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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이여 잘 있거라

 

Ruth Milkman(1997), Farewell to the Facto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이종인 옮김,『공장이여 잘 있거라』, 황금가지, 1998

 

 루스 밀크만의『공장이여 잘 있거라』

-방법론적 검토를 중심으로 


 Ruth Milkman에 대하여

  루스 밀크만의 책은『젠더와 노동』이후 두 번째로 읽는 것이다. 산업관계와 노동연구자인 루스 밀크만은  젠더 사회학을 연구하고, ‘사회주의’를 곧잘 이론적 틀로서 사용하는 진보적 성향의 학자이다. 그녀는 ‘새로운 노동사’(new labor history)의 대표적인 학자로 거론되며, 신좌파(new left)로 분류되기도 한다. 자료를 검색하다가 나는 ‘Organizing the Unorganizable'3)이라는 글을 읽을 수 있었는데, 미국으로 온 이주노동자들의 관점에서 조직화와 노동운동의 부흥을 조망한 글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는 그녀가 쓴『공장이여 잘 있거라』는 상당한 논란을 일으킬 만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3) Ruth Milkman(2006), "Organizing the Unorganizable : The Unlikely Spark for a Rebirth of Labor", L,A Story: Immigrant Workers and the Future of the U.S Labor History, New York: Russel Sage Foundation, 2006, 오민규 번역, “조직화가 불가능해보였던 대중들을 조직하기 : 거의 불가능해보였던 ‘노동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 월간『비정규노동』, 2007년 1월호

 



 

자동차 산업의 구조조정과 노동자들

 『공장이여 잘 있거라』는 1980년대 이후 불어 닥친 미국 자동차산업의 구조조정을 뉴저지 주의 GM-린든 공장을 통해 분석하고 있다. 그녀는 “노동자들의 관점에서”(Milkman 1997:14) 구조조정과 명예퇴직이라는 상황을 보고자 했다. 10년의 연구를 통해 그녀는 노동자들을 크게 두 부류-명예퇴직자와 잔류자-로 나누어 비교 분석한다.

  기존의 연구들은 탈산업화가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들을 주로 다루어왔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영화 ‘로저와 나’를 떠올려 보았다. ‘로저와 나’는 미국의 진보적 다큐멘터리 감독인 마이클 무어의 1989년 작품이다. 마이클 무어는 자신의 고향인 미시간 주의 플린트 시의 GM이 11개의 공장을 폐쇄 결정하여, 어떻게 한 도시가 완전히 파산 상태가 되는지를 담아낸다. 지금까지 주로 접해왔던 탈산업화 혹은 구조조정에 대한 연구들과 그에 대한 이미지들은 마치 ‘로저와 나’에서 보여주는 것과 거의 동일하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90년대 말 구조조정 시기에 노동자들의 극심한 반대투쟁이 있기도 했었다. 그래서 탈산업화와 명예퇴직이 노동자들을 주변화시키고, 노동자들의 소외와 불안을 가중시킨다고 생각해온 것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루스 밀크만은 자신이 직접 노동자들을 만나고 인터뷰해본 결과, 이와 같은 일방적인 가설들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그녀가 관찰한 결과들은 기존의 가설들을 완전히 뒤집을 만한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떠난 것을 행복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명예퇴직을 선택해서 “공장이여 잘 있거라”를 외치며 떠나갔다. 남아있는 노동자들(잔류자들)은 일본식 ‘다품종 소량방식’을 모방한 적기체제의 도입과 노동자 참여라는 새로운 회사 정책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이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고, 그들의 불만은 지속되고 있었다.


왜 노동자들은 “공장이여 잘 있거라”를 외쳤는가

  그렇다면 왜 이 노동자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떠나는 것을 행복으로 느꼈는가? 공장폐쇄가 노동자들에게는 축복이었다고? 탈산업화는 노동자들에게 불행이 아닌 행복을 가져다주었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지배적인 자본가들의 논리가 아닌가? 이런 식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밀크만의 관찰 결과에 적지 않은 미국의 좌파 지식인 혹은 사회주의자들을 당황시켰다. 밀크만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역설적 발견사항에 대한 해명의 실마리는 조사연구방법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집단의 노동자들에게서 찾아야 한다.”(Milkman 1997:243) 즉, 밀크만이 보고 들은 것들이 잘못되었다, 아니다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노동자의 관점에서 다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녀가 보기에 “조립라인의 일이 일부 좌파 지식인들에게는 매혹적일지 몰라도 노동자 자신은 결코 그것을 낭만적인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신은 무자비하게 비인간적인 작업 리듬으로부터 도망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Milkman 1997:32) 즉, 노동자들에게 GM공장에서 일을 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었다. 높은 임금과 훌륭한 사내 복지 시스템은 노동자들에게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주었지만, 한편으로 끊임없이 소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노동현장과 권위주의적 감독 시스템은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공장과 조립라인의 처참함을 ‘노동공장’ ‘포로수용소’ ‘노예집합소’ ‘강제수용소’로 (Milkman 1997:80) 표현할 정도로 공장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명예퇴직을 선택한 노동자들은 전자를 포기하면서 까지도 후자를 벗어나고 싶어했다. 이것은 포기한 것보다 선택하는 것이 가져다주는 만족이 더 크다는 점에서 일종의 ‘기회비용’인 셈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결단’으로 명예퇴직을 선택했다.

