예상태에 두는 것과도 같았다. 여성들은 방랑의 길에서도 여성적인 역할을 다하도록 요구받았고 또 그것 때문에 비난 받기도 했다. 여기에서 분열증을 경험하지 않은 여성히피들이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지금 2000년대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그 모순 속에서 분열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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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겨스케이팅은 인종적 텃세를 극복한 것일까

피겨스케이팅은 인종적 텃세를 극복한 것일까
흑인선수 쉬르야 보날리의 ‘백플립’
 
[여성주의 저널 일다] 박희정
최근 들어 국제 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있는 김연아 선수의 인기로 국내에서도 피겨스케이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피겨 종목 중 특히 여성 싱글 부문은 아시아계 선수들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트리플 악셀’로 유명한 일본의 이토 미도리라는 선수가 등장하기 전까지 피겨스케이팅은 백인들의 전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이후 크리스티 야마구치, 미쉘 콴 등 아시아계 미국 선수들이 이름을 떨치게 되고, 일본이 집중적인 투자를 통해 피겨 강국으로 발돋움하면서 피겨스케이팅의 중심은 동양계 선수들에게로 옮겨졌다.
 
피겨스케이팅은 이제 백인 중심의 인종적 텃세를 극복한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럴까?
 
피겨 팬들은 종종 ‘왜 피겨스케이팅 계에서 흑인 선수를 찾아보기 힘든 것인가’ 의문을 제기한다. 그 이유가 꼭 피부색에 대한 차별 때문만이라고 단정지을 순 없다. 그러나 피부색이 장벽 요소 중 하나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비운의 선수로 기억되는 쉬르야 보날리
 
1994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롱프로그램 경기 중, 한 선수가 심판들 앞에서 아마추어 경기에는 금지된 기술인 백플립(뒤로 공중제비를 돌아 착지하는 것)을 보란 듯이 해버린다. 장내는 술렁이고 생방송을 지켜보고 있던 세계 팬들도 놀라움에 휩싸였다.
 
피겨 팬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이 사건의 주인공은 프랑스 출신의 쉬르야 보날리(Surya Bonaly)선수. 그는 1973년 프랑스 태생으로, 피겨 팬들에게는 탄력 있는 스핀과 뛰어난 점프 실력으로 주목 받았지만 실력에 비해 ‘흑인’이라는 이유로 평가 받지 못한 비운의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1988년부터 9번 연속 프랑스 챔피언, 1991년도 주니어 월드 챔피언, 1991년도부터 5회 연속 유럽챔피언, 거기에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은메달만 3번이라는 이력이 말해주듯 쉬르야 보날리는 톱랭커에 이름을 올릴 충분한 자격을 가진 선수였다.
 
여자선수로서 4회전 점프를 시도할 만큼 점프에서는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아 기술의 여왕으로 불린 보날리지만, 유독 예술성 점수에 있어서 만큼은 그에 걸맞은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해 세계 정상의 문턱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빙판은 미끄럽고 메달의 색깔에는 어느 정도 ‘운’이라는 요소도 따르긴 하지만 보날리가 예술 점수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은 예술적 표현의 부족함이라기보다 외모에서 온 차별이라는 견해가 더 설득력 있다.
 
피겨스케이팅이나 체조 등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겨루는 스포츠의 경우, 특히 외모에 대한 편견이 선수에 대한 평가와 동일시 되는 일이 종종 목격된다. 아테네 올림픽 리듬체조 경기를 중계하던 KBS의 한 해설위원은 흑인선수가 나오자 ‘피부색은 검지만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보날리와 같은 흑인이지만 세계선수권 우승을 거머쥔 데비 토마스는 ‘갈색’의 피부에 가녀린 몸매를 지녀 백인들 취향의 외모였던 데 반해, 쉬르야 보날리는 ‘여성스럽지 않은’ 근육질 몸매에 그야말로 ‘검은’ 피부색을 지녔고, 이런 점이 아름답지 않다고 받아들여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스포츠 무대의 외모, 인종차별 조롱한 ‘퍼포먼스’
 
