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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운동의 여성주의적 한계

히피운동의 여성주의적 한계
히피문화 속 ‘여성’의 의미-2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현주
1969년 8월, 뉴욕 근교의 한 농장에서 사흘간 열린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유토피아와 같은 사랑과 평화의 황홀경을 보여주었다. 애초에 유료콘서트로 기획되었으나 모든 표가 매진되고 표를 구하지 못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자 주최 측은 무료공연을 선언한다. 히피들은 지금까지 음반기획사들이 꾸려 온 비싼 공연들에 불만을 표시해 왔고, 물질주의를 배격하고 공유정신을 내세웠던 히피들이 공연티켓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구걸이나 도둑질, 대마초를 키워 파는 방법들뿐이었다.

따라서 이번 무료축제는 그들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것이기도 하면서, 타인이 기획하고 마련한 축제에 초대된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축제를 만들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물과 음식이 부족하고 화장실도 엉망인데다가 사흘 내내 폭우가 쏟아져 내리는 등 객관적인 상황은 엉망이었지만 우드스탁의 젊은이들은 음식과 약 등을 서로 나누어 쓰면서 평화의 제전을 만들어 낸다.

우드스탁의 평화와 알타몬트의 폭력

30만~40만의 젊은이들이 뿜어대는 대마초의 연기와 LSD의 기운 가운데 슬라이 앤 패밀리 스톤은 대표적인 드럭송 ‘나는 너를 더 높은 곳으로 데려가고 싶어’(I want to take you higher)를 부르고 크로스비 스틸 내시 앤 영은 ‘나무 배’(Wooden Ship)를 통해 불만스러운 나라를 버리고 (노아의 방주와도 같은 나무배를 타고) 유토피아로 떠나자고 노래한다.

반전의 메시지도 빠지지 않았다. 컨트리 조 맥도널드는 ‘I feel like I'm fixing to die rag’에서 “전쟁터에 나간 아들이 관에 실려 돌아오는 첫 번째 부모가 되라”고 말하면서 베트남 전에 찬성한 사람들을 향해 냉소적인 저주를 내뱉었다. 그룹 Byrds의 데이빗 크로스비는 “만약 정치가들이 LSD를 맛본다면 전쟁은 끝나게 될 텐데”라며 자신들의 천국이 모든 공간으로 전이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말했다.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의 보컬 그레이스 슬릭(Grace Slick)은 그녀를 둘러싸고 음악을 듣는 젊은이들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그녀는 공연에서 “우리는 자유, 그 중에서도 프리섹스를 이야기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관중들 사이에서는 “성적인 반응이나 남성성을 과시하려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없으”며, “LSD에 취해 서로에 대한 사랑에 빠져있는 공동체적인 상태가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레이스 슬릭의 이러한 평가는 사랑과 평화의 축제인 1969년의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그대로 증명되는 듯 했다.

하지만 바로 몇 달 뒤 열린 알타몬트(Altamont) 페스티벌에서 우드스탁의 꿈은 악몽으로 변한다. 우드스탁의 열기를 재현하고 싶었던 롤링 스톤즈는 다른 유명한 사이키델릭 밴드들을 초청하여 콘서트를 연다. 그러나 롤링 스톤즈가 경호대로 불렀던 악명 높은 오토바이 폭주족 헬스 엔젤스(Hell's Angels)의 멤버가, 백인여성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한 흑인관객을 죽이는 비극이 벌어진다. 또한 약물과용으로 3명이 사망하고, 여러 폭력 사태가 끊이지 않는 등 온갖 끔찍한 사고들이 벌어져 가장 추악한 행사로 기록되었다.

공연장 밖에서도 알타몬트 페스티벌에서의 문제를 예외적인 일로 묻어버릴 수 없게 만드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집단생활을 하던 히피 찰스 맨슨이 비틀즈 곡 ‘Helter, Skelter’에서 영감을 얻어 여배우 샤론 데이트를 교살시키고, 히피들의 상징적인 장소 하이트 애쉬베리에서는 LSD에 만취한 여성이 집단강간을 당한 후 살해된 채 발견됐다. 사람들은 1960년대 젊은이들의 저항운동이 그 이면을 드러내며 막을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사랑’예찬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히피운동이 왜 실패한 시도가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뚜렷한 해답을 제시하기 힘들다. 현실과 동떨어져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유토피아적 관념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어떤 저항적인 코드든지 기존 의미체계 속으로 끌어당겨 대량생산되는 상품의 형태로 전환시켜버리는 지배문화의 무차별적 힘이 이들의 순수함을 변질시킨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히피운동이 평화나 사랑, 자연과 같은 특정 사안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이고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외부의 권력관계를 그대로 번복했다는데 그 모순이 자리 잡고 있었다.

