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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로서의 자괴감

정신과 의사로서의 자괴감

봄이었나 싶더니 어느새 초여름의 문턱에 들어선 느낌이다.
해마다 목련꽃이 질 무렵이면 생각나는 환자가 있다.
전공과 상관없이 모든 의사는 치료가 잘된 환자도 잘 기억하겠지만 그보다는 삶을 달리하게 된 환자들을 잘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주치의를 맡은 것은 전공의(레지던트) 1년차 시절이었으니까 실력은 없었지만 정말 열의 하나만은 대단했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결혼한 주부임에도 상태가 악화되면 미스코리아 대회를 나간다고 살림을 하지 않는 증상이 있었다. 게다가 피아노를 배우면 키가 커져 미스코리아에 당선이 될 거라는 망상을 지닌 만성 정신분열병 환자였다. 그녀의 남편은 가난한데다가 나이도 많은 노총각이었다가 그녀를 만나 결혼했는데 자신에게는 너무 과분한 여자라고 여기며 오랜 병치레에도 전혀 지쳐 하는 모습이 없었다.

그는 면회시간마다 아직 증상이 가시지 않은 그녀에게 갖은 수모를 다 당하면서도 수시로 병원을 찾아왔다. 나는 남편을 그렇게 대하는 그녀를 보고 나도 몰래 미운 감정까지 들었는지 그녀를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계속 항정신병 약물을 올리고 수시로 면담실로 불러 강요에 가까운 일방적인 상담을 진행했다. 그녀의 망상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하나하나 따지고 그녀의 남편이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아느냐며 이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망상은 찾기 힘들게 되었고 남편에 대한 공격적 태도도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녀는 점차 말수를 잃어갔고 어느날 부터인가 병든 정신으로 살아가는게 싫고 자신이 죽음으로써 친정식구들과 남편이 편해질거라며 강한 자살에의 집착을 보였다.

한동안 치료를 해서 그러한 우울감이 가시자 퇴원을 했는데 우려했던 대로 통원치료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개월 지나 목련이 송이채 뚝뚝 떨어질 무렵, 그녀의 남편이 찾아와 그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주고 힘없이 떠나갔다.

그 소식을 접한 후로 나는 한동안 자괴감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리고, 섣부른 열정만으로는 환자를 치료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신병환자가 가지고 있는 망상은 어찌보면 낭떠러지 같은 현실에서 위험하지만 그를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주는 썩은 동아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환자의 경우 그 썩은 줄만이 유일한 선택이고 삶의 위안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튼튼한 동아줄을 줄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썩은 동아줄만을 싹둑 잘라버린 셈이다.

오늘도 내 진료실 안에서는 은밀하고 기괴한 망상들이 떠돌아다닌다.
나는 그런 망상을 깨뜨리는 석공이 아니라 망상 속에 담긴 삶의 에너지를 좀더 건강한 형태의 에너지로 바꾸려는 연금술사가 되려고 노력한다.

-2004년 봄, 태능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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