피겨에서 예술 점수는 심판의 재량에 의해 매겨진다. 따라서 국가나 선수의 명성, 인종에 따른 편견이 개입된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현재 각 요소 별 점수를 합산해 총점으로 겨루는 신채점제에 비해, 6점이라는 만점을 기준으로 두고 상대적으로 점수를 매겼던 구채점제는 이런 비판에 더욱 취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김연아 선수를 두고 신채점제의 수혜자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같은 기술이나 예술적 수행력을 가지고도 실력 외적인 이유로 저평가될 가능성이 구채점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었다는 의미이다.
 
보날리 선수는 다른 선수들과 비교해 월등한 기술력을 가지고도 세계선수권이나 올림픽에서 납득하기 힘든 판정을 받은 것에 대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항의했던 선수다.
 
1994 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홈 코트의 이점을 등에 업은 사토 유카 선수에게 금메달을 뺏긴 보날리는 시상대에 오르는 것을 거부하고 시상대 옆에 서서 메달을 받았다. 그는 은메달을 목에 걸자마자 벗어 들고 눈물을 쏟았다.
 
세 번의 올림픽 참가 중 마지막 대회였던 나가노 올림픽에서 선보인 ‘백플립’은 아마추어 시절의 종지부를 찍는 시점에서 ‘한풀이’를 위한 퍼포먼스로 보였다. 당시 올림픽에서 보날리는 마지막 그룹 중 3회전-3회전의 고난이도 콤비 점프를 넣은 유일한 선수였음에도 쇼트 프로그램에서 6위를 기록했다.
 
이어진 프리 프로그램 경기에서 초반에 삼회전 살코 점프에서 실수를 하면서 메달권에서 벗어나자,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부상위험이 높다는 이유로 금지된 기술인 '백플립'을 심판들 코 앞에서 선보였다. 모든 점프는 한쪽 발로 착지해야 한다는 규정에 맞춰 ‘한 발로 착지’하면서.
 
인종도 국경도 초월한다는 스포츠 무대가 사실은 더 차별적이었다는 점을 통렬하게 조롱한 한 판 ‘시위’였다.
 

2008/03/21 [02:32] ⓒ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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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황인숙 시집 「자명한 산책」-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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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로서의 자괴감

정신과 의사로서의 자괴감

봄이었나 싶더니 어느새 초여름의 문턱에 들어선 느낌이다.
해마다 목련꽃이 질 무렵이면 생각나는 환자가 있다.
전공과 상관없이 모든 의사는 치료가 잘된 환자도 잘 기억하겠지만 그보다는 삶을 달리하게 된 환자들을 잘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주치의를 맡은 것은 전공의(레지던트) 1년차 시절이었으니까 실력은 없었지만 정말 열의 하나만은 대단했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결혼한 주부임에도 상태가 악화되면 미스코리아 대회를 나간다고 살림을 하지 않는 증상이 있었다. 게다가 피아노를 배우면 키가 커져 미스코리아에 당선이 될 거라는 망상을 지닌 만성 정신분열병 환자였다. 그녀의 남편은 가난한데다가 나이도 많은 노총각이었다가 그녀를 만나 결혼했는데 자신에게는 너무 과분한 여자라고 여기며 오랜 병치레에도 전혀 지쳐 하는 모습이 없었다.

그는 면회시간마다 아직 증상이 가시지 않은 그녀에게 갖은 수모를 다 당하면서도 수시로 병원을 찾아왔다. 나는 남편을 그렇게 대하는 그녀를 보고 나도 몰래 미운 감정까지 들었는지 그녀를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계속 항정신병 약물을 올리고 수시로 면담실로 불러 강요에 가까운 일방적인 상담을 진행했다. 그녀의 망상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하나하나 따지고 그녀의 남편이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아느냐며 이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망상은 찾기 힘들게 되었고 남편에 대한 공격적 태도도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녀는 점차 말수를 잃어갔고 어느날 부터인가 병든 정신으로 살아가는게 싫고 자신이 죽음으로써 친정식구들과 남편이 편해질거라며 강한 자살에의 집착을 보였다.

