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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D를 선택한 히피족

LSD를 선택한 히피족
히피문화 속 ‘여성’의 의미-1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현주
<’성 해방’의 기치를 내걸었던 히피운동 속 여성들의 위치는 어떠했을까. “모든 반문화 운동이라는 것이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소외 받는 계층들의 특별한 경험들에 대한 자리를 마련해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세일라 휘틀리의 지적은 과거의 문화운동뿐 아니라 오늘날 진보적 운동들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말이다. 일다는 3회에 걸친 연재를 통해 사랑과 평화를 갈구했던 히피운동에서 여성의 위치와, 그 안에서 여성뮤지션들의 고민은 어떠했는지 조망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샌프란시스코에 갈 때는 머리에 꽃을 꽂아요.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다정한 사람들을 만날 거에요/ …거기에는 모든 세대와 새로운 설명이 있어요.” 스콧 맥켄지(Scott McKenzie)가 부른 노래 ‘샌프란시스코(San Fransisco)’의 가사처럼, 1960년대 중반 샌프란시스코는 머리에 꽃을 단 히피들의 낙원처럼 보였다. 덥수룩하게 늘어뜨린 머리칼과 수염, 인디언처럼 총 천연색의 복장에 장신구를 하고, 느릿느릿 무리 지어 걸어 다니고 있는 이들은 처음에는 기성세대의 눈에 위협적이라기보다는 한심하고 철없는 젊은이들처럼 보였다.

‘사랑’과 ‘자유’ 그리고 ‘평화’를 주장하는 이들의 모습 속에는 지금까지 기성세대의 가치에 반기를 들고 노골적으로 저항을 해 오던 반항적인 젊은이의 공격성은 없었다. 으슥한 거리를 걷고 있는 현명한 중년의 신사라면, 파키스탄인들에게 발길질을 가하는 스킨헤드족에게 충고를 늘어놓는 것보다는 모르는 채 지나가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또한 런던의 카나비 스트리트에서를 허름하게 차려 입고 지나갔다가는 깔끔하게 차려 입은 모드족들의 삿대질을 당하게 될 터였다.

하지만 미국에선 오히려 일반노동자들이 머리가 긴 사람만 보면 “꽃이나 좋아하는 호모새끼들”이라며 폭력을 가하곤 했다. 이 “계집애 같은” 히피들이 무슨 저항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가진 것은 낭만적인 구호들과 거세된 듯한 표정, 그리고 LSD(환각제) 뿐인 것처럼 보였다.

하위집단이 선택한 약물의 ‘남성성’

히피족과 LSD의 긴밀한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1960년대 초중반 런던에 나타난 모드족과 그들이 애용한 진정제, 암페타민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모드족(Mods)은 1950년대 영국의 경제적 급성장의 시기를 거쳐 나타난 ‘풍요의 아이들’이었지만, 부모세대의 가치관에 반감을 가지고 모든 일에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나 이들이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도시문명이나 산업화를 거부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에 대해 낭만적인 기대감을 가지며, 속도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강박증적으로 외모에 신경을 썼다. 프랑스 댄디풍의 줄무늬 양복에, 스프레이로 짧은 머리를 부풀린 이들은 말 그대로 “패션 잡지에서 그대로 튀어 나온”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들은 항상 길거리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매만졌고, 옷을 더럽힐 염려가 없는 유선형디자인의 이탈리아제 베스파 스쿠터를 몰고 다녔다.

백인노동자 계층이 주를 이루었던 모드족은 평일에는 자본의 ‘맹목적인 연료로 소비되는 것을 묵묵히 감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삶을 증폭하여 노동의 과정에서 나온 자본의 상품들의 적극적인 소비자가 되기를 원했고, 상류층의 사교파티에서나 어울릴 옷들을 자신들의 뒷골목으로 끌어내렸다. 모드족은 20세기의 모던 드럭(modern drug)이라고 할 수 있는 암페타민을 이용했는데, 암페타민은 불면증을 유도하는 효과가 있었다. 따라서 잠과 게으름을 경멸하는 모드족들이 6일간의 지루한 노동이 끝나고 난 후, 48시간 동안의 주말을 잠을 자지 않고 즐기는 데 몰두할 수 있었다. 이는 남성다운 청년이 주말 내내 어머니의 영역에서 벗어나 거칠고 추운 공간을 돌아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암페타민은 여성에 대한 성욕은 억제시키고 공격성과 속도감을 증대시킴으로써 그들의 남성주의적인 성향에 영향을 미쳤다. 모드족들은 여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남자친구들의 눈에 띄기 위하여 멋을 부렸다. 히피족들에게 사랑의 행위는 하나의 목적이었지만, 모드족들의 연애는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모드족의 우상이 된 ‘더 후(The Who)’의 공연장에서는 “늙기 전에 죽어버리고 싶다”는 노랫말과 함께 기타를 때려 부수는 일이 연례가 되어가고 있었다.