히피 그룹들은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의식을 공유하긴 했지만, 그 반대의 구호는 추상적인 것에 불과했고, 대체적으로 정치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당시 베트남전과 함께 가장 핵심적인 쟁점 중 하나였던 흑인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대부분 백인 중산층 자녀였던 이들은 그들의 부모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흑인들도 그들의 문제를 ‘사랑’에 대한 예찬만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하지만 상황은 달랐다.

히피운동이 사그라질 무렵 미디어에서는 히피 청년들에게 날마다 ‘집으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이들의 중산층 부모들은 ‘여전히 너희를 사랑한다’는 피켓을 들고 다니면서 그들의 하얀 자녀들이 짧은 방랑을 끝마치고 안식처로 되돌아 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저항적인 흑인청년들에 대해서는 냉혹한 시선을 보냈다. 당시 FBI국장이었던 에드가 후버(Edgar Hoover)는 급진적인 흑인 학생집단인 블랙 팬더스당을 ‘국가 최대의 적’으로 규정짓고 폭력적인 탄압정책을 펼쳤다. 히피들이 그들의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흑인들은 그들의 집 안에서도 끌려 나와 폭행을 당했다.

히피공동체 그루피의 의미

히피운동은 당시 여성해방운동에 대해서는 보다 더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사이키델릭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밴드로 평가되는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보컬이면서 히피들의 히로인이었던 그레이스 슬릭도 여성해방운동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다른 많은 중요한 사안들 앞에서 그건 터무니없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이다. 왜 갑자기 요리를 못한다고 선언하고 그것에 대해 불평을 해 대는지. 여기 이 집에서 많은 남자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아무도 나에게 요리하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그레이스 슬릭이 요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당시 제퍼슨 에어플레인 멤버들이 공동 거주하던 샌프란시스코의 집에서는 셀리 만(Sally Mann)이라는 나이 어린 그루피(groupie)가 요리와 세탁 등 모든 가사 일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루피들을 소개한 1969년 롤링스톤즈(The Rolling Stone)의 기사에 따르자면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멤버들은 셀리 만에게 고맙다고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레이스 슬릭은 자신이 여성이면서도 히피문화내의 여성의 문제, 그루피들의 문제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션이라면 어디든지 따라다니는 열성 소녀팬들을 지칭하는 모멸적인 표현 ‘그루피’란 개념이 생긴 것이, 남성적이고 여성폄하적인 성격을 가진 파워풀한 남근 록(Cock Rock)이 주류가 된 1970년대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여성적 가치를 중시하고 성의 해방을 내세웠던 1960년대란 것은 얼핏 이상하게 여겨질 지 모른다. 하지만 1960년대 중후반 히피운동에서 예찬한 여성성이 단지 자연으로서의 어머니, 즉 현대사회에서 벗어나 자궁으로 퇴행하고 싶어하는 소년들을 위한 개념이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히피운동이 주장했던 자유의 한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집에서 벗어나 남성들처럼 저항의 길을 가고 싶어했던 여성들에게 허용되었던 것은 오직 ‘프리섹스로의 길’뿐이었다.

모든 가치를 전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내세웠던 급진적인 뮤지션 프랭크 자파(Frank Zappa)는 그루피들을 ‘성 해방의 자유의 전사’로 묘사하며 모멸적인 예찬론을 폈다. “결국 그녀(그루피)들의 대부분은 사무직 노동자나 공장 노동자 같은 평범한 남자들과 결혼하겠지. 남자들은 화려한 성적모험을 거친 (성적으로) 기술이 뛰어난 소녀들을 얻게 되니 행운이 되겠고, 이건 나라 전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야. 남자들은 더 행복해지고, 그들은 자기 일을 더 잘하게 될 테니까.”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추앙받는 지미 헨드릭스 역시 “나는 (내가 연주를 했던) 도시를 오직 그곳의 여자들에 의해서만 기억한다. 너를 둘러싸고 네 양말을 빨아주고 네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무엇이든 하는 여자들 말이야”라고 말하며 그의 여정에 그루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야기했다.