한동안 치료를 해서 그러한 우울감이 가시자 퇴원을 했는데 우려했던 대로 통원치료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개월 지나 목련이 송이채 뚝뚝 떨어질 무렵, 그녀의 남편이 찾아와 그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주고 힘없이 떠나갔다.

그 소식을 접한 후로 나는 한동안 자괴감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리고, 섣부른 열정만으로는 환자를 치료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신병환자가 가지고 있는 망상은 어찌보면 낭떠러지 같은 현실에서 위험하지만 그를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주는 썩은 동아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환자의 경우 그 썩은 줄만이 유일한 선택이고 삶의 위안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튼튼한 동아줄을 줄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썩은 동아줄만을 싹둑 잘라버린 셈이다.

오늘도 내 진료실 안에서는 은밀하고 기괴한 망상들이 떠돌아다닌다.
나는 그런 망상을 깨뜨리는 석공이 아니라 망상 속에 담긴 삶의 에너지를 좀더 건강한 형태의 에너지로 바꾸려는 연금술사가 되려고 노력한다.

-2004년 봄, 태능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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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유형의 노이로제 환자들.

“정신 분석가들은 이전보다 자주, 주로 관심의 상실과 주체성의 결여라는 특징을 지닌 새로운 유형의 노이로제 환자를 대하게 된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정신과 의사는 자주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의문을 가진 환자를 만난다. 나는 이러한 상태를 <실존적 공허>라고 부른다.... (중략)... 나는 프로이드가 보나파르트 공작부인에게 보내 편지 속에서 ‘사람은 삶의 의미나 가치에 의문을 가질 때 그 사람은 병이 든 것이다.’라는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오히려 삶에 의문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인간임을 입증한 자라고 생각한다.”
 

- 빅터 프랭클 <심리요법과 현대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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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정신과 의원을 오픈한지 한달 반이 넘었습니다. 3년 전 개원의사로 지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사람들이 병원에 가지고 오는 문제들이 많이 다르다는 느낌입니다. 물론 지역적인 특성이나 책의 영향도 있겠지만 지금 병원을 찾는 사람들은 딱히 정신과 환자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고 싶은 것이 없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직장생활의 의미가 없다!’ 등 실존적 공허감과 삶의 방향성 부재에 따른 문제를 많이 호소합니다. 실제로 그들의 문제를 잘 표현해줄 수 있는 적절한 진단명도 없습니다. 물론 우울감이나 과도한 걱정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라고 진단내릴 수도 없지 않습니까?   

   
저는 한동안 프로이드 외에 다른 정신분석가들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프로이드의 이론만으로 제 삶의 문제가 잘 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고 해서 ‘실존적 공허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뒤늦게 저는 다른 정신의학자들과 심리학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의미와 가치를 찾아가는 인간의 행위를 내적 갈등에 대한 방어기제로만 바라보는 것은 지나치게 편협한 시각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깨달음을 기초로 저는 심리상담과 자기계발이라는 두 분야의 일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앞으로 많은 정신과 의사들이 현 정신의학적 진단체계로는 정의내리기 어려운 사람들을 더 많이 마주할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정신의학은 정신의 병리현상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인간의 다채로운 정신에 대해 보다 폭넓은 접근이 이루어질 것이라 봅니다.  
 
존재에 대한 의문, 삶의 의미에의 탐색, 자기실현에의 지향성, 생산적인 삶에 대한 도전과 열정... 이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존중되어져야 할 인간만이 지닌  종적 특성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한편으로 우울이나 불안때문에 삶의 무의미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현실때문에 우리가 우울이나 불안에 시달리는 것은 아닐까요?
 

- 2007. 6. 7 週 2회 '당신의 삶을 깨우는' 문요한의 Energy Plus [1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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