평화를 가져오는 약물, LSD

모드족을 비롯한 대부분의 하위문화 집단이 선택한 드럭이 남성성과 공격성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평화주의와 자연에의 회귀, 그리고 자유로운 사랑을 주장하는 히피족들에게 환각제인 LSD는 최고의 선택으로 보인다. 히피족이 만약 암페타민이나, 사람을 차분하게 진정시켜 내면으로 파고들게 하는 코카인같은 드럭을 선택했다면 그들의 성향은 현재 우리가 기억하는 것과 상당히 달라져 있었을 지도 모른다.

가장 강력한 환각제 중의 하나인 LSD(Lysergic Acid Diethlamide)는 호밀에 생기는 곰팡이인 맥각에서 추출되는 화학물질로, 1938년 스위스 화학자인 앨버트 호프만이 처음으로 곰팡이에서 추출해냈다. 호프만은 1943년 LSD의 성질을 연구하는 실험을 하던 중 실수로 피부에 LSD액 소량을 주입시켰다가 이상한 의식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LSD를 복용하면 혈관 수축물질인 세로토닌의 반응에 이상이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것이 뇌에 어떻게 작용하는 지는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미량만 복용해도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이한 왜곡과 심한 환각과 망상을 불러일으키거나, 충동적인 개방성, 혹은 사랑의 감정상태를 끌어온다.

LSD는 주로 기분 좋은 각성효과를 가져온다고 알려져 있지만, 심리적으로 부정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약을 복용하거나 다른 약과 함께 복용하면 극심한 우울증 등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또한 LSD는 대부분의 다른 약물들과는 달리 중독성이 없다. 초기에 LSD는 각종 심리 치료, 특히 성기능 장애 치료 등 의학 분야에서만 연구, 활용됐으나 LSD의 환상적인 효과에 대한 소문은 급속하게 퍼져서 점차 많은 사람들이 LSD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히피공동체에서 찾은 낙원의 세계

LSD를 본격적으로 대중화한 사람은 티모시 리어리(Timothy Leary)였다.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 티모시 리어리는 LSD의 효능에 흠뻑 빠져, 대학에서는 LSD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이 신비의 약물이 ‘정신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사물의 진리를 깨닫게 하여 ‘신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또 ‘자기애가 아닌 집단에의 소속감’과 ‘타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약물이 평화를 가져 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티모시 리어리는 스스로가 LSD를 복용한 후 처음 만난 여성과 하루 만에 결혼식을 치렀으며, 그의 이런 모습과 여러 히피들이 집단으로 LSD를 복용하고 환각에 빠져들어 집단적인 사랑에 빠지는 모습이 TV를 통해 공개되면서 수많은 청년들이 히피공동체를 찾아 샌프란시스코로 모여들었다. 베트남전, “상대가 자본주의자가 아니라면 그것은 공산주의자로 없애버려야 한다”는 덜레스(1953년 D.D.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 반공주의자)식의 광적인 공산주의 혐오, 그리고 이기적인 소비지상주의에 지쳐있던 젊은이들은 샌프란시스코의 이 히피공통체에서 이상적인 낙원의 모습을 발견했다.

히피족들은 이 낙원을 미래의 어떤 상상의 공간이 아닌, 언어가 존재하기 이전의 모습으로 상정했다. LSD에 취한 이들은 환각 상태에서 이성적인 언어가 무너지고, 시간과 공간 등 모든 견고해 보이는 것들이 왜곡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데, 히피들은 꿈을 꾸는 듯 느리게 공중을 부유하는 듯한 이 상태가 어머니의 자궁 속에 들어가 있는 경험과 다름없다고 느꼈다. 모든 자연의 근본과도 같은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울려오는 무의식의 메시지와 접촉하려고 했는데 이 메시지는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 완전한 자유와 사랑이 있는 세계였다.

히피의 남성들은 스스로를 아버지의 폭압에서 벗어나 어머니의 손길에 의해 순화되고 중성화된 인간으로 보았으며, 거친 남성성 과시하는 행위를 폭력적인 것으로 간주하곤 했다. 또한 성 억압적인 당시의 가치관에 대항하여 프리섹스주의를 실천하면서, 자신들의 ‘성의 해방’을 통하여 ‘성의 평등’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연 구체적인 문제를 무시한 프리섹스주의적인 성의 해방이 성의 평등과 동의어가 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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