   물론 밀크만은 자신이 관찰한 이런 결과들을 결코 ‘일반론’으로 만들어버리지는 않는다. 아니, 밀크만은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탈산업화가 오히려 긍정적이라고 말해버리는 것은 잘못된 결론일 수 있다.”(Milkman 1997:244) 다만, “명예퇴직자들의 경험은 ‘어떤 조건’ 아래에서는 산업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옮겨가는 것이 비교적 고통도 없고 때로는 이득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Milkman 1997:174, 강조는 본인) 즉, GM-린든 노동자들의 이러한 반응을 고려할 때는 당시 현지의 상황과 명퇴를 받아들인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연공이 낮으며 비교적 쉽게 새로운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젊은 노동자들이었다는 점을 반드시 고려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특수한 조건’ 과 ‘전제’ 없이, 밀크만의 관찰결과를 ‘어떤 상황에서든’ 통하는 진실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

  밀크만의 작업들은 나에게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져준다. 유선 ‘무엇을 볼 것인가’의 측면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직접 보고 듣고 느끼는 관찰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밀크만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예를 들어 공장 내 팀제 도입에 대해서도 기존의 연구들은 “말단 연구자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Milkman 1997:35)에 주목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노동자 계급의 의식에 대한 어떤 식의 가정이 미리 전제되어 있는 것일 뿐, 실제로 그 당사자들에 대한 연구는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경험들이 없이 책상에서 만들어내는 지식이란 필연적으로 현실과 괴리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또, 어떤 연구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문제와 가설을 설정하는 단계에서부터 관찰하고 결과를 도출하기까지의 전체 연구과정에 있어서 실증주의 방법론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주관’을 배제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들과 한계들을 인식하고 출발하는 것과 모르고 출발하는 것, 또 알고도 눈감는 것은 완전히 다른 연구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자신의 한계와 자신이 가진 특정한 가치관들을 인식하고 출발하는 사람들은 ‘연구자 본인을’ 거리 두고 객관화해서 성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그 과정에서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오류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기며, 그럼으로써 ‘진실’에 조금은 더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러한 한계를 알면서도 눈을 감는다. 물론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치적인 영향력, 자신이 속한 학파 혹은 지지집단과의 관계에서부터 이전의 자기 자신의 가정을 뒤집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까지 말이다. 그리하여 방법론 시간에 라카토스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다른’ 관찰 결과들은 기존의 핵을 더욱 더 강화시켜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비록 ‘보고 싶지 않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것은 어떠한 현상을 ‘진공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이념과 가설을 떠나 다른 각도에서 관찰해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만약 밀크만이 보고 들은 것을 눈감았다면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밀크만 역시 연구를 하면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명예퇴직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 현상을 나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이것을 말했을 때 어떤 사회적 비난이 쏟아질까?” 등등. 그녀가 놀라운 것은 자신이 보고 들은 관찰을 정직하게 받아들인 진심어린 태도이며, 또한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어떠한 관찰 결과에 대해 ‘옳다 그르다’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구체적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동일한 상황을 놓고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관점’과 겉으로 드러나는 표피 이면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이다. 마치 밀크만이 공장을 떠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노동자들을 통해, 대공장 노동의 끔찍한 인간소외를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처럼 말이다.


고민지점들

   밀크만의 책을 읽으며 한 가지 궁금했던 점은 여성노동자들의 반응에 대한 좀 더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공장을 떠난 것을 후회했던 집단들은 대부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었는데, 이들은 노동시장에 재진입하기가 매우 어려운 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맥락에 있다고 판단되는 여성노동자들의 경우에 공장을 떠난 것을 후회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나는 이 점이 매우 특이하게 느껴졌는데, 밀크만은 이에 대해서 여성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감독자들로부터 더 지독한 대접을 받고 동료 (남성) 노동자들과의 이해부족과도 싸워야 했기 때문”에 “남성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GM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고  (Milkman 1997:241)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구체적인 분석이 존재하거나 여성노동자들의 생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 이런 부분들이 궁금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밀크만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다른 고민들을 해보았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나는 이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진실일까?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자 하는 태도가, 곧이곧대로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어졌을 때 또 다른 오류가 발생하지는 않을까? 예를 들어 공장을 떠난 노동자들이 GM에 대해 혐오감을 드러내는 것은 실제로 그들의 노동경험이 그러해서 일수도 있지만, 다른 식으로도 생각해볼 수가 있다. 그러니까 싫어서 그만둔 것일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만두게 되면서 부정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많은 경우 현재 자신이 하는 일을 정당화하고 자긍심을 느끼고자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과거를 부정하는 것보다 현재를 부정하는 것이 더 힘들기 때문에. 그래서 바꾸어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어서, 별다른 희망이 없어서 명예퇴직을 선택한 노동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이미 떠나버린 곳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꼭 GM노동자들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합리화의 가능성이란 어떤 인간들에게나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관찰대상자 ‘그들’이 말하는 것을 모두 진실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니라1), 말하는 이들(관찰대상자)조차도 어떠한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판단하고 이야기하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1) 이런 태도들을 성매매 논쟁 때 볼 수가 있었는데, 성매매/성노동을 주장하는 양쪽 모두 “이것이 ‘진짜’ 성매매 여성들의 목소리”라고 주장하는 방식은, 경합하는 여성의 목소리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옳고 그름의 이분법 속에 갇히게 만들어 버리는 한계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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