가사노동, 히피여성들에게 주어진 의무

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는 1970년대 펑크 무브먼트에서 여성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등장하기 이전에 록음악에 여성은 부재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이야기한다. 1960년대 록음악에서 여성이 어떤 의미로든 존재한 흔적을 찾는다면 그것은 그루피에게서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제니스 조플린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그나마도 자신을 견뎌내지 못하고 약물 중독으로 사라지지 않았는가) 여성이 그 시대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착실히 타이프 치는 것을 배워 비서로서 사회에 진출하는 것보다는 그루피가 되어 그 자신이 추앙하는 뮤지션의 삶의 태도를 흡수해 버리는 것이 여성에게는 매우 급진적인 선택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선택의 대가로 그루피들은 자신들이 혐오했던 평범한 가사일들을 자신의 영웅을 위해서는 불평 없이 해내야 했다.

가사를 돌보는 역할은 그루피들에게만 부여된 것이 아니라 히피공동체 전체에서 여성들에게 주어진 공동의 의무였다. 남성히피들이 대지의 어머니, 태고의 공간을 꿈꾸며 그곳을 찾아가는 여정을 떠나는 동안 여성들은 이 모험의 현실적인 필요들을 충족시켜주면서 어머니의 역할을 해야 했다. 공동체에서 바느질, 요리, 세탁, 아이 돌보기는 당연히 여성의 몫이었고, 자연친화적 이념 때문에 전기나 냉장고, 세탁기 같은 문명의 기기들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알로 거스리(프로테스탄트 포크음악의 대부로 평가 받는 우디 거스리의 아들)의 노래 ‘Alice's Restaurant’(1969)는 “쓰레기를 버려 벌금 50달러를 문 것이 전과자로 처리되어 베트남 전쟁의 징병결격자가 되는” 우스꽝스러운 현실을 담은 반전 송으로도 유명하지만, 저항문화집단에서 여성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노래이기도 하다.

교회를 개조해서 만든 공동체 ‘엘리스의 레스토랑’에서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꿈꾸는 남편은 늘 취해 있고, 모험을 꿈꾸는 젊은이들은 오고 가지만 엘리스는 이 모험가들의 지렛대가 되기 위해 거기 머물러 끊임없이 노동을 제공해야 한다. ‘엘리스의 레스토랑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후렴은 여성을 모든 반문화적인 모험의 디딤돌, 혹은 반문화의 영웅들에게 수유를 해주는 만인의 어머니 위치에 묶어두었던 남성들의 시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중적 잣대 속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분열증

이러한 여성에 대한 이중적인 관점은 히피운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히피운동에 모태가 된 1950년대의 반문화 비트닉의 영웅인 잭 캐루악(Jack Kerouack)은 사회에 염증을 느끼고 방랑적 여행을 떠나는 내용의 책 <길 위에서 On the Road>에서 ‘대지의 어머니’인 자연과 직접 대면하기 위해 땅에 구멍을 뚫고 자위를 한다. 이는 남성이 자연을 찾아 유토피아로 가는 과정이 여성이 가야 할 과정과는 일치할 수 없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여성이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주변부로 물러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실제로 잭 캐루악은 작가 지망생이었으며 이 여행에 동참하고 싶어했던 부인(조이스 존슨)의 요청을 방해가 된다면서 거절했으며, 자신의 남성친구와 함께 길을 떠났다. 여성은 언제나 ‘아이나 원하므로’ 진정한 방랑의 길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그런 그가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뒤, 어머니의 돈과 보호를 받으면서 글을 쓰고 평생 살아갔다는 것은 아이러니 한 일이다. 여성은 방해가 되는 한은 부르주아적인 가치를 추종하는 세력이며,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한에서는 모성적인 안식처를 제공하는 자연적 공간이었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던 정치적인 학생조직 SDS(민주 사회를 위한 학생 연합)를 탈퇴한 마지 피어스(Marge Percy)는 급진적인 학생운동 안에서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성 우월주의자들의 여성에 대한 관념은 인습적이고 가부장적이었다. 그들은 총을 멘 베트남 여성이 그려진 포스터를 가리키며 당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이 진짜 해방된 여성이지. 만약 당신이 저런 역할을 한다면 그때 나는 당신이 혁명가라고 믿을 거야.’ (중략) 여성은 패배자일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여성이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부르주아적인 주관성에 머물며, 게다가 그 사고가 선천적으로 반혁명적이라는 것이다.”

1960년대의 히피문화 안에서 여성들은 기존 가치에 반기를 둔 저항에 동참했으나 그 저항에서 배제된 것은 너무도 많았다. 남성들의 혁명이 성공을 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노예상태에 두는 것과도 같았다. 여성들은 방랑의 길에서도 여성적인 역할을 다하도록 요구받았고 또 그것 때문에 비난 받기도 했다. 여기에서 분열증을 경험하지 않은 여성히피들이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지금 2000년대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그 모순 속에서 분열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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